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람.
수련시간이 끝났는데도 열심히 연무장에서 혼자 수련에 전념하는 미소년이 있었다. 곱상한 얼굴이었지만 카마산답게, 눈빛도 제법 매섭고 앙다문 입술이 강인한 인상을 주는 소년이었다. 휘두르는 검날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고 있었고, 몸놀림은 춤사위를 벌이듯 날렵하고 빠르면서도 부드러웠다.
이런…!
어느 한 부분에서 틀린 모양이다. 재빨리 휘두르던 검 자루를 거두어들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책 한 권이 놓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세 발 달린 새의 형상이 그려진 책이었다.
“대체… 알 수가 없네….”
“뭐가?”
등 뒤에서 들리는 낭랑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돌아본다.
“리타!”
큰 키에 장대한 체격을 가진 여자. 이 미소년과는 아슈람에 같은 시기에 들어와 함께 자랐다. 미소년은 반색을 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근 1년 만에 보는 단짝 친구였다.
“깜짝 놀랐잖아~! 어떻게 된 거야?”
“키도 좀 큰 것 같은데? 이젠 나보다 큰 거 아냐?”
미소년은 키가 큰 편이 아니었고, 리타는 그보다 조금은 더 컸으니, 놀리는 격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크소바에서 나온 거야?”
“응, 그제 출관했어.”
리타의 눈과 얼굴에선 빛이 나고 있었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아크소바는 아슈람의 빅쿠들 중 가장 수행이 높은 이들이 아라한이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거치게 되는 과정으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는 공간이었다. 출관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 깨달음을 얻거나 혹은 그 한계를 느끼는 때뿐이었다.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아.”
“내가?”
“어. 뭔가. 빛이 나는 것 같고.”
“넌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윽!”
미안하다며 얼른 씻으러 가는 미소년의 뒤에다 리타는 아시타의 호출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알았어. 얼른 올게!”
그가 사라지자 그의 수련을 지켜보던 무신장은 리타를 향해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무신장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출관을 경하 드리옵니다.”
“그대는 나의 친구 또한 훌륭하게 성장시켰으니, 내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무신장은 리타를 향해 깊이 조아리며 절을 했다.
“하옵시면 본국으로 길을 잡을 예정이시옵니까?”
“음. 곧바로 돌아가진 않을 것입니다. 아직은 보고 싶은 것이 더 많으니까요.”
“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하하~, 역시 그대도 내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나보죠? 지당하다고 하는 걸 보니.”
“전하, 그 무슨 당치 않은…!”
웃으며 받는 리타의 말에 무신장은 당황하여 머리를 조아렸고,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 후 리타가 말을 꺼냈다.
“그대는 이번에 나와 함께 길을 떠날 것입니다.”
“하옵시면…?”
“폐하께서 밀지를 내리셨습니다. 그대도 복귀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와카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명령에 따를 뜻을 나타냈다. 아슈람의 무신장씩이나 되는 자와카에게서 극진한 공대를 받으며 명령을 내리는 리타의 본명은 리토르나 지앙 오르페 잉그라드. 아슈람이 자리한 아쿠아리아스 대륙으로부터 보르틴 대륙을 제대로 종단해야만 닿을 수 있는 아득히 먼 곳에 그녀의 고국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온갖 험준한 산맥, 고원, 사막, 그리고 바다만큼이나 넓은 강과 호수들이 있는 앙카라시아 대륙 그 전체를 관장하는 대제국 잉그라드. 리타는 그 제국의 황녀였다.
“하백도 갈 겁니다.”
미소년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그가 보고 있던 책자를 집어 들었다. 냄새난다는 말에 뛰어가느라 잊고 간 모양이었다. 표지에 찍힌 다리 셋 달린 새는 하백의 출신을 말해주는 표식이었다. 돌아갈 고향은 없지만, 자신의 뿌리를 줄기차게 붙들고 있는 그가 리타는 마음에 들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누구를 이르시옵니까…?”
“내가 말하면 독자들이 너무 재미없잖아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리타의 대답에 자와카도 어쩔 수 없이 웃고야 말았다.
아시타는 융베리와 차를 마시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를…, 보내야 하는 게 아쉽구먼.”
“적응이 안 되십니까?”
웃으며 찻잔을 기울이는 융베리는 여유가 있었고, 아시타는 못내 안타까워하는 얼굴이었다. 아무 매개도 없이 앞일을 내다볼 수는 없었지만, 아시타의 기색에서 융베리는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이 적응이 되겠는가? 겪을 때마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일세….”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요.”
둘은 말없이 찻잔을 기울이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아시타는 정치적인 사람이 되지 못했다. 인류의 스승이라는 말까지 듣는 그였지만, 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힘도 쓰지 못했다. 단지 지켜보고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구루께서 내다보신 이 사람의 미래가 어떻던, 저는 제가 할 일을 할 겁니다. 혹여 제가 잘못되는 일이 있더라도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할 일을 하다 가는 것이니까요. 기뻐해주셔야지요.”
“.... 몰라…?”
“예…?”
“자네…, 미래를 볼 줄 아는 거 아니었나?”
“그렇…긴 합니다만….”
“… ….”
아시타는 잠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난… 자네가 죽을 줄 아는 줄 알았네, 그려? 괜히 티냈네, 이거….”
“예~?”
여태 그럭저럭 이별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다 또다시 애먼 소리다. 융베리는 어이가 없어 크게 웃고야 말았다. 그래, 언제 간다고? 모렙니다. 이틀 남았지요.
그리고 이틀이 지난 후 아슈람에선 대대적인 귀환자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보르틴 대륙 전역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이었으니 그 수는 수만에 이르렀다. 사절단을 필두로 해서, 호위 군사들을 뒤쪽에 두고 이동하는 모습이 제법 장관이었다. 아시타와 묵은 창밖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타와 하백은 사절단 일행의 중간쯤에 있었고, 자와카는 융베리와 함께 선두에 있었다. 융베리는 레몽이 마차를 고집했지만 끝내 자와카와 함께 말을 탈 것을 고수했다. 고집스러운 늙은이 같으니라고…. 레몽의 입에서 괜한 험담이 씹혔다.
“지난해 팡그릿샤의 협약에서 동맹이 됐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각자 이권에 따라 맺은 동맹에 불과해. 바루나로서는 보다 확고한 주도권을 갖고 연합군을 결성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할 걸세.”
“그렇겠지요. 함부로 군을 움직이진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연합군이니….”
“주도권을 가지려면 먼저 그들을 배려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네. 그래서 ‘미키네오스의 망명자’가 아니라 ‘보르틴의 망명자’였던 거야.”
융베리는 사절단의 목적과 바루나의 의도에 대해 자와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명분을 얻기 위해서 라고는 해도, 자와카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귀환자들에게 약속한 그 막대한 이권이 보장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제안을 해 온 미키네오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스마르나 네오시아, 특히 바이마샤르 같은 데서도 거기에 동조를 하겠습니까? 그들이 망명자들을 받아서 그런 이권을 보장해준다는 보장은 또 어디 있습니까.”
“바이마샤르야 어떨지 모르지만, 이스마르나 네오시아는 다르네. 그들은 예전부터 교권이 강해지는 걸 마땅찮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국력이 필요해. 한 나라의 국력을 가늠할 때 가장 큰 기준이 뭔가? 그건 바로 결집력일세. 종교 숙청에서 다소 벗어나 있던 나라들이라고 해서 망명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런 망명자들까지도 끌어안는 모습을 행정부가 보여줘야 시민들의 믿음을 얻을 게 아니겠나.”
자와카는 융베리의 분석에 대단하다는 듯 헛웃음만 집어삼켰다. 보르틴 대륙 전체에 걸쳐 망명자를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바루나 국왕의 한 수에는 그런 정치적 계산이 숨어있었다. 귀환자를 박대할 이유가 없는 다른 국가들의 사정을 봐주는 듯하면서도, 그것이 보르틴 교원총련과 국왕 자신의 결정임을 내세우며 그 명분을 자신에게로 끌고 들어가는 것. 그것이 그의 노림수였다.
“역시 원로님이십니다. 명확한 분석을 해내시는군요.”
“국왕께서 매우 명민하신 게지요. 허허허….”
융베리는 ‘국왕’이란 칭호 외에 달리 공대를 쓰지 않았고, 그것이 레몽에게는 몹시 거슬렸다. 레몽은 개국 공신가문의 가주였고, 미키네오스 내에서도 충신으로 이름이 높은 자였다. 비록 같은 개국 가문이라고는 해도 바루나는 현재 자신이 몸담은 국가의 군주였다. 현재의 교권을 생각해볼 때 융베리의 언사는 다소 무례한 감이 있다고 여겼다.
“헌데, 원로님. 외람됩니다만….”
“말씀하시오.”
“저희 국왕 폐하에 대해 어째서 공대를 쓰지 않으시는지…?”
“불편하셨던 모양입니다.”
융베리는 말고삐를 잡으며 대답에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보르틴 교원총연합회의 전임 총장이었고, 이전엔 발덴 령의 추기경이었소. 교총은 미키네오스 소속이 아니라, 보르틴 대륙 전체에 걸쳐 있는 종교 연합체인데, 앞에서라면 모를까. 내가 어째서 그대가 아닌 사람들에게 말하면서까지 귀국의 군주를 높여 불러야 한다는 거지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레몽은 할 말이 없었다. 다만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는 수밖에. 융베리는 여유롭게 웃으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겼고, 레몽은 말을 재촉하여 그보다 앞선 일행으로 가버렸다. 자와카가 푹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도 너무 무안 주신 것 아닙니까? 명색이 한 나라의 재상인데….”
“난 대륙의 원로일세.”
“하하하~!”
자와카는 역시 대단한 학자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백은 무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뛰어나지는 이들에겐, 그렇지 않은 이들이 갖지 못한 곧고 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대륙 전체에 융베리가 미쳤던 학문적·종교적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그가 이토록 굽힘없이 자신의 논리를 펴낼 수 있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휘이~, 대단한데…?”
아슈람에서 멀어진 일행이 계곡 하나를 지날 무렵, 산의 능선을 타고 지나던 한 여행자가 이를 보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동이었다. 대체 몇 명이야…, 한 오만 명쯤 되려나, 이 정도면…? 혼잣말을 하는 그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떠돌아 다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빨아 입기는 하는 모양인지, 더럽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기운 것도 많았고, 신고 있는 신발은 다 헤진 탓에 끈을 달아 발목에 묶어서 신은 꼴이었다.
상당히 크고 단단한 체격에 황적색의 눈을 가진 그의 옆에는 커다란 행낭 하나와 칼을 싸놓은 것으로 보이는 가죽 주머니 다섯 자루가 있었다. 그나마 그것도 다 헤져서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역력했다.
“에이씨….”
거칠게 난 턱수염으로 기름이 흐르자 대충 어깨로 훔쳐내며 사절단과 귀환자 일행을 구경하던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놀랍군…, 놀라워…. 저렇게 강한 사람은 싸부 외에 처음인데….”
그가 시선을 고정한 것은 자와카였다.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커 보이는 덩치, 자신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게다가 타고 있는 말도, 말이라기보다는 괴물이라고 해야 옳을 만큼 컸다.
“아니 무슨……. 여물 대신에 고기를 처먹였나. 저게 말이야, 소야…?”
갑자기 그 말이 투레질을 했다. 동시에 자와카도 심상찮은 느낌에 고개를 들었고, 여행자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 왜 그러나…?”
“…. 보이십니까? 저기 저 자.”
“…꽤 멀리 있는 모양이군. 난 안 보이는데?”
“저 산등성이에 앉아있습니다.”
자와카는 손을 들어 가리켰다.
융베리는 그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말고삐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주둥이를 확 잡아당기는 그의 손짓에 말이 깜짝 놀라며 앞발을 들었고, 자와카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놀라며 재빨리 말에 떨어질 뻔 한 융베리를 안아들었다. 어이쿠~! 그 때문에 사신단이 조금 술렁거렸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앞서 가던 레몽이 이 소란에 사람을 보내왔지만, 자와카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별 일 아닙니다. 말이 좀 놀라는 통에…. 자와카는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융베리의 떨림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저 자는….”
“구루님…?”
그는 온 몸을 겨울철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융베리의 얼굴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은 공포였다. 그것도 절대적인 공포, 자와카는 그가 너무나 떨고 있자 일단 적의를 품은 눈으로 산등성이의 여행자를 다시 쏘아보았다.
“왜들 저래?”
“말이 좀 놀랐던 것 같은데…. 뭘 보고들 저러시지?”
하백은 자와카의 시선을 따라 산등성이로 눈을 들었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여행자였다. 꼬락서니도 허름하기 짝이 없는. 한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산짐승의 익힌 고기 같았다. 덩치가 크다, 뭔가 먹고 있다, 그 외에 그가 달리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자와카에게선 굉장한 투기가 나오고 있었다.
“…!”
리타도 발견했다.
“허, 참…. 무섭기도 하네…. 배고파서 고깃점 좀 뜯었다고 너무하는 거 아냐? 그렇게 째려볼 건 또 뭐람….”
그는 씹고 있던 걸 삼키고는 아직 살점이 붙어있는 커다란 뼈를 입에 덥석 문 채 주섬주섬 행낭을 챙겨들었다. 시끄러운 일은 질색이었다. 자와카는 분명 소름끼칠 정도로 강했지만, 괜히 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는 그에게 위협이 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어…?”
돌아서던 그의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 예리했지만 그것은 칼날 같다기보단 그를 잡아당기는 실 같은 느낌이었다. 이건 대체 무슨 느낌인가. 하는 의문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 그의 황적색 눈빛이 좀 더 적색으로 짙어지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리타와 시선이 마주쳤다. 뭔가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고, 자신을 잠식해오는 거대한 느낌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적이다.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환청처럼 그의 온몸을 울리는 감각이 그렇게 말했다. 그의 손이 이곳저곳을 기워놓은 검집으로 향했다.
“… 리타? 리타, 왜 그래?”
리타의 눈빛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백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녀와 산등성이의 여행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손이 검집을 집어 들자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 길 없는 하백도 일단 긴장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꽤 멀었기에 당장 공격을 해 들어오더라도 여유는 있었지만, 일단 검을 드는 것만으로도 경계하기에 충분했다.
“전하!!”
자와카는 그가 검집을 드는 자세를 보고는 황급히 말을 돌려 리타에게 달려왔다. 리타를 향해 돌아선 그의 검집을 드는 자세는 분명 공격 태세였다. 리타는 그가 부르는지 오는지 모르는 듯 움직임 없이 그를 쏘아보고만 있었다. 굉장한 기세가 오직 그 남자를 향해서만 쏘아져 가고 있었다.
푸르륵…!!
리타에게 다가가기 직전, 자와카의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별안간 발길을 멈춰 세웠다. 이유는 자와카도 쉬 알아챌 수 있었다. 오로지 한 방향만을 향해 발산되는 무시무시한 예기가 리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럴 수가…!’
검 한 자루 만져본 일 없는 리타에게서 이토록 절제된 예기가 뿜어져 나온다는 것을, 자와카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몽롱한 상태에서 검집을 열고 있었다. 자신이 뭘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한순간, 온 감각을 사로잡았던 묘한 느낌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호통소리가 그를 후려쳐갔다.
‘물러서지 못할까!!!’
남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앞에 있던 괴물 같은 말과 대머리의 큰 아저씨를 보고는 돌아서려던 자신이 왜 다시 뒤돌아서서 칼을 뽑으려 하고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당황한 그는 얼른 검집을 여미고는 다섯 개의 검자루를 단단히 묶은 뒤 얼른 행낭과 함께 걸쳤다. 대체 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빌어먹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씹어뱉으며 그는 줄행랑을 치듯 산등성이 뒤편의 숲속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이 어찌 된….”
“무엇이 말입니까?”
리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웃음까지 띤 채 되물었다. 무엇을 묻는지 모를 리가 없었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와카는 아직도 정신이 들지 않는지 벙벙한 얼굴로 리타를 쳐다보다가 헛웃음만 집어삼켰다.
“가시죠, 구루님?”
“아, 아아….”
화급한 상황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전하’라고 부르며 뛰어왔지만, 아슈람 내에서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고 지내온 두 사람이었다. 주종 관계가 밝혀지면 다른 이들로부터 색다른 시선을 받게 될 것이었으니까.
“왜 그래, 리타? 아는 사람이었어?”
“아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색을 하자 더 수상쩍다. 하백이 본 것은 분명한 공격 자세였다. 수련이 깊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정도의 구분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봤던 거야? 그 사람이 왜 널 보고 칼을 뽑으려고 했던 건데?”
“나도 몰라. 내가 이쁘니까 납치라도 하고 싶었나부지 뭐.”
“뭐…??”
웃기지도 않을 농담에 하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리타를 흘겨봤다. 행색이 하도 안됐어서 그냥 쳐다본 거였어. 더 묻지 마. 리타는 입을 다물어버린 채 말을 재촉해버렸고, 하백도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워 그저 따라가기만 했다.
궁정대신 미셀은 틈날 적마다 후원을 찾았다. 열일곱의 어린 애첩들도 있었지만, 공주만큼 그에게 만족을 안겨 준적은 없었다. 애첩들조차 꺼려하는 행위, 그러니까 제 남근을 입에 넣기를 주저 없이 하는 고결한 신분의 여인이었으니, 레이네의 기술도 기술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런 인식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미셀의 살찐 몸이 레이네의 엎드린 엉덩이를 부숴버릴 듯이 둔중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굉장한 무게가 뒤로부터 느껴져 왔고, 레이네는 그를 돌아보며 흐느꼈다. 그런 모습도 애첩들에게서 보기는 어려운 광경이었다.
“생각보다 절제가 없는 놈이로군….”
보고를 들은 바루나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말을 전한 시중은 그로부터 지시는커녕 아무 반응이 없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었다. 바루나의 손이 팔걸이 끝에 있는 사자상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한참을 그렇게 정적이 흐르고, 그가 몸을 일으켰다.
“…. 병부대신에게 갈 것이다. 따르라.”
“예, 폐하.”
한바탕 정사를 마친 뒤 나란히 누운 그들은 시녀들이 건네주는 잔을 기울이며 가쁜 숨을 골랐다. 그들이 쉬는 동안 시녀들이 수건을 가져다 그들의 다리 사이를 닦아내고 있었다. 궁정대신은 부드러운 실크 수건이 감싸며 자극하자 또다시 욕정이 불끈 솟아났다. 하지만 그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한창 피어나는 젊은 육신의 색욕을 감당해낸 직후에, 또 다시 아랫도리를 일으킬만한 기운은 없었다. 어쩐다…. 옆에 누운 공주의 젖가슴에 눈이 닿았다. 채 가라앉지 않은 레이네의 숨결을 따라 젖가슴이 함께 숨쉬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레이네의 입술을 느끼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녀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치욕적인 행동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엎드려 놓고 하기까지 했으니, 선뜻 요구하기가 망설여졌다.
‘하긴…, 엎드려 놓고 하는 건 겁간을 당할 때나 하는 거니까….’
한편으로는 레이네도 나름 머리를 계속 굴리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 자는 나에게 홀리긴 했지만, 원하는 건 몸뿐이다. 재무대신 르로아처럼 내가 누구랑 자고 말고를 질투할 자는 못 된다. 어쨌거나 왕궁의 일을 맡고 있으니 능구렁이이기야 하겠지만 내게서 원하는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그것을 보자, 레이네는 결정을 내렸다. 손을 뻗어 불룩한 배 아래에 있는 쪼그라든 늙은 성기를 쥐었다. 미셀의 눈이 빛났다.
‘음탕한 놈….’
곧이어 그녀의 입 안으로 작달만한 것이 뿌리까지 들어왔다. 따뜻하고 끈적한 느낌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오직 이 튀어나온 배 때문에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좋아요…?”
창녀처럼 물어오는 공주의 얼굴은 배에 가려서 반쯤만 보였다. 대신 엎드린 채 그를 향해 쳐든 엉덩이의 아래로 비부가 드러나 있었다.
병부대신 라크라오스의 저택.
오직 근위장만이 기립한 채 국왕과 라크라오스는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벌써 한참을 바루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없이 술잔만 비울 뿐이었다. 30년을 함께 한 동지이자 주인이었다. 바루나의 심정을 모르지 않는 라크라오스도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건네는 잔을 받아 잔을 비우고, 다시 잔을 채워서 건네줄 뿐이었다.
“병부대신.”
처음으로 말문이 열렸다.
술이 얼근히 오른 듯 바루나의 얼굴빛이 약간 들떠 있었다.
“예, 폐하.”
“자네가 보기에 레이네는 어떤 아인가…?”
“… ….”
“이 나라를 맡겨도 될 만한 싹이 보이는가…?”
“… ….”
라크라오스는 다른 말이 없었다. 30년을 주인으로 지척에서 모신 바루나 국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것쯤은 몇 마디 말만으로도, 때로는 아무 말 없이도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뜸을 들이는 건 언제나 바루나가 진실 되게 물을 경우뿐이었다.
“제 판단을 물으신다면….”
“….”
“공주님께서는 아직 어리신 만큼, 함께 길을 갈 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그렇겠지.”
“폐하….”
“제 어미가 죽고 유모라고 들여놓은 건 공주를 담보로 나와 협상을 하려 들었으니, 애시당초 그 아이가 배운 거라곤 수싸움밖에 없었네.”
“그것 또한 공주님의 재능입니다, 폐하.”
“재능이라. 재능….”
잠시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던 바루나가 쿡 하고 가볍게 웃음 지었다. 재능이라면 재능이지, 하긴 스무 살에 아비의 수까지 읽어낼 수 있으니까. 조금은 자조적이고 회한이 섞인 웃음이었다. 딸을 그렇게 만든 데 대한 자책 정도랄까.
“하지만 그 녀석 말이야. 그 많은 수싸움을 누굴 위해 해야 하는 건지. 그걸 몰라….”
술잔이 기울어졌다.
“그걸 먼저 가르쳤어야 했는가….”
“….”
“병부대신.”
“예, 폐하.”
“너는…,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나보다 더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다, 라크라오스.”
“….”
“칼을 들고 싸우는 전장에서도, 각자 든 패를 쥐고 수싸움을 하는 정치판에서도, 내가 진창 속에서 발을 뺀 후에도 끝까지 남아서…, 내 뒤를 받쳐주고 든든히 지켜온 사람이 단 하나 있다면 그건 너다. 알고 있겠지…?”
“저는 폐하의 가신이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미련맞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바루나는 쓸쓸하게 웃음지었다.
“병부대신이란 놈이 아직도 가신 흉내나 내기는….”
“폐하…!”
“형님의 목을 친 것도 가신으로서 한 일이라고 할 텐가?”
“… ….”
술잔이 바루나에게서 라크라오스에게로 건네졌다. 잔이 기울어지고, 실내엔 술 따르는 소리만이 감돌았다.
“그 순간부터 넌 이미 내 가신이 아니라 미키네오스의 종복이었다.”
“….”
“미키네오스의 국왕은 곧 국권이다. 이 나라의 모든 국법에 대한 도전은 곧 국왕의 몸에 대한 도전인 셈이지.”
“그렇습니다.”
“네가 그 아이를 좀 도와줘.”
“….”
“그 아이…, 그 아이는, 정치를 아직 몰라. 네 말대로…, 함께 길을 갈 사람이 필요해.”
“… ….”
“자네 아들이면 어떨까?”
“…!! 폐하…!!”
그는 바루나의 말뜻을 즉시 알아차렸다. 모르면 그것도 문제다. 그것은 라크라오스의 아들을 부마 삼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엎드리며 불복할 뜻을 밝혔다.
“그 명령만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폐하…! 어찌 제 아들이…!”
“그렇게 정색할 것 없어. 부족한 딸년이지만…, 난 네가 그 아이를 거두어줬으면 싶다.”
“폐하…!!”
“이런 청을 하는 게 얼마나 뻔뻔한 일인지 나도 모르지 않아. 하지만….”
바루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라크라오스는 엎드린 채로도 그런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 그의 주인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 앉은 후부터, 나는 사람이길 포기했네. 어떤 뻔뻔함도 감수해내기로 마음먹었다.”
“폐하…!”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난 이 나라가 전부야. 그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어. 그것 때문에 가문을 버려야 한다면 그렇게라도 할 거야.”
읊조리는 라크라오스는 주인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무겁게 그의 귀를 때렸다. 바루나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갔다.
“자식년 창부 만들어놓은 아비가, 가문인들 못 버릴까….”
교권국가였던 만큼 미키네오스는 성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여성의 정절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정사를 벌이는 데 있어서도 여성은 정숙해야 했다. 소리를 낸다거나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는 것은 타락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심지어는 국법으로 성문화되어 어길 시에는 재판을 통해 할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국왕은 그것이 얼마나 욕망을 음지 속에서 키워주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힘을 가진 귀족들에게 주는 당근으로써 그 욕망의 충족을 선택했고, 그 수단으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선택했다.
궁정대신이 돌아간 후원에서, 공주는 몇 차례에 걸쳐 목욕을 하고는 피로감에 젖어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남자가 다녀가면 그녀는 언제나 씻는 동안 침대보를 벗겨서 태워버리곤 새 것을 씌우곤 했다. 손짓을 하자, 엎드린 그녀의 하얀 나신에 기름이 부어지고 시중의 마사지가 이어졌다.
‘아무리 봐도 궁정대신은 언젠가 입을 나불거릴 거야. 르로아보단 그놈을 먼저 죽여야겠어….’
- 메텔 경은 아직 쓸모가 많은 자다. 나는 아직 그를 버릴 생각이 없다.
얼마 전 국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르로아는 내버려 둬도 그가 알아서 할 테고…, 미셀 이놈을 어떻게 죽이지…? 자객…? 아니야, 그건 마지막이야. 음…. 공주를 탐한다…? 그 죄명이면…, 아니지 가만…, 그러면 르로아가 자신도 내쳐질 거라고 생각할 텐데.’
재무대신은 머리가 꽤 잘 도는 편이었다. 술수 부분에서야 자신보다 떨어진다 해도, 적어도 궁중대신 미셀보다는 선이 굵고 속이 더 깊은 자였다. 조금이라도 의심을 살만한 수는 쓰지 않는 편이 옳았다.
‘어쩐담….’
종아리에서부터 허벅지, 그리고 엉덩이를 지나 시중의 손이 허리에 올라온다 싶을 무렵, 레이네는 생각을 거듭하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한율. 리타와 기싸움(?)을 벌였던 그 여행자의 이름이었다. 기실 그보다 나중에 그 스스로 이름을 밝힌 뒤 쓰려고 했지만, 갑갑해서 그냥 여기서 밝힌다. 대명사가 마땅치 않으므로. 멸망한 환국의 생존자로 하백과는 같은 민족이었다. 당년 33세. 그는 리타에 대한 묘한 적개심과 동시에 이끌림을 느끼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행렬 속에 몰래 합류했다. 덩치가 워낙 컸던 지라, 아슈람에서 귀환하는 이들도 그가 카마산 중의 한 명이겠거니 여기는 모양인지 달리 술렁거리는 일은 없었다.
“이대로 미키네오스까지 갈 거야?”
“그래야 하지 않겠어? 큰 전쟁이 일어난다는데….”
“그래…?”
“몰랐어? 보르틴 협약에서 결정됐다잖아.”
“그런… 내용이 있었어?”
물론 없었다.
리타는 그런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크소바에서의 깨달음이 그녀를 그런 경지로 이끌었다.
“물론 없었지.”
융베리의 목소리였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고 하백은 얼른 일어나 예를 갖추었고, 리타도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융베리는 놀랍다는 눈으로 리타를 보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벌써 앞일을 내다보게 되다니….”
“앞일을 내다봐요? 리타가…?”
“부럽지…?”
어깨를 으쓱하며 의기양양하게 하백을 내려다보는 리타. 황녀라도 그 모습은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녀였다. 융베리가 자리에 앉자 둘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인 그는 약간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며 둘에게 말을 꺼냈다.
“구루께서 내가 돌아가는 길에 변을 당한다고 하셨다.”
“예…?!”
“….”
놀라는 것은 하백뿐이었다. 리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런데, 아마도 그 일이 나 하나만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구나. 며칠 전에 보았던 그 여행자를 말하는 것이다. 리타는 알 수 있었다.
“넌 알고 있었어?”
전혀 동요하지 않는 리타를 향해 하백이 묻자 리타는 눈을 감으며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어지는 융베리의 이야기.
“일단 다른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 지금 무신장 자와카가 카마산들을 소집하고 있으니, 하백 너도 가보거라. 따로 호위대를 꾸려야 한다.”
“예, 구루님!”
하백은 이 모든 일을 내다보고 있었다는 융베리의 말에 놀랄 틈이 없었다. 물론 그것도 놀랄 만한 일이지만, 아크소바에서 나온 리타의 몸에서 느꼈던 상서로운 기운을 떠올려 보면 영 아닌 말도 아닌 듯했다.
‘대단해, 리타는…. 그에 비하면 난….’
몹시 보잘 것 없었다. 물론 그렇다.
검을 쥔 손을 들어보았다. 아직도 그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리타보다 앞선 것은 무력이었지만, 그것은 그가 카마산으로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리타는 빅쿠로서 경지를 넘어섰어. 그런데 카마산으로 난….’
빅쿠, 카마산은 아슈람의 수련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빅쿠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수양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스스로를 닦는 수행자들을 말하고, 카마산은 무예를 배우며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닦는 수행자들을 말한다. 그 외의 어떤 구분도 일절 없다. 신분과 재산, 출신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차등을 두지 않으니, 그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하백은 어금니를 꾸욱 깨물고 품안에 있는 책자를 만져보았다. 다리 셋 달린 새의 형상, 단지 그것만이 그가 갖고 있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전부였다. 그 안에 담긴 내용들 중 십 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좌절할 수는 없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젠가 나도 리타처럼 될 수 있다. 난 리타처럼 똑똑한 편도 아니고, 깊은 헤아림을 가지지도 못했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의지가 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그는 천천히 소집령이 내려졌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년 17세. 하백은 아직도 솜털 보송보송한 소년이었다. 가능성은 많다.
그의 기척이 사라진 후 융베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리타를 향해 오체복지의 예를 올렸다. 온 몸을 땅에 대고 그를 향해 완전한 복종의 표시를 한 것이었다. 리타는 앉은 그 자리에서 그를 향해 일어나세요, 하고 명했다.
“예.”
“그대는 나의 신하는 아닙니다. 어째서 내게 그런 예를 갖추는지요?”
“전하께선….”
융베리도 그녀의 신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의 왕이 되실 분입니다. 몸담은 곳이 어디가 되었건, 전하의 신하가 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지요.”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이미 싸움이 시작되고 있사옵니다.”
“며칠 전에 봤던 그 자 말인가요?”
“예, 전하. 그는….”
말끝을 흐리는 융베리의 몸이 공포로 다시 뒤덮이고 있었다. 일국의 재상 앞에서 그의 국왕을 향해 거침없는 논리를 펴는 꼿꼿한 대석학이, 두려움으로 감당을 못하고 있었다. 리타는 조용한 신색으로 그를 안정시켰다.
“그는 아직 자신의 길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
이해할 수 없었다. 선택이라니.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타고난 것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나중에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나와 같습니다.”
“…!”
리타와 같다는 것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마하수카의 영역에 들어섰단 말씀이십니까?!”
“…. 그렇게 되면, 그 때는 그 자신의 숙명과 끊임없이 싸워 이겨내야 할 겁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적어도 그대를 해치는 자는, 그가 아닙니다.”
리타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 여행자, 그러니까 한율이 곧 닥쳐올 겁난에서 도움이 될 지, 아니면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올지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리타도 입을 다물었다. 만일 그가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온다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이보쇼. 안 가오?”
“네…? 어딜….”
“카마산 소집령 떨어졌잖수. 카마산 아니었나?”
“카….”
태연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한율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잠시 멍한 얼굴로 뻐끔뻐끔 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디로 가는 이들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슬쩍 끼어들었으니, 어쩐지 들킨다는 것도 찜찜하다.
“아, 그… 그렇구만. 내 정신 좀 보게.”
황급히 행낭을 챙기며 일어서는 그를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부르는 소리라기보다는 발걸음을 붙드는 말이었다.
“어디서 온 거요?”
한율은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다 이야기하고, 받아주면 좋고 안 받아줘도 가던 길 가면 그만이다 싶었다. 나쁜 사람들 같지도 않고.
“아하하…, 그…게 실은….”
나이가 꽤 지긋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인상도 좋았다. 한율은 모든 것을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목적지도 없이 떠돈다는 건가? 그 뭐…, 그렇게 됐습니다, 노인장. 그 짐에 찬 것들은 칼자루인가보지? 예. 잘 쓸 줄은 모르지만 어쨌든…, 칼입지요. 묻는 말에 하나씩 하나씩 대답을 하며 그들과 말문을 텄다.
“그런데…, 슬쩍 끼어들어서 며칠 같이 오다보니, 귀향을 하시는 분들 같습니다만….”
“음…. 우리는 아슈람의 빅쿠들이라네. 원래는 미키네오스 왕국에서 살던 사람들이긴 하지만….”
미키네오스 왕국이라면 그도 아는 바가 있었다. 사정을 말하자 노인은 잘 알고 있군. 하며 웃음지었다. 그 동네,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던데요. 차라리 아슈람에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자네 말도 맞네. 어지간히 시끄러운 곳이긴 하지.”
한율이 건네주는 담뱃대로 뻐끔뻐끔 몇 모금 피우고는 깊이 들이쉬었다가 옅은 연기를 내뿜는 노인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나라도 많고, 사람도 많고…, 그러니 시끄러울 수밖에. 그는 곳곳에 모여앉아 불을 쬐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이 사람들을 보게.”
“… ….”
“나이가 들면…, 고고하고 깨끗한 것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죽는 것이 좋다네.”
“… 태어나고 자란 곳….”
한율의 되뇌임에 약간의 무게가 실렸다.
노인은 그의 황적색 눈을 살피며 출신을 물었다.
“자넨 어디서 왔나? 피부색이나 눈빛을 보니 우리 쪽 사람은 아니구먼.”
“아, 예…. 전 좀 먼 데서 왔지요.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말해보게. 이래 뵈어도 들은 건 많은 편일세.”
“잉그라드 대륙보다 더 위쪽입니다. 타림이라고 혹시….”
“타림…? 타림분지 말인가?!”
오, 아시는군요. 한율은 반색을 했지만 노인이 놀라는 건 그 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곳에서 이십년 전 처참한 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환국의 멸망, 그러니까 한율의 고국과 그 신민들이 몰살을 당한 사건. 자네 혹…. 한율도 그가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예. 환국 출신입니다. 그 아수라장에서 어떻게 살아나왔는지…, 하하~.”
“그래…, 그렇구만…. 허허…, 북방인들은 굉장히 크다고 들었는데. 자넬 보니 그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구먼 그래.”
“아… 이건…, 제가 좀 크기도 한 겁니다. 하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위에서 장작 타는 소리와 사람들의 이야기소리, 그리고 웃음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 카마산들이 모인다고 하셨었죠?”
“그래.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한율은 목을 뻗어 전체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이만한 인원이 대이동을 하는 중이니, 사절단의 호위대 정도로는 어렵기도 하겠지요. 뭐 그렇기도 하겠지.
“소집된다면 막사는 따로 있겠군요?”
“그렇지 않겠나. 왜? 자네도 가보고 싶은가?”
“하하…, 뭐 저도 보시다시피….”
어깨를 으쓱하자 그 큰 덩치가 더 커보였다. 힘깨나 쓰는 편이라서…. 도울 수 있다면 좀 거들어볼까 해서요.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말솜씨였다. 진실 되어 보이는 한율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수련시간이 끝났는데도 열심히 연무장에서 혼자 수련에 전념하는 미소년이 있었다. 곱상한 얼굴이었지만 카마산답게, 눈빛도 제법 매섭고 앙다문 입술이 강인한 인상을 주는 소년이었다. 휘두르는 검날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고 있었고, 몸놀림은 춤사위를 벌이듯 날렵하고 빠르면서도 부드러웠다.
이런…!
어느 한 부분에서 틀린 모양이다. 재빨리 휘두르던 검 자루를 거두어들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책 한 권이 놓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세 발 달린 새의 형상이 그려진 책이었다.
“대체… 알 수가 없네….”
“뭐가?”
등 뒤에서 들리는 낭랑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돌아본다.
“리타!”
큰 키에 장대한 체격을 가진 여자. 이 미소년과는 아슈람에 같은 시기에 들어와 함께 자랐다. 미소년은 반색을 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근 1년 만에 보는 단짝 친구였다.
“깜짝 놀랐잖아~! 어떻게 된 거야?”
“키도 좀 큰 것 같은데? 이젠 나보다 큰 거 아냐?”
미소년은 키가 큰 편이 아니었고, 리타는 그보다 조금은 더 컸으니, 놀리는 격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크소바에서 나온 거야?”
“응, 그제 출관했어.”
리타의 눈과 얼굴에선 빛이 나고 있었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아크소바는 아슈람의 빅쿠들 중 가장 수행이 높은 이들이 아라한이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거치게 되는 과정으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는 공간이었다. 출관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 깨달음을 얻거나 혹은 그 한계를 느끼는 때뿐이었다.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아.”
“내가?”
“어. 뭔가. 빛이 나는 것 같고.”
“넌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윽!”
미안하다며 얼른 씻으러 가는 미소년의 뒤에다 리타는 아시타의 호출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알았어. 얼른 올게!”
그가 사라지자 그의 수련을 지켜보던 무신장은 리타를 향해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무신장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출관을 경하 드리옵니다.”
“그대는 나의 친구 또한 훌륭하게 성장시켰으니, 내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무신장은 리타를 향해 깊이 조아리며 절을 했다.
“하옵시면 본국으로 길을 잡을 예정이시옵니까?”
“음. 곧바로 돌아가진 않을 것입니다. 아직은 보고 싶은 것이 더 많으니까요.”
“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하하~, 역시 그대도 내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나보죠? 지당하다고 하는 걸 보니.”
“전하, 그 무슨 당치 않은…!”
웃으며 받는 리타의 말에 무신장은 당황하여 머리를 조아렸고,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 후 리타가 말을 꺼냈다.
“그대는 이번에 나와 함께 길을 떠날 것입니다.”
“하옵시면…?”
“폐하께서 밀지를 내리셨습니다. 그대도 복귀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와카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명령에 따를 뜻을 나타냈다. 아슈람의 무신장씩이나 되는 자와카에게서 극진한 공대를 받으며 명령을 내리는 리타의 본명은 리토르나 지앙 오르페 잉그라드. 아슈람이 자리한 아쿠아리아스 대륙으로부터 보르틴 대륙을 제대로 종단해야만 닿을 수 있는 아득히 먼 곳에 그녀의 고국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온갖 험준한 산맥, 고원, 사막, 그리고 바다만큼이나 넓은 강과 호수들이 있는 앙카라시아 대륙 그 전체를 관장하는 대제국 잉그라드. 리타는 그 제국의 황녀였다.
“하백도 갈 겁니다.”
미소년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그가 보고 있던 책자를 집어 들었다. 냄새난다는 말에 뛰어가느라 잊고 간 모양이었다. 표지에 찍힌 다리 셋 달린 새는 하백의 출신을 말해주는 표식이었다. 돌아갈 고향은 없지만, 자신의 뿌리를 줄기차게 붙들고 있는 그가 리타는 마음에 들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누구를 이르시옵니까…?”
“내가 말하면 독자들이 너무 재미없잖아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리타의 대답에 자와카도 어쩔 수 없이 웃고야 말았다.
아시타는 융베리와 차를 마시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를…, 보내야 하는 게 아쉽구먼.”
“적응이 안 되십니까?”
웃으며 찻잔을 기울이는 융베리는 여유가 있었고, 아시타는 못내 안타까워하는 얼굴이었다. 아무 매개도 없이 앞일을 내다볼 수는 없었지만, 아시타의 기색에서 융베리는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이 적응이 되겠는가? 겪을 때마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일세….”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요.”
둘은 말없이 찻잔을 기울이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아시타는 정치적인 사람이 되지 못했다. 인류의 스승이라는 말까지 듣는 그였지만, 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힘도 쓰지 못했다. 단지 지켜보고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구루께서 내다보신 이 사람의 미래가 어떻던, 저는 제가 할 일을 할 겁니다. 혹여 제가 잘못되는 일이 있더라도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할 일을 하다 가는 것이니까요. 기뻐해주셔야지요.”
“.... 몰라…?”
“예…?”
“자네…, 미래를 볼 줄 아는 거 아니었나?”
“그렇…긴 합니다만….”
“… ….”
아시타는 잠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난… 자네가 죽을 줄 아는 줄 알았네, 그려? 괜히 티냈네, 이거….”
“예~?”
여태 그럭저럭 이별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다 또다시 애먼 소리다. 융베리는 어이가 없어 크게 웃고야 말았다. 그래, 언제 간다고? 모렙니다. 이틀 남았지요.
그리고 이틀이 지난 후 아슈람에선 대대적인 귀환자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보르틴 대륙 전역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이었으니 그 수는 수만에 이르렀다. 사절단을 필두로 해서, 호위 군사들을 뒤쪽에 두고 이동하는 모습이 제법 장관이었다. 아시타와 묵은 창밖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타와 하백은 사절단 일행의 중간쯤에 있었고, 자와카는 융베리와 함께 선두에 있었다. 융베리는 레몽이 마차를 고집했지만 끝내 자와카와 함께 말을 탈 것을 고수했다. 고집스러운 늙은이 같으니라고…. 레몽의 입에서 괜한 험담이 씹혔다.
“지난해 팡그릿샤의 협약에서 동맹이 됐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각자 이권에 따라 맺은 동맹에 불과해. 바루나로서는 보다 확고한 주도권을 갖고 연합군을 결성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할 걸세.”
“그렇겠지요. 함부로 군을 움직이진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연합군이니….”
“주도권을 가지려면 먼저 그들을 배려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네. 그래서 ‘미키네오스의 망명자’가 아니라 ‘보르틴의 망명자’였던 거야.”
융베리는 사절단의 목적과 바루나의 의도에 대해 자와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명분을 얻기 위해서 라고는 해도, 자와카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귀환자들에게 약속한 그 막대한 이권이 보장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제안을 해 온 미키네오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스마르나 네오시아, 특히 바이마샤르 같은 데서도 거기에 동조를 하겠습니까? 그들이 망명자들을 받아서 그런 이권을 보장해준다는 보장은 또 어디 있습니까.”
“바이마샤르야 어떨지 모르지만, 이스마르나 네오시아는 다르네. 그들은 예전부터 교권이 강해지는 걸 마땅찮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국력이 필요해. 한 나라의 국력을 가늠할 때 가장 큰 기준이 뭔가? 그건 바로 결집력일세. 종교 숙청에서 다소 벗어나 있던 나라들이라고 해서 망명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런 망명자들까지도 끌어안는 모습을 행정부가 보여줘야 시민들의 믿음을 얻을 게 아니겠나.”
자와카는 융베리의 분석에 대단하다는 듯 헛웃음만 집어삼켰다. 보르틴 대륙 전체에 걸쳐 망명자를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바루나 국왕의 한 수에는 그런 정치적 계산이 숨어있었다. 귀환자를 박대할 이유가 없는 다른 국가들의 사정을 봐주는 듯하면서도, 그것이 보르틴 교원총련과 국왕 자신의 결정임을 내세우며 그 명분을 자신에게로 끌고 들어가는 것. 그것이 그의 노림수였다.
“역시 원로님이십니다. 명확한 분석을 해내시는군요.”
“국왕께서 매우 명민하신 게지요. 허허허….”
융베리는 ‘국왕’이란 칭호 외에 달리 공대를 쓰지 않았고, 그것이 레몽에게는 몹시 거슬렸다. 레몽은 개국 공신가문의 가주였고, 미키네오스 내에서도 충신으로 이름이 높은 자였다. 비록 같은 개국 가문이라고는 해도 바루나는 현재 자신이 몸담은 국가의 군주였다. 현재의 교권을 생각해볼 때 융베리의 언사는 다소 무례한 감이 있다고 여겼다.
“헌데, 원로님. 외람됩니다만….”
“말씀하시오.”
“저희 국왕 폐하에 대해 어째서 공대를 쓰지 않으시는지…?”
“불편하셨던 모양입니다.”
융베리는 말고삐를 잡으며 대답에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보르틴 교원총연합회의 전임 총장이었고, 이전엔 발덴 령의 추기경이었소. 교총은 미키네오스 소속이 아니라, 보르틴 대륙 전체에 걸쳐 있는 종교 연합체인데, 앞에서라면 모를까. 내가 어째서 그대가 아닌 사람들에게 말하면서까지 귀국의 군주를 높여 불러야 한다는 거지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레몽은 할 말이 없었다. 다만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는 수밖에. 융베리는 여유롭게 웃으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겼고, 레몽은 말을 재촉하여 그보다 앞선 일행으로 가버렸다. 자와카가 푹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도 너무 무안 주신 것 아닙니까? 명색이 한 나라의 재상인데….”
“난 대륙의 원로일세.”
“하하하~!”
자와카는 역시 대단한 학자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백은 무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뛰어나지는 이들에겐, 그렇지 않은 이들이 갖지 못한 곧고 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대륙 전체에 융베리가 미쳤던 학문적·종교적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그가 이토록 굽힘없이 자신의 논리를 펴낼 수 있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휘이~, 대단한데…?”
아슈람에서 멀어진 일행이 계곡 하나를 지날 무렵, 산의 능선을 타고 지나던 한 여행자가 이를 보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동이었다. 대체 몇 명이야…, 한 오만 명쯤 되려나, 이 정도면…? 혼잣말을 하는 그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떠돌아 다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빨아 입기는 하는 모양인지, 더럽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기운 것도 많았고, 신고 있는 신발은 다 헤진 탓에 끈을 달아 발목에 묶어서 신은 꼴이었다.
상당히 크고 단단한 체격에 황적색의 눈을 가진 그의 옆에는 커다란 행낭 하나와 칼을 싸놓은 것으로 보이는 가죽 주머니 다섯 자루가 있었다. 그나마 그것도 다 헤져서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역력했다.
“에이씨….”
거칠게 난 턱수염으로 기름이 흐르자 대충 어깨로 훔쳐내며 사절단과 귀환자 일행을 구경하던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놀랍군…, 놀라워…. 저렇게 강한 사람은 싸부 외에 처음인데….”
그가 시선을 고정한 것은 자와카였다.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커 보이는 덩치, 자신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게다가 타고 있는 말도, 말이라기보다는 괴물이라고 해야 옳을 만큼 컸다.
“아니 무슨……. 여물 대신에 고기를 처먹였나. 저게 말이야, 소야…?”
갑자기 그 말이 투레질을 했다. 동시에 자와카도 심상찮은 느낌에 고개를 들었고, 여행자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 왜 그러나…?”
“…. 보이십니까? 저기 저 자.”
“…꽤 멀리 있는 모양이군. 난 안 보이는데?”
“저 산등성이에 앉아있습니다.”
자와카는 손을 들어 가리켰다.
융베리는 그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말고삐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주둥이를 확 잡아당기는 그의 손짓에 말이 깜짝 놀라며 앞발을 들었고, 자와카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놀라며 재빨리 말에 떨어질 뻔 한 융베리를 안아들었다. 어이쿠~! 그 때문에 사신단이 조금 술렁거렸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앞서 가던 레몽이 이 소란에 사람을 보내왔지만, 자와카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별 일 아닙니다. 말이 좀 놀라는 통에…. 자와카는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융베리의 떨림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저 자는….”
“구루님…?”
그는 온 몸을 겨울철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융베리의 얼굴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은 공포였다. 그것도 절대적인 공포, 자와카는 그가 너무나 떨고 있자 일단 적의를 품은 눈으로 산등성이의 여행자를 다시 쏘아보았다.
“왜들 저래?”
“말이 좀 놀랐던 것 같은데…. 뭘 보고들 저러시지?”
하백은 자와카의 시선을 따라 산등성이로 눈을 들었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여행자였다. 꼬락서니도 허름하기 짝이 없는. 한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산짐승의 익힌 고기 같았다. 덩치가 크다, 뭔가 먹고 있다, 그 외에 그가 달리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자와카에게선 굉장한 투기가 나오고 있었다.
“…!”
리타도 발견했다.
“허, 참…. 무섭기도 하네…. 배고파서 고깃점 좀 뜯었다고 너무하는 거 아냐? 그렇게 째려볼 건 또 뭐람….”
그는 씹고 있던 걸 삼키고는 아직 살점이 붙어있는 커다란 뼈를 입에 덥석 문 채 주섬주섬 행낭을 챙겨들었다. 시끄러운 일은 질색이었다. 자와카는 분명 소름끼칠 정도로 강했지만, 괜히 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는 그에게 위협이 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어…?”
돌아서던 그의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 예리했지만 그것은 칼날 같다기보단 그를 잡아당기는 실 같은 느낌이었다. 이건 대체 무슨 느낌인가. 하는 의문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 그의 황적색 눈빛이 좀 더 적색으로 짙어지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리타와 시선이 마주쳤다. 뭔가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고, 자신을 잠식해오는 거대한 느낌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적이다.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환청처럼 그의 온몸을 울리는 감각이 그렇게 말했다. 그의 손이 이곳저곳을 기워놓은 검집으로 향했다.
“… 리타? 리타, 왜 그래?”
리타의 눈빛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백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녀와 산등성이의 여행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손이 검집을 집어 들자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 길 없는 하백도 일단 긴장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꽤 멀었기에 당장 공격을 해 들어오더라도 여유는 있었지만, 일단 검을 드는 것만으로도 경계하기에 충분했다.
“전하!!”
자와카는 그가 검집을 드는 자세를 보고는 황급히 말을 돌려 리타에게 달려왔다. 리타를 향해 돌아선 그의 검집을 드는 자세는 분명 공격 태세였다. 리타는 그가 부르는지 오는지 모르는 듯 움직임 없이 그를 쏘아보고만 있었다. 굉장한 기세가 오직 그 남자를 향해서만 쏘아져 가고 있었다.
푸르륵…!!
리타에게 다가가기 직전, 자와카의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별안간 발길을 멈춰 세웠다. 이유는 자와카도 쉬 알아챌 수 있었다. 오로지 한 방향만을 향해 발산되는 무시무시한 예기가 리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럴 수가…!’
검 한 자루 만져본 일 없는 리타에게서 이토록 절제된 예기가 뿜어져 나온다는 것을, 자와카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몽롱한 상태에서 검집을 열고 있었다. 자신이 뭘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한순간, 온 감각을 사로잡았던 묘한 느낌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호통소리가 그를 후려쳐갔다.
‘물러서지 못할까!!!’
남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앞에 있던 괴물 같은 말과 대머리의 큰 아저씨를 보고는 돌아서려던 자신이 왜 다시 뒤돌아서서 칼을 뽑으려 하고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당황한 그는 얼른 검집을 여미고는 다섯 개의 검자루를 단단히 묶은 뒤 얼른 행낭과 함께 걸쳤다. 대체 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빌어먹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씹어뱉으며 그는 줄행랑을 치듯 산등성이 뒤편의 숲속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이 어찌 된….”
“무엇이 말입니까?”
리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웃음까지 띤 채 되물었다. 무엇을 묻는지 모를 리가 없었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와카는 아직도 정신이 들지 않는지 벙벙한 얼굴로 리타를 쳐다보다가 헛웃음만 집어삼켰다.
“가시죠, 구루님?”
“아, 아아….”
화급한 상황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전하’라고 부르며 뛰어왔지만, 아슈람 내에서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고 지내온 두 사람이었다. 주종 관계가 밝혀지면 다른 이들로부터 색다른 시선을 받게 될 것이었으니까.
“왜 그래, 리타? 아는 사람이었어?”
“아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색을 하자 더 수상쩍다. 하백이 본 것은 분명한 공격 자세였다. 수련이 깊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정도의 구분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봤던 거야? 그 사람이 왜 널 보고 칼을 뽑으려고 했던 건데?”
“나도 몰라. 내가 이쁘니까 납치라도 하고 싶었나부지 뭐.”
“뭐…??”
웃기지도 않을 농담에 하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리타를 흘겨봤다. 행색이 하도 안됐어서 그냥 쳐다본 거였어. 더 묻지 마. 리타는 입을 다물어버린 채 말을 재촉해버렸고, 하백도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워 그저 따라가기만 했다.
궁정대신 미셀은 틈날 적마다 후원을 찾았다. 열일곱의 어린 애첩들도 있었지만, 공주만큼 그에게 만족을 안겨 준적은 없었다. 애첩들조차 꺼려하는 행위, 그러니까 제 남근을 입에 넣기를 주저 없이 하는 고결한 신분의 여인이었으니, 레이네의 기술도 기술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런 인식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미셀의 살찐 몸이 레이네의 엎드린 엉덩이를 부숴버릴 듯이 둔중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굉장한 무게가 뒤로부터 느껴져 왔고, 레이네는 그를 돌아보며 흐느꼈다. 그런 모습도 애첩들에게서 보기는 어려운 광경이었다.
“생각보다 절제가 없는 놈이로군….”
보고를 들은 바루나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말을 전한 시중은 그로부터 지시는커녕 아무 반응이 없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었다. 바루나의 손이 팔걸이 끝에 있는 사자상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한참을 그렇게 정적이 흐르고, 그가 몸을 일으켰다.
“…. 병부대신에게 갈 것이다. 따르라.”
“예, 폐하.”
한바탕 정사를 마친 뒤 나란히 누운 그들은 시녀들이 건네주는 잔을 기울이며 가쁜 숨을 골랐다. 그들이 쉬는 동안 시녀들이 수건을 가져다 그들의 다리 사이를 닦아내고 있었다. 궁정대신은 부드러운 실크 수건이 감싸며 자극하자 또다시 욕정이 불끈 솟아났다. 하지만 그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한창 피어나는 젊은 육신의 색욕을 감당해낸 직후에, 또 다시 아랫도리를 일으킬만한 기운은 없었다. 어쩐다…. 옆에 누운 공주의 젖가슴에 눈이 닿았다. 채 가라앉지 않은 레이네의 숨결을 따라 젖가슴이 함께 숨쉬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레이네의 입술을 느끼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녀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치욕적인 행동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엎드려 놓고 하기까지 했으니, 선뜻 요구하기가 망설여졌다.
‘하긴…, 엎드려 놓고 하는 건 겁간을 당할 때나 하는 거니까….’
한편으로는 레이네도 나름 머리를 계속 굴리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 자는 나에게 홀리긴 했지만, 원하는 건 몸뿐이다. 재무대신 르로아처럼 내가 누구랑 자고 말고를 질투할 자는 못 된다. 어쨌거나 왕궁의 일을 맡고 있으니 능구렁이이기야 하겠지만 내게서 원하는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그것을 보자, 레이네는 결정을 내렸다. 손을 뻗어 불룩한 배 아래에 있는 쪼그라든 늙은 성기를 쥐었다. 미셀의 눈이 빛났다.
‘음탕한 놈….’
곧이어 그녀의 입 안으로 작달만한 것이 뿌리까지 들어왔다. 따뜻하고 끈적한 느낌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오직 이 튀어나온 배 때문에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좋아요…?”
창녀처럼 물어오는 공주의 얼굴은 배에 가려서 반쯤만 보였다. 대신 엎드린 채 그를 향해 쳐든 엉덩이의 아래로 비부가 드러나 있었다.
병부대신 라크라오스의 저택.
오직 근위장만이 기립한 채 국왕과 라크라오스는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벌써 한참을 바루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없이 술잔만 비울 뿐이었다. 30년을 함께 한 동지이자 주인이었다. 바루나의 심정을 모르지 않는 라크라오스도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건네는 잔을 받아 잔을 비우고, 다시 잔을 채워서 건네줄 뿐이었다.
“병부대신.”
처음으로 말문이 열렸다.
술이 얼근히 오른 듯 바루나의 얼굴빛이 약간 들떠 있었다.
“예, 폐하.”
“자네가 보기에 레이네는 어떤 아인가…?”
“… ….”
“이 나라를 맡겨도 될 만한 싹이 보이는가…?”
“… ….”
라크라오스는 다른 말이 없었다. 30년을 주인으로 지척에서 모신 바루나 국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것쯤은 몇 마디 말만으로도, 때로는 아무 말 없이도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뜸을 들이는 건 언제나 바루나가 진실 되게 물을 경우뿐이었다.
“제 판단을 물으신다면….”
“….”
“공주님께서는 아직 어리신 만큼, 함께 길을 갈 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그렇겠지.”
“폐하….”
“제 어미가 죽고 유모라고 들여놓은 건 공주를 담보로 나와 협상을 하려 들었으니, 애시당초 그 아이가 배운 거라곤 수싸움밖에 없었네.”
“그것 또한 공주님의 재능입니다, 폐하.”
“재능이라. 재능….”
잠시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던 바루나가 쿡 하고 가볍게 웃음 지었다. 재능이라면 재능이지, 하긴 스무 살에 아비의 수까지 읽어낼 수 있으니까. 조금은 자조적이고 회한이 섞인 웃음이었다. 딸을 그렇게 만든 데 대한 자책 정도랄까.
“하지만 그 녀석 말이야. 그 많은 수싸움을 누굴 위해 해야 하는 건지. 그걸 몰라….”
술잔이 기울어졌다.
“그걸 먼저 가르쳤어야 했는가….”
“….”
“병부대신.”
“예, 폐하.”
“너는…,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나보다 더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다, 라크라오스.”
“….”
“칼을 들고 싸우는 전장에서도, 각자 든 패를 쥐고 수싸움을 하는 정치판에서도, 내가 진창 속에서 발을 뺀 후에도 끝까지 남아서…, 내 뒤를 받쳐주고 든든히 지켜온 사람이 단 하나 있다면 그건 너다. 알고 있겠지…?”
“저는 폐하의 가신이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미련맞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바루나는 쓸쓸하게 웃음지었다.
“병부대신이란 놈이 아직도 가신 흉내나 내기는….”
“폐하…!”
“형님의 목을 친 것도 가신으로서 한 일이라고 할 텐가?”
“… ….”
술잔이 바루나에게서 라크라오스에게로 건네졌다. 잔이 기울어지고, 실내엔 술 따르는 소리만이 감돌았다.
“그 순간부터 넌 이미 내 가신이 아니라 미키네오스의 종복이었다.”
“….”
“미키네오스의 국왕은 곧 국권이다. 이 나라의 모든 국법에 대한 도전은 곧 국왕의 몸에 대한 도전인 셈이지.”
“그렇습니다.”
“네가 그 아이를 좀 도와줘.”
“….”
“그 아이…, 그 아이는, 정치를 아직 몰라. 네 말대로…, 함께 길을 갈 사람이 필요해.”
“… ….”
“자네 아들이면 어떨까?”
“…!! 폐하…!!”
그는 바루나의 말뜻을 즉시 알아차렸다. 모르면 그것도 문제다. 그것은 라크라오스의 아들을 부마 삼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엎드리며 불복할 뜻을 밝혔다.
“그 명령만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폐하…! 어찌 제 아들이…!”
“그렇게 정색할 것 없어. 부족한 딸년이지만…, 난 네가 그 아이를 거두어줬으면 싶다.”
“폐하…!!”
“이런 청을 하는 게 얼마나 뻔뻔한 일인지 나도 모르지 않아. 하지만….”
바루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라크라오스는 엎드린 채로도 그런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 그의 주인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 앉은 후부터, 나는 사람이길 포기했네. 어떤 뻔뻔함도 감수해내기로 마음먹었다.”
“폐하…!”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난 이 나라가 전부야. 그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어. 그것 때문에 가문을 버려야 한다면 그렇게라도 할 거야.”
읊조리는 라크라오스는 주인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무겁게 그의 귀를 때렸다. 바루나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갔다.
“자식년 창부 만들어놓은 아비가, 가문인들 못 버릴까….”
교권국가였던 만큼 미키네오스는 성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여성의 정절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정사를 벌이는 데 있어서도 여성은 정숙해야 했다. 소리를 낸다거나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는 것은 타락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심지어는 국법으로 성문화되어 어길 시에는 재판을 통해 할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국왕은 그것이 얼마나 욕망을 음지 속에서 키워주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힘을 가진 귀족들에게 주는 당근으로써 그 욕망의 충족을 선택했고, 그 수단으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선택했다.
궁정대신이 돌아간 후원에서, 공주는 몇 차례에 걸쳐 목욕을 하고는 피로감에 젖어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남자가 다녀가면 그녀는 언제나 씻는 동안 침대보를 벗겨서 태워버리곤 새 것을 씌우곤 했다. 손짓을 하자, 엎드린 그녀의 하얀 나신에 기름이 부어지고 시중의 마사지가 이어졌다.
‘아무리 봐도 궁정대신은 언젠가 입을 나불거릴 거야. 르로아보단 그놈을 먼저 죽여야겠어….’
- 메텔 경은 아직 쓸모가 많은 자다. 나는 아직 그를 버릴 생각이 없다.
얼마 전 국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르로아는 내버려 둬도 그가 알아서 할 테고…, 미셀 이놈을 어떻게 죽이지…? 자객…? 아니야, 그건 마지막이야. 음…. 공주를 탐한다…? 그 죄명이면…, 아니지 가만…, 그러면 르로아가 자신도 내쳐질 거라고 생각할 텐데.’
재무대신은 머리가 꽤 잘 도는 편이었다. 술수 부분에서야 자신보다 떨어진다 해도, 적어도 궁중대신 미셀보다는 선이 굵고 속이 더 깊은 자였다. 조금이라도 의심을 살만한 수는 쓰지 않는 편이 옳았다.
‘어쩐담….’
종아리에서부터 허벅지, 그리고 엉덩이를 지나 시중의 손이 허리에 올라온다 싶을 무렵, 레이네는 생각을 거듭하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한율. 리타와 기싸움(?)을 벌였던 그 여행자의 이름이었다. 기실 그보다 나중에 그 스스로 이름을 밝힌 뒤 쓰려고 했지만, 갑갑해서 그냥 여기서 밝힌다. 대명사가 마땅치 않으므로. 멸망한 환국의 생존자로 하백과는 같은 민족이었다. 당년 33세. 그는 리타에 대한 묘한 적개심과 동시에 이끌림을 느끼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행렬 속에 몰래 합류했다. 덩치가 워낙 컸던 지라, 아슈람에서 귀환하는 이들도 그가 카마산 중의 한 명이겠거니 여기는 모양인지 달리 술렁거리는 일은 없었다.
“이대로 미키네오스까지 갈 거야?”
“그래야 하지 않겠어? 큰 전쟁이 일어난다는데….”
“그래…?”
“몰랐어? 보르틴 협약에서 결정됐다잖아.”
“그런… 내용이 있었어?”
물론 없었다.
리타는 그런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크소바에서의 깨달음이 그녀를 그런 경지로 이끌었다.
“물론 없었지.”
융베리의 목소리였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고 하백은 얼른 일어나 예를 갖추었고, 리타도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융베리는 놀랍다는 눈으로 리타를 보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벌써 앞일을 내다보게 되다니….”
“앞일을 내다봐요? 리타가…?”
“부럽지…?”
어깨를 으쓱하며 의기양양하게 하백을 내려다보는 리타. 황녀라도 그 모습은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녀였다. 융베리가 자리에 앉자 둘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인 그는 약간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며 둘에게 말을 꺼냈다.
“구루께서 내가 돌아가는 길에 변을 당한다고 하셨다.”
“예…?!”
“….”
놀라는 것은 하백뿐이었다. 리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런데, 아마도 그 일이 나 하나만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구나. 며칠 전에 보았던 그 여행자를 말하는 것이다. 리타는 알 수 있었다.
“넌 알고 있었어?”
전혀 동요하지 않는 리타를 향해 하백이 묻자 리타는 눈을 감으며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어지는 융베리의 이야기.
“일단 다른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 지금 무신장 자와카가 카마산들을 소집하고 있으니, 하백 너도 가보거라. 따로 호위대를 꾸려야 한다.”
“예, 구루님!”
하백은 이 모든 일을 내다보고 있었다는 융베리의 말에 놀랄 틈이 없었다. 물론 그것도 놀랄 만한 일이지만, 아크소바에서 나온 리타의 몸에서 느꼈던 상서로운 기운을 떠올려 보면 영 아닌 말도 아닌 듯했다.
‘대단해, 리타는…. 그에 비하면 난….’
몹시 보잘 것 없었다. 물론 그렇다.
검을 쥔 손을 들어보았다. 아직도 그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리타보다 앞선 것은 무력이었지만, 그것은 그가 카마산으로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리타는 빅쿠로서 경지를 넘어섰어. 그런데 카마산으로 난….’
빅쿠, 카마산은 아슈람의 수련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빅쿠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수양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스스로를 닦는 수행자들을 말하고, 카마산은 무예를 배우며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닦는 수행자들을 말한다. 그 외의 어떤 구분도 일절 없다. 신분과 재산, 출신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차등을 두지 않으니, 그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하백은 어금니를 꾸욱 깨물고 품안에 있는 책자를 만져보았다. 다리 셋 달린 새의 형상, 단지 그것만이 그가 갖고 있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전부였다. 그 안에 담긴 내용들 중 십 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좌절할 수는 없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젠가 나도 리타처럼 될 수 있다. 난 리타처럼 똑똑한 편도 아니고, 깊은 헤아림을 가지지도 못했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의지가 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그는 천천히 소집령이 내려졌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년 17세. 하백은 아직도 솜털 보송보송한 소년이었다. 가능성은 많다.
그의 기척이 사라진 후 융베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리타를 향해 오체복지의 예를 올렸다. 온 몸을 땅에 대고 그를 향해 완전한 복종의 표시를 한 것이었다. 리타는 앉은 그 자리에서 그를 향해 일어나세요, 하고 명했다.
“예.”
“그대는 나의 신하는 아닙니다. 어째서 내게 그런 예를 갖추는지요?”
“전하께선….”
융베리도 그녀의 신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의 왕이 되실 분입니다. 몸담은 곳이 어디가 되었건, 전하의 신하가 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지요.”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이미 싸움이 시작되고 있사옵니다.”
“며칠 전에 봤던 그 자 말인가요?”
“예, 전하. 그는….”
말끝을 흐리는 융베리의 몸이 공포로 다시 뒤덮이고 있었다. 일국의 재상 앞에서 그의 국왕을 향해 거침없는 논리를 펴는 꼿꼿한 대석학이, 두려움으로 감당을 못하고 있었다. 리타는 조용한 신색으로 그를 안정시켰다.
“그는 아직 자신의 길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
이해할 수 없었다. 선택이라니.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타고난 것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나중에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나와 같습니다.”
“…!”
리타와 같다는 것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마하수카의 영역에 들어섰단 말씀이십니까?!”
“…. 그렇게 되면, 그 때는 그 자신의 숙명과 끊임없이 싸워 이겨내야 할 겁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적어도 그대를 해치는 자는, 그가 아닙니다.”
리타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 여행자, 그러니까 한율이 곧 닥쳐올 겁난에서 도움이 될 지, 아니면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올지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리타도 입을 다물었다. 만일 그가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온다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이보쇼. 안 가오?”
“네…? 어딜….”
“카마산 소집령 떨어졌잖수. 카마산 아니었나?”
“카….”
태연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한율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잠시 멍한 얼굴로 뻐끔뻐끔 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디로 가는 이들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슬쩍 끼어들었으니, 어쩐지 들킨다는 것도 찜찜하다.
“아, 그… 그렇구만. 내 정신 좀 보게.”
황급히 행낭을 챙기며 일어서는 그를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부르는 소리라기보다는 발걸음을 붙드는 말이었다.
“어디서 온 거요?”
한율은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다 이야기하고, 받아주면 좋고 안 받아줘도 가던 길 가면 그만이다 싶었다. 나쁜 사람들 같지도 않고.
“아하하…, 그…게 실은….”
나이가 꽤 지긋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인상도 좋았다. 한율은 모든 것을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목적지도 없이 떠돈다는 건가? 그 뭐…, 그렇게 됐습니다, 노인장. 그 짐에 찬 것들은 칼자루인가보지? 예. 잘 쓸 줄은 모르지만 어쨌든…, 칼입지요. 묻는 말에 하나씩 하나씩 대답을 하며 그들과 말문을 텄다.
“그런데…, 슬쩍 끼어들어서 며칠 같이 오다보니, 귀향을 하시는 분들 같습니다만….”
“음…. 우리는 아슈람의 빅쿠들이라네. 원래는 미키네오스 왕국에서 살던 사람들이긴 하지만….”
미키네오스 왕국이라면 그도 아는 바가 있었다. 사정을 말하자 노인은 잘 알고 있군. 하며 웃음지었다. 그 동네,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던데요. 차라리 아슈람에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자네 말도 맞네. 어지간히 시끄러운 곳이긴 하지.”
한율이 건네주는 담뱃대로 뻐끔뻐끔 몇 모금 피우고는 깊이 들이쉬었다가 옅은 연기를 내뿜는 노인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나라도 많고, 사람도 많고…, 그러니 시끄러울 수밖에. 그는 곳곳에 모여앉아 불을 쬐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이 사람들을 보게.”
“… ….”
“나이가 들면…, 고고하고 깨끗한 것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죽는 것이 좋다네.”
“… 태어나고 자란 곳….”
한율의 되뇌임에 약간의 무게가 실렸다.
노인은 그의 황적색 눈을 살피며 출신을 물었다.
“자넨 어디서 왔나? 피부색이나 눈빛을 보니 우리 쪽 사람은 아니구먼.”
“아, 예…. 전 좀 먼 데서 왔지요.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말해보게. 이래 뵈어도 들은 건 많은 편일세.”
“잉그라드 대륙보다 더 위쪽입니다. 타림이라고 혹시….”
“타림…? 타림분지 말인가?!”
오, 아시는군요. 한율은 반색을 했지만 노인이 놀라는 건 그 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곳에서 이십년 전 처참한 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환국의 멸망, 그러니까 한율의 고국과 그 신민들이 몰살을 당한 사건. 자네 혹…. 한율도 그가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예. 환국 출신입니다. 그 아수라장에서 어떻게 살아나왔는지…, 하하~.”
“그래…, 그렇구만…. 허허…, 북방인들은 굉장히 크다고 들었는데. 자넬 보니 그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구먼 그래.”
“아… 이건…, 제가 좀 크기도 한 겁니다. 하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위에서 장작 타는 소리와 사람들의 이야기소리, 그리고 웃음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 카마산들이 모인다고 하셨었죠?”
“그래.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한율은 목을 뻗어 전체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이만한 인원이 대이동을 하는 중이니, 사절단의 호위대 정도로는 어렵기도 하겠지요. 뭐 그렇기도 하겠지.
“소집된다면 막사는 따로 있겠군요?”
“그렇지 않겠나. 왜? 자네도 가보고 싶은가?”
“하하…, 뭐 저도 보시다시피….”
어깨를 으쓱하자 그 큰 덩치가 더 커보였다. 힘깨나 쓰는 편이라서…. 도울 수 있다면 좀 거들어볼까 해서요.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말솜씨였다. 진실 되어 보이는 한율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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