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전, 집무실을 정리하고 돌아온 예스프리는 목욕 후 오래간만에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아들을 멀리 변방으로 보내야 하는 트레제게 부인의 표정은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음식을 먹는 것도 깨작 깨작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라크라오스와 예스프리만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부인, 뭐 걱정거리라도 있습니까…? 표정이 영 안 좋습니다.”
“…후작…!”
“…먼 길 떠날 아들 앞에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속 편히 가겠습니까, 어디…. 그만 기분을 푸시오.”
트레제게 부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 포크 등을 내려놓으며 따져 물었다.
“대체 후작께선 뭘 하시는 분입니까? 예스프리가 그 사지로 가도록 내버려 두시다니요?”
“예스프리가 가는 곳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오. 론도 정벌전의 첨병이 되는 부대란 말이지요.”
“제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습니까? 알기 때문에 더 이러는 것 아닙니까?”
“안다면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부인. 그런 중요한 곳에 아무나 보낼 것 같소…?”
“신임 병부대신의 결정이지 않습니까…!”
“어머니.”
보다 못한 예스프리가 트레제게 부인을 말리고 나섰다. 저도 아버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 곳에 가게 된 건 군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예스프리…! 대체 누가 이 부자를 말려야 할 지 부인으로선 막막할 뿐이었다.
“임지로 가는 길에 마를렌도 데려가도록 해라.”
“아…, 아니….”
점입가경이다. 트레제게 부인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라크라오스를 쳐다보고만 있었고, 예스프리도 뜻밖의 말에 손을 멈추고 라크라오스를 쳐다보았다.
“카몬 협곡의 독립대대에 위안부를 설치하게 될 거다. 네가 다른 병사들과 똑같은 공창들을 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이보세요, 후작…!!”
“아버님…!”
부인과 아들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라크라오스는 묵묵히 식사를 하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군사들에겐 그만한 혜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버님, 그렇지만…! 예스프리의 말은 라크라오스에게 가로막혔다.
“집사가 내일 3백만 팡그를 마련해 줄 거다. 일개 독립대대에 그만한 예산이면 일단 제대로 정비하고 안정시킬 자금으로는 충분할 거야.”
“후작, 3백만 팡그라니오?! 그게…그게 얼마나 되는 돈인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부인께선….”
부인과 아들이 멈춰있는 동안 식사를 마친 라크라오스는 입을 닦았다.
“대체 내 재산이 뭘 위해 있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후작…!”
“나라에서 돈을 대기 어렵다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털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귀족들이 가져야 할 자세인 거요.”
말을 마친 라크라오스는 더 들을 말도 없다는 듯 일어나서 성큼 성큼 식당을 나가버렸다. 남아 있는 트레제게 부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고, 예스프리는 이게 정말 옳은 일인가 하는 얼굴로 앉아만 있었다.
안식일이 되자 바루나는 레이네를 부르고 객궁의 리토르나와 하백, 궁정대신과 더불어 오찬을 들었다. 일전에 궁정대신이 저질렀던 무례에 대해 국왕이 대신 사과의 뜻을 밝히는 의미에서였다. 명분상으로는.
“지난번 연회에서 궁정대신이 황녀께 무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많이 노여우셨던 모양인데, 이 국왕의 얼굴을 봐서 한 번 용서를 해 주시지요.”
“…. 국왕 폐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배려를 해주시니, 제가 물러설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신하의 잘못은 모두 군주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이토록 덕이 있으시니 미키네오스의 앞날이 밝은 듯합니다.”
하나 마나 한 의례적인 말들이 오가고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리토르나의 체면치레는 해 준 셈이었다. 궁정대신은 사죄부터 하라는 바루나의 말에 따라 이미 식사 전에 황녀에게 무례에 대한 사죄를 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으로 남몰래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 곳의 생활은 무료하지 않으신지요?”
“아닙니다. 생소한 곳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늘 새롭고 즐겁습니다. 또한 여기 공주님께서 한 번씩 연회도 베풀어 주시니 감사할 일일 뿐입니다.”
“애 쓰는구나. 자주 좀 열어드리고 말벗도 해 드리거라.”
“예, 폐하.”
이 날만큼은 레이네와 바루나 사이의 싸늘한 공기가 드러나지 않았다. 근위장은 그 두 부녀의 천연덕스러움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 타국의 황녀 앞에서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있는 그들의 태도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황녀의 친구분께서는 제가 듣기로…, 부친께서 환의 군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폐하. 저의 부친께선 환의 제후국인 하백의 단군이셨습니다.”
“단군…?”
“예. 환의 군주는 환인이라 하옵고, 왕자들은 환웅이라 하였으며, 제후국의 군왕을 단군이라고 하였습니다. 제 부친은 제후이셨습니다.”
“그러셨군요…. 큰 나라의 제후이셨으니 권세 또한 대단하셨겠습니다.”
“저는…. 환이 멸망한 이후 태어나 잘은 모릅니다.”
“예…. 내가 결례를 했습니다. 혹여 불편하셨다면 개의치 말아주십시오.”
“아닙니다, 폐하….”
바루나는 철저하게 웃는 낯을 유지하며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하백은 공손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투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아무리 황녀의 친구이며 왕자의 신분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멸망하고 없는 나라였다. 그런 자신에게 대륙의 강대국인 미키네오스의 국왕이 이렇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그에게는 어쩐지 석연치 않게 다가왔다.
“그럼 공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레이네가 물었다. 하백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궁정대신이 그를 보며 남몰래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생각이 있는 놈이 여태 여기서 뭉개며 칼이나 휘두를 리 없지…. 바루나는 하백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곧은 콧날과 각이 져 가는 턱선이 이제 미소년에서 준수한 청년의 티를 내는 모습이었다. 관상은 좋군…. 인물도 괜찮고….
“근위장에게서 들으니, 매일 수련을 하신다던데…. 어떻습니까? 근위 무사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는 것이….”
궁정대신은 연회에서부터처럼 집요하게 하백의 재주를 드러내기 위해 애썼다. 바루나는 이번엔 큰 문제가 없겠다 싶었는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의 말을 거들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으로 들립나다만…. 혹여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번쯤 공의 솜씨를 근위 무사들과 겨뤄보심이 어떠십니까?”
“… 저는….”
슬쩍 리토르나를 보는 하백, 리토르나는 피식 웃더니 국왕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백은 아슈람에서도 손꼽히는 카마산이었으니, 좋은 여흥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가…? 하백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이었으나, 리토르나의 물음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네는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하백과 리토르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저 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린 듯싶었다.
“기사란 혼자 수련하는 것보다는 대련을 통해서 자신의 단점을 발견해 가는 거지요. 그러면서 발전도 하고요.”
“말이 나온 김에 바로 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가, 폐하…? 하백 공께서만 허락을 하신다면 오늘 오후에 대신들을 모두 불러 모아 자리를 마련하심이….”
“그건 안 됩니다, 궁정대신.”
레이네가 말을 딱 잘라먹었다. 목을 움츠리는 궁정대신에게 레이네가 나무라듯 하백의 편을 들고 나섰다.
“하백 공을 구경거리로 만들 참입니까? 오늘 오후에 하는 거야 나쁠 일이 아니지만, 모두를 불러 모은다는 건 안식일의 교리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는 공주의 말이 옳다. 궁정대신은 자중하게.”
“… 예, 폐하….”
리토르나는 경우에 밝은 레이네의 말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왕녀쯤 되니 그렇겠지 라고 하기엔 보이는 것 외에 감춰두고 있는 속내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바루나는 허허 웃으며 근위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가 수하에게 일러 오후에 있을 대련을 준비하도록 한 후, 오찬이 곧 끝났다. 하백과 리토르나가 객궁으로 향하는 것을 바루나가 불러 세웠다.
“아, 황녀께서는 잠시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 ….”
리토르나는 하백을 먼저 보내고 바루나와 레이네, 그리고 궁정대신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무슨 얘길까. 어차피 마도들과 협력해서 잉그라드를 칠 계획이라면 나와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궁정대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국왕 폐하께서는 이번에 귀환자들이 마도의 무리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던 것에 대해 크게 노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개국 공신가문의 가주이자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재상이셨던 레몽 베스피앙 도메네크 경께서 그로 인해 변을 당하셨지요. 해서 우리는 교원총연합회의 이름 아래 전 보르틴 대륙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론도 산맥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전을 벌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리토르나는 짐짓 모른 척하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론도 산맥의 북부 쪽은 우리 잉그라드의 영토인 것으로 압니다. 만일 여기서 진군을 하신다면 잉그라드와의 외교적인 마찰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폐하께선 금번에 연합군 결성을 위한 보르틴 연합회의 소집에 앞서 잉그라드로 대규모의 사절단을 보낼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 ….”
의외였다. 마도들과 결탁하여 잉그라드를 침략한다면 먼저 자신을 객궁에 감금을 시키거나 혹은 자신이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며 최대한 빨리 진군하는 편이 옳았다. 그런데 정식으로 외교 사절단을 보내겠다니. 이게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토르나에게 바루나가 본론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전쟁이란 어떤 변수가 작용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론도 정벌은 우리 미키네오스와 보르틴 대륙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무결한 승리만이 허락되는 전쟁입니다. 만일 마도의 무리들이 우리 군과 맞서 싸우며 일전을 벌이고자 한다면 우리도 물러서지 않고 그들을 몰아붙일 것이지만…, 만에 하나 그들이 산맥의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다면….”
“…잉그라드의 국경을 넘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 그렇습니다. 또한 그렇게 되면 대국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 못 되지요.”
“…. 폐하의 말씀은, 그렇다면 잉그라드가 그들로 인해 몸살을 앓을 것이란 말씀으로도 들리는데요…?”
“….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그럼…. 우리와의 연합군 결성이라도 하고 싶단 말씀이십니까…?”
“하하하하…! 그렇다면 우리로서야 더없이 좋은 일이겠습니다…!”
이 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의혹의 빛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바루나에게서 리토르나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이번 정벌전은 보르틴 연합군의 힘으로 해야 하는 전쟁이라서요. 어려움이 있더라도 저희 힘으로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말씀을 이상하게 하십니다. 저는 연합군 결성에 대한 어떤 입장도 밝힌 적이 없는데요, 마치 국왕 폐하께서는 제가 먼저 손을 내밀기라도 했다는 듯 하시는군요.”
“이…, 이보시오, 황녀…!”
“나서지 말라.”
궁정대신의 말을 바루나가 끊었다. 그는 역시 아직 어리군…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리토르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지 않고 마주 눈빛을 대서는 리토르나가 못마땅했지만, 궁정대신은 화를 삭히며 바루나가 마무리 짓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황녀께서 이 곳에 머무르시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 역시 이 곳에 황녀께서 머무르시기를 바랍니다.”
“인질로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황녀께서 여기 계시는 것은, 만일 보르틴 연합군이 국경을 넘을 경우 본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양쪽에서 협공으로 응징을 하시겠다는 뜻 아닙니까…?”
“…. 반은 맞았습니다.”
“…반이라…?”
“…. 제가 데리고 있는 1천 5백의 군사들은 외람되오나 미키네오스 군 10만과도 같은 병력입니다. 그들은 그런 부대입니다.”
“아…아니…!”
궁정대신의 반응에도 리토르나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갔다.
“만일 연합군이 잉그라드의 국경을 넘는다면 그 즉시 본국에서는 대규모의 군사를 일으켜 제 명령에만 따르게 되어 있는 이 군사들과 함께 연합군을 양쪽에서 궤멸시킬 것입니다.”
“…이…!”
“또한…! 제가 여기에 머무르는 다른 이유는 미키네오스 왕실에서의 복잡한 정치상황을 지켜보며 장차 대 잉그라드의 황제로서 신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술수가 난무하는 조정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그것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제가 들어갈 황궁은 황녀에게 그런 여유를 주는 곳이 아닌 까닭입니다.”
“….”
“…. 이제 말씀하셔도 될 듯합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을 텐데요…?”
자신을 향해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리토르나. 바루나는 이 사람에게 뭘 숨기고 돌려 말해봐야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친서를 써 주셨으면 합니다.”
“…친서라고 하셨습니까?”
“예. 정벌의 결의와 시작에 앞서 대국의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황녀께서 친서를 써 주신다면 그보다 더 황제폐하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이 전쟁은 저희 입장에선 절대로 승리해야 하는 전쟁입니다. 보르틴 대륙의 북쪽과 서쪽을 감싸고 있는 저 거대한 론도 산맥 안에는 얼마나 많은 마도의 무리들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르는 큰 전쟁입니다. 그들의 뿌리를 뽑기 전에는 보르틴 대륙의 평화란 없습니다.”
“….”
“도와주시오, 황녀…! 잉그라드의 국경을 설령 넘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잉그라드에 어떤 해도 입히지 않을 것이오…! 그는 국왕의 명예를 걸고 약속을 드리겠소…!”
“… ….”
레이네는 조소를, 궁정대신은 놀라움과 당황함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지난 20년 간 어느 누구도 바루나에게 정면으로 대들거나, 혹은 바루나가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조아리는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레이네는 이런 부왕의 태도가 얼마나 기똥찬 연극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그런 부왕의 그런 점을 잘 닮아 있는 까닭이었으며, 부왕에겐 그 이외의 다른 수가 또 있음을 알고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제가….”
아직 널 완전히 믿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듯 의혹의 빛을 지우지 못한 채 바루나를 보고 있던 리토르나가 입을 열었다.
“써줄 수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짐짓 간절한 빛을 띠고 있던 바루나의 기색이 가라앉으며, 예의 그 침착하고 무게감 있는 안색으로 답변이 돌아왔다.
“써 주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리토르나와 바루나 사이에 가로놓인 긴장감이 극도로 팽창했다. 이번엔 레이네도 흠칫 놀라며 바루나를 쳐다보았고, 궁정대신과 근위장은 긴장한 안색으로 둘을 번갈아 보며 눈을 굴렸다. 리토르나는 이 자가 믿는 구석이 대체 뭔가 하는 눈빛이었다. 바루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금 전의 호소하는 듯한 기색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기왕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을 드리지요. 아직 본국에서 소식이 당도하지 않은 듯한데…. 귀국의 황제폐하께선 현재 병중에 계십니다.”
“…!!”
긴장의 끈이 바루나 쪽으로 당겨지며 주도권이 바루나 쪽으로 기울었다. 리토르나는 경직되었다. 레이네의 눈이 지그시 감기며 미세하게 찌푸려졌고, 바루나는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언제 붕어하실지 모를 심각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황녀께서 왜 모르고 계시는지 이 사람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만….”
“… …”
“지금 잉그라드의 황궁은 중심을 잃고 겨우 유지되는 형국입니다. 그런 와중에 군사를 일으켜 미키네오스도 아니고 보르틴 대륙 전체의 연합군을 궤멸시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 ….”
리토르나의 표정은 점점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바루나는 승기를 잡았으니 더 밀어붙여야 된다는 생각에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마도들이 두려워하는 잉그라드의 황실 친위대는 황제폐하의 침병으로 인해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마도들이 산맥에서 내려와 황도 베나레스까지 진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황군이 아니더라도 군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어느 모로 보아도 대국의 군사들은 황군의 기치에서 그 사기를 얻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군사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만의 힘으로 마도들을 막아내는 일은 적잖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
“마도의 무리들을 척살하고 나면 우리는 즉시 잉그라드의 영토에서 군사들을 철수시킬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연합군과 공조를 하여 마도들을 처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귀국에게도 나쁜 일이 아닐 것으로 생각되는데…. 장차 황위를 이으실 황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리토르나는 일단 그 자리에서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아직 자신에게 황군을 통솔하는 밀부가 있음을 바루나는 모르고 있었다. 기회를 엿볼 시간이 필요했다. 리토르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지요…. 친서를 써 드리겠습니다.”
“….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궁정대신은 그럼 그렇지 하며 리토르나를 비웃듯 쳐다보았다. 리토르나는 눈을 감은 채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자리를 파한 후 객궁으로 돌아온 리토르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기와 치욕을 다스리느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게다가 황제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바루나의 말은 곧, 본국의 황실에까지 그의 손이 뻗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법사들에 의해 결계진까지 쳐진 황실의 소식이 외부로 빠져나왔다는 것은 곧 누군가 매수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리토르나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왜….”
“….”
“…왜 말하지 않았는가….”
비사카는 즉시 리토르나의 발 앞에 엎드렸다.
“모르는 일을 황녀 전하께 아뢸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모른다….”
“소인의 무지를 탓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음을 명하옵소서. 하오나 맹세코 소인은 그를 모르고 있었나이다.”
“… ….”
황실 친위대의 군사들은 그런 일들에 대해 알지는 못했다. 여태까지 그래왔으니 그들도 명령에 따라 자신에게 왔을 뿐, 다른 일을 알고도 자신에게 숨겼을 리는 없었다. 리토르나는 그 점을 알고 있었다.
“…. 그대에게 죄를 물을 일은 아니다. 일어나거라.”
“망극하옵니다, 전하….”
일어난 비사카에게 리토르나는 확인이라도 하듯 부대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별동대는 성문 동쪽 외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사옵고, 본대는 론도 북부지역에 주둔하고 있사옵니다. 밀부를 발동하시면 즉시 산맥을 넘어 국경을 넘어올 수 있사옵니다.”
“그래…. 준비는 철저하게 해 두고 있군….”
“그렇사옵니다.”
리토르나로서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루나가 마도들과 결탁하여 잉그라드의 국경을 넘기에 앞서 공식적인 방법으로 그 명분을 마련하려 든다는 것은 생각지 못한 변수였으나, 어쨌든 단시일 내에 연합군을 궤멸시킬 준비가 필요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마도들이 한 데 뭉칠 구심점이 아직은 미키네오스에 오지 않은 것이었다. 리토르나는 바이마샤르에 있을 한율을 떠올렸다. 그가 여기 오지만 않는다면….
“황녀님, 들어가도 될까요…?”
잠시 달아올랐던 기분을 추스르며 침착하게 상황을 짚어보던 리토르나는 밖에서 들리는 레이네의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었다. 들어와 마주 앉은 레이네는 리토르나의 안색을 살피며 사뭇 그녀를 걱정하는 말투로 위로하듯 했다.
“염려가 크시겠습니다. 본국의 황제폐하께서 병환이 있으시다니….”
“….”
리토르나는 대답 없이 한숨지었다.
“그런 와중에 폐하께선 황녀님을 그렇게 핍박하시니…. 제가 정말 민망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선 이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황녀로서 군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건 황위를 이을 자격이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받아들여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대국의 황녀다우시군요.”
레이네는 얼굴을 활짝 펴며 리토르나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리토르나의 안색은 조금도 펴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헌데…. 이런 걸 여쭤보아도 될는지….”
“말씀하시지요.”
리토르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레이네는 그녀를 배려하듯 조심스럽게 황제의 환후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황제폐하께서 병중에 계시다면 당연히 황녀께서는 본국으로 가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리토르나가 가만히 눈을 떴다. 대단히 외람되오나, 폐하께서 국정을 돌보실 수 없다면 지금 잉그라드의 황궁은….
“아마도 조정에서 국정을 운영하고 있겠지요.”
“조정이라면…. 의회 같은 걸 말씀하십니까?”
“예. 바이마샤르에선 의회가 될 테고, 여기에선 귀족 대신들의 정무회의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더군요.”
“…예….”
“폐하의 환후가 제게 알려지지 않은 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아내려 노력하기 앞서 황녀로서 나는, 폐하께서 병중이신 이때에 타국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제가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황녀께서 하시는 일을 제가 도와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성의껏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입니다.”
리토르나는 가볍게 웃음지었다. 아비인 국왕이 자신을 압박하는데 거기서 숨통을 틔워주겠다는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하는 말이 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내비쳐 보이는 것은 아니리라 짐작한 탓이었다. 일단은 자신이 가진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여겼다. 생각을 굳힌 리토르나가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전했다.
“공주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예, 말씀하십시오. 뭐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 객궁에 은밀하게 잠입해 있는 자를 거두어 주십시오.”
“…!!”
크게 동요하는 레이네.
리토르나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시 눈을 감았고, 레이네는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시치미를 뗐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레이네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리토르나의 시선이었다. 그녀는 리토르나가 다시 눈을 뜨며 자신을 똑바로 주시하자 말을 삼켰고, 리토르나는 가볍게 웃음지었다.
“레이네 왕녀께서 제가 머무르는 곳을 살펴보시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렇게 절 찾아와서 요즘은 무얼 하며 지내느냐 물어보시는 것이 맞습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제게 말씀하신다면 저 역시 왕녀께 숨길 이유가 없겠지요.”
“… ….”
“하지만 폐하께서도 그러하시고, 왕녀께서도 그러하시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옳다는 것이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폐하께서 제게 친서를 명령하신 것은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으나, 제가 모든 것을 다 폐하께 양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점을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아무리 정치 경험이 일천한 황녀라도 대국인 잉그라드의 황녀가 이렇게 말하는 덴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텐데…. 이 자리에서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빠르게 머리속으로 상황을 정리해보는 레이네의 귀로 리토르나의 음성이 다시 꽂혀 들어왔다.
“여기 제 뒤에 시립해 있는 자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숨어 있는 자를 잡아 이 앞에 무릎을 꿇릴 수 있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는지요? 황실 친위군 1천 5백은 귀국의 군사 10만과 같다고 말입니다.”
“…!”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 물러가라….”
레이네는 리토르나의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정보조원을 철수시키는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패배감이 짓눌려 왔으나 그런 것에 분개할 때가 아니었다. 탁상 아래에 있는 레이네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리토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후원으로 돌아온 레이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꽃병을 집어던지고 응접 탁자 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독기가 오를 대로 올라 레이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술…!”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던 그녀의 앞에 술잔이 놓였다.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홱 집어 던졌다. 던져진 유리잔은 장식장에 부딪치며 하나의 술병과 두 개의 유리잔을 함께 깨뜨렸다. 숨소리도 조절이 잘 되지 않는지 콧김이 뿜어지는 듯 식식거렸다. 나다니엘은 담뱃대에 연초를 담아 불을 붙여 그녀에게 가져갔다.
“… …. 비토.”
“….”
낚아채듯 담뱃대를 받아든 그녀의 앞에 비토가 나타났다.
“그 황실 무사들…. 네가 보기에 그렇게 대단해…?”
“….”
“왜 대답이 없어…?!”
“겨루어 보지 않아 알 수는 없으나. 황녀의 옆에 항상 붙어 다니는 자는 적어도 저보다 아래가 아닌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 나머지 둘은…?”
“…. 잘 모르겠습니다.”
“…. 대단해…. 대단해, 과연 잉그라드의 황실 친위대…. 그러니 그렇게 오만하게 대놓고 날 모욕하는 거겠지….”
“….”
“….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 ….”
나다니엘이었다. 평소엔 물어도 별 말이 없던 그가 나서자 레이네는 뜻밖이라는 듯 돌아보았고, 나다니엘은 레이네의 허락을 기다리듯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 뭔데…?”
“국왕 폐하께서 압박을 하셨는데도 그토록 당당하게 공주님께 나오신 것은 뭔가 경고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경고…. 경고….”
레이네는 동감한다는 듯 그의 말을 되뇌었다.
“뭔가 아껴두고 있는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야. 꽤 눈치가 있는 편이로구나.”
“… ….”
조금 누그러진 말투였다. 레이네의 숨소리는 아까보다는 한결 가다듬어져 있었고,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도 평소의 안색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은 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보다 부왕이 그런 수를 들고 나올 줄은 몰랐어.”
“….”
“….”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다니엘이 대답을 요구하자 레이네는 연기를 내뿜으며 혼잣말하듯 오찬에서 있었던 일을 읊어냈다.
“잉그라드 황제의 침병…. 그걸 숨기고 협박을 할 줄 알았지…. 어차피 여기 있는 군사는 1천 5백에 불과해. 잉그라드가 힘으로 밀어붙일 생각을 했다면 부왕도 거기에 그대로 대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천 오백 대 미키네오스 전군이면 누가 뭐래도 승산은 있으니까….”
“하지만 피해를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오늘 따라 질문이 많군….”
“…! 송…송구합니다, 공주님…!”
당황한 나다니엘이 얼른 읍소하며 뒤로 물러서자 레이네는 피식 웃었다.
“아니다. 네 말이 맞아. 피해는 감수해야겠지.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명분이야. 그 명분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잉그라드에게 부왕이 어떻게 나올까, 내가 계산했던 게 틀렸던 거야….”
“… ….”
레이네는 담배를 끄라는 듯 시녀에게 담뱃대를 던지고는 나다니엘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는 여전히 물러선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일이면 폐하의 명이 있을 거다. 넌 궁내의 모든 시종들을 담당하는 시종관이 될 거야.”
“공…공주님…!!”
당황하는 나다니엘.
“하지만 착각 마라. 네 처소는 여전히 저쪽에 있을 테고, 넌 여전히 내 곁에 있어야 돼. 명심해. 아주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절대 이곳에서 내 명령 없이 벗어나지 마라. 알겠어?”
“…. 예, 공주님…!”
잠시 당황하던 얼굴빛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다니엘은 좋아라 하는 낯을 숨기지 않으며 레이네에게 거듭 몸을 숙였고, 그를 보는 레이네의 얼굴에도 희미하게나마 애틋한 표정이 감돌았다.
저녁 나절이 되어 객궁을 나선 리토르나는 기다리고 있던 하백의 인사를 받았다. 근위대의 연무장에서 있을 대련을 위해 하백은 오래간만에 카마산의 수련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가지….”
“황녀님.”
“…뭔가…?”
“…. 이것이 말씀하셨던 기회입니까?”
“… ….”
“….”
리토르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다.”
“… ….”
“하지만 기회란 것은 스스로 그렇다고 느낄 때이지, 누가 말해준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란 생각은 드는구나.”
“…그렇습니까.”
“나는 단지 그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해서 궁정대신의 말을 거들었던 것뿐이다. 그것이 기회가 될는지, 네게 악재가 될는지는 모르겠구나.”
하백은 솔직한 리토르나의 답변에 고맙다는 듯 읍소를 했고, 리토르나는 먼저 돌아서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한편 국왕은 연무장으로 나가기에 앞서 궁정대신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궁정대신은 잉그라드의 황녀를 압박한 바루나의 언변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가 그런 말을 꺼낼 적마다 바루나는 그 말들을 잘라내며 필요 이상의 잡소리가 시간을 좀먹는 일을 방지했다.
“자네도 이제 그런 소리를 입에서 떼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하하하…! 폐하께선 30년째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만 포기하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신하란 놈이 말법 한 번 공손하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바루나는 쿡쿡 하고 웃었다. 궁정대신은 창밖으로 눈을 돌리며 회상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은 폐하를 모시고 다시 이 왕도로 돌아오던 날을 생각합니다. 정무대신께서 앞장서서 혼란스러운 왕도를 평정하고, 그 땐 참….”
바루나의 웃는 낯 한쪽에서 싸늘한 기색이 끼어들었으나, 궁정대신은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홀로 옛일에 젖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미셀.”
“예, 폐하.”
“잉그라드로 가라.”
“…예…?”
“황녀의 친서를 갖고 잉그라드로 가거라. 가서 잡음이 없도록 네가 잘 구슬려 봐.”
“폐하…!”
“아무리 찾아봐도…. 외무대신만으로는 버겁다. 이제 너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뭔가 해야지.”
바루나의 진심이 담긴 눈을 대하며 궁정대신은 가슴이 찡하게 차올랐다. 왕위에 오르고 지난 20년간 온갖 술수를 부려가며 왕권을 강화한 정치꾼이어도, 30년을 가신으로 모셨던 자신에게만은 진심으로 신뢰를 던지고 있다는 확신이 그의 마음을 가득 메웠다.
“폐하가 곧 이 나라이십니다.”
“부인, 뭐 걱정거리라도 있습니까…? 표정이 영 안 좋습니다.”
“…후작…!”
“…먼 길 떠날 아들 앞에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속 편히 가겠습니까, 어디…. 그만 기분을 푸시오.”
트레제게 부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 포크 등을 내려놓으며 따져 물었다.
“대체 후작께선 뭘 하시는 분입니까? 예스프리가 그 사지로 가도록 내버려 두시다니요?”
“예스프리가 가는 곳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오. 론도 정벌전의 첨병이 되는 부대란 말이지요.”
“제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습니까? 알기 때문에 더 이러는 것 아닙니까?”
“안다면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부인. 그런 중요한 곳에 아무나 보낼 것 같소…?”
“신임 병부대신의 결정이지 않습니까…!”
“어머니.”
보다 못한 예스프리가 트레제게 부인을 말리고 나섰다. 저도 아버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 곳에 가게 된 건 군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예스프리…! 대체 누가 이 부자를 말려야 할 지 부인으로선 막막할 뿐이었다.
“임지로 가는 길에 마를렌도 데려가도록 해라.”
“아…, 아니….”
점입가경이다. 트레제게 부인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라크라오스를 쳐다보고만 있었고, 예스프리도 뜻밖의 말에 손을 멈추고 라크라오스를 쳐다보았다.
“카몬 협곡의 독립대대에 위안부를 설치하게 될 거다. 네가 다른 병사들과 똑같은 공창들을 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이보세요, 후작…!!”
“아버님…!”
부인과 아들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라크라오스는 묵묵히 식사를 하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군사들에겐 그만한 혜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버님, 그렇지만…! 예스프리의 말은 라크라오스에게 가로막혔다.
“집사가 내일 3백만 팡그를 마련해 줄 거다. 일개 독립대대에 그만한 예산이면 일단 제대로 정비하고 안정시킬 자금으로는 충분할 거야.”
“후작, 3백만 팡그라니오?! 그게…그게 얼마나 되는 돈인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부인께선….”
부인과 아들이 멈춰있는 동안 식사를 마친 라크라오스는 입을 닦았다.
“대체 내 재산이 뭘 위해 있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후작…!”
“나라에서 돈을 대기 어렵다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털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귀족들이 가져야 할 자세인 거요.”
말을 마친 라크라오스는 더 들을 말도 없다는 듯 일어나서 성큼 성큼 식당을 나가버렸다. 남아 있는 트레제게 부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고, 예스프리는 이게 정말 옳은 일인가 하는 얼굴로 앉아만 있었다.
안식일이 되자 바루나는 레이네를 부르고 객궁의 리토르나와 하백, 궁정대신과 더불어 오찬을 들었다. 일전에 궁정대신이 저질렀던 무례에 대해 국왕이 대신 사과의 뜻을 밝히는 의미에서였다. 명분상으로는.
“지난번 연회에서 궁정대신이 황녀께 무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많이 노여우셨던 모양인데, 이 국왕의 얼굴을 봐서 한 번 용서를 해 주시지요.”
“…. 국왕 폐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배려를 해주시니, 제가 물러설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신하의 잘못은 모두 군주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이토록 덕이 있으시니 미키네오스의 앞날이 밝은 듯합니다.”
하나 마나 한 의례적인 말들이 오가고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리토르나의 체면치레는 해 준 셈이었다. 궁정대신은 사죄부터 하라는 바루나의 말에 따라 이미 식사 전에 황녀에게 무례에 대한 사죄를 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으로 남몰래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 곳의 생활은 무료하지 않으신지요?”
“아닙니다. 생소한 곳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늘 새롭고 즐겁습니다. 또한 여기 공주님께서 한 번씩 연회도 베풀어 주시니 감사할 일일 뿐입니다.”
“애 쓰는구나. 자주 좀 열어드리고 말벗도 해 드리거라.”
“예, 폐하.”
이 날만큼은 레이네와 바루나 사이의 싸늘한 공기가 드러나지 않았다. 근위장은 그 두 부녀의 천연덕스러움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 타국의 황녀 앞에서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있는 그들의 태도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황녀의 친구분께서는 제가 듣기로…, 부친께서 환의 군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폐하. 저의 부친께선 환의 제후국인 하백의 단군이셨습니다.”
“단군…?”
“예. 환의 군주는 환인이라 하옵고, 왕자들은 환웅이라 하였으며, 제후국의 군왕을 단군이라고 하였습니다. 제 부친은 제후이셨습니다.”
“그러셨군요…. 큰 나라의 제후이셨으니 권세 또한 대단하셨겠습니다.”
“저는…. 환이 멸망한 이후 태어나 잘은 모릅니다.”
“예…. 내가 결례를 했습니다. 혹여 불편하셨다면 개의치 말아주십시오.”
“아닙니다, 폐하….”
바루나는 철저하게 웃는 낯을 유지하며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하백은 공손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투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아무리 황녀의 친구이며 왕자의 신분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멸망하고 없는 나라였다. 그런 자신에게 대륙의 강대국인 미키네오스의 국왕이 이렇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그에게는 어쩐지 석연치 않게 다가왔다.
“그럼 공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레이네가 물었다. 하백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궁정대신이 그를 보며 남몰래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생각이 있는 놈이 여태 여기서 뭉개며 칼이나 휘두를 리 없지…. 바루나는 하백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곧은 콧날과 각이 져 가는 턱선이 이제 미소년에서 준수한 청년의 티를 내는 모습이었다. 관상은 좋군…. 인물도 괜찮고….
“근위장에게서 들으니, 매일 수련을 하신다던데…. 어떻습니까? 근위 무사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는 것이….”
궁정대신은 연회에서부터처럼 집요하게 하백의 재주를 드러내기 위해 애썼다. 바루나는 이번엔 큰 문제가 없겠다 싶었는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의 말을 거들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으로 들립나다만…. 혹여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번쯤 공의 솜씨를 근위 무사들과 겨뤄보심이 어떠십니까?”
“… 저는….”
슬쩍 리토르나를 보는 하백, 리토르나는 피식 웃더니 국왕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백은 아슈람에서도 손꼽히는 카마산이었으니, 좋은 여흥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가…? 하백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이었으나, 리토르나의 물음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네는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하백과 리토르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저 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린 듯싶었다.
“기사란 혼자 수련하는 것보다는 대련을 통해서 자신의 단점을 발견해 가는 거지요. 그러면서 발전도 하고요.”
“말이 나온 김에 바로 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가, 폐하…? 하백 공께서만 허락을 하신다면 오늘 오후에 대신들을 모두 불러 모아 자리를 마련하심이….”
“그건 안 됩니다, 궁정대신.”
레이네가 말을 딱 잘라먹었다. 목을 움츠리는 궁정대신에게 레이네가 나무라듯 하백의 편을 들고 나섰다.
“하백 공을 구경거리로 만들 참입니까? 오늘 오후에 하는 거야 나쁠 일이 아니지만, 모두를 불러 모은다는 건 안식일의 교리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는 공주의 말이 옳다. 궁정대신은 자중하게.”
“… 예, 폐하….”
리토르나는 경우에 밝은 레이네의 말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왕녀쯤 되니 그렇겠지 라고 하기엔 보이는 것 외에 감춰두고 있는 속내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바루나는 허허 웃으며 근위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가 수하에게 일러 오후에 있을 대련을 준비하도록 한 후, 오찬이 곧 끝났다. 하백과 리토르나가 객궁으로 향하는 것을 바루나가 불러 세웠다.
“아, 황녀께서는 잠시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 ….”
리토르나는 하백을 먼저 보내고 바루나와 레이네, 그리고 궁정대신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무슨 얘길까. 어차피 마도들과 협력해서 잉그라드를 칠 계획이라면 나와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궁정대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국왕 폐하께서는 이번에 귀환자들이 마도의 무리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던 것에 대해 크게 노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개국 공신가문의 가주이자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재상이셨던 레몽 베스피앙 도메네크 경께서 그로 인해 변을 당하셨지요. 해서 우리는 교원총연합회의 이름 아래 전 보르틴 대륙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론도 산맥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전을 벌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리토르나는 짐짓 모른 척하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론도 산맥의 북부 쪽은 우리 잉그라드의 영토인 것으로 압니다. 만일 여기서 진군을 하신다면 잉그라드와의 외교적인 마찰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폐하께선 금번에 연합군 결성을 위한 보르틴 연합회의 소집에 앞서 잉그라드로 대규모의 사절단을 보낼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 ….”
의외였다. 마도들과 결탁하여 잉그라드를 침략한다면 먼저 자신을 객궁에 감금을 시키거나 혹은 자신이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며 최대한 빨리 진군하는 편이 옳았다. 그런데 정식으로 외교 사절단을 보내겠다니. 이게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토르나에게 바루나가 본론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전쟁이란 어떤 변수가 작용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론도 정벌은 우리 미키네오스와 보르틴 대륙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무결한 승리만이 허락되는 전쟁입니다. 만일 마도의 무리들이 우리 군과 맞서 싸우며 일전을 벌이고자 한다면 우리도 물러서지 않고 그들을 몰아붙일 것이지만…, 만에 하나 그들이 산맥의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다면….”
“…잉그라드의 국경을 넘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 그렇습니다. 또한 그렇게 되면 대국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 못 되지요.”
“…. 폐하의 말씀은, 그렇다면 잉그라드가 그들로 인해 몸살을 앓을 것이란 말씀으로도 들리는데요…?”
“….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그럼…. 우리와의 연합군 결성이라도 하고 싶단 말씀이십니까…?”
“하하하하…! 그렇다면 우리로서야 더없이 좋은 일이겠습니다…!”
이 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의혹의 빛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바루나에게서 리토르나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이번 정벌전은 보르틴 연합군의 힘으로 해야 하는 전쟁이라서요. 어려움이 있더라도 저희 힘으로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말씀을 이상하게 하십니다. 저는 연합군 결성에 대한 어떤 입장도 밝힌 적이 없는데요, 마치 국왕 폐하께서는 제가 먼저 손을 내밀기라도 했다는 듯 하시는군요.”
“이…, 이보시오, 황녀…!”
“나서지 말라.”
궁정대신의 말을 바루나가 끊었다. 그는 역시 아직 어리군…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리토르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지 않고 마주 눈빛을 대서는 리토르나가 못마땅했지만, 궁정대신은 화를 삭히며 바루나가 마무리 짓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황녀께서 이 곳에 머무르시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 역시 이 곳에 황녀께서 머무르시기를 바랍니다.”
“인질로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황녀께서 여기 계시는 것은, 만일 보르틴 연합군이 국경을 넘을 경우 본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양쪽에서 협공으로 응징을 하시겠다는 뜻 아닙니까…?”
“…. 반은 맞았습니다.”
“…반이라…?”
“…. 제가 데리고 있는 1천 5백의 군사들은 외람되오나 미키네오스 군 10만과도 같은 병력입니다. 그들은 그런 부대입니다.”
“아…아니…!”
궁정대신의 반응에도 리토르나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갔다.
“만일 연합군이 잉그라드의 국경을 넘는다면 그 즉시 본국에서는 대규모의 군사를 일으켜 제 명령에만 따르게 되어 있는 이 군사들과 함께 연합군을 양쪽에서 궤멸시킬 것입니다.”
“…이…!”
“또한…! 제가 여기에 머무르는 다른 이유는 미키네오스 왕실에서의 복잡한 정치상황을 지켜보며 장차 대 잉그라드의 황제로서 신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술수가 난무하는 조정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그것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제가 들어갈 황궁은 황녀에게 그런 여유를 주는 곳이 아닌 까닭입니다.”
“….”
“…. 이제 말씀하셔도 될 듯합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을 텐데요…?”
자신을 향해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리토르나. 바루나는 이 사람에게 뭘 숨기고 돌려 말해봐야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친서를 써 주셨으면 합니다.”
“…친서라고 하셨습니까?”
“예. 정벌의 결의와 시작에 앞서 대국의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황녀께서 친서를 써 주신다면 그보다 더 황제폐하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이 전쟁은 저희 입장에선 절대로 승리해야 하는 전쟁입니다. 보르틴 대륙의 북쪽과 서쪽을 감싸고 있는 저 거대한 론도 산맥 안에는 얼마나 많은 마도의 무리들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르는 큰 전쟁입니다. 그들의 뿌리를 뽑기 전에는 보르틴 대륙의 평화란 없습니다.”
“….”
“도와주시오, 황녀…! 잉그라드의 국경을 설령 넘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잉그라드에 어떤 해도 입히지 않을 것이오…! 그는 국왕의 명예를 걸고 약속을 드리겠소…!”
“… ….”
레이네는 조소를, 궁정대신은 놀라움과 당황함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지난 20년 간 어느 누구도 바루나에게 정면으로 대들거나, 혹은 바루나가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조아리는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레이네는 이런 부왕의 태도가 얼마나 기똥찬 연극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그런 부왕의 그런 점을 잘 닮아 있는 까닭이었으며, 부왕에겐 그 이외의 다른 수가 또 있음을 알고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제가….”
아직 널 완전히 믿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듯 의혹의 빛을 지우지 못한 채 바루나를 보고 있던 리토르나가 입을 열었다.
“써줄 수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짐짓 간절한 빛을 띠고 있던 바루나의 기색이 가라앉으며, 예의 그 침착하고 무게감 있는 안색으로 답변이 돌아왔다.
“써 주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리토르나와 바루나 사이에 가로놓인 긴장감이 극도로 팽창했다. 이번엔 레이네도 흠칫 놀라며 바루나를 쳐다보았고, 궁정대신과 근위장은 긴장한 안색으로 둘을 번갈아 보며 눈을 굴렸다. 리토르나는 이 자가 믿는 구석이 대체 뭔가 하는 눈빛이었다. 바루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금 전의 호소하는 듯한 기색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기왕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을 드리지요. 아직 본국에서 소식이 당도하지 않은 듯한데…. 귀국의 황제폐하께선 현재 병중에 계십니다.”
“…!!”
긴장의 끈이 바루나 쪽으로 당겨지며 주도권이 바루나 쪽으로 기울었다. 리토르나는 경직되었다. 레이네의 눈이 지그시 감기며 미세하게 찌푸려졌고, 바루나는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언제 붕어하실지 모를 심각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황녀께서 왜 모르고 계시는지 이 사람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만….”
“… …”
“지금 잉그라드의 황궁은 중심을 잃고 겨우 유지되는 형국입니다. 그런 와중에 군사를 일으켜 미키네오스도 아니고 보르틴 대륙 전체의 연합군을 궤멸시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 ….”
리토르나의 표정은 점점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바루나는 승기를 잡았으니 더 밀어붙여야 된다는 생각에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마도들이 두려워하는 잉그라드의 황실 친위대는 황제폐하의 침병으로 인해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마도들이 산맥에서 내려와 황도 베나레스까지 진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황군이 아니더라도 군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어느 모로 보아도 대국의 군사들은 황군의 기치에서 그 사기를 얻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군사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만의 힘으로 마도들을 막아내는 일은 적잖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
“마도의 무리들을 척살하고 나면 우리는 즉시 잉그라드의 영토에서 군사들을 철수시킬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연합군과 공조를 하여 마도들을 처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귀국에게도 나쁜 일이 아닐 것으로 생각되는데…. 장차 황위를 이으실 황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리토르나는 일단 그 자리에서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아직 자신에게 황군을 통솔하는 밀부가 있음을 바루나는 모르고 있었다. 기회를 엿볼 시간이 필요했다. 리토르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지요…. 친서를 써 드리겠습니다.”
“….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궁정대신은 그럼 그렇지 하며 리토르나를 비웃듯 쳐다보았다. 리토르나는 눈을 감은 채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자리를 파한 후 객궁으로 돌아온 리토르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기와 치욕을 다스리느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게다가 황제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바루나의 말은 곧, 본국의 황실에까지 그의 손이 뻗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법사들에 의해 결계진까지 쳐진 황실의 소식이 외부로 빠져나왔다는 것은 곧 누군가 매수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리토르나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왜….”
“….”
“…왜 말하지 않았는가….”
비사카는 즉시 리토르나의 발 앞에 엎드렸다.
“모르는 일을 황녀 전하께 아뢸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모른다….”
“소인의 무지를 탓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음을 명하옵소서. 하오나 맹세코 소인은 그를 모르고 있었나이다.”
“… ….”
황실 친위대의 군사들은 그런 일들에 대해 알지는 못했다. 여태까지 그래왔으니 그들도 명령에 따라 자신에게 왔을 뿐, 다른 일을 알고도 자신에게 숨겼을 리는 없었다. 리토르나는 그 점을 알고 있었다.
“…. 그대에게 죄를 물을 일은 아니다. 일어나거라.”
“망극하옵니다, 전하….”
일어난 비사카에게 리토르나는 확인이라도 하듯 부대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별동대는 성문 동쪽 외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사옵고, 본대는 론도 북부지역에 주둔하고 있사옵니다. 밀부를 발동하시면 즉시 산맥을 넘어 국경을 넘어올 수 있사옵니다.”
“그래…. 준비는 철저하게 해 두고 있군….”
“그렇사옵니다.”
리토르나로서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루나가 마도들과 결탁하여 잉그라드의 국경을 넘기에 앞서 공식적인 방법으로 그 명분을 마련하려 든다는 것은 생각지 못한 변수였으나, 어쨌든 단시일 내에 연합군을 궤멸시킬 준비가 필요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마도들이 한 데 뭉칠 구심점이 아직은 미키네오스에 오지 않은 것이었다. 리토르나는 바이마샤르에 있을 한율을 떠올렸다. 그가 여기 오지만 않는다면….
“황녀님, 들어가도 될까요…?”
잠시 달아올랐던 기분을 추스르며 침착하게 상황을 짚어보던 리토르나는 밖에서 들리는 레이네의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었다. 들어와 마주 앉은 레이네는 리토르나의 안색을 살피며 사뭇 그녀를 걱정하는 말투로 위로하듯 했다.
“염려가 크시겠습니다. 본국의 황제폐하께서 병환이 있으시다니….”
“….”
리토르나는 대답 없이 한숨지었다.
“그런 와중에 폐하께선 황녀님을 그렇게 핍박하시니…. 제가 정말 민망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선 이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황녀로서 군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건 황위를 이을 자격이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받아들여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대국의 황녀다우시군요.”
레이네는 얼굴을 활짝 펴며 리토르나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리토르나의 안색은 조금도 펴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헌데…. 이런 걸 여쭤보아도 될는지….”
“말씀하시지요.”
리토르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레이네는 그녀를 배려하듯 조심스럽게 황제의 환후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황제폐하께서 병중에 계시다면 당연히 황녀께서는 본국으로 가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리토르나가 가만히 눈을 떴다. 대단히 외람되오나, 폐하께서 국정을 돌보실 수 없다면 지금 잉그라드의 황궁은….
“아마도 조정에서 국정을 운영하고 있겠지요.”
“조정이라면…. 의회 같은 걸 말씀하십니까?”
“예. 바이마샤르에선 의회가 될 테고, 여기에선 귀족 대신들의 정무회의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더군요.”
“…예….”
“폐하의 환후가 제게 알려지지 않은 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아내려 노력하기 앞서 황녀로서 나는, 폐하께서 병중이신 이때에 타국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제가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황녀께서 하시는 일을 제가 도와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성의껏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입니다.”
리토르나는 가볍게 웃음지었다. 아비인 국왕이 자신을 압박하는데 거기서 숨통을 틔워주겠다는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하는 말이 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내비쳐 보이는 것은 아니리라 짐작한 탓이었다. 일단은 자신이 가진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여겼다. 생각을 굳힌 리토르나가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전했다.
“공주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예, 말씀하십시오. 뭐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 객궁에 은밀하게 잠입해 있는 자를 거두어 주십시오.”
“…!!”
크게 동요하는 레이네.
리토르나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시 눈을 감았고, 레이네는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시치미를 뗐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레이네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리토르나의 시선이었다. 그녀는 리토르나가 다시 눈을 뜨며 자신을 똑바로 주시하자 말을 삼켰고, 리토르나는 가볍게 웃음지었다.
“레이네 왕녀께서 제가 머무르는 곳을 살펴보시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렇게 절 찾아와서 요즘은 무얼 하며 지내느냐 물어보시는 것이 맞습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제게 말씀하신다면 저 역시 왕녀께 숨길 이유가 없겠지요.”
“… ….”
“하지만 폐하께서도 그러하시고, 왕녀께서도 그러하시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옳다는 것이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폐하께서 제게 친서를 명령하신 것은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으나, 제가 모든 것을 다 폐하께 양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점을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아무리 정치 경험이 일천한 황녀라도 대국인 잉그라드의 황녀가 이렇게 말하는 덴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텐데…. 이 자리에서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빠르게 머리속으로 상황을 정리해보는 레이네의 귀로 리토르나의 음성이 다시 꽂혀 들어왔다.
“여기 제 뒤에 시립해 있는 자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숨어 있는 자를 잡아 이 앞에 무릎을 꿇릴 수 있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는지요? 황실 친위군 1천 5백은 귀국의 군사 10만과 같다고 말입니다.”
“…!”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 물러가라….”
레이네는 리토르나의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정보조원을 철수시키는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패배감이 짓눌려 왔으나 그런 것에 분개할 때가 아니었다. 탁상 아래에 있는 레이네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리토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후원으로 돌아온 레이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꽃병을 집어던지고 응접 탁자 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독기가 오를 대로 올라 레이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술…!”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던 그녀의 앞에 술잔이 놓였다.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홱 집어 던졌다. 던져진 유리잔은 장식장에 부딪치며 하나의 술병과 두 개의 유리잔을 함께 깨뜨렸다. 숨소리도 조절이 잘 되지 않는지 콧김이 뿜어지는 듯 식식거렸다. 나다니엘은 담뱃대에 연초를 담아 불을 붙여 그녀에게 가져갔다.
“… …. 비토.”
“….”
낚아채듯 담뱃대를 받아든 그녀의 앞에 비토가 나타났다.
“그 황실 무사들…. 네가 보기에 그렇게 대단해…?”
“….”
“왜 대답이 없어…?!”
“겨루어 보지 않아 알 수는 없으나. 황녀의 옆에 항상 붙어 다니는 자는 적어도 저보다 아래가 아닌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 나머지 둘은…?”
“…. 잘 모르겠습니다.”
“…. 대단해…. 대단해, 과연 잉그라드의 황실 친위대…. 그러니 그렇게 오만하게 대놓고 날 모욕하는 거겠지….”
“….”
“….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 ….”
나다니엘이었다. 평소엔 물어도 별 말이 없던 그가 나서자 레이네는 뜻밖이라는 듯 돌아보았고, 나다니엘은 레이네의 허락을 기다리듯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 뭔데…?”
“국왕 폐하께서 압박을 하셨는데도 그토록 당당하게 공주님께 나오신 것은 뭔가 경고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경고…. 경고….”
레이네는 동감한다는 듯 그의 말을 되뇌었다.
“뭔가 아껴두고 있는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야. 꽤 눈치가 있는 편이로구나.”
“… ….”
조금 누그러진 말투였다. 레이네의 숨소리는 아까보다는 한결 가다듬어져 있었고,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도 평소의 안색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은 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보다 부왕이 그런 수를 들고 나올 줄은 몰랐어.”
“….”
“….”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다니엘이 대답을 요구하자 레이네는 연기를 내뿜으며 혼잣말하듯 오찬에서 있었던 일을 읊어냈다.
“잉그라드 황제의 침병…. 그걸 숨기고 협박을 할 줄 알았지…. 어차피 여기 있는 군사는 1천 5백에 불과해. 잉그라드가 힘으로 밀어붙일 생각을 했다면 부왕도 거기에 그대로 대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천 오백 대 미키네오스 전군이면 누가 뭐래도 승산은 있으니까….”
“하지만 피해를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오늘 따라 질문이 많군….”
“…! 송…송구합니다, 공주님…!”
당황한 나다니엘이 얼른 읍소하며 뒤로 물러서자 레이네는 피식 웃었다.
“아니다. 네 말이 맞아. 피해는 감수해야겠지.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명분이야. 그 명분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잉그라드에게 부왕이 어떻게 나올까, 내가 계산했던 게 틀렸던 거야….”
“… ….”
레이네는 담배를 끄라는 듯 시녀에게 담뱃대를 던지고는 나다니엘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는 여전히 물러선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일이면 폐하의 명이 있을 거다. 넌 궁내의 모든 시종들을 담당하는 시종관이 될 거야.”
“공…공주님…!!”
당황하는 나다니엘.
“하지만 착각 마라. 네 처소는 여전히 저쪽에 있을 테고, 넌 여전히 내 곁에 있어야 돼. 명심해. 아주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절대 이곳에서 내 명령 없이 벗어나지 마라. 알겠어?”
“…. 예, 공주님…!”
잠시 당황하던 얼굴빛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다니엘은 좋아라 하는 낯을 숨기지 않으며 레이네에게 거듭 몸을 숙였고, 그를 보는 레이네의 얼굴에도 희미하게나마 애틋한 표정이 감돌았다.
저녁 나절이 되어 객궁을 나선 리토르나는 기다리고 있던 하백의 인사를 받았다. 근위대의 연무장에서 있을 대련을 위해 하백은 오래간만에 카마산의 수련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가지….”
“황녀님.”
“…뭔가…?”
“…. 이것이 말씀하셨던 기회입니까?”
“… ….”
“….”
리토르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다.”
“… ….”
“하지만 기회란 것은 스스로 그렇다고 느낄 때이지, 누가 말해준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란 생각은 드는구나.”
“…그렇습니까.”
“나는 단지 그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해서 궁정대신의 말을 거들었던 것뿐이다. 그것이 기회가 될는지, 네게 악재가 될는지는 모르겠구나.”
하백은 솔직한 리토르나의 답변에 고맙다는 듯 읍소를 했고, 리토르나는 먼저 돌아서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한편 국왕은 연무장으로 나가기에 앞서 궁정대신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궁정대신은 잉그라드의 황녀를 압박한 바루나의 언변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가 그런 말을 꺼낼 적마다 바루나는 그 말들을 잘라내며 필요 이상의 잡소리가 시간을 좀먹는 일을 방지했다.
“자네도 이제 그런 소리를 입에서 떼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하하하…! 폐하께선 30년째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만 포기하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신하란 놈이 말법 한 번 공손하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바루나는 쿡쿡 하고 웃었다. 궁정대신은 창밖으로 눈을 돌리며 회상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은 폐하를 모시고 다시 이 왕도로 돌아오던 날을 생각합니다. 정무대신께서 앞장서서 혼란스러운 왕도를 평정하고, 그 땐 참….”
바루나의 웃는 낯 한쪽에서 싸늘한 기색이 끼어들었으나, 궁정대신은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홀로 옛일에 젖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미셀.”
“예, 폐하.”
“잉그라드로 가라.”
“…예…?”
“황녀의 친서를 갖고 잉그라드로 가거라. 가서 잡음이 없도록 네가 잘 구슬려 봐.”
“폐하…!”
“아무리 찾아봐도…. 외무대신만으로는 버겁다. 이제 너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뭔가 해야지.”
바루나의 진심이 담긴 눈을 대하며 궁정대신은 가슴이 찡하게 차올랐다. 왕위에 오르고 지난 20년간 온갖 술수를 부려가며 왕권을 강화한 정치꾼이어도, 30년을 가신으로 모셨던 자신에게만은 진심으로 신뢰를 던지고 있다는 확신이 그의 마음을 가득 메웠다.
“폐하가 곧 이 나라이십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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