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년아. 정신차려."
쇼트웨이브가 우악스런 말투로 디지털퍼머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잠시 기분이 상쾌하다고 해도 장 세척이란거, 자꾸 하면 대장 운동능력이 떨어져서 변비에 더 자주 걸리는거 몰라."
"누가 자주 하겠대. 변기가 했던 치료 때문에 몸 상태가 좋아진건지 아닌지 확인차 한번 더 받아보겠다는 소리지."
디지털퍼머가 약간 주눅이 든 음성으로 궁시렁거리며 말했다.
"됐거든. 너 어제 얼마나 꼴 사나왔는지 알아. 장 세척이 문제가 아니라구. 어딘지도 모르는 이상한 곳에서, 집사라는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인지도 알지도 못하는데 말야, 그런 인간이 치료랍시고 널 꼼짝 못하게 붙들어 놓고, 몸을 쑤셔서 속을 휘저어 대고. 넌 죽겠다고 비명 지르고, 그러다가.."
쇼트웨이브는 말을 하다가 말고 잠시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튼, 너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그 사람이 그런건 아니잖아. 변기가 한거잖아."
"변기가 한 건지 뭐가 한 건지 알게 뭐야. 너 왜 그렇게 바보같아. 그 사람 말이 곧이 곧대로 믿어지니."
디지털퍼머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한 댓발 내밀고 쇼트웨이브를 보았으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뭐가 어떻든. 다시 할 생각은 꿈도 꾸지마, 이 년아."
쇼트웨이브는 엄한 얼굴로 그녀에게 못을 박았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쇼트웨이브가 반사적으로 서랍콘솔 위를 쳐다보았다. 영국 국회의사당의 빅토리아탑을 닮은 신고딕식 첨탑 탁상시계가 묵직해 보이는 순금 바늘을 지금 막 8시를 표시하는 문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벌써 8시야."
쇼트웨이브가 조그만 소리로 디지털퍼머에게 속삭였다.
"시간은 칼같이 지키네."
문 뒤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쇼트웨이브는 대충 머리를 만지면서 대답했다.
"네."
파이프 렌치처럼 단단해 보이는 자세로 조용히 문을 열고 집사가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잠자리는 불편한데 없으셨구요."
어려운 질문이 아닌데도 대답없이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해진 디지털퍼머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네, 아주 잘 잤어요."
집사는 고개를 돌려 디지털퍼머를 바라보았다.
"큰 아가씨께선 속이 좀 어떠신가요. 특별히 아프신데는 없으십니까."
어젯밤 일이 새삼 떠올랐는지 디지털퍼머는 집사의 시선을 외면했다. 쇼트웨이브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대신 집사에게 대답했다.
"어제 많이 놀랐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모양이예요. 말이 나온김에 여쭤보겠는데요, 변기와 같은 종류의 기구들이 많은가요?"
"작은 아가씨 말씀은 치료기능을 가지는 기구들을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네."
"없습니다. 적어도 이 방안에는 그 변기를 제외한다면 치료 기구들은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안심하시고 사용하셔도 돼요."
"그럼 밖에는 있다는 얘긴가요?"
"네, 물론 밖엔 있지요.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아가씨들께서 그런 기구들을 사용하시려고 한다면 그 전에 제가 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제같은 일이 또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
쇼트웨이브가 집사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러셔야죠. 어제같은 일이 또 생기면 저흰 이 도시를 떠나겠어요."
집사가 끓는 물에 던져진 날치처럼 펄쩍 놀라서 물었다.
"떠나신다구요? 아니, 어디로요?"
"어디로든요."
단호한 대답에 디지털퍼머도 약간 놀란 표정을 하며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으나 그녀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오."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집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어쨌거나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안심하세요. 다만 그러기 위해선 아가씨들께서도 약간의 조심이 필요한데요, 좀 낯설다 싶은 물건을 사용하시거나 아니면,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할때 혼자서 결정하지 마시고 미리 저한테 상의를 주세요."
집사는 그녀들의 의사를 묻는 듯이 텅스텐 필라멘트 불빛에 반사된 샴페인 병처럼 반짝이는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들이 잠자코 앉아 아무 대답이 없자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손뼉을 한번 쳤다.
"자, 시장하시지요? 아침식사가 준비 되었습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식사를 하시면서 오늘 일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사가 먼저 방을 나가 그녀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씻지도 않았는데."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보며 말했다.
"나두. 클린징도 해야 되는데.."
그녀들은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보며 얼굴을 살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아침같지 않게 흐려서 이상한 생각이 든 쇼트웨이브가 하늘을 건너다 보니 비가 올 것처럼 낮은 먹구름이 낀 것이 보였다. 어젯밤 그녀들을 놀라게 했던 붉은 달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어제 낮부터 단 차례도 해를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방 밖에서 집사가 내는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디지털퍼머가 핏 하는 콧소리를 냈다.
"빨리 나오란다, 야."
쇼트웨이브는 재빨리 머리를 만져 손으로 정돈하면서 말했다.
"대충하구 밥 먹고 와서 씻자."
그녀는 디지털퍼머를 앞세우고 나오다가 어제 자신이 치워놓은 음식 카트를 지나쳤다. 음식 카트는 밀어놓은 그대로 놓여있었지만, 그녀가 한 숟갈 떠먹고 남은 오렌지 상귄느는 댕그라니 빈 접시만 남아 있었다.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맛있던데."
집사는 복도를 걸어 묵직해 보이는 승강기 문 앞으로 왔다. 쇼트웨이브는 그를 따라 걸으며 유심히 벽화를 쳐다보았지만, 어젯밤에 벽화에서 느꼈던 섬뜩한 분위기는 찾을 길이 없었다. 벽화 속 인물들은 제각각 그려진 목적에 맞는 자기의 일들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춤을 추는 무희는 춤을 추고, 구경꾼은 그 춤을 구경하고, 대화를 하고 있는 놈팽이들은 서로에게 열중했다. 그녀를 훔쳐보는 시선 따위는 없었다.
집사는 승강기 문에 7이라는 문패와 3이라는 문패를 합해 73을 만들어 걸었다.
"73층이라는 뜻인가요?"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식당이라는 뜻이랍니다."
집사가 빙그레 웃으며 승강기의 문을 열었다.
문 안쪽으로 펼쳐진 것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전개된 커다란 방이었다. 마치 한 층을 몽땅 터서 식당을 만든 것 같았다.
그녀들이 방 안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느린 템포의 피아노 곡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디지털퍼머는 어디서 음악이 들리는지 찾아보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도무지 소리가 나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음악은 스피커처럼 정해진 어느 한 곳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방 안 전체가 무빙코일인양 전방향으로 진동하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디지털퍼머는 마치 자신의 전두엽이 진동판이라도 된 것처럼 방으로부터 전달되는 떨림을 귀를 통하지 않고 머리 내부로 직접 가청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음악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 쇼트웨이브 쪽을 쳐다보았다. 쇼트웨이브는 복잡한 프라모델을 조립하기 위해 부품을 늘어놓은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찌푸린채 방의 내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예식장에 딸린 뷔페홀처럼 넓은 면적에, 천장은 세 개의 돔으로 연속해서 구축되어 있었는데, 돔마다 정가운데에는 채광창이 뚫려있어 자연광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돔은 정교한 방사형 형태로 퍼져나가는 8개의 보에 의해 지지되어 있었고, 보는 둥글게 휘어지며 벽을 타고 내려와, 로우 백 드레스를 입고 포토존에서 플래쉬 세례를 받는 여배우의 깊게 파인 등처럼 우아한 펜던티브(주: 돔을 지지하는 삼각형의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
돔의 보와 보 사이에는 육각형의 격자 장식이 벌집처럼 쌓여져 있었고, 격자 내부에는 조릿대의 잎같이 기다랗고 톱니모양으로 뾰죽뾰죽한 잎이 양각되어 있었다. 펜던티브를 받는 기둥들이 벽으로부터 독립되어 듬성듬성한 열주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열주들의 주두를 잇는 엔타블러쳐에는 퇴적암처럼 겹쳐진 여러 겹의 코니스가 포도덩굴 문양이 가득한 프리즈를 이고 있었다.
양쪽 벽면을 따라서 아치형의 벽감이 가지런히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대리석으로 그 날씬한 몸의 구석구석까지 정교하게 조각된 나체 여인의 등신상들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조각들은 지금이라도 벽감에서 걸어나올 것처럼 생동감이 넘쳐 났으며, 하나하나 모두가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참가한 란제리 모델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벽의 한쪽 구석에는 흑감나무로 지어진 양여닫이 문이 바닥에서부터 천장에 이르기까지 길고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방 중앙에는 붉은 색을 띤 참죽나무를 깎아 만든 널찍한 식탁이 놓여 있었다. 집사는 식탁 앞에 나란히 놓여있던 의자 2개를 빼며 말했다.
"앉아서 잠시 기다리시면 음식이 나올 겁니다."
그녀들이 머뭇거리며 의자에 앉자, 집사는 손수 그녀들 앞에 놓여있던 둥근 크리스털 글라스에 차가운 물을 따라주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식사가 준비된 모양이군요."
집사가 말했다. 여닫이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반짝거리는 황동 푸드커버가 씌워진 커다란 금속 바스킷을 한 손으로 받쳐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하얀색 요리복에 위생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태엽인형을 감아놓은 것처럼 정확히 일치하는 동작으로 보병이 사열하듯 일렬로 들어오고 있었다. 피아노 곡은 조금 경쾌한 리듬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3단짜리 금속 수레를 밀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각종 식기와 요리 도구, 도마, 칼, 조그만 버너 등이 실려 있었다.
그녀들은 거창한 식사행렬에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그녀들이 집사에게 이 행렬에 대해 따져 묻기에는, 행진해 들어오는 이들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열 명 안팎의 인원들이 그녀들을 마주한 채 기다란 식탁 앞에 줄지어 섰다.
"이 음악 들어보지 않았어?"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사티잖아, 에릭 사티."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그녀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듣고 있던 집사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음악에도 박식하셨군요. 혹시 이 곡이 무슨 곡인지 아시겠어요?"
쇼트웨이브가 집사를 쳐다보았다.
"설마 가져오신 요리가 그건 아니겠지요?"
집사가 커다랗게 웃었다.
"이러다 아가씨들이랑 얘기하는게 저의 유일한 낙이 되버리면 어떻게 하지요. 너무나 유머감각이 뛰어나셔서 제가 10년은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집사가 배를 문지르며 웃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그런 걸 어떻게 음식으로 내놓겠습니까. 걱정마십시오. 저희는 식인종이 아니랍니다."
"무슨 얘긴가요?"
궁금해진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아."
집사가 미안하다는 듯 그녀에게 설명했다.
"지금 나오고 있는 곡의 제목이 "말라 비틀어진 태아"거든요. 작은 아가씨께 우리는 그런 이상한 재료로 요리를 만들진 않는다는 걸 설명해드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쇼트웨이브가 우악스런 말투로 디지털퍼머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잠시 기분이 상쾌하다고 해도 장 세척이란거, 자꾸 하면 대장 운동능력이 떨어져서 변비에 더 자주 걸리는거 몰라."
"누가 자주 하겠대. 변기가 했던 치료 때문에 몸 상태가 좋아진건지 아닌지 확인차 한번 더 받아보겠다는 소리지."
디지털퍼머가 약간 주눅이 든 음성으로 궁시렁거리며 말했다.
"됐거든. 너 어제 얼마나 꼴 사나왔는지 알아. 장 세척이 문제가 아니라구. 어딘지도 모르는 이상한 곳에서, 집사라는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인지도 알지도 못하는데 말야, 그런 인간이 치료랍시고 널 꼼짝 못하게 붙들어 놓고, 몸을 쑤셔서 속을 휘저어 대고. 넌 죽겠다고 비명 지르고, 그러다가.."
쇼트웨이브는 말을 하다가 말고 잠시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튼, 너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그 사람이 그런건 아니잖아. 변기가 한거잖아."
"변기가 한 건지 뭐가 한 건지 알게 뭐야. 너 왜 그렇게 바보같아. 그 사람 말이 곧이 곧대로 믿어지니."
디지털퍼머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한 댓발 내밀고 쇼트웨이브를 보았으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뭐가 어떻든. 다시 할 생각은 꿈도 꾸지마, 이 년아."
쇼트웨이브는 엄한 얼굴로 그녀에게 못을 박았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쇼트웨이브가 반사적으로 서랍콘솔 위를 쳐다보았다. 영국 국회의사당의 빅토리아탑을 닮은 신고딕식 첨탑 탁상시계가 묵직해 보이는 순금 바늘을 지금 막 8시를 표시하는 문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벌써 8시야."
쇼트웨이브가 조그만 소리로 디지털퍼머에게 속삭였다.
"시간은 칼같이 지키네."
문 뒤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쇼트웨이브는 대충 머리를 만지면서 대답했다.
"네."
파이프 렌치처럼 단단해 보이는 자세로 조용히 문을 열고 집사가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잠자리는 불편한데 없으셨구요."
어려운 질문이 아닌데도 대답없이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해진 디지털퍼머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네, 아주 잘 잤어요."
집사는 고개를 돌려 디지털퍼머를 바라보았다.
"큰 아가씨께선 속이 좀 어떠신가요. 특별히 아프신데는 없으십니까."
어젯밤 일이 새삼 떠올랐는지 디지털퍼머는 집사의 시선을 외면했다. 쇼트웨이브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대신 집사에게 대답했다.
"어제 많이 놀랐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모양이예요. 말이 나온김에 여쭤보겠는데요, 변기와 같은 종류의 기구들이 많은가요?"
"작은 아가씨 말씀은 치료기능을 가지는 기구들을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네."
"없습니다. 적어도 이 방안에는 그 변기를 제외한다면 치료 기구들은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안심하시고 사용하셔도 돼요."
"그럼 밖에는 있다는 얘긴가요?"
"네, 물론 밖엔 있지요.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아가씨들께서 그런 기구들을 사용하시려고 한다면 그 전에 제가 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제같은 일이 또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
쇼트웨이브가 집사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러셔야죠. 어제같은 일이 또 생기면 저흰 이 도시를 떠나겠어요."
집사가 끓는 물에 던져진 날치처럼 펄쩍 놀라서 물었다.
"떠나신다구요? 아니, 어디로요?"
"어디로든요."
단호한 대답에 디지털퍼머도 약간 놀란 표정을 하며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으나 그녀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오."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집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어쨌거나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안심하세요. 다만 그러기 위해선 아가씨들께서도 약간의 조심이 필요한데요, 좀 낯설다 싶은 물건을 사용하시거나 아니면,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할때 혼자서 결정하지 마시고 미리 저한테 상의를 주세요."
집사는 그녀들의 의사를 묻는 듯이 텅스텐 필라멘트 불빛에 반사된 샴페인 병처럼 반짝이는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들이 잠자코 앉아 아무 대답이 없자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손뼉을 한번 쳤다.
"자, 시장하시지요? 아침식사가 준비 되었습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식사를 하시면서 오늘 일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사가 먼저 방을 나가 그녀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씻지도 않았는데."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보며 말했다.
"나두. 클린징도 해야 되는데.."
그녀들은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보며 얼굴을 살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아침같지 않게 흐려서 이상한 생각이 든 쇼트웨이브가 하늘을 건너다 보니 비가 올 것처럼 낮은 먹구름이 낀 것이 보였다. 어젯밤 그녀들을 놀라게 했던 붉은 달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어제 낮부터 단 차례도 해를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방 밖에서 집사가 내는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디지털퍼머가 핏 하는 콧소리를 냈다.
"빨리 나오란다, 야."
쇼트웨이브는 재빨리 머리를 만져 손으로 정돈하면서 말했다.
"대충하구 밥 먹고 와서 씻자."
그녀는 디지털퍼머를 앞세우고 나오다가 어제 자신이 치워놓은 음식 카트를 지나쳤다. 음식 카트는 밀어놓은 그대로 놓여있었지만, 그녀가 한 숟갈 떠먹고 남은 오렌지 상귄느는 댕그라니 빈 접시만 남아 있었다.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맛있던데."
집사는 복도를 걸어 묵직해 보이는 승강기 문 앞으로 왔다. 쇼트웨이브는 그를 따라 걸으며 유심히 벽화를 쳐다보았지만, 어젯밤에 벽화에서 느꼈던 섬뜩한 분위기는 찾을 길이 없었다. 벽화 속 인물들은 제각각 그려진 목적에 맞는 자기의 일들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춤을 추는 무희는 춤을 추고, 구경꾼은 그 춤을 구경하고, 대화를 하고 있는 놈팽이들은 서로에게 열중했다. 그녀를 훔쳐보는 시선 따위는 없었다.
집사는 승강기 문에 7이라는 문패와 3이라는 문패를 합해 73을 만들어 걸었다.
"73층이라는 뜻인가요?"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식당이라는 뜻이랍니다."
집사가 빙그레 웃으며 승강기의 문을 열었다.
문 안쪽으로 펼쳐진 것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전개된 커다란 방이었다. 마치 한 층을 몽땅 터서 식당을 만든 것 같았다.
그녀들이 방 안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느린 템포의 피아노 곡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디지털퍼머는 어디서 음악이 들리는지 찾아보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도무지 소리가 나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음악은 스피커처럼 정해진 어느 한 곳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방 안 전체가 무빙코일인양 전방향으로 진동하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디지털퍼머는 마치 자신의 전두엽이 진동판이라도 된 것처럼 방으로부터 전달되는 떨림을 귀를 통하지 않고 머리 내부로 직접 가청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음악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 쇼트웨이브 쪽을 쳐다보았다. 쇼트웨이브는 복잡한 프라모델을 조립하기 위해 부품을 늘어놓은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찌푸린채 방의 내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예식장에 딸린 뷔페홀처럼 넓은 면적에, 천장은 세 개의 돔으로 연속해서 구축되어 있었는데, 돔마다 정가운데에는 채광창이 뚫려있어 자연광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돔은 정교한 방사형 형태로 퍼져나가는 8개의 보에 의해 지지되어 있었고, 보는 둥글게 휘어지며 벽을 타고 내려와, 로우 백 드레스를 입고 포토존에서 플래쉬 세례를 받는 여배우의 깊게 파인 등처럼 우아한 펜던티브(주: 돔을 지지하는 삼각형의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
돔의 보와 보 사이에는 육각형의 격자 장식이 벌집처럼 쌓여져 있었고, 격자 내부에는 조릿대의 잎같이 기다랗고 톱니모양으로 뾰죽뾰죽한 잎이 양각되어 있었다. 펜던티브를 받는 기둥들이 벽으로부터 독립되어 듬성듬성한 열주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열주들의 주두를 잇는 엔타블러쳐에는 퇴적암처럼 겹쳐진 여러 겹의 코니스가 포도덩굴 문양이 가득한 프리즈를 이고 있었다.
양쪽 벽면을 따라서 아치형의 벽감이 가지런히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대리석으로 그 날씬한 몸의 구석구석까지 정교하게 조각된 나체 여인의 등신상들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조각들은 지금이라도 벽감에서 걸어나올 것처럼 생동감이 넘쳐 났으며, 하나하나 모두가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참가한 란제리 모델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벽의 한쪽 구석에는 흑감나무로 지어진 양여닫이 문이 바닥에서부터 천장에 이르기까지 길고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방 중앙에는 붉은 색을 띤 참죽나무를 깎아 만든 널찍한 식탁이 놓여 있었다. 집사는 식탁 앞에 나란히 놓여있던 의자 2개를 빼며 말했다.
"앉아서 잠시 기다리시면 음식이 나올 겁니다."
그녀들이 머뭇거리며 의자에 앉자, 집사는 손수 그녀들 앞에 놓여있던 둥근 크리스털 글라스에 차가운 물을 따라주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식사가 준비된 모양이군요."
집사가 말했다. 여닫이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반짝거리는 황동 푸드커버가 씌워진 커다란 금속 바스킷을 한 손으로 받쳐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하얀색 요리복에 위생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태엽인형을 감아놓은 것처럼 정확히 일치하는 동작으로 보병이 사열하듯 일렬로 들어오고 있었다. 피아노 곡은 조금 경쾌한 리듬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3단짜리 금속 수레를 밀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각종 식기와 요리 도구, 도마, 칼, 조그만 버너 등이 실려 있었다.
그녀들은 거창한 식사행렬에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그녀들이 집사에게 이 행렬에 대해 따져 묻기에는, 행진해 들어오는 이들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열 명 안팎의 인원들이 그녀들을 마주한 채 기다란 식탁 앞에 줄지어 섰다.
"이 음악 들어보지 않았어?"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사티잖아, 에릭 사티."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그녀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듣고 있던 집사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음악에도 박식하셨군요. 혹시 이 곡이 무슨 곡인지 아시겠어요?"
쇼트웨이브가 집사를 쳐다보았다.
"설마 가져오신 요리가 그건 아니겠지요?"
집사가 커다랗게 웃었다.
"이러다 아가씨들이랑 얘기하는게 저의 유일한 낙이 되버리면 어떻게 하지요. 너무나 유머감각이 뛰어나셔서 제가 10년은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집사가 배를 문지르며 웃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그런 걸 어떻게 음식으로 내놓겠습니까. 걱정마십시오. 저희는 식인종이 아니랍니다."
"무슨 얘긴가요?"
궁금해진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아."
집사가 미안하다는 듯 그녀에게 설명했다.
"지금 나오고 있는 곡의 제목이 "말라 비틀어진 태아"거든요. 작은 아가씨께 우리는 그런 이상한 재료로 요리를 만들진 않는다는 걸 설명해드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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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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