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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48 302회 0건
집사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디지털퍼머가 무어라 대꾸하기 위해 입술을 들썩였으나 헛숨만 들이켰을 뿐이었다.
쇼트웨이브는 팬포커스를 맞춘 광각렌즈처럼 동공 깊숙한 곳까지 심도를 키운 시선으로 커피를 만드는 여자의 작업을 주시했다.
"저걸 마시고 죽는다면..집사님 말처럼 말이예요, 저 커피를 마시고 죽는다면요."
쇼트웨이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요?"
"흠.."
집사가 한숨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소리를 내며 바에 기댔던 몸을 세웠다.
"그건 좀 어려운 질문인데요. 우선 쓸데없는 오해를 하지 않으시도록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아가씨들께서 커피 따위를 드시고 죽게끔 내버려둘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초대한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집사가 작은 소리로 웃고 나서는 말을 이었다.
"비록 저 커피의 독성이 매우 위험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사히 살아서 커피 맛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집사가 손 끝으로 노크를 하듯 바를 두드렸다. 여자가 손을 멈추고 집사를 쳐다보았다.
"그걸 보여줘."

여자는 전혀 서두는 기색없이 집사와 그녀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선반으로 가서 문갑처럼 얄팍한 직사각형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여자는 그녀들 앞에 상자를 놓고서 뚜껑을 열어 상자 안을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주사기 하나가 푹신한 자주빛 빌로드 안감에 반쯤 파묻혀 있었는데, 개틀링 기관포의 총신만큼이나 길게 늘어진 금색 바늘이 꽂혀 날카롭게 번쩍이고 있었다. 코발트를 섞어 주조한 듯 노란 광택을 띤 두터운 마판 유리 실린더엔 레몬색 눈금이 촘촘히 그려져 있었고, 구리로 만들어져 보기에도 무겁게 생긴 플런저가 그 안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주사기 옆에는 앰풀로 보이는 조그만 유리병이 고무나 가죽으로 보이는 마개로 입구가 봉해진 채 얌전히 놓여있었다.
"바로 이거죠."
집사가 주사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가 이거란 말이예요?"
디지털퍼머가 눈쌀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사히 커피를 즐기는 방법 말입니다."
집사는 디지털퍼머를 향해 말을 하면서 동시에 손을 까닥여 여자에게 신호를 보냈다.
여자는 다시 선반으로 돌아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불투명하고 지름이 넓은 유리병을 꺼내 왔다. 여자가 그것을 바 앞에 내려놓고 마개를 열자 그녀들은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보려고 동시에 고개를 내밀었다. 병 안엔 메추리알로 보이는 새 알들이 담겨 있었다.

"메추리알 아녜요?"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메추리알 입니다."
쇼트웨이브가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뭐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집사가 손으로 자기 뺨을 한번 문질렀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독이 있으면 해독하는 물질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해독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시아나이드 중독을 해독하는 아밀나이트라이트처럼 독과 화학결합을 하여 해독하는 물질이 있는가 하면 벤조디아제핀을 해독하는 플루마제닐처럼 약리적인 길항작용을 통해 해독하는 물질도 있습니다."
집사가 눈가에 가늘게 주름을 잡았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신경성 독은 항체에 의해 해독되기도 합니다. 누가 뭐래도 면역시스템이야말로 가장 치밀한 방어장치니까요. 전갈이나 붉은 등 거미, 코브라의 독같은 펩타이드 톡신을 중화하는 안티베닌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해독용 항체지요. 이 방법은 대단히 효과가 좋습니다. 작용범위도 선택적이고 속도도 빠르구요. 그래서 우리도 바트라초 톡신을 해독하기 위해 항체를 얻어내기로 했었습니다."
집사는 잔기침을 몇번 하고는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호스트가 무제한적으로 널려 있는게 아니었으니까 그중 가장 적절한 놈을 골라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꿩이었지요."
집사는 메추리알이 든 통을 가리켰다.
"우리는 꿩들을,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주의깊게 산출한 극소량의 바트라초 톡신에 노출시켰습니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살아남는 놈들도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거지요. 하지만 매우 적은 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성이 워낙 강한 탓인지 바트라초에 노출된 꿩들은 얼마 못 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생겼지요. 실험을 했던 꿩들 중엔 까투리들도 섞여 있었는데요, 이 암꿩들 중 몇몇이 죽기 전에 알을 낳았던 겁니다."
집사가 짖궂은 웃음기가 잔뜩 담긴 눈길로 그녀들을 보았다.

"대충 예상이 되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그 놈들이 낳은 알들 속에 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항체가 형성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바트라초에 중독된 까투리들이, 그 척박한 환경에서 새끼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항체를 형성시켜 놓고 죽은 거지요."
집사는 기특하지 않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그녀들은 어미 꿩들의 희생이 측은한 나머지 이런 쓸데없는 실험을 주도한 자를 붙잡아 턱주가리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집사가 말을 이었다.
"항체는 주로 난백에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해독제로 사용하는 방법을 보여드리지요."
여자가 주사기를 꺼내더니 앰풀의 마개 속으로 바늘을 꽂았다. 그리고 눈금을 보며 세심하게 플런저를 뽑아 앰풀 속의 액체를 실린더에 채웠다.
"저건 혈장 용해액입니다. 난백을 그대로 쓸 순 없으니까요. 뭐랄까, 해독제를 순수하게 만들어준다고나 할까요."

여자는 앰풀에서 바늘을 뽑더니 이번엔 메추리알을 하나 집어 가볍게 바늘 끝으로 껍질을 깨며 알 안쪽으로 주사기를 찔러넣었다.
"저건 흰자를 뽑아 올리는건데요, 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너무 깊이 찌르거나 너무 오래 빼내면 실린더 안에 노른자까지 딸려오니까요. 그러면 해독제를 못 쓰게 되지요. 그렇다고 주사기를 너무 빨리 빼면 충분한 양의 항체를 채취할 수 없습니다."
마치 노련한 간호사처럼 여자가 눈금을 확인한 다음 바늘을 빼고는 필요 없어진 메추리알을 버리고, 다른 알을 하나 집어 같은 방식으로 주사기를 찔러 넣어 흰자를 뽑아냈다. 이윽고 적절한 양의 난백이 실린더에 차자 여자는 주사기를 거꾸로 세우고는 플런저를 약간 밀어 주사액과 함께 실린더에 혼입된 공기를 빼냈다.
"자, 이것으로 해독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잠깐만요."
쇼트웨이브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집사님 말씀은 독이 든 커피를 마신 다음에 저 해독제를 맞는다 이건가요?"
"맞습니다."
어이가 없어진 쇼트웨이브가 잠시 입을 벌리고 집사를 쳐다보았다.
"대체 왜 그래야 되죠?"
"왜라니요. 바로 커피를 맛보기 위해서지요."
마치 산을 타는 이유가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당당한 목소리로 집사가 대답했다. 디지털퍼머가 곧바로 대꾸했다.
"아니, 어떤 미친 사람이 커피 하나 먹자고 주사까지 맞나요. 네? 이 커피가 아무리 맛있다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마셔야 할 필요가 있냐구요."
집사가 반질반질한 바의 표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작은 아가씨의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이 곳에서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냐구 물으셨죠."

여자는 주사기를 한 쪽에 내려놓은 후 손님들의 얘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듯 자기 일에 다시 집중했다. 멧돌을 원래대로 겹쳐 놓고는 윗돌을 잡아 대패로 나무를 깎듯이 밀고 당겨서 밑돌과 마찰을 시키자 그 사이에 낀 원두가 갈려서 받쳐 놓은 그릇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 다릅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죽음이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 아가씨들을 처음 만났을 때 삶과 죽음은 항상 혼재되어 있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 어쨌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디지털퍼머는 잠자코 집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살아있는 건가요? 살아있다면 얼마나 살아있습니까. 이제 막 숨을 거두려는 노인은 살아 있는 겁니까. 살아 있다면 또 그는 얼마나 살아있는 거지요? 사람들은 도무지 그 삶이란 것의 총량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집사가 너희들도 그렇지 않냐는 얼굴로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어딘가에서 숨쉬고 있는 평범한 사람은 살아있는 건가요, 아니면 점차 죽어가는 건가요? 물론 아가씨들한테 결론을 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건 정답이 없으니까요. 이것이 헷갈리는 이유는 질문 자체가 말만 다를 뿐 전적으로 똑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간다는 것과 죽어간다는 것이 동어반복이라는 것을 이해하시겠어요?"
"그래서요?"
"그것이 우리의 관점이라는 겁니다. 그 관점에서 죽음이란 곧 생활입니다. 자, 우리를 보세요. 아가씨들까지 포함해서요. 어떤가요? 살아있나요?"
살아있냐니,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을 잡기 힘들었지만 디지털퍼머는 갑자기 몸이 오싹해졌다. 집사는 윤리학을 처음 수강하는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선생님처럼 열기를 띠었다.
"나라면 모두 다 살아있다고 말하겠지만 매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누군가라면 모두 다 죽어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곳은 그런 종류의 공간입니다. 생기를 거부하는 곳이지요. 아가씨들께서 이곳에 들어왔을 때를 상기해 보십시오. 생기를 죽이는 작업을 거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 때문에 이곳을 죽음의 공간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집사의 제스처가 빨래 터는 주부처럼 점차 현란해졌다.
"죽어 있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입장은 아가씨들께서 예전에 살던 곳에서 취하던 입장과 완전히 상반된 것입니다. 예전엔 살아있다는 것이 죽어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죽어 있다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이 곳에서 거꾸로 물구나무 서있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과 죽어간다는 것은 이 곳에서도 정확히 동어반복입니다."
알 듯 모를 듯한 집사의 언변이 계속되고 있었다. 쇼트웨이브는 당치도 않은 집사의 궤변 속에서 쓸데없는 수식어를 모두 뺀다면 대체 뭐가 남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삶이 없다면 죽음도 없습니다. 이 곳에서의 삶을 부정한다면 죽음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너도 나도 모두 죽어있으면서 영원히 그저 그런 상태로 살아있는 거지요. 열량이 다한 반딧불처럼 존재가 희미해지는 겁니다."
집사가 갑자기 거칠게 손뼉을 치며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우리를 보세요. 존재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도 주고 받고 또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 말입니다."
쇼트웨이브는 집사의 말에서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이질적인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있다는 걸 증명할 증거가 필요한가. 이 곳은 그 증거를 찾기 위해서 이 어려운 논리를 끌어대야 할 만큼 죽어 있는 곳인가..
쇼트웨이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것이 죽음의 의미군요. 살아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강력한 증거. 죽을 수 있으니 살아있다는 거군요. 그렇죠?"
집사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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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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