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날, 바이마샤르에선 축제 분위기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새해가 오면 곧바로 보위부 전군 시찰을 나서야 할 한율로서는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어울릴 처지가 되지 못했다.
“에이씨, 진짜…. 괜히 시찰 따위 한다고 했나….”
서재에 앉아 끙끙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들어왔다. 아직도 책을 보고 계십니까? 흐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시찰을 간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갈 순 없잖습니까~. 뭘 좀 알아야 가서 이것저것 묻기도 좀 하고…, 그러죠….”
“하긴 그렇기도 하군요.”
수긍하며 집사는 그의 앞에 있던 식은 찻잔을 쟁반에 담아 치웠다. 오늘 연초는 안 태우십니다…? 아… 머리 나빠지신다기에…. 생각외로 귀가 얇으시군요. 이따금씩 이렇게 자신을 놀리는 집사는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능구렁이가 아니었다. 한율은 못 당하겠다는 듯 쓰게 웃으며 다시 책에 눈길을 주다가 말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내일 의회당에서 연말 연회가 있다고, 꼭 오시랍니다. 총리께서 직접 초대를 하셨더군요.”
“그래요…?”
“예복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니, 저기 이보세요, 집사님…!”
“안 가시게요?”
“아니, 안 간다기보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집사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인사를 하고는 나가버렸고, 한율은 한참 그가 나간 문을 보다가 혀를 차버렸다. 하여간…못 당하겠어, 저 아저씨는….
이튿날 연회 갈 준비에 핫산의 집은 야단법석이었다. 아로사와 나자르는 방에서 시종들의 도움을 받으며 예복을 갖추는 중이었다. 여기 뒤쪽, 깃 제대로 섰어? 네, 괜찮습니다 아가씨. 나 허리 휘장 좀 봐줘. 아무래도 군인이다보니, 그런 것들에 대해 신경이 많이 쓰이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의장대는 오늘 정신없겠다.”
“어휴…, 이번 의장대에 안 걸리길 잘했지. 안 그래도 시찰 때문에 정신없는데 의장대 총사는 거의 죽음이었겠어. 하하….”
“나가자. 다 됐으면….”
“어어. 나 검 좀 차고….”
둘이 방문을 열고 나서는데, 몇 걸음 떨어진 곳의 아이린 방에서 난리법석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못 고르겠어…! 유모! 나 뭐가 좋을까? 아이고, 아가씨 이걸로도 충분하세요…!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옷을 고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주 난리네, 난리…. 요즘 좀 조용하다더니….”
“지난번에 한율 공 집에 갔다가 그 난리를 피웠다잖아. 그 뒤로는 침울해져 있었다던데….”
“오늘 한율 공도 오지 않겠어? 그러니 저 야단이지.”
“어쨌든 침울한 것보단 보기 좋네.”
둘은 키득거리며 중앙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이린의 방에서 들렸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아래층 복도에서도 울려퍼지고 있었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좀 대충 해…! 당신은 지금 대충 하란 소리가 나와요?! 어떡해, 진짜~, 뭐 입어, 나~~!!
“똑같애, 똑같애….”
“아이린보고 뭐라고 하실 일이 아니야, 엄마도….”
한편 한율은 조촐한 예복을 입고는 아무래도 어색한지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집사도 이날만큼은 단정하게 차려입고 시녀들이 한율의 복장을 점검해주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도 검 다섯 자루를 다 가지고 가실 겁니까…?”
“…아뇨. 한 자루만 가져갈 겁니다.”
“한 자루라면…?”
“가장 긴 거요.”
“아하….”
집사가 돌아보는 곳에는 환인의 표식이 장식된 장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전 저 표식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래요? 예…. 무슨 새 같기도 한 것이…. 그런데 새는 아니겠죠. 다리가 셋이나 달린 새가….
“새 맞습니다.”
“예…?”
“다리 셋 달린 까마귀죠. 환국의 상징입니다.”
“까마귀요? 그런 새도 있습니까?”
“… ….”
한율은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보고는 아니, 집사님께서 모르시는 것도 있었습니까? 저 모르는 거 많습니다. 아직 위원님의 알몸도 보지 못했습니다. 시녀들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고, 한율은 내가 말을 말지 하는 얼굴로 검을 가져다 허리에 찼다.
“가십시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저택을 출발하자 집안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젊은 시녀들이 비로소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자, 우리도 파티하자, 파티~!!! 온 집안이 갑작스레 시끄러워졌다. 시녀들을 비롯한 시종 모두가 1층의 연회장으로 모여들었고, 주방에서 음식이 속속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왜 저럽니까, 갑자기…?”
“도둑이 들었나보죠.”
“이보세요, 집사.”
“물론 농담입니다.”
“으휴….”
의회당의 광장은 시민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곳곳에 커다란 식탁이 놓였고, 그 위에 음식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시민들은 마음껏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을 떠들썩하게 보내고 있었다. 거리의 악사들도 모여서 여기저기서 연주를 했다. 몇몇의 시민들은 그 음악에 맞춰 다같이 춤을 추기도 했고, 무희들이 그 가운데로 돌아다니며 춤을 주도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흥에 겨워 빈 술통을 가져다 놓고 두들기며 저희들끼리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었다. 아이들은 아비의 목마를 타고 노래를 부르거나, 엄마의 손을 잡고 무희들을 따라다니며 떼를 쓰기도 했다. 어떤 아이들은 벌써 지쳐서 잠들어 버리기도 했다. 마치 바이마샤르의 수도 시락에 있는 모든 시민들이 다 모인 듯, 십만이 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을 듯한 의회당 광장은 발 디딜 틈조차 없어보였다.
이 대규모의 파티가 바로 공화국 바이마샤르의 전통이었다. 총리 기즈는 의회당의 테라스로 핫산, 토메즈와 함께 나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의장대가 예복을 입고 광장의 양쪽 끝에서부터 열을 맞추어 나왔다. 음악이 멈추었고, 춤을 추던 사람들도 의장대의 일사불란한 분열행진에 잠시 손을 놓았다. 멋있다~, 근사해~. 연습 진짜 많이 했겠다~, 오늘 같은 날 쟤넨 무슨 고생이래~.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 그들의 분열이 끝나고 광장 양쪽에 나란히 도열하자 사람들은 다시 기즈에게로 일제히 눈길을 돌렸다. 수만 명의 눈길이 일제히 총리에게로 몰리자 의장대의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자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전 부대, 발도-!!!”
한 사람이 칼을 뽑듯 수백 명의 의장대가 일시에 검을 뽑아 팔을 수평으로 뻗어 검끝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다.
“예도-!!!”
이번엔 동시에 하늘로 높이 찔렀다가 가슴 높이로 내려 팔을 겨드랑이에 붙였다. 모든 동작이 서로 실이라도 매달아놓은 듯 완전히 일치했다. 의장대가 시민들을 향해 군례를 올리는 이 모습은 연말 연회의 구경거리 중 하나였다. 구령을 붙이던 대표가 총리를 향해 돌아서선 군례를 올렸다. 총리의 화답을 받은 그가 다시 검을 넣고 돌아서서 구령을 외치자, 뽑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장대는 전원이 동시에 검을 집어넣었다.
“존경하는 바이마샤르의 시민 여러분!! 바이마샤르의 국정을 책임지는 총리 기즈 마텐바이어입니다!! 한 해 동안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시민들의 웃음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재치있게 농담조로 인사를 띄운 기즈는 웃음소리가 잦아들 무렵 다시 말을 이어붙였다.
“저게…, 재미있는 거야…?”
한율은 웃는 시민들이 이해되지 않아 슬쩍 아로사에게 물어봤고, 아로사는 쿡 하고 조심스럽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유행어라고 설명해줬다. 각하께서 맨 처음 총리직 수락연설문에서 쓰셨던 말이에요. 남부지방 사투리를 쓰면서 그러시는 바람에 엄숙한 자리였는데 시민들이 다 웃어서 한바탕 소란스러웠었죠. 아하…. 저 양반이 원조였구먼….
“… ….”
한율과 함께 서서 수군거리는 아로사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핫산의 친딸인 아이린이었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이 연회장에서 웃음보다 한숨을 더 많이 내쉬는 것은 그녀 하나뿐인 듯했다. 아이린은 꽤 미인이었기에, 그 자리에 모인 군부의 젊은 지휘관들과 의회 의원의 자제들이 저희들끼리 쳐다보며 어떻게 엮어볼까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다가가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린의 눈이 한율에게 시도 때도 없이 가는데다, 그녀의 주변 공기가 묵직했으니, 다가설 엄두가 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뭘 망설여~, 그래봐야 여자잖아. 일단 부딪쳐 보라고.”
“문제는 그게 아니야. 행여 수작부리다가 기분이라도 상하게 해 봐. 핫산 의원은 차기 총리로 거론되는 사람이라고.”
“어휴…,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쩝…. 아쉽다….”
“필승전략 같은 거 없냐, 누구…?”
“그런데 또 상대는 왜 한율 위원이야.”
“뭐 어때, 어차피 허울만 좋은 위원인데.”
“…?”
아로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한율은 문득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의식하곤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이린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곤 모른 척했지만,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한율이 아니었다. 그의 입이 슬쩍 돌아가며 씁쓰레한 입맛을 다셨다. ?….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엄마는 여당 원내총무의 부인과 잠시 수군거리고는 서로 고개를 끄덕인 뒤 아이린에게로 다가갔다. 왜? 재미없어…? …. 이리 와 봐. …? 무작정 손을 잡고 끌고 가는 엄마를 따라는 나섰지만 아이린의 표정은 영 떨떠름했다. 또 한율 공하고 어울리지 말란 소리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었다.
“어머, 정말 아름다운 따님이세요, 부인…!”
“하하, 아드님이 참 늠름하시네요. 인사드려. 아버지랑 같이 일하시는 원내총무님 자제분이셔.”
“… ….”
아이린의 표정은 괴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잖이 놀란 것도 있었던데다,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그 마음을 숨기려다 보니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 것이었다. 엄마는 눈치를 채고는 그녀의 허리를 꽉 꼬집으며 신호를 주었다.
“아…하하, 얘가 사실 좀 몸이 안좋아서 오늘 안 오려다가…. 그래도 연말 연횐데 안 올 수가 없어서 좀 무리를 했나봐요.”
“아, 예…. 만나뵈어 반갑습니다. 루카스 스클로도프입니다.”
“네….”
“…이름…!”
“아, 아이린 바슈미르입니다.”
그제야 마지못해 아이린은 이름을 말하며 엉거주춤 몸을 숙였다. 드러난 목언저리의 뽀얀 앞가슴 피부가 루카스의 눈에 꽂혔다. 그는 아찔한 기분에 얼른 눈을 감으며 어색하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하하…, 그럼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놀게 하고, 우린 저쪽으로 가실까요…?”
“그, 그러시죠. 루카스. 아가씨게 잘 해드려야 한다?”
“예, 어머니.”
엄마는 원내총무댁을 이끌고 서두르자며 얼른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죄송해요, 아이가 아직도 저 모양이라…. 정말 많이 안좋은가봐요. 좀 그래요, 며칠을 끙끙 앓다가 오늘 일어나갖곤 지 아빠 생각한다고 억지로 나온 거라서…. 저런…, 그럼 무리를 하지 말고…, 아니아니. 일단 얼굴을 보는 게 중요하니까, 다음에 제대로 자리를 한 번 만들자고요. 그래요, 그래요…. 그렇게 숙덕거리는 모친네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 사이엔 어색함만이 잔뜩 차올라 있었다.
“아이린님…?”
“….”
“아이린님.”
“…네, 네…??”
토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아이린, 루카스는 키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 남자가 미쳤나 왜 처웃나 하는 얼굴로 자신을 살피는 아이린을 보고 그녀가 불쾌해한다 여겼는지 그는 얼른 헛기침을 하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저 두어 번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시기에….
“아, 네….”
“… 오늘 정말 몸이 많이 안좋으신데 무리하신 것 아닙니까?”
“…, 아니에요.”
샴페인 잔을 입에 대며 마시는 둥 마는 둥,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린의 시선은 여전히 남몰래 한율을 쫓고 있었다. 그는 총리부터 시작해서 여야 원내총무, 원내대표, 사무총장, 보위부, 행정부, 정보부 할 것 없이 정치권의 인사들과 줄줄이 인사를 나누며 꽤나 바빠보였다.
하얀 블라우스에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었던 옷색과 같은 녹색의 정장 외투를 걸친 그는 키가 커서 그런지 근사하게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올 것 같은 긴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서 묶었고, 단촐한 장식이 붙은 허리춤의 긴 장검의 검집은 은은한 붉은빛을 띠고 있어 포인트를 살려주고 있었다. 이 평가적인 서술은 어디까지나 아이린의 시선에서이며, 그저 단정한 정도가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한율의 옷차림은 다른 귀족 자제들의 차림새에 비해 단촐하다못해 초라해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따위의 것들이 아이린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주 유명인사 났네, 났어….”
“그런데 진짜 크긴 엄청나게 크다야.”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크하하하…!”
“정말로 수백 명을 혼자 상대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걸 믿어?”
“그게 거짓말이라고는 해도, 적어도 수십 명은 됐을 거 아냐.”
“그렇겠지…?”
“결투 같은 건 꿈도 못 꾸겠다. 저 팔 좀 봐라. 내 허벅지보다 굵은 거 같다.”
“저 옷도 아마 맞는 게 없어서 따로 만들었을 것 같은데…?”
젊은 사내들은 그를 보곤 질투심 반, 가십거리 반으로 너도 나도 질세라 한 마디씩 내놓으며 한율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대충 인사를 끝낸 한율은 음식이 놓인 식탁 쪽으로 와서는 거기에 양 손을 짚고 혀를 내둘렀다. 어휴…. 이럴 때 집사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지도…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그 양반 있다고 뭐가 나아지긴 나아지겠어…?
한편, 한율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아이린은 그가 혼자 떨어지게 되자 즉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그나마 어떻게든 이야기를 터 보려고 이 소리 저 소리 늘어놓던 루카스는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아니, 뭐야…? 그녀가 가는 곳을 본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 으익…!!”
인기척이 나 옆을 본 한율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아이린은 그의 반응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몹시 불쾌하여 잔뜩 인상을 구겼다. 주위를 둘러본 한율이 마치 사람 많은 곳에서 아이를 나무라는 아비와 같이 크게 뜬 눈을 부라리며 뭐 하는 짓이냐는 듯 그녀를 향해 도리질했다.
“….”
이내 울상으로 변할 것 같은 아이린을 보면서 곤란하여 어쩔 줄을 모르던 한율은 별안간 그녀가 소매를 덥석 잡아 끌자 움찔했다. 알았어요, 갈게, 갈게…. 이거 좀 놔~. 진땀을 흘리며 마임처럼 몸짓 손짓 눈짓으로 그가 거의 애원을 하자, 아이린은 손을 놓으며 조용히 그를 째려보고는 홱 돌아서서 의결당 쪽 테라스로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아이…씨, 진짜…. 골치아프네, 저 아가씨…. 그 자리에 서서 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던 한율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테라스로 향했다.
이거 봐라…. 남자가 있는데 날 소개시켜준단 말이지…? 떼놓기 위해서…. 그 꼴을 계속 보고 있던 루카스는 입꼬리가 비틀어지며 비릿한 웃음을 띄웠다.
테라스로 나간 아이린과 한율은 말없이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한율은 바깥쪽을, 아이린은 안쪽을 향해 서 있었다. 표정은 각각 달랐지만, 달갑지 않아하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러다 별안간 동시에, 아니 대체 왜…! 라고 하다 멈칫하고는 서로에게 먼저 하라고 미뤘다. 몇 번인가 서로 미루다가 한율이 먼저 시작했다.
“대체 왜 내가 좋아요? 뭣 때문에 좋아요?”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 좋아하는 게 아니면? …왜 이러는 건데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묻던 한율은 이어지는 아이린의 대답에 목을 잡고 뒤로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사랑해요. 좋아하지 않고 사랑한다구요!”
“아…, 아오… ….”
이젠 당황하기도 지겨웠다. 그는 눈을 깜빡거리며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이 아가씨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잔뜩 부어터진 얼굴을 하고서 그를 쳐다보는 아이린의 얼굴이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이봐요. 아가씨.”
“난 아가씨가 아니라 아이린이에요, 아이린, 바슈미르…! 내 이름을 불러요. 왜 자꾸 날 아가씨라고 해요?!”
앙칼지게 쏘아부치자 한율은 짐짓 아, 그렇지 하는 얼굴로 되뇌어보듯 아이린, 아이린, 아이린? 아이린. 음, 아이린~. 그녀는 그만 푹 하고 웃어버렸고, 한율도 그녀를 보면서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웃지 마세요. 난 지금 심각해요.”
“나도 심각하외다.”
“…. 난 무슨 일이 있어도 한율님하고 혼인할 거에요. 혼인해서….”
“이, 이봐요, 아이린 아가씨. 그게….”
“한율님 아내가 돼서, 매일매일 한율님 아침식사랑 저녁식사도 직접 챙겨드릴 거에요. 매일매일 한율님 목욕도 시켜드리구요. 매일매일…. 매일매일…. 어쨌든 아기도 많이 많이 나을 거에요.”
우물거리는 투를 보니 정말 뭘 모르는 아가씨로구나 싶었다. 한율은 한숨을 푸욱 소리가 날 정도로 길게 토해내며 테라스에 손을 짚고는 하늘을 봤다가 땅을 봤다가 하면서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아니, 뭘 보고 날 좋아했어요?”
“… ….”
“대답해봐요. 궁금해서 그래요, 정말….”
“…겨….”
“겨…?”
아이린은 몹시 망설였다. 그를 끌어당기려고 겨드랑이를 안았다가 좋아하게 되었다고는 죽어도 말하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딱히 둘러댈 다른 말도 없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에는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도 해주지 않을 성싶었다. 한율이 양손을 내저으며 재촉하자 아이린은 귀까지 빨개지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겨드랑…이요.”
“… ….”
잠시 멍해있던 한율은 내가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마임을 하듯 제 겨드랑이를 번갈아 보고는 다시 아이린을 쳐다봤다. 슬쩍 눈을 들어 그를 본 아이린은 그가 다시 한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손가락을 겨드랑이를 가리키자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아하하하하하…!!”
“… …. 이거요? 이 겨드랑이?”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거 웃지 말고 대답해 봐요. 내가 잘못 들은 겁니까?”
기왕 꺼낸 거 말 못할 이유가 없겠다 생각하고 아이린은 턱을 바짝 쳐들며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네. 하고. 이런 괴상망측한 일이 있나. 한율의 얼굴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로사가 발목을 다쳐서 그… 있잖아요.”
“예예, 뜸치료.”
“예, 뜸. 그거 불 붙일 때…. 한율님한테 뭐 하시는 거냐면서 잡아당기려고…, 겨드랑이를 안았었는데….”
“…. 그래서요?”
“… 그게….”
“…뭐, 이 겨드랑이가 무슨… 어~이, 아가씨, 나 어때? 이럽디까??”
“아하하하하하하…! 그건 아니구요~!”
아이린은 건들거리며 건달처럼 말해보는 그에게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그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 단단하고 묵직했어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한율님은 그 날 아로사의 발목도 치료해주시고…, 그것도 처음 보는 치료법으로요. 게다가 신기한 걸 많이 알고 계시니까…. 점점 마음도 가고…. 그래서, 이 겨드랑이가 불을 지폈다 이거구만. 거 참…. 한율이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을 받아내자 아이린은 대체 여자에 대해 아는 게 뭐냐며 뾰족하게 따지고 들었다.
“여자들은 그런 게 있다구요! 흥, 남자들이 뭘 알겠어.”
“흥, 남자들이 뭘 좀 알지.”
“자꾸 농담할 거에요?”
“알았어요, 미안해. 미안…. 그럼 이번엔 아이린이 물어봐요. 아까 뭘 물어보려고 했어요?”
“왜 내가 싫으냐고 물어보려고 했어요.”
“… ….”
한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상했던 질문이지만 난감한 기분이었다. 그걸 어떻게 이 스물 한 살 먹은 철없는 아가씨에게 설명을 해야 할 지, 도무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가 끙끙거리고만 있자, 아이린이 대답을 재촉했다.
“가만 있어봐요. 생각중이니까.”
“생각중이라뇨. 정말 제가 싫으신 거에요?”
“그게 아니고….”
참 나 이거 난처하네…. 한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담뱃대를 꺼냈다. 잠깐 여유 좀 부립시다. …그러시든가. 그는 거기에 연초를 꾹꾹 눌러담고는 불을 붙여 뻐끔 뻐끔 빨았다. 후유…. 연기를 내뿜는지 한숨을 내쉬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이린을 싫어하지 않아요.”
“…. 그런데요…?”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죠.”
“…좋아하면 좋아하고 말면 말지. 좋아하는 편이란 건 또 뭐예요?”
“…. 일단…. 아버지에게서 들으셨겠지만. 그런 정치적인 문제들은 다 빼놓을게요. 다 빼고….”
“….”
“음…. 이걸 얼마나 이해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음….”
“…. 뭔데요~?”
“… ….”
여러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핫산은 문득 테라스에 있는 한율과 아이린을 발견하곤 잠시 거기에 눈길을 두었다. 모양새를 보니 한율이 애를 먹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전에 보여주었던 행동이 핫산으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였으니, 딱히 염려스럽지는 않았다.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을까요…?”
“…. 괜찮을 거야.”
“…. 저러다 괜히…,”
“쓰읍…. 쯧…. 또 엉뚱한 생각해서 창피당하지 말고 내버려 둬.”
“이이는…. 걱정되니까 그러죠.”
“… ….”
한율의 말에 아이린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반박을 하고 나섰다. 혼인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예요?! 아니, 그러니까…. 그 좀 내 말을…. …. 혹시….
“…혹시 뭐요?”
“…남자 좋아하세요…?”
“이봐욧!!”
“어머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
“소리 지를만하니까 지르지! 내가 생긴 건 이래도 꽤 인기가 많았단 말입니다! 남자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아이가 있다면 제가 키울게요~! 내가 키울 수 있어요!”
한율은 또다시 격렬한 기침을 내뱉었다. 도대체 이 아가씨를 만나면 담배를 편하게 피울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하는 말마다 엉뚱하기 그지없다. 기침을 가라앉히는 그의 눈에 구세주가 들어왔다.
“너…, 이리 와…!”
“엄, 엄마…!!”
“하하, 한율 공. 잘 지내셨지요?”
“아, 예! 부인!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한율은 깍듯하게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너무나 반가워하는 한율이 밉기도 했지만 왜 하필 이때 엄마가 나타났는지, 아이린은 모든 상황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엄마, 나 얘기중이잖아…! 시끄러, 빨리 안 와…?! 하하, 한율 공, 즐겁게 있다 가세요.
“예!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이런 감사할 일이 다 있나. 그는 홀가분한 얼굴로 담뱃대를 입에 물고는 테라스에 기대어 서며 후련한 연기를 내뿜었다. 하하하…. 환인님, 환웅님, 단군님, 신령님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의 눈에 집사가 들어왔다. 집사는 회당 안쪽의 내실에, 집사들만의 자리가 마련된 곳에 있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모양새를 보니, 이쪽 일을 다 보고 있었던 듯했다. 한율은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한율 위원님의 집사이시지요?”
“…. 그렇습니다만….”
“나는 핫산 대표님의 집사지요. 노이만이라고 합니다.”
“…. 그래서요?”
호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노이만을 향해 집사는 대뜸 자극적으로 용무를 물었다. 노이만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고는 그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한율 위원님을 부추기지 마십시오.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 …. 위험해지다니요?”
“아실 텐데요.”
“….”
집사는 그를 향해 천천히 돌아 정면으로 섰다.
“알다니, 내가 대체 뭘 안단 말이오?”
“모르는 척 하지 마시오. 지난번에 아이린 아가씨께서 돌발적인 행동을 하셨을 때 당신이 일을 방해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난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내 일을 방해하려 든 건 오히려 대표님과 그 댁 마님이었습니다.”
“이보시오…!”
다시 돌아서며 능청을 떨던 집사가 시선을 노이만에게 던졌고, 그 순간 노이만은 온 몸이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천천히 입을 여는 집사의 목소리가 그의 뇌리 속에서 울리듯 천둥처럼 귀를 울렸다.
“말을 하려거든 똑바로 하시오. 돌려가며 수 쓰지 말고….”
“… …!”
“….”
다시 집사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자 온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노이만은 방금 자신이 느꼈던 것이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 ….”
핫산은 한율과 함께 광장쪽 테라스로 나갔다. 여전히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흥에 겨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분위기가 완전히 무르익은 모습이었다.
“어딜 가든 이런 행사는 꼭 있더군요.”
“어디 어디를 다녀보셨습니까?”
“글쎄요. 7년을 돌아다녔으니….”
“한두 군데가 아니었군요.”
“예….”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핫산이 먼저 아이린의 일을 사과했다. 아닙니다. 따님의 일은…. 말씀 안하셔도 됩니다. 그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핫산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시찰…, 말입니다.”
“…예.”
“혹시…. 그 집사의 생각이었습니까…?”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 역시 그렇군요. 그냥 한 번 짚어본 것입니다.”
“… ….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의원님께선….”
“….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렇습니다.”
“… ….”
한율은 잔을 한 번 기울이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허울뿐인 자리라, 가만히 있어줘야 의원님께도 부담이 덜 되겠지요. … …. 핫산은 피식 웃음을 내비쳤다. 스스로도 좀 민망한지, 그는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율은 사람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또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그만…둘 수는 없겠습니까.”
“… ….”
쉽게 나올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핫산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시찰을 조금 늦춰도 관계없다며, 천천히 생각하라고 말을 맺은 뒤 잔을 비웠다.
“심심해서 그만두진 못하겠고요….”
“…, 한율 공…!”
“… …. 생각을 좀 해 보지요.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 …”
한율은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조만간 결정을 내서 찾아뵙겠습니다. 하지만 시찰은 하지요. 이대로는 심심해서 못 살겠습니다.”
“…. 풋…!”
몹시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핫산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한율은 그에게 ‘난 이미 단단히 결심을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로 능청을 떨었다.
앙느쿠테는 자정부터 시작하여 해뜰녘까지 이어지는 행사였다. 국왕을 비롯한 귀족 대신들, 왕가의 친인척들 모두가 온통 하얀색의 예복을 갖추고 의식에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므로 원칙상 왕궁 내에서 이 행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두 사람, 하백과 리타는 모두가 예식 준비로 바쁜 터에 객궁에서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수련장은 마음에 들어?”
“예, 전하. 실은 그 때문에….”
“…문제라도 있나…?”
하백은 공주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기회가 없어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리타는 피식 웃었다. 이 고지식한 친구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얼굴로 그를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중요한 행사가 있다고 하니까 그렇지. 내일이면 어차피 새해 인사라도 해야 할 테니까 그때 하도록 해. 뭘 그런 걸로….
그 시각, 이 중요한 행사를 앞둔 궁정대신 미셀 포이아르 플라시니는 궁인들과 왕궁을 지키는 근위대 병사들을 일일이 점검하며 몰래 후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요즘 뜸했다고 노예라도 불러다 했겠지…? 그래도 이 손가락만큼 하는 노예가 있었겠어…, 오늘 한 해의 마지막을 근사하게 장식해주지….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알을 굴리며 주위를 살펴 본 그는 이내 회당과 국왕의 집무실을 이어주는 회랑의 쪽문을 열고 나섰다.
“뭐야…?”
“공주님께선 지금 몸이 불편하셔서 누굴 만날 수가 없으십니다.”
“이 자가…. 나는 이 왕궁 내의 행정을 담당하는 궁정대신이야! 왕족의 행사 준비를 하나 하나 챙겨야 하는 것이 내 직무고!”
“공주님께선 오늘밤 행사에 나가시진 않을 겁니다.”
“…, 안 나가시다니? 국왕 폐하께서도 참석하시는데 공주께서 참석을 하지 않으시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보나?!”
“공주님께서 크게 다치셨습니다. 며칠간 쉬셔야 합니다.”
미셀을 가로막고 서서 버티는 이는 다름아닌 비토였다. 그는 정보조의 조장이었으나 시위장 하나로 미셀을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레이네의 명령이었고, 그는 레이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며칠을 쉬다니? 대체 어디를 얼마나 다치셨기에 며칠씩이나 쉬셔야 한단 말인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란 말인가?”
“… ….”
“어서 말하지 못하겠나?!”
비토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공주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나라의 왕녀십니다. 왕녀께서 몸이 불편하시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곤란합니다.”
“뭣…!”
화가 치밀어 올라 뭐라고 한 마디 꺼내려던 궁정대신이 흠칫 물러섰다. 비토에게서 쏘아져 나오는 기세가 자신을 죽일 듯이 덮쳐온 까닭이었다. 물론 비토는그를 물러서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적의를 내비친 것이었으나, 그 같은 기세를 일찍이 느껴본 일 없는 미셀로서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으…음…흠…!”
살의마저 느껴지는 그 기세에 미셀은 어쩔 수 없이 뒷짐을 지며 물러서 헛기침을 하고는 짐짓 점잖게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 뭐…. 편찮으시다면 쉬셔야지. 중요한 행사라고는 하지만…, 어디 왕녀의 안위만큼 중요하겠는가. 험…. 그가 공주와 해왔던 짓을 짧은 기간이나마 지켜봤던 비토로서는 비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태도였다. 심지어 미셀은 비토를 치하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자네의 그 상전을 모시는 태도는 치하를 받을만하군. 자네를 보니 내가 든든해. 앞으로도 공주를 잘 모셔주게.”
“….”
느껴져 오던 기세는 사라졌지만 아무 대답도 표정도 없이 서 있는 비토를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미셀은 크흠 하고 크게 헛기침을 하며 홱 돌아서서 후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비토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도 열 줄 아나보네?”
레이네가 놀리듯 한 마디 던졌지만 비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에게 임무수행을 보고했다.
“재미없는 놈 같으니라고…. 아무튼 수고했어. 미셀이 다녀갔으니 이제 여기 올 사람은 없어. 하나 시켜서 윌토르를 은밀하게, 왕가 묘지로 데려와.”
“예.”
비토가 명령을 받들어 방에서 다시 나간 후 레이네는 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모양을 손질한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사뇰이 어떤지 보러 갈 참이었다.
“… ….”
사뇰은 침대에 앉아, 에반더가 사용하던 빈 침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궁에 들어온 시기도 비슷하고, 2년을 함께 생활하며 친구라고 여겼던 그가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고 공주를 범했다.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화가 나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공주님 오셨습니다.”
“…?!”
밖에서 들리는 시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일어나려던 그는 옆구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윽…! 하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고꾸라졌다. 이내 혼자 그의 처소로 문을 열고 들어온 레이네가 고통에 신음하듯한 그 모양새를 보고는 황급히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사뇰…! 사뇰, 괜찮아…?”
“괜찮습니다, 공주님…. 그저….”
“그대로 있어. 두 군데나 칼을 맞고도 미련하게 예의 차리려 들지 말고.”
치료는 제대로 했다지만 자상이란 것이 쉬이 낫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 환부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움직일 때마다 눈앞을 아찔하게 할 정도였다. 레이네의 손에도 저항을 하지 못하는 사뇰은 그대로 침대에 앉아 등을 기댔다. 황송한 얼굴을 한 사뇰과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는 레이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공주님께서 직접 이곳까지 오실 필요는 없는데…, 제가 너무….”
“쓸데없는 소리 말거라.”
“…공주님….”
“네놈 걱정하느라 오는 줄 알아?”
“… …”
“…. 오늘 윌토르 대주교를 만나러 간다.”
“…예.”
…. 레이네는 사뇰의 표정을 살폈다. 자조적인 웃음기가 입꼬리에서 실룩거리는 걸 보니 속내를 내비치지 않느라 애쓰는 흔적이 눈에 보였다.
“잠들기 전에….”
“….”
“너한테 내가 뭘 물어본 게 있었지?”
사뇰의 본명을 물었었다. 그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좋은 일일지 아닐지부터 산을 짚었다. 이제 와 굳이 자신의 이름을 밝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건 없었습니다. 자르듯 대답하는 사뇰을 보고는 레이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공주님…!”
“네 이름을 물어봤었고, 나다니엘 아브데옌코라고 대답했었다.”
“… ….”
“이제 와서 이름을 밝혀봐야 무슨 소용이겠느냐 생각했겠지.”
“… ….”
사뇰은 고개를 숙였다.
속내를 모조리 들켜버렸으니 이제 그녀가 할 말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이제부터 너는 나다니엘이다.”
“공주님…!”
“그 날….”
레이네의 표정이 바뀌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 ….”
“그 동안 내 몸에 대해 나보다 더 살뜰하게 챙겨 준 데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내가 네 이름을 허락하마, 나다니엘.”
본명을 되찾은 그는 통증도 잊은 듯 벌떡 일어나 공주를 향해 엎드려 절했다.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몇 번이고 읊조리는 나다니엘의 앞에 레이네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다시 태어났으니 나다니엘로서 충성 맹세를 해야겠지. 그는 지체없이 고개를 들어 레이네의 손등과 반지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만 일어나야겠다. 할 일은 해야지.”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 네놈이 걱정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다. 몸 관리나 잘하고 있거라.”
“예, 공주님. 감사합니다.”
레이네가 나간 뒤에도 나다니엘은 그대로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 그는 눈물로 얼굴이 얼룩져 있었다. 이름을 되찾은 감격이 상처의 통증을 지워버렸다.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비토.”
“예.”
“나다니엘의 집안에 대해서 알아와. 족보건 뭐건 그 아이 출신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입수할 수 있다면 더 좋고.”
“예.”
“가보 같은 게 있다면 가장 좋겠지.”
“….”
“저 아이는 생각보다 쓸모가 있겠어.”
“…. 정말 그 뿐입니까?”
“뭐…?”
속내를 떠보는 듯한 비토의 질문에 레이네는 불쾌한 얼굴로 홱 돌아보았다. 비토는 태연하게 다시 물어왔다. 저 아이가 쓸모 있다는 생각 하나뿐이냐고 여쭈었습니다.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자네는 고작 열 명 남짓한 정보대를 이끄는 자 치곤 배짱하며 기세가 남달라.”
“….”
“건방지게 상전의 속내를 떠보기도 하고…. 확실히 보통사람은 아닌데. 그 정도라면 너 역시 나에 대해서 산을 짚어보고 있겠지?”
“….”
“나도 그래. 난 아직 네가 확실히 내편이 되어줄 지 아닐지 판단을 세우지 못했어. 지금까지는 여러모로 편리한 방책이 되어줬지만…,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일수록 난 더 널 경계하게 된다는 것도 명심해.”
비토는 말없이 목례를 하여 그에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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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간격이 상당히 넓어졌군요.ㅡ.ㅡ;;; 한글 프로그램의 문제를 결국 찾아내지 못해서
그냥...화실에서 편집한 내용을 메일로 보내서 집에 와갖고 올립니다.
웹상의 텍스트를 그대로 복사 붙이기 했더니 이모냥이군요. ㅎㅎㅎㅎ...대체 왜 그러는 건지..ㅠ.ㅠ..;;
혹시 아시는 분 좀 가르쳐 주세요..
갑자기 한글 파일 중에서 실행에 필요한 dll 파일이 트로이 목마에 걸려갖고
한글을 지웠는데요. 다시 설치하려고 했더니 설치 파일 속에 있는 동일한 파일이
트로이 목마에 걸렸다고 난리난리 생난리를...ㅡ.ㅡ;;; 아니 대체.. CD에 바이러스가
걸릴 일이 뭐랍니까..;; 레지스트리에 있는 바이러스도 제거했는데 자꾸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혹여 아시는 분들 계신다면..꼭 좀..부탁드립니다.
“에이씨, 진짜…. 괜히 시찰 따위 한다고 했나….”
서재에 앉아 끙끙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들어왔다. 아직도 책을 보고 계십니까? 흐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시찰을 간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갈 순 없잖습니까~. 뭘 좀 알아야 가서 이것저것 묻기도 좀 하고…, 그러죠….”
“하긴 그렇기도 하군요.”
수긍하며 집사는 그의 앞에 있던 식은 찻잔을 쟁반에 담아 치웠다. 오늘 연초는 안 태우십니다…? 아… 머리 나빠지신다기에…. 생각외로 귀가 얇으시군요. 이따금씩 이렇게 자신을 놀리는 집사는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능구렁이가 아니었다. 한율은 못 당하겠다는 듯 쓰게 웃으며 다시 책에 눈길을 주다가 말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내일 의회당에서 연말 연회가 있다고, 꼭 오시랍니다. 총리께서 직접 초대를 하셨더군요.”
“그래요…?”
“예복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니, 저기 이보세요, 집사님…!”
“안 가시게요?”
“아니, 안 간다기보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집사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인사를 하고는 나가버렸고, 한율은 한참 그가 나간 문을 보다가 혀를 차버렸다. 하여간…못 당하겠어, 저 아저씨는….
이튿날 연회 갈 준비에 핫산의 집은 야단법석이었다. 아로사와 나자르는 방에서 시종들의 도움을 받으며 예복을 갖추는 중이었다. 여기 뒤쪽, 깃 제대로 섰어? 네, 괜찮습니다 아가씨. 나 허리 휘장 좀 봐줘. 아무래도 군인이다보니, 그런 것들에 대해 신경이 많이 쓰이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의장대는 오늘 정신없겠다.”
“어휴…, 이번 의장대에 안 걸리길 잘했지. 안 그래도 시찰 때문에 정신없는데 의장대 총사는 거의 죽음이었겠어. 하하….”
“나가자. 다 됐으면….”
“어어. 나 검 좀 차고….”
둘이 방문을 열고 나서는데, 몇 걸음 떨어진 곳의 아이린 방에서 난리법석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못 고르겠어…! 유모! 나 뭐가 좋을까? 아이고, 아가씨 이걸로도 충분하세요…!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옷을 고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주 난리네, 난리…. 요즘 좀 조용하다더니….”
“지난번에 한율 공 집에 갔다가 그 난리를 피웠다잖아. 그 뒤로는 침울해져 있었다던데….”
“오늘 한율 공도 오지 않겠어? 그러니 저 야단이지.”
“어쨌든 침울한 것보단 보기 좋네.”
둘은 키득거리며 중앙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이린의 방에서 들렸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아래층 복도에서도 울려퍼지고 있었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좀 대충 해…! 당신은 지금 대충 하란 소리가 나와요?! 어떡해, 진짜~, 뭐 입어, 나~~!!
“똑같애, 똑같애….”
“아이린보고 뭐라고 하실 일이 아니야, 엄마도….”
한편 한율은 조촐한 예복을 입고는 아무래도 어색한지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집사도 이날만큼은 단정하게 차려입고 시녀들이 한율의 복장을 점검해주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도 검 다섯 자루를 다 가지고 가실 겁니까…?”
“…아뇨. 한 자루만 가져갈 겁니다.”
“한 자루라면…?”
“가장 긴 거요.”
“아하….”
집사가 돌아보는 곳에는 환인의 표식이 장식된 장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전 저 표식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래요? 예…. 무슨 새 같기도 한 것이…. 그런데 새는 아니겠죠. 다리가 셋이나 달린 새가….
“새 맞습니다.”
“예…?”
“다리 셋 달린 까마귀죠. 환국의 상징입니다.”
“까마귀요? 그런 새도 있습니까?”
“… ….”
한율은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보고는 아니, 집사님께서 모르시는 것도 있었습니까? 저 모르는 거 많습니다. 아직 위원님의 알몸도 보지 못했습니다. 시녀들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고, 한율은 내가 말을 말지 하는 얼굴로 검을 가져다 허리에 찼다.
“가십시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저택을 출발하자 집안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젊은 시녀들이 비로소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자, 우리도 파티하자, 파티~!!! 온 집안이 갑작스레 시끄러워졌다. 시녀들을 비롯한 시종 모두가 1층의 연회장으로 모여들었고, 주방에서 음식이 속속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왜 저럽니까, 갑자기…?”
“도둑이 들었나보죠.”
“이보세요, 집사.”
“물론 농담입니다.”
“으휴….”
의회당의 광장은 시민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곳곳에 커다란 식탁이 놓였고, 그 위에 음식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시민들은 마음껏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을 떠들썩하게 보내고 있었다. 거리의 악사들도 모여서 여기저기서 연주를 했다. 몇몇의 시민들은 그 음악에 맞춰 다같이 춤을 추기도 했고, 무희들이 그 가운데로 돌아다니며 춤을 주도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흥에 겨워 빈 술통을 가져다 놓고 두들기며 저희들끼리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었다. 아이들은 아비의 목마를 타고 노래를 부르거나, 엄마의 손을 잡고 무희들을 따라다니며 떼를 쓰기도 했다. 어떤 아이들은 벌써 지쳐서 잠들어 버리기도 했다. 마치 바이마샤르의 수도 시락에 있는 모든 시민들이 다 모인 듯, 십만이 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을 듯한 의회당 광장은 발 디딜 틈조차 없어보였다.
이 대규모의 파티가 바로 공화국 바이마샤르의 전통이었다. 총리 기즈는 의회당의 테라스로 핫산, 토메즈와 함께 나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의장대가 예복을 입고 광장의 양쪽 끝에서부터 열을 맞추어 나왔다. 음악이 멈추었고, 춤을 추던 사람들도 의장대의 일사불란한 분열행진에 잠시 손을 놓았다. 멋있다~, 근사해~. 연습 진짜 많이 했겠다~, 오늘 같은 날 쟤넨 무슨 고생이래~.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 그들의 분열이 끝나고 광장 양쪽에 나란히 도열하자 사람들은 다시 기즈에게로 일제히 눈길을 돌렸다. 수만 명의 눈길이 일제히 총리에게로 몰리자 의장대의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자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전 부대, 발도-!!!”
한 사람이 칼을 뽑듯 수백 명의 의장대가 일시에 검을 뽑아 팔을 수평으로 뻗어 검끝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다.
“예도-!!!”
이번엔 동시에 하늘로 높이 찔렀다가 가슴 높이로 내려 팔을 겨드랑이에 붙였다. 모든 동작이 서로 실이라도 매달아놓은 듯 완전히 일치했다. 의장대가 시민들을 향해 군례를 올리는 이 모습은 연말 연회의 구경거리 중 하나였다. 구령을 붙이던 대표가 총리를 향해 돌아서선 군례를 올렸다. 총리의 화답을 받은 그가 다시 검을 넣고 돌아서서 구령을 외치자, 뽑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장대는 전원이 동시에 검을 집어넣었다.
“존경하는 바이마샤르의 시민 여러분!! 바이마샤르의 국정을 책임지는 총리 기즈 마텐바이어입니다!! 한 해 동안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시민들의 웃음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재치있게 농담조로 인사를 띄운 기즈는 웃음소리가 잦아들 무렵 다시 말을 이어붙였다.
“저게…, 재미있는 거야…?”
한율은 웃는 시민들이 이해되지 않아 슬쩍 아로사에게 물어봤고, 아로사는 쿡 하고 조심스럽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유행어라고 설명해줬다. 각하께서 맨 처음 총리직 수락연설문에서 쓰셨던 말이에요. 남부지방 사투리를 쓰면서 그러시는 바람에 엄숙한 자리였는데 시민들이 다 웃어서 한바탕 소란스러웠었죠. 아하…. 저 양반이 원조였구먼….
“… ….”
한율과 함께 서서 수군거리는 아로사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핫산의 친딸인 아이린이었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이 연회장에서 웃음보다 한숨을 더 많이 내쉬는 것은 그녀 하나뿐인 듯했다. 아이린은 꽤 미인이었기에, 그 자리에 모인 군부의 젊은 지휘관들과 의회 의원의 자제들이 저희들끼리 쳐다보며 어떻게 엮어볼까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다가가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린의 눈이 한율에게 시도 때도 없이 가는데다, 그녀의 주변 공기가 묵직했으니, 다가설 엄두가 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뭘 망설여~, 그래봐야 여자잖아. 일단 부딪쳐 보라고.”
“문제는 그게 아니야. 행여 수작부리다가 기분이라도 상하게 해 봐. 핫산 의원은 차기 총리로 거론되는 사람이라고.”
“어휴…,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쩝…. 아쉽다….”
“필승전략 같은 거 없냐, 누구…?”
“그런데 또 상대는 왜 한율 위원이야.”
“뭐 어때, 어차피 허울만 좋은 위원인데.”
“…?”
아로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한율은 문득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의식하곤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이린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곤 모른 척했지만,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한율이 아니었다. 그의 입이 슬쩍 돌아가며 씁쓰레한 입맛을 다셨다. ?….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엄마는 여당 원내총무의 부인과 잠시 수군거리고는 서로 고개를 끄덕인 뒤 아이린에게로 다가갔다. 왜? 재미없어…? …. 이리 와 봐. …? 무작정 손을 잡고 끌고 가는 엄마를 따라는 나섰지만 아이린의 표정은 영 떨떠름했다. 또 한율 공하고 어울리지 말란 소리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었다.
“어머, 정말 아름다운 따님이세요, 부인…!”
“하하, 아드님이 참 늠름하시네요. 인사드려. 아버지랑 같이 일하시는 원내총무님 자제분이셔.”
“… ….”
아이린의 표정은 괴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잖이 놀란 것도 있었던데다,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그 마음을 숨기려다 보니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 것이었다. 엄마는 눈치를 채고는 그녀의 허리를 꽉 꼬집으며 신호를 주었다.
“아…하하, 얘가 사실 좀 몸이 안좋아서 오늘 안 오려다가…. 그래도 연말 연횐데 안 올 수가 없어서 좀 무리를 했나봐요.”
“아, 예…. 만나뵈어 반갑습니다. 루카스 스클로도프입니다.”
“네….”
“…이름…!”
“아, 아이린 바슈미르입니다.”
그제야 마지못해 아이린은 이름을 말하며 엉거주춤 몸을 숙였다. 드러난 목언저리의 뽀얀 앞가슴 피부가 루카스의 눈에 꽂혔다. 그는 아찔한 기분에 얼른 눈을 감으며 어색하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하하…, 그럼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놀게 하고, 우린 저쪽으로 가실까요…?”
“그, 그러시죠. 루카스. 아가씨게 잘 해드려야 한다?”
“예, 어머니.”
엄마는 원내총무댁을 이끌고 서두르자며 얼른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죄송해요, 아이가 아직도 저 모양이라…. 정말 많이 안좋은가봐요. 좀 그래요, 며칠을 끙끙 앓다가 오늘 일어나갖곤 지 아빠 생각한다고 억지로 나온 거라서…. 저런…, 그럼 무리를 하지 말고…, 아니아니. 일단 얼굴을 보는 게 중요하니까, 다음에 제대로 자리를 한 번 만들자고요. 그래요, 그래요…. 그렇게 숙덕거리는 모친네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 사이엔 어색함만이 잔뜩 차올라 있었다.
“아이린님…?”
“….”
“아이린님.”
“…네, 네…??”
토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아이린, 루카스는 키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 남자가 미쳤나 왜 처웃나 하는 얼굴로 자신을 살피는 아이린을 보고 그녀가 불쾌해한다 여겼는지 그는 얼른 헛기침을 하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저 두어 번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시기에….
“아, 네….”
“… 오늘 정말 몸이 많이 안좋으신데 무리하신 것 아닙니까?”
“…, 아니에요.”
샴페인 잔을 입에 대며 마시는 둥 마는 둥,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린의 시선은 여전히 남몰래 한율을 쫓고 있었다. 그는 총리부터 시작해서 여야 원내총무, 원내대표, 사무총장, 보위부, 행정부, 정보부 할 것 없이 정치권의 인사들과 줄줄이 인사를 나누며 꽤나 바빠보였다.
하얀 블라우스에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었던 옷색과 같은 녹색의 정장 외투를 걸친 그는 키가 커서 그런지 근사하게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올 것 같은 긴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서 묶었고, 단촐한 장식이 붙은 허리춤의 긴 장검의 검집은 은은한 붉은빛을 띠고 있어 포인트를 살려주고 있었다. 이 평가적인 서술은 어디까지나 아이린의 시선에서이며, 그저 단정한 정도가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한율의 옷차림은 다른 귀족 자제들의 차림새에 비해 단촐하다못해 초라해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따위의 것들이 아이린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주 유명인사 났네, 났어….”
“그런데 진짜 크긴 엄청나게 크다야.”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크하하하…!”
“정말로 수백 명을 혼자 상대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걸 믿어?”
“그게 거짓말이라고는 해도, 적어도 수십 명은 됐을 거 아냐.”
“그렇겠지…?”
“결투 같은 건 꿈도 못 꾸겠다. 저 팔 좀 봐라. 내 허벅지보다 굵은 거 같다.”
“저 옷도 아마 맞는 게 없어서 따로 만들었을 것 같은데…?”
젊은 사내들은 그를 보곤 질투심 반, 가십거리 반으로 너도 나도 질세라 한 마디씩 내놓으며 한율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대충 인사를 끝낸 한율은 음식이 놓인 식탁 쪽으로 와서는 거기에 양 손을 짚고 혀를 내둘렀다. 어휴…. 이럴 때 집사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지도…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그 양반 있다고 뭐가 나아지긴 나아지겠어…?
한편, 한율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아이린은 그가 혼자 떨어지게 되자 즉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그나마 어떻게든 이야기를 터 보려고 이 소리 저 소리 늘어놓던 루카스는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아니, 뭐야…? 그녀가 가는 곳을 본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 으익…!!”
인기척이 나 옆을 본 한율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아이린은 그의 반응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몹시 불쾌하여 잔뜩 인상을 구겼다. 주위를 둘러본 한율이 마치 사람 많은 곳에서 아이를 나무라는 아비와 같이 크게 뜬 눈을 부라리며 뭐 하는 짓이냐는 듯 그녀를 향해 도리질했다.
“….”
이내 울상으로 변할 것 같은 아이린을 보면서 곤란하여 어쩔 줄을 모르던 한율은 별안간 그녀가 소매를 덥석 잡아 끌자 움찔했다. 알았어요, 갈게, 갈게…. 이거 좀 놔~. 진땀을 흘리며 마임처럼 몸짓 손짓 눈짓으로 그가 거의 애원을 하자, 아이린은 손을 놓으며 조용히 그를 째려보고는 홱 돌아서서 의결당 쪽 테라스로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아이…씨, 진짜…. 골치아프네, 저 아가씨…. 그 자리에 서서 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던 한율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테라스로 향했다.
이거 봐라…. 남자가 있는데 날 소개시켜준단 말이지…? 떼놓기 위해서…. 그 꼴을 계속 보고 있던 루카스는 입꼬리가 비틀어지며 비릿한 웃음을 띄웠다.
테라스로 나간 아이린과 한율은 말없이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한율은 바깥쪽을, 아이린은 안쪽을 향해 서 있었다. 표정은 각각 달랐지만, 달갑지 않아하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러다 별안간 동시에, 아니 대체 왜…! 라고 하다 멈칫하고는 서로에게 먼저 하라고 미뤘다. 몇 번인가 서로 미루다가 한율이 먼저 시작했다.
“대체 왜 내가 좋아요? 뭣 때문에 좋아요?”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 좋아하는 게 아니면? …왜 이러는 건데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묻던 한율은 이어지는 아이린의 대답에 목을 잡고 뒤로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사랑해요. 좋아하지 않고 사랑한다구요!”
“아…, 아오… ….”
이젠 당황하기도 지겨웠다. 그는 눈을 깜빡거리며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이 아가씨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잔뜩 부어터진 얼굴을 하고서 그를 쳐다보는 아이린의 얼굴이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이봐요. 아가씨.”
“난 아가씨가 아니라 아이린이에요, 아이린, 바슈미르…! 내 이름을 불러요. 왜 자꾸 날 아가씨라고 해요?!”
앙칼지게 쏘아부치자 한율은 짐짓 아, 그렇지 하는 얼굴로 되뇌어보듯 아이린, 아이린, 아이린? 아이린. 음, 아이린~. 그녀는 그만 푹 하고 웃어버렸고, 한율도 그녀를 보면서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웃지 마세요. 난 지금 심각해요.”
“나도 심각하외다.”
“…. 난 무슨 일이 있어도 한율님하고 혼인할 거에요. 혼인해서….”
“이, 이봐요, 아이린 아가씨. 그게….”
“한율님 아내가 돼서, 매일매일 한율님 아침식사랑 저녁식사도 직접 챙겨드릴 거에요. 매일매일 한율님 목욕도 시켜드리구요. 매일매일…. 매일매일…. 어쨌든 아기도 많이 많이 나을 거에요.”
우물거리는 투를 보니 정말 뭘 모르는 아가씨로구나 싶었다. 한율은 한숨을 푸욱 소리가 날 정도로 길게 토해내며 테라스에 손을 짚고는 하늘을 봤다가 땅을 봤다가 하면서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아니, 뭘 보고 날 좋아했어요?”
“… ….”
“대답해봐요. 궁금해서 그래요, 정말….”
“…겨….”
“겨…?”
아이린은 몹시 망설였다. 그를 끌어당기려고 겨드랑이를 안았다가 좋아하게 되었다고는 죽어도 말하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딱히 둘러댈 다른 말도 없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에는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도 해주지 않을 성싶었다. 한율이 양손을 내저으며 재촉하자 아이린은 귀까지 빨개지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겨드랑…이요.”
“… ….”
잠시 멍해있던 한율은 내가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마임을 하듯 제 겨드랑이를 번갈아 보고는 다시 아이린을 쳐다봤다. 슬쩍 눈을 들어 그를 본 아이린은 그가 다시 한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손가락을 겨드랑이를 가리키자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아하하하하하…!!”
“… …. 이거요? 이 겨드랑이?”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거 웃지 말고 대답해 봐요. 내가 잘못 들은 겁니까?”
기왕 꺼낸 거 말 못할 이유가 없겠다 생각하고 아이린은 턱을 바짝 쳐들며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네. 하고. 이런 괴상망측한 일이 있나. 한율의 얼굴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로사가 발목을 다쳐서 그… 있잖아요.”
“예예, 뜸치료.”
“예, 뜸. 그거 불 붙일 때…. 한율님한테 뭐 하시는 거냐면서 잡아당기려고…, 겨드랑이를 안았었는데….”
“…. 그래서요?”
“… 그게….”
“…뭐, 이 겨드랑이가 무슨… 어~이, 아가씨, 나 어때? 이럽디까??”
“아하하하하하하…! 그건 아니구요~!”
아이린은 건들거리며 건달처럼 말해보는 그에게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그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 단단하고 묵직했어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한율님은 그 날 아로사의 발목도 치료해주시고…, 그것도 처음 보는 치료법으로요. 게다가 신기한 걸 많이 알고 계시니까…. 점점 마음도 가고…. 그래서, 이 겨드랑이가 불을 지폈다 이거구만. 거 참…. 한율이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을 받아내자 아이린은 대체 여자에 대해 아는 게 뭐냐며 뾰족하게 따지고 들었다.
“여자들은 그런 게 있다구요! 흥, 남자들이 뭘 알겠어.”
“흥, 남자들이 뭘 좀 알지.”
“자꾸 농담할 거에요?”
“알았어요, 미안해. 미안…. 그럼 이번엔 아이린이 물어봐요. 아까 뭘 물어보려고 했어요?”
“왜 내가 싫으냐고 물어보려고 했어요.”
“… ….”
한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상했던 질문이지만 난감한 기분이었다. 그걸 어떻게 이 스물 한 살 먹은 철없는 아가씨에게 설명을 해야 할 지, 도무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가 끙끙거리고만 있자, 아이린이 대답을 재촉했다.
“가만 있어봐요. 생각중이니까.”
“생각중이라뇨. 정말 제가 싫으신 거에요?”
“그게 아니고….”
참 나 이거 난처하네…. 한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담뱃대를 꺼냈다. 잠깐 여유 좀 부립시다. …그러시든가. 그는 거기에 연초를 꾹꾹 눌러담고는 불을 붙여 뻐끔 뻐끔 빨았다. 후유…. 연기를 내뿜는지 한숨을 내쉬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이린을 싫어하지 않아요.”
“…. 그런데요…?”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죠.”
“…좋아하면 좋아하고 말면 말지. 좋아하는 편이란 건 또 뭐예요?”
“…. 일단…. 아버지에게서 들으셨겠지만. 그런 정치적인 문제들은 다 빼놓을게요. 다 빼고….”
“….”
“음…. 이걸 얼마나 이해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음….”
“…. 뭔데요~?”
“… ….”
여러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핫산은 문득 테라스에 있는 한율과 아이린을 발견하곤 잠시 거기에 눈길을 두었다. 모양새를 보니 한율이 애를 먹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전에 보여주었던 행동이 핫산으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였으니, 딱히 염려스럽지는 않았다.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을까요…?”
“…. 괜찮을 거야.”
“…. 저러다 괜히…,”
“쓰읍…. 쯧…. 또 엉뚱한 생각해서 창피당하지 말고 내버려 둬.”
“이이는…. 걱정되니까 그러죠.”
“… ….”
한율의 말에 아이린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반박을 하고 나섰다. 혼인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예요?! 아니, 그러니까…. 그 좀 내 말을…. …. 혹시….
“…혹시 뭐요?”
“…남자 좋아하세요…?”
“이봐욧!!”
“어머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
“소리 지를만하니까 지르지! 내가 생긴 건 이래도 꽤 인기가 많았단 말입니다! 남자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아이가 있다면 제가 키울게요~! 내가 키울 수 있어요!”
한율은 또다시 격렬한 기침을 내뱉었다. 도대체 이 아가씨를 만나면 담배를 편하게 피울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하는 말마다 엉뚱하기 그지없다. 기침을 가라앉히는 그의 눈에 구세주가 들어왔다.
“너…, 이리 와…!”
“엄, 엄마…!!”
“하하, 한율 공. 잘 지내셨지요?”
“아, 예! 부인!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한율은 깍듯하게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너무나 반가워하는 한율이 밉기도 했지만 왜 하필 이때 엄마가 나타났는지, 아이린은 모든 상황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엄마, 나 얘기중이잖아…! 시끄러, 빨리 안 와…?! 하하, 한율 공, 즐겁게 있다 가세요.
“예!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이런 감사할 일이 다 있나. 그는 홀가분한 얼굴로 담뱃대를 입에 물고는 테라스에 기대어 서며 후련한 연기를 내뿜었다. 하하하…. 환인님, 환웅님, 단군님, 신령님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의 눈에 집사가 들어왔다. 집사는 회당 안쪽의 내실에, 집사들만의 자리가 마련된 곳에 있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모양새를 보니, 이쪽 일을 다 보고 있었던 듯했다. 한율은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한율 위원님의 집사이시지요?”
“…. 그렇습니다만….”
“나는 핫산 대표님의 집사지요. 노이만이라고 합니다.”
“…. 그래서요?”
호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노이만을 향해 집사는 대뜸 자극적으로 용무를 물었다. 노이만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고는 그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한율 위원님을 부추기지 마십시오.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 …. 위험해지다니요?”
“아실 텐데요.”
“….”
집사는 그를 향해 천천히 돌아 정면으로 섰다.
“알다니, 내가 대체 뭘 안단 말이오?”
“모르는 척 하지 마시오. 지난번에 아이린 아가씨께서 돌발적인 행동을 하셨을 때 당신이 일을 방해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난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내 일을 방해하려 든 건 오히려 대표님과 그 댁 마님이었습니다.”
“이보시오…!”
다시 돌아서며 능청을 떨던 집사가 시선을 노이만에게 던졌고, 그 순간 노이만은 온 몸이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천천히 입을 여는 집사의 목소리가 그의 뇌리 속에서 울리듯 천둥처럼 귀를 울렸다.
“말을 하려거든 똑바로 하시오. 돌려가며 수 쓰지 말고….”
“… …!”
“….”
다시 집사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자 온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노이만은 방금 자신이 느꼈던 것이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 ….”
핫산은 한율과 함께 광장쪽 테라스로 나갔다. 여전히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흥에 겨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분위기가 완전히 무르익은 모습이었다.
“어딜 가든 이런 행사는 꼭 있더군요.”
“어디 어디를 다녀보셨습니까?”
“글쎄요. 7년을 돌아다녔으니….”
“한두 군데가 아니었군요.”
“예….”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핫산이 먼저 아이린의 일을 사과했다. 아닙니다. 따님의 일은…. 말씀 안하셔도 됩니다. 그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핫산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시찰…, 말입니다.”
“…예.”
“혹시…. 그 집사의 생각이었습니까…?”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 역시 그렇군요. 그냥 한 번 짚어본 것입니다.”
“… ….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의원님께선….”
“….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렇습니다.”
“… ….”
한율은 잔을 한 번 기울이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허울뿐인 자리라, 가만히 있어줘야 의원님께도 부담이 덜 되겠지요. … …. 핫산은 피식 웃음을 내비쳤다. 스스로도 좀 민망한지, 그는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율은 사람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또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그만…둘 수는 없겠습니까.”
“… ….”
쉽게 나올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핫산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시찰을 조금 늦춰도 관계없다며, 천천히 생각하라고 말을 맺은 뒤 잔을 비웠다.
“심심해서 그만두진 못하겠고요….”
“…, 한율 공…!”
“… …. 생각을 좀 해 보지요.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 …”
한율은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조만간 결정을 내서 찾아뵙겠습니다. 하지만 시찰은 하지요. 이대로는 심심해서 못 살겠습니다.”
“…. 풋…!”
몹시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핫산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한율은 그에게 ‘난 이미 단단히 결심을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로 능청을 떨었다.
앙느쿠테는 자정부터 시작하여 해뜰녘까지 이어지는 행사였다. 국왕을 비롯한 귀족 대신들, 왕가의 친인척들 모두가 온통 하얀색의 예복을 갖추고 의식에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므로 원칙상 왕궁 내에서 이 행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두 사람, 하백과 리타는 모두가 예식 준비로 바쁜 터에 객궁에서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수련장은 마음에 들어?”
“예, 전하. 실은 그 때문에….”
“…문제라도 있나…?”
하백은 공주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기회가 없어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리타는 피식 웃었다. 이 고지식한 친구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얼굴로 그를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중요한 행사가 있다고 하니까 그렇지. 내일이면 어차피 새해 인사라도 해야 할 테니까 그때 하도록 해. 뭘 그런 걸로….
그 시각, 이 중요한 행사를 앞둔 궁정대신 미셀 포이아르 플라시니는 궁인들과 왕궁을 지키는 근위대 병사들을 일일이 점검하며 몰래 후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요즘 뜸했다고 노예라도 불러다 했겠지…? 그래도 이 손가락만큼 하는 노예가 있었겠어…, 오늘 한 해의 마지막을 근사하게 장식해주지….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알을 굴리며 주위를 살펴 본 그는 이내 회당과 국왕의 집무실을 이어주는 회랑의 쪽문을 열고 나섰다.
“뭐야…?”
“공주님께선 지금 몸이 불편하셔서 누굴 만날 수가 없으십니다.”
“이 자가…. 나는 이 왕궁 내의 행정을 담당하는 궁정대신이야! 왕족의 행사 준비를 하나 하나 챙겨야 하는 것이 내 직무고!”
“공주님께선 오늘밤 행사에 나가시진 않을 겁니다.”
“…, 안 나가시다니? 국왕 폐하께서도 참석하시는데 공주께서 참석을 하지 않으시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보나?!”
“공주님께서 크게 다치셨습니다. 며칠간 쉬셔야 합니다.”
미셀을 가로막고 서서 버티는 이는 다름아닌 비토였다. 그는 정보조의 조장이었으나 시위장 하나로 미셀을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레이네의 명령이었고, 그는 레이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며칠을 쉬다니? 대체 어디를 얼마나 다치셨기에 며칠씩이나 쉬셔야 한단 말인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란 말인가?”
“… ….”
“어서 말하지 못하겠나?!”
비토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공주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나라의 왕녀십니다. 왕녀께서 몸이 불편하시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곤란합니다.”
“뭣…!”
화가 치밀어 올라 뭐라고 한 마디 꺼내려던 궁정대신이 흠칫 물러섰다. 비토에게서 쏘아져 나오는 기세가 자신을 죽일 듯이 덮쳐온 까닭이었다. 물론 비토는그를 물러서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적의를 내비친 것이었으나, 그 같은 기세를 일찍이 느껴본 일 없는 미셀로서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으…음…흠…!”
살의마저 느껴지는 그 기세에 미셀은 어쩔 수 없이 뒷짐을 지며 물러서 헛기침을 하고는 짐짓 점잖게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 뭐…. 편찮으시다면 쉬셔야지. 중요한 행사라고는 하지만…, 어디 왕녀의 안위만큼 중요하겠는가. 험…. 그가 공주와 해왔던 짓을 짧은 기간이나마 지켜봤던 비토로서는 비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태도였다. 심지어 미셀은 비토를 치하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자네의 그 상전을 모시는 태도는 치하를 받을만하군. 자네를 보니 내가 든든해. 앞으로도 공주를 잘 모셔주게.”
“….”
느껴져 오던 기세는 사라졌지만 아무 대답도 표정도 없이 서 있는 비토를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미셀은 크흠 하고 크게 헛기침을 하며 홱 돌아서서 후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비토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도 열 줄 아나보네?”
레이네가 놀리듯 한 마디 던졌지만 비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에게 임무수행을 보고했다.
“재미없는 놈 같으니라고…. 아무튼 수고했어. 미셀이 다녀갔으니 이제 여기 올 사람은 없어. 하나 시켜서 윌토르를 은밀하게, 왕가 묘지로 데려와.”
“예.”
비토가 명령을 받들어 방에서 다시 나간 후 레이네는 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모양을 손질한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사뇰이 어떤지 보러 갈 참이었다.
“… ….”
사뇰은 침대에 앉아, 에반더가 사용하던 빈 침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궁에 들어온 시기도 비슷하고, 2년을 함께 생활하며 친구라고 여겼던 그가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고 공주를 범했다.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화가 나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공주님 오셨습니다.”
“…?!”
밖에서 들리는 시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일어나려던 그는 옆구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윽…! 하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고꾸라졌다. 이내 혼자 그의 처소로 문을 열고 들어온 레이네가 고통에 신음하듯한 그 모양새를 보고는 황급히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사뇰…! 사뇰, 괜찮아…?”
“괜찮습니다, 공주님…. 그저….”
“그대로 있어. 두 군데나 칼을 맞고도 미련하게 예의 차리려 들지 말고.”
치료는 제대로 했다지만 자상이란 것이 쉬이 낫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 환부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움직일 때마다 눈앞을 아찔하게 할 정도였다. 레이네의 손에도 저항을 하지 못하는 사뇰은 그대로 침대에 앉아 등을 기댔다. 황송한 얼굴을 한 사뇰과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는 레이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공주님께서 직접 이곳까지 오실 필요는 없는데…, 제가 너무….”
“쓸데없는 소리 말거라.”
“…공주님….”
“네놈 걱정하느라 오는 줄 알아?”
“… …”
“…. 오늘 윌토르 대주교를 만나러 간다.”
“…예.”
…. 레이네는 사뇰의 표정을 살폈다. 자조적인 웃음기가 입꼬리에서 실룩거리는 걸 보니 속내를 내비치지 않느라 애쓰는 흔적이 눈에 보였다.
“잠들기 전에….”
“….”
“너한테 내가 뭘 물어본 게 있었지?”
사뇰의 본명을 물었었다. 그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좋은 일일지 아닐지부터 산을 짚었다. 이제 와 굳이 자신의 이름을 밝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건 없었습니다. 자르듯 대답하는 사뇰을 보고는 레이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공주님…!”
“네 이름을 물어봤었고, 나다니엘 아브데옌코라고 대답했었다.”
“… ….”
“이제 와서 이름을 밝혀봐야 무슨 소용이겠느냐 생각했겠지.”
“… ….”
사뇰은 고개를 숙였다.
속내를 모조리 들켜버렸으니 이제 그녀가 할 말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이제부터 너는 나다니엘이다.”
“공주님…!”
“그 날….”
레이네의 표정이 바뀌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 ….”
“그 동안 내 몸에 대해 나보다 더 살뜰하게 챙겨 준 데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내가 네 이름을 허락하마, 나다니엘.”
본명을 되찾은 그는 통증도 잊은 듯 벌떡 일어나 공주를 향해 엎드려 절했다.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몇 번이고 읊조리는 나다니엘의 앞에 레이네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다시 태어났으니 나다니엘로서 충성 맹세를 해야겠지. 그는 지체없이 고개를 들어 레이네의 손등과 반지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만 일어나야겠다. 할 일은 해야지.”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 네놈이 걱정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다. 몸 관리나 잘하고 있거라.”
“예, 공주님. 감사합니다.”
레이네가 나간 뒤에도 나다니엘은 그대로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 그는 눈물로 얼굴이 얼룩져 있었다. 이름을 되찾은 감격이 상처의 통증을 지워버렸다.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비토.”
“예.”
“나다니엘의 집안에 대해서 알아와. 족보건 뭐건 그 아이 출신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입수할 수 있다면 더 좋고.”
“예.”
“가보 같은 게 있다면 가장 좋겠지.”
“….”
“저 아이는 생각보다 쓸모가 있겠어.”
“…. 정말 그 뿐입니까?”
“뭐…?”
속내를 떠보는 듯한 비토의 질문에 레이네는 불쾌한 얼굴로 홱 돌아보았다. 비토는 태연하게 다시 물어왔다. 저 아이가 쓸모 있다는 생각 하나뿐이냐고 여쭈었습니다.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자네는 고작 열 명 남짓한 정보대를 이끄는 자 치곤 배짱하며 기세가 남달라.”
“….”
“건방지게 상전의 속내를 떠보기도 하고…. 확실히 보통사람은 아닌데. 그 정도라면 너 역시 나에 대해서 산을 짚어보고 있겠지?”
“….”
“나도 그래. 난 아직 네가 확실히 내편이 되어줄 지 아닐지 판단을 세우지 못했어. 지금까지는 여러모로 편리한 방책이 되어줬지만…,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일수록 난 더 널 경계하게 된다는 것도 명심해.”
비토는 말없이 목례를 하여 그에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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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간격이 상당히 넓어졌군요.ㅡ.ㅡ;;; 한글 프로그램의 문제를 결국 찾아내지 못해서
그냥...화실에서 편집한 내용을 메일로 보내서 집에 와갖고 올립니다.
웹상의 텍스트를 그대로 복사 붙이기 했더니 이모냥이군요. ㅎㅎㅎㅎ...대체 왜 그러는 건지..ㅠ.ㅠ..;;
혹시 아시는 분 좀 가르쳐 주세요..
갑자기 한글 파일 중에서 실행에 필요한 dll 파일이 트로이 목마에 걸려갖고
한글을 지웠는데요. 다시 설치하려고 했더니 설치 파일 속에 있는 동일한 파일이
트로이 목마에 걸렸다고 난리난리 생난리를...ㅡ.ㅡ;;; 아니 대체.. CD에 바이러스가
걸릴 일이 뭐랍니까..;; 레지스트리에 있는 바이러스도 제거했는데 자꾸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혹여 아시는 분들 계신다면..꼭 좀..부탁드립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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