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宦官) 카이만
#01-12 세리(稅吏) 호르돈 : [행복한 가족]
추적추척 비가 내리는 이른 밤, 극장의 입구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9시를 살짝 넘긴 시간, 아직은 저녁공연이 끝날 때가 아니었기에 극장앞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오페라 하우스 "달의 검은 그림자"는 황도(皇都) "그레이트 레오니아"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최고급 극장이었기에, 이 남자가 무려 제국의 2인자에 해당하는 "재상"이라는 것이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재상의 신분을 지닌 자가 수행원 한명도 거느리지 않은체, 마차도 기다리지 않은체, 왁자지껄한 거리로 바로 걸어 나간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 신분을 감추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비를 피하려는 것인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로브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있기까지 했다.
"거참... 그렇게 혼자 다니시면 어떻게 합니까?"
어둠이 짙게 깔린 뒷골목에서 남루한 갈색 로브를 둘러쓴 거한의 사내가, 마치 유령처럼 소리없이 걸어나오며 말했다.
"허허... 그건 나도 똑같이 해주고 싶은 말이구먼, 이런 야심한 시간에 장군께서 어인일이시오?"
재상의 말에 장군이라 불린 사나이는 한쪽눈을 살짝 찌부리며 말했다.
"어인일은 무슨 어인일이랍니까? 당연히 걱정되서 나온 것이죠."
재상은 비쩍 말라 볼품없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허허... 걱정은 무슨,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제국 최강의 검사인 장군께서 경호해주시면 돼겟구려."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글쌔요... 최강이라니... 저는 그저 "지지 않는 검사"일 뿐입니다."
재상이 고개를 끄떡거리는 것을 보고난 사내는 다시금 버릇처럼 한쪽눈을 살짝 찌뿌리며 재상에게 질문했다.
"..."그 남자"와 만나고 오신거겟죠? 도대체 "그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여태껏 이야기를 하셨잖습니까? 속시원하게 말씀좀 해주십시오. 이거 참 답답해서..."
"아아... "그 남자"가 하는 일이니 황제폐하나 제국에 누가 되진 않을것이라 믿고 싶긴 하지만..."
사내는 쓴웃음을 짙게 머금은 얼굴로 씁쓸하게 말했다.
"저역시 "그 남자"에게 빚이 있는 몸이니,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원..."
"하지만 그가 폐하께 충성스럽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네."
"그렇습니까?"
재상은 뭔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지. 다만 그 것이 너무나 맹목적이랄까? 그런 부분이 있다는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하지만 이번일만은 내게도 무척이나 의문스럽다네."
"그래서 "그 남자"의 뜻에 거스르신 겁니까?"
"허허... 물론 거슬렀다면 거스른것일 수도 있긴 하네만. "그 남자"는 지금까지 폐하의 말에 토를 단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자라네. 최소한 내가 보아온 70년 동안은 말이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폐하의 말이 한번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인 자이니, 설사 내가 그에게 반대했다 해도, 폐하의 손이 한번 떨어지면 그는 더이상 아무 추궁도 하지 않았을 껄세."
"으흠... 그러다가 "그 남자"가 어르신께 손이라도 쓰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사내는 누가 듣기라도 할듯 살짝 소리를 죽여 말했지만, 재상은 빙그래 웃으며 바로 대꾸했다.
"허허허. 그래서 제국 최강의 검사가 바로 내 곁에 있지않은가?"
사내는 한쪽눈을 잔뜩 찡그린체 대답했다.
"아아... 이거 참. 좀 봐주십시오."
"허허허..."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흐르고, 재상은 무언가 아주 힘들고 무거운짐을 내려놓은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무척이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117년이면 퍽 오래도 살았지 않은가? 이젠 쉴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네."
재상의 말속에 담긴 초연함은 오히려 엄청난 무게로 사내에게 다가왔고, 그는 한쪽눈을 깊게 찌뿌린체 조용히, 하지만 무언가 비장함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렇든 저렇든! 어르신은 이 나라의 기둥이십니다. 아무리 "그 남자"라 하더라도 감히 어르신을 어찌 할 순 없을것입니다."
재상은 사내의 불끈쥔 주먹을 고요한 눈길로 바라보곤,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을 건냈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닐세."
"..."
재상은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자아 가세.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잔 할까?"
사내는 지금까지 재상이 술을 입에 대는 것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살짝 당황하며 곧바로 되묻듯이 말했다.
"예?"
"그래 그래... 나도 이젠 자유로워지고 싶다네."
그리고 어두운 골목 저편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져 갔다.
* * *
커튼을 통해 흐릿하게 비추어지는 햇빛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딘가에서 개짖는 소리와 여자아이가 웃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같았다. 몽롱하고 흐릿한 시아속에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성애가 잔뜩 낀 유리처럼, 김이 잔뜩 서린 거울처럼, 두 눈에 보이는 것도, 머리속도 온통 뿌옇고 희미하기만 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한 쪽 손을 뻗자, 부드러운 촉감이 손끝에 느껴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리 저리 흩어진 연갈색의 기다란 머리카락, 잡티 하나 보이지 ㅤㅇㅏㅎ는 새하얗고 미끈한 피부, 봉긋 솟아난 가슴과 엉덩이는 완연한 여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가느다랗고 매끈한 목과 종아리의 선은 숲속의 암사슴을 연상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지럽게 구겨진 이불에 말라붙은 하얗고 누런 자국들은, 이 언제까지나 순결할 것만 같았던 소녀의 몸 여기 저기에도 뭍어 있었다.
"아아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어제밤 호르돈은 알레아와 라샤의 몸을 거의 해가 뜨기 직전까지 미친듯이 범했다. 그는 동이 틀 무ㅤㄹㅕㅍ, 피곤에 쓰러지기 직전까지 알레아의 몸속에 2번, 입에 1번, 그리고 라샤의 항문에 4번 씩이나 사정했다. 이것은 그저 약의 위력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육신이 새로운 쾌락에 눈을 뜨고만 것이었을까?
호르돈은 찬찬히 벌거벗은 딸 라샤의 몸에 이불을 살짝 덮어주며,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자신이 이런 과오를 범하고 만 것일까? 고민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기에는 머리를 쥐어싸고 미칠듯이 비명을 질러도 모자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은 마치 서류의 잘못된 부분을 보며 고민하고 있듯이 그저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포어겔스와 다른 귀족들의 미친짓거리를 보고 온 탓이었을까? 마음 한켠에선, 최근 2년 동안 가족에게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잘된것이 아닐까?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아니 어찌보면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미친 시대였다. 혼음황제(昏淫皇帝), 그 황음무도의 어리석음에서 시작된 지독한 타락과 혼란이 제국에 차고 넘처흘러 이젠 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검사란 어째서 검사인가? 검(劍)을 갈고 닦아, "마나-블레이드(mana-blade)"의 이치를 궁구하여 날카로운 쇳덩이에 불과한 검에서, 그 본질을 뛰어넘는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자들이기에 그들을 검사라 부른다.
귀족이란 어째서 귀족인가? 갈고 닦은 학식과 타고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어리석은 "다수"가 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수 있도록 선도하는 자이기에 그들을 귀족이라 부른다.
그 이름에 맞는 능력을 지닌지가, 그 능력에 맞는 일을 하기에 그 이름은 가치를 지닌다. 과연 지금 이 제국에서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위치에 걸맞는 일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황제란 어째서 황제인가...?"
무의식적으로 입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살짝 놀란 호르돈이었다.
"아니 이건 너무 지나쳤군..."
호르돈은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운 머리속에서 쏟아지는 생각들을 억눌렀다.
그 때 문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알레아가 천천히 뜨거운 물과 수건, 쟁반등이 담긴 작은 수레를 들여왔다. 침대 옆으로 다가온 그녀는 침실의 연분홍빛 실크커튼을 활짝 열어놓고서는, 조용히 말했다.
"잘 주무셨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기에 오히려 대답하기가 어려웠을까? 호르돈은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한 마디를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응."
시간은 오후 2시를 향해가고 있었고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따가운 햇살을 등지고 서있던 알레아는, 침대에 누워있던 큰딸 라샤에게 다가가더니 살짝 헛기침을 하며 엉덩이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아마도 이미 잠이 깬지 오래인듯, 라샤는 홍당무처럼 빨게진 얼굴로 금새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나서는, 이불로 몸을 둘러싸고서 도망치듯 침실밖으로 뛰쳐나가며 말했다.
"화. 화장실 좀요..."
라샤가 나가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침묵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만 가고 있었다. 어제밤의 일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몽마에 홀려 요사스러운 꿈속으로 빠져버렸던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래도 말을 해야만 했다. 더 이상 자신의 가족에게 외로움을, 고통을 안겨주지 않으려면 자신이 먼저 말을 건내야만 했다.
"... 미안해."
호르돈의 말에 알레아는 예쁜 이마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 모두 다 내 잘못이야."
그 순간 알레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두 눈 가득히 눈물을 글썽이며, 호르돈의 추욱 쳐진 등을 감싸안고 말했다.
"아... 아... 아니에요... 다. 당신은... 모. 모두... 제. 제... 제가... 제가. 더. 더... 더러운... 녀. 년... 이라서..."
그녀는 힘겹게 울음을 집어삼키며 간신히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그의 등에는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야! 그런 소리는... 아니야. 내. 내가 외롭게 만들어 버린거야... 내가."
너무나도 소중한 아내가 이런 소리를 입에 담도록 만들고 말다니, 깊은 슬픔과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제. 제가..."
호르돈은 그녀가 더 이상 스스로를 책망하며 상처입히지 않도록 그녀의 떨리는 몸을 가슴 깊숙히 품고서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입맞춤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던 떨림이 잠잠해져 갔다.
그리고 차 한잔 정도 마실시간이 지나서야 기나긴 입맞춤을 끝낸 호르돈은, 평소의 그였다면 생각 조차 할 수 없었을만한 말을 하고야 만다.
"어제밤... 좋았어."
이성으로는 분명 어처구니 없는 말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르돈이 이런말이라도 해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스스로를 용서 할 수가 없을것만 같아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말로서 호르돈 자신이 용서받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몸 어딘에서 이것은 결코 틀린말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같았다. 바로 이것이 그 더러운 귀족들이 말하던 배덕의 쾌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이 잊어버린, 그리고 잃어버릴 뻔했던 육신의 행복을 되찾은것 뿐이었을까? 어느 쪽이었든 분명 자신의 육신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알레아의 가녀린 몸은 흠칫하며 떨었지만,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호르돈의 눈과 마주친 순간, 그의 눈속에 가득 담긴 애정을 확인하고는, 그의 품에 더욱 깊숙히 안기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하. 한번만 더 키스... 해주세요."
호르돈은 그녀의 핑크빛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고, 그의 몸속에서는 또 다시 그녀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런대 문득 밖에서 나직한 개짖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일어나 창밖을 바라본 알레아가 살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손님이 오신것같아요."
* * *
헐래벌떡 몸을 씻고 간단한 옷을 걸친뒤 현관문을 열고나서, 그 앞에선 손님들의 면면들을 살펴보고난 호르돈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현관문 너머에는 가장 앞에 서서 무척이나 관료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내무부부상(內務府副相)", "로우와르 웨르티스"를 필두로, 몇 명의 내부무 수행원들과, 내관(內官:환관,내시)들, 황궁의 애완동물관리자 "토예프 가우프디치"와 얼마전 본적 있었던 새로운 개 조련사 "로크란 홀", 그리고 맨 뒤에 황제의 침소담당 환관장 "아논 카이만"이 서 있었다.
* * *
한편 갈라서 두편, 편수 불리기 신공.
퉁퉁불린 다음편은 내일올리겠습니다.
#01-12 세리(稅吏) 호르돈 : [행복한 가족]
추적추척 비가 내리는 이른 밤, 극장의 입구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9시를 살짝 넘긴 시간, 아직은 저녁공연이 끝날 때가 아니었기에 극장앞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오페라 하우스 "달의 검은 그림자"는 황도(皇都) "그레이트 레오니아"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최고급 극장이었기에, 이 남자가 무려 제국의 2인자에 해당하는 "재상"이라는 것이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재상의 신분을 지닌 자가 수행원 한명도 거느리지 않은체, 마차도 기다리지 않은체, 왁자지껄한 거리로 바로 걸어 나간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 신분을 감추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비를 피하려는 것인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로브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있기까지 했다.
"거참... 그렇게 혼자 다니시면 어떻게 합니까?"
어둠이 짙게 깔린 뒷골목에서 남루한 갈색 로브를 둘러쓴 거한의 사내가, 마치 유령처럼 소리없이 걸어나오며 말했다.
"허허... 그건 나도 똑같이 해주고 싶은 말이구먼, 이런 야심한 시간에 장군께서 어인일이시오?"
재상의 말에 장군이라 불린 사나이는 한쪽눈을 살짝 찌부리며 말했다.
"어인일은 무슨 어인일이랍니까? 당연히 걱정되서 나온 것이죠."
재상은 비쩍 말라 볼품없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허허... 걱정은 무슨,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제국 최강의 검사인 장군께서 경호해주시면 돼겟구려."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글쌔요... 최강이라니... 저는 그저 "지지 않는 검사"일 뿐입니다."
재상이 고개를 끄떡거리는 것을 보고난 사내는 다시금 버릇처럼 한쪽눈을 살짝 찌뿌리며 재상에게 질문했다.
"..."그 남자"와 만나고 오신거겟죠? 도대체 "그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여태껏 이야기를 하셨잖습니까? 속시원하게 말씀좀 해주십시오. 이거 참 답답해서..."
"아아... "그 남자"가 하는 일이니 황제폐하나 제국에 누가 되진 않을것이라 믿고 싶긴 하지만..."
사내는 쓴웃음을 짙게 머금은 얼굴로 씁쓸하게 말했다.
"저역시 "그 남자"에게 빚이 있는 몸이니,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원..."
"하지만 그가 폐하께 충성스럽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네."
"그렇습니까?"
재상은 뭔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지. 다만 그 것이 너무나 맹목적이랄까? 그런 부분이 있다는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하지만 이번일만은 내게도 무척이나 의문스럽다네."
"그래서 "그 남자"의 뜻에 거스르신 겁니까?"
"허허... 물론 거슬렀다면 거스른것일 수도 있긴 하네만. "그 남자"는 지금까지 폐하의 말에 토를 단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자라네. 최소한 내가 보아온 70년 동안은 말이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폐하의 말이 한번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인 자이니, 설사 내가 그에게 반대했다 해도, 폐하의 손이 한번 떨어지면 그는 더이상 아무 추궁도 하지 않았을 껄세."
"으흠... 그러다가 "그 남자"가 어르신께 손이라도 쓰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사내는 누가 듣기라도 할듯 살짝 소리를 죽여 말했지만, 재상은 빙그래 웃으며 바로 대꾸했다.
"허허허. 그래서 제국 최강의 검사가 바로 내 곁에 있지않은가?"
사내는 한쪽눈을 잔뜩 찡그린체 대답했다.
"아아... 이거 참. 좀 봐주십시오."
"허허허..."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흐르고, 재상은 무언가 아주 힘들고 무거운짐을 내려놓은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무척이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117년이면 퍽 오래도 살았지 않은가? 이젠 쉴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네."
재상의 말속에 담긴 초연함은 오히려 엄청난 무게로 사내에게 다가왔고, 그는 한쪽눈을 깊게 찌뿌린체 조용히, 하지만 무언가 비장함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렇든 저렇든! 어르신은 이 나라의 기둥이십니다. 아무리 "그 남자"라 하더라도 감히 어르신을 어찌 할 순 없을것입니다."
재상은 사내의 불끈쥔 주먹을 고요한 눈길로 바라보곤,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을 건냈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닐세."
"..."
재상은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자아 가세.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잔 할까?"
사내는 지금까지 재상이 술을 입에 대는 것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살짝 당황하며 곧바로 되묻듯이 말했다.
"예?"
"그래 그래... 나도 이젠 자유로워지고 싶다네."
그리고 어두운 골목 저편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져 갔다.
* * *
커튼을 통해 흐릿하게 비추어지는 햇빛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딘가에서 개짖는 소리와 여자아이가 웃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같았다. 몽롱하고 흐릿한 시아속에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성애가 잔뜩 낀 유리처럼, 김이 잔뜩 서린 거울처럼, 두 눈에 보이는 것도, 머리속도 온통 뿌옇고 희미하기만 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한 쪽 손을 뻗자, 부드러운 촉감이 손끝에 느껴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리 저리 흩어진 연갈색의 기다란 머리카락, 잡티 하나 보이지 ㅤㅇㅏㅎ는 새하얗고 미끈한 피부, 봉긋 솟아난 가슴과 엉덩이는 완연한 여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가느다랗고 매끈한 목과 종아리의 선은 숲속의 암사슴을 연상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지럽게 구겨진 이불에 말라붙은 하얗고 누런 자국들은, 이 언제까지나 순결할 것만 같았던 소녀의 몸 여기 저기에도 뭍어 있었다.
"아아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어제밤 호르돈은 알레아와 라샤의 몸을 거의 해가 뜨기 직전까지 미친듯이 범했다. 그는 동이 틀 무ㅤㄹㅕㅍ, 피곤에 쓰러지기 직전까지 알레아의 몸속에 2번, 입에 1번, 그리고 라샤의 항문에 4번 씩이나 사정했다. 이것은 그저 약의 위력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육신이 새로운 쾌락에 눈을 뜨고만 것이었을까?
호르돈은 찬찬히 벌거벗은 딸 라샤의 몸에 이불을 살짝 덮어주며,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자신이 이런 과오를 범하고 만 것일까? 고민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기에는 머리를 쥐어싸고 미칠듯이 비명을 질러도 모자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은 마치 서류의 잘못된 부분을 보며 고민하고 있듯이 그저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포어겔스와 다른 귀족들의 미친짓거리를 보고 온 탓이었을까? 마음 한켠에선, 최근 2년 동안 가족에게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잘된것이 아닐까?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아니 어찌보면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미친 시대였다. 혼음황제(昏淫皇帝), 그 황음무도의 어리석음에서 시작된 지독한 타락과 혼란이 제국에 차고 넘처흘러 이젠 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검사란 어째서 검사인가? 검(劍)을 갈고 닦아, "마나-블레이드(mana-blade)"의 이치를 궁구하여 날카로운 쇳덩이에 불과한 검에서, 그 본질을 뛰어넘는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자들이기에 그들을 검사라 부른다.
귀족이란 어째서 귀족인가? 갈고 닦은 학식과 타고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어리석은 "다수"가 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수 있도록 선도하는 자이기에 그들을 귀족이라 부른다.
그 이름에 맞는 능력을 지닌지가, 그 능력에 맞는 일을 하기에 그 이름은 가치를 지닌다. 과연 지금 이 제국에서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위치에 걸맞는 일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황제란 어째서 황제인가...?"
무의식적으로 입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살짝 놀란 호르돈이었다.
"아니 이건 너무 지나쳤군..."
호르돈은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운 머리속에서 쏟아지는 생각들을 억눌렀다.
그 때 문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알레아가 천천히 뜨거운 물과 수건, 쟁반등이 담긴 작은 수레를 들여왔다. 침대 옆으로 다가온 그녀는 침실의 연분홍빛 실크커튼을 활짝 열어놓고서는, 조용히 말했다.
"잘 주무셨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기에 오히려 대답하기가 어려웠을까? 호르돈은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한 마디를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응."
시간은 오후 2시를 향해가고 있었고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따가운 햇살을 등지고 서있던 알레아는, 침대에 누워있던 큰딸 라샤에게 다가가더니 살짝 헛기침을 하며 엉덩이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아마도 이미 잠이 깬지 오래인듯, 라샤는 홍당무처럼 빨게진 얼굴로 금새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나서는, 이불로 몸을 둘러싸고서 도망치듯 침실밖으로 뛰쳐나가며 말했다.
"화. 화장실 좀요..."
라샤가 나가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침묵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만 가고 있었다. 어제밤의 일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몽마에 홀려 요사스러운 꿈속으로 빠져버렸던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래도 말을 해야만 했다. 더 이상 자신의 가족에게 외로움을, 고통을 안겨주지 않으려면 자신이 먼저 말을 건내야만 했다.
"... 미안해."
호르돈의 말에 알레아는 예쁜 이마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 모두 다 내 잘못이야."
그 순간 알레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두 눈 가득히 눈물을 글썽이며, 호르돈의 추욱 쳐진 등을 감싸안고 말했다.
"아... 아... 아니에요... 다. 당신은... 모. 모두... 제. 제... 제가... 제가. 더. 더... 더러운... 녀. 년... 이라서..."
그녀는 힘겹게 울음을 집어삼키며 간신히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그의 등에는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야! 그런 소리는... 아니야. 내. 내가 외롭게 만들어 버린거야... 내가."
너무나도 소중한 아내가 이런 소리를 입에 담도록 만들고 말다니, 깊은 슬픔과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제. 제가..."
호르돈은 그녀가 더 이상 스스로를 책망하며 상처입히지 않도록 그녀의 떨리는 몸을 가슴 깊숙히 품고서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입맞춤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던 떨림이 잠잠해져 갔다.
그리고 차 한잔 정도 마실시간이 지나서야 기나긴 입맞춤을 끝낸 호르돈은, 평소의 그였다면 생각 조차 할 수 없었을만한 말을 하고야 만다.
"어제밤... 좋았어."
이성으로는 분명 어처구니 없는 말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르돈이 이런말이라도 해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스스로를 용서 할 수가 없을것만 같아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말로서 호르돈 자신이 용서받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몸 어딘에서 이것은 결코 틀린말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같았다. 바로 이것이 그 더러운 귀족들이 말하던 배덕의 쾌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이 잊어버린, 그리고 잃어버릴 뻔했던 육신의 행복을 되찾은것 뿐이었을까? 어느 쪽이었든 분명 자신의 육신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알레아의 가녀린 몸은 흠칫하며 떨었지만,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호르돈의 눈과 마주친 순간, 그의 눈속에 가득 담긴 애정을 확인하고는, 그의 품에 더욱 깊숙히 안기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하. 한번만 더 키스... 해주세요."
호르돈은 그녀의 핑크빛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고, 그의 몸속에서는 또 다시 그녀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런대 문득 밖에서 나직한 개짖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일어나 창밖을 바라본 알레아가 살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손님이 오신것같아요."
* * *
헐래벌떡 몸을 씻고 간단한 옷을 걸친뒤 현관문을 열고나서, 그 앞에선 손님들의 면면들을 살펴보고난 호르돈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현관문 너머에는 가장 앞에 서서 무척이나 관료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내무부부상(內務府副相)", "로우와르 웨르티스"를 필두로, 몇 명의 내부무 수행원들과, 내관(內官:환관,내시)들, 황궁의 애완동물관리자 "토예프 가우프디치"와 얼마전 본적 있었던 새로운 개 조련사 "로크란 홀", 그리고 맨 뒤에 황제의 침소담당 환관장 "아논 카이만"이 서 있었다.
* * *
한편 갈라서 두편, 편수 불리기 신공.
퉁퉁불린 다음편은 내일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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