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퀴로 만들어진 모래 사장에 유지방 덩어리의 크림 파도가 밀려오고, 그 속에서 목욕이나 하는 것처럼 미끄럽게 잠겨있는 과일 조각들이, 그녀들의 접시에 담겨 빛을 뿜는 듯 했다.
음식을 잘라 입에 넣자, 그녀들의 입 속에서 향긋한 바닐라 향의 바바로아가 싱싱한 과일과 함께 부서져내렸다. 젤라틴에서 해방된 초컬릿이, 중력에 무관하게 계곡을 떠도는 냇물처럼 달콤하게 혀 위를 흘러다녔다. 부드러운 채찍처럼 그녀들의 미각에 감겨대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지독한 유혹이었다.
"대단히 맛있어요."
디지털퍼머가 감탄하며 말했다. 쇼트웨이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사실 우리 요리사들은 음식 맛에 관한한 누구보다도 헌신적이거든요. 단언하건대 여기서 드시는 음식들은 어디서도 맛보시지 못했던 특별한 것들이라는 것을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집사가 그녀들이 마셔서 약간 줄어든 물잔에 다시금 물을 따라 채우며 말했다.
"왜 앙트르메를 먼저 내왔느냐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지요? 말씀드린 대로 서양 식사의 표준이 되어버린 프랑스식 요리법과 식단을 완성한 것은 그 두 명의 천재들이었습니다. 그 중 카렘은 제가 살았던 당시보다 30년쯤 전 사람이었어요. 그에게 바쳐진 찬사 중에 왕들의 요리사이자 요리사들의 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요리사 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말이지요. 불행히도 저는 카렘을 만나볼 수는 없었지만, 대신 또 한 명의 천재인 에스코피에의 요리는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았거든요."
음식에 대한 칭찬에 탄력을 받았는지, 말이 많아진 집사가 특유의 커다란 제스쳐를 써가며 얘기에 열을 올렸다.
"런던에 있던 사보이 호텔이었던 거 같습니다. 에스코피에의 요리를 먹었던 곳 말입니다. 그때 저는 헬렌 포터 미첼이라는 여가수와 친한 사이였는데, 그녀가 런던 공연을 할 때 묵었던 숙소가 바로 그 곳이었지요. 에스코피에는 당시 그 호텔의 요리장이었습니다. 미첼은 넬리 멜바라는 예명으로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였는데, 그 예명은 그녀 고향인 멜버른에서 딴 이름이었지요."
집사의 떠벌림은, 진득거리는 에버글레이드 악어 늪지를 가로지르는 한 척의 모터보트 같았다. 디지털퍼머는 악어꼬리 만큼이나 세차게 포크를 휘둘러 파파야 조각을 몰아쳐 갔다.
"에스코피에는 미첼의 팬이었어요. 어느 날 저녁 제가 그녀와 식사를 하고 있는데 에스코피에가 다가오더니, 미첼을 위해 특별히 생크림과 복숭아로 된 디저트를 만들어 주더군요. 정말 맛이 끝내줬어요. 처음 먹어보는 뛰어난 디저트였습니다. 미첼이 말했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멋진 것은 처음이예요. 이 디저트 이름이 뭔가요? 그러자 에스코피에가 그러더군요. 피치 멜바라고 불러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나 원 세상에..그러니까 에스코피에는 이전까지는 세상에 없던 요리법을 고안해서 미첼의 예명을 딴 디저트를 만든 겁니다. 당연히 미첼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그 후 피치 멜바의 레시피는 전 유럽을 강타했지요."
"그럼 집사님이 그 여가수와 같이 피치 멜바를 처음 먹어 본 사람 중 하나라는 말인가요?"
자기 몫을 다 먹어치운 디지털퍼머가 빈 접시에 다시 샤를로트를 덜어 담으며 말했다. 분필을 쥔 말썽쟁이가 낙서할 만한 담을 찾아냈을 때처럼 기분좋아 보이는 얼굴로 집사가 대답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저야말로 피치 멜바가 유럽에 유행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셈이었답니다. 그 레시피를 좀 다듬어서 디저트 사업을 시작했거든요. 이건 누워서 떡먹기였습니다. 미첼은 워낙에 유명한 가수여서, 방금 전에 말씀드렸던 그녀와 에스코피에의 에피소드를 공개하자 디저트는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지요. 누군들 그 유명한 여가수를 감동시킨 디저트를 먹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미첼과 에스코피에는 이 사업 아이템에 흔쾌히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집사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과거의 우연찮았던 사업얘기를 꺼냈다.
"뭐, 장난처럼 시작했던 일이었습니다. 다들 자기 분야에서 2인자라면 서러워할만큼 명성들이 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작은 디저트 요리법 하나에 연연해 하지 않았던 거지요. 저 역시 피치 멜바를 파는 것 말고도 다른 일을 하고 있었구요. 디저트 사업은 그날 호텔 식당에서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다보니 규모가 커져서 다른 것도 팔게 되고, 신경도 이만저만 쓰이는게 아니었습니다. 원래 하던 일도 그것 나름대로 바빠졌구요. 그래서 몇 년 뒤엔 저도 그 사업에서 손을 뗐습니다."
쇼트웨이브는 포크를 가지고 음식을 겨냥하고는 좀 더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며 음식을 덜어왔다. 집사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카렘이 요리사들의 왕이라는 칭호가 있었던 것처럼 에스코피에 역시 그에 맞먹는 칭호가 있습니다. 카렘을 염두에 둔 표현이겠습니다만, 에스코피에를 가리켜 왕들의 요리장이자 요리장들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동시대에 살지 않아서 완벽한 비교는 어렵지만 그 둘은 서로 막상막하였던 셈이지요. 카렘과 에스코피에는 궁정요리와 레스토랑 요리를 현대적으로 융합시켰습니다. 이 두 사람 이전의 프랑스 요리는 한마디로 말해 무질서한 낭비벽의 극치였지요. 도가 지나치게 화려했고, 같은 이름의 요리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당연히 격식이나 식사의 순서도 뒤죽박죽이었어요. 그러던걸 이들이 매우 간소하고 합리적으로 통일시킨 겁니다. 저나 아가씨들이 알고 있는 서양 식사 예법은 이 두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집사가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그런데요, 그 말은 거꾸로 하자면 원래부터 식사의 격식이라는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지요? 이 두 사람이 천재라고 해서 반드시 그들의 격식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만, 우리 요리사들의 의견에 따르면 격식을 따지는 순간 식사가 제 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법을 지켜 식사를 내온다면, 아가씨들께선 대충 처음엔 크레페 프로마쥬(주: 치즈 팬케?나 살라드 다렝(주: 청어 샐럿)같은 오르되브르(주: 전채요리)가, 다음엔 비앙드(주: 육류 요리)나 푸아송(주: 생선 요리)같은 그로스 피스(주: 주요리), 마지막엔 수플레나 푸딩같은 디저트가 나오겠구나 하는 것을 눈치챌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의식 중에 뭔가 각오를 하고 음식을 기다리게 되는 거지요. 이것은 음식 고유의 맛을 즐기는데 큰 방해가 되는 자세입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도 선입견을 버려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음식도 미리 어떤 예측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맛보게 되면 정확한 미감을 판단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우리 요리사들은 손님들이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식사를 하시는걸 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굳이 카렘과 에스코피에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일부러 식단의 순서를 바꿔 버린 겁니다. 실제로 예법이 굳어지기 이전엔 이런 식으로 디저트용 과자를 먼저 먹기도 했다고 해요."
"아."
디지털퍼머가 예의바르게도 앙트르메를 먼저 내온 이유에 대한 집사의 기나긴 설명에 감탄사를 터뜨렸으나, 그다지 감명을 받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샤를로트를 서로에게 양보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쇼트웨이브는 의자에 깊숙히 앉으며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카렘과 에스코피에가 얼마나 요리를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사님네 요리사 분들도 그에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진 거 같군요. 뛰어나다 못해 살인적인 맛이예요."
집사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정말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샤를로트는 사실 역사가 있는 음식이지요. 18세기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3세의 왕비에게 헌정품으로 창작된 것이랍니다. 그 후에 만드는 방법에 있어 여러가지 변형이 있었구요, 최종적인 디자인을, 아까 말씀드렸던 카렘이 완성했습니다. 따라서 아가씨들께 내놓는 첫 음식으로서 손색이 없는 메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사님께서도 요리 지식이 상당하신거 같아요. 음식의 유래나 레시피를 줄줄 외시네요."
디지털퍼머가 칭찬을 하자 집사는 기쁜 듯이 손가락으로 상의 옷자락을 만지작 거렸다.
"그냥 약간 알고 있는 것 뿐입니다. 아주 약간이요."
남은 앙트르메가 치워지고, 다음 음식으로 바싹 익혀진 파이사이에, 좀 전에 북 치듯 다져대던 연어를 집어넣은 요리가 나왔다. 달콤한 파이 향과 로즈메리 향, 구운 생선 냄새 따위가 어우러져 그녀들의 허기를 자극했다.
"이건 파테 드 소몽이라고 부릅니다. 아까 보셨던 연어로 만든 파르세에 파이반죽을 덮어서 아스픽 젤리라고 부르는 맛국물을 넣어 굳힌 음식이지요."
그것은 잘 다져 만든 연어 반죽을, 겉에 법랑이 입혀진 직사각형의 파테 구이틀에 담아 불을 피운 버너 속에 묻어서 구워낸 음식이었는데, 미르프와(주: 야채의 혼합물)와 부케 가르니(주: 풍미를 내기 위한 허브더미)를 볶아 거기에 집사가 자랑하던 트뤼프를 넣어 만든 알라망드 소스를 부은 다음, 버터에 구운 양송이 버섯과 빵가루에 튀긴 레몬, 모닥불에 건조한 파슬리, 베이컨과 같이 데친 양파 등으로 보기좋게 장식되어 있었다.
올리브 드랩 색의 연하고 바삭바삭한 파이와 부드럽고 탄력있어 보이는 연어 속이, 군침이 돌만큼 그녀들의 시선을 끌었다. 항상 그랬듯이 음식 앞에서 용감해지는 디지털퍼머가 먼저 포크를 들이밀었다. 음식을 자르는 그녀의 손을 보며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집사님이 아까 방에서 말씀하시길, 오늘 일과를 말해주겠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그거요."
양 손의 손가락 끝을 마주 대며 집사가 대답했다.
"아가씨들께선 손님이시니까 제가 나름대로 스케쥴을 잡아본 겁니다. 아무래도 계획적인 일과가 필요하지 않으시겠어요? 하루는 지겨울만큼 기니까요."
"어떤 일관데요?"
"우선 이렇게 잡아봤습니다. 아침식사를 하시고 나서 오전엔 저와 같이 의림지를 구경하러 가시게 됩니다."
쇼트웨이브가 약간 놀란 어투로 집사에게 물었다.
"의림지요? 여기에 의림지가 있어요?"
"그럼요. 여기는 제천시인걸요."
집사는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침 오늘 의림지에선 리뉴얼된 새 이무기의 쇼케이스가 있을 예정입니다. 아가씨들께선 흔치 않은 구경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뭐라구요? 이무기 쇼케이스요?"
음식을 옮기다 말고 디지털퍼머가 큰 소리를 냈다.
"그렇습니다. 이무기를 전에 보신 적이 있나요?"
"농담하세요? 그런 걸 어디서 봐요."
"그렇다면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주 대단합니다. 우리 시의 자랑거리지요. 옛 이무기는 비늘의 방향이 물 속에서 헤엄치기에만 좋게끔 설계되어 있어서 공중을 유영할 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 속에서 움직일 때와 물 밖에서 움직일 때 유연성이나 속도에서 차이가 나 보기가 썩 좋지 않았지요. 이번에 리뉴얼된 이무기는 공기 역학까지 충분히 고려하여 설계된 비늘을 장착했습니다. 예전의 단점을 상당히 줄였다고 하더군요."
디지털퍼머는 할 말을 잃은 채 쇼트웨이브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혹시 용도 있나요?"
"아니요. 아직은."
고개를 저으며 집사가 덧붙였다.
"여의주를 만드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 중 하나입니다. 굳이 하겠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 녀석을 용으로 만들어 놓으면 관리도 불편할 테고, 그다지 바람직할 것 같지도 않아서.."
집사가 웃으며 말 끝을 흐렸다.
"와, 굉장히 고소한데. 맛 좋다."
디지털퍼머는 가져온 음식을 한 입 베어 먹더니 감탄어린 말을 외쳤다. 한번 먹어보라는 듯이 그녀는 쇼트웨이브를 보며 음식을 가리켰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쇼트웨이브도 음식을 덜어왔다. 집사는 계속해서 다음 일정을 설명했다.
"의림지를 구경하신 후엔 이 곳으로 다시 오셔서 점심을 드시구요, 잠시 쉬신 다음 오후에 진우골 옥녀봉을 가시게 될 겁니다."
"옥녀봉이요? 산을 탄단 말씀이세요?"
"그렇지요."
산을 탄다는 말에 얼굴을 찌푸리는 그녀들을 향해서 집사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가마를 타고 가실테니까 힘들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 곳엔 우리 시에서 제일 멋진 공연장이 있습니다."
디지털퍼머가 눈을 크게 떴다.
"공연장이요? 산꼭대기에 말이예요?"
"그렇습니다. 경치도 좋고 공기도 맑고 문화 공연하기에 그보다 적합한 곳이 어딨겠어요. 오늘 옥녀봉 콘서트 홀에서는 칠선녀의 라이브 콘서트가 있을 겁니다."
음식을 잘라 입에 넣자, 그녀들의 입 속에서 향긋한 바닐라 향의 바바로아가 싱싱한 과일과 함께 부서져내렸다. 젤라틴에서 해방된 초컬릿이, 중력에 무관하게 계곡을 떠도는 냇물처럼 달콤하게 혀 위를 흘러다녔다. 부드러운 채찍처럼 그녀들의 미각에 감겨대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지독한 유혹이었다.
"대단히 맛있어요."
디지털퍼머가 감탄하며 말했다. 쇼트웨이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사실 우리 요리사들은 음식 맛에 관한한 누구보다도 헌신적이거든요. 단언하건대 여기서 드시는 음식들은 어디서도 맛보시지 못했던 특별한 것들이라는 것을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집사가 그녀들이 마셔서 약간 줄어든 물잔에 다시금 물을 따라 채우며 말했다.
"왜 앙트르메를 먼저 내왔느냐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지요? 말씀드린 대로 서양 식사의 표준이 되어버린 프랑스식 요리법과 식단을 완성한 것은 그 두 명의 천재들이었습니다. 그 중 카렘은 제가 살았던 당시보다 30년쯤 전 사람이었어요. 그에게 바쳐진 찬사 중에 왕들의 요리사이자 요리사들의 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요리사 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말이지요. 불행히도 저는 카렘을 만나볼 수는 없었지만, 대신 또 한 명의 천재인 에스코피에의 요리는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았거든요."
음식에 대한 칭찬에 탄력을 받았는지, 말이 많아진 집사가 특유의 커다란 제스쳐를 써가며 얘기에 열을 올렸다.
"런던에 있던 사보이 호텔이었던 거 같습니다. 에스코피에의 요리를 먹었던 곳 말입니다. 그때 저는 헬렌 포터 미첼이라는 여가수와 친한 사이였는데, 그녀가 런던 공연을 할 때 묵었던 숙소가 바로 그 곳이었지요. 에스코피에는 당시 그 호텔의 요리장이었습니다. 미첼은 넬리 멜바라는 예명으로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였는데, 그 예명은 그녀 고향인 멜버른에서 딴 이름이었지요."
집사의 떠벌림은, 진득거리는 에버글레이드 악어 늪지를 가로지르는 한 척의 모터보트 같았다. 디지털퍼머는 악어꼬리 만큼이나 세차게 포크를 휘둘러 파파야 조각을 몰아쳐 갔다.
"에스코피에는 미첼의 팬이었어요. 어느 날 저녁 제가 그녀와 식사를 하고 있는데 에스코피에가 다가오더니, 미첼을 위해 특별히 생크림과 복숭아로 된 디저트를 만들어 주더군요. 정말 맛이 끝내줬어요. 처음 먹어보는 뛰어난 디저트였습니다. 미첼이 말했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멋진 것은 처음이예요. 이 디저트 이름이 뭔가요? 그러자 에스코피에가 그러더군요. 피치 멜바라고 불러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나 원 세상에..그러니까 에스코피에는 이전까지는 세상에 없던 요리법을 고안해서 미첼의 예명을 딴 디저트를 만든 겁니다. 당연히 미첼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그 후 피치 멜바의 레시피는 전 유럽을 강타했지요."
"그럼 집사님이 그 여가수와 같이 피치 멜바를 처음 먹어 본 사람 중 하나라는 말인가요?"
자기 몫을 다 먹어치운 디지털퍼머가 빈 접시에 다시 샤를로트를 덜어 담으며 말했다. 분필을 쥔 말썽쟁이가 낙서할 만한 담을 찾아냈을 때처럼 기분좋아 보이는 얼굴로 집사가 대답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저야말로 피치 멜바가 유럽에 유행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셈이었답니다. 그 레시피를 좀 다듬어서 디저트 사업을 시작했거든요. 이건 누워서 떡먹기였습니다. 미첼은 워낙에 유명한 가수여서, 방금 전에 말씀드렸던 그녀와 에스코피에의 에피소드를 공개하자 디저트는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지요. 누군들 그 유명한 여가수를 감동시킨 디저트를 먹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미첼과 에스코피에는 이 사업 아이템에 흔쾌히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집사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과거의 우연찮았던 사업얘기를 꺼냈다.
"뭐, 장난처럼 시작했던 일이었습니다. 다들 자기 분야에서 2인자라면 서러워할만큼 명성들이 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작은 디저트 요리법 하나에 연연해 하지 않았던 거지요. 저 역시 피치 멜바를 파는 것 말고도 다른 일을 하고 있었구요. 디저트 사업은 그날 호텔 식당에서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다보니 규모가 커져서 다른 것도 팔게 되고, 신경도 이만저만 쓰이는게 아니었습니다. 원래 하던 일도 그것 나름대로 바빠졌구요. 그래서 몇 년 뒤엔 저도 그 사업에서 손을 뗐습니다."
쇼트웨이브는 포크를 가지고 음식을 겨냥하고는 좀 더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며 음식을 덜어왔다. 집사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카렘이 요리사들의 왕이라는 칭호가 있었던 것처럼 에스코피에 역시 그에 맞먹는 칭호가 있습니다. 카렘을 염두에 둔 표현이겠습니다만, 에스코피에를 가리켜 왕들의 요리장이자 요리장들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동시대에 살지 않아서 완벽한 비교는 어렵지만 그 둘은 서로 막상막하였던 셈이지요. 카렘과 에스코피에는 궁정요리와 레스토랑 요리를 현대적으로 융합시켰습니다. 이 두 사람 이전의 프랑스 요리는 한마디로 말해 무질서한 낭비벽의 극치였지요. 도가 지나치게 화려했고, 같은 이름의 요리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당연히 격식이나 식사의 순서도 뒤죽박죽이었어요. 그러던걸 이들이 매우 간소하고 합리적으로 통일시킨 겁니다. 저나 아가씨들이 알고 있는 서양 식사 예법은 이 두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집사가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그런데요, 그 말은 거꾸로 하자면 원래부터 식사의 격식이라는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지요? 이 두 사람이 천재라고 해서 반드시 그들의 격식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만, 우리 요리사들의 의견에 따르면 격식을 따지는 순간 식사가 제 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법을 지켜 식사를 내온다면, 아가씨들께선 대충 처음엔 크레페 프로마쥬(주: 치즈 팬케?나 살라드 다렝(주: 청어 샐럿)같은 오르되브르(주: 전채요리)가, 다음엔 비앙드(주: 육류 요리)나 푸아송(주: 생선 요리)같은 그로스 피스(주: 주요리), 마지막엔 수플레나 푸딩같은 디저트가 나오겠구나 하는 것을 눈치챌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의식 중에 뭔가 각오를 하고 음식을 기다리게 되는 거지요. 이것은 음식 고유의 맛을 즐기는데 큰 방해가 되는 자세입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도 선입견을 버려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음식도 미리 어떤 예측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맛보게 되면 정확한 미감을 판단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우리 요리사들은 손님들이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식사를 하시는걸 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굳이 카렘과 에스코피에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일부러 식단의 순서를 바꿔 버린 겁니다. 실제로 예법이 굳어지기 이전엔 이런 식으로 디저트용 과자를 먼저 먹기도 했다고 해요."
"아."
디지털퍼머가 예의바르게도 앙트르메를 먼저 내온 이유에 대한 집사의 기나긴 설명에 감탄사를 터뜨렸으나, 그다지 감명을 받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샤를로트를 서로에게 양보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쇼트웨이브는 의자에 깊숙히 앉으며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카렘과 에스코피에가 얼마나 요리를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사님네 요리사 분들도 그에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진 거 같군요. 뛰어나다 못해 살인적인 맛이예요."
집사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정말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샤를로트는 사실 역사가 있는 음식이지요. 18세기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3세의 왕비에게 헌정품으로 창작된 것이랍니다. 그 후에 만드는 방법에 있어 여러가지 변형이 있었구요, 최종적인 디자인을, 아까 말씀드렸던 카렘이 완성했습니다. 따라서 아가씨들께 내놓는 첫 음식으로서 손색이 없는 메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사님께서도 요리 지식이 상당하신거 같아요. 음식의 유래나 레시피를 줄줄 외시네요."
디지털퍼머가 칭찬을 하자 집사는 기쁜 듯이 손가락으로 상의 옷자락을 만지작 거렸다.
"그냥 약간 알고 있는 것 뿐입니다. 아주 약간이요."
남은 앙트르메가 치워지고, 다음 음식으로 바싹 익혀진 파이사이에, 좀 전에 북 치듯 다져대던 연어를 집어넣은 요리가 나왔다. 달콤한 파이 향과 로즈메리 향, 구운 생선 냄새 따위가 어우러져 그녀들의 허기를 자극했다.
"이건 파테 드 소몽이라고 부릅니다. 아까 보셨던 연어로 만든 파르세에 파이반죽을 덮어서 아스픽 젤리라고 부르는 맛국물을 넣어 굳힌 음식이지요."
그것은 잘 다져 만든 연어 반죽을, 겉에 법랑이 입혀진 직사각형의 파테 구이틀에 담아 불을 피운 버너 속에 묻어서 구워낸 음식이었는데, 미르프와(주: 야채의 혼합물)와 부케 가르니(주: 풍미를 내기 위한 허브더미)를 볶아 거기에 집사가 자랑하던 트뤼프를 넣어 만든 알라망드 소스를 부은 다음, 버터에 구운 양송이 버섯과 빵가루에 튀긴 레몬, 모닥불에 건조한 파슬리, 베이컨과 같이 데친 양파 등으로 보기좋게 장식되어 있었다.
올리브 드랩 색의 연하고 바삭바삭한 파이와 부드럽고 탄력있어 보이는 연어 속이, 군침이 돌만큼 그녀들의 시선을 끌었다. 항상 그랬듯이 음식 앞에서 용감해지는 디지털퍼머가 먼저 포크를 들이밀었다. 음식을 자르는 그녀의 손을 보며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집사님이 아까 방에서 말씀하시길, 오늘 일과를 말해주겠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그거요."
양 손의 손가락 끝을 마주 대며 집사가 대답했다.
"아가씨들께선 손님이시니까 제가 나름대로 스케쥴을 잡아본 겁니다. 아무래도 계획적인 일과가 필요하지 않으시겠어요? 하루는 지겨울만큼 기니까요."
"어떤 일관데요?"
"우선 이렇게 잡아봤습니다. 아침식사를 하시고 나서 오전엔 저와 같이 의림지를 구경하러 가시게 됩니다."
쇼트웨이브가 약간 놀란 어투로 집사에게 물었다.
"의림지요? 여기에 의림지가 있어요?"
"그럼요. 여기는 제천시인걸요."
집사는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침 오늘 의림지에선 리뉴얼된 새 이무기의 쇼케이스가 있을 예정입니다. 아가씨들께선 흔치 않은 구경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뭐라구요? 이무기 쇼케이스요?"
음식을 옮기다 말고 디지털퍼머가 큰 소리를 냈다.
"그렇습니다. 이무기를 전에 보신 적이 있나요?"
"농담하세요? 그런 걸 어디서 봐요."
"그렇다면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주 대단합니다. 우리 시의 자랑거리지요. 옛 이무기는 비늘의 방향이 물 속에서 헤엄치기에만 좋게끔 설계되어 있어서 공중을 유영할 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 속에서 움직일 때와 물 밖에서 움직일 때 유연성이나 속도에서 차이가 나 보기가 썩 좋지 않았지요. 이번에 리뉴얼된 이무기는 공기 역학까지 충분히 고려하여 설계된 비늘을 장착했습니다. 예전의 단점을 상당히 줄였다고 하더군요."
디지털퍼머는 할 말을 잃은 채 쇼트웨이브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혹시 용도 있나요?"
"아니요. 아직은."
고개를 저으며 집사가 덧붙였다.
"여의주를 만드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 중 하나입니다. 굳이 하겠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 녀석을 용으로 만들어 놓으면 관리도 불편할 테고, 그다지 바람직할 것 같지도 않아서.."
집사가 웃으며 말 끝을 흐렸다.
"와, 굉장히 고소한데. 맛 좋다."
디지털퍼머는 가져온 음식을 한 입 베어 먹더니 감탄어린 말을 외쳤다. 한번 먹어보라는 듯이 그녀는 쇼트웨이브를 보며 음식을 가리켰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쇼트웨이브도 음식을 덜어왔다. 집사는 계속해서 다음 일정을 설명했다.
"의림지를 구경하신 후엔 이 곳으로 다시 오셔서 점심을 드시구요, 잠시 쉬신 다음 오후에 진우골 옥녀봉을 가시게 될 겁니다."
"옥녀봉이요? 산을 탄단 말씀이세요?"
"그렇지요."
산을 탄다는 말에 얼굴을 찌푸리는 그녀들을 향해서 집사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가마를 타고 가실테니까 힘들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 곳엔 우리 시에서 제일 멋진 공연장이 있습니다."
디지털퍼머가 눈을 크게 떴다.
"공연장이요? 산꼭대기에 말이예요?"
"그렇습니다. 경치도 좋고 공기도 맑고 문화 공연하기에 그보다 적합한 곳이 어딨겠어요. 오늘 옥녀봉 콘서트 홀에서는 칠선녀의 라이브 콘서트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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