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륵, 푸륵 키히힝~괴상한 소리를 내며 후방에서 달려오던 기마대의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갑작스럽게 멈춰서기 시작했다. 타고 있던 기마대원들이 떨어지거나 구르며 부상을 당하고, 방패진을 형성한 군사들의 대형이 급격하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죽여! 죽이자! 적이야! 적이다!
“진형을 유지하라!! 죽을 힘을 다해 버텨!! 보병 앞으로!! 전진한다!!”
그의 상황판단은 매우 빨랐다. 이 소름끼치는 살의의 덩어리, 산울림처럼 퍼져오는 마도들의 외침으로 기가 질리면서도 지금 후퇴를 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다는 지휘관으로서의 직감이 그를 움직였다. 돌격하라, 돌격!!
“전방이 밀린다! 카마산 백인대는 호위대를 지원해!! 나머지는 융베리 구루님을 겹겹이 에워싸라!! 어서!!!”
일단 이쪽의 상황은 자신들이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들리는 소리로 봐서 한율은 충분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라이반은 신속하게 전방 지원과 융베리의 호위를 지시하고 스스로 백인대를 이끌고 호위대 지원에 나섰다.
“이런 의리없는 놈들…!!”
그 바쁜 와중에도 한율의 눈에는 언덕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카마산들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라도 이날 마주친 마도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강철같은 체력과 황소같은 힘이 있어도, 이 많은 적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놈들 이거…! 훈련받은 놈들이다…! 순수한 살의와 적의로 움직이는 것들치곤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수백의 마도들, 이들은 끊임없이 그의 주위를 돌며 시선을 어지럽히고, 일정한 간격과 일정한 방향에서 덤벼들면서 동료의 시체를 쌓아 한율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있었다.
백병전이 치러지는 행렬의 전방에선 방어선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맹목적인 적의에 기가 꺾인 군사들이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수적 우세를 이용하지 못해 다행이라 여겼던 호위대장의 판단도 이쯤 와서는 소용이 없어졌다. 진세가 무너지면서 방어선이 뚫려버렸으니, 우회고 뭐고 할 것 없이 삽시간에 수천의 적수가 밀려들어온 까닭이었다. 레몽은 뭔가에 홀린 듯 막사 앞에 나왔다가 그들을 정면으로 맞아들이는 꼴이 되었다. 먼저 부딪친 마도가 그의 머릿가죽을 물어뜯었다. 다음은 왼팔, 다음은 가슴살, 다음은 목언저리, 그렇게 레몽의 몸이 처참하게 한 입 한 입 마도들에게 물어뜯겼다. 그들은 카마산 백인대보다 앞서 사절단을 그대로 통과하여 묵과 리타, 정확히 리타를 향해 직선으로 덤벼들었다. 어지간한 리타로서도 기가 질릴 만한 모습이었다. 수천이 넘어 보이는 파멸의 무리들이 오로지 자신만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이런 젠장…!! 저 계집애도 표적이 될 만한 걸…!!!”
한율은 마땅히 그러리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자신만이 그들의 표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도 없이 그런 일을 겪어왔으니. 자신만이 표적이라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지금 달려드는 마도들은 그리 강한 이들이 되지 못했다. 훈련을 받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집단으로 움직이는 자들. 물론 자신이 좀 지치기야 하겠지만, 돌파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요 표적이 하나 더 있다. 그녀는 자신처럼 주먹으로 뚫고 나갈 능력은 없다. 카마산을 믿어보려고 해도, 그들은 실전경험이 별로 없다. 설령 맞서 싸울 능력이 된다 해도 저쪽에서 몰려드는 마도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았다.
공포로 인해 카마산들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코가 물어뜯기고, 뱃가죽이 뜯기며 내장이 튀어나오고, 누군가는 머리의 반이 사라져버렸다. 이 광기어린 살육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라곤 고작 한율 한 명 뿐이었다.
‘내가 저 계집애를 데리고 다니는 한이 있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자신은 계속 표적이 될 것이고, 그녀 또한 마도들이 출현하는 곳에선 언제나 주요 표적이 될 것이었다. 그들과 싸우지도 못할 이들을 대동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한율은 자신을 덮친 마도들을 끌고 그쪽으로 향했다.
“젠장, 한 놈이라도 더…!”
적을 줄여야 했다. 카마산들 중에선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용감하게 맞서 칼을 휘두르는 이들도 있었다. 하백도 그들 중 하나였다. 특히 위기가 오자 그는 누구보다도 망설임없이 검을 내뻗어 갔다. 실력으로만 치자면 하백도 꽤 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마도들의 전진을 조금씩은 막아내고 있었다. 조금씩은. 이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야 해!! 적이다!! 적이야!!!”
그 소리는 외침이 되고 있었다. 카마산들이, 하백이 아무리 용기를 쥐어짜내도 적의와 살의가 넘실대는 이 외침에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리타로부터 그들은 스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왔다. 수천의 무리들이 몰려왔으니, 카마산 몇 명이 앞을 막아선다고 뚫리지 않을 방벽이 아니었다. 한율의 눈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황적색의 눈빛이 점점 진홍색으로 변해갔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진짜…!!”
자신에게 몰리는 것들만 해도 수백은 되는 듯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다. 어서 떨궈내고 리타를 구해야 했다. 이미 두세 명 정도가 카마산의 방벽을 뚫고 리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칼을 뽑는 수밖에 없다. 한율의 손이 목검으로 가는 순간,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리타에게 달려들던 마도들이 두동강이 나버렸다. 시간이 멈춘 듯, 대체 어디서 나온 자인지. 한율도 순간적으로 어라.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금색의 무사복과 무슨 표식같은 문양이 등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무지막지하게 큰 말 한 마리와 기사. 말이고 기사고 할 것 없이 둘 다 황금(금칠을 했는지 정말 금인지)의 갑옷을 두른 모습이었다. 그들을 본 리타의 얼굴에 안도감이, 융베리의 얼굴에 놀라움이, 한율의 얼굴엔 멍때리는 표정이 올랐다. 내가 그래도 주인공 격인데. 하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황금의 기사가 바닥에 닿을 듯 긴 장창의 끝에 달린 거대한 언월도를 높이 들고 군령을 내렸다.
‘경호대 측면교란, 척살대 후방돌파. 수비대 전방대치.’
무사복을 입은 자가 검을 치켜들고 크게 외친다.
황제폐하 만세…!!!
외치는 것치곤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그 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천둥이 내려치듯 작렬하는 음성이었다. 뒤이어 군사들의 복명복창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잉그라드 만세…!!!
“만샤르차크…!”
전투의 개시에서 반드시 황제의 영광과 제국의 영화를 외치며 돌격하는 무적의 투신들. 이라고 소문나 있는 부대. 귀환자 행렬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들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다. 보르틴 대륙에서도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론도 산맥을 건너야 당도하는 먼 제국의 땅에서 온 1천 5백의 군사들이 동시에 쇄도하기 시작했다.
“어이씨…, 저놈들 너무 멋진 거 아냐? 어엉…?!”
아직 여유가 있는지 농담조로 씨근거리며 또 하나의 머리를 박살내는 한율. 그러나. 아그작. 팔에 가벼운 느낌이 왔다.
“어…?”
만샤르차크가 나타났을 때보다 더 어? 했다. 마도들 중 하나가 그의 팔을 물어뜯으려고 깨물었다. 그들 따위에게 물어뜯길 한율도 아니었지만, 깨물렸다는 사실 자체가 더 기가 막혔다. 이놈들 봐라…. 진까지 펼쳐가며 애먹인 놈들이다. 게다가 비록 여행객이라지만 이지가 있는 사람이었고 이놈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고 보는 야만인들이다. 한율의 이마에 핏대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 개…새…끼…!!”
한율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포효성처럼 토해졌다. 온몸에서 폭발하듯 투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는 제 팔을 문 마도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쪽 손으로 덜미를 잡은 뒤 똑같이 물어뜯었다. 우직 소리가 나며 마도의 두개골이 으스러지고 뇌수가 튀어올랐다.
전방에선 마도들이 정신없이 학살되고 있었다. 거대한 말을 타고 리타의 앞을 막아선 자로부터 모든 군령이 전달되고 있었다.
‘경호대 퇴로 차단, 척살대 좌우 분산, 수비대와 위치교환, 수비대 돌격.’
측면을 교란하던 경호대가 뒤로 빠지며 길을 열어주자 척살대인 기병대가 장창과 언월도를 휘두르며 좌우로 갈라지고, 가운데가 휘저어진 마도들을 향해 앞을 막던 수비진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좌우로 갈라진 기병대는 수비대의 위치로 둘러싸며 학익진을 펼치고 돌격대에 밀려 좌우로 흩어지는 적을 척살하기 시작했다.
“이런 전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저 많은 군사가 저렇게….”
융베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군사들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하는 듯했다. 수천의 마도들이 순식간에 시체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생각하자 리타도 비로소 안심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퍼득 드는 생각이 들었다. 융베리도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를 향했다. 그리고 똑같이 멈칫했다. 저만치 떨어진 언덕 중턱쯤, 한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아 담뱃대에 연초를 꾹꾹 눌러 채우고 있었다.
“젠장…, 이 의리없는 카마산 놈들…. 이놈들이 나한테만 꾸역꾸역 달려든다고 날 내버려 두고 저 계집애한테 간단 말이지…. 두고 보자.”
저 계집애라면 달리 말할 것도 없이 리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온 몸에 청녹색의 마도의 피를 뒤집어 쓴 꼴이, 누가 마도고 누가 인간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지만, 그 태연자약한 모습하며 궁시렁대는 모습이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리타와 융베리는 놀랍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여 그저 헛바람만 집어삼킬 밖에 달리 반응할 수 없었다.
?…. 입안에 감도는 마도의 핏물을 뱉은 뒤 품을 뒤적거려 불씨를 꺼냈다. 뻐끔 뻐끔 담뱃대를 빨고는 연기를 푸우 뿜어내는 꼴이 전투를 치른 사람이 아니라 막 식사를 마친 골초처럼 보였다. 피만 뒤집어 쓰지 않았다면.
“어~이, 거기 기사양반!”
만샤르차크의 지휘관을 향해 큰 소리로 불러놓고 한율은 녹색 피를 처덕처덕 묻힌 그 꼴 그대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런데…, 그 갑주 말이오. 이거 진짜 금이오?”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황금빛의 철갑을 두른 그들을 보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궁금해 할만하긴 했지만, 이 시점에 그걸 물어보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리타는 그의 끔찍한 몰골에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군, 당신…. 그 많은 마도들을 상대로 어떻게….”
“뭐…, 그 정도야… 별 볼일 없는 놈들이 마릿수 믿고 덤비는 거, 그거 생각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거 아니유.”
그러나 한율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폭발했던 순간을 아는 자들은 따로 있었다. 무예에 대해 모르는 리타나 융베리는 눈앞의 전투에 정신이 빠져 있었지만, 거기에 참가하지 않았던 카마산, 그리고 참가했으면서도 계속 한율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하백, 또한 전투를 지휘했던 만샤르차크의 지휘관은, 그 순간 폭발하는 한율의 전율스러운 투기를 눈치채고 있었다.
‘전원 직검.’
어느새 리타의 앞에 정렬한 오백 기의 만샤르차크와 일천의 경호대는 하나로 맞춘 듯 동시에 창검을 하늘을 향해 나란히 내뻗었다. 지휘관은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은 뒤 리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오른팔을 수평으로 절도있게 들어올려 예를 올렸다.
“만샤르차크 4전대장 우탐파, 나바스암바라 2전대장 비사카 외 1천 4백 98명, 전하께 문후 드리옵니다.”
“문후 한 번 아슬아슬하게 올리는군요.”
“송구하옵니다. 전하.”
“에….”
한율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리타가 보통 신분이 아니라는 것쯤. 그가 놀란 건 그런 것이 아니라, 만샤르차크 전대장이라는 이가 올리는 예법 때문이었다. 오른팔을 수평으로 들어올리고 가슴을 치듯 예를 올리는 것은 환국 무사들의 전통적인 예법이었다. 허, 이것들 봐라…. 꽤 비슷하잖아?
“뭐야, 그럼…. 리타가 잉그라드 황녀였어?”
“리타가…?”
“이건 뭐 우리랑은 하늘과 땅 차이잖아.”
카마산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백도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무슨 일인지 얼른 수습해 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부상자나 전사자는?”
“부상자 셋이며 전사자는 없사옵니다.”
압승이었다. 리타는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는 사절단의 생존자들을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내일 아침일찍 떠나도록 하지요. 전대장.”
“예, 전하.”
“귀환자 행렬의 호위책임을 그대에게 맡깁니다.”
“그리하겠나이다.”
순식간에 행렬의 리더가 리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사절단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그녀에게 수장의 자리를 빼앗긴 격이 되었다. 레몽을 수행했던 외무차장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보시오!!”
“…?”
“잉그라드의 공주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목에 비사카의 칼날이 닿아 있었다. 누구도 그가 움직이는 걸 보지 못했고, 심지어 발검을 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엄청나게 빠른 검세였다. 한율은 감탄사를 자아내며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백은 그런 그가 이제는 무섭기까지 했다.
‘대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이, 이게 무슨 짓…이오!!”
“대 잉그라드 제국의 황녀 전하이십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외교부에서 부수장급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비사카의 날카로운 살의를 피부로 느끼면서도 말을 끝까지 내뱉는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으음…. 엄연히 이 귀환행렬은 나의 국왕 폐하와 보르틴 총장 예하의 뜻을 받들어 가는 것이오! 누가 되었건 이 행렬을 이끄는 것은 미키네오스에서 해야 할 일이라 이말입니다!”
노기충천했으나 알맹이가 없는 말이었다. 리타는 이 자리에서 그런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뜻대로 하라는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계집 따위가…, 외무차장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러서는 리타에게 그는 한 걸음 나아가며 가슴을 폈다.
“고귀하신 대 잉그라드 제국의 황녀 전하께 간곡히 청하겠소. 귀국의 용맹하고 강대무비한 일천 오백의 기병대와 보병대가 우리 보르틴 시민들의 안전한 귀환을 돕게끔 해주시겠습니까?”
한율은 별안간 폭소를 터뜨렸다. 대체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녹청색의 핏물을 잔뜩 뒤집어쓴 채 못 참겠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머리까지 절레절레 젓는 그의 웃음소리가 심히 거슬렸지만 외무차장은 애써 그것을 외면한 채 리타를 똑바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음….”
융베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 늙은이는 뭐야. 외무차장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외무차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난 보르틴 교원총연합회 전임총장 마놀로 융베리일세. 지금은 보르틴 교총의 원로회 교원 자격으로 고인이 되신 레몽 도메네크 경과 함께 귀환자 행렬을 이끌고 가던 길이었는데….”
“초…총장 예하…!”
외무차장을 비롯한 사절단의 남은 생존자들 여섯은 융베리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곤 무릎으로 기어와 융베리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한율의 웃음소리는 죽어가고 있었지만 더 지독해졌다. 숨 넘어가게 생겼다. 리타도 이번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도메네크 경이 없는 지금 이 행렬을 책임질 사람은 나여야 할 것 같은데. 어떤가…?”
“그…그렇습니다.”
“… …!”
사절단은 진땀을 흘리며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융베리는 그들에게 어서 뒷수습을 하라 지시한 후 리타를 보았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우탐파에게 경비를 맡겼다.
“전대장, 숙영지를 정비하는 동안 외각 경비를 맡겨도 되겠지요?”
“받들겠나이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우탐파. 자와카보다 더 커보였다. 녹청색의 피를 뒤집어 쓴 꼴의 한율, 아까부터 그의 시선은 우탐파에게 꽂혀 있었다. 동질감은 아니다. 뭔가가 느껴졌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경계심까진 아니더라도 일종의 이질감과 같았다.
‘저 자는 인간의 무예를 펼치는 자가 아니다.’
그것은 리타에게서 받는 이질감과 묘한 적의와는 또한 달랐다.
“당신은 좀 씻는 편이 좋겠군요. 수백의 적들과 싸워야 했으니까.”
“으음….”
한율은 리타의 말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몸을 움츠렸다. 역시 쉽지 않았다. 이 여자에게만큼은 그렇다. 주변이 정리되면서 리타는 융베리와 함께 막사로 들어갔다. 쳐들어 오던 적들도 물러갔고, 다행히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카마산들이 수십 희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타의 얼굴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다. 융베리가 그 까닭을 물었다.
“본국에…. 본국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일이 생기다니요?”
“지금 온 부대는 규모가 너무 커요. 나는 자와카 대신 누군가를 보내올 것으로만 생각했지, 이렇게 대규모로 올 줄은 몰랐습니다.”
“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랬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미처 살피지 못했으나 리타의 말대로 이 먼 곳까지 천오백의 군사가 나타난다는 것은 쉬 납득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와카 대장이 떠난 지 겨우 며칠만에 왔다면 국경 근처의 부대였을 겁니다. 이렇게 빨리 왔다면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렇다면…, 보르틴 대륙을 종단했어야….”
“산맥을 타고 왔어도 이 시각에 당도한 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기동력으로만 보면 나는 새와 같은 자들이니까요. 문제는 병력입니다.”
“… ….”
한율은 오래간만에 깨끗하게 씻고는 옷까지 갈아입고 숙영지 안을 어슬렁거렸다. 마도들의 기습이 있었지만, 경계를 서는 잉그라드의 군사들이 보여준 압도적인 힘이 귀환자 행렬들을 안정시켜놓은 듯했다. 여기저기서 금빛으로 번쩍이는 기병대와 금빛 무사복을 입은 자들을 보며 떠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대단하다, 멋있다, 뭐 그런 말들이었다.
‘쳇…, 난 완전히 찬밥이로구만….’
그리고 눈앞에 여전히 상태 좋지 않은 하백이 검을 끌어안은 채 앉아있었다. 그는 옆에 가 앉아 연초를 꺼내 태웠다.
“… ….”
“… ….”
동족의 두 남자는 말없이 잠시 시간을 보냈다.
“이봐.”
“예.”
대답은 대번에 나왔지만 그다지 집중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한율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난 아직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
“그러니 내가 아는 것만 말하지.”
“….”
“칼자루를 쥐고 살아왔으니 어렴풋이 알고 있겠지만, 자네의 몸에 있는 기운과 내 몸에 있는 기운은 서로 달라. 흐름도 다르고, 그것이 응축되고 다시 발산되는 형태도. 모두 달라.”
“….”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는 일이지. 그건 습성과도 같은 거니까.”
“…,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래, 뭐… 쉽진 않지만 바뀌기도 하지, 간혹은….”
그는 담뱃대를 바닥에 툭.쳐서 재를 한 번 떨구어 내고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바꿔야만 하는 건가? 짧게나마 네가 몸으로 겪어낸 그 시간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 만큼, 그렇게나 출신에 대한 애착이 진한가?”
“….”
하백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생각해볼만한 의문이었다.
“뿌리와 과거를 모르쇠로 살겠다 드는 것도 과히 좋은 일은 아니다만…, 굳이 자신의 생생한 뿌리가 있는데도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걸 붙들고 거기에 새 뿌리를 내려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 좀 미련해 보인다.”
“…!”
“아직 내 말을 다 이해는 못하겠지만. 그냥 들어두라고.”
그는 연기를 뿌옇게 내뿜으며 탁탁 털어 재로 변한 연초를 모두 털어냈다.
“과거가…,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고, 아직도 살아있는 대지라면 그 곳에 새 뿌리를 내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환국은 이미 죽은 땅일세. 죽은 땅에 심어져선 입이 터지라고 빨아봐야 물 한 모금 얻어먹을 수 없어. 알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한다만…, 이미 네 지금의 토지는 충분히 비옥하다. 그것으로 만족해도 돼.”
그는 할 말을 마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기저기 횃불이 켜져 있는 곳으로 멀어지는 한율의 뒷모습이 환상처럼 어른거렸다. 하백의 귀에 그의 마지막 말이 감돌았다. 이미 네 지금의 토지는 충분히 비옥하다. 살아있는 대지. 살아있는 땅. 그런 말들이 하백의 뇌리에 강렬하게 꽂혀들었다.
“만샤르차크?! 만샤르차크라니…?!”
국왕 바루나는 론지니아 근방에서 일어났던 전투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번도 만샤르차크가 대륙을 건너갔다는 보고를 들은 바가 없었다. 게다가 천 명이 넘는 규모의 군사라니, 일이 꼬이는 것 같았다.
“도메네크 경…, 아니 사절단은 무사하다던가…?”
특정 이름을 지칭하려다 아차 싶었다. 얼른 정정하는 국왕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외사부장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도메네크의 유고를 보고했다. 융베리 원로께선 무사하시고, 사절단 중 생존자는 여섯 명이라고 합니다.
“호위대는…?”
“…전멸…했습니다.”
바루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예기치 않은 잉그라드군의 등장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융베리는 그렇다 해도 정무대신 레몽은 그곳에서 반드시 죽어줘야만 했다.
‘잉그라드 황실의 친위대…. 그들이 왔다면 거기 잉그라드의 황족, 적어도 황녀가 아니면 황태자는 있을 것이다. 이건 기회야….’
“어디쯤 오고 있다던가?”
“나흘 전에 론지니아를 출발했다고 하니, 지금쯤이면 바이마샤르 국경을 진입했을 겁니다.”
“….”
바루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외사부장에게 명령을 내린다.
“내사부에 알리고, 서기관.”
“예, 폐하.”
“내일 정무회의 안건에 추가하도록 하라.”
“예, 폐하.”
왕궁 후원.
“레몽은 죽고…, 융베리는 살았다….”
내사부장이 다녀간 뒤 공주 레이네는 발가벗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술잔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것을 따라 시선을 굴렸다. 잉그라드 군 천오백…, 그것도 황실 친위대면, 거기 황족이 있다는 얘긴데. 호위대는 전멸하고 레몽이 죽고, 잉그라드 군에게 구원을 받았다 이거지…. 혼잣말을 하는 그녀의 머릿속에선 내사부장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정보들을 조합하며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판도가 짜였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뇰.”
“예, 공주님.”
그녀는 자신의 비경에 흐르던 남자의 흔적을 닦아내곤 큰 수건을 든 채 목욕을 준비하던 시중에게 말을 건넸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이번 사건이 국왕한테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공…공주님…! 어떻게 저 같은 노예에게 그런 걸….”
“넌 이 나라에서 부왕과 나를 빼고는 가장 정보에 밝은 사람이야. 그 정도면 노예가 아니라 정보차장 못지 않지.”
“전….”
“괜찮으니까 말해봐.”
“….”
사뇰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황한 기색은 역력했으나, 시중으로서 그는 조용히 서 있을 뿐 몸짓으로 그것을 표현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 대답…들으려면 화대가 필요한가?”
“아, 아닙니다, 공주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하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내가 설마 너 따위와 몸을 섞을까…!”
레이네는 웃음을 터뜨리며 일어나 술잔을 내던지곤 준비된 욕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갓 스무 살, 이제 막 성장하여 완전한 여인의 모습을 갖춘 레이네의 몸은 아름다웠다. 자고로 명가의 자제들은 돈 많고 집안이 좋다보니 보기 좋은 떡부터 골라먹는 법이다. 나이가 들면 배도 나오고 주름도 늘어지고, 탐욕으로 그늘지며 추한 외모를 갖는 이들도 종종 생겨나지만. 일단은 그 씨앗부터가 좋은데다 잘 먹고 잘 관리하며 자라난 젊은이들은 대체로 그 외모만큼은 썩 훌륭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게다가 갓 성숙한 몸이 되어 성감을 자극하여 쾌락에 눈을 뜨게 만들어졌으니, 거기에 요염함이 더해져 레이네의 걸음걸이는 자연적으로 엉덩이와 골반을 살랑살랑 흔드는 꼴이었다.
사뇰은 조용히 레이네의 뒤를 따라 욕조 뒤에 기립했다. 시녀들이 레이네의 몸에 물을 끼얹고, 물에 꽃잎을 띄웠다.
“후우….”
담뱃대를 받아 연기를 내뿜는 레이네.
“사뇰.”
“예, 공주님.”
“왕궁 능구렁이가….”
부왕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아바마마’라고, 없는 데서라도 말해본 일이 없었다. 연유를 아는 사람은 후원 공주의 거처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이번에 아주 좋은 패를 잡았어. 한 번 게임해서 판을 쓸어낼 만큼….”
“…?”
그녀의 말은 사뇰을 향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기를 내뿜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레이네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아직 그녀가 이 상황에서 당장 얻어낼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었다.
“잉그라드의 황족…, 누굴까, 대체….”
“진형을 유지하라!! 죽을 힘을 다해 버텨!! 보병 앞으로!! 전진한다!!”
그의 상황판단은 매우 빨랐다. 이 소름끼치는 살의의 덩어리, 산울림처럼 퍼져오는 마도들의 외침으로 기가 질리면서도 지금 후퇴를 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다는 지휘관으로서의 직감이 그를 움직였다. 돌격하라, 돌격!!
“전방이 밀린다! 카마산 백인대는 호위대를 지원해!! 나머지는 융베리 구루님을 겹겹이 에워싸라!! 어서!!!”
일단 이쪽의 상황은 자신들이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들리는 소리로 봐서 한율은 충분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라이반은 신속하게 전방 지원과 융베리의 호위를 지시하고 스스로 백인대를 이끌고 호위대 지원에 나섰다.
“이런 의리없는 놈들…!!”
그 바쁜 와중에도 한율의 눈에는 언덕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카마산들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라도 이날 마주친 마도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강철같은 체력과 황소같은 힘이 있어도, 이 많은 적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놈들 이거…! 훈련받은 놈들이다…! 순수한 살의와 적의로 움직이는 것들치곤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수백의 마도들, 이들은 끊임없이 그의 주위를 돌며 시선을 어지럽히고, 일정한 간격과 일정한 방향에서 덤벼들면서 동료의 시체를 쌓아 한율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있었다.
백병전이 치러지는 행렬의 전방에선 방어선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맹목적인 적의에 기가 꺾인 군사들이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수적 우세를 이용하지 못해 다행이라 여겼던 호위대장의 판단도 이쯤 와서는 소용이 없어졌다. 진세가 무너지면서 방어선이 뚫려버렸으니, 우회고 뭐고 할 것 없이 삽시간에 수천의 적수가 밀려들어온 까닭이었다. 레몽은 뭔가에 홀린 듯 막사 앞에 나왔다가 그들을 정면으로 맞아들이는 꼴이 되었다. 먼저 부딪친 마도가 그의 머릿가죽을 물어뜯었다. 다음은 왼팔, 다음은 가슴살, 다음은 목언저리, 그렇게 레몽의 몸이 처참하게 한 입 한 입 마도들에게 물어뜯겼다. 그들은 카마산 백인대보다 앞서 사절단을 그대로 통과하여 묵과 리타, 정확히 리타를 향해 직선으로 덤벼들었다. 어지간한 리타로서도 기가 질릴 만한 모습이었다. 수천이 넘어 보이는 파멸의 무리들이 오로지 자신만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이런 젠장…!! 저 계집애도 표적이 될 만한 걸…!!!”
한율은 마땅히 그러리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자신만이 그들의 표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도 없이 그런 일을 겪어왔으니. 자신만이 표적이라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지금 달려드는 마도들은 그리 강한 이들이 되지 못했다. 훈련을 받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집단으로 움직이는 자들. 물론 자신이 좀 지치기야 하겠지만, 돌파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요 표적이 하나 더 있다. 그녀는 자신처럼 주먹으로 뚫고 나갈 능력은 없다. 카마산을 믿어보려고 해도, 그들은 실전경험이 별로 없다. 설령 맞서 싸울 능력이 된다 해도 저쪽에서 몰려드는 마도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았다.
공포로 인해 카마산들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코가 물어뜯기고, 뱃가죽이 뜯기며 내장이 튀어나오고, 누군가는 머리의 반이 사라져버렸다. 이 광기어린 살육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라곤 고작 한율 한 명 뿐이었다.
‘내가 저 계집애를 데리고 다니는 한이 있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자신은 계속 표적이 될 것이고, 그녀 또한 마도들이 출현하는 곳에선 언제나 주요 표적이 될 것이었다. 그들과 싸우지도 못할 이들을 대동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한율은 자신을 덮친 마도들을 끌고 그쪽으로 향했다.
“젠장, 한 놈이라도 더…!”
적을 줄여야 했다. 카마산들 중에선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용감하게 맞서 칼을 휘두르는 이들도 있었다. 하백도 그들 중 하나였다. 특히 위기가 오자 그는 누구보다도 망설임없이 검을 내뻗어 갔다. 실력으로만 치자면 하백도 꽤 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마도들의 전진을 조금씩은 막아내고 있었다. 조금씩은. 이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야 해!! 적이다!! 적이야!!!”
그 소리는 외침이 되고 있었다. 카마산들이, 하백이 아무리 용기를 쥐어짜내도 적의와 살의가 넘실대는 이 외침에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리타로부터 그들은 스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왔다. 수천의 무리들이 몰려왔으니, 카마산 몇 명이 앞을 막아선다고 뚫리지 않을 방벽이 아니었다. 한율의 눈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황적색의 눈빛이 점점 진홍색으로 변해갔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진짜…!!”
자신에게 몰리는 것들만 해도 수백은 되는 듯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다. 어서 떨궈내고 리타를 구해야 했다. 이미 두세 명 정도가 카마산의 방벽을 뚫고 리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칼을 뽑는 수밖에 없다. 한율의 손이 목검으로 가는 순간,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리타에게 달려들던 마도들이 두동강이 나버렸다. 시간이 멈춘 듯, 대체 어디서 나온 자인지. 한율도 순간적으로 어라.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금색의 무사복과 무슨 표식같은 문양이 등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무지막지하게 큰 말 한 마리와 기사. 말이고 기사고 할 것 없이 둘 다 황금(금칠을 했는지 정말 금인지)의 갑옷을 두른 모습이었다. 그들을 본 리타의 얼굴에 안도감이, 융베리의 얼굴에 놀라움이, 한율의 얼굴엔 멍때리는 표정이 올랐다. 내가 그래도 주인공 격인데. 하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황금의 기사가 바닥에 닿을 듯 긴 장창의 끝에 달린 거대한 언월도를 높이 들고 군령을 내렸다.
‘경호대 측면교란, 척살대 후방돌파. 수비대 전방대치.’
무사복을 입은 자가 검을 치켜들고 크게 외친다.
황제폐하 만세…!!!
외치는 것치곤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그 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천둥이 내려치듯 작렬하는 음성이었다. 뒤이어 군사들의 복명복창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잉그라드 만세…!!!
“만샤르차크…!”
전투의 개시에서 반드시 황제의 영광과 제국의 영화를 외치며 돌격하는 무적의 투신들. 이라고 소문나 있는 부대. 귀환자 행렬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들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다. 보르틴 대륙에서도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론도 산맥을 건너야 당도하는 먼 제국의 땅에서 온 1천 5백의 군사들이 동시에 쇄도하기 시작했다.
“어이씨…, 저놈들 너무 멋진 거 아냐? 어엉…?!”
아직 여유가 있는지 농담조로 씨근거리며 또 하나의 머리를 박살내는 한율. 그러나. 아그작. 팔에 가벼운 느낌이 왔다.
“어…?”
만샤르차크가 나타났을 때보다 더 어? 했다. 마도들 중 하나가 그의 팔을 물어뜯으려고 깨물었다. 그들 따위에게 물어뜯길 한율도 아니었지만, 깨물렸다는 사실 자체가 더 기가 막혔다. 이놈들 봐라…. 진까지 펼쳐가며 애먹인 놈들이다. 게다가 비록 여행객이라지만 이지가 있는 사람이었고 이놈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고 보는 야만인들이다. 한율의 이마에 핏대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 개…새…끼…!!”
한율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포효성처럼 토해졌다. 온몸에서 폭발하듯 투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는 제 팔을 문 마도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쪽 손으로 덜미를 잡은 뒤 똑같이 물어뜯었다. 우직 소리가 나며 마도의 두개골이 으스러지고 뇌수가 튀어올랐다.
전방에선 마도들이 정신없이 학살되고 있었다. 거대한 말을 타고 리타의 앞을 막아선 자로부터 모든 군령이 전달되고 있었다.
‘경호대 퇴로 차단, 척살대 좌우 분산, 수비대와 위치교환, 수비대 돌격.’
측면을 교란하던 경호대가 뒤로 빠지며 길을 열어주자 척살대인 기병대가 장창과 언월도를 휘두르며 좌우로 갈라지고, 가운데가 휘저어진 마도들을 향해 앞을 막던 수비진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좌우로 갈라진 기병대는 수비대의 위치로 둘러싸며 학익진을 펼치고 돌격대에 밀려 좌우로 흩어지는 적을 척살하기 시작했다.
“이런 전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저 많은 군사가 저렇게….”
융베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군사들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하는 듯했다. 수천의 마도들이 순식간에 시체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생각하자 리타도 비로소 안심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퍼득 드는 생각이 들었다. 융베리도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를 향했다. 그리고 똑같이 멈칫했다. 저만치 떨어진 언덕 중턱쯤, 한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아 담뱃대에 연초를 꾹꾹 눌러 채우고 있었다.
“젠장…, 이 의리없는 카마산 놈들…. 이놈들이 나한테만 꾸역꾸역 달려든다고 날 내버려 두고 저 계집애한테 간단 말이지…. 두고 보자.”
저 계집애라면 달리 말할 것도 없이 리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온 몸에 청녹색의 마도의 피를 뒤집어 쓴 꼴이, 누가 마도고 누가 인간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지만, 그 태연자약한 모습하며 궁시렁대는 모습이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리타와 융베리는 놀랍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여 그저 헛바람만 집어삼킬 밖에 달리 반응할 수 없었다.
?…. 입안에 감도는 마도의 핏물을 뱉은 뒤 품을 뒤적거려 불씨를 꺼냈다. 뻐끔 뻐끔 담뱃대를 빨고는 연기를 푸우 뿜어내는 꼴이 전투를 치른 사람이 아니라 막 식사를 마친 골초처럼 보였다. 피만 뒤집어 쓰지 않았다면.
“어~이, 거기 기사양반!”
만샤르차크의 지휘관을 향해 큰 소리로 불러놓고 한율은 녹색 피를 처덕처덕 묻힌 그 꼴 그대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런데…, 그 갑주 말이오. 이거 진짜 금이오?”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황금빛의 철갑을 두른 그들을 보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궁금해 할만하긴 했지만, 이 시점에 그걸 물어보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리타는 그의 끔찍한 몰골에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군, 당신…. 그 많은 마도들을 상대로 어떻게….”
“뭐…, 그 정도야… 별 볼일 없는 놈들이 마릿수 믿고 덤비는 거, 그거 생각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거 아니유.”
그러나 한율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폭발했던 순간을 아는 자들은 따로 있었다. 무예에 대해 모르는 리타나 융베리는 눈앞의 전투에 정신이 빠져 있었지만, 거기에 참가하지 않았던 카마산, 그리고 참가했으면서도 계속 한율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하백, 또한 전투를 지휘했던 만샤르차크의 지휘관은, 그 순간 폭발하는 한율의 전율스러운 투기를 눈치채고 있었다.
‘전원 직검.’
어느새 리타의 앞에 정렬한 오백 기의 만샤르차크와 일천의 경호대는 하나로 맞춘 듯 동시에 창검을 하늘을 향해 나란히 내뻗었다. 지휘관은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은 뒤 리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오른팔을 수평으로 절도있게 들어올려 예를 올렸다.
“만샤르차크 4전대장 우탐파, 나바스암바라 2전대장 비사카 외 1천 4백 98명, 전하께 문후 드리옵니다.”
“문후 한 번 아슬아슬하게 올리는군요.”
“송구하옵니다. 전하.”
“에….”
한율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리타가 보통 신분이 아니라는 것쯤. 그가 놀란 건 그런 것이 아니라, 만샤르차크 전대장이라는 이가 올리는 예법 때문이었다. 오른팔을 수평으로 들어올리고 가슴을 치듯 예를 올리는 것은 환국 무사들의 전통적인 예법이었다. 허, 이것들 봐라…. 꽤 비슷하잖아?
“뭐야, 그럼…. 리타가 잉그라드 황녀였어?”
“리타가…?”
“이건 뭐 우리랑은 하늘과 땅 차이잖아.”
카마산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백도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무슨 일인지 얼른 수습해 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부상자나 전사자는?”
“부상자 셋이며 전사자는 없사옵니다.”
압승이었다. 리타는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는 사절단의 생존자들을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내일 아침일찍 떠나도록 하지요. 전대장.”
“예, 전하.”
“귀환자 행렬의 호위책임을 그대에게 맡깁니다.”
“그리하겠나이다.”
순식간에 행렬의 리더가 리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사절단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그녀에게 수장의 자리를 빼앗긴 격이 되었다. 레몽을 수행했던 외무차장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보시오!!”
“…?”
“잉그라드의 공주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목에 비사카의 칼날이 닿아 있었다. 누구도 그가 움직이는 걸 보지 못했고, 심지어 발검을 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엄청나게 빠른 검세였다. 한율은 감탄사를 자아내며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백은 그런 그가 이제는 무섭기까지 했다.
‘대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이, 이게 무슨 짓…이오!!”
“대 잉그라드 제국의 황녀 전하이십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외교부에서 부수장급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비사카의 날카로운 살의를 피부로 느끼면서도 말을 끝까지 내뱉는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으음…. 엄연히 이 귀환행렬은 나의 국왕 폐하와 보르틴 총장 예하의 뜻을 받들어 가는 것이오! 누가 되었건 이 행렬을 이끄는 것은 미키네오스에서 해야 할 일이라 이말입니다!”
노기충천했으나 알맹이가 없는 말이었다. 리타는 이 자리에서 그런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뜻대로 하라는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계집 따위가…, 외무차장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러서는 리타에게 그는 한 걸음 나아가며 가슴을 폈다.
“고귀하신 대 잉그라드 제국의 황녀 전하께 간곡히 청하겠소. 귀국의 용맹하고 강대무비한 일천 오백의 기병대와 보병대가 우리 보르틴 시민들의 안전한 귀환을 돕게끔 해주시겠습니까?”
한율은 별안간 폭소를 터뜨렸다. 대체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녹청색의 핏물을 잔뜩 뒤집어쓴 채 못 참겠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머리까지 절레절레 젓는 그의 웃음소리가 심히 거슬렸지만 외무차장은 애써 그것을 외면한 채 리타를 똑바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음….”
융베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 늙은이는 뭐야. 외무차장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외무차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난 보르틴 교원총연합회 전임총장 마놀로 융베리일세. 지금은 보르틴 교총의 원로회 교원 자격으로 고인이 되신 레몽 도메네크 경과 함께 귀환자 행렬을 이끌고 가던 길이었는데….”
“초…총장 예하…!”
외무차장을 비롯한 사절단의 남은 생존자들 여섯은 융베리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곤 무릎으로 기어와 융베리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한율의 웃음소리는 죽어가고 있었지만 더 지독해졌다. 숨 넘어가게 생겼다. 리타도 이번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도메네크 경이 없는 지금 이 행렬을 책임질 사람은 나여야 할 것 같은데. 어떤가…?”
“그…그렇습니다.”
“… …!”
사절단은 진땀을 흘리며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융베리는 그들에게 어서 뒷수습을 하라 지시한 후 리타를 보았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우탐파에게 경비를 맡겼다.
“전대장, 숙영지를 정비하는 동안 외각 경비를 맡겨도 되겠지요?”
“받들겠나이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우탐파. 자와카보다 더 커보였다. 녹청색의 피를 뒤집어 쓴 꼴의 한율, 아까부터 그의 시선은 우탐파에게 꽂혀 있었다. 동질감은 아니다. 뭔가가 느껴졌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경계심까진 아니더라도 일종의 이질감과 같았다.
‘저 자는 인간의 무예를 펼치는 자가 아니다.’
그것은 리타에게서 받는 이질감과 묘한 적의와는 또한 달랐다.
“당신은 좀 씻는 편이 좋겠군요. 수백의 적들과 싸워야 했으니까.”
“으음….”
한율은 리타의 말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몸을 움츠렸다. 역시 쉽지 않았다. 이 여자에게만큼은 그렇다. 주변이 정리되면서 리타는 융베리와 함께 막사로 들어갔다. 쳐들어 오던 적들도 물러갔고, 다행히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카마산들이 수십 희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타의 얼굴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다. 융베리가 그 까닭을 물었다.
“본국에…. 본국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일이 생기다니요?”
“지금 온 부대는 규모가 너무 커요. 나는 자와카 대신 누군가를 보내올 것으로만 생각했지, 이렇게 대규모로 올 줄은 몰랐습니다.”
“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랬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미처 살피지 못했으나 리타의 말대로 이 먼 곳까지 천오백의 군사가 나타난다는 것은 쉬 납득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와카 대장이 떠난 지 겨우 며칠만에 왔다면 국경 근처의 부대였을 겁니다. 이렇게 빨리 왔다면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렇다면…, 보르틴 대륙을 종단했어야….”
“산맥을 타고 왔어도 이 시각에 당도한 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기동력으로만 보면 나는 새와 같은 자들이니까요. 문제는 병력입니다.”
“… ….”
한율은 오래간만에 깨끗하게 씻고는 옷까지 갈아입고 숙영지 안을 어슬렁거렸다. 마도들의 기습이 있었지만, 경계를 서는 잉그라드의 군사들이 보여준 압도적인 힘이 귀환자 행렬들을 안정시켜놓은 듯했다. 여기저기서 금빛으로 번쩍이는 기병대와 금빛 무사복을 입은 자들을 보며 떠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대단하다, 멋있다, 뭐 그런 말들이었다.
‘쳇…, 난 완전히 찬밥이로구만….’
그리고 눈앞에 여전히 상태 좋지 않은 하백이 검을 끌어안은 채 앉아있었다. 그는 옆에 가 앉아 연초를 꺼내 태웠다.
“… ….”
“… ….”
동족의 두 남자는 말없이 잠시 시간을 보냈다.
“이봐.”
“예.”
대답은 대번에 나왔지만 그다지 집중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한율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난 아직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
“그러니 내가 아는 것만 말하지.”
“….”
“칼자루를 쥐고 살아왔으니 어렴풋이 알고 있겠지만, 자네의 몸에 있는 기운과 내 몸에 있는 기운은 서로 달라. 흐름도 다르고, 그것이 응축되고 다시 발산되는 형태도. 모두 달라.”
“….”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는 일이지. 그건 습성과도 같은 거니까.”
“…,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래, 뭐… 쉽진 않지만 바뀌기도 하지, 간혹은….”
그는 담뱃대를 바닥에 툭.쳐서 재를 한 번 떨구어 내고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바꿔야만 하는 건가? 짧게나마 네가 몸으로 겪어낸 그 시간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 만큼, 그렇게나 출신에 대한 애착이 진한가?”
“….”
하백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생각해볼만한 의문이었다.
“뿌리와 과거를 모르쇠로 살겠다 드는 것도 과히 좋은 일은 아니다만…, 굳이 자신의 생생한 뿌리가 있는데도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걸 붙들고 거기에 새 뿌리를 내려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 좀 미련해 보인다.”
“…!”
“아직 내 말을 다 이해는 못하겠지만. 그냥 들어두라고.”
그는 연기를 뿌옇게 내뿜으며 탁탁 털어 재로 변한 연초를 모두 털어냈다.
“과거가…,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고, 아직도 살아있는 대지라면 그 곳에 새 뿌리를 내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환국은 이미 죽은 땅일세. 죽은 땅에 심어져선 입이 터지라고 빨아봐야 물 한 모금 얻어먹을 수 없어. 알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한다만…, 이미 네 지금의 토지는 충분히 비옥하다. 그것으로 만족해도 돼.”
그는 할 말을 마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기저기 횃불이 켜져 있는 곳으로 멀어지는 한율의 뒷모습이 환상처럼 어른거렸다. 하백의 귀에 그의 마지막 말이 감돌았다. 이미 네 지금의 토지는 충분히 비옥하다. 살아있는 대지. 살아있는 땅. 그런 말들이 하백의 뇌리에 강렬하게 꽂혀들었다.
“만샤르차크?! 만샤르차크라니…?!”
국왕 바루나는 론지니아 근방에서 일어났던 전투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번도 만샤르차크가 대륙을 건너갔다는 보고를 들은 바가 없었다. 게다가 천 명이 넘는 규모의 군사라니, 일이 꼬이는 것 같았다.
“도메네크 경…, 아니 사절단은 무사하다던가…?”
특정 이름을 지칭하려다 아차 싶었다. 얼른 정정하는 국왕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외사부장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도메네크의 유고를 보고했다. 융베리 원로께선 무사하시고, 사절단 중 생존자는 여섯 명이라고 합니다.
“호위대는…?”
“…전멸…했습니다.”
바루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예기치 않은 잉그라드군의 등장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융베리는 그렇다 해도 정무대신 레몽은 그곳에서 반드시 죽어줘야만 했다.
‘잉그라드 황실의 친위대…. 그들이 왔다면 거기 잉그라드의 황족, 적어도 황녀가 아니면 황태자는 있을 것이다. 이건 기회야….’
“어디쯤 오고 있다던가?”
“나흘 전에 론지니아를 출발했다고 하니, 지금쯤이면 바이마샤르 국경을 진입했을 겁니다.”
“….”
바루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외사부장에게 명령을 내린다.
“내사부에 알리고, 서기관.”
“예, 폐하.”
“내일 정무회의 안건에 추가하도록 하라.”
“예, 폐하.”
왕궁 후원.
“레몽은 죽고…, 융베리는 살았다….”
내사부장이 다녀간 뒤 공주 레이네는 발가벗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술잔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것을 따라 시선을 굴렸다. 잉그라드 군 천오백…, 그것도 황실 친위대면, 거기 황족이 있다는 얘긴데. 호위대는 전멸하고 레몽이 죽고, 잉그라드 군에게 구원을 받았다 이거지…. 혼잣말을 하는 그녀의 머릿속에선 내사부장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정보들을 조합하며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판도가 짜였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뇰.”
“예, 공주님.”
그녀는 자신의 비경에 흐르던 남자의 흔적을 닦아내곤 큰 수건을 든 채 목욕을 준비하던 시중에게 말을 건넸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이번 사건이 국왕한테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공…공주님…! 어떻게 저 같은 노예에게 그런 걸….”
“넌 이 나라에서 부왕과 나를 빼고는 가장 정보에 밝은 사람이야. 그 정도면 노예가 아니라 정보차장 못지 않지.”
“전….”
“괜찮으니까 말해봐.”
“….”
사뇰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황한 기색은 역력했으나, 시중으로서 그는 조용히 서 있을 뿐 몸짓으로 그것을 표현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 대답…들으려면 화대가 필요한가?”
“아, 아닙니다, 공주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하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내가 설마 너 따위와 몸을 섞을까…!”
레이네는 웃음을 터뜨리며 일어나 술잔을 내던지곤 준비된 욕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갓 스무 살, 이제 막 성장하여 완전한 여인의 모습을 갖춘 레이네의 몸은 아름다웠다. 자고로 명가의 자제들은 돈 많고 집안이 좋다보니 보기 좋은 떡부터 골라먹는 법이다. 나이가 들면 배도 나오고 주름도 늘어지고, 탐욕으로 그늘지며 추한 외모를 갖는 이들도 종종 생겨나지만. 일단은 그 씨앗부터가 좋은데다 잘 먹고 잘 관리하며 자라난 젊은이들은 대체로 그 외모만큼은 썩 훌륭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게다가 갓 성숙한 몸이 되어 성감을 자극하여 쾌락에 눈을 뜨게 만들어졌으니, 거기에 요염함이 더해져 레이네의 걸음걸이는 자연적으로 엉덩이와 골반을 살랑살랑 흔드는 꼴이었다.
사뇰은 조용히 레이네의 뒤를 따라 욕조 뒤에 기립했다. 시녀들이 레이네의 몸에 물을 끼얹고, 물에 꽃잎을 띄웠다.
“후우….”
담뱃대를 받아 연기를 내뿜는 레이네.
“사뇰.”
“예, 공주님.”
“왕궁 능구렁이가….”
부왕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아바마마’라고, 없는 데서라도 말해본 일이 없었다. 연유를 아는 사람은 후원 공주의 거처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이번에 아주 좋은 패를 잡았어. 한 번 게임해서 판을 쓸어낼 만큼….”
“…?”
그녀의 말은 사뇰을 향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기를 내뿜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레이네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아직 그녀가 이 상황에서 당장 얻어낼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었다.
“잉그라드의 황족…, 누굴까,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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