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황제를 받쳐들고 조심스럽게 어가에 눕혔다. 환관들이 그를 들어올려 황제의 처소로 옮기기 시작했다. 황제는 얕고 가쁜 숨결 사이로 띄엄띄엄 말했다. 자네…, 자네… 고생일…세…. 말씀을 마오소서, 폐하…! 힘을 아끼셔야 하옵니다…! 자와카는 다급한 목소리로 황제를 말렸다. 황제의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올랐다.
이날 밤 황궁의 가장 깊은 곳, 황제의 처소에 가다르파의 수장 칼가마나가 들었다. 자와카가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계셨습니까, 자와카 수장….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을지 이미 예상한 듯, 그녀는 황제의 앞에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 예를 올렸다.
“왔는가….”
“…, 예, 폐하….”
“시작하게….”
칼가마나는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자와카는 칼가마나를 등지고 섰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칼가마나는 두 손을 모았다가 황제를 향해 펼쳐냈다. 손목 쪽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수천․수만 갈래로 갈라지며 황제를 감쌌고, 곧이어 다시 모이며 공중에 원형의 얀트라를 그렸다.
옴… … 샤크티 바하… …슈무르나… …칼가마나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주문을 외우자 상형문자들이 빛의 얀트라 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눈을 감은 채 그 빛을 향해 얼굴을 들고 있었다. 상형문자를 새기는 빛줄기들은 황제의 몸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황제의 몸이 빛줄기에 이끌려 약간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제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칼가마나의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그녀의 손은 주문을 외우면서 계속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었다. 돌아서 있는 자와카는 침중한 안색이었다. 끝나가는군…. 그는 법술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으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알 수 있었다.
빛으로 새겨진 상형문자들은 그대로 말리면서 권책이 되었고, 황제의 몸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 침대에 묻혔다. 견고하게 봉인된 권책은 칼가마나의 품으로 들어왔다. 황제의 숨이 이전보다 더욱 가늘어졌다.
“가까이….”
자와카는 황제의 희미한 말소리에 침상에 가까이 가 무릎을 꿇었다. 칼가마나는 어느새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황제의 임종이 목전에 있었다.
“말씀하소서, 폐하….”
“…, 리토르나…, 잉그라드를….”
“예, 폐하…. 전해드리겠나이다.”
“….”
황제는 힘겹게 웃었다.
“…, 내 죽음은…, 3년 후에…. 모든 것은…. 새…황제….”
“예, 폐하…. 그리 하겠나이다.”
칼가마나와 자와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비로소 황제는 눈을 감으며 편안하고 가느다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칼가마나는 울음을 삼키며 자와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마지막 밤입니다. 폐하를 편안히 침수 드시게 해야지요.”
“…. 그러세.”
그들은 황제의 마지막을 앞두고 조용히 침전에서 물러났다. 거소의 문이 닫히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황제의 숨소리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이옷 라마 아요디아 잉그라드, 이날 황실의 법도대로 홀로 숨을 거두니 이 때가 잉그라드 8백 33년, 재위 140년이 되는 해였다. 12세에 선황제의 후계자로 간택되어 가나파티에서 수업을 받고 18세에서 21세가 될 때까지 잉그라드의 국토를 순행 후 제국의 1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가 즉위할 당시의 잉그라드는 제후국 간의 영토 분쟁, 말하자면 내란이 적잖이 지속되어온 혼돈기였다. 게다가 각 제후들을 단속해야 할 황실은 오랜 시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그 영향력을 황도 주위에밖에 행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7백년에 가까운 긴 세월동안 앙카라시아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해 온 제국의 위기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가이옷은 황제에 즉위한 직후 10년간 제국의 안정을 위해 힘썼다. 제후들 간의 협상안을 직접 마련하여 내란을 종식시키고,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던 혼란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민생을 되살리기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제후들의 자치권 중에서도 외교와 무역에 관한 권리까지 추가로 보장하여, 상하 관계에 의한 중앙-지방 구조가 아닌 계약 관계에 의한 구조로 제국을 탈바꿈시켰다. 동시에 제후국의 여러 인재들을 중앙의 관리로 등용하여 그들의 충성심을 볼모를 통해 보장받음으로써 제후국의 이권과 황실의 권위를 동시에 확립하였다.
또한 새롭게 법을 제정하여 성문화하고 반포하였으며, 그를 엄격히 하고자 사법기관인 바크티를 설립하여 조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법 집행기관으로 확립시켰다. 거대한 제국의 내치를 다지기 위하여 브라훔으로 한정되어 있던 조정을 작금의 여섯 편제로 분화하여 전문성을 확보하고, 더불어 조정의 전횡을 견제하고자 감찰기관을 독립시켰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제도와 정책을 통해 국가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제국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황제로 평가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늘 덕망을 베풀며 어떤 반대라도 수용하고 거기서 협상안을 찾아내는 뛰어난 지도력을 보였기에, 잉그라드의 역대 16명의 황제들 중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고 신민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아왔으며, 실제로 그의 재위기간에 이르러 잉그라드는 최고의 번성기를 구가하였다. 말년에 병을 얻어 1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이날 밤 숨을 거두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 161세였다.
날이 밝을 무렵, 황제의 유지를 받아든 칼가마나와 자와카는 황궁 북문 근처의 전각에서 붉어지는 동쪽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제 가셔야겠군요. 음…. 자와카는 허리에 찬 검자루 끝을 만지작거렸다.
“자네도 가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이곳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불경을 저지른 자들을 잡아들이는 거야 내가 해도 되지 않는가. 폐하의 곁에는 나보다는 그래도 자네가….”
그녀는 자와카의 말을 막으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와카 수장께선 그런 일에는 소질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칼가마나는 빙긋 웃으며 자와카를 민망하게 했다. 으음…. 그녀는 품에 갈무리했던 권책을 꺼내어 자와카에게 건넸다. 폐하께…. 말없이 받아드는 자와카의 입에서 문득 탄식과 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너무 안타까워 마십시오, 자와카 수장….”
“어떻게 안타깝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무도한 자들의 술책에 말려들어 황위 계승의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시게 되었는데….”
자와카의 음성에 분기가 서려있었다.
“20명의 법사들이 목숨으로 폐하의 승계의식을 받들 것입니다.”
“…. 그래, 그렇겠지….”
“이제 가시지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정말 자네 혼자 괜찮겠는가…?”
“트란드라를 움직여주신 것만 해도 제가 민망합니다. 이제 윤곽은 드러났으니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 ….”
자와카의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날까지 황실의 안위는 자네의 책임일세. 예…. 가이옷 선제의 붕어가 다시 생각나는지, 칼가마나는 대답하면서 조금 울먹거렸다. 자와카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는 말에 올랐다. 대기하고 있던 20인의 가다르파 법사들이 말고삐를 잡았다.
“또 보세.”
“예.”
아슈람을 떠나올 때 타고 왔던 그 거대한 말은 자와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땅을 박찼다. 뒤에 있던 법사들이 힘차게 말의 배를 걷어찼고, 그들은 순식간에 북문을 빠져나와 황도의 북쪽 성문을 향했다. 말을 달려가던 자와카는 등에 단 창을 들어 성문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창이 돌로 만든 견고한 성벽에 콱 박히며 창에 매달려 있던 깃발이 펄럭거렸다. 성문을 지키던 황도방위군의 병사들은 깃발에 새겨진 문장을 확인하곤 얼른 문을 열었다.
‘트란드라 제 1전대는 나를 따르라. 나머지는 이곳에서 새 황제폐하의 명을 대기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어디에선가 속속 금빛 전포차림의 병사들이 말을 타고 나타나 그를 따라 북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1천의 특수전 부대가 성문을 통과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론도 산맥을 건너 미키네오스에 계시는 황제폐하께로 간다. 국경을 넘은 뒤 전 부대는 잠행한다.’
땅을 진동하는 1천기의 말발굽 소리가 황도로부터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레이네는 오래간만에 부왕과 둘이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들 부녀가 마주할 땐 언제나 그랬듯 적막처럼 조용한 가운데 말없이 식기를 움직이는 소리만이 실내를 감돌았다.
‘하긴 식사 중에 말 꺼냈다간 급체를 하겠지, 당신이나 나나….’
“… ….”
시중을 드는 시녀들 또한 이 얼음장 같은 부녀간의 분위기에 -늘 그러듯-긴장한 얼굴들로 몸가짐을 조심히 했다.
식사가 끝나고 시녀들이 차를 내왔다. 찻잔이 다 비워질 때까지도 그들 부녀는 서로 말이 없었다. 바루나는 아무 내색도 없이 눈을 내려뜬 채 차를 마시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많이…, 노련해졌군.’
이윽고 찻잔까지 치워진 뒤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 ….”
조심스럽게 닫은 문소리가 정적에 싸인 실내를 가득히 울렸다가 천천히 사그라졌다. 레이네는 차분하게 부왕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 ….”
“…. 하백은…, 어떠냐.”
“… ….”
부왕답다고 생각했다.
“…, 아직은 좀…, 그렇습니다.”
“… …. 재미는 있느냐…?”
“…. 길들이는 것이 수월하진 않습니다.”
“음…. 좀 곧기는 하지….”
그럴 거라는 듯 바루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감사드립니다. 근자에는 정보 공유를 완전하게 해 주시더군요.”
“… ….”
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레이네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두 부녀의 웃음에는 여전히 냉기가 흘렀다.
“병무대신에게는 좀 짓궂으셨던 듯합니다.”
“… ….”
“제가 아는 한 폐하께선 사리분별이 없는 분이 아니신데…, 앙굴리마라 이야기를 꺼내서 병무대신을 제게 보내시다니요….”
“…. 이야기는 들었다. 한 차례 기를 꺾어놨다고….”
“바라셨던 바 아니었습니까?”
“…. 뜻을 모아보라는 것이었지, 병무대신을 희롱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희롱이라니요.”
“… ….”
바루나는 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레이네가 지적한 대로, 바루나가 앞서 앙굴리마라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은 레이네로 하여금 병무대신을 얻게끔 하고자 하는 일종의 고육책이었다. 답잖게 궁색한 방법을 쓴 부왕을, 레이네는 능청을 떨며 간접적으로 비웃는 것이었다. 한 차례 그를 민망하게 했다 싶자 이번엔 직접적으로 말을 꺼냈다.
“말하자면…, 하백을 길들이는 건 연습이고, 병무대신은 실전이다. 이런 겁니까, 폐하…?”
“말을 가려서 하거라.”
“달라질 것은 없지 않습니까.”
“… ….”
바루나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미 그런다고 해서 들을만한 나이도, 그럴 시기도 지나 있었다. 그는 본론을 이야기했다.
“정벌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진전이 되었다. 준비에 구체적인 역할 분담도 슬슬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스비아타라고 하던가요…? 신의 기사 말입니다.”
“음…. 그렇게 되었다.”
“애들 많이 쓰십니다. 하기야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니, 단순히 병략만 가지고서야 무리이겠지요.”
“…. 그 때문에 오늘 널 보자고 한 게다.”
“… ….”
“… ….”
바루나는 지그시 딸을 쳐다보았다. 마치 ‘내 속내를 맞춰보라’는 듯. 레이네는 뭔가 관찰이라도 하듯 제 아비를 요모조모로 뜯어보았다.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이 노인네….
“지금까지 말씀만으로는 제게서 뭘 원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요. 말씀을 해보시지요. 폐하께서 그래도 미셀 늙은이까지 깔끔하게 처리해주셨는데…,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긍정적으로…,”
“네 정보원들을 좀 빌려야겠다.”
“…! … ….”
“네가 정확하게 지적했다시피 이 정벌은 절대 성공해야만 한다.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적을 안다….”
“지금 정벌이 결정된다고 해도 모병과 군 체제 개편에 연합군 소집까지 하면 앞으로 1년은 걸릴 일이다. 그 동안 론도 산맥에 대한 상세하고도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겠구나.”
“… ….”
바루나가 설명하는 동안 레이네는 그의 표정과 안색을 살폈다. 마치 독심술이라도 하듯 하는 딸의 눈길을 피해 바루나는 눈을 감았다. 레이네는 피식 소리가 나도록 코웃음을 내뱉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르나 산맥에 대한 상세하고도 정확한 정보가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뭐…. 그것도 있으면 더 좋고….”
바루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스르나 산맥, 대륙을 가로지르는 론도 산맥의 지류로 그 규모는 장대했지만 산세 자체는 험하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대였다. 주로 울리프를 비롯한 독립영주들이 그 산에 터전을 잡고 있었고, 멀리는 이스마르 제국 영토의 일부에까지 그 끄트머리가 걸쳐져 있었다. 말은 론도 산맥에 대한 정보라고 했지만 바루나의 본심은 연합군 내 다른 세력들에 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레이네는 그렇게 판단했다.
“물론 그러셔야겠지요. 그런데, …1년씩이나 빌려달란 말씀이십니까…?”
“… ….”
아무래도 좀 무리였나…. 바루나는 조금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레이네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바루나는 품에서 두루마리로 말린 문서를 한 뭉치 꺼내놓았다.
“1년은 긴 기간이지….”
“…. 그건 뭡니까, 폐하…?”
“…, 대여료다.”
“…!”
레이네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바루나는 이야기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레이네는 석상처럼 경직된 채 그 문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빛이 붉어지고 악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바루나는 그에 신경 쓰지 않는 듯 제 할 말을 마저 하고는 응접실을 먼저 나섰다.
“그것과, 앞으로 1년간 최근 그래왔던 것처럼 아비가 얻는 모든 정보는 너에게도 갈 것이다. 그만하면 나쁜 조건은 아닐 게다.”
그의 말이 레이네의 가슴을 후벼 팠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마치 온몸을 후려치듯 그녀의 내부를 두들겼다. 정적 속에서 레이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분기로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아랫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깨문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비…, 아비라고….”
레이네의 꽉 쥔 주먹이 꽝 소리가 나도록 탁자를 내리쳤다. 눈물이 방울져 내려 턱에 맺히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조금씩 올라갔다. 핏발이 선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주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은 늘…, 늘 그래왔으니까…. … ….
“으음….”
“조금만 참으십시오. 다 됐습니다.”
레이네가 흠칫 몸을 떨자 비토는 무감각한 어조로 한마디 툭 던지며 붕대를 꺼내 꼼꼼하게 감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하백은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나 싶어 남몰래 그녀를 한 차례 흘겨보았다.
‘손가락뼈가 어긋난 걸 맞추는데 비명 한 번 안 지르다니….’
“비토.”
“예.”
“앞으로 1년간은 국왕의 명령에 따르도록 해. 나에게 하듯이 그렇게.”
“…. 저를 포함한 전부입니까?”
“…. 그렇게 해.”
“…. 알겠습니다.”
“…, 때 되면 말해줄게.”
“…. 그러지요.”
묻고, 대답하는 동안 비토는 레이네를 쳐다보지도 않았으나 그녀는 그런 무례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이번엔 하백을 불렀다.
“그간 국왕에게서 정보 실어 나르면서 뭐 생각한 건 없어…?”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 ….”
눈을 감고 있던 레이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하백은 아무 동요 없이 공손히 서 있기만 했다. 이놈 정말 멍청한 거야 아니면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레이네는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정보와 사실관계의 차이가 뭔지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허….”
딱 잘라 대답한다. 그는 대단히 완강했다.
“다음에 물어볼 때까지 알아와.”
“… ….”
“…. 안 들려…?”
“…. 알겠습니다.”
“… …. 나가봐.”
하백이 나가는 문이 닫히자 비토는 붕대 끝을 잘라내며 치료가 끝났음을 알렸다. 레이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짓으로 가보라 하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만 주무시겠습니까…?”
그녀는 손을 들어 이마에 얹었다. 나다니엘은 시녀들을 향해 눈짓을 했고, 방 안에는 곧 나다니엘과 레이네 둘만이 남았다. 그는 부왕으로부터 레이네가 받아온 문서를 한쪽에 정리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다니엘….”
“…? 예, 공주님.”
“…. 별로…, 말이야.”
“… ….”
“….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어.”
“….”
그는 다시 침대 옆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레이네는 손으로 이마와 눈을 가린 채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그럴 필요도 없고….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손이 아프다…. 그 말을 끝으로 레이네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속으로 울고 계시겠지…. 나다니엘은 그렇게 짐작하며 그저 앉아만 있었다. 레이네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손을 내렸다.
“발…. 해줄래? …오래간만에.”
“…. 예.”
그가 침대에 올라가 발 맛사지를 해주는 동안 레이네는 조금씩 잠들기 시작했다. 완전히 잠들기 전에 물었다.
“그…, 문서는 무슨 내용이야…?”
“….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
“… ….”
푹 하고 웃은 그녀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일 보지….”
정벌을 위한 회의는 윤곽이 뚜렷해지면서 탄력을 받아 갔다. 론도 산맥에 대한 장악력이 그 목표로 정해지면서, 각국이 부담해야 할 군자금이나 군사의 규모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실하게 해결이 나지 않은 잉그라드와의 분쟁 문제로 인해 몇몇 참석자들은 적극적인 입장을 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잉그라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바이마샤르는 더욱 그러했다.
“바슈미르 대표께선 공연한 염려를 하시는 것이 아닐는지….”
“….”
펠리그로니에프의 말에 핫산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느라 잠시 지체를 해야 했다. 바루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가운데 그는 잉그라드와의 마찰을 우려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일단, 이 사람이 염려하는 것이 잉그라드 제국과 많은 교역을 하는 바이마샤르의 입장과 무관하지 않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님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으나, 잉그라드의 국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입니다.”
“야만국에 대한 바슈미르 대표의 평가가 다소 지나친 듯합니다.”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고 들어오는 펠리그로니에프, 그러나 핫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야만국이건 뭐건 간에, 우리들 중 어느 하나도 정면으로 잉그라드와 맞붙을 수 있는 국가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자그마치 8백년입니다. 대영주께서 야만국이라고 부르는 그 잉그라드의 역사는 8백년이 넘는다 이 말씀입니다. 그 오랜 기간을 잉그라드는 저 거대한 대륙의 패자로 군림해왔습니다. 게다가 작금의 황제에 이르러 잉그라드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건 알고 계셨습니까?
“그런 야만인들의 사정을 내가 알아서 무엇 하겠소…?”
“자자, 일단은 바슈미르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십시다. 야만인들이라곤 해도 국력 자체가 대단한 것은 사실이오. 바이마샤르만큼 다른 세상의 소식에 밝은 곳도 없습니다. 대영주께선 잠시 자중해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연신 헛기침을 하며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펠리그로니에프를 보다 못한 바루나가 나서서 말렸다. 핫산은 국왕을 향해 고맙다는 듯 눈인사를 한 후 다시 좌중을 향했다.
“지금의 황제는 물론 잉그라드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보다는 내치에 힘을 썼지요. 그가 재위하는 동안 잉그라드가 타국과 전쟁을 벌인 횟수는 여섯 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여섯 번 모두가 타국의 국경 침범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입니다.”
“음….”
“다시 말하면 지금의 황제는 자국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선 결코 자비가 없는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바루나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묻자 핫산은 규모에 대한 재설정을 제안했다. 이미 정해진 정벌 규모에 대해 그가 이론을 제기하자 참석한 이들 모두가 당황한 낯빛으로 서로 마주보며 술렁거렸다. 펠리그로니에프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이미 정해진 정벌의 규모이올시다. 대표께선 어째서 이제 와 그런 말씀으로 성전(聖戰)에 찬물을 끼얹으려 하시는지 모르겠구려.”
“지금의 잉그라드 황제는 황녀 하나의 안위를 위해 백성의 안위를 다소나마 포기하는 그런 자가 아니란 말이올시다…! 대체 뭘 들으신 거요, 대영주께선…!”
“진정하시지요, 바슈미르 대표.”
다소 언성이 높아지자 바루나가 나섰다. 그는 핫산의 우려를 이해한다며 아래쪽에 자리해 있던 정무대신에게 눈짓을 했다. 라크라오스는 목례로 답하며 일어났다.
“바슈미르 대표께서 우려하시는 바에 공감이 갑니다. 하오나 잉그라드가 아무리 강국이라 하더라도, 대표께서 우려하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전체적인 국력으로 보아 우리가 열세인 것은 분명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는 핫산을 향해 있던 라크라오스의 눈길이 모두에게로 돌려졌다. 한 차례 그들을 돌아보고서 그는 핫산이 말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만일 잉그라드가 국경 침탈을 구실로 하여 군사를 보낸다 하더라도, 일단은 전선이 넓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과 우리 연합군이 대치하게 될 곳은 결국 론도 산맥의 어딘가가 될 것입니다. 론도 산맥이 어디입니까? 우리가 정벌코자 하는 무도한 마도의 무리들이 곳곳에 숨어 사는 곳입니다. 그 지형과 산세가 험악하여 도저히 사람이 다닐 수가 없다는 곳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강성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들의 진격로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군사를 보내는 것은 시기상으로 이미 우리가 론도 산맥에 들어가 장악한 후의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총력을 다해 몰려온다 하더라도, 론도 산맥 자체가 이미 우리의 요새가 된 이후의 일입니다. 온갖 협곡과 험난한 지형이 진을 치고 있는 천혜의 요새 말입니다.”
라크라오스의 긴 설명을 들은 좌중들은 오…, 혹은 아하…, 따위의 소리를 내며 감탄하는 얼굴들로 거기에 동감하였다. 이론을 제기했던 핫산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설명에 일리가 있다며 경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역시…, 트레제게 후작이 미키네오스 내에선 군신(軍神)으로 추앙을 받는다더니…. 펠리그로니에프는 박수를 쳐가면서까지 호들갑을 떨었다.
“대단합니다. 대단하오! 역시 트레제게 경은 군사의 달인이구려…!!”
발덴, 험멜, 칼링거 등의 영주들, 그러니까 펠리그로니에프의 영향권 하에 있는 영주들은 덩달아 박수치며 라크라오스의 견해에 열광적으로 찬동하고 나섰다. 이쯤 되고 나니 핫산으로서도 더 이상 이론을 제기하기가 어려웠다.
==============================<각주>=========================================
- 가다르파 : 황실 직속의 법술사 부대. 법사와 술사로 구성되며 법사는 경호와 수비, 술사는 전투에 투입된다.
- 얀트라 : 잉그라드에서 법사/법술사들이 쓰는 기하학적 형태의 도해, 즉 그림.
- 트란드라 : 황실의 직속부대 중 하나.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만샤르차크와 나바스암바라, 법술부대 가다르파, 그리고 트란드라. 트란드라는 황제의 밀명을 수행하는 특수전 부대. 각 1천의 20개 전대로 구성되어 있다. 만샤르차크는 각 1만여의 20개 전대, 나바스암바라는 1만의 30개 전대, 가다르파는 각 3천의 15개 전대로 구성되어 있다. 황군의 가장 핵심적인 부대들이며 총병력은 60만에 이른다. 이외 황궁수비대인 기샤르바트, 황실근위사령부인 바슈탄타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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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부에 가깝게 계속 연재를 할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어느새 그렇게 되었네요.
지난주 글에서 어느 분이 아주 적절하게 지적해주신 것처럼, 서술 방식이 다소
혼란스러운 데가 있습니다. 그걸 지금 좀 다듬고 있는데... 쉽지가 않군요, 역시. ㅎ
이날 밤 황궁의 가장 깊은 곳, 황제의 처소에 가다르파의 수장 칼가마나가 들었다. 자와카가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계셨습니까, 자와카 수장….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을지 이미 예상한 듯, 그녀는 황제의 앞에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 예를 올렸다.
“왔는가….”
“…, 예, 폐하….”
“시작하게….”
칼가마나는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자와카는 칼가마나를 등지고 섰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칼가마나는 두 손을 모았다가 황제를 향해 펼쳐냈다. 손목 쪽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수천․수만 갈래로 갈라지며 황제를 감쌌고, 곧이어 다시 모이며 공중에 원형의 얀트라를 그렸다.
옴… … 샤크티 바하… …슈무르나… …칼가마나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주문을 외우자 상형문자들이 빛의 얀트라 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눈을 감은 채 그 빛을 향해 얼굴을 들고 있었다. 상형문자를 새기는 빛줄기들은 황제의 몸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황제의 몸이 빛줄기에 이끌려 약간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제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칼가마나의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그녀의 손은 주문을 외우면서 계속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었다. 돌아서 있는 자와카는 침중한 안색이었다. 끝나가는군…. 그는 법술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으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알 수 있었다.
빛으로 새겨진 상형문자들은 그대로 말리면서 권책이 되었고, 황제의 몸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 침대에 묻혔다. 견고하게 봉인된 권책은 칼가마나의 품으로 들어왔다. 황제의 숨이 이전보다 더욱 가늘어졌다.
“가까이….”
자와카는 황제의 희미한 말소리에 침상에 가까이 가 무릎을 꿇었다. 칼가마나는 어느새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황제의 임종이 목전에 있었다.
“말씀하소서, 폐하….”
“…, 리토르나…, 잉그라드를….”
“예, 폐하…. 전해드리겠나이다.”
“….”
황제는 힘겹게 웃었다.
“…, 내 죽음은…, 3년 후에…. 모든 것은…. 새…황제….”
“예, 폐하…. 그리 하겠나이다.”
칼가마나와 자와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비로소 황제는 눈을 감으며 편안하고 가느다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칼가마나는 울음을 삼키며 자와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마지막 밤입니다. 폐하를 편안히 침수 드시게 해야지요.”
“…. 그러세.”
그들은 황제의 마지막을 앞두고 조용히 침전에서 물러났다. 거소의 문이 닫히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황제의 숨소리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이옷 라마 아요디아 잉그라드, 이날 황실의 법도대로 홀로 숨을 거두니 이 때가 잉그라드 8백 33년, 재위 140년이 되는 해였다. 12세에 선황제의 후계자로 간택되어 가나파티에서 수업을 받고 18세에서 21세가 될 때까지 잉그라드의 국토를 순행 후 제국의 1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가 즉위할 당시의 잉그라드는 제후국 간의 영토 분쟁, 말하자면 내란이 적잖이 지속되어온 혼돈기였다. 게다가 각 제후들을 단속해야 할 황실은 오랜 시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그 영향력을 황도 주위에밖에 행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7백년에 가까운 긴 세월동안 앙카라시아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해 온 제국의 위기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가이옷은 황제에 즉위한 직후 10년간 제국의 안정을 위해 힘썼다. 제후들 간의 협상안을 직접 마련하여 내란을 종식시키고,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던 혼란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민생을 되살리기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제후들의 자치권 중에서도 외교와 무역에 관한 권리까지 추가로 보장하여, 상하 관계에 의한 중앙-지방 구조가 아닌 계약 관계에 의한 구조로 제국을 탈바꿈시켰다. 동시에 제후국의 여러 인재들을 중앙의 관리로 등용하여 그들의 충성심을 볼모를 통해 보장받음으로써 제후국의 이권과 황실의 권위를 동시에 확립하였다.
또한 새롭게 법을 제정하여 성문화하고 반포하였으며, 그를 엄격히 하고자 사법기관인 바크티를 설립하여 조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법 집행기관으로 확립시켰다. 거대한 제국의 내치를 다지기 위하여 브라훔으로 한정되어 있던 조정을 작금의 여섯 편제로 분화하여 전문성을 확보하고, 더불어 조정의 전횡을 견제하고자 감찰기관을 독립시켰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제도와 정책을 통해 국가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제국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황제로 평가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늘 덕망을 베풀며 어떤 반대라도 수용하고 거기서 협상안을 찾아내는 뛰어난 지도력을 보였기에, 잉그라드의 역대 16명의 황제들 중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고 신민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아왔으며, 실제로 그의 재위기간에 이르러 잉그라드는 최고의 번성기를 구가하였다. 말년에 병을 얻어 1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이날 밤 숨을 거두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 161세였다.
날이 밝을 무렵, 황제의 유지를 받아든 칼가마나와 자와카는 황궁 북문 근처의 전각에서 붉어지는 동쪽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제 가셔야겠군요. 음…. 자와카는 허리에 찬 검자루 끝을 만지작거렸다.
“자네도 가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이곳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불경을 저지른 자들을 잡아들이는 거야 내가 해도 되지 않는가. 폐하의 곁에는 나보다는 그래도 자네가….”
그녀는 자와카의 말을 막으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와카 수장께선 그런 일에는 소질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칼가마나는 빙긋 웃으며 자와카를 민망하게 했다. 으음…. 그녀는 품에 갈무리했던 권책을 꺼내어 자와카에게 건넸다. 폐하께…. 말없이 받아드는 자와카의 입에서 문득 탄식과 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너무 안타까워 마십시오, 자와카 수장….”
“어떻게 안타깝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무도한 자들의 술책에 말려들어 황위 계승의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시게 되었는데….”
자와카의 음성에 분기가 서려있었다.
“20명의 법사들이 목숨으로 폐하의 승계의식을 받들 것입니다.”
“…. 그래, 그렇겠지….”
“이제 가시지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정말 자네 혼자 괜찮겠는가…?”
“트란드라를 움직여주신 것만 해도 제가 민망합니다. 이제 윤곽은 드러났으니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 ….”
자와카의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날까지 황실의 안위는 자네의 책임일세. 예…. 가이옷 선제의 붕어가 다시 생각나는지, 칼가마나는 대답하면서 조금 울먹거렸다. 자와카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는 말에 올랐다. 대기하고 있던 20인의 가다르파 법사들이 말고삐를 잡았다.
“또 보세.”
“예.”
아슈람을 떠나올 때 타고 왔던 그 거대한 말은 자와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땅을 박찼다. 뒤에 있던 법사들이 힘차게 말의 배를 걷어찼고, 그들은 순식간에 북문을 빠져나와 황도의 북쪽 성문을 향했다. 말을 달려가던 자와카는 등에 단 창을 들어 성문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창이 돌로 만든 견고한 성벽에 콱 박히며 창에 매달려 있던 깃발이 펄럭거렸다. 성문을 지키던 황도방위군의 병사들은 깃발에 새겨진 문장을 확인하곤 얼른 문을 열었다.
‘트란드라 제 1전대는 나를 따르라. 나머지는 이곳에서 새 황제폐하의 명을 대기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어디에선가 속속 금빛 전포차림의 병사들이 말을 타고 나타나 그를 따라 북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1천의 특수전 부대가 성문을 통과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론도 산맥을 건너 미키네오스에 계시는 황제폐하께로 간다. 국경을 넘은 뒤 전 부대는 잠행한다.’
땅을 진동하는 1천기의 말발굽 소리가 황도로부터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레이네는 오래간만에 부왕과 둘이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들 부녀가 마주할 땐 언제나 그랬듯 적막처럼 조용한 가운데 말없이 식기를 움직이는 소리만이 실내를 감돌았다.
‘하긴 식사 중에 말 꺼냈다간 급체를 하겠지, 당신이나 나나….’
“… ….”
시중을 드는 시녀들 또한 이 얼음장 같은 부녀간의 분위기에 -늘 그러듯-긴장한 얼굴들로 몸가짐을 조심히 했다.
식사가 끝나고 시녀들이 차를 내왔다. 찻잔이 다 비워질 때까지도 그들 부녀는 서로 말이 없었다. 바루나는 아무 내색도 없이 눈을 내려뜬 채 차를 마시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많이…, 노련해졌군.’
이윽고 찻잔까지 치워진 뒤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 ….”
조심스럽게 닫은 문소리가 정적에 싸인 실내를 가득히 울렸다가 천천히 사그라졌다. 레이네는 차분하게 부왕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 ….”
“…. 하백은…, 어떠냐.”
“… ….”
부왕답다고 생각했다.
“…, 아직은 좀…, 그렇습니다.”
“… …. 재미는 있느냐…?”
“…. 길들이는 것이 수월하진 않습니다.”
“음…. 좀 곧기는 하지….”
그럴 거라는 듯 바루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감사드립니다. 근자에는 정보 공유를 완전하게 해 주시더군요.”
“… ….”
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레이네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두 부녀의 웃음에는 여전히 냉기가 흘렀다.
“병무대신에게는 좀 짓궂으셨던 듯합니다.”
“… ….”
“제가 아는 한 폐하께선 사리분별이 없는 분이 아니신데…, 앙굴리마라 이야기를 꺼내서 병무대신을 제게 보내시다니요….”
“…. 이야기는 들었다. 한 차례 기를 꺾어놨다고….”
“바라셨던 바 아니었습니까?”
“…. 뜻을 모아보라는 것이었지, 병무대신을 희롱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희롱이라니요.”
“… ….”
바루나는 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레이네가 지적한 대로, 바루나가 앞서 앙굴리마라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은 레이네로 하여금 병무대신을 얻게끔 하고자 하는 일종의 고육책이었다. 답잖게 궁색한 방법을 쓴 부왕을, 레이네는 능청을 떨며 간접적으로 비웃는 것이었다. 한 차례 그를 민망하게 했다 싶자 이번엔 직접적으로 말을 꺼냈다.
“말하자면…, 하백을 길들이는 건 연습이고, 병무대신은 실전이다. 이런 겁니까, 폐하…?”
“말을 가려서 하거라.”
“달라질 것은 없지 않습니까.”
“… ….”
바루나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미 그런다고 해서 들을만한 나이도, 그럴 시기도 지나 있었다. 그는 본론을 이야기했다.
“정벌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진전이 되었다. 준비에 구체적인 역할 분담도 슬슬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스비아타라고 하던가요…? 신의 기사 말입니다.”
“음…. 그렇게 되었다.”
“애들 많이 쓰십니다. 하기야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니, 단순히 병략만 가지고서야 무리이겠지요.”
“…. 그 때문에 오늘 널 보자고 한 게다.”
“… ….”
“… ….”
바루나는 지그시 딸을 쳐다보았다. 마치 ‘내 속내를 맞춰보라’는 듯. 레이네는 뭔가 관찰이라도 하듯 제 아비를 요모조모로 뜯어보았다.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이 노인네….
“지금까지 말씀만으로는 제게서 뭘 원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요. 말씀을 해보시지요. 폐하께서 그래도 미셀 늙은이까지 깔끔하게 처리해주셨는데…,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긍정적으로…,”
“네 정보원들을 좀 빌려야겠다.”
“…! … ….”
“네가 정확하게 지적했다시피 이 정벌은 절대 성공해야만 한다.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적을 안다….”
“지금 정벌이 결정된다고 해도 모병과 군 체제 개편에 연합군 소집까지 하면 앞으로 1년은 걸릴 일이다. 그 동안 론도 산맥에 대한 상세하고도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겠구나.”
“… ….”
바루나가 설명하는 동안 레이네는 그의 표정과 안색을 살폈다. 마치 독심술이라도 하듯 하는 딸의 눈길을 피해 바루나는 눈을 감았다. 레이네는 피식 소리가 나도록 코웃음을 내뱉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르나 산맥에 대한 상세하고도 정확한 정보가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뭐…. 그것도 있으면 더 좋고….”
바루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스르나 산맥, 대륙을 가로지르는 론도 산맥의 지류로 그 규모는 장대했지만 산세 자체는 험하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대였다. 주로 울리프를 비롯한 독립영주들이 그 산에 터전을 잡고 있었고, 멀리는 이스마르 제국 영토의 일부에까지 그 끄트머리가 걸쳐져 있었다. 말은 론도 산맥에 대한 정보라고 했지만 바루나의 본심은 연합군 내 다른 세력들에 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레이네는 그렇게 판단했다.
“물론 그러셔야겠지요. 그런데, …1년씩이나 빌려달란 말씀이십니까…?”
“… ….”
아무래도 좀 무리였나…. 바루나는 조금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레이네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바루나는 품에서 두루마리로 말린 문서를 한 뭉치 꺼내놓았다.
“1년은 긴 기간이지….”
“…. 그건 뭡니까, 폐하…?”
“…, 대여료다.”
“…!”
레이네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바루나는 이야기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레이네는 석상처럼 경직된 채 그 문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빛이 붉어지고 악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바루나는 그에 신경 쓰지 않는 듯 제 할 말을 마저 하고는 응접실을 먼저 나섰다.
“그것과, 앞으로 1년간 최근 그래왔던 것처럼 아비가 얻는 모든 정보는 너에게도 갈 것이다. 그만하면 나쁜 조건은 아닐 게다.”
그의 말이 레이네의 가슴을 후벼 팠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마치 온몸을 후려치듯 그녀의 내부를 두들겼다. 정적 속에서 레이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분기로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아랫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깨문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비…, 아비라고….”
레이네의 꽉 쥔 주먹이 꽝 소리가 나도록 탁자를 내리쳤다. 눈물이 방울져 내려 턱에 맺히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조금씩 올라갔다. 핏발이 선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주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은 늘…, 늘 그래왔으니까…. … ….
“으음….”
“조금만 참으십시오. 다 됐습니다.”
레이네가 흠칫 몸을 떨자 비토는 무감각한 어조로 한마디 툭 던지며 붕대를 꺼내 꼼꼼하게 감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하백은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나 싶어 남몰래 그녀를 한 차례 흘겨보았다.
‘손가락뼈가 어긋난 걸 맞추는데 비명 한 번 안 지르다니….’
“비토.”
“예.”
“앞으로 1년간은 국왕의 명령에 따르도록 해. 나에게 하듯이 그렇게.”
“…. 저를 포함한 전부입니까?”
“…. 그렇게 해.”
“…. 알겠습니다.”
“…, 때 되면 말해줄게.”
“…. 그러지요.”
묻고, 대답하는 동안 비토는 레이네를 쳐다보지도 않았으나 그녀는 그런 무례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이번엔 하백을 불렀다.
“그간 국왕에게서 정보 실어 나르면서 뭐 생각한 건 없어…?”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 ….”
눈을 감고 있던 레이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하백은 아무 동요 없이 공손히 서 있기만 했다. 이놈 정말 멍청한 거야 아니면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레이네는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정보와 사실관계의 차이가 뭔지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허….”
딱 잘라 대답한다. 그는 대단히 완강했다.
“다음에 물어볼 때까지 알아와.”
“… ….”
“…. 안 들려…?”
“…. 알겠습니다.”
“… …. 나가봐.”
하백이 나가는 문이 닫히자 비토는 붕대 끝을 잘라내며 치료가 끝났음을 알렸다. 레이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짓으로 가보라 하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만 주무시겠습니까…?”
그녀는 손을 들어 이마에 얹었다. 나다니엘은 시녀들을 향해 눈짓을 했고, 방 안에는 곧 나다니엘과 레이네 둘만이 남았다. 그는 부왕으로부터 레이네가 받아온 문서를 한쪽에 정리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다니엘….”
“…? 예, 공주님.”
“…. 별로…, 말이야.”
“… ….”
“….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어.”
“….”
그는 다시 침대 옆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레이네는 손으로 이마와 눈을 가린 채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그럴 필요도 없고….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손이 아프다…. 그 말을 끝으로 레이네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속으로 울고 계시겠지…. 나다니엘은 그렇게 짐작하며 그저 앉아만 있었다. 레이네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손을 내렸다.
“발…. 해줄래? …오래간만에.”
“…. 예.”
그가 침대에 올라가 발 맛사지를 해주는 동안 레이네는 조금씩 잠들기 시작했다. 완전히 잠들기 전에 물었다.
“그…, 문서는 무슨 내용이야…?”
“….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
“… ….”
푹 하고 웃은 그녀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일 보지….”
정벌을 위한 회의는 윤곽이 뚜렷해지면서 탄력을 받아 갔다. 론도 산맥에 대한 장악력이 그 목표로 정해지면서, 각국이 부담해야 할 군자금이나 군사의 규모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실하게 해결이 나지 않은 잉그라드와의 분쟁 문제로 인해 몇몇 참석자들은 적극적인 입장을 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잉그라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바이마샤르는 더욱 그러했다.
“바슈미르 대표께선 공연한 염려를 하시는 것이 아닐는지….”
“….”
펠리그로니에프의 말에 핫산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느라 잠시 지체를 해야 했다. 바루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가운데 그는 잉그라드와의 마찰을 우려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일단, 이 사람이 염려하는 것이 잉그라드 제국과 많은 교역을 하는 바이마샤르의 입장과 무관하지 않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님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으나, 잉그라드의 국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입니다.”
“야만국에 대한 바슈미르 대표의 평가가 다소 지나친 듯합니다.”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고 들어오는 펠리그로니에프, 그러나 핫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야만국이건 뭐건 간에, 우리들 중 어느 하나도 정면으로 잉그라드와 맞붙을 수 있는 국가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자그마치 8백년입니다. 대영주께서 야만국이라고 부르는 그 잉그라드의 역사는 8백년이 넘는다 이 말씀입니다. 그 오랜 기간을 잉그라드는 저 거대한 대륙의 패자로 군림해왔습니다. 게다가 작금의 황제에 이르러 잉그라드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건 알고 계셨습니까?
“그런 야만인들의 사정을 내가 알아서 무엇 하겠소…?”
“자자, 일단은 바슈미르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십시다. 야만인들이라곤 해도 국력 자체가 대단한 것은 사실이오. 바이마샤르만큼 다른 세상의 소식에 밝은 곳도 없습니다. 대영주께선 잠시 자중해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연신 헛기침을 하며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펠리그로니에프를 보다 못한 바루나가 나서서 말렸다. 핫산은 국왕을 향해 고맙다는 듯 눈인사를 한 후 다시 좌중을 향했다.
“지금의 황제는 물론 잉그라드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보다는 내치에 힘을 썼지요. 그가 재위하는 동안 잉그라드가 타국과 전쟁을 벌인 횟수는 여섯 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여섯 번 모두가 타국의 국경 침범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입니다.”
“음….”
“다시 말하면 지금의 황제는 자국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선 결코 자비가 없는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바루나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묻자 핫산은 규모에 대한 재설정을 제안했다. 이미 정해진 정벌 규모에 대해 그가 이론을 제기하자 참석한 이들 모두가 당황한 낯빛으로 서로 마주보며 술렁거렸다. 펠리그로니에프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이미 정해진 정벌의 규모이올시다. 대표께선 어째서 이제 와 그런 말씀으로 성전(聖戰)에 찬물을 끼얹으려 하시는지 모르겠구려.”
“지금의 잉그라드 황제는 황녀 하나의 안위를 위해 백성의 안위를 다소나마 포기하는 그런 자가 아니란 말이올시다…! 대체 뭘 들으신 거요, 대영주께선…!”
“진정하시지요, 바슈미르 대표.”
다소 언성이 높아지자 바루나가 나섰다. 그는 핫산의 우려를 이해한다며 아래쪽에 자리해 있던 정무대신에게 눈짓을 했다. 라크라오스는 목례로 답하며 일어났다.
“바슈미르 대표께서 우려하시는 바에 공감이 갑니다. 하오나 잉그라드가 아무리 강국이라 하더라도, 대표께서 우려하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전체적인 국력으로 보아 우리가 열세인 것은 분명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는 핫산을 향해 있던 라크라오스의 눈길이 모두에게로 돌려졌다. 한 차례 그들을 돌아보고서 그는 핫산이 말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만일 잉그라드가 국경 침탈을 구실로 하여 군사를 보낸다 하더라도, 일단은 전선이 넓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과 우리 연합군이 대치하게 될 곳은 결국 론도 산맥의 어딘가가 될 것입니다. 론도 산맥이 어디입니까? 우리가 정벌코자 하는 무도한 마도의 무리들이 곳곳에 숨어 사는 곳입니다. 그 지형과 산세가 험악하여 도저히 사람이 다닐 수가 없다는 곳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강성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들의 진격로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군사를 보내는 것은 시기상으로 이미 우리가 론도 산맥에 들어가 장악한 후의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총력을 다해 몰려온다 하더라도, 론도 산맥 자체가 이미 우리의 요새가 된 이후의 일입니다. 온갖 협곡과 험난한 지형이 진을 치고 있는 천혜의 요새 말입니다.”
라크라오스의 긴 설명을 들은 좌중들은 오…, 혹은 아하…, 따위의 소리를 내며 감탄하는 얼굴들로 거기에 동감하였다. 이론을 제기했던 핫산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설명에 일리가 있다며 경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역시…, 트레제게 후작이 미키네오스 내에선 군신(軍神)으로 추앙을 받는다더니…. 펠리그로니에프는 박수를 쳐가면서까지 호들갑을 떨었다.
“대단합니다. 대단하오! 역시 트레제게 경은 군사의 달인이구려…!!”
발덴, 험멜, 칼링거 등의 영주들, 그러니까 펠리그로니에프의 영향권 하에 있는 영주들은 덩달아 박수치며 라크라오스의 견해에 열광적으로 찬동하고 나섰다. 이쯤 되고 나니 핫산으로서도 더 이상 이론을 제기하기가 어려웠다.
==============================<각주>=========================================
- 가다르파 : 황실 직속의 법술사 부대. 법사와 술사로 구성되며 법사는 경호와 수비, 술사는 전투에 투입된다.
- 얀트라 : 잉그라드에서 법사/법술사들이 쓰는 기하학적 형태의 도해, 즉 그림.
- 트란드라 : 황실의 직속부대 중 하나.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만샤르차크와 나바스암바라, 법술부대 가다르파, 그리고 트란드라. 트란드라는 황제의 밀명을 수행하는 특수전 부대. 각 1천의 20개 전대로 구성되어 있다. 만샤르차크는 각 1만여의 20개 전대, 나바스암바라는 1만의 30개 전대, 가다르파는 각 3천의 15개 전대로 구성되어 있다. 황군의 가장 핵심적인 부대들이며 총병력은 60만에 이른다. 이외 황궁수비대인 기샤르바트, 황실근위사령부인 바슈탄타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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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부에 가깝게 계속 연재를 할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어느새 그렇게 되었네요.
지난주 글에서 어느 분이 아주 적절하게 지적해주신 것처럼, 서술 방식이 다소
혼란스러운 데가 있습니다. 그걸 지금 좀 다듬고 있는데... 쉽지가 않군요, 역시.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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