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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41 580회 0건
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새하얀 달이 넓은 광장에 비추었다. 그 광장의 중앙에는 소녀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고고하게 서 있었다.
피로 물든 마법진의 중앙에 처연하게 서 있는 소녀이었다.
희고 깨끗한 피부에 그려진 붉은 문신 같은 도형이 어지럽게 온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레이..."

유리안느는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보았다.
항상 보던 달이었지만 여느 때와 달라 보였다.
그레이가 자신의 침실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달과 지금 저기 떠있는 달, 분명히 같은 달이건만 너무나도 처연하게 보였다.

"이젠 달을 바라보며 그레이가 오기를 기다리는 밤은 다시 오지 않겠지."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았다. 붉은 피로 그린 듯 광장을 가득 채운 마법진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붉은 혀를 움직여 세상을 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노인이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질식할 듯한 느낌은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자신, 유리안느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야, 너무 긴장하지 마라."

마법진을 그리던 노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미소 지었다.
거칠고 메마른 피부의 노인의 손가락이 소녀의 뺨에 그려진 도형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여인을 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장인처럼 깨어질까 조심하는 손길이었다.

"그저, 간단한 실험을 할 뿐이란다."

"실험이라니요?"

"하나의 몸에 다른 영혼을 녹이는 실험이지. 비록 너의 몸은 황후를 모실만한 그릇은 못 되지만 실험을 하기엔 부족함이 없구나."

유리안느의 질문에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해주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분야에서 극한을 추구하는 자이었다. 자신의 실력만큼 남들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이 없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부하나 동료에게 능력을 떠들고 다니는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소녀는 곧 실험에 쓰일 몸, 이제 자신에게 세뇌되어 자아가 비틀어져 버릴 소녀이었다.

"너를 이용해서 실험한 결과는 나중에 황후를 모실 때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리자드맨이랑 놀고 있을 라플라스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


유리안느는 온몸을 난도질할 것 같은 참혹함 속에서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코 원하는 데로 되지 않을 거예요."

"허허, 그저 좋은 그릇일 줄 알았건만, 심지마저 굳구나."
"하지만 소용없단다. 이 일이 끝나면 나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를 테니까."

노인은 천천히 두 팔을 들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마법진의 기운이 잠에서 깨어나는 듯 파문을 일으켰다.
허한 행동을 하며 웃던 기색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노인이 일으킨 파문이 하늘을 가득 채우며 천천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자, 조심스럽게 품속에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한눈에 봐도 보석을 담는 고급스러운 처리가 되어 있는 상자이었다.

노인은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서 눈처럼 희고 고운 보석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 ..."

노인의 입에서 기묘한 주문이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상자 속의 흰 보석이 더욱 창백해지더니 이내 천천히 떠올랐다.

하늘을 뒤덮던 붉은 마법진의 기운이 거대한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그 중심에서 유리안느의 몸은 천천히 떠올랐다.


"그레이... 도와줘요."

유리안느가 마지막 말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의식의 끈을 천천히 놓았다.






-----------------------------------------------------------


"천사? 난 죽은 건가?"

의식을 잃어가는 가운데 ,한 여인이 보였다.
단정하게 묶은 검은 색의 긴 머리카락, 마치 유령처럼 창백한 흰 피부, 이때까지 보지 못했던 형태의 긴 소매가 달린 긴 치마를 입은 여인이었다.

"하얀 손? "

그 여인의 손은 조금 전에 보았던 하얀 달처럼 투명하고도 희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춤을 추는 듯 여인이 물결처럼 움직이었다.
유리안느에게 그녀의 노래가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바람이 흐르노라.
피를 먹은 대지는 세상에 침묵하니

바람이 흐르노라.
눈물는 모여서 호수가 되나니


부모 잃은 작은 소녀
사흘 밤낮 헤매니

모질디 모진 목숨
몸을 팔아 연명하니

몸 판 돈, 서푼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무뢰한에게 맞고 밟혀
서푼마저 빼앗기니

맞아 죽어 혼이 되어
먼 길을 나서려다

가슴속에 한이 쌓여
저승길마저 멈추노니

소녀를 본 귀가 있어
귓가에 속삭이니

혼을 팔아 돌아오니
그 이름, 빙화라

스치는 손끝마다
얼음꽃이 피어나고

피어난 얼음꽃은
피를 먹고 자라나니


더러워진 대지는
원한에 침묵하고

피가 내를 이루어
호수가 되나니

천지를 울리는 통곡소리가
땅끝 산꼭대기까지 울리나니

백발의 도인 하산하여
피의 길을 막아선다

극양의 동정을 지닌
의자산의 도인이라

도인의 손끝에서
뜨거움은 피어나고

그 순수한 극양공에
얼음꽃은 바스러진다

뜨거움에 ?겨나서
한을 풀지 못하고 도망치니

맵디 매운 북으로가
저승의 틈을 연다

귀를 나와 속삭이며
빙정을 쥐어 준다

빙화야 빙화야
삼천의 소녀를 모아와라

삼천의 순음이면
한많은 이 세상 그 끝을 보여주마

한에 서린 빙화가
빙정을 쥐고 내려오니

삼천의 소녀를 납치하여
소녀의 자궁 안에 빙정을 박아넣어

살지도 죽지도 못한
삼천빙녀의 탄생이라


힘을 얻은 빙화가
의자산의 도인을 시험하니

삼천빙녀중에 하나
도인의 여제자라

빙화가 수작 부려
살아 숨 쉬는 얼음조각으로 만들나니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얼음속에 가두어서

의자에게 보내노니
의자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얼음이 된 여제자는
얼어붙는 고통 속에

눈물조차 얼어버려
울지도 못하나니

시험에 든 의자를
선한 눈으로 쳐다볼 뿐

그 아이를 구하려면
극양의 정기로 자궁을 채워야 하니

이는 육과 영의 교합이라
남녀 간의 어울림이니

이는 동정공의 상실이요
또한 의자의 도를 포기함이라

얼어 붙은 여제자가
떨리는 입술을 여니

스승이여 스승이여
차라리 죽여주오

차갑고 외롭지만
스승의 누가 되긴 싫소

차가워진 자신의 이로
혀를 물어 자결하니

의자의 두 눈에
피눈물이 흐르도다

도란 무엇이냐
사람이란 무엇이냐

사흘 밤낮 울던 의자
처연하게 일어나니

도를 버리고 정을 취하리라
극양을 버리고 어울림을 취하리라

북에 숨어 있던 빙화
남으로 내려오니

의자의 극양이 사라짐에
두려울 것이 없음이라

삼천빙녀 이끄는 빙화
이르는 길마다 피가 흘러

빙화을 막아선 의자 옆에
두 사람이 함께 하니

서역에서온 신승과
달처럼 흰 손의 여인이라

극양으로 제압하지 못하고
그저 막기에만 급급하다

신승의 법력과 여인의 무공으로
빙화를 묶어두고

그 찰라의 순간에
의자가 삼천빙녀의 자궁을 어루만진다

홀로 삼천을 사랑하니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

자궁에 정을 받아
빙공은 깨어지고

온기와 어울리니
꽃향기가 진동한다

빙화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다다르니
그 광기가 끝에 도달함이라

막아선 세 명 밀어내고
삼천의 소녀에게 다가가서

가슴 속에 손을 넣어 심장을 뽑아내어
그 피로 천지를 가리니

세상에 틈이 생겨
큰 구멍이 생겨난다

모든 것을 삼키고 나더니
그조차도 사라진다










---------------------------------------------
내용의 변경이 있습니다.

그레이에게 무공을 남겨준 노인의 정체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초반부의 대화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부분을 삭제하였습니다.
"무공을 남길 수 있어서 기쁘다"는 표현을, "인연을 만났다" 라는 식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빙화를 만나면 범해달라"는 말을 "빙화를 막아달라"는 말로 변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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