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돌자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작업을 하며 내는 소음이 더욱 크게 들려왔다. 집사는 콧수염을 몇 번 매만지더니 가만히 입을 떼었다.
"작은 아가씨 말씀은 내가 한 얘기를 다분히 악의적으로 해석한 겁니다. 우린 자살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살아있다는 결론을 끌어내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논리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내가 아가씨들한테 하려고 했던 말은 그런게 아니라, 삶과 죽음이란 것은 반대되는 말처럼 여겨지기는 하지만 사실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가지는 완전히 떼어버릴 수도, 완전히 섞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아있다고 믿는 순간조차도 살아왔던 분량만큼 죽어간 것이니까요."
쇼트웨이브는 집사의 각진 턱과 날카롭지만 기름진 눈매를 바라보았다. 집사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그녀를 탐색하고 있었다.
"글쎄요, 집사님의 설명이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지 않나 싶어요. 죽어있으니 살아있는거라뇨. 이렇게 애매모호한 말이 어디 있겠어요. 그보다는 집사님께서 악의적으로 해석했다고 비난하셨던 제 판단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옆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겼다.
"저로서는 솔직히 그렇게 여겨지는걸요. 집사님은, 아니 이 도시에서 사시는 분들은 애써서 죽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던게 아닐까요. 아까 말한대로 죽을 수 있다면 살아있는 것이니까요."
그녀는 손가락을 흔들어 주의를 집중시켰다.
"저희들이 처음 여기에 왔을 때 가장 혼란스러웠던 점 중에 하나도 저희가 정말로 죽었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듣기에 이 곳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어떤 틈새라고 하던데, 죽어야 온다고 알고 있는 이 곳에 진짜로 죽어서 온건지, 언뜻 느끼기엔 살아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도 없는데 실상 살아있는건 아닌지, 과연 저희가 어떤 상태로 이 곳에 있는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시스템 내에서 시스템을 확인해 볼 길은 없는 것이니까 살아있는 것을 알아보는 방법은 시스템을 벗어나는 것, 그야말로 죽어보는 수 밖에는 없는 거지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별 표정없이 앞을 응시했는데 거기엔 열심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디지털퍼머가, 그리고 그녀의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열심히 커피만 만들고 있는 카페 주인이 정물화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집사님께서는 이 곳에서 죽음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오히려 죽음은 소중한 것이라고 하셨어야 옳은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이 경우 이 곳에서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되는 것이니까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희망. 살아있다는 희망, 또한 이 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요. 죽을 수 있다면 죽음이야말로 이 곳을 탈출하는 확실한 수단이 될테니까요."
그녀는 아랫 입술로 윗 입술을 덮어 침을 축이고는 옆 눈으로 살짝 집사를 쳐다보았다. 디지털퍼머는 그러한 무의식적인 얼굴 움직임이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대단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전 이런 행위, 그러니까 커피에 독을 타서 마시는 것 같은 위험천만한 행위는 이 도시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 예컨대 집단 무의식적인 기저로부터 발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걸 집사님이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말이예요. 이것은 저희가 제천시에 오기 전에 보았던 월명사라는 절과도 비교되는 상황인데..생각나시죠? 집사님이 어젯밤에 설명해 주셨던 그 절이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집사님 설명에 의하면 그 절에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거였어요. 그렇죠? 그들의 고통은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범죄를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저주가 걸려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를 탈출할 수 없는 고통 말이예요. 그들이야말로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니죠. 집사님 말 마따나 반딧불처럼 희미한 존재가 된 거라고나 할까요. 제가 보기엔 이 도시도 기본적으로 그러한 고통을 공유하고 있어요.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이 공간에서 얼마나 지내야하는지, 영원히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고통이지요. 그러한 고통과 불확실성이 이렇듯 치명적인 커피를 만들게끔 한 것이예요. 아무것도 아닌 기호품 하나에도 극단적인 죽음의 칼날을 심어 그것으로써 이 공간의 구속을 돌파하려 하는 거죠."
쇼트웨이브는 잠시 집사의 반응을 살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그 절의 중들과 이 도시 사람들이 다른 것이 있다면, 그건 이 도시 사람들은 자의적으로 선택해서 이 생활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겠죠. 이런 종류의 자살 수단을 통해서요. 바트라초 톡신은 그런 면에서 이 도시 사람들을 결속시켜 주고 힘을 줘서 생활을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걸 거예요."
집사가 쇼트웨이브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쇼트웨이브는 그 웃음이 대단히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예기치 않던 커다란 웃음이었으므로 적잖이 당황했다.
"감동적인 말씀이었습니다만 잘못 짚으셨습니다. 작은 아가씨 말씀은 소설에 가까워요. 우리가 죽음에 대해 본능적인 친밀함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죽음을 희망이라고 여기는 증거는 아닙니다. 대체 우리가 왜 죽음을 희망이라고 여기겠어요. 우리에겐 삶이 희망입니다. 아가씨들처럼 우리 역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예요."
삶을 얘기하는 집사의 눈이 이상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그가 다시한번 웃자 그 이상한 번뜩임은 가늘어진 눈꼬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작은 아가씨께서는 아마도 우리가 위험해 보이는 커피를 마신다는 것에서 우리가 자살충동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의심하신 모양인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자는 원두가 곱게 갈아지자 그것을 그릇에 털어내고 남아있던 원두를 모두 모아 다시 밑돌에 깐 다음, 같은 방법으로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돌과 돌이 부딪히는 거친 마찰음이 실내를 채웠다.
"음식 문화나 식습관에 대해 작은 아가씨께서 간과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예요. 우리가 이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혹은 커피를 이렇게 위험하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 욕망 때문입니다. 위험한 것일수록 입맛을 끄는 유혹이 강해지는 법입니다."
집사가 의자 위에서 몸을 약간 움직여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애프리코트 스톤티(주: 살구씨로 만든 차, 행인차)나 복어요리도 그런 종류의 음식이지요. 살구씨에 들어있는 아미그달린은 시안화물, 말하자면 청산가리입니다. 이것이 독성을 발휘하지 않는 이유는 청산가리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포도당과 알데히드의 화합물로 존재하기 때문인데요, 행여 이걸 마셨을 때 재수없게도 체내에서 포도당 분해효소를 만난다면 그때 비로서 아미그달린으로부터 청산가리가 분리되어 숨겨져 있던 맹독성을 드러내게 된답니다. 청산가리를 마시는 셈이니 참으로 위험하겠지요? 그러니 이 차의 한모금 한모금이 얼마나 독특하고 맛있겠습니까."
집사의 손이 움직이자 손가락 사이에서 어제 보았던 빈 담뱃대가 튀어나왔다. 그는 희귀한 아바나 시거의 향이라도 맡듯이 담뱃대 끝을 코에 갖다대고 숨을 깊숙히 들이마셨다.
"복어요리는 한술 더 뜨지요. 아시다시피 동양인들은 오래 전부터 복어를 요리해 먹지 않았습니까. 복어에는 테트로도 톡신이라는 치명적인 신경성 독이 들어있습니다. 이것 또한 맹독이지요. 치사량이 1 킬로그램당 8 마이크로그램 정도니까요. 말하자면 70 킬로그램 정도의 성인을 죽이기 위해선 0.6 밀리그램 정도의 양이면 되는 셈입니다."
집사가 그게 얼마나 적은 양인지 시각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으로 두께를 재는 모양을 만들어 자기 눈 앞에 갖다대고 그 틈새를 노려보았다.
"바트라초 톡신이 1 킬로그램당 1 마이크로그램 정도의 치사량을 가졌으니까 테트로도가 바트라초 보다는 좀 떨어지기는 해도 하여튼 대단한 독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위험한 물건들을 요리해서 먹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설마 작은 아가씨 말처럼 자살충동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건 아니겠지요."
쇼트웨이브는 어깨만 으쓱거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카페 주인 여자는 나머지 원두도 모두 갈아서 먼저 갈아 놓았던 원두 위에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그릇을 흔들어 가루들을 잘 섞은 다음 드립용 깔대기에 담고는 종지에 담아 놓았던 개구리 독을 그 위에 부었다. 밤색의 가루들이 검게 젖어 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먹을게 없어서 그런걸 먹었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언제라도 죽음을 불러들일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 아무리 요리를 잘 한다고 해도 예측할 수 없는 우연으로 인해 발현된 독성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가능성, 그 무모한 스릴과 어두운 유혹.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미각을 자극한 겁니다. 그 순간 대단치 않던 복어 맛이 다른 먹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맛으로 변해버린 거라구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욕망입니다. 쉽게 먹을 수 없는 것을 먹는다는 것, 아무데서나 맛볼 수 있는 달고 시고 떫고 쓴, 그런 단순한 맛이 아니라 아주 희소하고 위험천만한 가치를 맛보고 싶었던 거지요. 한마디로 벼랑 끝에 섰을 때처럼 무릎이 후들거리는 경험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여자는 약간 넓은 비이커처럼 생긴 유리 포트를 꺼내, 병처럼 좁아지는 포트 입구에 원두를 담은 깔대기를 올려 놓았다. 그리고 끓여 놓았던 물을 천천히 깔대기 위에 부었다. 마치 마른 모래에 물이 스며들듯 원두 속으로 물이 흡수되더니, 이내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지대처럼 칙칙해 보이는 퇴적층을 여과한 새까만 용액이 유리포트 안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쇼트웨이브는 커피가 거의 완성되는 모습을 보자 눈을 돌려서 집사를 쳐다보았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볼께요. 커피를 마시고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니까 주사를 맞지 않고 죽으면요. 좀 이상한 질문이긴 하지만 제가 궁금한건 이 곳에서 죽고나면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거예요."
"땅에 묻히죠."
집사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주인 여자가 일행을 향해 물었다.
"몇 잔 드릴까요?"
여자는 백토와 유리, 그리고 동석을 써서 구운 연질자기 커피잔을 꺼냈다. 잔과 받침 한 세트가 백색처리되어 단아한 느낌이 드는 그릇이었는데, 금채를 사용하여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쇼트웨이브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안 마셔요."
디지털퍼머 역시 징그러운 벌레를 보듯 커피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안 드세요?"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집사가 물었다.
"예. 저희는 어리석게도 집사님이 말씀하신 희소하고 위험천만한 가치를 맛보고 싶은 욕망이 없나봐요."
집사가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리고 여자를 향해 말했다.
"애써 만든걸 버릴 순 없지. 그럼 그건 모두 내가 마시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깔대기를 제거하고는, 유리 포트를 기울여 커피잔 가득 커피를 따랐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게 보였다. 집사는 찰랑찰랑한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들고 냄새를 맡았다.
"정말 좋아요. 한번 맡아보세요. 위험하지 않으니까요."
집사가 커피를 그녀들쪽으로 들이밀었다. 디지털퍼머는 약간 망설이다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커피의 향기를 마셨다.
겉에 곰팡이가 슨 오래된 오크통의 마개를 뽑아 통 속에 코를 박아 넣었을 때처럼 포도주 향 비슷한 시큼한 냄새가 끼쳐왔다. 그러나 그것은 부드럽지 않았고 매우 야성적이었다. 속에 뾰족한 말뚝이 박혀있는 깊은 함정처럼 커피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농축하고 있었다.
집사는 다시 커피를 가져가더니 음미하듯 한 모금을 마셨다.
"포틴이라는 아일랜드 밀주를 드셔보셨나요?"
집사가 천천히 커피를 넘기고는 말했다.
"아이리쉬 문샤인..보리로 만든 아주 전설적인 술입니다. 한번 그것을 맛본 사람은 절대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알콜도수가 자그마치 90도 이상입니다. 밀주니까 공식적인 알콜함량 따위는 없습니다. 최하가 그렇다는 얘기지요."
집사는 얘기를 하며 다시 한모금 커피를 마셨다.
"내가 알기로 포틴은 이미 1760년 경에 불법화 됐지요. 주된 이유는 영국에서 주세를 받아내기 위해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민가에서 밀주를 만드는걸 금지시켰기 때문입니다만 또다른 이유는 포틴의 알콜함량이 너무나 높은 탓에 아일랜드 주민들 사이에서 문제를 빈번히 발생시켰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내가 유럽에 있었을 때 각국을 여행할 기회가 많았는데 말입니다, 가끔씩 아일랜드에 가게 되면 더블린의 퇴락한 오코늘 거리에 있던 낡은 주점에서 어렵사리 한 병씩 구하곤 했습니다."
이번엔 집사가 길게 커피를 들이켰다.
"포틴의 첫 잔은 식도를 태우면서 내려가지요. 사람의 정신이 가죽처럼 팽팽히 당겨진 어떤 스크린이라면, 포틴은 일종의 북채와도 같습니다. 첫 잔을 넘기는 순간 북채는 스크린을 찢어져라 두들겨 대기 시작합니다."
집사는 커피잔을 눈높이까지 들고 그 경계면을 취한 듯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쇼트웨이브는 집사의 눈이 낡은 매듭처럼 올이 헤져 너덜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트라의 맛도..그와 비슷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집사의 손이 두세번 흔들리더니 갑자기 커피잔을 놓쳤다. 커피잔은 큰 소리를 내며 바 위에 떨어졌고 디지털퍼머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집사가 바를 덮치듯이 앞으로 거꾸러졌다. 디지털퍼머는 계속 비명을 질렀으나 주인 여자는 태연하게 주사기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셔츠의 뒷 목 부분을 내려주세요. 빨리요."
"작은 아가씨 말씀은 내가 한 얘기를 다분히 악의적으로 해석한 겁니다. 우린 자살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살아있다는 결론을 끌어내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논리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내가 아가씨들한테 하려고 했던 말은 그런게 아니라, 삶과 죽음이란 것은 반대되는 말처럼 여겨지기는 하지만 사실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가지는 완전히 떼어버릴 수도, 완전히 섞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아있다고 믿는 순간조차도 살아왔던 분량만큼 죽어간 것이니까요."
쇼트웨이브는 집사의 각진 턱과 날카롭지만 기름진 눈매를 바라보았다. 집사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그녀를 탐색하고 있었다.
"글쎄요, 집사님의 설명이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지 않나 싶어요. 죽어있으니 살아있는거라뇨. 이렇게 애매모호한 말이 어디 있겠어요. 그보다는 집사님께서 악의적으로 해석했다고 비난하셨던 제 판단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옆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겼다.
"저로서는 솔직히 그렇게 여겨지는걸요. 집사님은, 아니 이 도시에서 사시는 분들은 애써서 죽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던게 아닐까요. 아까 말한대로 죽을 수 있다면 살아있는 것이니까요."
그녀는 손가락을 흔들어 주의를 집중시켰다.
"저희들이 처음 여기에 왔을 때 가장 혼란스러웠던 점 중에 하나도 저희가 정말로 죽었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듣기에 이 곳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어떤 틈새라고 하던데, 죽어야 온다고 알고 있는 이 곳에 진짜로 죽어서 온건지, 언뜻 느끼기엔 살아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도 없는데 실상 살아있는건 아닌지, 과연 저희가 어떤 상태로 이 곳에 있는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시스템 내에서 시스템을 확인해 볼 길은 없는 것이니까 살아있는 것을 알아보는 방법은 시스템을 벗어나는 것, 그야말로 죽어보는 수 밖에는 없는 거지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별 표정없이 앞을 응시했는데 거기엔 열심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디지털퍼머가, 그리고 그녀의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열심히 커피만 만들고 있는 카페 주인이 정물화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집사님께서는 이 곳에서 죽음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오히려 죽음은 소중한 것이라고 하셨어야 옳은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이 경우 이 곳에서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되는 것이니까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희망. 살아있다는 희망, 또한 이 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요. 죽을 수 있다면 죽음이야말로 이 곳을 탈출하는 확실한 수단이 될테니까요."
그녀는 아랫 입술로 윗 입술을 덮어 침을 축이고는 옆 눈으로 살짝 집사를 쳐다보았다. 디지털퍼머는 그러한 무의식적인 얼굴 움직임이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대단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전 이런 행위, 그러니까 커피에 독을 타서 마시는 것 같은 위험천만한 행위는 이 도시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 예컨대 집단 무의식적인 기저로부터 발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걸 집사님이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말이예요. 이것은 저희가 제천시에 오기 전에 보았던 월명사라는 절과도 비교되는 상황인데..생각나시죠? 집사님이 어젯밤에 설명해 주셨던 그 절이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집사님 설명에 의하면 그 절에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거였어요. 그렇죠? 그들의 고통은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범죄를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저주가 걸려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를 탈출할 수 없는 고통 말이예요. 그들이야말로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니죠. 집사님 말 마따나 반딧불처럼 희미한 존재가 된 거라고나 할까요. 제가 보기엔 이 도시도 기본적으로 그러한 고통을 공유하고 있어요.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이 공간에서 얼마나 지내야하는지, 영원히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고통이지요. 그러한 고통과 불확실성이 이렇듯 치명적인 커피를 만들게끔 한 것이예요. 아무것도 아닌 기호품 하나에도 극단적인 죽음의 칼날을 심어 그것으로써 이 공간의 구속을 돌파하려 하는 거죠."
쇼트웨이브는 잠시 집사의 반응을 살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그 절의 중들과 이 도시 사람들이 다른 것이 있다면, 그건 이 도시 사람들은 자의적으로 선택해서 이 생활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겠죠. 이런 종류의 자살 수단을 통해서요. 바트라초 톡신은 그런 면에서 이 도시 사람들을 결속시켜 주고 힘을 줘서 생활을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걸 거예요."
집사가 쇼트웨이브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쇼트웨이브는 그 웃음이 대단히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예기치 않던 커다란 웃음이었으므로 적잖이 당황했다.
"감동적인 말씀이었습니다만 잘못 짚으셨습니다. 작은 아가씨 말씀은 소설에 가까워요. 우리가 죽음에 대해 본능적인 친밀함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죽음을 희망이라고 여기는 증거는 아닙니다. 대체 우리가 왜 죽음을 희망이라고 여기겠어요. 우리에겐 삶이 희망입니다. 아가씨들처럼 우리 역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예요."
삶을 얘기하는 집사의 눈이 이상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그가 다시한번 웃자 그 이상한 번뜩임은 가늘어진 눈꼬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작은 아가씨께서는 아마도 우리가 위험해 보이는 커피를 마신다는 것에서 우리가 자살충동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의심하신 모양인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자는 원두가 곱게 갈아지자 그것을 그릇에 털어내고 남아있던 원두를 모두 모아 다시 밑돌에 깐 다음, 같은 방법으로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돌과 돌이 부딪히는 거친 마찰음이 실내를 채웠다.
"음식 문화나 식습관에 대해 작은 아가씨께서 간과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예요. 우리가 이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혹은 커피를 이렇게 위험하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 욕망 때문입니다. 위험한 것일수록 입맛을 끄는 유혹이 강해지는 법입니다."
집사가 의자 위에서 몸을 약간 움직여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애프리코트 스톤티(주: 살구씨로 만든 차, 행인차)나 복어요리도 그런 종류의 음식이지요. 살구씨에 들어있는 아미그달린은 시안화물, 말하자면 청산가리입니다. 이것이 독성을 발휘하지 않는 이유는 청산가리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포도당과 알데히드의 화합물로 존재하기 때문인데요, 행여 이걸 마셨을 때 재수없게도 체내에서 포도당 분해효소를 만난다면 그때 비로서 아미그달린으로부터 청산가리가 분리되어 숨겨져 있던 맹독성을 드러내게 된답니다. 청산가리를 마시는 셈이니 참으로 위험하겠지요? 그러니 이 차의 한모금 한모금이 얼마나 독특하고 맛있겠습니까."
집사의 손이 움직이자 손가락 사이에서 어제 보았던 빈 담뱃대가 튀어나왔다. 그는 희귀한 아바나 시거의 향이라도 맡듯이 담뱃대 끝을 코에 갖다대고 숨을 깊숙히 들이마셨다.
"복어요리는 한술 더 뜨지요. 아시다시피 동양인들은 오래 전부터 복어를 요리해 먹지 않았습니까. 복어에는 테트로도 톡신이라는 치명적인 신경성 독이 들어있습니다. 이것 또한 맹독이지요. 치사량이 1 킬로그램당 8 마이크로그램 정도니까요. 말하자면 70 킬로그램 정도의 성인을 죽이기 위해선 0.6 밀리그램 정도의 양이면 되는 셈입니다."
집사가 그게 얼마나 적은 양인지 시각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으로 두께를 재는 모양을 만들어 자기 눈 앞에 갖다대고 그 틈새를 노려보았다.
"바트라초 톡신이 1 킬로그램당 1 마이크로그램 정도의 치사량을 가졌으니까 테트로도가 바트라초 보다는 좀 떨어지기는 해도 하여튼 대단한 독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위험한 물건들을 요리해서 먹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설마 작은 아가씨 말처럼 자살충동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건 아니겠지요."
쇼트웨이브는 어깨만 으쓱거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카페 주인 여자는 나머지 원두도 모두 갈아서 먼저 갈아 놓았던 원두 위에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그릇을 흔들어 가루들을 잘 섞은 다음 드립용 깔대기에 담고는 종지에 담아 놓았던 개구리 독을 그 위에 부었다. 밤색의 가루들이 검게 젖어 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먹을게 없어서 그런걸 먹었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언제라도 죽음을 불러들일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 아무리 요리를 잘 한다고 해도 예측할 수 없는 우연으로 인해 발현된 독성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가능성, 그 무모한 스릴과 어두운 유혹.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미각을 자극한 겁니다. 그 순간 대단치 않던 복어 맛이 다른 먹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맛으로 변해버린 거라구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욕망입니다. 쉽게 먹을 수 없는 것을 먹는다는 것, 아무데서나 맛볼 수 있는 달고 시고 떫고 쓴, 그런 단순한 맛이 아니라 아주 희소하고 위험천만한 가치를 맛보고 싶었던 거지요. 한마디로 벼랑 끝에 섰을 때처럼 무릎이 후들거리는 경험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여자는 약간 넓은 비이커처럼 생긴 유리 포트를 꺼내, 병처럼 좁아지는 포트 입구에 원두를 담은 깔대기를 올려 놓았다. 그리고 끓여 놓았던 물을 천천히 깔대기 위에 부었다. 마치 마른 모래에 물이 스며들듯 원두 속으로 물이 흡수되더니, 이내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지대처럼 칙칙해 보이는 퇴적층을 여과한 새까만 용액이 유리포트 안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쇼트웨이브는 커피가 거의 완성되는 모습을 보자 눈을 돌려서 집사를 쳐다보았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볼께요. 커피를 마시고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니까 주사를 맞지 않고 죽으면요. 좀 이상한 질문이긴 하지만 제가 궁금한건 이 곳에서 죽고나면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거예요."
"땅에 묻히죠."
집사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주인 여자가 일행을 향해 물었다.
"몇 잔 드릴까요?"
여자는 백토와 유리, 그리고 동석을 써서 구운 연질자기 커피잔을 꺼냈다. 잔과 받침 한 세트가 백색처리되어 단아한 느낌이 드는 그릇이었는데, 금채를 사용하여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쇼트웨이브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안 마셔요."
디지털퍼머 역시 징그러운 벌레를 보듯 커피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안 드세요?"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집사가 물었다.
"예. 저희는 어리석게도 집사님이 말씀하신 희소하고 위험천만한 가치를 맛보고 싶은 욕망이 없나봐요."
집사가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리고 여자를 향해 말했다.
"애써 만든걸 버릴 순 없지. 그럼 그건 모두 내가 마시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깔대기를 제거하고는, 유리 포트를 기울여 커피잔 가득 커피를 따랐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게 보였다. 집사는 찰랑찰랑한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들고 냄새를 맡았다.
"정말 좋아요. 한번 맡아보세요. 위험하지 않으니까요."
집사가 커피를 그녀들쪽으로 들이밀었다. 디지털퍼머는 약간 망설이다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커피의 향기를 마셨다.
겉에 곰팡이가 슨 오래된 오크통의 마개를 뽑아 통 속에 코를 박아 넣었을 때처럼 포도주 향 비슷한 시큼한 냄새가 끼쳐왔다. 그러나 그것은 부드럽지 않았고 매우 야성적이었다. 속에 뾰족한 말뚝이 박혀있는 깊은 함정처럼 커피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농축하고 있었다.
집사는 다시 커피를 가져가더니 음미하듯 한 모금을 마셨다.
"포틴이라는 아일랜드 밀주를 드셔보셨나요?"
집사가 천천히 커피를 넘기고는 말했다.
"아이리쉬 문샤인..보리로 만든 아주 전설적인 술입니다. 한번 그것을 맛본 사람은 절대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알콜도수가 자그마치 90도 이상입니다. 밀주니까 공식적인 알콜함량 따위는 없습니다. 최하가 그렇다는 얘기지요."
집사는 얘기를 하며 다시 한모금 커피를 마셨다.
"내가 알기로 포틴은 이미 1760년 경에 불법화 됐지요. 주된 이유는 영국에서 주세를 받아내기 위해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민가에서 밀주를 만드는걸 금지시켰기 때문입니다만 또다른 이유는 포틴의 알콜함량이 너무나 높은 탓에 아일랜드 주민들 사이에서 문제를 빈번히 발생시켰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내가 유럽에 있었을 때 각국을 여행할 기회가 많았는데 말입니다, 가끔씩 아일랜드에 가게 되면 더블린의 퇴락한 오코늘 거리에 있던 낡은 주점에서 어렵사리 한 병씩 구하곤 했습니다."
이번엔 집사가 길게 커피를 들이켰다.
"포틴의 첫 잔은 식도를 태우면서 내려가지요. 사람의 정신이 가죽처럼 팽팽히 당겨진 어떤 스크린이라면, 포틴은 일종의 북채와도 같습니다. 첫 잔을 넘기는 순간 북채는 스크린을 찢어져라 두들겨 대기 시작합니다."
집사는 커피잔을 눈높이까지 들고 그 경계면을 취한 듯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쇼트웨이브는 집사의 눈이 낡은 매듭처럼 올이 헤져 너덜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트라의 맛도..그와 비슷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집사의 손이 두세번 흔들리더니 갑자기 커피잔을 놓쳤다. 커피잔은 큰 소리를 내며 바 위에 떨어졌고 디지털퍼머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집사가 바를 덮치듯이 앞으로 거꾸러졌다. 디지털퍼머는 계속 비명을 질렀으나 주인 여자는 태연하게 주사기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셔츠의 뒷 목 부분을 내려주세요. 빨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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