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보르틴 연기 1천 82년, 대륙의 최북단에서 론도 산맥의 뿌리에 자리한 로이나르 가의 가주 베슬리 얀 반 마르크 로이나르가 “보르틴 정화”라는 기치 아래 마도들을 규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침공 한 달 만에 대륙의 최강대국이었던 미키네오스의 왕도가 함락되고 국왕이 시해 당했을 만큼 초기부터 기선을 제압당했던 이 전쟁에서, 보르틴을 하나로 결집하여 그나마 항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바이마샤르와 네오시아를 위시한 공화정 국가들의 힘이었다. 결국 뱃길을 통해 요청한 잉그라드의 구원군으로 로이나르 세력의 배후를 압박하여 전쟁은 중단되었으나, 그로 인해 전통적으로 대륙 전반에 걸친 영향력을 행사하던 보르틴의 교원연합총회는 그 힘을 잃고 말았다. 새로이 국왕에 오른 미키네오스의 바루나 라카론 부르노아 비클멘은 초토화된 자국의 위상과, 분산된 교권을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종교적 숙청을 꺼내들었다. 10여 년에 걸친 숙청과 사상 통제는 미키네오스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는 성공했으나, 당초 의도했던 교권의 회복은 미키네오스에만 국한된 일이었고, 지난날의 국가적 위상을 되찾길 원하는 국왕 바루나는 이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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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천상의 종복들이여. 하늘의 가신들이여.
그대들, 땅의 주인들이여.
때가 이르러
하늘의 권능을 지닌 자 그대들에게 내려오리라.
종 된 자로서 주인 된 이를 알아보지 못하여
주인을 거스르는 죄가 창궐할지니
하늘을 읽는 죄인을 다스리고저 내려진 그대들,
주인의 분노를 마땅히 헤아릴 것이며
주인의 철퇴를 마땅히 행사할 것이며
마침내 죄를 사하게 할 것이니
종 된 자의 종 됨을 참되게 할 것이며
주인 된 자의 주인 됨을 참되게 할지니라.
<예언서 8장>
그대 하늘을 읽는 자여, 천주의 대역죄인 이여.
태초의 옳음을 행할 때가 올지니
자연을 지배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은
그대들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다만 정해진 것은 그대들을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위함이라.
하늘과 땅, 삶과 죽음의 균형이
깨어지는 날, 그대들
조화의 칼을 들고 분연히 일어나
맞서 싸워야 하리라.
이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들 있으니
그대들, 자비를 베풀지 말지니라.
<예언서 12장>
보르틴 연기 1천 103년.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예언서의 종말의 장은 사람들 입에 공공연히 오르내리곤 했다. 융베리가 교리를 편찬하면서, 예언서의 내용을 일부 담아놓고 주해를 달기는 했으나, 종말에 관한 부분은 일부러 빼놓았으니 일반 민초들이 이를 알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예언서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돈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민심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융베리는 예언서의 종말 편을 암송하며 펼쳐놓았던 마법 진을 거두어 들였다.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마놀로 융베리.
당년 97세. 발덴 령의 사제 출신이었던 그는 일찍부터 다민족 대륙인 보르틴에 산재하는 많은 종교들의 교리를 두루 섭렵하여, 보르틴 교회의 교리를 중심으로 개편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이 같은 업적을 인정받아 50세의 나이에 교원연합총회의 발덴 지역 추기경으로 승격되고, 26년간의 추기경 재임기간 동안 그가 이루어 놓은 무수한 저술 활동은 보르틴 대륙 전반에 걸친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심지어는 민생에 이르기까지 아우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그 깊이 또한 대단한 것들이었다. 이후 보르틴 교원연합총회의 총장직을 역임하며 교총의 교리와 사상을 더욱 탄탄하게 다진 인물로 추앙받았으나, 20년 전의 전쟁의 결과에 대해 “위기관리능력 부족”이란 이유로 사임하고 아슈람에 귀의했다. 어찌 보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교총은 미키네오스 왕국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전후 국왕 바루나가 해왔던 일은 실질적으로 그의 학문적 업적을 반감시키는 것들이었으므로, 여전히 총장직에 머물러 있었다면 정치적으로 망명이라도 해야 할 판국이었기에.
어찌 되었든 아슈람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 지 십여 년 후 원로회의 구루로 승격이 되어 이젠 빅쿠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뜰로 나서는 그를 아시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가게 되는가…?”
“아, 오셨습니까.”
매끈한 머리의 아시타는 늙은인지 젊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얼굴을 갖고 있었다. 다만 하얗게 센 눈썹과 목 언저리에 깊게 패인 주름이 적어도 젊은이는 아닐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끔 했다.
“보름을 지내고 나면 갈 것입니다.”
“보름이면….”
아시타는 잠시 날짜를 세어보는 척 하더니 그게 며칠이나 남았느냐며 난데없이 물어왔다. 달도 안 보십니까….
“리타와 하백을 함께 데려갈까 합니다.”
“…, 그래. 그 아이들도 이제 나갈 때가 됐지.”
“아마도 이번 전쟁은 제가 반대한다 해서 될 일은 아닐 겁니다. 이미 하늘과 땅의 경계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도 막아볼 참인가…?”
“…,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마음입니다. 아직 원로교원 권한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행사할 수 있을 겁니다.”
“막는다고 늦춰질 살겁이 아닐세….”
아시타는 연초를 피워 물며 깊이 시름했다.
수백 명의 인간의 수명만큼을 살아온 아시타에게는 마법진이 아니라 해도 보이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륙의 역사만큼이나 장구한 세월을 건너온 아슈람은 바로 그가 만든 지혜의 요람이었다. 수억의 사람들이 아시타를 비롯한 성인들의 설법을 듣기 위해 이곳을 방문해왔고, 요정들과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한 샤몽의 영역보다도 더욱 신성히 여겨지는 이곳은 ‘성지’라 불릴 정도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갈 곳 없는 이들 또한 이곳에서는 신분이나 소속에 관계없이 마도조차도 받아주어, 정치적인 망명자들, 멸망한 나라의 유민들, 심지어는 걸인이나 지명수배자들까지도 이곳에선 차등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어떤 국가에서도 이곳은 치외법권의 지대와 같은 존중을 받고 있었다.
그런 아슈람에 미키네오스 국왕으로부터 의외의 사절단이 도착한 것은 얼마 전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의 대대적인 종교적 숙청으로 인해 미키네오스는 아슈람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였다. 국왕 바루나가 나라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꺼내든 패는 교리에 의한 사상적 결집이었으며, 따라서 철저한 교회 원리주의에 입각한 배타적인 정책이 단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마법을 사용하며 자연을 숭배하는 샤몽과, 인간 스스로 내재해 있는 자연적 인과의 법칙을 가르치며 깨달음을 설파하는 아슈라마(아슈람의 분타급)가 대륙에서 축출 당하다시피 했다. 따라서 이번 대규모의 사절단은 아슈람의 입장에선 엉뚱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온 목적 또한 그러했다.
-보르틴의 주인이시며 론도 산맥의 성스러운 기운을 이어받은 대 미키네오스의 국왕 폐하를 대신하여 아슈람의 구루께 문안을 드립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사신의 첫 인사는 몹시 길고도 거추장스러운 수사로 치장되어 있었다. 원형의 탁자가 놓인 데서 한 집단의 우두머리를 만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 듯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사신이었으나, 한 나라의 사절단을 대표하는 이답게 할 말을 이어붙이는 데 주저함은 없었다.
“영명하신 저희 국왕 폐하께서는 지난 날 사상적 마찰로 인해 보르틴 대륙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하여 무척 유감스럽게 여기고 계시며….”
장대한 수사가 이어졌으나 요점을 말하자면, 지난 십 수 년에 걸친 종교숙청에 의해 축출당하거나 망명해 온 보르틴 대륙 출신인 이들을 데려가겠다는 게 사절단의 목적이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듯한데…, 그들은 우리가 잡아들인 포로가 아니라, 스스로 망명을 요청한 망명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마치 송환을 요청하듯 하다니, 어불성설이오.”
아슈람 내의 행정적인 문제들을 맡고 있는 묵이 딱 잘라 말하자, 사신이 그 말 한 번 잘했다는 듯 반색을 하며 다시 주워섬기길,
“영명하신 국왕 폐하께선 그들을 강제로 송환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들이 아슈람에 몸을 담은 지 수 년이 지났으니, 폐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이곳에서의 경건하고 엄격한 생활로부터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짓기를 원치 않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머무르겠다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대로 둘 것이요, 어떤 강요도 하지 말 것이며, 오로지 고향이 그리워 돌아오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은 군주로서 할 일이 아니니 반드시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길기도 했다. 무신장인 자와카는 그 장대하고 쓸모없는 수사들에 웃음부터 나왔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사신은 보르틴 대륙으로부터 귀의한 빅쿠나 빅쿠니들에게 국왕의 뜻을 전할 기회를 달라 청했다.
“위대하고 장엄한 론도 산맥의 정기를 받은 보르틴의 시민들은 들으시오!”
“… …”
그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면서 운을 뗀 첫 구절부터도 그러했고, 대단히 세심하게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사신이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 엿보였다.
“보르틴의 시민들이라….”
“교묘하게 우리 신경을 긁어 놓는군, 그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정무대신이랍니다. 좀 길던데. 레몽… 뭐라더라….”
“레몽 베스피앙 도메네크…. 미키네오스의 정무대신이고 지금 도메네크 가(家)의 가주이기도 합니다. 미키네오스를 세운 4대 가문 중의 하나죠.”
융베리가 말을 받았다. 대단한 가문이군요, 나라를 세운 공신 가문이라면…, 이번에 꽤 애를 쓴 것 같습니다, 구루님…?
“응…? 누가 말인가…?”
아시타의 이따금씩 보이는 이런 반응에 묵을 비롯한 다른 구루들은 어떨 땐 복장이 터질 때도 있었다. 수천 년이 넘게 살았으니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뭔가를 알고야 있을 법도 하지만, 한시가 급박한 상황에선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기도 했다.
“얼마나…, 모일까요?”
자와카는 아시타의 반응을 무시한 채 융베리를 향해 물었고, 융베리는 대답에 앞서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문제는 얼마나 가느냐가 아닐세. 바루나가 이런 회유책을 쓰는 의도지.”
“전쟁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마도….”
융베리와 묵의 신음하듯 하는 대답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일었다. 그 침묵을 깨는 아시타였다.
“그런데…. 정말 얼마나 모일까…?”
미키네오스.
보르틴 연기 787년 건국. 보르틴 대륙 서북부 론도 산맥을 끼고 세력을 유지하던 네 개의 가문-비클멘, 도메네크, 롤랑트, 발부아-이 연합하여 세웠으며, 초기에는 각 가문의 대표들이 각자의 세력을 이끌고 의회를 결성하여 공화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발부아 가에서 군사를 일으켜 의회를 장악하고 왕정을 선포하니, 그것이 건국 52년 되던 보르틴 연기 839년의 일이었고, 당시 미키네오스의 제일 가문이면서 건국에 가장 큰 공로가 있었던 롤랑트 가문이 숙청을 당했다.
20여 년 전, 보르틴 대전에서 국왕과 그 일족이 몰살을 당하고, 몰락한 발부아 왕가의 뒤를 이어 왕정을 이끌게 된 바루나는 대대적인 종교 숙청과 교리의 보급을 통해 국가의 결집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바로 그 전쟁에서 바루나 가문의 가신으로서 가병들을 이끌며 가문을 수호한 자는 라크라오스 그라토레 트레제게. 이제 갓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는 미키네오스의 오십만 전 군사를 통솔하는 병부대신의 위치에 있었다.
공주가 머무르는 왕궁 후원.
방 안에선 한껏 고조된 남녀의 신음소리가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침대 옆에 시립한 시녀들은 그 광경이 익숙한지 낯색 한 번 바꾸지 않은 채 조용히 부채질만을 하고 있었고, 그 부채질을 받으며 땀을 뻘뻘 흘리는 두 남녀는 곧 자세를 바꿨다. 남자의 위에 올라타 그의 두 손을 이끌어 스스로의 젖가슴을 거칠게 주무르며 익숙하게 허리를 흔드는 여자의 눈은 색정에 젖어 반쯤 정신이 나간 듯했다.
시녀들의 부채질까지 받아가면서 땀에 젖어 남자와 몸을 섞는 이 여자가 누군지야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그보다는 이 남자가 중요하다. 물론 공주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이나, 이 남자는 국왕 바루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시녀들은 역겨움을 겨우 이겨내고 있었다. 불룩하게 나온 배를 세로로 수놓은 듯 돋아나 있는 시커먼 털이 더 그랬다. 미셀 포이아르 플라시니, 미키네오스의 궁정대신이었다. 원래는 무가(武家)였으나 라크라오스 그라토레 트레제게가 비클멘 가의 가병들을 통솔하게 된 이후 그 통제에 따르고 있었다. 미셀은 그 집안에서 나온 학자 출신으로 왕궁 내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었으니, 가문에서 배출한 것 치고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궁정대신이 그저 금덩어리에나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깜짝 놀랐어요.”
“나 역시 놀랐습니다. 공주께서 이렇게 훌륭하실 줄이야.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대단하십니다.”
가시가 살짝 돋친 공주의 말이었지만, 미셀은 그 말이 전혀 모욕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구하시는 것 중에서 여자를 기쁘게 하는 방법 같은 것도 있나보죠?”
그는 털이 가득 돋은 손으로 땀에 젖은 공주의 젖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듯 젖꼭지가 발딱 서 있었다. 시녀가 건네주는 물을 마시며 공주가 다리를 벌리자, 시녀는 실크로 짠 수건을 가져와 정액이 흐르는 공주의 비경을 닦아냈다.
“그나저나, 공주께서 처음으로 경험하신 남자는 어떤 분이죠? 그 분께 감사라도 드려야겠습니다.”
물을 마신 궁정대신이 유들유들하게 웃자 공주도 배시시 웃으며 되받았다. 꼭 남자여야만 한다는 법이 있나요? 그리고 터지는 웃음소리는 문 밖까지 새어나갈 정도로 컸지만,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궁정의 시위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가 간 곳은 왕궁의 가장 중심부, 국왕 바루나의 집무실이었다.
“그래…. 알았다.”
시위의 보고를 들은 바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끝이었다. 시위를 내보낸 후 바루나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탁자 옆에 기립해 있던 근위장은 왕의 등을 따라 시선만 옮길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 ….”
바루나는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왕도의 밤풍경에 눈을 고정시킨 채 무슨 생각인가를 골똘하게 하고 있었다. 시름을 하는 것인지 궁리를 하는 것인지. 어쨌거나 그의 온 신경은 내일 있을 정무회의에 쏠려 있었다.
“정말 정무대신을 버릴 생각이십니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
이튿날 정무회의가 시작되기 전, 바루나는 회당으로 나가기 전에 집무실에서 병부대신을 만났다. 30년을 가신으로, 또한 친구로 지내온 그는 바루나의 가장 든든한 동지였으며 또한 신하였다.
“폐하, 그를 버리시면 안 됩니다. 그처럼 유능한 사람을 또 얻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차라리 설득을 하십시오. 이번에 아슈람에 보냈던 것처럼 최대한 예를 갖춰서 사신단을 보내서 친서를 전달하고 설득을….”
“설득한다고 해서 넘어올 놈들이 아닐세.”
“하지만 정무대신을 버리는 건 안 됩니다!”
“내가 없애려는 건….”
어려운 선택이었다. 바루나는 굳은 얼굴로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정무대신이 아니라, 이 미키네오스의 도약을 막는 장애물일세.”
“폐하…!”
“더 이상 말하지 말라. 그 정도 희생도 없이 이 나라의 위상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나?”
바루나는 단호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시작된 일에 대해서 제동을 거는 것은 일을 망치자고 나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라크라오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가지.”
회당에는 이미 모든 대신들이 들어와 자리하고 있었다. 바루나가 들어와 맨 위에 앉자 기립해 있던 대신들이 하나 둘 자리에 앉았다.
“교총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도록 하지. 추기경이 먼저 말씀해보시오.”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칙서에 담는 장구한 격식이나 사절단이 입에 담는 장황한 수사 따위도 없었다. 바루나는 실무에 있어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추기경은 시립해 있는 시중을 통해 제 앞에 놓여있던 문서를 왕에게 전달했다.
“총장 예하께서 보내신 서한입니다. 이번 망명자 귀환 조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신다는 의사를….”
“그건 이미 함께 이야기했던 거고. 다른 건 없나?”
“오피퀴움을 열었으면 한다고 하십니다.”
“오피퀴움이라….”
정기적으로 치러지던 대회였다. 교권의 영향을 받는 각 국가들을 대표하는 기사들이 기량을 겨루는 일종의 무술대회로, 20여 년 전의 전쟁 이후 단 한 번도 치러진 일이 없었다. 바루나는 서한을 읽어 내려가면서 추기경의 설명을 들었다.
“사실 전임 총장이셨던 융베리 원로에 비해 현재의 총장 예하께서는 그 업적이 크다 할 수 없습니다. 당장 실질적으로 뭔가를 해 내기에도 교총의 실권은 그리 크진 않지요. 그래서….”
“상징적인 무언가를 통해서 일단 교총은 건재하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거로군.”
“그렇습니다.”
바루나 앞에서 이런 저런 정치적 수사를 꾸며봐야 얻을 것이 없었고, 추기경은 그 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교총에서 가장 큰 어른인 총장이 그간 별 볼일 없었다는 걸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선 그 방법이 가장 잘 먹혀들어가는 편이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 바루나는 병부대신에게 눈길을 돌렸다.
“병부대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교권으로서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신 분은 폐하십니다. 제 생각에, 총장 예하와 국왕 폐하께선 하나와도 같으십니다.”
“상징적으로 그렇단 얘기겠지.”
“그렇습니다.”
“병부대신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찬성한다는 겁니까?”
라크라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셀을 향해 대답을 꺼내놓았다. 지난 십 수 년간의 레콩퀴스타로 폐하께선 교권을 중심으로 이 나라를 결집시켜 놓으셨습니다. 이 마당에 총장 예하와 폐하께서 뜻을 다르게 하셔선 겨우 이루어 놓은 이 화합에 균열을 일으킬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교총의 예산이 오피퀴움을 열 만한 게 못 된다고 알고 있는데. 망명자 귀환 문제로 총장 예하의 창고까지 여는 판국에 그럴 예산이 있겠습니까? 왕궁 국고도 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재무대신의 염려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폐하. 귀환자가 얼마나 될는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에 하나 그 수가 예상보다 많다면 오피퀴움을 열 만한 재정이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예산이 있다면 차라리 귀환자들이 많은 국가들에게 지원금을 보내는 편이 낫습니다.”
외무대신까지 각자 한 번씩 의견을 내놓고 나자 회당에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이제는 국왕이 결정을 내릴 때였다. 누구 하나 그릇된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추기경은 기분이 상해 있었다. 교권 중심주의네 뭐네 하며 떠받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돈 문제를 꺼내며 노골적으로 교총의 가난함을 꼬집는 그들이 당연히 마뜩치 않았다.
“일단…. 좋은 제안이다.”
일단은 좋은 제안이다. 국왕의 입에서 거절의 의사가 나왔다. 추기경의 입에서 가늘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오, 추기경. 총장 예하께 전해주시오. 오피퀴움은 매우 훌륭한 제안이라고. 반드시 열 테지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 바루나처럼 정치 술수에 능한 사람의 말은 모두 믿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반드시 연다는 말도 추기경으로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때가 아니다, 기다려 달라. 정치하는 사람들이 거절할 때 가장 잘 내뱉는 말이었다.
“이제 총장께선 이름뿐이야.”
회의가 끝난 후 회당 뜰에서 추기경은 하염없이 한숨만 내쉬는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수행원인 사제가 어째서 그러느냐, 폐하께서 반드시 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물었지만 추기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국왕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게. 저 자는 위험해. 그 말 몇 마디가 또 뭔가의 복안일 수도 있다.”
“그래도 지난 20년간 충실하게 교총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애써오지 않았습니까. 추기경님께서 너무 예민하신 듯합니다.”
“예민한 게 아니네. 지금의 총장 예하께선 그리 정치적인 분은 아닐세. 게다가 전임 총장이셨던 융베리 원로만큼 풍부한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야.”
“신앙만큼은 역대 어느 누구보다도 충실하신 분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신앙만으로 교총을 지켜나갈 수는 없어. 국왕은 총장 예하의 신앙을 분명히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 거야.”
왕궁 후원.
“오피퀴움이라….”
뜰에 두 개의 화려한 침대가 있고 각각 공주와 재무대신이 누워 있었다. 재무대신에게는 시녀 하나가, 공주에게는 시중이 있었다. 시녀는 엎드린 채로 재무대신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는 중이었고, 공주는 다리를 벌린 채 시중의 애무를 받고 있었다.
“폐하께선 아마 여실 겁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 늙은이가 꽤 괜찮은 생각을 했군요.”
공주는 빙글빙글 웃으며 시중의 머리를 허벅지로 조였다. 아랫도리에 와 닿는 그의 혀가 점점 애무의 농도를 짙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예산입니다. 지금 끌어올 곳이 없거든요. 과일주를 기울이며 진지한 얼굴이 된 재무대신을 보고 공주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아직도 폐하를 모르시나요? 하하~, 부왕이 설마 주머니를 털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방법이 있단 겁니까?”
“있고말고요.”
공주는 시중 하나를 더 부르곤 스스로 어깨끈을 풀어 젖가슴을 내놓았다. 가지런히 무릎을 꿇은 시중이 젖꼭지를 물고 혀를 움직이자 그녀는 가늘게 신음하며 그의 머리를 안았다. 뜸을 들이는 공주에게 재무대신이 대답을 재촉했다.
“도메네크 경이 있잖아요.”
“도메네크 경이 무슨…?”
“귀환자들도 그렇지만, 도메네크 경과 교총 원로가 마도의 무리들에게 습격이라도 받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야…, 당연히 전쟁이겠지요. 대륙의 전군이 론도 산맥으로 진군을….”
재무대신은 말을 잇다 말고 멈칫했다.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정착금을 군자금으로…!”
“부왕은 분명 정치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의리는 있는 분이세요. 총장 늙은이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구요.”
“…!”
“갈수록 기술이 느는구나. 이 아이들에게 상으로 금화 다섯 냥씩 줘.”
공주는 가늘게 몸을 떨더니 자신을 애무하는 시중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야릇한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시중의 혀가 어디를 건드렸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뾰족하고 짧은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도 무서운 사람이군….”
재무대신의 입에서 득의만면한 음성이 나왔다. 둘 다 달아오를 만큼 달아올랐다. 공주는 색욕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재무대신의 남근을 훑어보며 시종들을 모두 물렸다.
“당신에게도 나쁜 수는 아닐 거야. 미키네오스의 돈줄을 쥐고 흔든다지만, 그것만으로 개국 공신가문을 이길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럼 나는 어떤 식으로 쳐낼 생각이지?”
“무슨 말씀을…, 그런다고 그대로 내쳐질 사람도 아니면서….”
공주는 걸치고 있던 슬립을 벗어던지곤 그를 향해 다리를 벌렸다. 만개한 꽃잎이 재무대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는 단단해진 아랫도리를 그 곳에 맞추며 공주의 위에 몸을 포갰다.
“내가 국왕과의 수싸움에서 밀릴 것 같애?”
이젠 숫제 제 아비를 향해 ‘국왕’이란 말까지 해댄다. 이 도발적인 말이 그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공주의 손이 그의 남근을 부드럽게 감싸 쥐곤 제 비경으로 인도했다. 끝부분이 닿는가 싶더니 금세 미끄러져 들어갔고, 둘의 숨소리가 급격하게 상승세를 탔다.
“날 계속 기쁘게 해줘….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스스로 엉덩이를 들어 올려 그를 더욱 깊이 받아들이는 공주. 이름은 레이네 마리 부르노아 비클멘, 국왕 바루나의 하나뿐인 자식으로 당년 겨우 20세였다.
부왕이 왕좌에 앉은 직후 태어났고, 그녀가 자라난 미키네오스 왕궁은 국가의 부흥을 목표로 하며 내부적으로 갖은 숙청과 정치적 수싸움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겨우 스무 살이 된 그녀가 이토록 술수에 밝아 제 아비의 수를 읽어내는 것도 그런 환경 덕이라면 덕이었다.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거기에 동참하기도 했으니, 그 중 하나가 이렇듯 대신들과 살을 섞는 일이었다. 재무대신 르로아 메텔, 그도 이렇게 공주에게 얽혀든 이들 중 하나였으며, 가장 먼저 얽혀든 자였다.
“참, 나 당신에게 말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요.”
“뭔데…?”
한바탕 정사가 끝나고 레이네가 말문을 열었다. 일을 치르고 난 후 르로아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레이네의 말에 그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미셀 경이랑….”
말끝을 흐렸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르로아가 모를 리 없었다. 불쾌한 얼굴로 술잔을 들고 단숨에 비운 그는 잔을 집어던져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지는 잔을 시녀가 얼른 가서 치우는 동안 레이네는 알몸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위에 엎드렸다.
“아시잖아요. 난 여자예요. 왕녀라고는 해도, 왕위를 이어받으려면 사람이 필요해요.”
“그래서? 몸 내둘려서 왕위를 얻겠다? 화대치곤 꽤나 근사하군 그래.”
툭 던지듯 내뱉는 르로아의 말에는 불쾌감과 질투가 숨김없이 담겨 있었다. 레이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는 데에 암암리에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군권을 가진 라크라오스는 충신 중의 충신이었고, 돈줄을 쥐고 있는 자신이 그녀의 편이었으니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반대파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와중에 사람을 얻겠다며 레이네가 궁정대신과 몸을 섞었으니, 르로아로서는 그럴 법도 했다.
“빌어먹을….”
“…용서해줘요. 날 좀 이해해줄 순 없어요?”
공주는 고개 돌린 르로아에게 애원하듯 했다. 쉬 풀릴 마음이 아니었다. 적어도 르로아는 자신에게 공주가 진심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아무리 정치적인 수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냉철함과 명민함을 갖고 있다 해도 그녀는 겨우 스무 살 난 어린 처녀였다. 그 나이를 이미 30년 전에 겪어 본 입장에서, 여태까지 보여준 레이네의 행동엔 진심이 들어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궁정대신과 몸을 섞었다.
“…!!”
“고…공주…!!!”
별다른 대답 없이 여전히 고개를 돌린 르로아를 향해 이어지는 공주의 행동에 그는 아연실색하였다. 공주가 직접 입으로 자신을 애무했다. 자신의 정실부인조차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공주…! 이 무슨…!!”
레이네는 멈추지 않고 눈을 반쯤 감은 채 그것을 입안 깊이 품고 애무했다. 능숙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욕정에 눈뜬 지 오랜 그녀가 입으로 남근을 품어보지 못했을 리 없었지만, 그런 행동은 기실 천박한 것으로 취급되어왔다. 따라서 노예들이나 하는 행동이었고, 심지어 매춘부들에게 원할 때에도 따로 화대를 지급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왕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여자가 하고 있었다. 짐짓 정성을 다하는 시늉을 내면서도 레이네는 능숙해 보이지 않기 위해 혀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기분 좋아요…?”
입안에서 르로아의 남근이 팽창하는 것이 느껴지자 묻는 레이네, 그녀는 놀라 자빠질 것 같은 르로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다시 그것을 입에 넣었다. 신분으로만 치자면 가장 고결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입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르로아를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뻐근하게 굳어오는 남근의 끝이 레이네의 입술에서 빠져나왔다.
“나 당신 앞이라면 상관없어….”
스스로 그의 위에 올라 다리를 벌리며 하반신을 맞춰가는 레이네, 르로아는 이게 대체 꿈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천천히 내려앉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끊어질 듯 팽창한 자신의 일부가 모습을 감췄고, 레이네는 그를 안으며 완만하게 몸을 움직였다.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피부로 느껴졌다.
“당신만… 곁에 있으면….”
눈물까지 글썽이며 엉덩이를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르로아는 뭔가가 머릿속에서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단숨에 그녀의 몸을 부둥켜안고 격정에 몸을 내맡겼다.
?….
레이네는 몇 번씩이나 침을 뱉어냈다. 재무대신이 돌아간 뒤 목욕을 세 번이나 하고, 입안을 수도 없이 헹궈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얼굴엔 아까의 애처로운 표정은 말끔하게 사라지고, 대신 표독스러움만이 남아있었다.
“두고 보라지. 왕위에 오르는 순간 가장 먼저,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놈은 네놈이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자명했다. 레이네는 아직도 입안이 찜찜한지 다시 한 번 침을 뱉어냈다. 받아내는 시녀들만 곤욕스러웠다.
“공주님.”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
그럴 줄 알았다. 자신의 잠자리까지 훤히 알고 있는 아비였으니, 찾지 않을 리 없었다. 궁정대신과의 관계를 밝힌 연유를 물어보는 것일 테지. 레이네는 그렇게 짐작하며 그를 따라 나섰다.
생각보다 바루나는 무거운 안색이었다. 마주 앉은 레이네는 당돌하게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
“재무대신을 완전하게 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는 건 알겠다만….”
“….”
“도메네크 경의 이야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
“뒷일을 꾸미지 않겠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네게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르로아야 워낙….”
“메텔 경이라고 해라. 이 나라의 재무대신이다.”
“…, 메텔 경이야 워낙 제 이익을 챙기는 데 밝은 사람이니까요.”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안다기보단, 추측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편이 맞을 겁니다. 폐하께서 마도의 누구와 손을 잡고 계시는지, 그들과 어떤 거래를 하고 계시는지, 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연합군 결성과 그 군권을 잡는 데 개국 공신 가문의 희생만한 명분은 없을 테니까, 그런 추측을 해봤을 뿐입니다.”
“입 밖으로 나오면 그것은 이미 사실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게 이미 진행 중인 사실이란 거겠지요.”
둘 사이엔 부녀지간이라 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근위장도, 공주를 수행하는 시위장도 모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바루나의 눈썹이 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만일…, 메텔 경이 그 사실을 빌미로 삼아 왕가에 반기를 들면 어떻게 막을 생각이냐? 그 정도 복안은 갖고 있겠지?”
“그건 폐하의 계획입니다. 제 계획이 아닙니다.”
“나는 네 의견을 물었다.”
“저는 폐하가 벌여놓은 일을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폐하의 딸입니다.”
“…이 녀석….”
바루나의 표정에 은근히 노기가 차올랐으나, 레이네는 조금도 수그러드는 기색 없이 말을 이어갔다.
“폐하의 명이라면 방도를 찾아보지요. 하지만 명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폐하를 보호하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텔 경은 아직 쓸모가 많은 자다. 나는 그를 버릴 생각이 없다.”
“…?”
무슨 말일까. 공주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렸으면 몰렸지, 그를 제거할 수 있는 카드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바루나의 말에는 조금도 주저함이나 불안함이 없었다. 분명 그는 뭔가를 갖고 있었다.
“이제 보니….”
레이네의 입 꼬리가 실룩거렸다.
“복안은 폐하께서 이미 갖고 계시는군요.”
“명심해라. 메텔 경을 내치게 만든다면…,”
“저는 메텔 경보다 더 쓸모가 있을 텐데요?”
도발적으로 말을 끊고 들어오자 바루나의 안색이 조금 달아올랐다. 레이네는 말을 이어붙이며 그를 더욱 자극했다.
“이토록 쓸모 있는 딸년을 만들어주신 건 바로 폐하가 아니신지요? 폐하께서 만드신 강력한 칼날이 가장 날카로울 때, 버리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탁자 아래에 있던 바루나의 손이 꾸욱 쥐어졌다. 떨림은 어깨로까지 전해지고 있었고, 레이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러가겠습니다. 폐하의 복안이 무엇인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그럼….”
살포시 예를 올리고는 사뿐사뿐 엉덩이를 흔들며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는 바루나,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보르틴 연기 1천 82년, 대륙의 최북단에서 론도 산맥의 뿌리에 자리한 로이나르 가의 가주 베슬리 얀 반 마르크 로이나르가 “보르틴 정화”라는 기치 아래 마도들을 규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침공 한 달 만에 대륙의 최강대국이었던 미키네오스의 왕도가 함락되고 국왕이 시해 당했을 만큼 초기부터 기선을 제압당했던 이 전쟁에서, 보르틴을 하나로 결집하여 그나마 항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바이마샤르와 네오시아를 위시한 공화정 국가들의 힘이었다. 결국 뱃길을 통해 요청한 잉그라드의 구원군으로 로이나르 세력의 배후를 압박하여 전쟁은 중단되었으나, 그로 인해 전통적으로 대륙 전반에 걸친 영향력을 행사하던 보르틴의 교원연합총회는 그 힘을 잃고 말았다. 새로이 국왕에 오른 미키네오스의 바루나 라카론 부르노아 비클멘은 초토화된 자국의 위상과, 분산된 교권을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종교적 숙청을 꺼내들었다. 10여 년에 걸친 숙청과 사상 통제는 미키네오스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는 성공했으나, 당초 의도했던 교권의 회복은 미키네오스에만 국한된 일이었고, 지난날의 국가적 위상을 되찾길 원하는 국왕 바루나는 이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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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천상의 종복들이여. 하늘의 가신들이여.
그대들, 땅의 주인들이여.
때가 이르러
하늘의 권능을 지닌 자 그대들에게 내려오리라.
종 된 자로서 주인 된 이를 알아보지 못하여
주인을 거스르는 죄가 창궐할지니
하늘을 읽는 죄인을 다스리고저 내려진 그대들,
주인의 분노를 마땅히 헤아릴 것이며
주인의 철퇴를 마땅히 행사할 것이며
마침내 죄를 사하게 할 것이니
종 된 자의 종 됨을 참되게 할 것이며
주인 된 자의 주인 됨을 참되게 할지니라.
<예언서 8장>
그대 하늘을 읽는 자여, 천주의 대역죄인 이여.
태초의 옳음을 행할 때가 올지니
자연을 지배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은
그대들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다만 정해진 것은 그대들을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위함이라.
하늘과 땅, 삶과 죽음의 균형이
깨어지는 날, 그대들
조화의 칼을 들고 분연히 일어나
맞서 싸워야 하리라.
이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들 있으니
그대들, 자비를 베풀지 말지니라.
<예언서 12장>
보르틴 연기 1천 103년.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예언서의 종말의 장은 사람들 입에 공공연히 오르내리곤 했다. 융베리가 교리를 편찬하면서, 예언서의 내용을 일부 담아놓고 주해를 달기는 했으나, 종말에 관한 부분은 일부러 빼놓았으니 일반 민초들이 이를 알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예언서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돈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민심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융베리는 예언서의 종말 편을 암송하며 펼쳐놓았던 마법 진을 거두어 들였다.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마놀로 융베리.
당년 97세. 발덴 령의 사제 출신이었던 그는 일찍부터 다민족 대륙인 보르틴에 산재하는 많은 종교들의 교리를 두루 섭렵하여, 보르틴 교회의 교리를 중심으로 개편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이 같은 업적을 인정받아 50세의 나이에 교원연합총회의 발덴 지역 추기경으로 승격되고, 26년간의 추기경 재임기간 동안 그가 이루어 놓은 무수한 저술 활동은 보르틴 대륙 전반에 걸친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심지어는 민생에 이르기까지 아우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그 깊이 또한 대단한 것들이었다. 이후 보르틴 교원연합총회의 총장직을 역임하며 교총의 교리와 사상을 더욱 탄탄하게 다진 인물로 추앙받았으나, 20년 전의 전쟁의 결과에 대해 “위기관리능력 부족”이란 이유로 사임하고 아슈람에 귀의했다. 어찌 보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교총은 미키네오스 왕국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전후 국왕 바루나가 해왔던 일은 실질적으로 그의 학문적 업적을 반감시키는 것들이었으므로, 여전히 총장직에 머물러 있었다면 정치적으로 망명이라도 해야 할 판국이었기에.
어찌 되었든 아슈람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 지 십여 년 후 원로회의 구루로 승격이 되어 이젠 빅쿠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뜰로 나서는 그를 아시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가게 되는가…?”
“아, 오셨습니까.”
매끈한 머리의 아시타는 늙은인지 젊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얼굴을 갖고 있었다. 다만 하얗게 센 눈썹과 목 언저리에 깊게 패인 주름이 적어도 젊은이는 아닐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끔 했다.
“보름을 지내고 나면 갈 것입니다.”
“보름이면….”
아시타는 잠시 날짜를 세어보는 척 하더니 그게 며칠이나 남았느냐며 난데없이 물어왔다. 달도 안 보십니까….
“리타와 하백을 함께 데려갈까 합니다.”
“…, 그래. 그 아이들도 이제 나갈 때가 됐지.”
“아마도 이번 전쟁은 제가 반대한다 해서 될 일은 아닐 겁니다. 이미 하늘과 땅의 경계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도 막아볼 참인가…?”
“…,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마음입니다. 아직 원로교원 권한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행사할 수 있을 겁니다.”
“막는다고 늦춰질 살겁이 아닐세….”
아시타는 연초를 피워 물며 깊이 시름했다.
수백 명의 인간의 수명만큼을 살아온 아시타에게는 마법진이 아니라 해도 보이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륙의 역사만큼이나 장구한 세월을 건너온 아슈람은 바로 그가 만든 지혜의 요람이었다. 수억의 사람들이 아시타를 비롯한 성인들의 설법을 듣기 위해 이곳을 방문해왔고, 요정들과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한 샤몽의 영역보다도 더욱 신성히 여겨지는 이곳은 ‘성지’라 불릴 정도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갈 곳 없는 이들 또한 이곳에서는 신분이나 소속에 관계없이 마도조차도 받아주어, 정치적인 망명자들, 멸망한 나라의 유민들, 심지어는 걸인이나 지명수배자들까지도 이곳에선 차등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어떤 국가에서도 이곳은 치외법권의 지대와 같은 존중을 받고 있었다.
그런 아슈람에 미키네오스 국왕으로부터 의외의 사절단이 도착한 것은 얼마 전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의 대대적인 종교적 숙청으로 인해 미키네오스는 아슈람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였다. 국왕 바루나가 나라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꺼내든 패는 교리에 의한 사상적 결집이었으며, 따라서 철저한 교회 원리주의에 입각한 배타적인 정책이 단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마법을 사용하며 자연을 숭배하는 샤몽과, 인간 스스로 내재해 있는 자연적 인과의 법칙을 가르치며 깨달음을 설파하는 아슈라마(아슈람의 분타급)가 대륙에서 축출 당하다시피 했다. 따라서 이번 대규모의 사절단은 아슈람의 입장에선 엉뚱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온 목적 또한 그러했다.
-보르틴의 주인이시며 론도 산맥의 성스러운 기운을 이어받은 대 미키네오스의 국왕 폐하를 대신하여 아슈람의 구루께 문안을 드립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사신의 첫 인사는 몹시 길고도 거추장스러운 수사로 치장되어 있었다. 원형의 탁자가 놓인 데서 한 집단의 우두머리를 만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 듯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사신이었으나, 한 나라의 사절단을 대표하는 이답게 할 말을 이어붙이는 데 주저함은 없었다.
“영명하신 저희 국왕 폐하께서는 지난 날 사상적 마찰로 인해 보르틴 대륙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하여 무척 유감스럽게 여기고 계시며….”
장대한 수사가 이어졌으나 요점을 말하자면, 지난 십 수 년에 걸친 종교숙청에 의해 축출당하거나 망명해 온 보르틴 대륙 출신인 이들을 데려가겠다는 게 사절단의 목적이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듯한데…, 그들은 우리가 잡아들인 포로가 아니라, 스스로 망명을 요청한 망명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마치 송환을 요청하듯 하다니, 어불성설이오.”
아슈람 내의 행정적인 문제들을 맡고 있는 묵이 딱 잘라 말하자, 사신이 그 말 한 번 잘했다는 듯 반색을 하며 다시 주워섬기길,
“영명하신 국왕 폐하께선 그들을 강제로 송환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들이 아슈람에 몸을 담은 지 수 년이 지났으니, 폐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이곳에서의 경건하고 엄격한 생활로부터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짓기를 원치 않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머무르겠다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대로 둘 것이요, 어떤 강요도 하지 말 것이며, 오로지 고향이 그리워 돌아오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은 군주로서 할 일이 아니니 반드시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길기도 했다. 무신장인 자와카는 그 장대하고 쓸모없는 수사들에 웃음부터 나왔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사신은 보르틴 대륙으로부터 귀의한 빅쿠나 빅쿠니들에게 국왕의 뜻을 전할 기회를 달라 청했다.
“위대하고 장엄한 론도 산맥의 정기를 받은 보르틴의 시민들은 들으시오!”
“… …”
그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면서 운을 뗀 첫 구절부터도 그러했고, 대단히 세심하게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사신이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 엿보였다.
“보르틴의 시민들이라….”
“교묘하게 우리 신경을 긁어 놓는군, 그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정무대신이랍니다. 좀 길던데. 레몽… 뭐라더라….”
“레몽 베스피앙 도메네크…. 미키네오스의 정무대신이고 지금 도메네크 가(家)의 가주이기도 합니다. 미키네오스를 세운 4대 가문 중의 하나죠.”
융베리가 말을 받았다. 대단한 가문이군요, 나라를 세운 공신 가문이라면…, 이번에 꽤 애를 쓴 것 같습니다, 구루님…?
“응…? 누가 말인가…?”
아시타의 이따금씩 보이는 이런 반응에 묵을 비롯한 다른 구루들은 어떨 땐 복장이 터질 때도 있었다. 수천 년이 넘게 살았으니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뭔가를 알고야 있을 법도 하지만, 한시가 급박한 상황에선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기도 했다.
“얼마나…, 모일까요?”
자와카는 아시타의 반응을 무시한 채 융베리를 향해 물었고, 융베리는 대답에 앞서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문제는 얼마나 가느냐가 아닐세. 바루나가 이런 회유책을 쓰는 의도지.”
“전쟁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마도….”
융베리와 묵의 신음하듯 하는 대답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일었다. 그 침묵을 깨는 아시타였다.
“그런데…. 정말 얼마나 모일까…?”
미키네오스.
보르틴 연기 787년 건국. 보르틴 대륙 서북부 론도 산맥을 끼고 세력을 유지하던 네 개의 가문-비클멘, 도메네크, 롤랑트, 발부아-이 연합하여 세웠으며, 초기에는 각 가문의 대표들이 각자의 세력을 이끌고 의회를 결성하여 공화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발부아 가에서 군사를 일으켜 의회를 장악하고 왕정을 선포하니, 그것이 건국 52년 되던 보르틴 연기 839년의 일이었고, 당시 미키네오스의 제일 가문이면서 건국에 가장 큰 공로가 있었던 롤랑트 가문이 숙청을 당했다.
20여 년 전, 보르틴 대전에서 국왕과 그 일족이 몰살을 당하고, 몰락한 발부아 왕가의 뒤를 이어 왕정을 이끌게 된 바루나는 대대적인 종교 숙청과 교리의 보급을 통해 국가의 결집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바로 그 전쟁에서 바루나 가문의 가신으로서 가병들을 이끌며 가문을 수호한 자는 라크라오스 그라토레 트레제게. 이제 갓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는 미키네오스의 오십만 전 군사를 통솔하는 병부대신의 위치에 있었다.
공주가 머무르는 왕궁 후원.
방 안에선 한껏 고조된 남녀의 신음소리가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침대 옆에 시립한 시녀들은 그 광경이 익숙한지 낯색 한 번 바꾸지 않은 채 조용히 부채질만을 하고 있었고, 그 부채질을 받으며 땀을 뻘뻘 흘리는 두 남녀는 곧 자세를 바꿨다. 남자의 위에 올라타 그의 두 손을 이끌어 스스로의 젖가슴을 거칠게 주무르며 익숙하게 허리를 흔드는 여자의 눈은 색정에 젖어 반쯤 정신이 나간 듯했다.
시녀들의 부채질까지 받아가면서 땀에 젖어 남자와 몸을 섞는 이 여자가 누군지야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그보다는 이 남자가 중요하다. 물론 공주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이나, 이 남자는 국왕 바루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시녀들은 역겨움을 겨우 이겨내고 있었다. 불룩하게 나온 배를 세로로 수놓은 듯 돋아나 있는 시커먼 털이 더 그랬다. 미셀 포이아르 플라시니, 미키네오스의 궁정대신이었다. 원래는 무가(武家)였으나 라크라오스 그라토레 트레제게가 비클멘 가의 가병들을 통솔하게 된 이후 그 통제에 따르고 있었다. 미셀은 그 집안에서 나온 학자 출신으로 왕궁 내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었으니, 가문에서 배출한 것 치고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궁정대신이 그저 금덩어리에나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깜짝 놀랐어요.”
“나 역시 놀랐습니다. 공주께서 이렇게 훌륭하실 줄이야.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대단하십니다.”
가시가 살짝 돋친 공주의 말이었지만, 미셀은 그 말이 전혀 모욕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구하시는 것 중에서 여자를 기쁘게 하는 방법 같은 것도 있나보죠?”
그는 털이 가득 돋은 손으로 땀에 젖은 공주의 젖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듯 젖꼭지가 발딱 서 있었다. 시녀가 건네주는 물을 마시며 공주가 다리를 벌리자, 시녀는 실크로 짠 수건을 가져와 정액이 흐르는 공주의 비경을 닦아냈다.
“그나저나, 공주께서 처음으로 경험하신 남자는 어떤 분이죠? 그 분께 감사라도 드려야겠습니다.”
물을 마신 궁정대신이 유들유들하게 웃자 공주도 배시시 웃으며 되받았다. 꼭 남자여야만 한다는 법이 있나요? 그리고 터지는 웃음소리는 문 밖까지 새어나갈 정도로 컸지만,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궁정의 시위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가 간 곳은 왕궁의 가장 중심부, 국왕 바루나의 집무실이었다.
“그래…. 알았다.”
시위의 보고를 들은 바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끝이었다. 시위를 내보낸 후 바루나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탁자 옆에 기립해 있던 근위장은 왕의 등을 따라 시선만 옮길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 ….”
바루나는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왕도의 밤풍경에 눈을 고정시킨 채 무슨 생각인가를 골똘하게 하고 있었다. 시름을 하는 것인지 궁리를 하는 것인지. 어쨌거나 그의 온 신경은 내일 있을 정무회의에 쏠려 있었다.
“정말 정무대신을 버릴 생각이십니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
이튿날 정무회의가 시작되기 전, 바루나는 회당으로 나가기 전에 집무실에서 병부대신을 만났다. 30년을 가신으로, 또한 친구로 지내온 그는 바루나의 가장 든든한 동지였으며 또한 신하였다.
“폐하, 그를 버리시면 안 됩니다. 그처럼 유능한 사람을 또 얻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차라리 설득을 하십시오. 이번에 아슈람에 보냈던 것처럼 최대한 예를 갖춰서 사신단을 보내서 친서를 전달하고 설득을….”
“설득한다고 해서 넘어올 놈들이 아닐세.”
“하지만 정무대신을 버리는 건 안 됩니다!”
“내가 없애려는 건….”
어려운 선택이었다. 바루나는 굳은 얼굴로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정무대신이 아니라, 이 미키네오스의 도약을 막는 장애물일세.”
“폐하…!”
“더 이상 말하지 말라. 그 정도 희생도 없이 이 나라의 위상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나?”
바루나는 단호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시작된 일에 대해서 제동을 거는 것은 일을 망치자고 나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라크라오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가지.”
회당에는 이미 모든 대신들이 들어와 자리하고 있었다. 바루나가 들어와 맨 위에 앉자 기립해 있던 대신들이 하나 둘 자리에 앉았다.
“교총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도록 하지. 추기경이 먼저 말씀해보시오.”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칙서에 담는 장구한 격식이나 사절단이 입에 담는 장황한 수사 따위도 없었다. 바루나는 실무에 있어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추기경은 시립해 있는 시중을 통해 제 앞에 놓여있던 문서를 왕에게 전달했다.
“총장 예하께서 보내신 서한입니다. 이번 망명자 귀환 조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신다는 의사를….”
“그건 이미 함께 이야기했던 거고. 다른 건 없나?”
“오피퀴움을 열었으면 한다고 하십니다.”
“오피퀴움이라….”
정기적으로 치러지던 대회였다. 교권의 영향을 받는 각 국가들을 대표하는 기사들이 기량을 겨루는 일종의 무술대회로, 20여 년 전의 전쟁 이후 단 한 번도 치러진 일이 없었다. 바루나는 서한을 읽어 내려가면서 추기경의 설명을 들었다.
“사실 전임 총장이셨던 융베리 원로에 비해 현재의 총장 예하께서는 그 업적이 크다 할 수 없습니다. 당장 실질적으로 뭔가를 해 내기에도 교총의 실권은 그리 크진 않지요. 그래서….”
“상징적인 무언가를 통해서 일단 교총은 건재하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거로군.”
“그렇습니다.”
바루나 앞에서 이런 저런 정치적 수사를 꾸며봐야 얻을 것이 없었고, 추기경은 그 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교총에서 가장 큰 어른인 총장이 그간 별 볼일 없었다는 걸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선 그 방법이 가장 잘 먹혀들어가는 편이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 바루나는 병부대신에게 눈길을 돌렸다.
“병부대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교권으로서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신 분은 폐하십니다. 제 생각에, 총장 예하와 국왕 폐하께선 하나와도 같으십니다.”
“상징적으로 그렇단 얘기겠지.”
“그렇습니다.”
“병부대신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찬성한다는 겁니까?”
라크라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셀을 향해 대답을 꺼내놓았다. 지난 십 수 년간의 레콩퀴스타로 폐하께선 교권을 중심으로 이 나라를 결집시켜 놓으셨습니다. 이 마당에 총장 예하와 폐하께서 뜻을 다르게 하셔선 겨우 이루어 놓은 이 화합에 균열을 일으킬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교총의 예산이 오피퀴움을 열 만한 게 못 된다고 알고 있는데. 망명자 귀환 문제로 총장 예하의 창고까지 여는 판국에 그럴 예산이 있겠습니까? 왕궁 국고도 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재무대신의 염려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폐하. 귀환자가 얼마나 될는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에 하나 그 수가 예상보다 많다면 오피퀴움을 열 만한 재정이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예산이 있다면 차라리 귀환자들이 많은 국가들에게 지원금을 보내는 편이 낫습니다.”
외무대신까지 각자 한 번씩 의견을 내놓고 나자 회당에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이제는 국왕이 결정을 내릴 때였다. 누구 하나 그릇된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추기경은 기분이 상해 있었다. 교권 중심주의네 뭐네 하며 떠받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돈 문제를 꺼내며 노골적으로 교총의 가난함을 꼬집는 그들이 당연히 마뜩치 않았다.
“일단…. 좋은 제안이다.”
일단은 좋은 제안이다. 국왕의 입에서 거절의 의사가 나왔다. 추기경의 입에서 가늘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오, 추기경. 총장 예하께 전해주시오. 오피퀴움은 매우 훌륭한 제안이라고. 반드시 열 테지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 바루나처럼 정치 술수에 능한 사람의 말은 모두 믿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반드시 연다는 말도 추기경으로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때가 아니다, 기다려 달라. 정치하는 사람들이 거절할 때 가장 잘 내뱉는 말이었다.
“이제 총장께선 이름뿐이야.”
회의가 끝난 후 회당 뜰에서 추기경은 하염없이 한숨만 내쉬는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수행원인 사제가 어째서 그러느냐, 폐하께서 반드시 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물었지만 추기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국왕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게. 저 자는 위험해. 그 말 몇 마디가 또 뭔가의 복안일 수도 있다.”
“그래도 지난 20년간 충실하게 교총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애써오지 않았습니까. 추기경님께서 너무 예민하신 듯합니다.”
“예민한 게 아니네. 지금의 총장 예하께선 그리 정치적인 분은 아닐세. 게다가 전임 총장이셨던 융베리 원로만큼 풍부한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야.”
“신앙만큼은 역대 어느 누구보다도 충실하신 분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신앙만으로 교총을 지켜나갈 수는 없어. 국왕은 총장 예하의 신앙을 분명히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 거야.”
왕궁 후원.
“오피퀴움이라….”
뜰에 두 개의 화려한 침대가 있고 각각 공주와 재무대신이 누워 있었다. 재무대신에게는 시녀 하나가, 공주에게는 시중이 있었다. 시녀는 엎드린 채로 재무대신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는 중이었고, 공주는 다리를 벌린 채 시중의 애무를 받고 있었다.
“폐하께선 아마 여실 겁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 늙은이가 꽤 괜찮은 생각을 했군요.”
공주는 빙글빙글 웃으며 시중의 머리를 허벅지로 조였다. 아랫도리에 와 닿는 그의 혀가 점점 애무의 농도를 짙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예산입니다. 지금 끌어올 곳이 없거든요. 과일주를 기울이며 진지한 얼굴이 된 재무대신을 보고 공주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아직도 폐하를 모르시나요? 하하~, 부왕이 설마 주머니를 털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방법이 있단 겁니까?”
“있고말고요.”
공주는 시중 하나를 더 부르곤 스스로 어깨끈을 풀어 젖가슴을 내놓았다. 가지런히 무릎을 꿇은 시중이 젖꼭지를 물고 혀를 움직이자 그녀는 가늘게 신음하며 그의 머리를 안았다. 뜸을 들이는 공주에게 재무대신이 대답을 재촉했다.
“도메네크 경이 있잖아요.”
“도메네크 경이 무슨…?”
“귀환자들도 그렇지만, 도메네크 경과 교총 원로가 마도의 무리들에게 습격이라도 받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야…, 당연히 전쟁이겠지요. 대륙의 전군이 론도 산맥으로 진군을….”
재무대신은 말을 잇다 말고 멈칫했다.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정착금을 군자금으로…!”
“부왕은 분명 정치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의리는 있는 분이세요. 총장 늙은이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구요.”
“…!”
“갈수록 기술이 느는구나. 이 아이들에게 상으로 금화 다섯 냥씩 줘.”
공주는 가늘게 몸을 떨더니 자신을 애무하는 시중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야릇한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시중의 혀가 어디를 건드렸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뾰족하고 짧은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도 무서운 사람이군….”
재무대신의 입에서 득의만면한 음성이 나왔다. 둘 다 달아오를 만큼 달아올랐다. 공주는 색욕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재무대신의 남근을 훑어보며 시종들을 모두 물렸다.
“당신에게도 나쁜 수는 아닐 거야. 미키네오스의 돈줄을 쥐고 흔든다지만, 그것만으로 개국 공신가문을 이길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럼 나는 어떤 식으로 쳐낼 생각이지?”
“무슨 말씀을…, 그런다고 그대로 내쳐질 사람도 아니면서….”
공주는 걸치고 있던 슬립을 벗어던지곤 그를 향해 다리를 벌렸다. 만개한 꽃잎이 재무대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는 단단해진 아랫도리를 그 곳에 맞추며 공주의 위에 몸을 포갰다.
“내가 국왕과의 수싸움에서 밀릴 것 같애?”
이젠 숫제 제 아비를 향해 ‘국왕’이란 말까지 해댄다. 이 도발적인 말이 그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공주의 손이 그의 남근을 부드럽게 감싸 쥐곤 제 비경으로 인도했다. 끝부분이 닿는가 싶더니 금세 미끄러져 들어갔고, 둘의 숨소리가 급격하게 상승세를 탔다.
“날 계속 기쁘게 해줘….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스스로 엉덩이를 들어 올려 그를 더욱 깊이 받아들이는 공주. 이름은 레이네 마리 부르노아 비클멘, 국왕 바루나의 하나뿐인 자식으로 당년 겨우 20세였다.
부왕이 왕좌에 앉은 직후 태어났고, 그녀가 자라난 미키네오스 왕궁은 국가의 부흥을 목표로 하며 내부적으로 갖은 숙청과 정치적 수싸움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겨우 스무 살이 된 그녀가 이토록 술수에 밝아 제 아비의 수를 읽어내는 것도 그런 환경 덕이라면 덕이었다.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거기에 동참하기도 했으니, 그 중 하나가 이렇듯 대신들과 살을 섞는 일이었다. 재무대신 르로아 메텔, 그도 이렇게 공주에게 얽혀든 이들 중 하나였으며, 가장 먼저 얽혀든 자였다.
“참, 나 당신에게 말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요.”
“뭔데…?”
한바탕 정사가 끝나고 레이네가 말문을 열었다. 일을 치르고 난 후 르로아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레이네의 말에 그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미셀 경이랑….”
말끝을 흐렸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르로아가 모를 리 없었다. 불쾌한 얼굴로 술잔을 들고 단숨에 비운 그는 잔을 집어던져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지는 잔을 시녀가 얼른 가서 치우는 동안 레이네는 알몸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위에 엎드렸다.
“아시잖아요. 난 여자예요. 왕녀라고는 해도, 왕위를 이어받으려면 사람이 필요해요.”
“그래서? 몸 내둘려서 왕위를 얻겠다? 화대치곤 꽤나 근사하군 그래.”
툭 던지듯 내뱉는 르로아의 말에는 불쾌감과 질투가 숨김없이 담겨 있었다. 레이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는 데에 암암리에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군권을 가진 라크라오스는 충신 중의 충신이었고, 돈줄을 쥐고 있는 자신이 그녀의 편이었으니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반대파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와중에 사람을 얻겠다며 레이네가 궁정대신과 몸을 섞었으니, 르로아로서는 그럴 법도 했다.
“빌어먹을….”
“…용서해줘요. 날 좀 이해해줄 순 없어요?”
공주는 고개 돌린 르로아에게 애원하듯 했다. 쉬 풀릴 마음이 아니었다. 적어도 르로아는 자신에게 공주가 진심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아무리 정치적인 수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냉철함과 명민함을 갖고 있다 해도 그녀는 겨우 스무 살 난 어린 처녀였다. 그 나이를 이미 30년 전에 겪어 본 입장에서, 여태까지 보여준 레이네의 행동엔 진심이 들어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궁정대신과 몸을 섞었다.
“…!!”
“고…공주…!!!”
별다른 대답 없이 여전히 고개를 돌린 르로아를 향해 이어지는 공주의 행동에 그는 아연실색하였다. 공주가 직접 입으로 자신을 애무했다. 자신의 정실부인조차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공주…! 이 무슨…!!”
레이네는 멈추지 않고 눈을 반쯤 감은 채 그것을 입안 깊이 품고 애무했다. 능숙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욕정에 눈뜬 지 오랜 그녀가 입으로 남근을 품어보지 못했을 리 없었지만, 그런 행동은 기실 천박한 것으로 취급되어왔다. 따라서 노예들이나 하는 행동이었고, 심지어 매춘부들에게 원할 때에도 따로 화대를 지급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왕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여자가 하고 있었다. 짐짓 정성을 다하는 시늉을 내면서도 레이네는 능숙해 보이지 않기 위해 혀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기분 좋아요…?”
입안에서 르로아의 남근이 팽창하는 것이 느껴지자 묻는 레이네, 그녀는 놀라 자빠질 것 같은 르로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다시 그것을 입에 넣었다. 신분으로만 치자면 가장 고결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입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르로아를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뻐근하게 굳어오는 남근의 끝이 레이네의 입술에서 빠져나왔다.
“나 당신 앞이라면 상관없어….”
스스로 그의 위에 올라 다리를 벌리며 하반신을 맞춰가는 레이네, 르로아는 이게 대체 꿈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천천히 내려앉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끊어질 듯 팽창한 자신의 일부가 모습을 감췄고, 레이네는 그를 안으며 완만하게 몸을 움직였다.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피부로 느껴졌다.
“당신만… 곁에 있으면….”
눈물까지 글썽이며 엉덩이를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르로아는 뭔가가 머릿속에서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단숨에 그녀의 몸을 부둥켜안고 격정에 몸을 내맡겼다.
?….
레이네는 몇 번씩이나 침을 뱉어냈다. 재무대신이 돌아간 뒤 목욕을 세 번이나 하고, 입안을 수도 없이 헹궈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얼굴엔 아까의 애처로운 표정은 말끔하게 사라지고, 대신 표독스러움만이 남아있었다.
“두고 보라지. 왕위에 오르는 순간 가장 먼저,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놈은 네놈이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자명했다. 레이네는 아직도 입안이 찜찜한지 다시 한 번 침을 뱉어냈다. 받아내는 시녀들만 곤욕스러웠다.
“공주님.”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
그럴 줄 알았다. 자신의 잠자리까지 훤히 알고 있는 아비였으니, 찾지 않을 리 없었다. 궁정대신과의 관계를 밝힌 연유를 물어보는 것일 테지. 레이네는 그렇게 짐작하며 그를 따라 나섰다.
생각보다 바루나는 무거운 안색이었다. 마주 앉은 레이네는 당돌하게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
“재무대신을 완전하게 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는 건 알겠다만….”
“….”
“도메네크 경의 이야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
“뒷일을 꾸미지 않겠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네게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르로아야 워낙….”
“메텔 경이라고 해라. 이 나라의 재무대신이다.”
“…, 메텔 경이야 워낙 제 이익을 챙기는 데 밝은 사람이니까요.”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안다기보단, 추측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편이 맞을 겁니다. 폐하께서 마도의 누구와 손을 잡고 계시는지, 그들과 어떤 거래를 하고 계시는지, 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연합군 결성과 그 군권을 잡는 데 개국 공신 가문의 희생만한 명분은 없을 테니까, 그런 추측을 해봤을 뿐입니다.”
“입 밖으로 나오면 그것은 이미 사실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게 이미 진행 중인 사실이란 거겠지요.”
둘 사이엔 부녀지간이라 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근위장도, 공주를 수행하는 시위장도 모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바루나의 눈썹이 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만일…, 메텔 경이 그 사실을 빌미로 삼아 왕가에 반기를 들면 어떻게 막을 생각이냐? 그 정도 복안은 갖고 있겠지?”
“그건 폐하의 계획입니다. 제 계획이 아닙니다.”
“나는 네 의견을 물었다.”
“저는 폐하가 벌여놓은 일을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폐하의 딸입니다.”
“…이 녀석….”
바루나의 표정에 은근히 노기가 차올랐으나, 레이네는 조금도 수그러드는 기색 없이 말을 이어갔다.
“폐하의 명이라면 방도를 찾아보지요. 하지만 명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폐하를 보호하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텔 경은 아직 쓸모가 많은 자다. 나는 그를 버릴 생각이 없다.”
“…?”
무슨 말일까. 공주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렸으면 몰렸지, 그를 제거할 수 있는 카드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바루나의 말에는 조금도 주저함이나 불안함이 없었다. 분명 그는 뭔가를 갖고 있었다.
“이제 보니….”
레이네의 입 꼬리가 실룩거렸다.
“복안은 폐하께서 이미 갖고 계시는군요.”
“명심해라. 메텔 경을 내치게 만든다면…,”
“저는 메텔 경보다 더 쓸모가 있을 텐데요?”
도발적으로 말을 끊고 들어오자 바루나의 안색이 조금 달아올랐다. 레이네는 말을 이어붙이며 그를 더욱 자극했다.
“이토록 쓸모 있는 딸년을 만들어주신 건 바로 폐하가 아니신지요? 폐하께서 만드신 강력한 칼날이 가장 날카로울 때, 버리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탁자 아래에 있던 바루나의 손이 꾸욱 쥐어졌다. 떨림은 어깨로까지 전해지고 있었고, 레이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러가겠습니다. 폐하의 복안이 무엇인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그럼….”
살포시 예를 올리고는 사뿐사뿐 엉덩이를 흔들며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는 바루나,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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