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다섯 마녀의 전설(The Legend of Five Witches) 외전 2부 5장
본 야설은 강간, 윤간, 성고문 수준의 SM 등 비윤리적이고 중범죄에 해당하며 잔인하고 하드코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취향의 글을 좋아하시지 않는 분은 읽으시지 말 것을 미리 권고 드립니다.
- 외전 2부 - 잊혀진 전설들 (퀴인 데 글레이셔(얼음의 여왕) 멜리사편 : 저주받은 아이) - 5장 -
"호오! 철 광석 가격이 요즘 들어 많이 올랐군!
올 겨울에는 수입이 괜찮겠는데....."
고급스런 갈색의 나무 책상 앞에 앉은 채로, 사십대 중반의 호리호리한 남자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보고서로 보이는 몇 장의 종이를 오른손에 들고 있는 남자는..... 꽤 따뜻해 보이는, 검정 빌로도 재질의 튜닉(허벅지 가까이까지 오는 긴 웃옷)과 두꺼운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뮤리엘 백작가에서 대대로 집사 일을 맡아보고 있는 로암 리슬리라는 자였다.
벌써 500여 년째 이어진 전란의 시대라지만..... 위스토아 대륙 서북쪽 끝에 위치한 노르디아 왕국은 벌써 100년 가까이, 전쟁없는 시절을 누리고 있었다.
노르디아 왕권이 거의 유명무실할 정도로 약해져서, 정복전쟁을 벌일만한 힘이 없었고.....
왕국 주변에도 이렇다 할만한 강대국이 없었던 데다가.....
왕국내의 귀족들도 이웃간에 힘의 균형이 서로 팽팽하거나, 혈연으로 얽혀 있어서..... 누구도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전쟁이 없었다는 의미일 뿐, 특별히 치안이 좋다거나, 주민들의 삶이 안전하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어서.....
산적들이나 괴물들, 맹수들의 습격 등 이런저런 재난으로, 주민들이 시달리고, 보호받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이렇다할 문제없이, 비교적 팔자좋고 편한 삶을 살아 온, 집사 로암이 보고서 몇장을 끝으로..... 한가로왔던 오늘의 일과도 그만 마치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성 안에 있는, 모든 미천한 것들에게 명하노라!
지금 즉시 성 밖으로 나와서 모여서라!
이 성을 곧 산산조각내 버릴 것이로다!"
"뭐? 뭐라고?"
갑자기 창밖에서 들려온, 높은 여자 목소리에, 집사 로암이 기절할 듯 놀라며 창가로 뛰어갔다.
저 멀리..... 새하얀 드레스에, 새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뮤리엘 백작가의 거대한 성을 내려다보며..... 적어도 60헥사(약 30미터) 높이에 떠있는, 여자의 오른손에는 수정구슬이 달린 새하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크...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로암의 입이 저절로 떡 벌어졌다.
사악한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가 성에 쳐들어오다니..... 그런 일은 아이들의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얘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강한 매기아러(마법사)라고 해도,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위력이나 범위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몇 천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거대한 성을, 혼자서 정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매기아러(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적어도 지난 500여 년 동안은.....
성의 외벽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공중에 떠 있는, 온통 새하얀 모습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를 향해, 일제히 화살들을 쏴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마치 투명한 방패에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화살들은 다크 매기아러의 주변에서 이상한 각도로 튕기더니,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의 손에 들린 수정구슬 지팡이로부터 새하얀 눈보라가 만들어지더니, 성벽 위를 향해 가로로 쏟아붓듯 날아들었다.
단, 한 방의 눈보라로, 외벽의 정면 쪽에 몰려서서 화살을 쏴대던, 50여 명의 병사들이 모조리 쓰러져 버리는 모습이, 로암의 눈에 들어왔다.
성의 주건물에 붙은 탑 5층에 위치한 로암의 집무실과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지만, 끔찍한 냉기에 얼굴에 소름이 돋으며, 저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씨이이이이이잉!"
"콰콰콰콰콰콰콰쾅!"
이어,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돌로 지은 거대한 성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와아아아아악!"
엄청난 진동에, 중심을 잃으며 바닥에 나뒹군 로암 집사가 몸을 일으켜, 다급하게 집무실 밖으로 뛰쳐 나갔다.
성에 쳐들어온,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가 정말로 성을 박살내기 시작한게 틀림없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사람 살려!"
이미 탑의 넓은 계단은 뛰어 내려가는 사람들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백작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집사답게 천천히 걸으면서 점잔을 뺐겠지만..... 로암도 정신없이 다른 사람들을 떠밀고 떠밀리면서, 1층으로 뛰어 내려가기 바빴다.
뮤리엘 백작가의 거대한 성은..... 가장 바깥쪽을, 강물을 끌어들인 깊고 넓은 물이 에워싸고 있었고,
그 안쪽에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외벽이.....
다시 그 안쪽에는, 여덟 개의 탑을 가진, 거대한 주건물이 - 크고 작은 부속건물들과 함께 - 높이 솟아올라 있었으며,
주건물 아래쪽에는, 넓은 통로가 중앙을 세로로 관통하듯 뚫려 있어,
필요시, 군대의 집결 및 성 바깥으로의 돌격이 용이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지금은 성안의 주민들 모두가 몰려나와, 중앙 통로를 미어질듯 메운 채로..... 성밖으로 먼저 나가려고 서로 밀어대며 아수라장을 벌이고 있었다.
물을 건너 성밖으로 나가는 넓은 다리를 지키던, 8명의 병사들이 잠시 주민들을 막고 있었으나, 엄청난 사람들의 기세에 순식간에 떠밀려 버리고 말았다.
마치, 막힌 물이 터지듯 우르르르..... 성안의 주민들이 다리를 건너, 성밖으로 빠져 나갔다.
성앞의 넓은 빈터에 모여선 주민들은 웅성웅성대며, 머리위 저 높이 공중에 떠있는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를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 보았다.
주민들이 왠만큼 빠져나가 자리를 비우자..... 병사들이 성안의 중앙 통로를 메우며 집결했다.
검게 칠한 가죽 흉갑옷(가슴과 몸통을 가리는 갑옷)와 역시 검게 칠한 투구 차림에, 3헥사(약 1.5미터) 길이의 긴 창을 높이 세워들고 있었다.
적어도 1,000명 가까이 되어 보이는 상당한 규모에..... 절반 가까이는 활과 화살통을 등에 메고 있었다.
선두에서는, 전신을 감싸는 철판갑옷을 입은, 덩치 큰 기사가, 역시 철판갑옷 차림의 기사들 20여 명과 함께,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창대신 긴 칼을 허리에 찬 병사들 십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금속제 흉갑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귀족 한 사람이 기사에게 다가왔다.
고급스런 옷차림의 여자들과 아이들 스무 명 가량이 귀족을 따라오며, 불안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어떤가, 덴리경?
막아낼 수 있겠나?"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텁수룩한 갈색 수염을 기른, 덩치 큰 기사가 안심시키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페이잘 백작님!
정신나간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한 명 따위에게 정복당할 만큼, 우리 군대는 약하지 않습니다!
이미 연기를 피워 신호했으니, 좀 있으면 가까운 요새에 주둔중인 주력 병력들도 달려올 것입니다."
기사단장 덴리의 믿음직스런 대답에, 페이잘 반 뮤리엘 백작의 긴장했던 얼굴도 조금은 풀어졌다.
갈색의 로브(헐렁하고 긴 겉옷) 차림의 세 명이 급한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수염이 하얀, 꽤 나이들어 보이는 노인과 그보다는 젊은 각각 삼십대, 사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들이었다.
세 명 모두, 수정구슬이 달린 지팡이를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페이잘 백작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탑에서 내려오는 길이, 사람들로 어떻게나 미어터지는지 원....."
하얀 수염을 왼손으로 쓰다듬으며, 노마법사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어떻소, 리스톤씨? 해치울 수 있겠소?"
페이잘 백작의 질문에, 노마법사 리스톤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와 두 제자들이면 충분합니다!
사실, 번거롭게, 군대를 집합시킬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핏 보니, 외벽을 지키던 병사들 수십 명을 매기아(마법) 한 방으로 쓸어 버리는 것 같던데.....
게다가, 집채만한 얼음 덩어리를 성에 떨어뜨린 듯 했소만....."
"허허허! 십중팔구, 그 두 번으로, 갖고 있는 마나(에너지)를 다 써버렸을 겝니다.
다크 매기아(흑마법)의 파괴적인 힘에 홀려버린, 정신나간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들이 가끔 이런 짓을 벌이죠.
이런 큰 성에 혼자서 쳐들어올 정도로,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경우는 처음 봅니다만....."
노마법사의 자신있는 대답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기사단장 덴리가 끼어들었다.
"일단..... 아직도 공중에 떠있으니, 활을 쏠 줄 아는 병사들과 함께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척! 척! 척! 척!"
1,000여 명의 병력이 4열 종대로 위풍당당하게, 넓은 나무 다리를 건너, 성밖으로 행진해 나왔다.
말을 탄, 20여 명 가량의 기사들과 3명의 마법사들이 앞장선 채였다.
다리 건너편, 넓은 광장에 몰려서 웅성거리던 일반 주민들이, 싸울 자리라도 만들어주듯, 양옆으로 갈라서며 멀찌감치 물러섰다.
선두에 선, 덩치 큰 털보 기사단장 덴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리석은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여!
이제라도 내려와서, 순순히 용서를 빌어라!
알량한 매기아(마법)를 믿고 계속 날뛰다간, 뼈도 못 추릴 줄 알아라!"
여전히 60헥사(약 30미터) 높이의 공중에 떠 있던,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다크 매기아러의 몸이 천천히 내려와.....
기사단장 덴리와 그의 병력으로부터 50헥사(약 25미터)쯤 떨어진 정면에 내려섰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물론, 드러난 얼굴과 팔다리, 두 눈동자까지..... 작고 붉은 입술을 제외한, 몸 전체가 눈처럼 새하얀..... 놀랄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처녀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새하얀 얼굴에 담긴 오만한 표정은..... 용서를 빌려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알량한 매기아(마법)라.....
짐의 매기아를 그렇게 부른 것은 네 놈이 처음이로다, 미천한 것아!"
오른손에 든 수정구슬 지팡이를 이쪽으로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노마법사 리스톤과 그의 두 제자들이 준비하고 있던 주문을 동시에 외쳤다.
"파이온!" (화염)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세 개의 수정구슬 지팡이에서 동시에 날아간 불의 공들이 요란한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히이이이이이이잉! 히이이이잉!"
놀라서 소리지르는 말의 고삐를 억센 손으로 감아쥐어 진정시키며, 기사단장 덴리는 고개를 저었다.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아직 스무 살도 채 안돼 보이는, 무척 아름다운 처녀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하지만, 이미 병사들 수십 명을 죽이고, 성의 주건물까지 일부 부쉈으니, 어쩔 수 없.....
기사단장 덴리의 생각은 거기서 중단되고 말았다.
폭발의 연기와 흙먼지가 사라지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새하얀 모습이 드러났던 것이다.
"글레이셔 란자!" (얼음의 창)
"퍼억!"
"털퍼덕!"
눈깜짝할 사이에 날아온 얼음의 창에, 노마법사 리스톤의 양쪽에 있던 두 제자중 한 명의 머리가 수박처럼 박살나며, 목없는 몸이 말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뭐야? 바레라(방어막)를 쓰는 걸 잊은겐가?
저런 초보 매기아(마법)에 당하다니!"
"그럴리가요? 나오기 전에 쓰는 걸 분명히 봤....."
"퍽썩!"
"그란드 바레라!" (대 방어막)
또 한명의 제자의 머리가 날아간 뒤에야, 상황을 깨달은 노마법사 리스톤이 바레라 마법을 강화했다.
역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기사단장 덴리도 오른손을 높이 들며 외쳤다.
"궁수! 사격 준비!"
1,000여 명의 병사들중 활을 메고 있던 500여 명이 일제히 활에 화살을 매기고 팽팽하게 잡아 당겼다.
성의 수비병력이니 만큼, 활을 쏠 줄 아는 병사들의 비율이 절반 정도 될 정도로, 꽤 높은 편이었다.
"발사!"
"휘이익! 휘이익! 휘익! 휘익! 휘익! ....."
500여 발의 화살들이 새까맣게 날아감과 동시에, 리스톤의 공격 마법이 또다시 작렬했다.
"그란드 람파고!" (대 번개)
"빠지지지지지직!"
거대한 번갯불이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를 향해 날아가 새하얀 빛을 뿜으며 작렬했다.
뒤이어, 수백 발의 화살들도 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다크 매기아러를 덮는 듯 했다.
그러나, 번갯불도, 화살들도..... 다크 매기아러에게 닿지 못했다.
허무하게도, 모조리 그 근처에서 튕겨나버릴 뿐이었다.
번갯불의 새하얀 불꽃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다크 매기아러의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투명한 막이 얼핏 모습을 드러냈다.
"미천한 것이..... 아무데나 그란드(큰, 위대한)를 붙이는구나!
글레이셔 란자!" (얼음의 창)
"퍼억!"
고드름처럼 생긴 얼음의 창을 맞고, 머리가 박살나버린 노마법사 리스톤의 몸이..... 천천히 말 위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털퍼덕!"
그란드 바레라(대 방어막)라는 거창한 이름이 무색하게도..... 빙계(얼음 계열)의 공격 마법중 가장 기초에 속하는 글레이셔 란자(얼음의 창)를 막아주지 못했던 것이다.
"휘휙! 휘익! 휘이익! 휘익! ....."
끊임없이 날아가는 화살들도 여전히, 새하얀 드레스조차 건드려보지 못하고 그 주변 4헥사(약 2미터) 정도에서 튕겨나고 있었다.
"사격 중지!"
오른손을 높이 들어 궁병들의 사격을 정지시킨, 기사단장 덴리가 얇고 긴 마상 검(말위에서 휘두르는 검)을 뽑아들며 목청껏 소리쳤다.
"돌격!"
"와아아아아아아아!"
2헥사반(약 125센치) 길이의 마상 검을 뽑아든 20여 명의 기사들이, 기사단장 덴리와 함께, 말을 달려 돌격해 갔다.
앞장선 기사단장 덴리의 마상 검은, 소드 바인(검기)의 파란 빛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말을 달려오던 무시무시한 힘과 속도를 더해, 온힘을 다한 일격으로 검을 휘둘러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다크 매기아러를 후려쳤다.
"차카캉! 차캉! 차카카캉! ....."
아름다운 새하얀 얼굴에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짓고 있는,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주위를 빙빙 돌면서 죽어라고 검으로 후려 갈겼다.
그러나, 다크 매기아러의 주위 4헥사(약 2미터) 정도를 감싸고 있는 투명한 막에 번번히 튕겨날 뿐이었다.
기사단장 덴리의, 소드 바인(검기)이 서린 검도.....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다.
"글레이셔 토멘토!" (얼음의 폭풍)
"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끄아아아아악! 우와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
"히히히히히히히히힝! 히히히히히히히히힝! ....."
"으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비교적 가까이 서있던 주민들과 병사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나며 비명을 질러댔다.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를 중심으로 갑자기 일어난 눈보라가,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주위를 온통 쓸어 버렸다.
눈보라가 불어닥친 것은 아주 잠깐이었으나, 기사단장 덴리를 포함한 20여 명의 기사들과,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을 전부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얇은 얼음에 뒤덮힌 시체들이..... 어린애가 집어던진 장난감들처럼, 아무렇게나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일부러 약하게 마법을 쓴 듯한, 눈앞의 다크 매기아러가 조금만 더 오래, 조금만 더 강하게 마법을 썼다면..... 어쩌면 주민들과 병사들 전부가, 지금쯤 같은 꼴의 시체들이 되어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모스카!" (비행)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다크 매기아러의 몸이, 천천히 다시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5,000여 명의 주민들과 1,000여 명의 병사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올려보는 가운데, 새하얀 오른손에 들려진 수정구슬 지팡이가 천천히 성쪽을 가리켰다.
"글레이셔 메테리온!" (얼음의 운석)
"씨이이이이이이이잉!"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하늘 전체가 새하얀 색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적어도 20헥사(약 10미터)가 넘어 보이는 집채만한 크기의 얼음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거대한 성의 주건물을 강타했다.
이번에는, 조금 아까 떨어졌던 것처럼, 한 개로 그치지 않았다.
뒤이어, 수십 개의, 아니 수백 개의 거대한 얼음덩이들이 끝도 없이 성 위로 떨어져 내렸다.
"씨이이이이이잉! 씨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
"콰콰콰콰콰쾅! 우르르르르르! 콰콰콰콰쾅! ....."
.....
세상이 통째로 박살나는 듯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온통 흔들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우와아아아아앗! ....."
겁을 먹은 주민들과 병사들 모두가 겁을 집어먹은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떨었다.
성안에서 다크 매기아러를 해치우기를 기다리고 있던, 페이젤 반 뮤리엘 백작과 그 가족들..... 그리고, 그때까지도 눈치를 보며 성 안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제야 우르르 성밖으로 몰려나오며,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채만한 얼음덩이 하나가, 우연인지, 일부러 겨눈 것인지, 성문께를 두들기면서.....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다리를 박살내 끊어 버렸다.
"씨이이이이이이잉! 씨이이이이이이이잉! ....."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우르르르르르르르르!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
마침내, 하늘에서 계속 떨어지는 거대한 얼음덩이들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주성의 높은 건물이..... 외벽들과 함께, 마치 망치로 맞은 모래성처럼,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아직도 안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지르는 비명소리가 성밖에까지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악몽이다! 악몽이야!
사랑과 생명의 여신이신 귀니아님!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흐흐흐흐흐흐흑!"
도망나온 주민들 사이에 섞여 있던, 집사 로암이 남들처럼 바닥에 엎드려, 양쪽 귀를 두손으로 막은 채로, 비명을 지르며 흐느꼈다.
........................................................................................................................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멜리사, 하쏘 자작령과 뮤리엘 백작령 습격!
자작가의 저택 및 백작가의 성, 완파!
무너져내린 폐허들만 남음.
리토 반 하쏘 자작과 페이젤 반 뮤리엘 백작 본인들을 포함..... 두 가문의 귀족들 전멸!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함.
뮤리엘 백작가의 남은 사병들 약 5,000여 명, 멜리사에게 충성을 맹세.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 멜리사는 몸 전체가 눈처럼 새하얀, 2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외모의 처녀임.
"눈의 요정이 버린 아이"라고 함.
뮤리엘 백작령에서 가장 가까이 사는, 두 명의 대귀족, 라메드 반 데스몬드 후작과 티베로 반 메넬릭 백작, 동맹 선언!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 멜리사에 공동으로 선전 포고!
세상이 깜짝 놀라 뒤집힐 만한, 급박한 소문들이 연거푸 터져나와...... 노르디아 왕국 서북 지방을 강타하며 퍼져 나갔다.
여느 때 같으면, 아무도 믿지 않을 잠꼬대같은 내용이었으나..... 믿지 않을 수 없는 사실들이었다.
적어도..... 지금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와의 결전을 위해, 이곳 쟈마라 평원(넓고 평평한 들판)에 모여 있는.....
11,000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과 기사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소문들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님! 그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라는 년이 정말로 여기 올까요?
티베로 백작과 우리를 각개격파하는 편이 훨씬 유리할텐데요."
철판갑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덩치 큰 젊은 기사가, 역시 철판갑옷 차림의 나이지긋한 기사에게 물었다.
가슈르 반 데스몬드와 그의 부친인 라메드 반 데스몬드 후작이었다.
두 사람 모두, 크고 좋아보이는 밤색 말들을 타고 있는 채였다.
"듣기로, 오만하고 잔인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년이라니..... 결전 요청에 오겠다고 대답한 이상, 아마 오겠지.
매기아러(마법사)들은 싸울 준비가 됐나?"
"예, 아버님! 잠깐 와서 싸움을 도와주는 비용이 1인당 10,000세테르라니..... 매기아러란 놈들은 정말 칼 안든 강도들이로군요!"
젊은 가슈르 반 데스몬드가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할 수 없지!
우리 가문의 수석 매기아러(마법사)인 페리클은 5레벨..... 죽은, 뮤리엘 백작가의 매기아러 리스톤과 같은 레벨이니, 아마도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7레벨의 고위 매기아러를 두 사람이나 불러 왔으니, 메넬릭 백작가의 5레벨 매기아러 길리오까지 해서.....
이제 5레벨 이상의 매기아러만 4명, 그 이하의 매기아러들은 6명이나 되는 셈이다.
아무리,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라고 해도..... 10명이나 되는 매기아러들을 혼자서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런 매기아러(마법사)들보다는..... 저는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가보인, 이 갑옷들이 더 믿음직스럽습니다."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은빛의 철판 갑옷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의 붉은 선들이 장식처럼 복잡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모든 적대적인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대 마법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 갑옷들이었다.
노귀족 라메드 반 데스몬드 후작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빰빠람! 빰빠밤! 빠밤!"
저 멀리서 나팔 소리로 들리는 높은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새하얀 물결처럼 보이는 모습들이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옵니다! 뮤리엘 백작가 병사들의 갑옷은 저런 색깔이 아니었을텐데..... 전부 새하얗게 칠했군요!"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라더니, 하얀 색에 미친 년인가 보군!"
데스몬드 후작가의 부자가 그렇게 말을 주고 받는 동안, 휘하의 기사들과 장교들은 병사들의 싸움 준비를 시키느라 분주해졌다.
"블루(파랑) 기사단, 승마!"
"히히힝! 히힝! 힝! ....."
"레쥬(빨강) 부대, 활 들어!
화살 매겨!"
"탁! 탁! 탁! 탁! 탁! 탁! ....."
"브라우니(갈색) 부대, 투창 들어!
투척 준비!"
"척! 처처척! 척! 척! ....."
.....
일사분란하게, 데스몬드 후작가의 사병 5,000여 명이 전투준비를 갖춰 나갔다.
그 오른편에 자리잡은, 티베로 반 메넬릭 백작과 그의 두 아들들..... 그리고 그 휘하 6,000여 명의 병사들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양쪽 가문의 마법사들과 이번 싸움을 위해 고용된 두 명의 고위 마법사들은..... 대열 앞으로 나와, 양쪽 가문 부대들의 사이 정중앙에 모여섰다.
"허허허! 메넬릭 백작가의 길리오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명성이 높으신 레드왈님과 쿼르토님을 모시고 싸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데스몬드 후작가의 수석 마법사 페리클이 점잖은 말투로 말을 꺼내며, 웃음을 지었다.
페리클 만큼이나 나이들어 들어 보이는, 세 명의 노마법사들이 웃으며, 답례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왈과 쿼르토..... 두 명의 고위 마법사들은 그 와중에도 어쩐지 뽐내는 듯한 거만한 분위기였지만, 7레벨의 고위 마법사들이니 만큼,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어느새,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멜리사의 군대 5,000여 명은 400헥사(약 200미터) 앞까지 행군해 와서, 멈춰 서 있었다.
몸에 입고 있는 갑옷들은 물론, 머리에 쓰고 있는 투구며, 손에 들고 있는 긴 창의 창대들까지 온통 새하얗게 칠한 모습들이었다.
"호오! 저것도 나름대로 장관이로군요!"
메넬릭 백작가의 수석 마법사 길리오가 멋으로 길게 기른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죽기전의 수의(시체에 입히는 옷) 차림인가 보군!"
"어?"
고용된 고위 마법사 레드왈의 코웃음치는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의 동료 쿼르토가 놀란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아아아! 우와아아! ....."
"당황하지 마라!"
"사격 준비!"
"투척 준비!"
.....
여기저기서 놀라는 감탄성과 함께, 전투 준비의 구령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자신의 병력 5,000여 명을 400헥사(약 200미터) 거리에 대기시켜 놓은 채로.....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멜리사가 혼자서 백마를 타고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나마, 200헥사(약 100미터) 거리까지 오자, 말까지 놔둔 채로, 몸을 공중에 띄우더니..... 천천히 이편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11,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10명의 매기아러(마법사)들을 상대로..... 설마, 혼자서 싸우려는 건가?"
중얼거리던, 7레벨의 고위 마법사 레드왈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 멜리사는 그녀의 병력 5,000여 명을, 함께 싸우게 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서 공포를 심어줄, 관객으로 데려왔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거..... 쉽지 않겠군!"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의, 광기에 가까운 오만함에..... 뒤늦게 오싹한 긴장감을 느낀, 노마법사 레드왈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에 인상을 썼다.
[폐... 폐하! 너무 많아요! 허억!
온 들판이 병사들로..... 꽉 찬 것처럼 보여요!]
자신의 몸속에 여전히 갇힌 채인 멜리사가 벌벌 떨며, 겁먹은 목소리로 하소연하듯 말했다.
물론 머리속에서만 울릴 뿐, 밖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칠한 것처럼 붉은 색의 조그만 입술이 미소를 지으며 열렸다.
"벌레같은 미천한 것들 따위..... 아무리 많아도 전혀 위협이 되지 않노라!"
[꺄아아아악! 폐하!]
앞에 나와 있던 10여 명의 마법사들에게서, 갑자기 불덩어리와 번갯불, 얼음덩어리 등 다양한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위협적으로 날아들었다.
뒤이어, 들판을 가득 메우다시피 벌려서 있던, 병사들에게서 화살들과 투창들이, 마치 옆으로 쏟아지는 비처럼 하늘을 메우며 날아들기 시작했다.
"파시식! 푸쉬이이이익! 퍼어어억! ....."
"차캉! 차카캉! 차캉! 차카카카캉! ....."
연달아서 바로 눈앞에서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흩어지는..... 불꽃과 번개, 화살, 투창 등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멜리사는 잔뜩 겁을 먹었으나.....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는 태연한 모습으로, 새하얀 두 눈동자를 깜짝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40헥사(약 20미터)쯤 공중에 높이 뜬 채로, 위에서 내려다보니.....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 10,000명이 훨씬 넘어보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마치 개미떼처럼 보였다.
물론, 조용한 개미떼들과는 달리, 귀가 먹을 정도로, 악을 쓰듯 기합과 함성을 지르며, 죽어라 화살들을 쏘고 투창들을 던지고 있었지만.....
아무리 마법을 쏴대도 전혀 끄덕도 하지 않는, 아크 바레라(상위 방어막)의 모습에..... 앞에 나와 선 채, 마법을 연사하던 마법사들의 당황하며 놀라는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4가지 원소들의 힘을 끌어모아 사용하는 매기아(마법)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힘의 집중을 도와주는 수정구슬 지팡이가 있어야 제대로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다.
그러나, 우리 위대한 글레이셔(얼음) 일족의 가장 강력한 매기아(마법)는..... 지팡이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노라!"
특별히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멜리사는 느낄 수 있었다.
주위의 물의 원소의 힘이..... 차갑게 얼어붙으면서 자신의 몸안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의 물의 힘을 모조리 흡수해서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엄청난 기세와 규모였다.
작고 붉은 입술이 조금 열리며, 새하얀 치아들이 반짝 빛났다.
"기억해라, 멜리사! 일족의 아이여!
이것이..... 우리 위대한 글레이셔 일족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설사, 드래곤이라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최강의 매기아(마법).....
글레이셔 피니셔(얼음의 말살자)로다!"
"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작은 입에서 불어나온 끔찍한 냉기의 바람이.....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11,000명에 달하는 병력 전체를 순식간에 뒤덮어갔다.
"마그나 바레라!" (대 방어막)
"울티모 바레라!" (궁극 방어막)
"퍽썩! 퍽썩!"
"끄아아아아아악! 우와아아아악!"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7레벨의 고위 마법사 레드왈과 쿼르토가 다급하게 자신들의 최강의 방어막을 펼쳤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망치로 맞은 유리처럼, 순식간에 깨져 나가 버렸다.
그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다른 마법사들 8명의 방어막은 말할 것도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
"히히히히히히힝! 히히힝! ....."
투명한 얼음이 덮히면서, 온몸이 산채로 얼어붙는 끔찍한 감각에,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뒷쪽에 서있던 병사들과 말을 탄 기사들은 도망치려고 몸을 돌리거나, 바닥에 넙죽 엎드려 피하려고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끔찍한 냉기의 바람이..... 어느새 11,000명에 달하는 병사들 전체를 뒤덮고, 그 뒤의 빈 들판까지 온통 새하얗게 얼려 버리고 있었다.
"지이이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이잉!"
라메드 반 데스몬드 후작과 그의 아들 가슈르의 철판 갑옷들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붉은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모든 적대적인 마법을 막아주는 방어 마법이 작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눈을 네댓 번 깜빡일 정도(약 4, 5초)도 채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붉은 빛이 희미해지더니..... 투명한 얼음이 온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헉! 어어어어어어억!"
"으아아아아아아악!"
.....
[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10,000명이 훨씬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투명한 얼음이 온몸에 덮히며, 순식간에 모두 얼어 죽어갔다.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가 벌인 끔찍하고 잔혹한 광경에..... 자신의 몸안에 갇혀있던 멜리사는 비명을 지르고 또 질러댔다.
높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랑스러운 듯한 말투로 속삭였다.
"기뻐하라, 멜리사!
이제, 텅 비다시피한 저것들의 영지를 흡수해서.....
하쏘 자작령, 뮤리엘 백작령, 데스몬드 후작령, 메넬릭 백작령..... 이렇게 4개 영지를 합쳐서 글레이셔(얼음) 왕국의 성립을 선포할 때로다!
위대한 대제국 글레이셔의 부활로 가는 첫 걸음이로다!"
[흐흐흑! 흐흑흑흑흑흑흑!]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겁먹은 울음을 터뜨리며, 멜리사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500여 년전, 글레이셔 제국 당시에, 우리 글레이셔 일족은 최소한 몇 천명이었잖아요, 폐하!
지금은 저 혼자뿐인데..... 흐흐흐흑! 무슨 수로..... 제국을 부활시켜요? 흑흑!]
새하얀 오똑한 코 아래의, 작고 붉은 입술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틀림없이, 살아남은 자들이..... 숨어 있는 우리 글레이셔(얼음) 일족의 자들이 더 있을 것이로다!
글레이셔 왕국의 부활을 널리 선포하면..... 그들이 찾아올 것이로다!
그들을 모으고, 그대의 머리 속에 있는 매기아(마법) 지식을 가르쳐라!
그대의 당대에는 어려울지 몰라도..... 이제, 짐의 위대한 글레이셔 제국은 다시 부활해, 세상을 지배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로다!
자! 4개 영지의 중앙에 위치한 이곳 쟈마라 평원(넓고 평평한 들판) 위에, 화려한 캐츄 데 글레이셔(얼음의 성)를 지을 때로다!
글레이셔(얼음)의 건축물들은..... 단순히 마력을 과시하는 장식물들이 아니로다!
그것들은 주위의 물의 원소의 냉기의 힘을 끊임없이 모아, 우리 글레이셔 일족에게 나누어 주어, 우리 일족들을 점점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도다."
황제가 차지하고 있는 멜리사의 몸이 좀더 위쪽으로 떠올라 200헥사(약 100미터) 높이까지 올라왔다.
수정구슬 지팡이로 아래쪽의 평원을 가리킨 황제가 멀리 울려퍼지는 목소리로, 중얼중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이전에 환상 속에서 들었을 때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지금의 멜리사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달전 수정동굴 안에서 수정조각을 잡은 채 "받아들인다!" 라고 말했을 때, 머리속으로 들어온 방대한 지식중의 일부로서..... 멜리사도 이제는 잘 알고 있는 주문이었다.
"스르르르르르륵! 스르르르르! 스르르르르르르륵!"
주변의 물의 원소들의 힘이, 저 아래쪽에서 하나로 모이며, 서로 결합되어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넓은 평원 위에, 하얀 덩어리들이 만들어지더니, 하나로 뭉치면서 점점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10헥사, 20헥사...... 무려 40헥사(약 20미터) 높이로 높이 솟아오른 새하얗고 거대한 얼음의 덩어리가 이번에는 옆으로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높이 40헥사(약 20미터)에, 지름이 무려 2,000헥사(약 1키로)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의 캐츄 데 글레이셔(얼음의 성)가 높이 솟아 올랐다.
80헥사(약 40미터) 높이의, 6개의 탑들이 가장자리를 빙돌며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척! 척! 척! 척! 척! 척! ....."
싸움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던, 새하얀 갑옷 차림의 병사들 5,000여 명이, 백마를 탄 지휘관들의 지휘에 따라, 바로 앞까지 발맞춰 행군해왔다.
말에서 내린 지휘관들이 바닥에 왼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무릎을 꿇으며, 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들을 숙였다.
뒤따라, 5,000여 명의 병사들도 모두 무릎을 꿇으며, 깊숙히 고개들을 숙였다.
눈앞에서 연거푸 펼쳐진, 초월적이고도 무시무시한 광경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병사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가 속삭였다.
"명심해라, 멜리사!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어리석고 힘든 법이다!
힘이 아니라..... 힘이 가진 공포로 모든 것을 지배하라!
죽여야 할 때는 망설임없이 죽이고, 부숴야 할 때는 가차없이 부숴버리며..... 그 모습을 가능한, 많은 미천한 것들이 보고 공포에 떨게 하라!
그러한 공포야 말로..... 불과 5,000명을 채 넘지 못했던 우리 글레이셔 일족이 1,000만 명에 달하는 대제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이제 멜리사 그대가 혼자서 왕국을 통치할 수 있게 해줄..... 가장 강력한 무기로다!"
[흐흑흑흑흑흑흑! 하지만, 저는..... 저는.....
사람들을 더이상 죽이고 싶지 않아요! 흑흑흑! 흐흑흑흑흑흑흑흑!]
차마, 왕국이나 제국같은 걸 원하지 않는다고 황제에게 말할 수는 없었던 멜리사는..... 울면서 황제에게 하소연했지만, 황제가 차지하고 있는 멜리사의 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뒤로 돌아갈 수 없도다!
위대한 우리 글레이셔 일족의 후손이자, 일족의 힘을 계승한 자여!"
........................................................................................................................
새하얀 드레스 차림에, 머리에는 투명한 수정왕관을 쓴 멜리사가 - 정확히는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가 투명한 얼음의 옥좌 위에 앉아 있었다.
얼음으로 된 투명한 옥좌였지만, 전혀 차갑지도 미끄럽지도 않았다.
마법으로 성을 만들 때..... 물의 원소의 힘 외에도, 흙의 원소의 힘을 약간 끌어다 섞어서, 얼음이면서도 얼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걸 멜리사도 잘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신기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쟈마라 평원에서의 전투 - 내지는, 대학살이 있은 후, 벌써 두 달여..... 하쏘 자작령과 뮤리엘 백작령에 이어, 영주들과 함께 거의 전병력이 몰살당한, 데스몬드 후작령과 메넬릭 백작령도 순조롭게 흡수되었고.....
이웃한 모든 영지들과, 유명무실한 노르드 왕실에, 총 인구가 8만여 명에 달하는 글레이셔(얼음) 왕국의 성립을 선포하는, 수십 명의 사절들이 보내졌다.
왕국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하라는, 선포라기보다는 협박이었으나..... 모든 사절들이 글레이셔 왕국의 성립을 인정한다는 정중한 답변들과 함께 돌아왔다.
4개 영주령에 남아있던 귀족들의 찌꺼기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학살당했고, 더 이상은 아무런 장애요소가 없었다.
물론, 수백 년 동안 갈라져 있었던 4개의 영주령을 단기간에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고, 모든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황제는 조그만 왕국 하나를 세우는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 쉽게 쉽게 일을 진행해 나갔다.
황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거나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 자는 가차없이 죽여버리고, 다른 자에게 다시 그 일을 맡긴다는.....
아주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폐하! 사람들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조그만 마을들조차도 남자들은 모두 무장을 집에 갖추게 하시고, 직업 병사들까지 치안대로 몇 명씩 두게 하시다니 납득이 가질 않아요!]
"모두 물러들 가라!"
"예, 퀴인 리지(여왕 폐하)!"
옥좌의 양옆에서 호위하고 있던, 새하얀 갑옷 차림의 병사들 20여 명이 넓은 홀(넓고 큰 방) 밖으로 나가자.....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가, 부드러운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돼지 우리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치는 것이로다."
[예?]
"돼지들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으니, 꿀꿀거리며 불평을 하든 말든, 가시 울타리를 둘러쳐서 보호해 주는 것이로다.
처음에는 꿀꿀거리겠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산적들이나 괴물들, 맹수들 따위에 시달릴 일은 없으리로다.
시행 상태를 종종 점검해서, 부실한 마을의 대표들은 가차없이 목을 쳐라.
그리고, 모든 마을들에 씨타씨온(소환) 매기아(마법)가 담긴 종이들을 배포하라!
천천히, 하지만..... 작은 마을들까지 가능한 빠짐없이.....
그 종이들을 찢으면, 그대에게 신호가 오면서 동시에 트랜스포라(장거리 이동)에 필요한 좌표를 알려주게 될 것이로다.
물론, 자기들 힘으로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산적이나 괴물들 따위에 그대를 부른 미친 것들이 있으면..... 그런 것들은 반드시 죽여야 하노라."
[저..... 저는.....]
자신의 몸속에 갇힌 멜리사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요 석달간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사실..... 무섭고 끔찍하다고만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수익이나 생산의, 100을 기준으로, 50에서 70까지 달했던 세금을 40 정도로 낮춰주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니.....
고대 왕국들의 시대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가 나았었군요!]
새하얀 아름다운 얼굴에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가 대답했다.
"위대한 매기아(마법)의 힘이로다!
우리 위대한 글레이셔 일족은 숫자가 얼마 안될뿐 아니라.....
치안대 이외에, 머릿수만 차지하는 쓸모없는 병력들을 많이 유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로다.
필요 이상으로 쥐어짜서, 쓸모없는 삐쩍마른 돼지들로 만들 필요는 없노라.
다만, 미천한 것들의 목을 휘어잡고 있는, 공포라는 굴레를 늦춰서는 안될 것이로다."
사람들을 정말로 가축 이하로 생각하는, 오만하고 잔인한 대답에 오싹함을 느끼면서도..... 멜리사는 한편으로는 황제의 말에 동감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짐은 떠날 시간이로다!
자랑스런, 우리 일족의 후손, 멜리사여!"
[폐... 폐하!
안돼요! 저 혼자 두고가지 마셔요!]
황제가, 그의 의지가 떠날 때가 됐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겁에 질린 멜리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몸을 대신 차지하는, 이 매기아(마법)는 90일밖에 가지 못 하노라!
이제 어쩔 수 없노라!
작별의 시간이로다!"
[잠시만요, 폐하!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제껏, 제게 친절했던 사람들은..... 심지어는, 괴물들조차도 전부 죽어 버렸어요!
이런 일들은 전부 우연의 일치였나요?
아니면.....]
자신의 몸속에 갇힌 멜리사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렸다.
[제가..... 정말로, 죽음의 저주를 부르는 "눈의 요정이 버린 아이"이기 때문이었나요?]
작고 붉은 입술에 냉소적인 미소가 어렸다.
"눈의 요정이 버린 아이? 미천한 것들이 우리 일족을 부르는 말인가?
그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어쩌면 그럴 수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뿐이로다."
[예?]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의 대답이 이어졌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같은 글레이셔(얼음) 일족간에는, 서로 사랑하고 결혼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 뿐이로다.
사실, 우리 글레이셔 일족이 일족들끼리만 결혼해 온 것은..... 일반인들과 결혼하면 거의 틀림없이 일반인의 아이가 태어나 버리는 문제 때문으로.....
우리 글레이셔 일족이.....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미천한 일반인들은 죽게되는, 죽음을 부르는 자들로 자처해 온 것은, 아마도 미천한 것들을 지배하기 쉽도록,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높도다."
[그... 그렇다면.....]
머리속에서 울리는, 멜리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황제의 대답은 계속 이어졌다.
"무려 1,000년이 넘게, 죽음을 부르는 자들로 자처해 오면서..... 우리들 자신도, 미천한 일반인들은 우리와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죽게 될 거라고 믿어온 것 또한 사실이었노라.
그러니..... 어느 쪽이 진실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로다."
[그렇군요.]
자신의 몸속에 갇혀있는 멜리사의 들리지 않는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로다!
위대한 글레이셔 일족의 후손 멜리사여!
위대한 글레이셔 제국을 꼭 부활시켜 다오!"
[잠시만, 폐하! 안 돼요!]
"가지 마셔요! 가지 마셔요!"
마지막 말들은..... 석달만에 처음으로 입밖으로 튀어나온 말들이었다.
느낄 수 있었다.
석달간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 함께 했던 황제가..... 그가 남겼던 의지가.....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걸.....
옥좌위에서 내려와, 얼음 바닥에 무릎을 꿇은 멜리사가 울음을 터뜨리며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폐하! 저는 아직도 너무나 약해요! 흐흑흑흑흑!
저 혼자서..... 흑흑흑! 백성들이 8만 명이나 되는, 이런 큰 왕국을 무슨 수로 다스려요!
게다가, 우리 글레이셔 일족의 글레이셔 제국은..... 위대한 글레이셔 제국은..... 흐흑흑! 흐으으으윽!"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멜리사의 가냘픈 몸이 떨리며, 흐느낌이 더욱 심해졌다.
"이미 다시는..... 부활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제가 유일하고도, 마지막으로 남은..... 일족의 후손이니까요!
설사, 숨어있던, 한 두 사람을 찾아낸다고 해도..... 제 몸은, 젖가슴도, 성기도 전부 뭉개져 버렸는데, 어떤 남자가 저와 결혼해 주겠어요? 흐흑흑흑!
으흑흑흑흑흑흑흑흑흑!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멜리사의 비명같은 긴 절규가 텅빈 얼음의 홀 안에 길게 울려 퍼졌다.
........................................................................................................................
"레이나 스타크와 그녀의 두 아들 밥과 에반을 찾아서 데려왔습니다, 퀴인 리지(여왕 폐하)!"
새하얀 흉갑옷(가슴과 몸통을 가리는 갑옷)에 새하얀 옷차림의 고급 장교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보고했다.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 애썼지만, 눈처럼 새하얀 퀴인(여왕)에 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으로, 손끝을 가볍게 벌벌 떨고 있었다.
"들어오게 하라!"
새하얗게 칠해진, 홀의 나무문이 열리며, 역시 새하얀 갑옷을 입고 있는 네 명의 병사들이..... 누더기를 걸친 삼십대 중반의 여자와, 역시 누더기 차림의 두 꼬마들을 안으로 데려왔다.
뼈만 남은 것처럼 앙상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비참한 모습에, 멜리사의 새하얀 두 눈동자가 충격으로 커졌다.
"보비(밥의 애칭)? 보비!
좀더 일찍..... 좀더 일찍, 생각해 냈었어야 했어!
보비! 보비!"
눈물이 새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거대한 캐츄 데 글레이셔(얼음의 성)의 모습에 기가 질린 듯 벌벌 떨며 들어온, 레이나 스타크가 옥좌 앞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큰 소리로 빌기 시작했다.
아주 짧고 야한, 누더기같은 갈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퀴인 리에(여왕님)!
퀴인 리에를 때린, 무엄한 짓을 했던 그날은..... 제가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남편이 마차에 치여 죽어서, 정신이 나가서 그만.....
설사, 저를 죽이시더라도, 제발 이 아이들만은.....
제 남편인 레기날드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이 아이들만은 살려 주십시오, 퀴인 리에(여왕님)!"
하쏘 자작가를 포함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앞에 엎드린 채..... 레이나 스타크는 울면서 자비를 간청했다.
얼음의 옥좌 위에 앉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멜리사의 눈처럼 새하얀 아름다운 얼굴은 무표정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흐흑흑흑! 흑흑! 그날 몇 대 맞은 복수를 하려고 부른게 아니어요, 레이나 마님!
어떻게 지내시나 알아봤더니, 빵집 문을 결국 닫고 싸구려 창녀짓을 하면서 힘들게 살고 계시다고 해서.....
그래서..... 모셔온 거에요!
제가 어떻게..... 흐으윽! 제가 어떻게..... 레기날드 주인님을 잊을 수 있겠어요! 흐흐흑흑흑흑!"
"어? 멜리사 누나다!
멜리사 누나인데, 머리카락이 갈색이 아니라 하얀 색이야, 마미(엄마)!"
아버지인 빵집 주인 레기날드를 닮은, 착해 보이는 파란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금발의 여덟 살 꼬마 보비가 용케도 3년만에 보는 멜리사를 알아본 듯 했다.
삐쩍마른 지저분한 몰골이, 영락없이 거지 꼬마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니야! 저 분은 멜리사 누나가 아니야!
어서 고개를 숙이고, 살려달라고 빌렴!
저 분은 아주 무서운 퀴인 리에(여왕님)시란다!"
누더기같은 갈색 드레스를 입은 레이나가 다급하게 어린 아들의 머리를 손으로 눌러 숙이게 하며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두 살의 아기였던 다섯 살의 에반은 멜리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겁먹은 얼굴로 엄마가 시키는 대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붉고 작은 입술이 열리며,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죽이려고 부른 것이 아니다!
네 남편에게 작은 빚이 있으니, 그 빚을 갚을 뿐.....
이걸 갖고, 돌아가라!"
새하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자, 멜리사의 옆에 서 있던, 새하얀 옷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묵직한 자루 두 개를 내밀었다.
금화와 은화로, 합쳐서 100,000세테르의 돈이 들어있는 자루들이었다.
50세테르 정도면, 평범한 가정의 한달 생활비로 잡을 수 있었으니..... 낭비하지 않으면, 100년치 생활비가 훨씬 넘을 거액이었다.
"고맙습니다, 퀴인 리에(여왕님)! 고맙습니다!"
"멜리사 누나가 맞는데.....
나, 보비야, 누나!
멜리사 누나!"
"아니라니까!
가자, 보비! 빨리 따라와, 에반!"
자루 두 개를 받아든 레이나가 겁먹은 표정으로, 도망치듯 아이들을 재촉했다.
이상한 표정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며, 홀을 빠져나가는 금발머리의 꼬마 보비를..... 얼음의 옥좌 위에 앉은 멜리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3년전 레기날드의 빵집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어서 가, 보비!
어서 가서..... 마미(엄마)와 동생과 같이, 행복하게 잘 살아!
누나와 가까이 해서는 안돼!
널..... 죽게 만들지도 모른단 말이야! 흐으윽! 흑흑! 어엉엉엉!"
자꾸만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멜리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집사장!"
"옛, 퀴인 리지(여왕 폐하)!"
뮤리엘 백작가에서 집사 일을 했으며, 지금은 멜리사를 섬기고 있는, 새하얀 옷차림의 로암 리슬리가 깜짝 놀라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저 여자는..... 별로 똑똑한 여자가 아니다.
누군가 적당한 사람을 보내줘서, 풍족한 생활을 잘 꾸려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라!
사는 걸 간섭하지는 말고.....
사는 모습을 종종 보고하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관련된 자들 모두, 그 가족들까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예, 폐하!
예, 폐... 하!"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가 직접 내리는 벌은..... 오직 한가지, 죽음뿐이었다.
잔뜩 겁을 먹고, 온몸을 벌벌 떨면서, 집사장 로암은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
"으아아아아아아! 왜?
도대체, 왜 바레라(방어막)가 뚫리지 않는 거야?"
새하얀 수염을 길게 기르고, 검은 로브(헐렁하고 긴 겉옷)를 걸친,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쟈레드는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주위에는, 10명의 제자들이..... 이미 머리가 박살나버린 시체들이 되어,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눈처럼 새하얀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 멜리사가 투명한 얼음의 옥좌 위에 앉은 채,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2레벨의 바레라(방어막)가 아니라, 9레벨의 아크 바레라(상위 방어막)거든."
"9레벨?"
쟈레드의 파란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며, 턱이 빠질 듯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최종 레벨인 9레벨의 마법은..... 지금보다 마법이 훨씬 발달했던 고대 왕국들의 시절에도, 도달한 마법사들이 몇 명 없었다고 전해지는, 거의 전설적인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중 가장 파괴력이 강한, 8레벨 마법 "다쓰 보르티온"(죽음의 소용돌이)이 어째서 멜리사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는지.....
이미 숱한 강력한 마법사들을 함께 해치워 왔으며, 전원이 5레벨 이상의 고위 마법사들인 그의 제자들 10명이..... 어째서, 겨우 2레벨 마법인 글레이셔 란자(얼음의 창)를 막지 못하고, 차례로 시체들로 변해 갔는지.....
"충성을 맹세합니다, 퀴인 리지(여왕 폐하)!
신하로 섬기..."
"글레이셔 란자!" (얼음의 창)
"퍼억!"
쟈레드의, 8레벨 마법 "마그나 다쓰 바레라"(위대한 죽음의 방어막)가 장난처럼 쉽게 뚫려 버리며..... 머리가 날아가버린 시체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10명의 제자들과 함께, 다른 마법사들을 죽이고 마법연구 성과와 지식을 빼앗는 짓을 거듭해 오며, 매기아러 도살자로 불리기까지 했던, 악명높은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치고는..... 참으로 허무한 최후였다.
"너처럼 미천한 것의 충성 따위는..... 필요없다!"
작고 붉은 입술이 열리며, 옥좌 위의 멜리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시체를 향해 대답했다.
글레이셔(얼음) 왕국의 성립을 선포한지 벌써 2년이 넘어, 이제는 왕국도 확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건만..... 역시나 글레이셔(얼음) 일족의 사람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갑작스럽게 출현한, 젊은 여자 다크 매기아러를 만만하게 생각한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들만이..... 그녀가 가진 다크 매기아(흑마법) 지식을 욕심내고, 종종 쳐들어오곤 했다.
글레이셔 제국의 부활을 바랬던 황제의 뜻과는 달리, 멜리사는 더이상 정복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도와줄 다른 글레이셔 일족의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더 이상 왕국을 넓힐 여력도 없었거니와.....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전해오는 다크 매기아러들은 살려줄 수 없었다.
인구 8만 명의 작지 않은 왕국을 혼자서 다스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힘이 아니라, 힘이 가진 공포라는 것을, 이제는 멜리사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대로..... 이렇게 혼자서 살다가, 죽어버리는 건가?
힘이 있든 없든..... 너는 눈의 요정이 버린 아이, 재수없는 괴물일 뿐이야, 멜리사!
오히려, 어쩌면 힘을 가진, 지금의 이 모습이야말로..... 전보다도 더한 괴물일지도.....
아무리 강한 힘을 가져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물이 있어도.....
행복이란..... 나같은 괴물이 사기에는 너무나 비싼 것인가?"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멜리사의 새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은 무표정할 뿐이었다.
공포로 모두를 다스리고, 모두 위에 군림하는 퀴인(여왕)은..... 눈물이 없는 존재여야 했다.
.......................................................................................................................
다섯 마녀의 전설(The Legend of Five Witches) 외전 2부 5장
본 야설은 강간, 윤간, 성고문 수준의 SM 등 비윤리적이고 중범죄에 해당하며 잔인하고 하드코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취향의 글을 좋아하시지 않는 분은 읽으시지 말 것을 미리 권고 드립니다.
- 외전 2부 - 잊혀진 전설들 (퀴인 데 글레이셔(얼음의 여왕) 멜리사편 : 저주받은 아이) - 5장 -
"호오! 철 광석 가격이 요즘 들어 많이 올랐군!
올 겨울에는 수입이 괜찮겠는데....."
고급스런 갈색의 나무 책상 앞에 앉은 채로, 사십대 중반의 호리호리한 남자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보고서로 보이는 몇 장의 종이를 오른손에 들고 있는 남자는..... 꽤 따뜻해 보이는, 검정 빌로도 재질의 튜닉(허벅지 가까이까지 오는 긴 웃옷)과 두꺼운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뮤리엘 백작가에서 대대로 집사 일을 맡아보고 있는 로암 리슬리라는 자였다.
벌써 500여 년째 이어진 전란의 시대라지만..... 위스토아 대륙 서북쪽 끝에 위치한 노르디아 왕국은 벌써 100년 가까이, 전쟁없는 시절을 누리고 있었다.
노르디아 왕권이 거의 유명무실할 정도로 약해져서, 정복전쟁을 벌일만한 힘이 없었고.....
왕국 주변에도 이렇다 할만한 강대국이 없었던 데다가.....
왕국내의 귀족들도 이웃간에 힘의 균형이 서로 팽팽하거나, 혈연으로 얽혀 있어서..... 누구도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전쟁이 없었다는 의미일 뿐, 특별히 치안이 좋다거나, 주민들의 삶이 안전하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어서.....
산적들이나 괴물들, 맹수들의 습격 등 이런저런 재난으로, 주민들이 시달리고, 보호받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이렇다할 문제없이, 비교적 팔자좋고 편한 삶을 살아 온, 집사 로암이 보고서 몇장을 끝으로..... 한가로왔던 오늘의 일과도 그만 마치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성 안에 있는, 모든 미천한 것들에게 명하노라!
지금 즉시 성 밖으로 나와서 모여서라!
이 성을 곧 산산조각내 버릴 것이로다!"
"뭐? 뭐라고?"
갑자기 창밖에서 들려온, 높은 여자 목소리에, 집사 로암이 기절할 듯 놀라며 창가로 뛰어갔다.
저 멀리..... 새하얀 드레스에, 새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뮤리엘 백작가의 거대한 성을 내려다보며..... 적어도 60헥사(약 30미터) 높이에 떠있는, 여자의 오른손에는 수정구슬이 달린 새하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크...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로암의 입이 저절로 떡 벌어졌다.
사악한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가 성에 쳐들어오다니..... 그런 일은 아이들의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얘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강한 매기아러(마법사)라고 해도,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위력이나 범위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몇 천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거대한 성을, 혼자서 정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매기아러(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적어도 지난 500여 년 동안은.....
성의 외벽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공중에 떠 있는, 온통 새하얀 모습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를 향해, 일제히 화살들을 쏴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마치 투명한 방패에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화살들은 다크 매기아러의 주변에서 이상한 각도로 튕기더니,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의 손에 들린 수정구슬 지팡이로부터 새하얀 눈보라가 만들어지더니, 성벽 위를 향해 가로로 쏟아붓듯 날아들었다.
단, 한 방의 눈보라로, 외벽의 정면 쪽에 몰려서서 화살을 쏴대던, 50여 명의 병사들이 모조리 쓰러져 버리는 모습이, 로암의 눈에 들어왔다.
성의 주건물에 붙은 탑 5층에 위치한 로암의 집무실과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지만, 끔찍한 냉기에 얼굴에 소름이 돋으며, 저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씨이이이이이잉!"
"콰콰콰콰콰콰콰쾅!"
이어,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돌로 지은 거대한 성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와아아아아악!"
엄청난 진동에, 중심을 잃으며 바닥에 나뒹군 로암 집사가 몸을 일으켜, 다급하게 집무실 밖으로 뛰쳐 나갔다.
성에 쳐들어온,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가 정말로 성을 박살내기 시작한게 틀림없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사람 살려!"
이미 탑의 넓은 계단은 뛰어 내려가는 사람들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백작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집사답게 천천히 걸으면서 점잔을 뺐겠지만..... 로암도 정신없이 다른 사람들을 떠밀고 떠밀리면서, 1층으로 뛰어 내려가기 바빴다.
뮤리엘 백작가의 거대한 성은..... 가장 바깥쪽을, 강물을 끌어들인 깊고 넓은 물이 에워싸고 있었고,
그 안쪽에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외벽이.....
다시 그 안쪽에는, 여덟 개의 탑을 가진, 거대한 주건물이 - 크고 작은 부속건물들과 함께 - 높이 솟아올라 있었으며,
주건물 아래쪽에는, 넓은 통로가 중앙을 세로로 관통하듯 뚫려 있어,
필요시, 군대의 집결 및 성 바깥으로의 돌격이 용이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지금은 성안의 주민들 모두가 몰려나와, 중앙 통로를 미어질듯 메운 채로..... 성밖으로 먼저 나가려고 서로 밀어대며 아수라장을 벌이고 있었다.
물을 건너 성밖으로 나가는 넓은 다리를 지키던, 8명의 병사들이 잠시 주민들을 막고 있었으나, 엄청난 사람들의 기세에 순식간에 떠밀려 버리고 말았다.
마치, 막힌 물이 터지듯 우르르르..... 성안의 주민들이 다리를 건너, 성밖으로 빠져 나갔다.
성앞의 넓은 빈터에 모여선 주민들은 웅성웅성대며, 머리위 저 높이 공중에 떠있는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를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 보았다.
주민들이 왠만큼 빠져나가 자리를 비우자..... 병사들이 성안의 중앙 통로를 메우며 집결했다.
검게 칠한 가죽 흉갑옷(가슴과 몸통을 가리는 갑옷)와 역시 검게 칠한 투구 차림에, 3헥사(약 1.5미터) 길이의 긴 창을 높이 세워들고 있었다.
적어도 1,000명 가까이 되어 보이는 상당한 규모에..... 절반 가까이는 활과 화살통을 등에 메고 있었다.
선두에서는, 전신을 감싸는 철판갑옷을 입은, 덩치 큰 기사가, 역시 철판갑옷 차림의 기사들 20여 명과 함께,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창대신 긴 칼을 허리에 찬 병사들 십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금속제 흉갑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귀족 한 사람이 기사에게 다가왔다.
고급스런 옷차림의 여자들과 아이들 스무 명 가량이 귀족을 따라오며, 불안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어떤가, 덴리경?
막아낼 수 있겠나?"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텁수룩한 갈색 수염을 기른, 덩치 큰 기사가 안심시키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페이잘 백작님!
정신나간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한 명 따위에게 정복당할 만큼, 우리 군대는 약하지 않습니다!
이미 연기를 피워 신호했으니, 좀 있으면 가까운 요새에 주둔중인 주력 병력들도 달려올 것입니다."
기사단장 덴리의 믿음직스런 대답에, 페이잘 반 뮤리엘 백작의 긴장했던 얼굴도 조금은 풀어졌다.
갈색의 로브(헐렁하고 긴 겉옷) 차림의 세 명이 급한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수염이 하얀, 꽤 나이들어 보이는 노인과 그보다는 젊은 각각 삼십대, 사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들이었다.
세 명 모두, 수정구슬이 달린 지팡이를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페이잘 백작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탑에서 내려오는 길이, 사람들로 어떻게나 미어터지는지 원....."
하얀 수염을 왼손으로 쓰다듬으며, 노마법사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어떻소, 리스톤씨? 해치울 수 있겠소?"
페이잘 백작의 질문에, 노마법사 리스톤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와 두 제자들이면 충분합니다!
사실, 번거롭게, 군대를 집합시킬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핏 보니, 외벽을 지키던 병사들 수십 명을 매기아(마법) 한 방으로 쓸어 버리는 것 같던데.....
게다가, 집채만한 얼음 덩어리를 성에 떨어뜨린 듯 했소만....."
"허허허! 십중팔구, 그 두 번으로, 갖고 있는 마나(에너지)를 다 써버렸을 겝니다.
다크 매기아(흑마법)의 파괴적인 힘에 홀려버린, 정신나간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들이 가끔 이런 짓을 벌이죠.
이런 큰 성에 혼자서 쳐들어올 정도로,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경우는 처음 봅니다만....."
노마법사의 자신있는 대답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기사단장 덴리가 끼어들었다.
"일단..... 아직도 공중에 떠있으니, 활을 쏠 줄 아는 병사들과 함께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척! 척! 척! 척!"
1,000여 명의 병력이 4열 종대로 위풍당당하게, 넓은 나무 다리를 건너, 성밖으로 행진해 나왔다.
말을 탄, 20여 명 가량의 기사들과 3명의 마법사들이 앞장선 채였다.
다리 건너편, 넓은 광장에 몰려서 웅성거리던 일반 주민들이, 싸울 자리라도 만들어주듯, 양옆으로 갈라서며 멀찌감치 물러섰다.
선두에 선, 덩치 큰 털보 기사단장 덴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리석은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여!
이제라도 내려와서, 순순히 용서를 빌어라!
알량한 매기아(마법)를 믿고 계속 날뛰다간, 뼈도 못 추릴 줄 알아라!"
여전히 60헥사(약 30미터) 높이의 공중에 떠 있던,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다크 매기아러의 몸이 천천히 내려와.....
기사단장 덴리와 그의 병력으로부터 50헥사(약 25미터)쯤 떨어진 정면에 내려섰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물론, 드러난 얼굴과 팔다리, 두 눈동자까지..... 작고 붉은 입술을 제외한, 몸 전체가 눈처럼 새하얀..... 놀랄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처녀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새하얀 얼굴에 담긴 오만한 표정은..... 용서를 빌려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알량한 매기아(마법)라.....
짐의 매기아를 그렇게 부른 것은 네 놈이 처음이로다, 미천한 것아!"
오른손에 든 수정구슬 지팡이를 이쪽으로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노마법사 리스톤과 그의 두 제자들이 준비하고 있던 주문을 동시에 외쳤다.
"파이온!" (화염)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세 개의 수정구슬 지팡이에서 동시에 날아간 불의 공들이 요란한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히이이이이이이잉! 히이이이잉!"
놀라서 소리지르는 말의 고삐를 억센 손으로 감아쥐어 진정시키며, 기사단장 덴리는 고개를 저었다.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아직 스무 살도 채 안돼 보이는, 무척 아름다운 처녀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하지만, 이미 병사들 수십 명을 죽이고, 성의 주건물까지 일부 부쉈으니, 어쩔 수 없.....
기사단장 덴리의 생각은 거기서 중단되고 말았다.
폭발의 연기와 흙먼지가 사라지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새하얀 모습이 드러났던 것이다.
"글레이셔 란자!" (얼음의 창)
"퍼억!"
"털퍼덕!"
눈깜짝할 사이에 날아온 얼음의 창에, 노마법사 리스톤의 양쪽에 있던 두 제자중 한 명의 머리가 수박처럼 박살나며, 목없는 몸이 말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뭐야? 바레라(방어막)를 쓰는 걸 잊은겐가?
저런 초보 매기아(마법)에 당하다니!"
"그럴리가요? 나오기 전에 쓰는 걸 분명히 봤....."
"퍽썩!"
"그란드 바레라!" (대 방어막)
또 한명의 제자의 머리가 날아간 뒤에야, 상황을 깨달은 노마법사 리스톤이 바레라 마법을 강화했다.
역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기사단장 덴리도 오른손을 높이 들며 외쳤다.
"궁수! 사격 준비!"
1,000여 명의 병사들중 활을 메고 있던 500여 명이 일제히 활에 화살을 매기고 팽팽하게 잡아 당겼다.
성의 수비병력이니 만큼, 활을 쏠 줄 아는 병사들의 비율이 절반 정도 될 정도로, 꽤 높은 편이었다.
"발사!"
"휘이익! 휘이익! 휘익! 휘익! 휘익! ....."
500여 발의 화살들이 새까맣게 날아감과 동시에, 리스톤의 공격 마법이 또다시 작렬했다.
"그란드 람파고!" (대 번개)
"빠지지지지지직!"
거대한 번갯불이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를 향해 날아가 새하얀 빛을 뿜으며 작렬했다.
뒤이어, 수백 발의 화살들도 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다크 매기아러를 덮는 듯 했다.
그러나, 번갯불도, 화살들도..... 다크 매기아러에게 닿지 못했다.
허무하게도, 모조리 그 근처에서 튕겨나버릴 뿐이었다.
번갯불의 새하얀 불꽃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다크 매기아러의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투명한 막이 얼핏 모습을 드러냈다.
"미천한 것이..... 아무데나 그란드(큰, 위대한)를 붙이는구나!
글레이셔 란자!" (얼음의 창)
"퍼억!"
고드름처럼 생긴 얼음의 창을 맞고, 머리가 박살나버린 노마법사 리스톤의 몸이..... 천천히 말 위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털퍼덕!"
그란드 바레라(대 방어막)라는 거창한 이름이 무색하게도..... 빙계(얼음 계열)의 공격 마법중 가장 기초에 속하는 글레이셔 란자(얼음의 창)를 막아주지 못했던 것이다.
"휘휙! 휘익! 휘이익! 휘익! ....."
끊임없이 날아가는 화살들도 여전히, 새하얀 드레스조차 건드려보지 못하고 그 주변 4헥사(약 2미터) 정도에서 튕겨나고 있었다.
"사격 중지!"
오른손을 높이 들어 궁병들의 사격을 정지시킨, 기사단장 덴리가 얇고 긴 마상 검(말위에서 휘두르는 검)을 뽑아들며 목청껏 소리쳤다.
"돌격!"
"와아아아아아아아!"
2헥사반(약 125센치) 길이의 마상 검을 뽑아든 20여 명의 기사들이, 기사단장 덴리와 함께, 말을 달려 돌격해 갔다.
앞장선 기사단장 덴리의 마상 검은, 소드 바인(검기)의 파란 빛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말을 달려오던 무시무시한 힘과 속도를 더해, 온힘을 다한 일격으로 검을 휘둘러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다크 매기아러를 후려쳤다.
"차카캉! 차캉! 차카카캉! ....."
아름다운 새하얀 얼굴에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짓고 있는,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주위를 빙빙 돌면서 죽어라고 검으로 후려 갈겼다.
그러나, 다크 매기아러의 주위 4헥사(약 2미터) 정도를 감싸고 있는 투명한 막에 번번히 튕겨날 뿐이었다.
기사단장 덴리의, 소드 바인(검기)이 서린 검도.....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다.
"글레이셔 토멘토!" (얼음의 폭풍)
"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끄아아아아악! 우와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
"히히히히히히히히힝! 히히히히히히히히힝! ....."
"으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비교적 가까이 서있던 주민들과 병사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나며 비명을 질러댔다.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를 중심으로 갑자기 일어난 눈보라가,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주위를 온통 쓸어 버렸다.
눈보라가 불어닥친 것은 아주 잠깐이었으나, 기사단장 덴리를 포함한 20여 명의 기사들과,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을 전부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얇은 얼음에 뒤덮힌 시체들이..... 어린애가 집어던진 장난감들처럼, 아무렇게나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일부러 약하게 마법을 쓴 듯한, 눈앞의 다크 매기아러가 조금만 더 오래, 조금만 더 강하게 마법을 썼다면..... 어쩌면 주민들과 병사들 전부가, 지금쯤 같은 꼴의 시체들이 되어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모스카!" (비행)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다크 매기아러의 몸이, 천천히 다시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5,000여 명의 주민들과 1,000여 명의 병사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올려보는 가운데, 새하얀 오른손에 들려진 수정구슬 지팡이가 천천히 성쪽을 가리켰다.
"글레이셔 메테리온!" (얼음의 운석)
"씨이이이이이이이잉!"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하늘 전체가 새하얀 색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적어도 20헥사(약 10미터)가 넘어 보이는 집채만한 크기의 얼음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거대한 성의 주건물을 강타했다.
이번에는, 조금 아까 떨어졌던 것처럼, 한 개로 그치지 않았다.
뒤이어, 수십 개의, 아니 수백 개의 거대한 얼음덩이들이 끝도 없이 성 위로 떨어져 내렸다.
"씨이이이이이잉! 씨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
"콰콰콰콰콰쾅! 우르르르르르! 콰콰콰콰쾅! ....."
.....
세상이 통째로 박살나는 듯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온통 흔들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우와아아아아앗! ....."
겁을 먹은 주민들과 병사들 모두가 겁을 집어먹은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떨었다.
성안에서 다크 매기아러를 해치우기를 기다리고 있던, 페이젤 반 뮤리엘 백작과 그 가족들..... 그리고, 그때까지도 눈치를 보며 성 안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제야 우르르 성밖으로 몰려나오며,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채만한 얼음덩이 하나가, 우연인지, 일부러 겨눈 것인지, 성문께를 두들기면서.....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다리를 박살내 끊어 버렸다.
"씨이이이이이이잉! 씨이이이이이이이잉! ....."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우르르르르르르르르!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
마침내, 하늘에서 계속 떨어지는 거대한 얼음덩이들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주성의 높은 건물이..... 외벽들과 함께, 마치 망치로 맞은 모래성처럼,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아직도 안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지르는 비명소리가 성밖에까지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악몽이다! 악몽이야!
사랑과 생명의 여신이신 귀니아님!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흐흐흐흐흐흐흑!"
도망나온 주민들 사이에 섞여 있던, 집사 로암이 남들처럼 바닥에 엎드려, 양쪽 귀를 두손으로 막은 채로, 비명을 지르며 흐느꼈다.
........................................................................................................................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멜리사, 하쏘 자작령과 뮤리엘 백작령 습격!
자작가의 저택 및 백작가의 성, 완파!
무너져내린 폐허들만 남음.
리토 반 하쏘 자작과 페이젤 반 뮤리엘 백작 본인들을 포함..... 두 가문의 귀족들 전멸!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함.
뮤리엘 백작가의 남은 사병들 약 5,000여 명, 멜리사에게 충성을 맹세.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 멜리사는 몸 전체가 눈처럼 새하얀, 2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외모의 처녀임.
"눈의 요정이 버린 아이"라고 함.
뮤리엘 백작령에서 가장 가까이 사는, 두 명의 대귀족, 라메드 반 데스몬드 후작과 티베로 반 메넬릭 백작, 동맹 선언!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 멜리사에 공동으로 선전 포고!
세상이 깜짝 놀라 뒤집힐 만한, 급박한 소문들이 연거푸 터져나와...... 노르디아 왕국 서북 지방을 강타하며 퍼져 나갔다.
여느 때 같으면, 아무도 믿지 않을 잠꼬대같은 내용이었으나..... 믿지 않을 수 없는 사실들이었다.
적어도..... 지금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와의 결전을 위해, 이곳 쟈마라 평원(넓고 평평한 들판)에 모여 있는.....
11,000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과 기사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소문들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님! 그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라는 년이 정말로 여기 올까요?
티베로 백작과 우리를 각개격파하는 편이 훨씬 유리할텐데요."
철판갑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덩치 큰 젊은 기사가, 역시 철판갑옷 차림의 나이지긋한 기사에게 물었다.
가슈르 반 데스몬드와 그의 부친인 라메드 반 데스몬드 후작이었다.
두 사람 모두, 크고 좋아보이는 밤색 말들을 타고 있는 채였다.
"듣기로, 오만하고 잔인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년이라니..... 결전 요청에 오겠다고 대답한 이상, 아마 오겠지.
매기아러(마법사)들은 싸울 준비가 됐나?"
"예, 아버님! 잠깐 와서 싸움을 도와주는 비용이 1인당 10,000세테르라니..... 매기아러란 놈들은 정말 칼 안든 강도들이로군요!"
젊은 가슈르 반 데스몬드가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할 수 없지!
우리 가문의 수석 매기아러(마법사)인 페리클은 5레벨..... 죽은, 뮤리엘 백작가의 매기아러 리스톤과 같은 레벨이니, 아마도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7레벨의 고위 매기아러를 두 사람이나 불러 왔으니, 메넬릭 백작가의 5레벨 매기아러 길리오까지 해서.....
이제 5레벨 이상의 매기아러만 4명, 그 이하의 매기아러들은 6명이나 되는 셈이다.
아무리,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라고 해도..... 10명이나 되는 매기아러들을 혼자서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런 매기아러(마법사)들보다는..... 저는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가보인, 이 갑옷들이 더 믿음직스럽습니다."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은빛의 철판 갑옷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의 붉은 선들이 장식처럼 복잡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모든 적대적인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대 마법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 갑옷들이었다.
노귀족 라메드 반 데스몬드 후작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빰빠람! 빰빠밤! 빠밤!"
저 멀리서 나팔 소리로 들리는 높은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새하얀 물결처럼 보이는 모습들이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옵니다! 뮤리엘 백작가 병사들의 갑옷은 저런 색깔이 아니었을텐데..... 전부 새하얗게 칠했군요!"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라더니, 하얀 색에 미친 년인가 보군!"
데스몬드 후작가의 부자가 그렇게 말을 주고 받는 동안, 휘하의 기사들과 장교들은 병사들의 싸움 준비를 시키느라 분주해졌다.
"블루(파랑) 기사단, 승마!"
"히히힝! 히힝! 힝! ....."
"레쥬(빨강) 부대, 활 들어!
화살 매겨!"
"탁! 탁! 탁! 탁! 탁! 탁! ....."
"브라우니(갈색) 부대, 투창 들어!
투척 준비!"
"척! 처처척! 척! 척! ....."
.....
일사분란하게, 데스몬드 후작가의 사병 5,000여 명이 전투준비를 갖춰 나갔다.
그 오른편에 자리잡은, 티베로 반 메넬릭 백작과 그의 두 아들들..... 그리고 그 휘하 6,000여 명의 병사들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양쪽 가문의 마법사들과 이번 싸움을 위해 고용된 두 명의 고위 마법사들은..... 대열 앞으로 나와, 양쪽 가문 부대들의 사이 정중앙에 모여섰다.
"허허허! 메넬릭 백작가의 길리오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명성이 높으신 레드왈님과 쿼르토님을 모시고 싸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데스몬드 후작가의 수석 마법사 페리클이 점잖은 말투로 말을 꺼내며, 웃음을 지었다.
페리클 만큼이나 나이들어 들어 보이는, 세 명의 노마법사들이 웃으며, 답례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왈과 쿼르토..... 두 명의 고위 마법사들은 그 와중에도 어쩐지 뽐내는 듯한 거만한 분위기였지만, 7레벨의 고위 마법사들이니 만큼,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어느새,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멜리사의 군대 5,000여 명은 400헥사(약 200미터) 앞까지 행군해 와서, 멈춰 서 있었다.
몸에 입고 있는 갑옷들은 물론, 머리에 쓰고 있는 투구며, 손에 들고 있는 긴 창의 창대들까지 온통 새하얗게 칠한 모습들이었다.
"호오! 저것도 나름대로 장관이로군요!"
메넬릭 백작가의 수석 마법사 길리오가 멋으로 길게 기른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죽기전의 수의(시체에 입히는 옷) 차림인가 보군!"
"어?"
고용된 고위 마법사 레드왈의 코웃음치는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의 동료 쿼르토가 놀란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아아아! 우와아아! ....."
"당황하지 마라!"
"사격 준비!"
"투척 준비!"
.....
여기저기서 놀라는 감탄성과 함께, 전투 준비의 구령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자신의 병력 5,000여 명을 400헥사(약 200미터) 거리에 대기시켜 놓은 채로.....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멜리사가 혼자서 백마를 타고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나마, 200헥사(약 100미터) 거리까지 오자, 말까지 놔둔 채로, 몸을 공중에 띄우더니..... 천천히 이편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11,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10명의 매기아러(마법사)들을 상대로..... 설마, 혼자서 싸우려는 건가?"
중얼거리던, 7레벨의 고위 마법사 레드왈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 멜리사는 그녀의 병력 5,000여 명을, 함께 싸우게 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서 공포를 심어줄, 관객으로 데려왔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거..... 쉽지 않겠군!"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의, 광기에 가까운 오만함에..... 뒤늦게 오싹한 긴장감을 느낀, 노마법사 레드왈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에 인상을 썼다.
[폐... 폐하! 너무 많아요! 허억!
온 들판이 병사들로..... 꽉 찬 것처럼 보여요!]
자신의 몸속에 여전히 갇힌 채인 멜리사가 벌벌 떨며, 겁먹은 목소리로 하소연하듯 말했다.
물론 머리속에서만 울릴 뿐, 밖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칠한 것처럼 붉은 색의 조그만 입술이 미소를 지으며 열렸다.
"벌레같은 미천한 것들 따위..... 아무리 많아도 전혀 위협이 되지 않노라!"
[꺄아아아악! 폐하!]
앞에 나와 있던 10여 명의 마법사들에게서, 갑자기 불덩어리와 번갯불, 얼음덩어리 등 다양한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위협적으로 날아들었다.
뒤이어, 들판을 가득 메우다시피 벌려서 있던, 병사들에게서 화살들과 투창들이, 마치 옆으로 쏟아지는 비처럼 하늘을 메우며 날아들기 시작했다.
"파시식! 푸쉬이이이익! 퍼어어억! ....."
"차캉! 차카캉! 차캉! 차카카카캉! ....."
연달아서 바로 눈앞에서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흩어지는..... 불꽃과 번개, 화살, 투창 등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멜리사는 잔뜩 겁을 먹었으나.....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는 태연한 모습으로, 새하얀 두 눈동자를 깜짝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40헥사(약 20미터)쯤 공중에 높이 뜬 채로, 위에서 내려다보니.....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 10,000명이 훨씬 넘어보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마치 개미떼처럼 보였다.
물론, 조용한 개미떼들과는 달리, 귀가 먹을 정도로, 악을 쓰듯 기합과 함성을 지르며, 죽어라 화살들을 쏘고 투창들을 던지고 있었지만.....
아무리 마법을 쏴대도 전혀 끄덕도 하지 않는, 아크 바레라(상위 방어막)의 모습에..... 앞에 나와 선 채, 마법을 연사하던 마법사들의 당황하며 놀라는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4가지 원소들의 힘을 끌어모아 사용하는 매기아(마법)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힘의 집중을 도와주는 수정구슬 지팡이가 있어야 제대로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다.
그러나, 우리 위대한 글레이셔(얼음) 일족의 가장 강력한 매기아(마법)는..... 지팡이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노라!"
특별히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멜리사는 느낄 수 있었다.
주위의 물의 원소의 힘이..... 차갑게 얼어붙으면서 자신의 몸안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의 물의 힘을 모조리 흡수해서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엄청난 기세와 규모였다.
작고 붉은 입술이 조금 열리며, 새하얀 치아들이 반짝 빛났다.
"기억해라, 멜리사! 일족의 아이여!
이것이..... 우리 위대한 글레이셔 일족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설사, 드래곤이라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최강의 매기아(마법).....
글레이셔 피니셔(얼음의 말살자)로다!"
"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작은 입에서 불어나온 끔찍한 냉기의 바람이.....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11,000명에 달하는 병력 전체를 순식간에 뒤덮어갔다.
"마그나 바레라!" (대 방어막)
"울티모 바레라!" (궁극 방어막)
"퍽썩! 퍽썩!"
"끄아아아아아악! 우와아아아악!"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7레벨의 고위 마법사 레드왈과 쿼르토가 다급하게 자신들의 최강의 방어막을 펼쳤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망치로 맞은 유리처럼, 순식간에 깨져 나가 버렸다.
그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다른 마법사들 8명의 방어막은 말할 것도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
"히히히히히히힝! 히히힝! ....."
투명한 얼음이 덮히면서, 온몸이 산채로 얼어붙는 끔찍한 감각에,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뒷쪽에 서있던 병사들과 말을 탄 기사들은 도망치려고 몸을 돌리거나, 바닥에 넙죽 엎드려 피하려고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끔찍한 냉기의 바람이..... 어느새 11,000명에 달하는 병사들 전체를 뒤덮고, 그 뒤의 빈 들판까지 온통 새하얗게 얼려 버리고 있었다.
"지이이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이잉!"
라메드 반 데스몬드 후작과 그의 아들 가슈르의 철판 갑옷들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붉은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모든 적대적인 마법을 막아주는 방어 마법이 작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눈을 네댓 번 깜빡일 정도(약 4, 5초)도 채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붉은 빛이 희미해지더니..... 투명한 얼음이 온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헉! 어어어어어어억!"
"으아아아아아아악!"
.....
[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10,000명이 훨씬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투명한 얼음이 온몸에 덮히며, 순식간에 모두 얼어 죽어갔다.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가 벌인 끔찍하고 잔혹한 광경에..... 자신의 몸안에 갇혀있던 멜리사는 비명을 지르고 또 질러댔다.
높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랑스러운 듯한 말투로 속삭였다.
"기뻐하라, 멜리사!
이제, 텅 비다시피한 저것들의 영지를 흡수해서.....
하쏘 자작령, 뮤리엘 백작령, 데스몬드 후작령, 메넬릭 백작령..... 이렇게 4개 영지를 합쳐서 글레이셔(얼음) 왕국의 성립을 선포할 때로다!
위대한 대제국 글레이셔의 부활로 가는 첫 걸음이로다!"
[흐흐흑! 흐흑흑흑흑흑흑!]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겁먹은 울음을 터뜨리며, 멜리사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500여 년전, 글레이셔 제국 당시에, 우리 글레이셔 일족은 최소한 몇 천명이었잖아요, 폐하!
지금은 저 혼자뿐인데..... 흐흐흐흑! 무슨 수로..... 제국을 부활시켜요? 흑흑!]
새하얀 오똑한 코 아래의, 작고 붉은 입술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틀림없이, 살아남은 자들이..... 숨어 있는 우리 글레이셔(얼음) 일족의 자들이 더 있을 것이로다!
글레이셔 왕국의 부활을 널리 선포하면..... 그들이 찾아올 것이로다!
그들을 모으고, 그대의 머리 속에 있는 매기아(마법) 지식을 가르쳐라!
그대의 당대에는 어려울지 몰라도..... 이제, 짐의 위대한 글레이셔 제국은 다시 부활해, 세상을 지배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로다!
자! 4개 영지의 중앙에 위치한 이곳 쟈마라 평원(넓고 평평한 들판) 위에, 화려한 캐츄 데 글레이셔(얼음의 성)를 지을 때로다!
글레이셔(얼음)의 건축물들은..... 단순히 마력을 과시하는 장식물들이 아니로다!
그것들은 주위의 물의 원소의 냉기의 힘을 끊임없이 모아, 우리 글레이셔 일족에게 나누어 주어, 우리 일족들을 점점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도다."
황제가 차지하고 있는 멜리사의 몸이 좀더 위쪽으로 떠올라 200헥사(약 100미터) 높이까지 올라왔다.
수정구슬 지팡이로 아래쪽의 평원을 가리킨 황제가 멀리 울려퍼지는 목소리로, 중얼중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이전에 환상 속에서 들었을 때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지금의 멜리사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달전 수정동굴 안에서 수정조각을 잡은 채 "받아들인다!" 라고 말했을 때, 머리속으로 들어온 방대한 지식중의 일부로서..... 멜리사도 이제는 잘 알고 있는 주문이었다.
"스르르르르르륵! 스르르르르! 스르르르르르르륵!"
주변의 물의 원소들의 힘이, 저 아래쪽에서 하나로 모이며, 서로 결합되어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넓은 평원 위에, 하얀 덩어리들이 만들어지더니, 하나로 뭉치면서 점점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10헥사, 20헥사...... 무려 40헥사(약 20미터) 높이로 높이 솟아오른 새하얗고 거대한 얼음의 덩어리가 이번에는 옆으로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높이 40헥사(약 20미터)에, 지름이 무려 2,000헥사(약 1키로)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의 캐츄 데 글레이셔(얼음의 성)가 높이 솟아 올랐다.
80헥사(약 40미터) 높이의, 6개의 탑들이 가장자리를 빙돌며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척! 척! 척! 척! 척! 척! ....."
싸움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던, 새하얀 갑옷 차림의 병사들 5,000여 명이, 백마를 탄 지휘관들의 지휘에 따라, 바로 앞까지 발맞춰 행군해왔다.
말에서 내린 지휘관들이 바닥에 왼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무릎을 꿇으며, 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들을 숙였다.
뒤따라, 5,000여 명의 병사들도 모두 무릎을 꿇으며, 깊숙히 고개들을 숙였다.
눈앞에서 연거푸 펼쳐진, 초월적이고도 무시무시한 광경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병사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가 속삭였다.
"명심해라, 멜리사!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어리석고 힘든 법이다!
힘이 아니라..... 힘이 가진 공포로 모든 것을 지배하라!
죽여야 할 때는 망설임없이 죽이고, 부숴야 할 때는 가차없이 부숴버리며..... 그 모습을 가능한, 많은 미천한 것들이 보고 공포에 떨게 하라!
그러한 공포야 말로..... 불과 5,000명을 채 넘지 못했던 우리 글레이셔 일족이 1,000만 명에 달하는 대제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이제 멜리사 그대가 혼자서 왕국을 통치할 수 있게 해줄..... 가장 강력한 무기로다!"
[흐흑흑흑흑흑흑! 하지만, 저는..... 저는.....
사람들을 더이상 죽이고 싶지 않아요! 흑흑흑! 흐흑흑흑흑흑흑흑!]
차마, 왕국이나 제국같은 걸 원하지 않는다고 황제에게 말할 수는 없었던 멜리사는..... 울면서 황제에게 하소연했지만, 황제가 차지하고 있는 멜리사의 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뒤로 돌아갈 수 없도다!
위대한 우리 글레이셔 일족의 후손이자, 일족의 힘을 계승한 자여!"
........................................................................................................................
새하얀 드레스 차림에, 머리에는 투명한 수정왕관을 쓴 멜리사가 - 정확히는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가 투명한 얼음의 옥좌 위에 앉아 있었다.
얼음으로 된 투명한 옥좌였지만, 전혀 차갑지도 미끄럽지도 않았다.
마법으로 성을 만들 때..... 물의 원소의 힘 외에도, 흙의 원소의 힘을 약간 끌어다 섞어서, 얼음이면서도 얼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걸 멜리사도 잘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신기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쟈마라 평원에서의 전투 - 내지는, 대학살이 있은 후, 벌써 두 달여..... 하쏘 자작령과 뮤리엘 백작령에 이어, 영주들과 함께 거의 전병력이 몰살당한, 데스몬드 후작령과 메넬릭 백작령도 순조롭게 흡수되었고.....
이웃한 모든 영지들과, 유명무실한 노르드 왕실에, 총 인구가 8만여 명에 달하는 글레이셔(얼음) 왕국의 성립을 선포하는, 수십 명의 사절들이 보내졌다.
왕국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하라는, 선포라기보다는 협박이었으나..... 모든 사절들이 글레이셔 왕국의 성립을 인정한다는 정중한 답변들과 함께 돌아왔다.
4개 영주령에 남아있던 귀족들의 찌꺼기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학살당했고, 더 이상은 아무런 장애요소가 없었다.
물론, 수백 년 동안 갈라져 있었던 4개의 영주령을 단기간에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고, 모든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황제는 조그만 왕국 하나를 세우는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 쉽게 쉽게 일을 진행해 나갔다.
황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거나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 자는 가차없이 죽여버리고, 다른 자에게 다시 그 일을 맡긴다는.....
아주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폐하! 사람들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조그만 마을들조차도 남자들은 모두 무장을 집에 갖추게 하시고, 직업 병사들까지 치안대로 몇 명씩 두게 하시다니 납득이 가질 않아요!]
"모두 물러들 가라!"
"예, 퀴인 리지(여왕 폐하)!"
옥좌의 양옆에서 호위하고 있던, 새하얀 갑옷 차림의 병사들 20여 명이 넓은 홀(넓고 큰 방) 밖으로 나가자.....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가, 부드러운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돼지 우리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치는 것이로다."
[예?]
"돼지들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으니, 꿀꿀거리며 불평을 하든 말든, 가시 울타리를 둘러쳐서 보호해 주는 것이로다.
처음에는 꿀꿀거리겠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산적들이나 괴물들, 맹수들 따위에 시달릴 일은 없으리로다.
시행 상태를 종종 점검해서, 부실한 마을의 대표들은 가차없이 목을 쳐라.
그리고, 모든 마을들에 씨타씨온(소환) 매기아(마법)가 담긴 종이들을 배포하라!
천천히, 하지만..... 작은 마을들까지 가능한 빠짐없이.....
그 종이들을 찢으면, 그대에게 신호가 오면서 동시에 트랜스포라(장거리 이동)에 필요한 좌표를 알려주게 될 것이로다.
물론, 자기들 힘으로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산적이나 괴물들 따위에 그대를 부른 미친 것들이 있으면..... 그런 것들은 반드시 죽여야 하노라."
[저..... 저는.....]
자신의 몸속에 갇힌 멜리사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요 석달간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사실..... 무섭고 끔찍하다고만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수익이나 생산의, 100을 기준으로, 50에서 70까지 달했던 세금을 40 정도로 낮춰주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니.....
고대 왕국들의 시대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가 나았었군요!]
새하얀 아름다운 얼굴에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가 대답했다.
"위대한 매기아(마법)의 힘이로다!
우리 위대한 글레이셔 일족은 숫자가 얼마 안될뿐 아니라.....
치안대 이외에, 머릿수만 차지하는 쓸모없는 병력들을 많이 유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로다.
필요 이상으로 쥐어짜서, 쓸모없는 삐쩍마른 돼지들로 만들 필요는 없노라.
다만, 미천한 것들의 목을 휘어잡고 있는, 공포라는 굴레를 늦춰서는 안될 것이로다."
사람들을 정말로 가축 이하로 생각하는, 오만하고 잔인한 대답에 오싹함을 느끼면서도..... 멜리사는 한편으로는 황제의 말에 동감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짐은 떠날 시간이로다!
자랑스런, 우리 일족의 후손, 멜리사여!"
[폐... 폐하!
안돼요! 저 혼자 두고가지 마셔요!]
황제가, 그의 의지가 떠날 때가 됐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겁에 질린 멜리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몸을 대신 차지하는, 이 매기아(마법)는 90일밖에 가지 못 하노라!
이제 어쩔 수 없노라!
작별의 시간이로다!"
[잠시만요, 폐하!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제껏, 제게 친절했던 사람들은..... 심지어는, 괴물들조차도 전부 죽어 버렸어요!
이런 일들은 전부 우연의 일치였나요?
아니면.....]
자신의 몸속에 갇힌 멜리사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렸다.
[제가..... 정말로, 죽음의 저주를 부르는 "눈의 요정이 버린 아이"이기 때문이었나요?]
작고 붉은 입술에 냉소적인 미소가 어렸다.
"눈의 요정이 버린 아이? 미천한 것들이 우리 일족을 부르는 말인가?
그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어쩌면 그럴 수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뿐이로다."
[예?]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멜리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의 대답이 이어졌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같은 글레이셔(얼음) 일족간에는, 서로 사랑하고 결혼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 뿐이로다.
사실, 우리 글레이셔 일족이 일족들끼리만 결혼해 온 것은..... 일반인들과 결혼하면 거의 틀림없이 일반인의 아이가 태어나 버리는 문제 때문으로.....
우리 글레이셔 일족이.....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미천한 일반인들은 죽게되는, 죽음을 부르는 자들로 자처해 온 것은, 아마도 미천한 것들을 지배하기 쉽도록,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높도다."
[그... 그렇다면.....]
머리속에서 울리는, 멜리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황제의 대답은 계속 이어졌다.
"무려 1,000년이 넘게, 죽음을 부르는 자들로 자처해 오면서..... 우리들 자신도, 미천한 일반인들은 우리와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죽게 될 거라고 믿어온 것 또한 사실이었노라.
그러니..... 어느 쪽이 진실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로다."
[그렇군요.]
자신의 몸속에 갇혀있는 멜리사의 들리지 않는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로다!
위대한 글레이셔 일족의 후손 멜리사여!
위대한 글레이셔 제국을 꼭 부활시켜 다오!"
[잠시만, 폐하! 안 돼요!]
"가지 마셔요! 가지 마셔요!"
마지막 말들은..... 석달만에 처음으로 입밖으로 튀어나온 말들이었다.
느낄 수 있었다.
석달간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 함께 했던 황제가..... 그가 남겼던 의지가.....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걸.....
옥좌위에서 내려와, 얼음 바닥에 무릎을 꿇은 멜리사가 울음을 터뜨리며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폐하! 저는 아직도 너무나 약해요! 흐흑흑흑흑!
저 혼자서..... 흑흑흑! 백성들이 8만 명이나 되는, 이런 큰 왕국을 무슨 수로 다스려요!
게다가, 우리 글레이셔 일족의 글레이셔 제국은..... 위대한 글레이셔 제국은..... 흐흑흑! 흐으으으윽!"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멜리사의 가냘픈 몸이 떨리며, 흐느낌이 더욱 심해졌다.
"이미 다시는..... 부활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제가 유일하고도, 마지막으로 남은..... 일족의 후손이니까요!
설사, 숨어있던, 한 두 사람을 찾아낸다고 해도..... 제 몸은, 젖가슴도, 성기도 전부 뭉개져 버렸는데, 어떤 남자가 저와 결혼해 주겠어요? 흐흑흑흑!
으흑흑흑흑흑흑흑흑흑!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멜리사의 비명같은 긴 절규가 텅빈 얼음의 홀 안에 길게 울려 퍼졌다.
........................................................................................................................
"레이나 스타크와 그녀의 두 아들 밥과 에반을 찾아서 데려왔습니다, 퀴인 리지(여왕 폐하)!"
새하얀 흉갑옷(가슴과 몸통을 가리는 갑옷)에 새하얀 옷차림의 고급 장교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보고했다.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 애썼지만, 눈처럼 새하얀 퀴인(여왕)에 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으로, 손끝을 가볍게 벌벌 떨고 있었다.
"들어오게 하라!"
새하얗게 칠해진, 홀의 나무문이 열리며, 역시 새하얀 갑옷을 입고 있는 네 명의 병사들이..... 누더기를 걸친 삼십대 중반의 여자와, 역시 누더기 차림의 두 꼬마들을 안으로 데려왔다.
뼈만 남은 것처럼 앙상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비참한 모습에, 멜리사의 새하얀 두 눈동자가 충격으로 커졌다.
"보비(밥의 애칭)? 보비!
좀더 일찍..... 좀더 일찍, 생각해 냈었어야 했어!
보비! 보비!"
눈물이 새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거대한 캐츄 데 글레이셔(얼음의 성)의 모습에 기가 질린 듯 벌벌 떨며 들어온, 레이나 스타크가 옥좌 앞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큰 소리로 빌기 시작했다.
아주 짧고 야한, 누더기같은 갈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퀴인 리에(여왕님)!
퀴인 리에를 때린, 무엄한 짓을 했던 그날은..... 제가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남편이 마차에 치여 죽어서, 정신이 나가서 그만.....
설사, 저를 죽이시더라도, 제발 이 아이들만은.....
제 남편인 레기날드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이 아이들만은 살려 주십시오, 퀴인 리에(여왕님)!"
하쏘 자작가를 포함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앞에 엎드린 채..... 레이나 스타크는 울면서 자비를 간청했다.
얼음의 옥좌 위에 앉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멜리사의 눈처럼 새하얀 아름다운 얼굴은 무표정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흐흑흑흑! 흑흑! 그날 몇 대 맞은 복수를 하려고 부른게 아니어요, 레이나 마님!
어떻게 지내시나 알아봤더니, 빵집 문을 결국 닫고 싸구려 창녀짓을 하면서 힘들게 살고 계시다고 해서.....
그래서..... 모셔온 거에요!
제가 어떻게..... 흐으윽! 제가 어떻게..... 레기날드 주인님을 잊을 수 있겠어요! 흐흐흑흑흑흑!"
"어? 멜리사 누나다!
멜리사 누나인데, 머리카락이 갈색이 아니라 하얀 색이야, 마미(엄마)!"
아버지인 빵집 주인 레기날드를 닮은, 착해 보이는 파란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금발의 여덟 살 꼬마 보비가 용케도 3년만에 보는 멜리사를 알아본 듯 했다.
삐쩍마른 지저분한 몰골이, 영락없이 거지 꼬마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니야! 저 분은 멜리사 누나가 아니야!
어서 고개를 숙이고, 살려달라고 빌렴!
저 분은 아주 무서운 퀴인 리에(여왕님)시란다!"
누더기같은 갈색 드레스를 입은 레이나가 다급하게 어린 아들의 머리를 손으로 눌러 숙이게 하며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두 살의 아기였던 다섯 살의 에반은 멜리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겁먹은 얼굴로 엄마가 시키는 대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붉고 작은 입술이 열리며,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죽이려고 부른 것이 아니다!
네 남편에게 작은 빚이 있으니, 그 빚을 갚을 뿐.....
이걸 갖고, 돌아가라!"
새하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자, 멜리사의 옆에 서 있던, 새하얀 옷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묵직한 자루 두 개를 내밀었다.
금화와 은화로, 합쳐서 100,000세테르의 돈이 들어있는 자루들이었다.
50세테르 정도면, 평범한 가정의 한달 생활비로 잡을 수 있었으니..... 낭비하지 않으면, 100년치 생활비가 훨씬 넘을 거액이었다.
"고맙습니다, 퀴인 리에(여왕님)! 고맙습니다!"
"멜리사 누나가 맞는데.....
나, 보비야, 누나!
멜리사 누나!"
"아니라니까!
가자, 보비! 빨리 따라와, 에반!"
자루 두 개를 받아든 레이나가 겁먹은 표정으로, 도망치듯 아이들을 재촉했다.
이상한 표정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며, 홀을 빠져나가는 금발머리의 꼬마 보비를..... 얼음의 옥좌 위에 앉은 멜리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3년전 레기날드의 빵집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어서 가, 보비!
어서 가서..... 마미(엄마)와 동생과 같이, 행복하게 잘 살아!
누나와 가까이 해서는 안돼!
널..... 죽게 만들지도 모른단 말이야! 흐으윽! 흑흑! 어엉엉엉!"
자꾸만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멜리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집사장!"
"옛, 퀴인 리지(여왕 폐하)!"
뮤리엘 백작가에서 집사 일을 했으며, 지금은 멜리사를 섬기고 있는, 새하얀 옷차림의 로암 리슬리가 깜짝 놀라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저 여자는..... 별로 똑똑한 여자가 아니다.
누군가 적당한 사람을 보내줘서, 풍족한 생활을 잘 꾸려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라!
사는 걸 간섭하지는 말고.....
사는 모습을 종종 보고하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관련된 자들 모두, 그 가족들까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예, 폐하!
예, 폐... 하!"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가 직접 내리는 벌은..... 오직 한가지, 죽음뿐이었다.
잔뜩 겁을 먹고, 온몸을 벌벌 떨면서, 집사장 로암은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
"으아아아아아아! 왜?
도대체, 왜 바레라(방어막)가 뚫리지 않는 거야?"
새하얀 수염을 길게 기르고, 검은 로브(헐렁하고 긴 겉옷)를 걸친,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 쟈레드는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주위에는, 10명의 제자들이..... 이미 머리가 박살나버린 시체들이 되어,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눈처럼 새하얀 백색의 다크 매기아러 멜리사가 투명한 얼음의 옥좌 위에 앉은 채,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2레벨의 바레라(방어막)가 아니라, 9레벨의 아크 바레라(상위 방어막)거든."
"9레벨?"
쟈레드의 파란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며, 턱이 빠질 듯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최종 레벨인 9레벨의 마법은..... 지금보다 마법이 훨씬 발달했던 고대 왕국들의 시절에도, 도달한 마법사들이 몇 명 없었다고 전해지는, 거의 전설적인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중 가장 파괴력이 강한, 8레벨 마법 "다쓰 보르티온"(죽음의 소용돌이)이 어째서 멜리사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는지.....
이미 숱한 강력한 마법사들을 함께 해치워 왔으며, 전원이 5레벨 이상의 고위 마법사들인 그의 제자들 10명이..... 어째서, 겨우 2레벨 마법인 글레이셔 란자(얼음의 창)를 막지 못하고, 차례로 시체들로 변해 갔는지.....
"충성을 맹세합니다, 퀴인 리지(여왕 폐하)!
신하로 섬기..."
"글레이셔 란자!" (얼음의 창)
"퍼억!"
쟈레드의, 8레벨 마법 "마그나 다쓰 바레라"(위대한 죽음의 방어막)가 장난처럼 쉽게 뚫려 버리며..... 머리가 날아가버린 시체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10명의 제자들과 함께, 다른 마법사들을 죽이고 마법연구 성과와 지식을 빼앗는 짓을 거듭해 오며, 매기아러 도살자로 불리기까지 했던, 악명높은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치고는..... 참으로 허무한 최후였다.
"너처럼 미천한 것의 충성 따위는..... 필요없다!"
작고 붉은 입술이 열리며, 옥좌 위의 멜리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시체를 향해 대답했다.
글레이셔(얼음) 왕국의 성립을 선포한지 벌써 2년이 넘어, 이제는 왕국도 확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건만..... 역시나 글레이셔(얼음) 일족의 사람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갑작스럽게 출현한, 젊은 여자 다크 매기아러를 만만하게 생각한 다크 매기아러(흑마법사)들만이..... 그녀가 가진 다크 매기아(흑마법) 지식을 욕심내고, 종종 쳐들어오곤 했다.
글레이셔 제국의 부활을 바랬던 황제의 뜻과는 달리, 멜리사는 더이상 정복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도와줄 다른 글레이셔 일족의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더 이상 왕국을 넓힐 여력도 없었거니와.....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전해오는 다크 매기아러들은 살려줄 수 없었다.
인구 8만 명의 작지 않은 왕국을 혼자서 다스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힘이 아니라, 힘이 가진 공포라는 것을, 이제는 멜리사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대로..... 이렇게 혼자서 살다가, 죽어버리는 건가?
힘이 있든 없든..... 너는 눈의 요정이 버린 아이, 재수없는 괴물일 뿐이야, 멜리사!
오히려, 어쩌면 힘을 가진, 지금의 이 모습이야말로..... 전보다도 더한 괴물일지도.....
아무리 강한 힘을 가져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물이 있어도.....
행복이란..... 나같은 괴물이 사기에는 너무나 비싼 것인가?"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멜리사의 새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은 무표정할 뿐이었다.
공포로 모두를 다스리고, 모두 위에 군림하는 퀴인(여왕)은..... 눈물이 없는 존재여야 했다.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
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태그 | |||
황진이-무료한국야동,일본야동,중국야동,성인야설,토렌트,성인야사,애니야동
야동토렌트, 국산야동토렌트, 성인토렌트, 한국야동, 중국야동토렌트, 19금토렌트 |
추천 0 비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