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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59 401회 0건
남자는 성마르다는 듯 파나마 모자를 얼굴에 대고 부채처럼 흔들며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 여전히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은, 가마를 내려놓은 채 남자의 지시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좀 독특했다. 고만고만한 체격에, 형제들처럼 비슷비슷한 얼굴들, 게다가 연극배우들처럼 약간 우스꽝스런 옷들을 맞춰 입고 있었다.
넥라인이나 커프스, 벨트 등 세부적인 디테일은 조금씩 달랐으나 전체적으로 비슷한 유니폼이었다. 상의는 셔츠 위에 저지 크레이프를 사용한 베스트를 조여 입었고, 하의는 개버딘으로 제단한 판탈롱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에나 입었음직한 상퀼롯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특히나,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 봤던, 삼색기를 든 마리안느를 따라가는 남자들의 얼굴만큼이나 무표정해 보이는 가마꾼들의 얼굴은, 희안할 정도로 프랑스 혁명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주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셔츠의 컬러를 높게 세우고, 마치 공기의 공격으로부터 목덜미를 보호하겠다는 듯 제일 윗단추까지 사정없이 잠그고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디지털퍼머가 그들 앞으로 걸어가다가 평평하지 못한 땅바닥 때문에 발을 헛딛어,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비틀거렸다. 순간 마치 그녀를 부축해주려다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먹은 것처럼,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다 정지하며 부채질을 딱 멈춘 남자의 검은 눈에, 알 수 없는 열정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쇼트웨이브는 살바람이라도 쐰듯 섬?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한 디지털퍼머는 가방에서 여행안내 책자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가요?"
남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지우며, 옆으로 뉘인 바게트라도 충분히 들어갈 만큼 입을 활짝 벌려 웃음을 피워냈다.
"설마 이게 다 초대장은 아니겠지요? 저희는 낱장으로 배포했는데요. 제가 원하는 것은 한장입니다."
그 말을 들은 쇼트웨이브가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그 초대장이요. 고맙게도 우체국 택배에서 근사하게 리본을 묶어 꽃다발이랑 같이 배달해 주더군요. 나팔만한 크기의 사과 샴페인도 함께 말이죠. 그래서 우린 굉장히 중요한 건가 부다 싶어서 이렇게 제본을 떠서 보관하기로 했답니다. 두고두고 기념하려구요. 그치만 돌려달라시니 어쩔 수 없네요. 찾으시는건 아마도 중간 쯤에 끼워져 있을 거예요."
남자가 마치 붕어처럼 입을 오무린채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톱니바퀴가 망가진 윤전기가 돌아가듯이 어색하고 시끄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매력. 매력. 정말 매력적인 분들이세요. 재미있으시기도 하구."
그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특이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계시군요. 잠깐이지만 믿을 뻔 했지 뭡니까."
그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아주 살갑게 쇼트웨이브를 노려보며 책자를 받아들었다.

"그럼 한번 볼까요?"
그가 왼손으로 바인딩 부분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책을 꺾어 엄지 손가락을 이용해 카드를 털듯 주르르 책장을 튕기기 시작했다. 영사기 매거진의 필름을 돌리는 스프로킷처럼 책장이 타다닥 거리며 넘어갔다.
여러가지 모양의 지도와 차도를 표시한 구불구불한 선들이 책의 면면마다 어지럽게 겹쳐 지나가다가, 책의 중간쯤 음식점을 소개한 문제의 간지가 나왔을 때였다. 넘어가던 책장이 느닷없이 멈추며, 부적은 마치 선생님한테 호명을 받은 학생이 손을 번쩍 들 듯 철판처럼 꼿꼿이 공중으로 몸을 세웠다.
"오, 여기 있군요."
남자는 그녀들을 번갈아 가며, 도장이라도 찍듯이 꾹꾹 응시하고는 꼿꼿이 선 부적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부적은 곤봉에 얻어맞은 소리굽쇠처럼 좌우로 빠르게 진동을 시작했다.
부적은 예기가 흐르는 칼처럼 날카롭게 진폭을 줄이고, 부산한 잠자리 날개처럼 보이지도 않을만큼 몸을 떨면서 밝은 오렌지 빛 광채를 띠기 시작했다. 눈부시도록 휘도를 높인 광채는 곧 살구색으로 두터워지더니 부적 중간부터 붉게 달아올라 순식간에 빨간 화염덩어리로 변해갔다. 책의 나머지 부분들이 그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장작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책이 불덩이가 되는 순간 남자는 책에서 손을 떼었으나, 보이지 않는 끈에라도 묶여 공간 속에 고정되어 있는 양 불덩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서 새파란 불꽃을 튀겨냈다. 디지털퍼머가 놀라움에 손으로 입을 막고 쇼트웨이브 곁에 바싹 붙어섰다.
책은 단지 몇 번 눈 깜박일 시간에, 미리 화약이라도 내장되어 있었던 것처럼 맹렬히 연소되어 재마저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달랑 한장 남아 공중에 떠 있던 부적이, 아직도 이글거리는 불 속에서 무지개색으로 얼룩지며, 샐러맨더처럼 자신을 불사르다가, 서서히 껍질을 벗듯이 모양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벽난로 속에 던져넣은 플라스틱처럼 오그라들고 뒤틀리더니, 이내 단단하게 뭉쳐져 끈같은 형태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끈이 긴 사슬로 형태를 잡아가면서, 점차로 파랗던 불꽃이 빨갛게, 그리고 다시 오렌지 빛으로 약해져갔다. 오렌지색 광휘는 부적을 도금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표면에 흡착되어 전체를 탐스런 금빛으로 물들였다.
약해진 불이 마침내 꺼지고, 그제서야 부적은 중력이 작용한 것처럼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떨어지는 부적을 그녀들의 시선으로부터 교묘하게 가리며, 부드럽고 재빠른 동작으로 나꿔챘는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쇼트웨이브는 놓치지 않고 부적이 변태한 모습을 확인했다. 그것은 금색 사슬로 만들어진 한쌍의 수갑이었다.

"재미있는 불꽃놀이였죠?"
남자가 손안에 뭉친 사슬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쇼트웨이브가 남자의 불룩한 바지 주머니에서, 그의 중앙분리대처럼 육중한 미간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받았다.
"비둘기는 언제 나와요?"
"네?"
"마술사 같으셔서요. 물건도 없애시고 아까 보니 모자도 꺼내시던데 슬슬 비둘기라도 나와야 되는거 아닌가요."
남자가 좁은 이마를 찡그리며 눈을 반달처럼 만들고는, 또다시 늘어진 팬벨트가 돌아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매력. 매력. 정말 매력덩어리셔요, 아가씨들."
남자가 매우 우습다는 듯이 배를 잡으며, 손에 들려있던 파나마 모자를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처럼 머리 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비둘기는 잊어버리세요. 비둘기보다 더 멋진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멋진 것들요. 부디 아가씨들이 우리 도시에서, 우리가 준비한 멋진 것들을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초대장도 확인되었으니 이제 우리가 아가씨들을 의심할 이유는 없겠습니다. 아가씨들은 우리가 기다리던 분들이 확실하군요."
"그래요? 정말 궁금하네요. 비둘기보다 멋진게 대체 뭘까요."
코웃음을 치며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걸 보기 전에 알고 싶은게 있어요. 대체 이것들이 뭔지 우리한테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우리가 미쳐버리기 전에 말이예요."
"이것들이라뇨?"
쇼트웨이브가 집게 손가락을 쳐들고는 말했다.
"모든 것들이요. 우리가 왜 여기 있으며 아저씨가 우리한테 바라는게 뭔지,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말이예요."
"아하."
그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것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설명이 좀 길어지겠는데요."
그는 그녀들이 가마 쪽으로 걸어가기 쉽게 몸을 옆으로 비키며 말했다.
"우선 우리 시를 방문해 보시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직접 보시는게 훨씬 더 이해가 빠르실거예요. 가시는 길에 제가 설명드릴 수 있는 부분은 대충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글쎄요. 그건 어쩐지 현명하지 못한 일 같은데요."
남자가 어깨를 움츠리며 두 손을 벌렸다.
"우리를 못 믿는건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이 곳에서 지체를 할 수가 없어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곳은 안전하지가 못합니다. 아가씨들이 우리와 함께 가는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냥 우리끼리 돌아갈 수 밖에요."
쇼트웨이브는 남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남자 역시 태연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10초쯤 지나자 디지털퍼머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의논 좀 해보구요."
그녀는 쇼트웨이브를 끌고 그로부터 좀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어때?"
쇼트웨이브는 발끝으로 흙을 탁탁 찼다.
"모르겠어.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거 같긴 한데 얘길 하지 않으니. 그치만 저들이 이곳을 두려워 하는건 사실인거 같아."
"어째서?"
쇼트웨이브가 남자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 모두가 처음부터 카펫 위에서 한 발도 내려오지 않고 있잖아. 좀 어색하지 않아? 저 좁은 카펫 위에 옹기종기 모여서 말야..어쩐지 땅을 밟기 싫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처음에 카펫이 깔릴 땐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깔았나부다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그게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깐거 같아. 자기네 도시 바깥에서는 아예 땅조차 딛지 않으려는게 아닐까."
"땅을 딛으면 무슨 일이 생기나?"
"알게 뭐야. 결벽증인지도 모르지. 왜 그런 사람들 있잖아. 먼지 하나만 묻어도 병적으로 닦아내야 하는 사람들. 발에 흙 묻히기 싫은 거지."
디지털퍼머가 피식 웃었다.
"설마. 뭐 어쨌든 이유가 뭔지 몰라도 자기네 도시 바깥에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는게 사실이라면 우리를 여기에 끌어와 놓고도 이제서야 모습을 나타내는게 이해는 가네."
"그래."
"그렇다면 저들 말이 그냥 엄포는 아니겠군. 만약 우리가 계속 안가겠다고 버티면 자기네들끼리 돌아가겠다고 한거."
"그럴테지."
그녀들이 서로 심각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디지털퍼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따라가 보는 수 밖엔 없는건가."
"험."
쇼트웨이브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여기 남아 있어도 더 좋은 꼴을 보긴 힘들겠지."
디지털퍼머는 쇼트웨이브의 어깨 너머로 매우 낯선 하늘과 들판을 바라보았다. 붉은 달은 얼굴을 크게 들이밀고 무언가를 강요나 하듯이 그녀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갈 수는 있는걸까, 우리?"
"예감이 썩 좋지는 않아."
쇼트웨이브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한번 훑고는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진 않고 있어. 정신을 차리고 기다리면 기회가 올거라고 믿어. 여기에 오는 길이 있으면 여기서 나가는 길도 있겠지. 안그래? 너두 힘을 내."
바람이 또다시 습기를 몰고 지나갔다. 디지털퍼머는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요. 같이 가겠어요. 단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세요."
쇼트웨이브가 싸리나무를 부러뜨리듯이 딱딱하게 말했다. 남자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아하, 드디어 결정을 하셨군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물론 아가씨들의 안전은 저희가 책임집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으세요."
남자는 약간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지는 말아주셨으면 해요. 아가씨들은 그저 우리의 일상적인 초대에 응하셨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초대에 거창한 의미 같은 것은 없어요. 고급 휴양지의 칵테일 파티 같은 거죠."
"그럴리가요. 그저 칵테일 파티나 여시려고 우리를 저승까지 끌어들이셨다는 말씀이세요? 그렇게 친구가 없으셨나요. 정말 그렇다면 이건 완전히 상식이하인데요."
남자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좀 의외의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아가씨들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셨나요? 그건 분명 오해예요."
"오해라니요. 아까 분명히 아저씨 쪽에서 초대장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지요."
"그런데 뭐가 의외란 말씀이세요. 그 초대장이 우리를 여기로 끌고 온 거 아녜요."
"그건 아니지요. 초대장이야 그저 초대장일 뿐입니다. 오고 안오고는 받는 사람 마음대로구요. 물론 저희야 아가씨들이 방문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초대장을 보낸 것입니다만 초대장이 사람을 끌고 올 수는 없는거 아닙니까."
"아하."
쇼트웨이브가 알았다는 듯이 냉소를 지었다.
"좀 전까지는 이곳이 위험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보채시던 분이, 이제는 그런건 상관없으니 여기서 논쟁을 해보자고 하시는군요. 좋아요. 아저씨가 그걸 초대장이라고 부를 때부터 이상했어요. 이제보니 우리를 저승으로 끌어들인 책임을 지지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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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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