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버지가 사신으로 떠나는 사신단의 환송길에 아이린은 나가지 않았다. 그 행렬의 호위대에 한율이 끼어 있음을 아는 모든 바슈미르 저택의 식솔들은 그녀에게 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도 아침 일찍 나가다 말고 잠시 방문을 열어보고는 도로 나갈 뿐이었다. 한율의 말마따나, 이젠 식사도 제 때 맞춰서 하고, 그나마 사람 꼴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이린은 여전히 방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밖에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아이린은 별 말 없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장은 이 기운없어 보이는 손녀딸 같은 아이가 쭈그리고 앉은 모양새를 보고는 짧게 한숨지었다.
“무슨 일이세요?”
“사람이 왔습니다. 선물이 왔는데요.”
“… …. 그냥 두고 가세요.”
“서한도 왔습니다. 여기 두고 갈게요.”
시종장은 꽃바구니를 들고 뒤따라 들어오는 시녀에게 침대 옆에 두라 하곤 손에 들고 있던 서한을 아이린이 앉은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쉬세요.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시종장은 시녀를 재촉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 ….”
천천히 서한의 겉봉으로 눈길이 간 아이린이 별안간 난폭한 손짓으로 그것을 집어 던졌다. 금세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식식거리던 아이린은 벌떡 일어나 꽃바구니를 발로 차고는 미친 듯이 꽃을 잡아뜯었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던 방이 떨어져 나간 꽃잎으로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꽃잎이며 줄기며 할 것 없이 거의 떨어져 나간 뒤에도 아이린은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바구니를 들고 거칠게 바닥을 향해 내리치기 시작했다. 나무껍질을 여러 겹 둘러싸서 짠 바구니는 제법 무게가 있었지만, 아이린은 힘겨운 줄도 모르는지 땀방울이 날 때까지 그것을 바닥에 대고 힘껏 내리치길 멈추지 않았다.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나자 시종장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황급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아이린이 하는 양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아가씨. 왜 이러세요?!”
“이거 태워.”
“네…?”
“다 쓸어다가 태워버리라고, 당장!!”
발작적으로 소리지르는 아이린은 반쯤 미친 모양이었다. 시종장은 대체 왜 이러나 하는 얼굴이면서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시녀에게 바구니를 치우게 했다. 아이린은 집어던진 서한도 같이 태우라며 냉기 서린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시녀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얼른 그것들을 쓸어담고 서한을 주워 바구니에 함께 담았다.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 태워. 저 앞마당에서, 기름 붓고 완전히 태워 없애버려.”
“그러지요. 그럼….”
얼른 문을 닫고 나가 시녀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던 시종장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루카스 도련님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거였나…. 뭐 그럴 것도 없었는데….’
아이린이 받은 것은 루카스가 보낸 꽃바구니와 서한이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시녀들이 바구니와 서한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것을 보며 아직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듯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더러운 놈…또 그 이상한 글줄이나 써서 보냈겠지…. 가다가 마도 놈들한테 뜯겨먹어 버려라….’ 루카스를 향해 끔찍한 저주를 퍼붓던 아이린이 지켜보는 앞마당에, 사신단 환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엄마의 마차가 들어섰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뭘 태우는 거야…?”
마차 안에서부터 불길을 본 엄마는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문을 열면서부터 시종장에게 물었다. 아이린 아가씨가 태우라고 하던데요? 불같이 화를 내면서…. 뭐…? 누가 보낸 건데…? 음…, 그건 아가씨께 직접 들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시종장이 입을 다물자 엄마는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추궁하려다 말았다.
“무슨 소리야, 그게~. 누가 보냈…. 아냐, 알았어. 내가 올라가 볼게.”
환송 때문에 나가느라 차림새가 그리 편하지 않았을 텐데도 엄마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얼른 3층으로 올라왔다. 문을 열었을 때 아이린은 방문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다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엄마는 장갑을 빼고 모피 숄을 벗어 시녀에게 건네며 다가와 앉았다.
“너 저거 뭐야, 어? 누가 보낸 건데 저렇게 태워? 그리고 불같이 화를 냈다는 건 대체 무슨 얘기야?”
하나씩 물어볼 것이지…. 그러나 아이린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은 채 돌아누운 그대로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성미 급하기로는 아이린과 막상막하인 엄마는 그녀의 몸을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야, 대답해 봐~. 왜 화를 냈어? 저거 누가 보낸 건데~? 몰라~. 모르는데 저렇게 태워? 몇 번을 재촉해도 아이린은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결국엔 이불을 확 뒤집어쓰며 짜증을 부렸다.
“몰라~, 나 좀 내버려 둬.”
“얘가 진짜…. 야!”
엄마는 아이린의 엉덩이 부근을 찰싹 때렸다. 평소 같았으면 엉덩이를 도사리며 얼른 일어나 앉았을 딸아이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혹시 저거…, 루카스가 보낸 거니?”
“아, 말 좀 시키지 마~!”
“얘가 어디서….”
벌떡 일어나 돌아앉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는 딸애를 보고 엄마는 기가 막혀 야단을 치려다 멈칫했다. 붉어진 얼굴이 죽상이었고, 충혈된 눈으로 딸이 울고 있었다.
“야, 너 왜 또 그래~? 말해 봐, 울지 말고 말해 봐~, 어서~.”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루카슨지 개새낀지 나가 뒤져 버리라고 해!!”
“얘, 너….”
성마르고 엄벙덤벙대는 성격이었지만 말은 곱게 하던 아이린이 욕을 내뱉자 엄마는 깜짝 놀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내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린의 팔을 찰싹 때리며, 너 어디서 그런 말 배웠어? 어? 너 한율 그 놈한테서 배운 거지? 맞지? 추궁해 들어가도 아이린은 그저 울기만 하고, 대답은커녕 맞아도 아픈 척조차 하지 않았다.
“뭐야, 왜 이래, 너~! 제발 정신 좀 차려~~!!”
엄마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신경질적으로 소리지르며 아이린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두 모녀가 방 안에서 하나는 울고, 하나는 소리지르고 있었다.
“요즘 좀 잘 먹고 얼굴 좀 나아졌다 싶더니 이게 왜 또 이렇게 미친 짓을 하고 그러니 그래…, 어…?”
사신단을 이끌고 가는 핫산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미키네오스의 사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하하 허허허 웃고는 있었지만 중간 중간 짓는 한숨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아이린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는 가던 중 언뜻 뒤를 돌아보았다. 사방 경계를 하며 행렬의 좌우로 늘어선 호위대에 한율이 있었다. 나자르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저도 한숨지었다.
“나자르 총사, 사방경계 해야지, 그렇게 한숨짓고 있으면 어떻게 해?”
“아…, 죄송합니다.”
“왜 그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루카스의 말에 나자르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마시키려 했지만, 루카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뭐야, 한율 공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서 그러진 않을 테고…. 나자르의 신색을 살피던 루카스가 아이린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린 아가씨 때문에 그래…? 쭉 보니 대표님께서도 표정이 언뜻 언뜻 안좋으시더라고….”
“그러실 밖에요…. 요즘 그나마 식사는 좀 하는 것 같던데…. 그래도 아직 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씀 전해 들었다. 한율 공은 대체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하셨기에….”
“어떻게 아세요…?”
“응? 뭘?”
“아이린이 그러는 거, 그 사람이랑 있었던 일인가요?”
“뭐…. 그렇지 않았어…? 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한율 공이 아이린 아가씨를 좀 부담스러워 하시긴 했었다며….”
“그건 그렇지만….”
“…. 아무도 정확히 아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아이린이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까요.”
“휴…. 속 시원히 어디 털어놓기라도 하면 좀 나아질 텐데….”
“누가 아니랍니까….”
루카스는 천연덕스럽게 걱정하는 투로 한숨까지 내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린의 증세가 루카스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나자르로서는 그가 딱하기만 했다. 아직도 마음을 쓰세요…? 응? 아이린에게 말이에요, 사령님…. 쓰긴 뭐…. 그냥…. 나자르는 고개를 돌리며 턱을 긁는 루카스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쓰네 뭐…. 안 쓰이겠어, 어떻게…. 지금이야 포기했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좀 끌렸던 사람인걸. 참 속도 없으세요. 보기하곤 좀 다르시네요? 어, 그래? 하하…. 나 그래도 그렇게 매정한 사람은 못 돼. 루카스는 그렇게 말하며 말을 재촉했다.
왕도로 가는 길은 출발 전 그들이 군사들에게 했던 말마따나 먼 길이었다. 별다른 위험도 없는 사신단 호위대가 군인정신으로 버텨내기엔 지루한 여정이었다. 그런 여정을 군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달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므로 숙영지에서의 저녁 시간을 자유롭게 풀어주며 군사들의 숨통을 틔워주곤 했으나, 그 와중에도 루카스와 나자르는 휴식 군기의 단속에 몹시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사신단과 함께 가는 길인데다, 경유지가 대부분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이거나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였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이마샤르 군의 기강이 대단합니다, 의원님.”
“하하하…. 고맙습니다. 이번에 저희 호위대를 맡은 지휘관이 또 주목 받는 군부의 유명주이기도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어떤 분이시기에 이렇게 길고도 지루한 여정을 호위하면서도 이토록 기강을 훌륭히 유지하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비록 병력은 많지 않으나, 보르틴의 어느 강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 번 자리를 마련하도록 해 보지요.”
“정말이십니까? 이거 영광입니다. 바이마샤르를 대표하는 군부의 젊은 지휘관을 만나 뵙게 되다니, 사신으로 다녀가는 길에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을 얻었습니다, 의원님…!”
“아…하하…, 칭찬이 과하십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내일쯤 숙영지에서라도 한 번 다 같이 자리를 가져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정을 빠듯하게 잡은 탓에 다 같이 자리를 한 번 가져보는 일에도 소홀했는데, 왕궁이나 연회장에서 여는 것만큼은 아니겠습니다만 객사에서나마 조촐하게 자리해 보심이 어떠십니까?”
“하하…, 좋은 생각이십니다. 안 그래도 조금은 지루하던 참이었습니다.”
“폐하의 마음을 생각하면 사실 이런 것도 죄스럽긴 합니다만….”
“그래도 가는 길이 멀고 지루한 건 사실이니 폐하께서도 너그럽게 헤아려 주실 겁니다. 좀 먼 길이겠습니까, 어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이 사람 마음이 더 편해집니다, 하하~! 의원님께서 이 사람의 근심을 덜어주시는군요.”
사신으로 온 정무 행정관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자체가 조금은 피곤한 일이기도 했다. 바이마샤르에서도 정치인으로서 의례적인 수사를 쓰는 일은 어느 정도 필요했지만, 이자와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 두세 번은 더 거쳐야 결론이 나곤 했다. 핫산은 행정관 몰래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 ….”
한율은 평소에 보이던 털털하고 조금은 풀어진 그런 모습과 달랐다. 시락을 떠나 온 지 나흘째. 세 곳의 마을과 두 개의 도시를 지나오며, 조금은 따분함을 느낄 법도 한 시간대였다. 그다지 긴장해서 주변경계를 해야 할만한 지형적인 조건도 없었다. 마을을 지나면 눈 덮인 벌판이나 경작지가 보였고, 산지라고는 지평선 너머로 저만치 물러가 있었고, 그나마도 오후가 되자 보이지 않았다. 사신 행렬은 야트막한 구릉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산 같지도 않은 산을 몇 개씩 넘었다. 병사들이 조금씩 긴장이 풀릴 법도 했다. 루카스나 나자르도 행렬을 이탈하거나 시끄럽게 떠들거나 하지만 않으면 병사들을 그다지 닦달하지 않았다. 그들도 지겹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율은 아무런 변화 없이 무표정한 눈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 혼자 경계병인 듯했다.
“한율 공.”
“예, 사령님.”
“긴장 풀고 가세요. 힘드실 텐데….”
“아닙니다. 경계 중입니다. 딱히 힘들 것은 없습니다.”
“…. 예. 계속 수고해주십시오.”
“예.”
한율은 다시 앞으로 말을 재촉해 가는 루카스를 향해 깍듯이 군례를 올렸다. 병사들 몇이 찜찜한 얼굴을 하며 그 장면에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론지니아 전투의 영웅이라고는 했지만, 어쩐지 그에게 말을 걸기가 껄끄러웠다. 한율도 그들이 그러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한율 공이 좀 신경 쓰이네….”
“왜 그러십니까?”
“너무 열심이잖아.”
나자르는 힐끗 뒤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열심히 잘 하고 있는걸요, 뭐.”
“평소 같으면 따분해 했을 텐데….”
“… ….”
나자르의 표정을 보니 입을 열 것 같지도 않았다. 루카스는 더 말하기도 뭣해서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의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솔직히 조금은 고소한 일이었지만, 부대 내에서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은 그로서도 반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 ….”
나흘째의 숙영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트막한 산지(?)의 숲이었다. 그 곳을 지나면 또 다시 시가지가 나오는 지점이었다. 한율은 자청하여 나서서 시가지로 물을 구하러 가는 일을 했다. 막사가 차려지고 저녁 식사가 될 때쯤 마차를 몰고 물을 가져 온 한율은 웬만한 어른 하나는 들어갈 만한, 물이 꽉 찬 나무통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두세 사람이 힘을 합쳐야 들 만큼 무거운 그것을 혼자서 번쩍 번쩍 들어 나르는 그를 보며 병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저 양반 힘 하나는 황소 같이 세네….”
“그래, …. 차라리 지금처럼 병사를 하는 게 낫지…. 지휘관이 뭐 싸움 잘해야 지휘관이겠나. 아랫사람 잘 단속하고 통제 잘 해야 지휘관이지.”
“자네 말 맞네.”
바둑돌을 움직이며 시간을 보내던 병사 둘이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모았다. 물통을 다 내린 한율은 말들을 마차에서 떼어 끌고 가 묶은 뒤 여물과 물을 먹였다.
“잘 먹어라. 그래야 내일도 힘써서 종일 걷지.”
말들은 그가 쓰다듬으며 타이르듯 하자 대답이라도 하듯 가볍게 투레질을 해 보였다. 허리춤에서 담뱃대를 꺼내 연초를 담은 그는 자신의 조가 속한 막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한율 공, 식사 안하십니까?”
“됐습니다. 전 별로 생각이 없네요.”
“아니 그래도 종일….”
“괜찮습니다. 배고프면 제가 알아서 챙겨먹을게요. 식사들 하십시오.”
날이 추웠다. 한율은 불을 지핀 장작 중 하나를 꺼내 연초에 불을 붙이곤 다시 그것으로 장작을 쑤석거렸다.
“한율.”
“…. 예, 총사님.”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또 왜 저런대…하는 눈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자르는 그가 일어나 군례를 올리는 것을, 고개를 외로 꼰 채 보고 있다가 방금 그가 한 말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밥을 굶으랬나?”
“….”
“밥 굶는 정도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던가?”
“시정하겠습니다.”
“야전에서 밥을 굶는 것은 전투력 감소다. 군인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모두 의무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식사한다.”
“식사하겠습니다.”
한율은 두 말 않고 연초를 털어내며 다시 담뱃대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취사병에게로 가 그릇을 받아 수프와 고기 몇 점을 얻어 한쪽으로 가는 걸 흘끔거리며 병사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아니 대체 왜 총사는 한율 공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래?”
“둘이 사귀다 깨졌나?”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한율 공은 자문직에 가기 전에 여당 대표 집에 살았었다며.”
그러는 소리들이 한율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일반 사람들보다 감각이 훨씬 발달한 그로서는 그런 소리들보단 차라리 개 짖는 소리가 더 낫다고 느껴질 정도로 시끄러웠다. 아무도 모르는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자신이 왜 미키네오스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기왕 말릴 수 없다면 미키네오스보다는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위원님께선 그래도 평화에 적응 못 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아서요….
집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율은 고깃점을 든 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깨작거렸다. 덩치가 커다란 그가 그러고 있으니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 리 만무했다. 지나던 루카스가 그를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나갔다.
‘방법이 없을까….’
막사 안에 앉아 이리 저리 염두를 굴려보던 그는 아이린을 떠올렸다. 아예 없애버려도 될 것 같긴 한데…. 내가 했다고 하면 덤비려 들지도 모르고…. 어차피 전시 상황이니까 즉참을 해도 되긴 되는데…. 아냐, 그럼 문제가 좀 커질 수도 있지…. 가만. 내가 저 놈한테 못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럴 리가 없잖아.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막사 입구가 열리며 나자르가 들어왔다. 식사를 마치고 씻었는지, 그녀는 조금 뽀얗게 된 얼굴에 이마에 돋아난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웬일이야? 그 술병은 또 뭐고…?”
“….”
나자르가 그의 앞에 술병을 놓고 앉으며 피식 웃었다.
“오늘 제 술친구 좀 해주십시오.”
“총사란 사람이 전시에 술을 마셔…?”
“이렇게 평화로운 전시도 있답니까?”
루카스는 그녀의 말도 맞다며 마주 웃었다. 그래, 한 잔 하자. 나무잔 두 개를 꺼내 와 탁자에 내려놓는데 나자르가 술병을 그대로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어어, 이 사람 보게.
“크…. 좋다.”
“술이 고팠나보네.”
“글쎄요. 술이 고팠는지…. 아니면….”
“…. 무슨 일이 있긴 있구먼?”
말끝을 흐리는 나자르를 보며 루카스가 묻자 그녀는 또 피식. 웃는다.
“한율 공.”
“…. 아 예, 의원님.”
한율은 불 꺼진 장작더미 앞에 앉아 불 꺼진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물끄러미 뭔가를 생각하듯 앉아있던 중 핫산의 방문을 맞았다. 주위를 둘러 본 핫산이 허허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여기서 대체 뭘 하고 계십니까? 장작불도 다 꺼졌는데. 저기 병사들하고 불 쬐면서 좀 몸이라도 녹이시지….”
“별로 안 춥습니다. 이 정도야….”
“… ….”
“헌데 무슨 일이십니까?”
한율은 괜히 다 타서 숯덩이가 된 장작을 발로 쑤석거렸다. 핫산은 내일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된다며, 그 자리에 나갈 의향을 물어왔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것으로 보아 그가 가려 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는 듯했다.
“말씀 안하셨으면…. 그냥 전 없는 걸로 쳐 주십시오.”
“….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키네오스 사신들한테 론지니아 전투의 싸움쟁이가 여기 껴있다는 말씀, 아직 안 하셨으면 그냥 전 없는 사람으로 해주셨으면 한다는 겁니다.”
“한율 공…!”
“의원님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
“… ….”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핫산은 스스로 가진 자책감 때문에 그 말을 곧이듣기가 힘들었다. 한율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듯 다시 빈 담뱃대를 물며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럼…. 내게 말해줄 수는 있겠습니까? 지금 그 한숨….”
“… …”
“염치없지만, 내 맘이 편하질 않아서 그래요.”
“하하…. 아닙니다. 의원님하곤 관계없고요…. 저 때문입니다, 저….”
“….”
병사 하나가 지나가다 어두운 속에서 핫산은 알아보지 못한 채 한율에게 장작 갖다주랴 물어봤고, 한율은 손을 내저었다. 그가 가고 나서 한율이 설명했다.
“미키네오스로 갈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다른 곳으로 떠났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전 원래 싸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지라…. 미키네오스에서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론지니아에서 마도들이 몰려왔던 건 저 때문입니다. 물론 그 지역은 마도들이 나타난 적 없는 곳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율 공 때문이라니오? 한율 공이 마도들과 무슨 은원관계라도 있단 말입니까?”
“은원관계라기보다는….”
한율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는 얼굴로 한참 뜸을 들였다. 핫산은 재촉하지 않으며 잠자코 그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음…. 은원관계라고 해 두는 편이 낫겠습니다. 저보다는 마도들이 제게 원한을 가졌다…뭐 그렇게 말해두지요.”
“한율 공….”
“모든 걸 말씀드릴 수 없는 거…,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자르는 금세 취해버렸는지 얼굴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잔이 채워지는 족족 비워내는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루카스도 다소 급하게 마신 터라 약간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자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왜 이렇게 급해, 오늘따라…?”
“글쎄요. 하하…. 오늘 좀 술이 빨리 취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혀까지 꼬인 나자르는 민망한 듯 웃었지만, 조금 어두운 표정이었다. 루카스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약간 처진 눈꼬리가 더 처진 듯했다. 무슨 고민거리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루카스는 나자르의 그런 얼굴을 처음 대했다.
“군율이라면 신탁처럼 받드는 총사가 이렇게 망가지다니, 좀 의외군.”
“총사, 총사 하지 마세요. 재미없게….”
“그럼 뭐라고 불러? 자기…? 여보…?”
“에이 참….”
나자르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힘없이 웃었다. 전에 없던 행동을 하는 그녀가 다시 술을 따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율 공이…. 신경이 쓰이네요. 아로사도 걸리고…. 아이린도 걱정되고…. 무슨 소리야, 아로사가 왜…? 아시잖아요. 아로사가 마도라고만 하면 앞뒤 안 재고 칼부터 뽑으려 드는 거…. 그런데…? 나자르는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입술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나는 그게 안 되거든요…. 한율 공도 그렇고, 아로사도 그렇고…. 아이린도 그렇고…. 다들 뭔가 하나에 미쳐 있거나 아니면 자기 고집도 있고 그런데…. 나만 안 되거든요. 난 그렇게 빠져 있을 뭐가 없으니까….”
“총사답지 않게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거 총사, 총사 하지 말라니까 정말…. 그냥 이름 불러요.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그렇게 부르니까 오히려 더 답지 않으시네요.”
“개기는 거지, 지금…?”
“킥킥…. 개기면 받아주실래요…?”
술기운 때문인지 피식피식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 보는 나자르의 얼굴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술에 젖어 반짝거리는 입술이 루카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연애를 해 보지 그래…? 남자한테 빠져보지, 어디…. 그럴 남자가 있어야죠~, 나라고 남자 좋은 줄 왜 모르겠어요. 알어…? 군율 좋은 줄만 아는 줄 알았는데…. 에~ 진짜 계속 그럴 거에요? 이래뵈도 남자는 안다구요…. 말이야 누군들 못하겠어. 나 남자 알아요~하고…. 루카스는 짐짓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받아내며 나자르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나자르의 손이 그의 손을 가만히 잡자 루카스의 손이 멈칫했다.
“이러면 여자들이 오해해요.”
“오해하라지….”
“… ….”
“… ….”
잠시 그에게 눈을 맞추고 있던 나자르를 향해 루카스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 나자르는 순순히 그를 향해 턱을 들며 입술을 살며시 벌렸다. 일단 입술이 닿고 나자 나자르가 먼저 혀를 넣어왔다. 둘은 단숨에 엉겨 붙으며 열정적으로 키스에 몰입했다. 술에 섞인 타액이 두 사람의 입술을 적셨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뻗어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아직 마음이 정리된 것도 아니면서…. 이래도 돼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조금 거칠어진 숨소리로 한 마디씩 주고받은 그들은 다시 엉겼다. 나자르는 그의 입술과 턱과 목을 핥고 빨며 파고들었고, 루카스는 그녀의 젖가슴을 다소 거칠게 주무르며 허리와 등을 더듬어 갔다.
“다 잊고 그냥 한 번 즐기자는 건가요…?”
“그럴 생각 아니었어…?”
나자르의 손이 그의 아래춤으로 향했다. 루카스가 몸을 뒤로 젖히자 그녀는 조금 벗겨져 있는 상의를 완전히 벗어던지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루카스의 허리띠를 풀었다. 익숙한데…. 말했잖아요, 나 남자 안다고…. 술기운에 욕정까지 달아오른 얼굴로 웃어 보인 나자르는 단숨에 그의 바지를 무릎까지 벗겨냈다. 아직 단단하지는 않았지만 피가 몰리고 있는 성기가 눈앞에 드러났고, 이내 거기로 입을 가져갔다. 으음…. 나자르의 입 속으로 제 몸의 일부가 들어가는 걸 느끼며 루카스는 낮은 신음을 냈다. 그것은 단숨에 단단하게 일어섰다. 완전히 커진 듯한 남근을 나자르는 뿌리까지 삼켰다가 도로 뱉기를 반복하면서 혀를 사용했다. 귀두 부분을 쓰다듬으며 다시 입 속 깊이 품는 모양새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잘 하는데….”
“해 주는 만큼 돌려 줄 생각이나 하세요.”
옷 속으로 파고드는 나자르의 손이 가슴을 매만졌다.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 성기를 입에 넣고 애무하는 나자르의 머리 뒤로 군데 군데 근육이 도드라진 그녀의 등과 뒤로 빼 앉은 엉덩이의 곡선이 보였다. 루카스는 그녀를 일으켜 안아 들고 침상으로 향했다. 나자르의 손은 여전히 그의 남근을 놓지 않았다. 군화와 바지를 벗고, 나자르의 바지까지 벗겨낸 루카스의 손이 그녀의 나신 위를 천천히 쓸었다. 나자르는 그를 향해 다리를 벌렸다.
“좀 색다른가 보죠…? 근육질의 여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매력적인데….”
“언제까지 그 옷은 입고 있을 건데…?”
아예 반말을 하며 발가락으로 상의를 잡아 늘이자 루카스는 남아 있던 상의를 벗어던져 그녀와 같이 알몸이 되었다. 우람하진 않았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상체가 그녀의 알몸 위로 덮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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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자르와 루카스가 붙어먹었습니다.(작가가 돼서 말뽄새 하곤..;;)
쿨하고 똑똑한 나자르가 앞으로 루카스를 안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캐릭터 설정으로 몇 장 그려놨는데, 여긴 사진을 올릴 수가 없군요. 흙...ㅡ.ㅜ;;
어쨌든. 꾸준한 호응 감사드립니다. 꾸벅~(_ _)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밖에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아이린은 별 말 없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장은 이 기운없어 보이는 손녀딸 같은 아이가 쭈그리고 앉은 모양새를 보고는 짧게 한숨지었다.
“무슨 일이세요?”
“사람이 왔습니다. 선물이 왔는데요.”
“… …. 그냥 두고 가세요.”
“서한도 왔습니다. 여기 두고 갈게요.”
시종장은 꽃바구니를 들고 뒤따라 들어오는 시녀에게 침대 옆에 두라 하곤 손에 들고 있던 서한을 아이린이 앉은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쉬세요.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시종장은 시녀를 재촉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 ….”
천천히 서한의 겉봉으로 눈길이 간 아이린이 별안간 난폭한 손짓으로 그것을 집어 던졌다. 금세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식식거리던 아이린은 벌떡 일어나 꽃바구니를 발로 차고는 미친 듯이 꽃을 잡아뜯었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던 방이 떨어져 나간 꽃잎으로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꽃잎이며 줄기며 할 것 없이 거의 떨어져 나간 뒤에도 아이린은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바구니를 들고 거칠게 바닥을 향해 내리치기 시작했다. 나무껍질을 여러 겹 둘러싸서 짠 바구니는 제법 무게가 있었지만, 아이린은 힘겨운 줄도 모르는지 땀방울이 날 때까지 그것을 바닥에 대고 힘껏 내리치길 멈추지 않았다.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나자 시종장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황급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아이린이 하는 양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아가씨. 왜 이러세요?!”
“이거 태워.”
“네…?”
“다 쓸어다가 태워버리라고, 당장!!”
발작적으로 소리지르는 아이린은 반쯤 미친 모양이었다. 시종장은 대체 왜 이러나 하는 얼굴이면서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시녀에게 바구니를 치우게 했다. 아이린은 집어던진 서한도 같이 태우라며 냉기 서린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시녀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얼른 그것들을 쓸어담고 서한을 주워 바구니에 함께 담았다.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 태워. 저 앞마당에서, 기름 붓고 완전히 태워 없애버려.”
“그러지요. 그럼….”
얼른 문을 닫고 나가 시녀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던 시종장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루카스 도련님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거였나…. 뭐 그럴 것도 없었는데….’
아이린이 받은 것은 루카스가 보낸 꽃바구니와 서한이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시녀들이 바구니와 서한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것을 보며 아직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듯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더러운 놈…또 그 이상한 글줄이나 써서 보냈겠지…. 가다가 마도 놈들한테 뜯겨먹어 버려라….’ 루카스를 향해 끔찍한 저주를 퍼붓던 아이린이 지켜보는 앞마당에, 사신단 환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엄마의 마차가 들어섰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뭘 태우는 거야…?”
마차 안에서부터 불길을 본 엄마는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문을 열면서부터 시종장에게 물었다. 아이린 아가씨가 태우라고 하던데요? 불같이 화를 내면서…. 뭐…? 누가 보낸 건데…? 음…, 그건 아가씨께 직접 들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시종장이 입을 다물자 엄마는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추궁하려다 말았다.
“무슨 소리야, 그게~. 누가 보냈…. 아냐, 알았어. 내가 올라가 볼게.”
환송 때문에 나가느라 차림새가 그리 편하지 않았을 텐데도 엄마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얼른 3층으로 올라왔다. 문을 열었을 때 아이린은 방문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다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엄마는 장갑을 빼고 모피 숄을 벗어 시녀에게 건네며 다가와 앉았다.
“너 저거 뭐야, 어? 누가 보낸 건데 저렇게 태워? 그리고 불같이 화를 냈다는 건 대체 무슨 얘기야?”
하나씩 물어볼 것이지…. 그러나 아이린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은 채 돌아누운 그대로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성미 급하기로는 아이린과 막상막하인 엄마는 그녀의 몸을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야, 대답해 봐~. 왜 화를 냈어? 저거 누가 보낸 건데~? 몰라~. 모르는데 저렇게 태워? 몇 번을 재촉해도 아이린은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결국엔 이불을 확 뒤집어쓰며 짜증을 부렸다.
“몰라~, 나 좀 내버려 둬.”
“얘가 진짜…. 야!”
엄마는 아이린의 엉덩이 부근을 찰싹 때렸다. 평소 같았으면 엉덩이를 도사리며 얼른 일어나 앉았을 딸아이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혹시 저거…, 루카스가 보낸 거니?”
“아, 말 좀 시키지 마~!”
“얘가 어디서….”
벌떡 일어나 돌아앉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는 딸애를 보고 엄마는 기가 막혀 야단을 치려다 멈칫했다. 붉어진 얼굴이 죽상이었고, 충혈된 눈으로 딸이 울고 있었다.
“야, 너 왜 또 그래~? 말해 봐, 울지 말고 말해 봐~, 어서~.”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루카슨지 개새낀지 나가 뒤져 버리라고 해!!”
“얘, 너….”
성마르고 엄벙덤벙대는 성격이었지만 말은 곱게 하던 아이린이 욕을 내뱉자 엄마는 깜짝 놀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내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린의 팔을 찰싹 때리며, 너 어디서 그런 말 배웠어? 어? 너 한율 그 놈한테서 배운 거지? 맞지? 추궁해 들어가도 아이린은 그저 울기만 하고, 대답은커녕 맞아도 아픈 척조차 하지 않았다.
“뭐야, 왜 이래, 너~! 제발 정신 좀 차려~~!!”
엄마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신경질적으로 소리지르며 아이린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두 모녀가 방 안에서 하나는 울고, 하나는 소리지르고 있었다.
“요즘 좀 잘 먹고 얼굴 좀 나아졌다 싶더니 이게 왜 또 이렇게 미친 짓을 하고 그러니 그래…, 어…?”
사신단을 이끌고 가는 핫산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미키네오스의 사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하하 허허허 웃고는 있었지만 중간 중간 짓는 한숨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아이린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는 가던 중 언뜻 뒤를 돌아보았다. 사방 경계를 하며 행렬의 좌우로 늘어선 호위대에 한율이 있었다. 나자르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저도 한숨지었다.
“나자르 총사, 사방경계 해야지, 그렇게 한숨짓고 있으면 어떻게 해?”
“아…, 죄송합니다.”
“왜 그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루카스의 말에 나자르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마시키려 했지만, 루카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뭐야, 한율 공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서 그러진 않을 테고…. 나자르의 신색을 살피던 루카스가 아이린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린 아가씨 때문에 그래…? 쭉 보니 대표님께서도 표정이 언뜻 언뜻 안좋으시더라고….”
“그러실 밖에요…. 요즘 그나마 식사는 좀 하는 것 같던데…. 그래도 아직 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씀 전해 들었다. 한율 공은 대체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하셨기에….”
“어떻게 아세요…?”
“응? 뭘?”
“아이린이 그러는 거, 그 사람이랑 있었던 일인가요?”
“뭐…. 그렇지 않았어…? 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한율 공이 아이린 아가씨를 좀 부담스러워 하시긴 했었다며….”
“그건 그렇지만….”
“…. 아무도 정확히 아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아이린이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까요.”
“휴…. 속 시원히 어디 털어놓기라도 하면 좀 나아질 텐데….”
“누가 아니랍니까….”
루카스는 천연덕스럽게 걱정하는 투로 한숨까지 내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린의 증세가 루카스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나자르로서는 그가 딱하기만 했다. 아직도 마음을 쓰세요…? 응? 아이린에게 말이에요, 사령님…. 쓰긴 뭐…. 그냥…. 나자르는 고개를 돌리며 턱을 긁는 루카스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쓰네 뭐…. 안 쓰이겠어, 어떻게…. 지금이야 포기했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좀 끌렸던 사람인걸. 참 속도 없으세요. 보기하곤 좀 다르시네요? 어, 그래? 하하…. 나 그래도 그렇게 매정한 사람은 못 돼. 루카스는 그렇게 말하며 말을 재촉했다.
왕도로 가는 길은 출발 전 그들이 군사들에게 했던 말마따나 먼 길이었다. 별다른 위험도 없는 사신단 호위대가 군인정신으로 버텨내기엔 지루한 여정이었다. 그런 여정을 군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달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므로 숙영지에서의 저녁 시간을 자유롭게 풀어주며 군사들의 숨통을 틔워주곤 했으나, 그 와중에도 루카스와 나자르는 휴식 군기의 단속에 몹시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사신단과 함께 가는 길인데다, 경유지가 대부분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이거나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였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이마샤르 군의 기강이 대단합니다, 의원님.”
“하하하…. 고맙습니다. 이번에 저희 호위대를 맡은 지휘관이 또 주목 받는 군부의 유명주이기도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어떤 분이시기에 이렇게 길고도 지루한 여정을 호위하면서도 이토록 기강을 훌륭히 유지하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비록 병력은 많지 않으나, 보르틴의 어느 강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 번 자리를 마련하도록 해 보지요.”
“정말이십니까? 이거 영광입니다. 바이마샤르를 대표하는 군부의 젊은 지휘관을 만나 뵙게 되다니, 사신으로 다녀가는 길에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을 얻었습니다, 의원님…!”
“아…하하…, 칭찬이 과하십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내일쯤 숙영지에서라도 한 번 다 같이 자리를 가져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정을 빠듯하게 잡은 탓에 다 같이 자리를 한 번 가져보는 일에도 소홀했는데, 왕궁이나 연회장에서 여는 것만큼은 아니겠습니다만 객사에서나마 조촐하게 자리해 보심이 어떠십니까?”
“하하…, 좋은 생각이십니다. 안 그래도 조금은 지루하던 참이었습니다.”
“폐하의 마음을 생각하면 사실 이런 것도 죄스럽긴 합니다만….”
“그래도 가는 길이 멀고 지루한 건 사실이니 폐하께서도 너그럽게 헤아려 주실 겁니다. 좀 먼 길이겠습니까, 어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이 사람 마음이 더 편해집니다, 하하~! 의원님께서 이 사람의 근심을 덜어주시는군요.”
사신으로 온 정무 행정관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자체가 조금은 피곤한 일이기도 했다. 바이마샤르에서도 정치인으로서 의례적인 수사를 쓰는 일은 어느 정도 필요했지만, 이자와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 두세 번은 더 거쳐야 결론이 나곤 했다. 핫산은 행정관 몰래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 ….”
한율은 평소에 보이던 털털하고 조금은 풀어진 그런 모습과 달랐다. 시락을 떠나 온 지 나흘째. 세 곳의 마을과 두 개의 도시를 지나오며, 조금은 따분함을 느낄 법도 한 시간대였다. 그다지 긴장해서 주변경계를 해야 할만한 지형적인 조건도 없었다. 마을을 지나면 눈 덮인 벌판이나 경작지가 보였고, 산지라고는 지평선 너머로 저만치 물러가 있었고, 그나마도 오후가 되자 보이지 않았다. 사신 행렬은 야트막한 구릉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산 같지도 않은 산을 몇 개씩 넘었다. 병사들이 조금씩 긴장이 풀릴 법도 했다. 루카스나 나자르도 행렬을 이탈하거나 시끄럽게 떠들거나 하지만 않으면 병사들을 그다지 닦달하지 않았다. 그들도 지겹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율은 아무런 변화 없이 무표정한 눈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 혼자 경계병인 듯했다.
“한율 공.”
“예, 사령님.”
“긴장 풀고 가세요. 힘드실 텐데….”
“아닙니다. 경계 중입니다. 딱히 힘들 것은 없습니다.”
“…. 예. 계속 수고해주십시오.”
“예.”
한율은 다시 앞으로 말을 재촉해 가는 루카스를 향해 깍듯이 군례를 올렸다. 병사들 몇이 찜찜한 얼굴을 하며 그 장면에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론지니아 전투의 영웅이라고는 했지만, 어쩐지 그에게 말을 걸기가 껄끄러웠다. 한율도 그들이 그러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한율 공이 좀 신경 쓰이네….”
“왜 그러십니까?”
“너무 열심이잖아.”
나자르는 힐끗 뒤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열심히 잘 하고 있는걸요, 뭐.”
“평소 같으면 따분해 했을 텐데….”
“… ….”
나자르의 표정을 보니 입을 열 것 같지도 않았다. 루카스는 더 말하기도 뭣해서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의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솔직히 조금은 고소한 일이었지만, 부대 내에서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은 그로서도 반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 ….”
나흘째의 숙영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트막한 산지(?)의 숲이었다. 그 곳을 지나면 또 다시 시가지가 나오는 지점이었다. 한율은 자청하여 나서서 시가지로 물을 구하러 가는 일을 했다. 막사가 차려지고 저녁 식사가 될 때쯤 마차를 몰고 물을 가져 온 한율은 웬만한 어른 하나는 들어갈 만한, 물이 꽉 찬 나무통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두세 사람이 힘을 합쳐야 들 만큼 무거운 그것을 혼자서 번쩍 번쩍 들어 나르는 그를 보며 병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저 양반 힘 하나는 황소 같이 세네….”
“그래, …. 차라리 지금처럼 병사를 하는 게 낫지…. 지휘관이 뭐 싸움 잘해야 지휘관이겠나. 아랫사람 잘 단속하고 통제 잘 해야 지휘관이지.”
“자네 말 맞네.”
바둑돌을 움직이며 시간을 보내던 병사 둘이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모았다. 물통을 다 내린 한율은 말들을 마차에서 떼어 끌고 가 묶은 뒤 여물과 물을 먹였다.
“잘 먹어라. 그래야 내일도 힘써서 종일 걷지.”
말들은 그가 쓰다듬으며 타이르듯 하자 대답이라도 하듯 가볍게 투레질을 해 보였다. 허리춤에서 담뱃대를 꺼내 연초를 담은 그는 자신의 조가 속한 막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한율 공, 식사 안하십니까?”
“됐습니다. 전 별로 생각이 없네요.”
“아니 그래도 종일….”
“괜찮습니다. 배고프면 제가 알아서 챙겨먹을게요. 식사들 하십시오.”
날이 추웠다. 한율은 불을 지핀 장작 중 하나를 꺼내 연초에 불을 붙이곤 다시 그것으로 장작을 쑤석거렸다.
“한율.”
“…. 예, 총사님.”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또 왜 저런대…하는 눈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자르는 그가 일어나 군례를 올리는 것을, 고개를 외로 꼰 채 보고 있다가 방금 그가 한 말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밥을 굶으랬나?”
“….”
“밥 굶는 정도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던가?”
“시정하겠습니다.”
“야전에서 밥을 굶는 것은 전투력 감소다. 군인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모두 의무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식사한다.”
“식사하겠습니다.”
한율은 두 말 않고 연초를 털어내며 다시 담뱃대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취사병에게로 가 그릇을 받아 수프와 고기 몇 점을 얻어 한쪽으로 가는 걸 흘끔거리며 병사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아니 대체 왜 총사는 한율 공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래?”
“둘이 사귀다 깨졌나?”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한율 공은 자문직에 가기 전에 여당 대표 집에 살았었다며.”
그러는 소리들이 한율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일반 사람들보다 감각이 훨씬 발달한 그로서는 그런 소리들보단 차라리 개 짖는 소리가 더 낫다고 느껴질 정도로 시끄러웠다. 아무도 모르는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자신이 왜 미키네오스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기왕 말릴 수 없다면 미키네오스보다는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위원님께선 그래도 평화에 적응 못 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아서요….
집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율은 고깃점을 든 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깨작거렸다. 덩치가 커다란 그가 그러고 있으니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 리 만무했다. 지나던 루카스가 그를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나갔다.
‘방법이 없을까….’
막사 안에 앉아 이리 저리 염두를 굴려보던 그는 아이린을 떠올렸다. 아예 없애버려도 될 것 같긴 한데…. 내가 했다고 하면 덤비려 들지도 모르고…. 어차피 전시 상황이니까 즉참을 해도 되긴 되는데…. 아냐, 그럼 문제가 좀 커질 수도 있지…. 가만. 내가 저 놈한테 못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럴 리가 없잖아.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막사 입구가 열리며 나자르가 들어왔다. 식사를 마치고 씻었는지, 그녀는 조금 뽀얗게 된 얼굴에 이마에 돋아난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웬일이야? 그 술병은 또 뭐고…?”
“….”
나자르가 그의 앞에 술병을 놓고 앉으며 피식 웃었다.
“오늘 제 술친구 좀 해주십시오.”
“총사란 사람이 전시에 술을 마셔…?”
“이렇게 평화로운 전시도 있답니까?”
루카스는 그녀의 말도 맞다며 마주 웃었다. 그래, 한 잔 하자. 나무잔 두 개를 꺼내 와 탁자에 내려놓는데 나자르가 술병을 그대로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어어, 이 사람 보게.
“크…. 좋다.”
“술이 고팠나보네.”
“글쎄요. 술이 고팠는지…. 아니면….”
“…. 무슨 일이 있긴 있구먼?”
말끝을 흐리는 나자르를 보며 루카스가 묻자 그녀는 또 피식. 웃는다.
“한율 공.”
“…. 아 예, 의원님.”
한율은 불 꺼진 장작더미 앞에 앉아 불 꺼진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물끄러미 뭔가를 생각하듯 앉아있던 중 핫산의 방문을 맞았다. 주위를 둘러 본 핫산이 허허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여기서 대체 뭘 하고 계십니까? 장작불도 다 꺼졌는데. 저기 병사들하고 불 쬐면서 좀 몸이라도 녹이시지….”
“별로 안 춥습니다. 이 정도야….”
“… ….”
“헌데 무슨 일이십니까?”
한율은 괜히 다 타서 숯덩이가 된 장작을 발로 쑤석거렸다. 핫산은 내일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된다며, 그 자리에 나갈 의향을 물어왔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것으로 보아 그가 가려 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는 듯했다.
“말씀 안하셨으면…. 그냥 전 없는 걸로 쳐 주십시오.”
“….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키네오스 사신들한테 론지니아 전투의 싸움쟁이가 여기 껴있다는 말씀, 아직 안 하셨으면 그냥 전 없는 사람으로 해주셨으면 한다는 겁니다.”
“한율 공…!”
“의원님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
“… ….”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핫산은 스스로 가진 자책감 때문에 그 말을 곧이듣기가 힘들었다. 한율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듯 다시 빈 담뱃대를 물며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럼…. 내게 말해줄 수는 있겠습니까? 지금 그 한숨….”
“… …”
“염치없지만, 내 맘이 편하질 않아서 그래요.”
“하하…. 아닙니다. 의원님하곤 관계없고요…. 저 때문입니다, 저….”
“….”
병사 하나가 지나가다 어두운 속에서 핫산은 알아보지 못한 채 한율에게 장작 갖다주랴 물어봤고, 한율은 손을 내저었다. 그가 가고 나서 한율이 설명했다.
“미키네오스로 갈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다른 곳으로 떠났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전 원래 싸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지라…. 미키네오스에서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론지니아에서 마도들이 몰려왔던 건 저 때문입니다. 물론 그 지역은 마도들이 나타난 적 없는 곳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율 공 때문이라니오? 한율 공이 마도들과 무슨 은원관계라도 있단 말입니까?”
“은원관계라기보다는….”
한율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는 얼굴로 한참 뜸을 들였다. 핫산은 재촉하지 않으며 잠자코 그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음…. 은원관계라고 해 두는 편이 낫겠습니다. 저보다는 마도들이 제게 원한을 가졌다…뭐 그렇게 말해두지요.”
“한율 공….”
“모든 걸 말씀드릴 수 없는 거…,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자르는 금세 취해버렸는지 얼굴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잔이 채워지는 족족 비워내는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루카스도 다소 급하게 마신 터라 약간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자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왜 이렇게 급해, 오늘따라…?”
“글쎄요. 하하…. 오늘 좀 술이 빨리 취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혀까지 꼬인 나자르는 민망한 듯 웃었지만, 조금 어두운 표정이었다. 루카스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약간 처진 눈꼬리가 더 처진 듯했다. 무슨 고민거리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루카스는 나자르의 그런 얼굴을 처음 대했다.
“군율이라면 신탁처럼 받드는 총사가 이렇게 망가지다니, 좀 의외군.”
“총사, 총사 하지 마세요. 재미없게….”
“그럼 뭐라고 불러? 자기…? 여보…?”
“에이 참….”
나자르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힘없이 웃었다. 전에 없던 행동을 하는 그녀가 다시 술을 따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율 공이…. 신경이 쓰이네요. 아로사도 걸리고…. 아이린도 걱정되고…. 무슨 소리야, 아로사가 왜…? 아시잖아요. 아로사가 마도라고만 하면 앞뒤 안 재고 칼부터 뽑으려 드는 거…. 그런데…? 나자르는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입술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나는 그게 안 되거든요…. 한율 공도 그렇고, 아로사도 그렇고…. 아이린도 그렇고…. 다들 뭔가 하나에 미쳐 있거나 아니면 자기 고집도 있고 그런데…. 나만 안 되거든요. 난 그렇게 빠져 있을 뭐가 없으니까….”
“총사답지 않게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거 총사, 총사 하지 말라니까 정말…. 그냥 이름 불러요.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그렇게 부르니까 오히려 더 답지 않으시네요.”
“개기는 거지, 지금…?”
“킥킥…. 개기면 받아주실래요…?”
술기운 때문인지 피식피식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 보는 나자르의 얼굴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술에 젖어 반짝거리는 입술이 루카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연애를 해 보지 그래…? 남자한테 빠져보지, 어디…. 그럴 남자가 있어야죠~, 나라고 남자 좋은 줄 왜 모르겠어요. 알어…? 군율 좋은 줄만 아는 줄 알았는데…. 에~ 진짜 계속 그럴 거에요? 이래뵈도 남자는 안다구요…. 말이야 누군들 못하겠어. 나 남자 알아요~하고…. 루카스는 짐짓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받아내며 나자르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나자르의 손이 그의 손을 가만히 잡자 루카스의 손이 멈칫했다.
“이러면 여자들이 오해해요.”
“오해하라지….”
“… ….”
“… ….”
잠시 그에게 눈을 맞추고 있던 나자르를 향해 루카스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 나자르는 순순히 그를 향해 턱을 들며 입술을 살며시 벌렸다. 일단 입술이 닿고 나자 나자르가 먼저 혀를 넣어왔다. 둘은 단숨에 엉겨 붙으며 열정적으로 키스에 몰입했다. 술에 섞인 타액이 두 사람의 입술을 적셨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뻗어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아직 마음이 정리된 것도 아니면서…. 이래도 돼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조금 거칠어진 숨소리로 한 마디씩 주고받은 그들은 다시 엉겼다. 나자르는 그의 입술과 턱과 목을 핥고 빨며 파고들었고, 루카스는 그녀의 젖가슴을 다소 거칠게 주무르며 허리와 등을 더듬어 갔다.
“다 잊고 그냥 한 번 즐기자는 건가요…?”
“그럴 생각 아니었어…?”
나자르의 손이 그의 아래춤으로 향했다. 루카스가 몸을 뒤로 젖히자 그녀는 조금 벗겨져 있는 상의를 완전히 벗어던지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루카스의 허리띠를 풀었다. 익숙한데…. 말했잖아요, 나 남자 안다고…. 술기운에 욕정까지 달아오른 얼굴로 웃어 보인 나자르는 단숨에 그의 바지를 무릎까지 벗겨냈다. 아직 단단하지는 않았지만 피가 몰리고 있는 성기가 눈앞에 드러났고, 이내 거기로 입을 가져갔다. 으음…. 나자르의 입 속으로 제 몸의 일부가 들어가는 걸 느끼며 루카스는 낮은 신음을 냈다. 그것은 단숨에 단단하게 일어섰다. 완전히 커진 듯한 남근을 나자르는 뿌리까지 삼켰다가 도로 뱉기를 반복하면서 혀를 사용했다. 귀두 부분을 쓰다듬으며 다시 입 속 깊이 품는 모양새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잘 하는데….”
“해 주는 만큼 돌려 줄 생각이나 하세요.”
옷 속으로 파고드는 나자르의 손이 가슴을 매만졌다.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 성기를 입에 넣고 애무하는 나자르의 머리 뒤로 군데 군데 근육이 도드라진 그녀의 등과 뒤로 빼 앉은 엉덩이의 곡선이 보였다. 루카스는 그녀를 일으켜 안아 들고 침상으로 향했다. 나자르의 손은 여전히 그의 남근을 놓지 않았다. 군화와 바지를 벗고, 나자르의 바지까지 벗겨낸 루카스의 손이 그녀의 나신 위를 천천히 쓸었다. 나자르는 그를 향해 다리를 벌렸다.
“좀 색다른가 보죠…? 근육질의 여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매력적인데….”
“언제까지 그 옷은 입고 있을 건데…?”
아예 반말을 하며 발가락으로 상의를 잡아 늘이자 루카스는 남아 있던 상의를 벗어던져 그녀와 같이 알몸이 되었다. 우람하진 않았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상체가 그녀의 알몸 위로 덮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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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자르와 루카스가 붙어먹었습니다.(작가가 돼서 말뽄새 하곤..;;)
쿨하고 똑똑한 나자르가 앞으로 루카스를 안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캐릭터 설정으로 몇 장 그려놨는데, 여긴 사진을 올릴 수가 없군요. 흙...ㅡ.ㅜ;;
어쨌든. 꾸준한 호응 감사드립니다. 꾸벅~(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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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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