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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52 316회 0건
시골의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허름한 마차.
푸른 머리에 초췌한 몰골의 소녀가 헝겁에 싼 대검을 안아들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정말 괜찮은걸까? 저대로 놔둬도…”

엉망이 된 그녀를 루이가 업고 온지 이틀.
하루 세 번 스프를 떠먹이고 있지만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그녀는 거의 반 이상을 흘리면서도 기계적으로 그걸 받아먹어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코어웨폰을 소환해 저렇게 멍하니 어딘가를 쳐다보는게 전부.
정말이지 보는 사람이 환장할 지경이다.

“괜찮을거야. 아마도…”

페이버린 가문이 사라진 것은 이미 천년도 전의 일이다.
그녀를 이 땅에 묶어두고 있었던건 오직 류우 마하의 연인 기네비아 워커에 대한 죄책감과 조든의 분노를 감당함으로 루이가 내리지 않은 벌을 대신 하겠다는 의지.
애초에 그것들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란걸 슈슈 본인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식으로라도 누군가에게 괴롭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버틸 자신이 없었다.
미치도록 그를 사랑했으니까… 그런 죄책감이라도 지고 있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그 남자에게 달려갈 것 같았으니까.
친구가 사랑했던 남자에게…

“그것보다 루이! 엘리스는 좀 어때?”
“어떻게든 엘리스라는 이름은 기억하는 모양인데 본명은 잃어버린 모양이야. 그래도 뭐… 저 상태라면 문제 없지 않겠어? 일단 기억 회복 기능도 있는 모양이니까.”
“내비두면 그만이라… 확실히 편리한 물건이네. 그나저나 정말 의외였어. 아돌님…”
“아아… 정말 의외였지.”

일단 마족을 썰어낸 순간 센트럴 고등학교 사건은 종료되었다.
고깃덩이의 주인 란셀이 찾아와 국왕으로부터의 소환장이란 것을 건넸고, 그것을 찢는 순간 옥좌 앞까지 강제 소환 당했다.
덕분에 아직 알몸에 정액 투성이가 되어 망토 한 장 둘둘 말아놓은게 전부였던 슈슈를 처리하느라 황실의 시녀들이 난리도 아니었지만 아돌이란 녀석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식으로 새로운 코어나이트가 누구냐고 물어왔다.
그리고는 어차피 명예직도 아니고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니 알아서 잘 해달라며 아발론 은행의 플래티넘 카드를 넘겼다.
그걸로 인간의 왕과의 만남은 종료.
헤어질 때 그가 했던 말이 걸작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 결국 돈이 굴리는거죠.-

아톰이나 슈슈가 왜 인간의 왕을 그런식으로 평가했는지 알만한 일이다.

“슈슈! 밥 먹으러 가야지?”
“바압?”

겨우 정신이 돌아온 걸까?
간신히 반응을 보인 그녀는 보고 있기 안타까울 정도로 힘겹게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이내 비틀거리며 쓰러지려 했다.

“바보. 아직 정상이 아니니까…”
“따뜻하네…”

루이의 품에 얼굴을 부비며 조용히 어깨를 떨고 있는 슈슈.
아니… 이젠 그녀가 사랑하던 남자가 아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적어도 이 가슴은 그녀가 절대로 기대선 안될 남자가 아니니까…

“그럼 얼음이겠냐? 바보 녀석.”

***********
“세상에서 가장 고지식한 녀석은 은빛 사시미 녀석(아리아 셀레드림)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봐.”
“당신에겐 미안하게 됐습니다.”

감정 없는 슈슈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공포도 뭣도 없다.
애써 숨겨왔던게 전부 벗겨졌고 더 이상 이 지겹도록 긴 생을 유지시켜 나갈 기력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이렇게 재수없게 곱상한 놈이 좋아? 그것 참 독특한 취향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한번 루이를 힐끗 올려다보는 슈슈.

“취향 아닙니다.”
“역시 그렇지?”

루이가 좌절해서 벽에 머리를 박건 말건 가차없이 혹평을 가하는 두 사람.
무엇 때문일까?
난데없이 슈슈가 피식 웃었다.

“당신이란 사람… 의외로 좋은 사람이었군요.”
“아아… 마를린이 반해버릴 정도로 말이야!”
“좋습니다. 당신이 저를 죽인다 해도… 당신들이 저를 버려둔다 해도 저는 살 마음이 없습니다.”

마치 ‘나는 홍차가 좋아.’라고 말하는 투로 중얼거리는 슈슈.
그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모처럼 이렇게나 오랫동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조든이 말을 건넨다.

“그럼 아직 치르지 못한 대가를 치르는게 어때?”
“치르지 못한 대가? 제가 당신에게 그런걸 남겼던가요?”
“확실히 마를린의 일은 고마워. 하지만 그만큼 난 지난 세월 동안 광전사로 살아야 했고, 너를 증오해야 했잖아?”
“그렇죠.”
“널 이리저리 굴리며 더럽혔지만 사실 그건 네가 자초해서 그렇게 된거야. 난 완전히 이용 당해온 거지. 결과적으로 재미본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거 별로 재미 없거든?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만히 슈슈를 노려보는 조든.
이 여자는 지불할게 있다면 확실히 지불할 인간이다.

“좋아요. 뭘 원하죠? 개? 말? 소? 마음대로 하세요.”

정액으로 떡이 된 망토를 벗어 던진 슈슈.
하지만 조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다시 한번 마력 봉인을 해줘야겠어.”
“아아… 기꺼이.”

잠시 찬란한 마법 인장들이 일제히 그녀의 피부 위로 빛나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그 체격의 평범한 여자 아이로 되돌아갔고…
‘푸우우욱!’
시뻘건 영혼의 탐식자가 부드러운 피부를 찢으며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읍…”

시뻘건 핏물을 토해내며 뭔가 말하려다 결국 말을 마치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슈슈.
그녀의 망막에 비친 조든의 붉은 머리는 빠른 색으로 백색으로 탈색되고 있었다.
***********

“루이.”
“응?”
“이거 받아. 역시 이건 마스터가 갖고 있어야 하니까.”

모처럼 제대로 식사를 마친 슈슈를 데리고 올라간 유키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장장 2시간에 걸쳐 깨끗하게 씻기고 빗기고 입혀서 내려 보냈다.
그런 탓에 끌려 올라가기 전 ‘기다려 달라’고 부탁받은 루이는 장장 2시간을 기다린 끝에 말끔한 모습의 슈슈를 볼 수 있었다.

“이건…”
“스태프 오브 아우터플레인. 기네비아의 코어웨폰이야. 적당한 상대를 찾으면 넘기려고 했는데 워낙 침식력이 강한 물건이라 넘겨 줄 상대를 찾을 수 없었어.”

본래 모든 마나는 아우터플레인에서 링커코어를 거쳐 현상계에 넘어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스태프 오브 아우터플레인이란 말은 뭔가 좀 이상하다.
하지만 사실 이 스태프는 그런 이상한 이름을 들어도 괜찮을 만큼 충분한 위력을 갖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를 탄생시키고 일곱명의 코어나이트를 탄생시키기 위해 나머지 코어웨폰을 제작하던 현자들은 돌연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투영된 실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는다면 굳이 파괴되지 않는 단단한 재질의 무기에 연연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걸 보면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걸 느낄 수 있다. 바보라도 알만한 일을 왜 그제서야 깨달은 건지…)

하지만 그땐 이미 일곱 자루의 코어웨폰이 완성된 다음이라 마지막 두 자루가 스태프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스태프 오브 마기’와 ‘스태프 오브 아우터플레인’.
본래 슈슈가 사용하던 ‘스태프 오브 마기’는 멀티캐스팅 전용의 스태프.
9서클의 메테오 스윔을 초당 9발씩 무한으로 연사할 수 있는 스태프가 이 괴물 스태프의 정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서클 체계는 고대 마법 서클체계의 마이너 버전이라는 점이다. 즉, 이때의 매직 미사일과 지금의 매직 미사일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소모 마나나 마법 수식이나 위력이나 비교할 바가 못된다.)
그리고 기네비아가 사용하던 ‘스태프 오브 아우터플레인’이 바로 본래대로라면 슈슈가 쥐어야 할 극강 데미지를 목표로 하는 데미지 증폭으로 특화된 코어웨폰이다.
(단순히 일점 파괴력만으로 따진다면 프로메테우스의 이퀄라이저와 게센을 모두 합쳐도 이것 하나를 따라가지 못한다.)

“네가 사용하는건?”
“조든이 이걸 주면서 말했어. 이젠 행복해져도 된다고…”

마력이 봉인된 그녀는 조든이 넘기는 코어웨폰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영혼의 탐식자 소울이터는 그녀의 몸에 새겨진 마법 인장들을 모조리 집어삼키고는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탈레스 코어의 인장만을 남겼다.
덕분에 모든 인장 마법을 잃어야 했지만 대신 마법 인장을 얻는 대가로 잃었던 감각들 전부를 되찾을 수 있었다.

“녀석을 묻어주지 못한게 미안하군.”
“광전사의 최후는 깔끔한 법이야.”
“나와 결혼해 주겠어? 아름다운 보랏빛의 마녀여.”
“모든 건 그대의 뜻대로. 나의 사랑하는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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