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접탁자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 그리고 나다니엘이 레이네의 뒤에 시립했다. 연회를 막 마친 뒤라 차라든가 하는 마실 것들은 내오지 않았다. 리토르나는 눈을 감은 채 레이네의 말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황녀께서는 이해하실 수 없을는지 몰라도, 미키네오스는 남녀의 구분이 엄격합니다. 여자가 군인이거나 정치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지요. 이런 말까진 조금 민망합니다만, 남녀 간의 일조차 국법이 간섭을 하는 실정입니다. 모두 교리에 따르는 것이긴 합니다만, 알고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
“그러기에 제가 폐하의 핏줄이긴 합니다만, 공주로서 누릴 의전이 있을 뿐, 진정한 왕녀가 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왕위를 갖고자 하십니까?”
“도와주십시오, 황녀님. 대국의 황녀께서 제 손을 잡아주신다면 저는 황녀님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잉그라드의 국경을 침탈하고자 제게 친서까지 쓰게 하신 폐하의 뜻을 공주님께선 어떻게 꺾고자 하십니까?”
곧바로 어려운 질문을 치고 나오는 리토르나에게 레이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로서도 그 문제에 대해 나름의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타국의 황녀 앞에서 섣불리 말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뜸을 들이는 레이네에게 리토르나가 재촉하듯 자신의 생각을 내놓았다.
“왕실에서 폐하의 뜻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곧 반역의 불씨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공주께서는 총명하시니, 그리 무모한 일을 벌이실 듯하진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기왕에 마음을 다 내놓기로 결심을 한 터였다. 이제 와서 숨기며 다시 술수를 부려봐야 득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레이네가 눈을 뜨고 자신을 주시하는 황녀를 똑바로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군부를 장악할 생각입니다.”
“… ….”
“군부를 제 편으로 끌어들여, 폐하께서 무모한 행보를 하지 않으시도록 어떻게든 방도를 강구할 것입니다.”
“…자칫…. 큰 오해를 받고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겨우 나라의 기강이 선 마당에, 대국과의 무모한 충돌로 인해 다시 국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미키네오스는 보르틴 대륙에서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 ….”
리토르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모든 걸 다 털어 놓지야 않겠지만, 어쨌든 지금 말은 사실일 테고…. 다른 나라의 왕위 계승 문제에 지금 여기서 휘말리게 된다면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잉그라드는 차기 황제를 잃는 형국이 될 터….’
“도와주십시오, 황녀님…! 황녀님께 행여라도 어떤 식으로라도 해가 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것입니다…!”
레이네가 거듭 그녀의 대답을 청했다. 리토르나는 가만히 눈을 떴다. 움직임 없이 허공을 보는 리토르나의 기색을 살피는 레이네의 표정이 자못 진실했다.
“일단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타국의 왕위에 대한 문제인지라…, 저 역시 이 자리에서 곧바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공주께서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 ….”
수긍한다는 듯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물러서는 레이네게 리토르나 역시 본심을 한 번쯤 보여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보다….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 말씀하시지요.”
리토르나의 고요한 눈빛이 레이네에게 향했다. 레이네는 달리 술수를 부리거나 혹은 찔릴 것도 없는데 괜히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리토르나에게서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솟구치고 있었다. 레이네의 어깨를 움츠리게 만든 것은 바로 그 기운이었다.
“제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단지 잉그라드의 국경을 침탈하는 외적이 아닙니다. 미키네오스에서 론도 정벌을 통해 잉그라드의 국경을 넘든 그렇지 않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관심이 없습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론도 산맥의 자원은 우리 잉그라드에게도 큰 재산이긴 합니다만…. 힘으로만 밀어붙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론도 산맥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잉그라드의 군사력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이건 공주님과 폐하, 더불어 미키네오스 왕국을 모욕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현실이 그렇다는 거지요.”
“… ….”
“하지만 제가 염려하는 것은 귀국이나 보르틴의 연합군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다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제가 경계하는 것은 마도들이 하나로 뭉쳐 무차별적인 참극을 벌이는 일, 그것뿐입니다.”
레이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 여자가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잉그라드의 군사력으로 그런 걸 걱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지금…?’
의혹의 눈빛이 살짝 떠오르는 레이네에게 리토르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나온 김에 일단 할 수 있는 말까지는 다 할 생각이었다.
“믿기가 어려우신 모양이군요. 압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마도의 무리들은 저 론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건 그들은 나타날 수 있지요.”
“잘 보셨습니다. 전 믿기가 어렵습니다.”
“….”
“20년 전의 전쟁에서 보르틴 대륙이 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잉그라드의 황군이 구원군으로 배후를 압박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하나, 사실은 사실이지요. 사정이 이런데, 장차 황위를 이어받고 잉그라드의 모든 권한을 틀어쥐게 되실 황녀께서 마도의 무리들을 근심하시다니요.”
리토르나의 입에서 가늘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레이네는 진심을 털어 놓으라 재촉했다.
“말씀해보시지요. 황녀께서 진정으로 염려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 공주께서 진심을 털어놓았기에 저 역시 진심을 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마도의 무리들은 단지 베슬리 로이나르의 세력을 중심으로 규합한 일부에 불과합니다. 보르틴 대륙 뿐만아니라 잉그라드가 있는 앙카라시아 대륙의 사람이 살지 않는 곳곳에도 그만한 마도들은 수도 없이 무리지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로 규합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 하나로…. 뭉치다니요…?”
“론지니아 전투에서 봤던 그들은 순수한 살의와 적의만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파멸 그 자체인 것처럼요. 그런 자들의 구심점이 되는 이가 있다면….”
“… …. 그런 자가… 있습니까…?”
“… ….”
리토르나는 한율을 떠올렸다.
그는 확실히, 지금도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그의 그런 상황과 관계없이, 마하수카의 경지에 들어서면서 자신이 얻은 것들을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을 말해봐야 먹힐 리도 없을뿐더러, 자신에게 왕위 계승의 문제를 말하며 도와달라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미친 사람 취급 받기가 십상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확신을 갖고 말한다 해도, 아니 어쩌면 확신을 갖고 말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확실하게 미쳤다는 소릴 들을 공산이 더욱 커지는 꼴일 뿐이었다.
“아직은…모릅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 조짐이 있습니다.”
“…!!”
흔들림 없이 말하는 리토르나를 보며 레이네는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미치거나 아니면 정말 그렇거나…. 이 여자는 잉그라드의 황녀다. 거긴 황실에조차도 마법사가 있는 곳이니…, 게다가 마법사가 차고 넘치는 아슈람에서 10년이 넘게 있었으니…. 그런데 지금 내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
국경 침탈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 사실일까. 레이네의 귀에는 리토르나의 말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마도의 무리들에 대한 리토르나의 생각을 알고자 한 것이 애시당초 아니었으니, 레이네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왕위 계승에 쓸모가 있는가 아닌가, 그것뿐이었다.
“….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잉그라드는 국경의 침탈에 대해서는 몹시 민감한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마도의 무리들에 대한 말씀은 차치하고서라도, 미키네오스의 공주로서 그 말씀은 선뜻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 …. 그 점에 대해선….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레이네는 다시 그녀에게 집중했다.
“보르틴의 연합군이 론도 산맥에 있는 마도의 무리들을 모두 소탕해 준다면 우리 잉그라드로서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국경을 넘어오더라도 어느 정도는 묵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친서에 썼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만일 폐하께서 명예를 걸고 약조하셨던 것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
“정벌전을 승리로 장식하고도 잉그라드의 국경 내에서 군사를 물리지 않으신다면, 잉그라드는 그것을 명백한 침략 행위로 간주하고 필요한 모든 물리적 행사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 ….”
리토르나의 말은 단호했다. 레이네는, 황제가 환후 중인 이 때에 적지가 될 지도 모를 이곳에서 단 1천 5백의 군사만을 대동하고 있는 황녀의 태도치곤 너무나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잉그라드가 갖춘 군사력 중에서 황군은 비록 2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수와 위력에 대해 알고 있는 레이네로서는, 황녀의 자신감이 터무니없는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선전…. 포고로군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네는 사뭇 심각한 그 말과는 달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은 걸 알았다는 듯. 리토르나는 그녀의 표정에 납득이 되지 않았다.
“국왕 폐하께서 약조를 어기실 경우 그렇다는 거지요. 하지만 그보다…, 공주께서 지금 지으신 그 표정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렇지 않겠습니까…? 행여라도 폐하께서 무모한 행보를 하실 경우 미연에 방지하여 미키네오스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정보를 얻었으니…. 제가 당연히 다행스럽게 여길 수밖에요.”
“…그렇습니까….”
그렇다 해도 레이네의 표정은 미심쩍은 데가 많았다. 리토르나는 더 묻지 않고 그만 나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가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정말 유익했습니다. 리토르나는 대답 없이 목례를 해 보이곤 공주의 거소를 나서 객궁으로 향했다. 어쩐지 손해를 본 느낌이었다. 레이네의 마지막 미소가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이 나라의 왕녀와 국왕이 서로 척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득이 될 지 실이 될 지는 당장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바루나는 명백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본심을 내비쳤으나, 레이네는 진심으로 호소하는 듯하면서 아직도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리토르나는, 남의 나라라 해도 그와 같은 일들이 시민들의 안정과는 별도의 문제라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좀 의외였습니다, 공주님….”
“…. 뭐가…?”
“황녀 앞에서 그런 노골적인 표정을 지으셨던 것 말입니다.”
“아…. 하하하하…! 아마 좀 찔끔했을 거야.”
“…. 일부러 그러셨습니까…?”
“반은 진심이었지만…, 정말 마음대로 했다면 황녀를 꽉 끌어안기라도 했을걸?”
“….”
“생각해 봐. 황군이 없다고 해도 잉그라드의 군세는 엄청나. 황제가 병중이라고 해도 잉그라드는 잉그라드야. 그 군사와 연합군이 정면으로 맞붙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더라도, 누가 이기건 간에 양쪽 다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면 부왕이 신망을 잃게 되는 건 시간문제지.”
“… ….”
레이네의 그런 말들이 듣기에 불편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녀가 안쓰럽기도 했으나 나다니엘은 별반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레이네는 속이 좀 후련해진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하아…. 황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거야….”
나다니엘은 키득거리다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레이네의 곁으로 의자를 가져가 앉았다. 이따금씩 그녀는 그렇게 나다니엘을 곁에 앉혀 손을 잡은 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레이네의 작은 손을 잡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감히 내색할 수가 없었다.
“나 좀 봐….”
고개 숙인 그에게 레이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넌 끝까지 내 편이어야 해. 알지…?”
“…. 물론입니다. 공주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래야 하는 거…. 알지…?”
“…. 예.”
레이네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이곤 눈을 감았다. 나다니엘은 뭔가를 물어보려다 레이네가 그대로 잠들 것 같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에반더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비토…, 나오지 말고 들어. 오늘은 나다니엘하고 이대로 잘 거야. 그러니 내가 일어날 때까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알겠습니다.”
어디서 들려오는 소린지 비토는 어쨌든 대답을 했다. 한바탕 황녀와 하고 났더니 피곤했던 모양인지 레이네는 곧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나다니엘은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연합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사신단은 국경 지역에 이르러 한 차례 더 숙영을 해야 했다.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미키네오스 령으로 진입할 거리였다. 일찌감치 숙영지를 정한 터라, 막사를 치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도 해가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한율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물을 뜨기 위해 마차를 몰고 계곡으로 향했다.
“참…, 저 양반도 팔자 사납네. 하루아침에 보위부 자문에서 병사로 추락하더니 이젠 물당번이야.”
“무슨 꼴이야, 저게….”
병사들이 혀를 차며 한 마디씩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얼굴로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말을 몰았다. 세 명의 병사가 마차 뒤에 함께 타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미키네오스 령까지는…?”
“내일 한낮에 통과할 것 같습니다. 아마…. 이 고갯길 지나서 여기 이쯤에 국경 경비대가 있을 거예요.”
“음…. 내일은 군사들한테 옷차림이랑 그런 것 좀 다시 주의 줘.”
“예. 그러지요.”
“….”
루카스는 자신의 옆에 서서 몸을 숙인 채 지도를 살피는 나자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숙영지에 와 갑주를 벗고 있는 그녀의 군복 차림이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젠 별 생각을 다 하는군….’
혼자 피식 웃으며 떨쳐내려 했지만 다시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눈길이 나자르의 몸으로 향했다. 여자 치고 근육이 좀 도드라진 것을 제외하면 나자르의 몸은 훌륭한 편이었다. 출신이 북방이라 그런지 일단 큼직큼직한 생김생김에 군복으로 가려져 있던 젖가슴이 생각보다 컸다.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상의를 벗어던질 때 마치 눌려 있다가 튀어 나오기라도 하듯 불쑥 솟아오르던 젖가슴이 생각나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슬그머니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 뭘 그렇게 보세요?”
“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하하….”
“… ….”
나자르는 제 몸에 뭐가 묻었나 싶어 등을 펴고 몸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음…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씨익 웃었다. 뭐예요, 무슨 생각을 하신 건데요, 대체…? 루카스는 난처한 듯 손사래를 치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 별 거 아니라니까….”
“이제 보니 생각은 다른 데 가 계셨군요? 숙영지도 일찍 차렸겠다, 시간 많겠다, 할 건 별로 없겠다….”
“이, 이봐, 나자르 총사…!”
“왜요? 정곡을 콕~! 하고 찌르니까 몹시 당황스러우십니까?”
나자르가 가슴팍을 손가락을 쿡 찌르자 루카스는 포기한 듯 입맛을 쓰게 다시며 푹 웃었다. 명망 높으신 루카스 사령님께서 꽤 색정가란 게 알려지면 어떨까? 시락의 많은 여성분들께서 실망을 할까요…, 아니면 좋아들 할까요…? 이봐, 색정가라니…! 거 마, 말이 좀…. 나자르는 팔짱을 끼며 싱글싱글 웃었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던데요…?”
“뭐야…?”
짐짓 발끈한 척을 하며 쳐다본 루카스는 나자르의 입꼬리가 묘하게 실룩거리는 걸 보고는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아하…. 여유를 되찾은 안색으로 책상에 기대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연초를 껐다.
“그건 총사도 마찬가지던데, 뭘…. 설마 그것 때문에 반하거나 하진 않았을 테고….”
“솔직히, 섹스라면 반했지….”
“뭐가 그렇게 맘에 들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말만 하고 있을 건데…?”
“하나~, 둘… 어잇~차!!”
병사들 셋은 물이 가득 든 나무통을 들어 마차로 날랐고, 한율은 허리까지 잠기는 물에 들어가 빈 통에 물을 담아 그들이 들고 갈 바위 위에 얹었다. 한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는 추위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병사들은 저게 사람이야? 하는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그가 들을까 싶어 서로 눈짓만 하고 있었다. 장정 셋이 힘을 합쳐야 들 물통을 빈 나무상자 들듯 번쩍 번쩍 들어 올려 바위에 사뿐히 놓는 것은 이미 한율과 물당번을 했던 다른 병사들에게서 듣긴 했으나, 실제로 보니 오금이 저렸다. 이거 혼자 드는 사람 봤어…? 아니…. 그게 사람이냐? 일을 마친 한율은 남은 물통 두 개를 한꺼번에 양쪽에 끼고 마차로 돌아왔다. 병사들은 입을 떡 벌린 채 그가 물통들을 마차에 싣는 걸 보고만 있었고, 안 갈 심산이냐 묻는 한율의 말에 비로소 마차에 올랐다. 한율은 물에 젖은 옷을 말리거나 갈아입을 생각도 않은 채 마차에 올라 다시 담뱃대를 입에 물며 말을 몰아 주둔지로 향했다. 허이~! 헛…!
루카스의 군막 안에선 장작불 말고도 다른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자르는 바지를 내린 채 책상에 기댄 자세로 뒤에서부터 루카스의 몸을 받아들였다. 루카스가 상의를 걷어 올려 비어져 나온 나자르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자르의 젖은 음모를 쓰다듬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당신…. 역시….”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뭘… 좀 알아….”
나자르는 그가 허리를 밀어 넣을 때마다 엉덩이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로 파고들었고, 손가락이 민감한 곳을 자극할 때마다 뾰족한 소리를 냈다. 좀 참아봐, 병사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몰라, 그런 거…. 이제 보니…아주 막 나가네? 싫어…? 섹스할 때도…. 군례 올릴까…? 거친 숨소리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묻어 나왔다. 나자르는 아랫배 깊은 곳에서 남자의 몸이 요동치는 느낌에 집중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둘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루카스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쥐며 페이스를 올렸다. 퍽 퍽 하고 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자르는 책상에 이마를 기댄 채 신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입을 가렸다.
“당신…! 너무 좋아…! 흐읍…! 흡…!”
루카스는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나자르의 몸속에 정액을 분사했다. 나자르도 아랫배에 따끈한 느낌이 퍼져오자 그가 사정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아….”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뺀 루카스가 수건을 꺼내 제 것을 닦아내는 걸 보며 책상에 엎드린 채 그를 보고 있던 나자르가 배시시 웃었다.
“그 수건…, 제대로 빨기는 하는 거야…?”
“왜…, 입으로 닦기라도 해 주려고…?”
“원한다면….”
피식 웃으며 자신의 남근을 모두 닦아낸 루카스가 그녀에게 수건을 건넸다. 수건을 접어 의자에 놓고 그 위에 앉은 나자르는 머리카락부터 먼저 다듬어 다시 묶었다. 그러고 있으니까 꽤 요염한데…. 나 보기보다 몸매 좋아. 보기에도 좋아. 아주 입에 뱄네, 여자한테 그런 말…. 비웃듯 하는 나자르를 보며 다시 푹 하고 웃었다. 머리를 다 묶은 나자르는 엉덩이를 들어 수건으로 비경을 닦아내고는 바지를 입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어요, 민망하게…. 서로 다 본 사이에 뭘 그래. 그래도 그런 게 아니죠. 입을 비죽거리며 허리띠를 채우고 나자르는 그에게 군례를 올렸다.
“오늘도 멋지게 한 판 했습니다, 사령님.”
“푸하하하…!! 뭐 하는 거야, 지금.”
“우린 군인이니까요.”
그러고는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가려는 나자르에게 루카스는 한율을 불러 달라 말했다. 그 사람은 왜요…? 조금 언짢아진 듯한 얼굴로 묻는 나자르.
“술이나 한 잔 할까 하고. 그래도 매번 물당번도 하고, 고생하잖아, 날씨도 추운데…. 좀 불러다 줘.”
“알겠습니다. 연적인데…. 참 속도 좋으십니다.”
나자르를 통해 루카스의 호출을 받고 온 한율은 군례부터 올렸다. 음, 앉지. 그에게 자리를 권한 루카스는 이미 술잔과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린 터였다. 허리에 찬 환인검을 책상에 기대어 놓고, 한율은 그의 잔을 받았다.
“매일 물당번을 하느라 고생이 많아.”
“…. 아닙니다.”
“자네한테 이렇게 하대를 하는 게 편하진 않지만…. 그래도 기강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이해하고 있지…?”
“당연한 일입니다. 전 사령님의 지휘를 받는 병사입니다.”
“군인 다 됐네, 어느 새….”
잡담 몇 마디가 오가고 술잔이 한 차례 비워졌다. 한 잔 주게. 한율은 내밀어진 잔에 술을 따르고 제 잔에도 술을 채웠다. 아이린 아가씨 때문인가…? …? 뭐가 말입니까? 자네 그 표정 말이야. 루카스는 연초를 꺼내며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비린내가 날 듯한 웃음을 지었다.
“내내 표정이 안 좋기에 난 그런가 싶었지. 전에 관심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니…, 그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
“맞나보군….”
“…. 없진… 않습니다.”
“없진 않다…라….”
한율은 쿡쿡쿡 하며 웃는 루카스에게서 이전에 대하던 그와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분위기랄까. 애당초 그를 좋게 보거나 혹은 나쁘게 보거나, 그런 식의 판단을 하지는 않았었지만 지금 그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이전에 보여주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말없이 잔을 반 정도 비운 루카스가 그를 향해 눈을 들었다. 느낀 바대로 전에 볼 수 없었던 눈매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자네 별로 안 좋아해.”
“…. 그렇습니까.”
“론지니아 전투에서 무훈이 높다고는 해도…. 어차피 자네를 보위부 자문이란 자리에 앉혔던 핫산 대표님의 의중이 뭔지는 알지?”
“…. 알고 있습니다.”
“…. 꽤 섭섭했겠구먼….”
“…그건 아닙니다.”
“그래…?”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뭐, 자네가 그렇다면야…. 믿어야지 어쩌겠어. 안 그래…? 신경을 긁으려고 하는 말이 분명했으나 한율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 신경을 긁는 말도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하실 말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눈치가 좀 있군.”
연기가 한율의 시야를 가렸다가 다시 맑아졌다. 루카스가 본심을 털어놨다.
“자네랑 한 번 대련을 하고 싶어서.”
“….”
“난 기사야. 군인이라고….”
“….”
“론지니아 전투의 영웅이라…. 솔직히 말해서, 검을 쥐고 사는 사람으로서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붙어보고 싶은 거,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렇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다…? … …. 하하하, 교묘하게 속내를 드러내는군.”
“….”
루카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몸 주위에서 한율과는 또 다른 류의 투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율은 그런 것에 관심 없다는 듯 눈을 내려뜬 채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네 정도라면 알아챘겠지만…, 우리 집안은 대대로 마검사 집안이었어. 이스마르는 보르틴 대륙 마검사의 근원지였지…. 마법을 무예…, 특히 검술에 응용시켜서 위력을 배가시키는 마검사 말이지….”
“… ….”
“… 그 동안은 마법을 쓸 이유가 없었어. 바루나 같은 놈이 종교숙청이다 뭐다 하면서 그런 걸 모조리 대륙에서 쫓아내 버릴 기세였으니…, 멍청한 놈들. 이스마르고 바이마샤르고 그깟 놈 기세에 눌려 마법사들을 핍박했으니…. 하긴 센 놈보다 미친 놈이 더 무서운 법이긴 하니까 무리도 아니었지….”
한율은 괜스레 말을 이어 붙여가며 질질 끄는 것을 듣고 있기가 귀찮았다. 곧바로 정곡을 찌르고 들어갔다.
“저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누가 싸움을 하자고 했나…? 난 오래간만에 마법을 쓰면서까지 싸워볼 만한 상대가 있다고 해서 무인으로서 지금 자네에게 대련을 청하는 거야. 설마 그조차 마다할 생각인가…?”
“…. 대련이건 싸움이건…. 저는 지키기 위해서만 싸울 뿐입니다.”
“… ….”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루카스는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이 앉아만 있는 한율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검이 뽑혀 한율의 목에 바싹 겨누어졌다. 스릉~소리와 거의 동시에 검날이 한율의 목에 닿았다. 그래도 한율은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이래도 싸우지 않을 텐가…?”
검 끝에서 뭉실 뭉실 예리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목에 닿을락 말락했던 검날에서 투기가 나오자 피부가 미세하게 갈라지며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대로 자네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 ….”
한율은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루카스는 오기가 불끈 치솟았다. 검을 천천히 거두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그는 술잔을 비워내곤 코웃음을 쳤다. 그래, 싸울 계기가 필요하단 말이지…. 빙글빙글 짓는 웃음이 다소 야비한 인상을 풍겨내기 시작했다.
“그럼 이런 건 어떤가…? 자네가 날 한 번 꾸짖어 보는 건….”
“…. 그럴 이유라도 있습니까…?”
“있지. 있고 말고….”
“… ….”
“아이린 아가씨 말야. 몇 차례 나한테 모욕을 줬거든.”
“….”
루카스는 한율의 기색을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한 손은 이미 검에 가 있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말이 한율을 격동시킬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니.
“여태까지 난 품어보려고 한 번 눈에 들였던 계집을 그냥 놓아 본 적이 없어. 대부분은 제가 좋아서 나한테 안기기도 했고…, 저 밖에 있는 나자르 총사도 마찬가지지.”
“…. 그렇습니까….”
한율은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속으로 설마, 설마 하고 있었다. 나자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이 자가 아이린까지 그렇게 했을까 싶었다. 아니, 지금 말하는 내용과 떠나오기 전 보았던 아이린의 상태를 보건대,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한율의 눈썹이 루카스의 자극하는 말에 꿈틀거렸다.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자 루카스는 결정타를 날렸고, 한율은 망설임 없이 분노에 몸을 맡겼다.
“그래서 아이린 그 계집에게도 남자를 가르쳐 줬지. 처음이라 힘겹기야 했겠지만…, 아마 앞으로…!!”
루카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한율의 두툼한 손바닥이 그의 턱에 작렬했다. 뭐가 어떻게 날아와 자신을 쳤는지도 모른 루카스는 침상까지 부수며 나뒹굴었고, 한율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헉…! 억…!”
미리 마투기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한율의 손바닥에 제대로 맞은 루카스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턱이 어긋났는지 머리까지 지끈거렸고, 충격의 여파로 정신이 어지러웠다.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한율의 몸에서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투기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였구나….”
“큭…! 윽…!”
정신을 수습하며 돌아앉는 루카스의 전신을 한율의 목소리가 뒤흔들었다. 이… 이게 뭐야, 이런 마법도 있었나…? 식은땀을 흘리는 루카스의 전신이 저도 모르게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내가 떨고 있…어…?’
“그래서였어…, 네놈 때문이었어….”
한율의 몸이 쇠갈고리로 오장육부를 긁어내리듯 그의 내부를 무너뜨릴 것처럼 관통했다. 루카스는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온 몸의 힘이 풀리는 듯한 느낌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뭐…이런 놈이…!! 한율은 손을 꺾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어느새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으…으으…!!”
공포에 싸인 루카스가 비명처럼 신음했다. 그를 내려다보는 한율의 눈동자는 황적색에서 짙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섬뜩한 안광에 루카스는 소름이 끼쳐 올랐다. 죽음에 대한 예감이 등줄기를 사납게 훑어냈다. 저항할 수 없었다. 한율의 주먹은 극에 달한 분기로 떨렸고, 화마(火魔)처럼 휘몰아치는 투기가 주체할 수 없이 요동쳤다.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발로 땅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으나 물러날 곳은 없었다. 부질없는 그의 몸짓을 보는 한율의 눈빛이 점점 차갑고 싸늘한 열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그 기세로라면 틀림없이 루카스를 죽이고야 말 것이었다.
‘이럴…수가…!! 이런… 세상에 이런 놈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황녀께서는 이해하실 수 없을는지 몰라도, 미키네오스는 남녀의 구분이 엄격합니다. 여자가 군인이거나 정치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지요. 이런 말까진 조금 민망합니다만, 남녀 간의 일조차 국법이 간섭을 하는 실정입니다. 모두 교리에 따르는 것이긴 합니다만, 알고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
“그러기에 제가 폐하의 핏줄이긴 합니다만, 공주로서 누릴 의전이 있을 뿐, 진정한 왕녀가 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왕위를 갖고자 하십니까?”
“도와주십시오, 황녀님. 대국의 황녀께서 제 손을 잡아주신다면 저는 황녀님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잉그라드의 국경을 침탈하고자 제게 친서까지 쓰게 하신 폐하의 뜻을 공주님께선 어떻게 꺾고자 하십니까?”
곧바로 어려운 질문을 치고 나오는 리토르나에게 레이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로서도 그 문제에 대해 나름의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타국의 황녀 앞에서 섣불리 말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뜸을 들이는 레이네에게 리토르나가 재촉하듯 자신의 생각을 내놓았다.
“왕실에서 폐하의 뜻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곧 반역의 불씨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공주께서는 총명하시니, 그리 무모한 일을 벌이실 듯하진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기왕에 마음을 다 내놓기로 결심을 한 터였다. 이제 와서 숨기며 다시 술수를 부려봐야 득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레이네가 눈을 뜨고 자신을 주시하는 황녀를 똑바로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군부를 장악할 생각입니다.”
“… ….”
“군부를 제 편으로 끌어들여, 폐하께서 무모한 행보를 하지 않으시도록 어떻게든 방도를 강구할 것입니다.”
“…자칫…. 큰 오해를 받고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겨우 나라의 기강이 선 마당에, 대국과의 무모한 충돌로 인해 다시 국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미키네오스는 보르틴 대륙에서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 ….”
리토르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모든 걸 다 털어 놓지야 않겠지만, 어쨌든 지금 말은 사실일 테고…. 다른 나라의 왕위 계승 문제에 지금 여기서 휘말리게 된다면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잉그라드는 차기 황제를 잃는 형국이 될 터….’
“도와주십시오, 황녀님…! 황녀님께 행여라도 어떤 식으로라도 해가 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것입니다…!”
레이네가 거듭 그녀의 대답을 청했다. 리토르나는 가만히 눈을 떴다. 움직임 없이 허공을 보는 리토르나의 기색을 살피는 레이네의 표정이 자못 진실했다.
“일단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타국의 왕위에 대한 문제인지라…, 저 역시 이 자리에서 곧바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공주께서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 ….”
수긍한다는 듯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물러서는 레이네게 리토르나 역시 본심을 한 번쯤 보여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보다….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 말씀하시지요.”
리토르나의 고요한 눈빛이 레이네에게 향했다. 레이네는 달리 술수를 부리거나 혹은 찔릴 것도 없는데 괜히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리토르나에게서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솟구치고 있었다. 레이네의 어깨를 움츠리게 만든 것은 바로 그 기운이었다.
“제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단지 잉그라드의 국경을 침탈하는 외적이 아닙니다. 미키네오스에서 론도 정벌을 통해 잉그라드의 국경을 넘든 그렇지 않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관심이 없습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론도 산맥의 자원은 우리 잉그라드에게도 큰 재산이긴 합니다만…. 힘으로만 밀어붙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론도 산맥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잉그라드의 군사력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이건 공주님과 폐하, 더불어 미키네오스 왕국을 모욕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현실이 그렇다는 거지요.”
“… ….”
“하지만 제가 염려하는 것은 귀국이나 보르틴의 연합군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다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제가 경계하는 것은 마도들이 하나로 뭉쳐 무차별적인 참극을 벌이는 일, 그것뿐입니다.”
레이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 여자가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잉그라드의 군사력으로 그런 걸 걱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지금…?’
의혹의 눈빛이 살짝 떠오르는 레이네에게 리토르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나온 김에 일단 할 수 있는 말까지는 다 할 생각이었다.
“믿기가 어려우신 모양이군요. 압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마도의 무리들은 저 론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건 그들은 나타날 수 있지요.”
“잘 보셨습니다. 전 믿기가 어렵습니다.”
“….”
“20년 전의 전쟁에서 보르틴 대륙이 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잉그라드의 황군이 구원군으로 배후를 압박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하나, 사실은 사실이지요. 사정이 이런데, 장차 황위를 이어받고 잉그라드의 모든 권한을 틀어쥐게 되실 황녀께서 마도의 무리들을 근심하시다니요.”
리토르나의 입에서 가늘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레이네는 진심을 털어 놓으라 재촉했다.
“말씀해보시지요. 황녀께서 진정으로 염려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 공주께서 진심을 털어놓았기에 저 역시 진심을 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마도의 무리들은 단지 베슬리 로이나르의 세력을 중심으로 규합한 일부에 불과합니다. 보르틴 대륙 뿐만아니라 잉그라드가 있는 앙카라시아 대륙의 사람이 살지 않는 곳곳에도 그만한 마도들은 수도 없이 무리지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로 규합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 하나로…. 뭉치다니요…?”
“론지니아 전투에서 봤던 그들은 순수한 살의와 적의만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파멸 그 자체인 것처럼요. 그런 자들의 구심점이 되는 이가 있다면….”
“… …. 그런 자가… 있습니까…?”
“… ….”
리토르나는 한율을 떠올렸다.
그는 확실히, 지금도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그의 그런 상황과 관계없이, 마하수카의 경지에 들어서면서 자신이 얻은 것들을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을 말해봐야 먹힐 리도 없을뿐더러, 자신에게 왕위 계승의 문제를 말하며 도와달라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미친 사람 취급 받기가 십상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확신을 갖고 말한다 해도, 아니 어쩌면 확신을 갖고 말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확실하게 미쳤다는 소릴 들을 공산이 더욱 커지는 꼴일 뿐이었다.
“아직은…모릅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 조짐이 있습니다.”
“…!!”
흔들림 없이 말하는 리토르나를 보며 레이네는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미치거나 아니면 정말 그렇거나…. 이 여자는 잉그라드의 황녀다. 거긴 황실에조차도 마법사가 있는 곳이니…, 게다가 마법사가 차고 넘치는 아슈람에서 10년이 넘게 있었으니…. 그런데 지금 내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
국경 침탈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 사실일까. 레이네의 귀에는 리토르나의 말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마도의 무리들에 대한 리토르나의 생각을 알고자 한 것이 애시당초 아니었으니, 레이네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왕위 계승에 쓸모가 있는가 아닌가, 그것뿐이었다.
“….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잉그라드는 국경의 침탈에 대해서는 몹시 민감한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마도의 무리들에 대한 말씀은 차치하고서라도, 미키네오스의 공주로서 그 말씀은 선뜻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 …. 그 점에 대해선….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레이네는 다시 그녀에게 집중했다.
“보르틴의 연합군이 론도 산맥에 있는 마도의 무리들을 모두 소탕해 준다면 우리 잉그라드로서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국경을 넘어오더라도 어느 정도는 묵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친서에 썼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만일 폐하께서 명예를 걸고 약조하셨던 것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
“정벌전을 승리로 장식하고도 잉그라드의 국경 내에서 군사를 물리지 않으신다면, 잉그라드는 그것을 명백한 침략 행위로 간주하고 필요한 모든 물리적 행사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 ….”
리토르나의 말은 단호했다. 레이네는, 황제가 환후 중인 이 때에 적지가 될 지도 모를 이곳에서 단 1천 5백의 군사만을 대동하고 있는 황녀의 태도치곤 너무나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잉그라드가 갖춘 군사력 중에서 황군은 비록 2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수와 위력에 대해 알고 있는 레이네로서는, 황녀의 자신감이 터무니없는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선전…. 포고로군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네는 사뭇 심각한 그 말과는 달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은 걸 알았다는 듯. 리토르나는 그녀의 표정에 납득이 되지 않았다.
“국왕 폐하께서 약조를 어기실 경우 그렇다는 거지요. 하지만 그보다…, 공주께서 지금 지으신 그 표정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렇지 않겠습니까…? 행여라도 폐하께서 무모한 행보를 하실 경우 미연에 방지하여 미키네오스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정보를 얻었으니…. 제가 당연히 다행스럽게 여길 수밖에요.”
“…그렇습니까….”
그렇다 해도 레이네의 표정은 미심쩍은 데가 많았다. 리토르나는 더 묻지 않고 그만 나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가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정말 유익했습니다. 리토르나는 대답 없이 목례를 해 보이곤 공주의 거소를 나서 객궁으로 향했다. 어쩐지 손해를 본 느낌이었다. 레이네의 마지막 미소가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이 나라의 왕녀와 국왕이 서로 척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득이 될 지 실이 될 지는 당장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바루나는 명백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본심을 내비쳤으나, 레이네는 진심으로 호소하는 듯하면서 아직도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리토르나는, 남의 나라라 해도 그와 같은 일들이 시민들의 안정과는 별도의 문제라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좀 의외였습니다, 공주님….”
“…. 뭐가…?”
“황녀 앞에서 그런 노골적인 표정을 지으셨던 것 말입니다.”
“아…. 하하하하…! 아마 좀 찔끔했을 거야.”
“…. 일부러 그러셨습니까…?”
“반은 진심이었지만…, 정말 마음대로 했다면 황녀를 꽉 끌어안기라도 했을걸?”
“….”
“생각해 봐. 황군이 없다고 해도 잉그라드의 군세는 엄청나. 황제가 병중이라고 해도 잉그라드는 잉그라드야. 그 군사와 연합군이 정면으로 맞붙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더라도, 누가 이기건 간에 양쪽 다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면 부왕이 신망을 잃게 되는 건 시간문제지.”
“… ….”
레이네의 그런 말들이 듣기에 불편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녀가 안쓰럽기도 했으나 나다니엘은 별반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레이네는 속이 좀 후련해진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하아…. 황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거야….”
나다니엘은 키득거리다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레이네의 곁으로 의자를 가져가 앉았다. 이따금씩 그녀는 그렇게 나다니엘을 곁에 앉혀 손을 잡은 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레이네의 작은 손을 잡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감히 내색할 수가 없었다.
“나 좀 봐….”
고개 숙인 그에게 레이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넌 끝까지 내 편이어야 해. 알지…?”
“…. 물론입니다. 공주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래야 하는 거…. 알지…?”
“…. 예.”
레이네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이곤 눈을 감았다. 나다니엘은 뭔가를 물어보려다 레이네가 그대로 잠들 것 같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에반더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비토…, 나오지 말고 들어. 오늘은 나다니엘하고 이대로 잘 거야. 그러니 내가 일어날 때까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알겠습니다.”
어디서 들려오는 소린지 비토는 어쨌든 대답을 했다. 한바탕 황녀와 하고 났더니 피곤했던 모양인지 레이네는 곧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나다니엘은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연합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사신단은 국경 지역에 이르러 한 차례 더 숙영을 해야 했다.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미키네오스 령으로 진입할 거리였다. 일찌감치 숙영지를 정한 터라, 막사를 치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도 해가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한율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물을 뜨기 위해 마차를 몰고 계곡으로 향했다.
“참…, 저 양반도 팔자 사납네. 하루아침에 보위부 자문에서 병사로 추락하더니 이젠 물당번이야.”
“무슨 꼴이야, 저게….”
병사들이 혀를 차며 한 마디씩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얼굴로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말을 몰았다. 세 명의 병사가 마차 뒤에 함께 타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미키네오스 령까지는…?”
“내일 한낮에 통과할 것 같습니다. 아마…. 이 고갯길 지나서 여기 이쯤에 국경 경비대가 있을 거예요.”
“음…. 내일은 군사들한테 옷차림이랑 그런 것 좀 다시 주의 줘.”
“예. 그러지요.”
“….”
루카스는 자신의 옆에 서서 몸을 숙인 채 지도를 살피는 나자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숙영지에 와 갑주를 벗고 있는 그녀의 군복 차림이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젠 별 생각을 다 하는군….’
혼자 피식 웃으며 떨쳐내려 했지만 다시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눈길이 나자르의 몸으로 향했다. 여자 치고 근육이 좀 도드라진 것을 제외하면 나자르의 몸은 훌륭한 편이었다. 출신이 북방이라 그런지 일단 큼직큼직한 생김생김에 군복으로 가려져 있던 젖가슴이 생각보다 컸다.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상의를 벗어던질 때 마치 눌려 있다가 튀어 나오기라도 하듯 불쑥 솟아오르던 젖가슴이 생각나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슬그머니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 뭘 그렇게 보세요?”
“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하하….”
“… ….”
나자르는 제 몸에 뭐가 묻었나 싶어 등을 펴고 몸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음…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씨익 웃었다. 뭐예요, 무슨 생각을 하신 건데요, 대체…? 루카스는 난처한 듯 손사래를 치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 별 거 아니라니까….”
“이제 보니 생각은 다른 데 가 계셨군요? 숙영지도 일찍 차렸겠다, 시간 많겠다, 할 건 별로 없겠다….”
“이, 이봐, 나자르 총사…!”
“왜요? 정곡을 콕~! 하고 찌르니까 몹시 당황스러우십니까?”
나자르가 가슴팍을 손가락을 쿡 찌르자 루카스는 포기한 듯 입맛을 쓰게 다시며 푹 웃었다. 명망 높으신 루카스 사령님께서 꽤 색정가란 게 알려지면 어떨까? 시락의 많은 여성분들께서 실망을 할까요…, 아니면 좋아들 할까요…? 이봐, 색정가라니…! 거 마, 말이 좀…. 나자르는 팔짱을 끼며 싱글싱글 웃었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던데요…?”
“뭐야…?”
짐짓 발끈한 척을 하며 쳐다본 루카스는 나자르의 입꼬리가 묘하게 실룩거리는 걸 보고는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아하…. 여유를 되찾은 안색으로 책상에 기대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연초를 껐다.
“그건 총사도 마찬가지던데, 뭘…. 설마 그것 때문에 반하거나 하진 않았을 테고….”
“솔직히, 섹스라면 반했지….”
“뭐가 그렇게 맘에 들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말만 하고 있을 건데…?”
“하나~, 둘… 어잇~차!!”
병사들 셋은 물이 가득 든 나무통을 들어 마차로 날랐고, 한율은 허리까지 잠기는 물에 들어가 빈 통에 물을 담아 그들이 들고 갈 바위 위에 얹었다. 한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는 추위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병사들은 저게 사람이야? 하는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그가 들을까 싶어 서로 눈짓만 하고 있었다. 장정 셋이 힘을 합쳐야 들 물통을 빈 나무상자 들듯 번쩍 번쩍 들어 올려 바위에 사뿐히 놓는 것은 이미 한율과 물당번을 했던 다른 병사들에게서 듣긴 했으나, 실제로 보니 오금이 저렸다. 이거 혼자 드는 사람 봤어…? 아니…. 그게 사람이냐? 일을 마친 한율은 남은 물통 두 개를 한꺼번에 양쪽에 끼고 마차로 돌아왔다. 병사들은 입을 떡 벌린 채 그가 물통들을 마차에 싣는 걸 보고만 있었고, 안 갈 심산이냐 묻는 한율의 말에 비로소 마차에 올랐다. 한율은 물에 젖은 옷을 말리거나 갈아입을 생각도 않은 채 마차에 올라 다시 담뱃대를 입에 물며 말을 몰아 주둔지로 향했다. 허이~! 헛…!
루카스의 군막 안에선 장작불 말고도 다른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자르는 바지를 내린 채 책상에 기댄 자세로 뒤에서부터 루카스의 몸을 받아들였다. 루카스가 상의를 걷어 올려 비어져 나온 나자르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자르의 젖은 음모를 쓰다듬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당신…. 역시….”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뭘… 좀 알아….”
나자르는 그가 허리를 밀어 넣을 때마다 엉덩이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로 파고들었고, 손가락이 민감한 곳을 자극할 때마다 뾰족한 소리를 냈다. 좀 참아봐, 병사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몰라, 그런 거…. 이제 보니…아주 막 나가네? 싫어…? 섹스할 때도…. 군례 올릴까…? 거친 숨소리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묻어 나왔다. 나자르는 아랫배 깊은 곳에서 남자의 몸이 요동치는 느낌에 집중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둘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루카스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쥐며 페이스를 올렸다. 퍽 퍽 하고 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자르는 책상에 이마를 기댄 채 신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입을 가렸다.
“당신…! 너무 좋아…! 흐읍…! 흡…!”
루카스는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나자르의 몸속에 정액을 분사했다. 나자르도 아랫배에 따끈한 느낌이 퍼져오자 그가 사정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아….”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뺀 루카스가 수건을 꺼내 제 것을 닦아내는 걸 보며 책상에 엎드린 채 그를 보고 있던 나자르가 배시시 웃었다.
“그 수건…, 제대로 빨기는 하는 거야…?”
“왜…, 입으로 닦기라도 해 주려고…?”
“원한다면….”
피식 웃으며 자신의 남근을 모두 닦아낸 루카스가 그녀에게 수건을 건넸다. 수건을 접어 의자에 놓고 그 위에 앉은 나자르는 머리카락부터 먼저 다듬어 다시 묶었다. 그러고 있으니까 꽤 요염한데…. 나 보기보다 몸매 좋아. 보기에도 좋아. 아주 입에 뱄네, 여자한테 그런 말…. 비웃듯 하는 나자르를 보며 다시 푹 하고 웃었다. 머리를 다 묶은 나자르는 엉덩이를 들어 수건으로 비경을 닦아내고는 바지를 입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어요, 민망하게…. 서로 다 본 사이에 뭘 그래. 그래도 그런 게 아니죠. 입을 비죽거리며 허리띠를 채우고 나자르는 그에게 군례를 올렸다.
“오늘도 멋지게 한 판 했습니다, 사령님.”
“푸하하하…!! 뭐 하는 거야, 지금.”
“우린 군인이니까요.”
그러고는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가려는 나자르에게 루카스는 한율을 불러 달라 말했다. 그 사람은 왜요…? 조금 언짢아진 듯한 얼굴로 묻는 나자르.
“술이나 한 잔 할까 하고. 그래도 매번 물당번도 하고, 고생하잖아, 날씨도 추운데…. 좀 불러다 줘.”
“알겠습니다. 연적인데…. 참 속도 좋으십니다.”
나자르를 통해 루카스의 호출을 받고 온 한율은 군례부터 올렸다. 음, 앉지. 그에게 자리를 권한 루카스는 이미 술잔과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린 터였다. 허리에 찬 환인검을 책상에 기대어 놓고, 한율은 그의 잔을 받았다.
“매일 물당번을 하느라 고생이 많아.”
“…. 아닙니다.”
“자네한테 이렇게 하대를 하는 게 편하진 않지만…. 그래도 기강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이해하고 있지…?”
“당연한 일입니다. 전 사령님의 지휘를 받는 병사입니다.”
“군인 다 됐네, 어느 새….”
잡담 몇 마디가 오가고 술잔이 한 차례 비워졌다. 한 잔 주게. 한율은 내밀어진 잔에 술을 따르고 제 잔에도 술을 채웠다. 아이린 아가씨 때문인가…? …? 뭐가 말입니까? 자네 그 표정 말이야. 루카스는 연초를 꺼내며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비린내가 날 듯한 웃음을 지었다.
“내내 표정이 안 좋기에 난 그런가 싶었지. 전에 관심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니…, 그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
“맞나보군….”
“…. 없진… 않습니다.”
“없진 않다…라….”
한율은 쿡쿡쿡 하며 웃는 루카스에게서 이전에 대하던 그와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분위기랄까. 애당초 그를 좋게 보거나 혹은 나쁘게 보거나, 그런 식의 판단을 하지는 않았었지만 지금 그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이전에 보여주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말없이 잔을 반 정도 비운 루카스가 그를 향해 눈을 들었다. 느낀 바대로 전에 볼 수 없었던 눈매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자네 별로 안 좋아해.”
“…. 그렇습니까.”
“론지니아 전투에서 무훈이 높다고는 해도…. 어차피 자네를 보위부 자문이란 자리에 앉혔던 핫산 대표님의 의중이 뭔지는 알지?”
“…. 알고 있습니다.”
“…. 꽤 섭섭했겠구먼….”
“…그건 아닙니다.”
“그래…?”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뭐, 자네가 그렇다면야…. 믿어야지 어쩌겠어. 안 그래…? 신경을 긁으려고 하는 말이 분명했으나 한율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 신경을 긁는 말도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하실 말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눈치가 좀 있군.”
연기가 한율의 시야를 가렸다가 다시 맑아졌다. 루카스가 본심을 털어놨다.
“자네랑 한 번 대련을 하고 싶어서.”
“….”
“난 기사야. 군인이라고….”
“….”
“론지니아 전투의 영웅이라…. 솔직히 말해서, 검을 쥐고 사는 사람으로서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붙어보고 싶은 거,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렇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다…? … …. 하하하, 교묘하게 속내를 드러내는군.”
“….”
루카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몸 주위에서 한율과는 또 다른 류의 투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율은 그런 것에 관심 없다는 듯 눈을 내려뜬 채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네 정도라면 알아챘겠지만…, 우리 집안은 대대로 마검사 집안이었어. 이스마르는 보르틴 대륙 마검사의 근원지였지…. 마법을 무예…, 특히 검술에 응용시켜서 위력을 배가시키는 마검사 말이지….”
“… ….”
“… 그 동안은 마법을 쓸 이유가 없었어. 바루나 같은 놈이 종교숙청이다 뭐다 하면서 그런 걸 모조리 대륙에서 쫓아내 버릴 기세였으니…, 멍청한 놈들. 이스마르고 바이마샤르고 그깟 놈 기세에 눌려 마법사들을 핍박했으니…. 하긴 센 놈보다 미친 놈이 더 무서운 법이긴 하니까 무리도 아니었지….”
한율은 괜스레 말을 이어 붙여가며 질질 끄는 것을 듣고 있기가 귀찮았다. 곧바로 정곡을 찌르고 들어갔다.
“저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누가 싸움을 하자고 했나…? 난 오래간만에 마법을 쓰면서까지 싸워볼 만한 상대가 있다고 해서 무인으로서 지금 자네에게 대련을 청하는 거야. 설마 그조차 마다할 생각인가…?”
“…. 대련이건 싸움이건…. 저는 지키기 위해서만 싸울 뿐입니다.”
“… ….”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루카스는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이 앉아만 있는 한율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검이 뽑혀 한율의 목에 바싹 겨누어졌다. 스릉~소리와 거의 동시에 검날이 한율의 목에 닿았다. 그래도 한율은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이래도 싸우지 않을 텐가…?”
검 끝에서 뭉실 뭉실 예리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목에 닿을락 말락했던 검날에서 투기가 나오자 피부가 미세하게 갈라지며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대로 자네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 ….”
한율은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루카스는 오기가 불끈 치솟았다. 검을 천천히 거두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그는 술잔을 비워내곤 코웃음을 쳤다. 그래, 싸울 계기가 필요하단 말이지…. 빙글빙글 짓는 웃음이 다소 야비한 인상을 풍겨내기 시작했다.
“그럼 이런 건 어떤가…? 자네가 날 한 번 꾸짖어 보는 건….”
“…. 그럴 이유라도 있습니까…?”
“있지. 있고 말고….”
“… ….”
“아이린 아가씨 말야. 몇 차례 나한테 모욕을 줬거든.”
“….”
루카스는 한율의 기색을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한 손은 이미 검에 가 있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말이 한율을 격동시킬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니.
“여태까지 난 품어보려고 한 번 눈에 들였던 계집을 그냥 놓아 본 적이 없어. 대부분은 제가 좋아서 나한테 안기기도 했고…, 저 밖에 있는 나자르 총사도 마찬가지지.”
“…. 그렇습니까….”
한율은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속으로 설마, 설마 하고 있었다. 나자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이 자가 아이린까지 그렇게 했을까 싶었다. 아니, 지금 말하는 내용과 떠나오기 전 보았던 아이린의 상태를 보건대,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한율의 눈썹이 루카스의 자극하는 말에 꿈틀거렸다.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자 루카스는 결정타를 날렸고, 한율은 망설임 없이 분노에 몸을 맡겼다.
“그래서 아이린 그 계집에게도 남자를 가르쳐 줬지. 처음이라 힘겹기야 했겠지만…, 아마 앞으로…!!”
루카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한율의 두툼한 손바닥이 그의 턱에 작렬했다. 뭐가 어떻게 날아와 자신을 쳤는지도 모른 루카스는 침상까지 부수며 나뒹굴었고, 한율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헉…! 억…!”
미리 마투기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한율의 손바닥에 제대로 맞은 루카스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턱이 어긋났는지 머리까지 지끈거렸고, 충격의 여파로 정신이 어지러웠다.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한율의 몸에서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투기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였구나….”
“큭…! 윽…!”
정신을 수습하며 돌아앉는 루카스의 전신을 한율의 목소리가 뒤흔들었다. 이… 이게 뭐야, 이런 마법도 있었나…? 식은땀을 흘리는 루카스의 전신이 저도 모르게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내가 떨고 있…어…?’
“그래서였어…, 네놈 때문이었어….”
한율의 몸이 쇠갈고리로 오장육부를 긁어내리듯 그의 내부를 무너뜨릴 것처럼 관통했다. 루카스는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온 몸의 힘이 풀리는 듯한 느낌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뭐…이런 놈이…!! 한율은 손을 꺾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어느새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으…으으…!!”
공포에 싸인 루카스가 비명처럼 신음했다. 그를 내려다보는 한율의 눈동자는 황적색에서 짙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섬뜩한 안광에 루카스는 소름이 끼쳐 올랐다. 죽음에 대한 예감이 등줄기를 사납게 훑어냈다. 저항할 수 없었다. 한율의 주먹은 극에 달한 분기로 떨렸고, 화마(火魔)처럼 휘몰아치는 투기가 주체할 수 없이 요동쳤다.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발로 땅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으나 물러날 곳은 없었다. 부질없는 그의 몸짓을 보는 한율의 눈빛이 점점 차갑고 싸늘한 열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그 기세로라면 틀림없이 루카스를 죽이고야 말 것이었다.
‘이럴…수가…!! 이런… 세상에 이런 놈이…!!’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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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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