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네는 자위를 하고 있었다. 시녀들에 나다니엘까지 모두 물리고는 혼자 침대에 누워 손으로 제 가슴과 사타구니를 쓰다듬으며 열락에 빠져들었다. 손가락이 은밀한 곳을 비집고 들어가 간질이자 다른 한 손이 강하게 젖무덤을 틀어쥐듯 오그라들었다. 한 차례 열기가 온몸을 훑고 지난 후 손가락에 묻어난 체액을 보는 레이네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나왔다.
‘정보원들 덕에 그런 짓 안 해도 된다고 좋아했더니….’
이미 레이네의 몸은 남자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상태였다. 역겨운 노인네라도 그녀로서는 아쉬운 것이 사실이었다. 음란해진 제 몸에 대해 그토록 진저리를 쳤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목욕을 하고 시녀들이 닦아주는 손길에도 그녀의 몸은 반응을 하고 있었다. 도드라진 부분들에 자극이 올 때마다 레이네는 내색하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깨물어야 했다.
“공주님, 하백이 돌아왔습니다.”
나다니엘의 기별에 이어 문이 열리고 하백이 들어왔다. 레이네는 얇은 슬립에 모피를 두른 채 침대에 앉아 그의 인사를 받았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태도와 자세였으나, 얼굴이 약간 붉게 상기된 것이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듯 어색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나다니엘은 그를 눈치 챘지만 모른 척 대동한 시종과 함께 하백의 옆으로 물러섰다.
“먼 길인데 수고했다.”
목소리도 조금 들뜬 듯한데…. 나다니엘이 재떨이와 술잔을 받쳐 든 시녀에게 눈짓을 했다. 시녀는 남몰래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예스프리로부터 전해 받은 서한을 읽는 둥 마는 둥 하고 하백을 물린 레이네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으로 나다니엘의 옆에서 시종이 들고 있는 궤에 대해 물었다.
“비센테 추기경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음….”
“내일 오전에 펠리그로니에프 폰 마르크 울리프 대영주가 직접 사신으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
대영주가 직접 온다는 소식은 충분히 흥미를 끌 만했으나, 그녀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 친히 나가 대영주를 맞이하신다고…,
“내일 일은 내일 말해. 오늘은 뭐 없어…?”
나다니엘의 말을 끊어먹으며 레이네는 비센테가 보낸 궤 안에서 서한을 꺼내들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연합회의 소집을 앞두고 왕궁 방문 전에 인사차 보낸 서한과 귀물 정도였다. 한숨지으며 서한을 다시 궤 안에 던져 넣는 레이네를 보고, 나다니엘은 시녀들을 모두 방 밖으로 물렸다.
“뭐 하는 거야?”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건방진 놈….”
“….”
“…, 어디서 이런 방자한 짓을 배웠느냐?”
“송구합니다.”
평소의 레이네 같았으면 위아래로 훑거나 똑바로 쳐다보며 했을 말을 고개를 돌린 채 헛기침까지 섞어가며 하고 있었다. 나다니엘은 뭔가 있어도 있을 법한데 말을 않는 그녀를 향해 공손히 시립한 채 분부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레이네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뻐근한 아랫도리가 괜스레 민망하여 허벅지를 꼬았다.
“….”
“별 일이 없으면 오늘은…. 좀 쉬고 싶다.”
나다니엘이 익히 알기로 공주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자신에게 애틋한 정을 이따금씩 보인다 하더라도 결코 어떤 식으로든 빈틈을 내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 이상 다가가려 들면 오히려 밀어낼 사람이다. 나다니엘이 아는 레이네는 그런 사람이었다.
“물러가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선 나다니엘은 레이네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근자에 들어 후원에 남자가 든 일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래로 피가 몰렸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별실로 얼른 발길을 돌렸다.
그가 나간 후 방에 홀로 남은 공주의 손은 저도 모르게 제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꽤 한참을 남자 맛을 보지 못한 물오른 여자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걷어 올린 슬립 아래로 활짝 벌린 허벅지의 근육이 도드라지며 손가락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하아….
스스로 또 한 번 제 몸을 달래주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다니엘에게 한 번 하자고 덤빌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다시 예전 같은 짓을 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엉덩이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버린 슬립을 벗어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지고, 레이네는 이른 잠을 억지로 청했다.
“얼굴이 좋지 않으십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저…, 간밤에 잠을 설쳤을 뿐입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영주를 맞이하러 나가는 길에 만난 리토르나의 염려에 레이네는 별 일 아니라며 활짝 웃어보였다. 울리프 령의 대영주가 도착을 한다고요.
“예, 그래서 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지내시긴 괜찮으신지요?”
“왕녀께서 불러주시질 않으니 좀 심심합니다.”
그 말에 늘 담담하던 나다니엘조차 반응을 보였다. 항상 냉철하고 기품 있는 모습만을 보이던 리토르나의 말에 레이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로 여기에 대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할 말을 잊은 그녀에게 리토르나가 웃는 낯으로,
“그래도 오늘은 대영주께서 오신다고 하니 어려울 테지요?”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황녀님은 언제 오셔도 환영입니다. 언제든 찾아주세요~. 객궁에 오래 머무르시느라 무료하실 텐데, 제가 요즘 신경을 써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약속하신 겁니다…?”
“네, 밤늦은 시간에라도 상관없으니 언제든 찾아오세요.”
생긋 웃으며 그러마고 다짐하는 리토르나와 헤어져 왕궁 앞 광장으로 나가는 길에 레이네는 나다니엘과 마주보며 의외라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나다니엘도 황녀가 그런 말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듯싶었다. 좀 변한 것 같지? 다른 뜻은 없으신 듯합니다. 하긴 심심하기도 하겠지…. 알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레이네는 다시 눈앞의 일을 생각했다.
“아…, 그런데 오늘 오는 게…, 울리프 대영주가 직접 오는 거랬지?”
“예, 공주님.”
“굉장히 깐깐한 고집불통 늙은이라던데….”
“엄격한 교리 원리주의자입니다. 폐하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음….”
“저녁 만찬에 함께하실 테니 판단은 그 이후에 하셔도….”
나다니엘은 레이네의 눈길에 말을 멈추었다.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가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요즘은 꽤 적극적으로 조언을 하네? 송구합니다. 아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잘하고 있는 거야. 나다니엘은 선선하게 말하며 앞장서는 레이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에는 볼 수 없던 표정이 이따금씩 그녀에게서 나타났다. 황녀도 황녀였지만, 그가 보기에 레이네도 분명히 조금씩은 변하는 것 같았다.
대영주의 일행은 수행한 시종들만 수십에 대동한 호위대가 일개 독립부대 규모였다. 모르는 이가 보면 침공을 위한 선봉대로 오해할 만큼 그 수와 위세가 자못 대단했다. 세를 과시하는 것 치곤 좀 지나친 듯합니다. 왕이나 다름없는 자가 직접 오는 것이니 이만쯤은 할 수도 있지. 인사 대신 건넨 레이네의 말에 바루나는 광장을 향해 다가오는 대영주 일행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광장에는 근위병들이 대영주의 친방을 환영하는 군례를 올리기 위해 도열해 있었고, 신하들 모두가 양쪽으로 갈라서 있었다. 국왕은 그들이 광장으로 들어서자 때를 맞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레이네를 비롯하여 귀족 대신들은 국왕을 따라 행렬을 이루었다.
펠리그로니에프가 가마에서 내리자 근위병들이 일제히 검을 세우며 군례를 올렸다. 두 군주가 거의 정확하게 신하들이 늘어선 가운데에서 마주쳤다.
“어서 오십시오, 울리프 공작. 직접 방문을 해 주시니 뜻밖의 영광입니다.”
“그 무슨 말씀을…. 보르틴의 대국 미키네오스의 국왕 폐하께서 친히 나와 맞아주시니 이 사람의 영광입니다.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이쪽은 짐의 딸아이입니다. 인사 드리거라.”
“레이네 마리 부르노아 비클멘이라 합니다. 명성 드높은 공작을 직접 뵈어 영광입니다.”
“폐하께선 무척 아름다운 공주님을 두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키네오스를 일으켜 세우신 폐하의 의지와 높은 덕망을 그대로 이어받으신 듯 고귀한 기품이 엿보이십니다.”
속으로 웃으면서도 레이네는 수줍은 얼굴을 하며 그의 칭찬에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펠리그로니에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요녀 같은 외모와는 다르군…. 몸가짐이며 표정이나 눈빛 등이 단정하고 응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예배당으로 드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무사히 도착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지요.”
예배당까지 따라 들어가 비센테 추기경의 주관 아래 기도를 올리는 일까지 함께 한 레이네는, 몹시 피곤한 듯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이 짓을 저 자가 갈 때까지 해야 하다니…. 그것은 부왕의 지시였다. 대영주의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어서, 그가 머무는 동안엔 교권국가의 엄격하고 충실한 왕녀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근위장을 통해 신신당부를 해왔다.
“나다니엘.”
“예, 공주님.”
“바쁘지 않으면 하백 좀 들어오라고 해.”
“예.”
잠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쉬던 그녀는 머리를 대충 쓸어 정리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백이 들어오자 레이네는 턱짓으로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예스프리가 보내 온 문서를 보니, 전공이 좀 있더군.”
“별다른 것은 아닙니다.”
“첫 전투를 치러본 소감이 어때…?”
“… ….”
하백은 뭐라 대답해야 할 지 몰라 머뭇거렸다. 사실 뭐라 대답할 말도 없었다. 레이네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차 그 곳 상황에 대해 물었다.
“서신에는 감사 인사만 적혀 있었던데. 그 곳 상황은 어떻던가?”
“…. 마도의 무리들이 잦은 습격을 하여 성곽이 무너지고 부상을 당한 병사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 하긴 근처엔 제대로 된 마을 하나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 ….”
“그 외에는…?”
“….”
“머뭇거리지 말고 말해보거라. 아는 것이 있다면 모두.”
하백은 예스프리가 마검사임을 말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가 듣기로 미키네오스의 영향권 내에서 마법사는 이교도라 하여 배격 당하거나 추방을 면치 못했다. 그가 성기사 운운하며 수하들을 무마시키긴 했으나, 그런 것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는지 아닌지 알지 못했으니, 말을 꺼내기가 더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레이네가 엄격한 교회의 신도가 아니란 점은 눈치를 채고 있었어도, 금기시되는 것에까지 관대할지 아닐지 그로서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넌 지금 뭔가를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구나.”
“…!”
속내를 들킨 하백이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다. 레이네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애송이를 상대로 괜한 성질을 부릴 일까지는 없다. 한 마디 충고나 해 줘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넌 아직 내 앞에서 머리를 굴릴 처지가 아니다. 알고 있느냐?”
“… …”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직 네겐 무리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일단 따르면 되는 것이다.”
“…. 알겠습니다.”
“….”
잠시 그를 쳐다보던 레이네는 듣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며 손짓으로 그를 내보내버렸다. 그리곤 시녀들까지 물리며 자리에 누웠다. 손을 들자 나다니엘이 가까이 다가와 앉아 두 손을 거기에 포개었다.
“촛불…, 끄지 마. 이대로 잘 건 아니니까….”
“예, 공주님.”
“…. 어제는….”
“….”
“…. 잘했어.”
“….”
그 정도가 전부였다. 레이네는 더 이상 나다니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길게 말하지 않았다.
이후 며칠에 걸쳐 각국의 사신단이 속속 도착하였다. 왕도 남쪽에서 합류한 네오시아와 바이마샤르의 사신단이 함께 왔고, 같은 날 저녁나절엔 발덴 지역의 영주가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도착했다. 울리프나 발덴에 비해 작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영주들은 대부분 발덴과 같이 친방을 하였고, 가장 먼 곳에서 오는 이스마르는 귀족대신들 중 가장 높은 국무관을 보내왔다. 오래간만에 객궁이 떠들썩하여 리토르나로서는 무료함을 달랠 수 있었다. 이미 면식이 있는 핫산이 누군가 새로 올 적마다 인사를 시켰다. 몇몇은 오래 전의 전쟁에서 구원군을 보내왔던 대국의 황녀를 만나는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가 하면, 차마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했으나 교회의 신도가 아닌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펠리그로니에프 같은 이들도 있었다.
“그럼…, 아무쪼록 머무르시는 동안 신의 은총으로 거듭나시길 바라겠소.”
“… ….”
특히 펠리그로니에프는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리토르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그다지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그녀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 말을 던져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제 처소로 향해버렸다. 담담한 신색의 리토르나에게 핫산이 대영주는 원래 저런 분입니다. 워낙 완고하셔서 그렇지, 누구보다도 교리에 충실하고 엄격한 신도이시지요. 나쁜 뜻은 없으셨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곧은 마음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그나저나 황녀 전하께서 이곳에 아직도 계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오래 머무를 생각이십니까?”
“정벌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오래요?!”
“그게 좀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일일이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일단 돌아가는 추이를 보아야겠죠.”
“그렇군요…. 아 참….”
“…?”
“…. 마놀로 융베리 전 총장 예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 예….”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오랫동안 아슈람에서 함께 계셨는데….”
“…. 한율 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곳으로는 오지 않은 것 같던데요.”
“…. 오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라니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오던 길에 탈영을 했습니다. 지금은 수배령이 떨어져서 바이마샤르 내에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
리토르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핫산은 한숨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떻게 되었건…, 여러 가지로 뒤끝이 좋지 않은 일들이었습니다. 핫산과 헤어져 제 처소로 돌아온 리토르나는 눈을 감고 앉아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장작을 가져 온 시녀가 차를 내오랴 물어도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직 하늘이 열릴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적어도 그자의 숙명이 깨어난 것은 아닐 테고…. 결국은 잘 된 일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곳으로 오지는 않았으니….’
“황녀님, 공주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 모셔라.”
리토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네를 맞았다. 따라 들어온 시녀들이 뭔가를 받쳐 들고 있었다. 앉으시지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네는 생긋 웃어보였다.
“바쁘시겠어요. 시녀들에게서 들어보니 각국 사신들을 만나시느라 하루가 분주하시다고….”
“덕분에 무료한 건 덜었는데…, 어찌나 말씀들이 긴 지 듣고 있기 민망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의를 차리느라 그러시는 것이지요.”
“그렇겠지요….”
“대국에선 안 그렇습니까?”
“저희도 수사가 많긴 하지만 여기만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왕궁 서고의 책들을 둘러보니, 특히 보르틴의 문화는 수사학이 많이 발달해 있더군요.”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필요하답니다.”
“네…. 차 드시지요.”
시녀가 내온 찻잔을 기울이며 둘은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이젠 꽤 가까워진 듯 소리내 웃기까지 하는 분위기가 제법 화기애애했다. 비워진 찻잔을 치우자 레이네는 가져온 것을 내려놓았다.
“이건…?”
“황녀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부왕께서 오늘밤 사신단을 위한 연회를 여시는데, 황녀님께서도 참석해주시길 바란다 하십니다.”
“네…. 그런데 이건….”
“대륙의 모든 나라에서 대표 격인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까. 황녀님께서 변변한 연회복이 없으신 듯하여 제가 한 번 준비를 해봤답니다.”
“어머나….”
시녀가 들어 보이는 드레스는 어깨에 둘러진 금빛 숄과 연보라색의 치마에 금빛으로 수놓인 무늬가 어우러져 잉그라드 황제의 표식을 담고 있었다. 레이네는 같은 표식이 장식된 족두리까지 선보이며 리토르나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나 근사합니다.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
감격한 얼굴이었다. 사실 좀 조마조마했답니다. 대국의 황제폐하의 문장을 함부로 옷에 새겨 넣는 것이 결례가 되지나 않을까 해서…. 아닙니다. 역시 왕녀님은 정말 현명한 분이세요. 리토르나는 정색을 했다.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살펴 주시니 제가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어서 입어보세요.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봐주셔야죠.”
비사카를 내보낸 리토르나는 레이네를 붙들어 앉히며 수선을 떨었다. 볼수록 의외라는 생각에 레이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앉아 시녀들이 옷을 갈아입히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이 날 저녁 연회장으로 가는 길에 새 옷을 입은 리토르나를 본 바루나는 잠시 넋을 잃은 듯 쳐다보았다. 어깨에 두른 숄이 살짝 위로 접혀 올라가 대담하고 위엄이 넘치는 디자인으로 황녀의 곧은 몸가짐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왕녀께서 황송하게도 저를 위해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아…, 예. 황녀의 기품을 담은 듯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연회의 주인공이 되시겠습니다. 하하….”
“폐하의 위엄과 왕녀님의 아름다움에 비하겠습니까.”
“가시지요.”
왕궁 남쪽의 구릉지에 군막을 설치하고 숙영중인 바이마샤르 보위부 군사들은 바로 옆에 서 있는 잉그라드 황실 친위대의 기세에 조금 눌려 있었다. 젠장, 저것들은 춥지도 않나…. 금빛 갑주를 두른 채 경계를 서고 있는 그들을 보며 병사 하나가 진저리를 쳤다.
“춥지 않나? 왜 밖에서 이러고 있어?”
“앗, 총사님…!”
“왜 그렇게들 놀라?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닙니다. 하하….”
“추운데 여기서 뭐 해?”
“그저…. 저 놈들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이 추운데 철갑주를 온 몸에 두르고 멀쩡히 서 있잖습니까.”
혀를 내두르는 병사의 말에 나자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같이 그들을 둘러봤다. 그런데…, 총사님.
“왜.”
“루카스 사령께선 무슨 일 있으십니까?”
“… ….”
“아무리 군기를 잡는다고 해도 병사들에겐 늘 각별하셨는데…, 좀 이상하십니다. 통 안 내시던 화도 자주 내시고, 표정도 좀 날카로워지신 것이….”
“오는 길에 사고가 생겨서 그러시겠지. 그러니 더 눈 밖에 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들 써.”
“알겠습니다.”
“… ….”
그의 말마따나, 루카스의 상태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했다. 팔짱을 끼고 고심하는 그녀에게 누군가 술병을 흔들며 다가섰다.
“나자르 총사.”
“…? 지울리니 경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귀국 기사단의 숙영지는 반대편으로 알고 있는데요.”
“허 참…. 언제까지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실 겁니까? 남자가 이만큼 노력하면 한 번쯤은 져주시지….”
“이보세요, 지울리니 경…!”
“예! 브로시니 캄폴리노 지울리니입니다!”
“… ….”
하아…. 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자르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경은 네오시아 공화국의 전군을 대표해서 이곳에 오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귀국의 군부가 무슨 말을 듣겠습니까?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손을 내젓는 브로시니.
“무슨 그런 말씀을…. 삼백 기사단의 명성이 그 정도로…,”
“어쨌든 귀공과 술잔을 기울일 일은 없을 겁니다. 드시고 싶으면 귀공의 수하들과 마음껏 드시지요.”
“에이 참…, 시커먼 사내놈들하고 무슨 술을…, 이봐요, 나자르 총사…!”
느물거리던 브로시니는 나자르가 홱 돌아서서 군막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자 당황하며 그녀를 쫓았다. 마침 군막에서 나오던 루카스는 이를 보고 멈춰섰다. 무슨 일이야? 보시는 대롭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하는 나자르의 뒤에 어느새 브로시니가 다가왔다.
“이거 루카스 사령이 아니십니까? 하하하…. 술 한 잔 하자고 왔는데 총사께서 계속 거절을…,”
“삼백 기사단의 명성은 옛말인가 봅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어먹자 브로시니는 어라…? 하는 얼굴로 술병을 내렸다. 저럴 줄 알았지….
“하긴 그게 벌써 20년 전인데…. 20년 전 명성으로 어떻게 먹어주지 않을까, 뭐 그런 건가?”
빈정거리는 루카스의 말에 브로시니의 표정에서 여유가 가셨다. 나자르는 조금 심하다 싶은 루카스의 말로 인해 싸움이라도 날까 싶어 초조해졌지만, 타국의 지휘관 앞에서 제 상관을 말리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지금 상단 호위무사들이 실력행사 한 번 해 보이겠다…?”
바이마샤르가 상업대국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브로시니가 노골적으로 그를 폄하하고 나서자 이번엔 나자르가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여 검을 뽑아 브로시니를 향해 겨누었다.
“지금 그 말씀 사과하시죠. 먼저 무례를 저지른 건 그쪽입니다.”
“…. 술 한 잔 하는 게 그렇게 큰일입니까? 대체 왜 그렇게 거절하시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나자르에게는 존대를 쓴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브로시니를 쏘아보며 재차 사과를 요구했다.
“어서 사과하시지요. 지금 한 말씀과, 그간의 모든 무례에 대한 사과까지 이 자리에서 받아야겠습니다.”
“…. 난 무례를 저지른 기억이 없는데….”
“아비들의 이름값으로 먹고 사는 자들이니…, 분별 따위가 있을 리 없지.”
“…뭐야…?”
브로시니의 표정에서도 전의가 오르기 시작했다. 나자르는 검을 거두고는 돌아서서 루카스를 향해 곧게 섰다.
“사령님. 브로시니 캄폴리노 지울리니 경은 오는 내내 제게 무례를 저질렀고, 또한 사과는커녕 우리 바이마샤르 군부뿐만 아니라 공화국을 모욕했습니다. 국가를 대표하여 온 보위부의 총사로서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결투를 신청하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십시오.”
“….”
“…난 여자랑은 술자리랑 잠자리만 하는데….”
그 말에 나자르가 독기를 품은 눈으로 홱 돌아봤으나, 브로시니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루카스를 자극했다. 기왕에 한다면 대장끼리 해 보는 게 어때? 어차피 막말한 건 우리들인데…. 루카스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나쁠 것 없지….”
“사령님…!!”
“물러서.”
그는 나자르의 결투 신청에 대해 일축해버리고는 투기를 내뿜으며 앞으로 나섰다. 루카스의 몸 주위에 일어나는 투기를 본 브로시니가 비릿하게 웃으며 술병을 내던졌다.
“뭐야, 이거…. 별 구경을 다 하게 되는군.”
“피차일반인 것 같은데….”
밖에서 일어나는 이 소동에 무슨 일인가 싶어 모인 병사들은 그들 주위를 맴돌고 있는 투기를 보며 술렁거렸지만, 감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나자르도 이 정체불명의 기운을 보며 설마설마 했다. 이스마르가 마검사의 근원지라는 거야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미키네오스의 영향권 내에 있는 바이마샤르에선 마검사는커녕 마법사나 심지어 점술가조차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애들 놀라게 할 것 없이 검술로 하자고….”
검을 이마 위로 들며 자세를 잡는 브로시니를 향해 대답 대신 루카스가 먼저 공격해 들어갔다. 마투기가 실린 맹렬한 검격이 브로시니를 조각내버릴 듯 달려들었다.
“흥…!”
몸을 숙이며 쳐낸 브로시니의 기운도 보통이 아니었다. 한 번 부딪칠 때마다 검이 부서질 것처럼 격렬한 소리가 나고 불똥이 튀겼다. 목, 어깨, 허리, 다리 등을 향해 사정없이 그어지는 루카스의 검격이나 찌르기 위주로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는 브로시니의 검격이나 누구 하나 아니랄 것 없이 살의를 띠고 있었다.
나자르의 청이 무시된 것은 이제 둘째 문제였다. 이대로만 가면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날 것 같았다. 그녀가 말린다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단이나 지키는 주제에 꽤 하는…구먼…!!”
“그 입은…, 죽어야 다물어지겠군…!”
루카스는 그를 끌어들이듯 검을 수평으로 긋더니 회전력을 이용해 그대로 브로시니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제대로 맞은 브로시니는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고, 루카스는 그가 숨 고를 틈도 없이 무릎을 향해 대각선으로 검을 내리그으며 쫓아갔다. 그대로 두면 무릎 아래가 뎅겅 잘려나갈 기세였다. 브로시니는 검끝을 아래로 늘어뜨려 검격을 흘려내며 그대로 검날을 타고 올라가 목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사령님…!!”
왕궁에서의 연회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저마다의 속내는 따로따로였어도, 굳이 이 자리에서 연합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는 없었다. 연회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리토르나와 레이네였다. 옅은 녹색의 데이지가 수놓아진 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이네는 부왕의 당부대로 단정한 몸가짐을 유지하며 자리한 이들의 시선을 달고 다녔다. 펠리그로니에프 대영주 역시 그녀의 몸가짐을 연신 칭찬하며 시선을 자주 주었다.
“대영주께서 다스리시는 곳은 늘 기강이 바로 서 있고 거짓된 말과 행동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광대한 지역을 훌륭히 다스리시는 방도에 대해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언을 좀 얻을 수 있을는지요?”
“이 사람이 아무리 그렇다 한들, 20년 만에 미키네오스의 국권을 일으켜 세우신 여기 국왕폐하만 하겠습니까.”
“울리프 대영주께선 짐을 놀리십니다 그려, 허허….”
“무슨 말씀을….”
“대영주의 고결하신 인품과 노련하신 통치는 우리 보르틴 전체에 널리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고견을 들려주시지요.”
“무릇 통치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잘 따르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민들은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권리가 많아지고, 모이게 되면 늘 충동적이고 우매한 주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듣고 있던 핫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으나 펠리그로니에프는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어갔다. 따라서 법제를 엄히 하고, 그것을 두려워하게끔 한다면 시민들은 단합하여 제 이권을 주장하며 난동을 일으키거나 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본보기를 제대로 보여야 한다, 이런 소리였다. 공화정을 수백 년간 이어온 바이마샤르의 입장에선 과히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으나 핫산은 짐짓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법제를 엄히 한다. 정말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대영주는 입꼬리를 슬쩍 올릴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대국의 황녀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아직 식견이 좁고 통치에 관하여 아는 바 없어 감히 이 자리에서 말을 꺼낼 게재가 못 된답니다.”
“여인은 통치보다는 부군의 위안이 되는 법을 알아야지요. 언제나 겸손하게 물러설 줄 알고 말을 아낄 줄 알며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봐도 펠리그로니에프는 리토르나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한참 먼 곳이라 해도 그녀를 앞에서 대놓고 폄하하는 대영주의 태도에 핫산은 무슨 일이라도 날까 싶어 불안불안했다.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리토르나는 그 말로 응수했다.
“아주 오래간만에 입맛 가시는 인간을 만나셨어요.”
그들로부터 떨어져 리토르나가 홀로 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레이네가 다가와 속삭였다.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리토르나를 대영주는 노골적으로 고깝게 쳐다보았다.
“영주님, 아깐 좀 심하셨던 것 아닙니까? 잉그라드는 대국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그럼 내가 야만인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단 말인가?”
수행하는 시종의 고언을 그는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웃는 법도 모르는 천박한 것들…. 그때 근위장이 바쁜 걸음으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뭔가 다급한 일이 생긴 듯 그는 바루나에게 다가와 소식을 알렸다.
“폐하, 사신단 호위기사단에서 문제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무슨 말인가?”
“그게….”
근위장의 눈길이 네오시아의 부통령과 핫산을 가리켰다. 대충 감 잡은 바루나가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을 땐 브로시니나 루카스나 둘 다 독기가 오를 만큼 올라 한 치 양보 없는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표정들엔 여유 대신 살의와 전의만이 번득거렸고, 보는 사람의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그들의 모습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핫산과 부통령은 이 비상사태에 당황하여 허옇게 질려버렸고, 바루나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부통령이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동안 핫산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국왕을 향해 능청을 떨었다.
“하하핫핫하하하…!! 기운 넘치는 젊은 지휘관들이 벌써부터 기량을 뽐내고들 있습니다, 그려…! 안 그렇습니까?”
“…, 그렇구려….”
푹 하고 같이 웃음을 터뜨리는 바루나는 그의 순간적인 대응에 제법인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곤 이내 박수를 치며 그들의 기량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숨죽이며 이 대결을 지켜보던 병사들의 시선이 일순 그들 셋에게로 향했고, 서로를 향해 죽일 듯이 덤벼들던 루카스와 브로시니도 검을 멈추었다.
“대단들 합니다. 정말 대단한 기량이오…!”
“부…부통령 각하….”
“…!”
바루나는 짐짓 감격했다는 듯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다.
“저만한 기사는 우리 미키네오스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든데…. 역시 삼백 기사단과 보위부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하하…. 소란을 피워 송구합니다. 젊은이들의 치기라 여기시고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부통령도 정치에 몸담은 이답게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무마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바루나는 일을 크게 벌여놓고자 했다. 둘을 떼어 말려놓고 돌아온 연회장에서 바루나는 오피퀴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말인즉슨 오피퀴움의 전초전 형태로 열병식을 열어 이번 회의 중의 여흥을 즐겨 보자는 얘기였다.
“어떻습니까? 짐은 좋은 여흥거리가 될 거라 보는데….”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국왕폐하께서 참으로 탁월한 제안을 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찬성을 표한 것은 대영주였고 모두들 질세라 그에 응하는 가운데 부통령과 핫산만이 민망한 낯색으로 마지못해 찬성의 뜻을 밝혔다.
“공주는 각국의 지휘관들에게 전달도 할 겸해서 연회를 열어 주거라. 그래줄 수 있겠지…?”
“공주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하하…, 기실 연회라는 게 위안과 여흥 아니겠습니까. 그 점에서는 이 아이가 짐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폐하….”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민망한 기색을 연출하는 레이네를 보고 대영주는 볼수록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하며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그렇군요. 수행하느라 지친 젊은 지휘관들에게 공주님의 아름답고 기품 있는 모습은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국왕폐하의 탁견에 감복했습니다. 찬사가 지나치십니다, 대영주….
“얼마나 피곤하게 구는지, 넌 못 봐서 모를 거야. 세상에 황녀를 앞에 놓고 여자는 남편을 위안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느니, 얌전해야 한다느니….”
레이네는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목까지 올라오는 갑갑한 드레스를 벗으며 대영주에 대해 쉴 새 없이 험담을 늘어놓았다. 시녀들은 당황하여 서로 눈치만 살피며 네네 맞장구만 쳤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레이네가 뒤를 돌아보자, 등에 묶인 매듭을 풀던 시녀가 긴장한 낯으로 말했다.
“나다니엘님은 객궁으로 보내셨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황녀를 부르러 나다니엘을 보냈었다.
“이 늦은 시각에 황녀를…?”
“…. 무슨 다른 일이야 있겠습니까. 들어보니, 황녀와 공주님의 사이가 요즘 들어 상당히 친근해졌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그 얘기는 나도 들어 알고 있네. 너무 가까워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대국의 황위계승권자와 친분이 생기는 일은 공주님께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터놓을 벗이라면 더욱 좋은 일이겠지요.”
정무대신의 말에 바루나는, 어찌 아비인 나보다 자네가 더 아비 같네 그려, 하며 허허 웃었다. 웃음 뒤에 정무대신은 슬쩍 바루나를 힐난하듯 한 마디 덧붙였다. 조금 짓궂으셨던 것 같습니다, 오피퀴움 말입니다.
“그게 왜…?”
“본래 그 제안은 비센테 추기경께서 하셨던 것이잖습니까. 하필 그런 자리에서 말씀하셔서 바이마샤르와 네오시아 측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시다니요.”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툭 툭 쳐 주는 편이 좋지.”
“비센테 추기경은 좋아하겠습니다.”
국왕은 정무대신의 말에 그저 가볍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어차피 교총의 입장이야 바루나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상징적이나마 교총의 권위를 세워주려는 바루나의 의도에 교총이 반대할 리는 없었다. 문제는 펠리그로니에프였다. 대륙의 동북방을 장악하고 있는 트로이센 제국 부흥군의 군주로, 이미 선대에 이르러 대부분 수복한 옛 제국의 영토를 이어받았다. 때마침 보르틴 전체를 뒤흔든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대륙의 극동 지역으로 물러나 세를 유지하였다.
“우리가 허덕거리고 있는 동안 세를 확장했으니…, 비바람은 우리가 다 막아주고 그 동안 제 살을 찌운 격입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쩌겠나. 그보다는 앞으로가 문제일세.”
“…, 그렇습니다. 아마도 정벌을 통해 대륙의 패권을 가져가려 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
일리는 있었으나, 바루나는 수긍하는 대신 눈을 들어 정무대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묻듯 마주 쳐다보는 라크라오스에게 묻는다.
“자넨 마치 이 전쟁…, 다 이긴 것처럼 말하는군…?”
“…,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할 폐하가 아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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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한파로군요. 며칠 전 여자친구가 저보고 "작년과 올해 들어 부쩍
춥다는 소릴 한다"며 나이먹었다고 핀잔을 주더군요. 처음엔 저도 정말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작년부터 겨울이 부쩍 추워졌잖습니까.-_-
암튼 오늘내일은 영하 17도까지 내려간다네요. (여기는 성남시~)
추운 날씨를 무척 좋아하는데... 오늘밤(토요일밤)은 나가서 맥주라도
한 잔 션~하게 해야겠습니다. 크헛헛.....;;;
----아참... 펠리그로네의 이름을 펠리그로니에프로 바꾼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언어적인 통일성을 좀 주고자 그렇게 바꿨습니다.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께 늘 그러듯,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추운 날씨에
건강을 늘 챙기시길. 날이 혹독하게 추우면 오히려 감기에 안 걸린다고는
합니다마는.. 그것도 거짓말인 것 같습니다. ㅎㅎ.
그럼 또 다음주에...(_ _)
‘정보원들 덕에 그런 짓 안 해도 된다고 좋아했더니….’
이미 레이네의 몸은 남자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상태였다. 역겨운 노인네라도 그녀로서는 아쉬운 것이 사실이었다. 음란해진 제 몸에 대해 그토록 진저리를 쳤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목욕을 하고 시녀들이 닦아주는 손길에도 그녀의 몸은 반응을 하고 있었다. 도드라진 부분들에 자극이 올 때마다 레이네는 내색하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깨물어야 했다.
“공주님, 하백이 돌아왔습니다.”
나다니엘의 기별에 이어 문이 열리고 하백이 들어왔다. 레이네는 얇은 슬립에 모피를 두른 채 침대에 앉아 그의 인사를 받았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태도와 자세였으나, 얼굴이 약간 붉게 상기된 것이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듯 어색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나다니엘은 그를 눈치 챘지만 모른 척 대동한 시종과 함께 하백의 옆으로 물러섰다.
“먼 길인데 수고했다.”
목소리도 조금 들뜬 듯한데…. 나다니엘이 재떨이와 술잔을 받쳐 든 시녀에게 눈짓을 했다. 시녀는 남몰래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예스프리로부터 전해 받은 서한을 읽는 둥 마는 둥 하고 하백을 물린 레이네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으로 나다니엘의 옆에서 시종이 들고 있는 궤에 대해 물었다.
“비센테 추기경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음….”
“내일 오전에 펠리그로니에프 폰 마르크 울리프 대영주가 직접 사신으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
대영주가 직접 온다는 소식은 충분히 흥미를 끌 만했으나, 그녀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 친히 나가 대영주를 맞이하신다고…,
“내일 일은 내일 말해. 오늘은 뭐 없어…?”
나다니엘의 말을 끊어먹으며 레이네는 비센테가 보낸 궤 안에서 서한을 꺼내들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연합회의 소집을 앞두고 왕궁 방문 전에 인사차 보낸 서한과 귀물 정도였다. 한숨지으며 서한을 다시 궤 안에 던져 넣는 레이네를 보고, 나다니엘은 시녀들을 모두 방 밖으로 물렸다.
“뭐 하는 거야?”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건방진 놈….”
“….”
“…, 어디서 이런 방자한 짓을 배웠느냐?”
“송구합니다.”
평소의 레이네 같았으면 위아래로 훑거나 똑바로 쳐다보며 했을 말을 고개를 돌린 채 헛기침까지 섞어가며 하고 있었다. 나다니엘은 뭔가 있어도 있을 법한데 말을 않는 그녀를 향해 공손히 시립한 채 분부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레이네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뻐근한 아랫도리가 괜스레 민망하여 허벅지를 꼬았다.
“….”
“별 일이 없으면 오늘은…. 좀 쉬고 싶다.”
나다니엘이 익히 알기로 공주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자신에게 애틋한 정을 이따금씩 보인다 하더라도 결코 어떤 식으로든 빈틈을 내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 이상 다가가려 들면 오히려 밀어낼 사람이다. 나다니엘이 아는 레이네는 그런 사람이었다.
“물러가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선 나다니엘은 레이네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근자에 들어 후원에 남자가 든 일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래로 피가 몰렸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별실로 얼른 발길을 돌렸다.
그가 나간 후 방에 홀로 남은 공주의 손은 저도 모르게 제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꽤 한참을 남자 맛을 보지 못한 물오른 여자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걷어 올린 슬립 아래로 활짝 벌린 허벅지의 근육이 도드라지며 손가락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하아….
스스로 또 한 번 제 몸을 달래주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다니엘에게 한 번 하자고 덤빌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다시 예전 같은 짓을 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엉덩이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버린 슬립을 벗어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지고, 레이네는 이른 잠을 억지로 청했다.
“얼굴이 좋지 않으십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저…, 간밤에 잠을 설쳤을 뿐입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영주를 맞이하러 나가는 길에 만난 리토르나의 염려에 레이네는 별 일 아니라며 활짝 웃어보였다. 울리프 령의 대영주가 도착을 한다고요.
“예, 그래서 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지내시긴 괜찮으신지요?”
“왕녀께서 불러주시질 않으니 좀 심심합니다.”
그 말에 늘 담담하던 나다니엘조차 반응을 보였다. 항상 냉철하고 기품 있는 모습만을 보이던 리토르나의 말에 레이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로 여기에 대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할 말을 잊은 그녀에게 리토르나가 웃는 낯으로,
“그래도 오늘은 대영주께서 오신다고 하니 어려울 테지요?”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황녀님은 언제 오셔도 환영입니다. 언제든 찾아주세요~. 객궁에 오래 머무르시느라 무료하실 텐데, 제가 요즘 신경을 써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약속하신 겁니다…?”
“네, 밤늦은 시간에라도 상관없으니 언제든 찾아오세요.”
생긋 웃으며 그러마고 다짐하는 리토르나와 헤어져 왕궁 앞 광장으로 나가는 길에 레이네는 나다니엘과 마주보며 의외라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나다니엘도 황녀가 그런 말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듯싶었다. 좀 변한 것 같지? 다른 뜻은 없으신 듯합니다. 하긴 심심하기도 하겠지…. 알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레이네는 다시 눈앞의 일을 생각했다.
“아…, 그런데 오늘 오는 게…, 울리프 대영주가 직접 오는 거랬지?”
“예, 공주님.”
“굉장히 깐깐한 고집불통 늙은이라던데….”
“엄격한 교리 원리주의자입니다. 폐하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음….”
“저녁 만찬에 함께하실 테니 판단은 그 이후에 하셔도….”
나다니엘은 레이네의 눈길에 말을 멈추었다.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가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요즘은 꽤 적극적으로 조언을 하네? 송구합니다. 아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잘하고 있는 거야. 나다니엘은 선선하게 말하며 앞장서는 레이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에는 볼 수 없던 표정이 이따금씩 그녀에게서 나타났다. 황녀도 황녀였지만, 그가 보기에 레이네도 분명히 조금씩은 변하는 것 같았다.
대영주의 일행은 수행한 시종들만 수십에 대동한 호위대가 일개 독립부대 규모였다. 모르는 이가 보면 침공을 위한 선봉대로 오해할 만큼 그 수와 위세가 자못 대단했다. 세를 과시하는 것 치곤 좀 지나친 듯합니다. 왕이나 다름없는 자가 직접 오는 것이니 이만쯤은 할 수도 있지. 인사 대신 건넨 레이네의 말에 바루나는 광장을 향해 다가오는 대영주 일행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광장에는 근위병들이 대영주의 친방을 환영하는 군례를 올리기 위해 도열해 있었고, 신하들 모두가 양쪽으로 갈라서 있었다. 국왕은 그들이 광장으로 들어서자 때를 맞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레이네를 비롯하여 귀족 대신들은 국왕을 따라 행렬을 이루었다.
펠리그로니에프가 가마에서 내리자 근위병들이 일제히 검을 세우며 군례를 올렸다. 두 군주가 거의 정확하게 신하들이 늘어선 가운데에서 마주쳤다.
“어서 오십시오, 울리프 공작. 직접 방문을 해 주시니 뜻밖의 영광입니다.”
“그 무슨 말씀을…. 보르틴의 대국 미키네오스의 국왕 폐하께서 친히 나와 맞아주시니 이 사람의 영광입니다.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이쪽은 짐의 딸아이입니다. 인사 드리거라.”
“레이네 마리 부르노아 비클멘이라 합니다. 명성 드높은 공작을 직접 뵈어 영광입니다.”
“폐하께선 무척 아름다운 공주님을 두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키네오스를 일으켜 세우신 폐하의 의지와 높은 덕망을 그대로 이어받으신 듯 고귀한 기품이 엿보이십니다.”
속으로 웃으면서도 레이네는 수줍은 얼굴을 하며 그의 칭찬에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펠리그로니에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요녀 같은 외모와는 다르군…. 몸가짐이며 표정이나 눈빛 등이 단정하고 응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예배당으로 드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무사히 도착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지요.”
예배당까지 따라 들어가 비센테 추기경의 주관 아래 기도를 올리는 일까지 함께 한 레이네는, 몹시 피곤한 듯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이 짓을 저 자가 갈 때까지 해야 하다니…. 그것은 부왕의 지시였다. 대영주의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어서, 그가 머무는 동안엔 교권국가의 엄격하고 충실한 왕녀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근위장을 통해 신신당부를 해왔다.
“나다니엘.”
“예, 공주님.”
“바쁘지 않으면 하백 좀 들어오라고 해.”
“예.”
잠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쉬던 그녀는 머리를 대충 쓸어 정리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백이 들어오자 레이네는 턱짓으로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예스프리가 보내 온 문서를 보니, 전공이 좀 있더군.”
“별다른 것은 아닙니다.”
“첫 전투를 치러본 소감이 어때…?”
“… ….”
하백은 뭐라 대답해야 할 지 몰라 머뭇거렸다. 사실 뭐라 대답할 말도 없었다. 레이네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차 그 곳 상황에 대해 물었다.
“서신에는 감사 인사만 적혀 있었던데. 그 곳 상황은 어떻던가?”
“…. 마도의 무리들이 잦은 습격을 하여 성곽이 무너지고 부상을 당한 병사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 하긴 근처엔 제대로 된 마을 하나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 ….”
“그 외에는…?”
“….”
“머뭇거리지 말고 말해보거라. 아는 것이 있다면 모두.”
하백은 예스프리가 마검사임을 말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가 듣기로 미키네오스의 영향권 내에서 마법사는 이교도라 하여 배격 당하거나 추방을 면치 못했다. 그가 성기사 운운하며 수하들을 무마시키긴 했으나, 그런 것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는지 아닌지 알지 못했으니, 말을 꺼내기가 더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레이네가 엄격한 교회의 신도가 아니란 점은 눈치를 채고 있었어도, 금기시되는 것에까지 관대할지 아닐지 그로서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넌 지금 뭔가를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구나.”
“…!”
속내를 들킨 하백이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다. 레이네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애송이를 상대로 괜한 성질을 부릴 일까지는 없다. 한 마디 충고나 해 줘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넌 아직 내 앞에서 머리를 굴릴 처지가 아니다. 알고 있느냐?”
“… …”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직 네겐 무리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일단 따르면 되는 것이다.”
“…. 알겠습니다.”
“….”
잠시 그를 쳐다보던 레이네는 듣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며 손짓으로 그를 내보내버렸다. 그리곤 시녀들까지 물리며 자리에 누웠다. 손을 들자 나다니엘이 가까이 다가와 앉아 두 손을 거기에 포개었다.
“촛불…, 끄지 마. 이대로 잘 건 아니니까….”
“예, 공주님.”
“…. 어제는….”
“….”
“…. 잘했어.”
“….”
그 정도가 전부였다. 레이네는 더 이상 나다니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길게 말하지 않았다.
이후 며칠에 걸쳐 각국의 사신단이 속속 도착하였다. 왕도 남쪽에서 합류한 네오시아와 바이마샤르의 사신단이 함께 왔고, 같은 날 저녁나절엔 발덴 지역의 영주가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도착했다. 울리프나 발덴에 비해 작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영주들은 대부분 발덴과 같이 친방을 하였고, 가장 먼 곳에서 오는 이스마르는 귀족대신들 중 가장 높은 국무관을 보내왔다. 오래간만에 객궁이 떠들썩하여 리토르나로서는 무료함을 달랠 수 있었다. 이미 면식이 있는 핫산이 누군가 새로 올 적마다 인사를 시켰다. 몇몇은 오래 전의 전쟁에서 구원군을 보내왔던 대국의 황녀를 만나는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가 하면, 차마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했으나 교회의 신도가 아닌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펠리그로니에프 같은 이들도 있었다.
“그럼…, 아무쪼록 머무르시는 동안 신의 은총으로 거듭나시길 바라겠소.”
“… ….”
특히 펠리그로니에프는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리토르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그다지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그녀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 말을 던져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제 처소로 향해버렸다. 담담한 신색의 리토르나에게 핫산이 대영주는 원래 저런 분입니다. 워낙 완고하셔서 그렇지, 누구보다도 교리에 충실하고 엄격한 신도이시지요. 나쁜 뜻은 없으셨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곧은 마음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그나저나 황녀 전하께서 이곳에 아직도 계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오래 머무를 생각이십니까?”
“정벌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오래요?!”
“그게 좀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일일이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일단 돌아가는 추이를 보아야겠죠.”
“그렇군요…. 아 참….”
“…?”
“…. 마놀로 융베리 전 총장 예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 예….”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오랫동안 아슈람에서 함께 계셨는데….”
“…. 한율 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곳으로는 오지 않은 것 같던데요.”
“…. 오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라니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오던 길에 탈영을 했습니다. 지금은 수배령이 떨어져서 바이마샤르 내에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
리토르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핫산은 한숨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떻게 되었건…, 여러 가지로 뒤끝이 좋지 않은 일들이었습니다. 핫산과 헤어져 제 처소로 돌아온 리토르나는 눈을 감고 앉아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장작을 가져 온 시녀가 차를 내오랴 물어도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직 하늘이 열릴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적어도 그자의 숙명이 깨어난 것은 아닐 테고…. 결국은 잘 된 일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곳으로 오지는 않았으니….’
“황녀님, 공주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 모셔라.”
리토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네를 맞았다. 따라 들어온 시녀들이 뭔가를 받쳐 들고 있었다. 앉으시지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네는 생긋 웃어보였다.
“바쁘시겠어요. 시녀들에게서 들어보니 각국 사신들을 만나시느라 하루가 분주하시다고….”
“덕분에 무료한 건 덜었는데…, 어찌나 말씀들이 긴 지 듣고 있기 민망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의를 차리느라 그러시는 것이지요.”
“그렇겠지요….”
“대국에선 안 그렇습니까?”
“저희도 수사가 많긴 하지만 여기만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왕궁 서고의 책들을 둘러보니, 특히 보르틴의 문화는 수사학이 많이 발달해 있더군요.”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필요하답니다.”
“네…. 차 드시지요.”
시녀가 내온 찻잔을 기울이며 둘은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이젠 꽤 가까워진 듯 소리내 웃기까지 하는 분위기가 제법 화기애애했다. 비워진 찻잔을 치우자 레이네는 가져온 것을 내려놓았다.
“이건…?”
“황녀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부왕께서 오늘밤 사신단을 위한 연회를 여시는데, 황녀님께서도 참석해주시길 바란다 하십니다.”
“네…. 그런데 이건….”
“대륙의 모든 나라에서 대표 격인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까. 황녀님께서 변변한 연회복이 없으신 듯하여 제가 한 번 준비를 해봤답니다.”
“어머나….”
시녀가 들어 보이는 드레스는 어깨에 둘러진 금빛 숄과 연보라색의 치마에 금빛으로 수놓인 무늬가 어우러져 잉그라드 황제의 표식을 담고 있었다. 레이네는 같은 표식이 장식된 족두리까지 선보이며 리토르나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나 근사합니다.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
감격한 얼굴이었다. 사실 좀 조마조마했답니다. 대국의 황제폐하의 문장을 함부로 옷에 새겨 넣는 것이 결례가 되지나 않을까 해서…. 아닙니다. 역시 왕녀님은 정말 현명한 분이세요. 리토르나는 정색을 했다.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살펴 주시니 제가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어서 입어보세요.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봐주셔야죠.”
비사카를 내보낸 리토르나는 레이네를 붙들어 앉히며 수선을 떨었다. 볼수록 의외라는 생각에 레이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앉아 시녀들이 옷을 갈아입히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이 날 저녁 연회장으로 가는 길에 새 옷을 입은 리토르나를 본 바루나는 잠시 넋을 잃은 듯 쳐다보았다. 어깨에 두른 숄이 살짝 위로 접혀 올라가 대담하고 위엄이 넘치는 디자인으로 황녀의 곧은 몸가짐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왕녀께서 황송하게도 저를 위해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아…, 예. 황녀의 기품을 담은 듯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연회의 주인공이 되시겠습니다. 하하….”
“폐하의 위엄과 왕녀님의 아름다움에 비하겠습니까.”
“가시지요.”
왕궁 남쪽의 구릉지에 군막을 설치하고 숙영중인 바이마샤르 보위부 군사들은 바로 옆에 서 있는 잉그라드 황실 친위대의 기세에 조금 눌려 있었다. 젠장, 저것들은 춥지도 않나…. 금빛 갑주를 두른 채 경계를 서고 있는 그들을 보며 병사 하나가 진저리를 쳤다.
“춥지 않나? 왜 밖에서 이러고 있어?”
“앗, 총사님…!”
“왜 그렇게들 놀라?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닙니다. 하하….”
“추운데 여기서 뭐 해?”
“그저…. 저 놈들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이 추운데 철갑주를 온 몸에 두르고 멀쩡히 서 있잖습니까.”
혀를 내두르는 병사의 말에 나자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같이 그들을 둘러봤다. 그런데…, 총사님.
“왜.”
“루카스 사령께선 무슨 일 있으십니까?”
“… ….”
“아무리 군기를 잡는다고 해도 병사들에겐 늘 각별하셨는데…, 좀 이상하십니다. 통 안 내시던 화도 자주 내시고, 표정도 좀 날카로워지신 것이….”
“오는 길에 사고가 생겨서 그러시겠지. 그러니 더 눈 밖에 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들 써.”
“알겠습니다.”
“… ….”
그의 말마따나, 루카스의 상태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했다. 팔짱을 끼고 고심하는 그녀에게 누군가 술병을 흔들며 다가섰다.
“나자르 총사.”
“…? 지울리니 경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귀국 기사단의 숙영지는 반대편으로 알고 있는데요.”
“허 참…. 언제까지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실 겁니까? 남자가 이만큼 노력하면 한 번쯤은 져주시지….”
“이보세요, 지울리니 경…!”
“예! 브로시니 캄폴리노 지울리니입니다!”
“… ….”
하아…. 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자르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경은 네오시아 공화국의 전군을 대표해서 이곳에 오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귀국의 군부가 무슨 말을 듣겠습니까?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손을 내젓는 브로시니.
“무슨 그런 말씀을…. 삼백 기사단의 명성이 그 정도로…,”
“어쨌든 귀공과 술잔을 기울일 일은 없을 겁니다. 드시고 싶으면 귀공의 수하들과 마음껏 드시지요.”
“에이 참…, 시커먼 사내놈들하고 무슨 술을…, 이봐요, 나자르 총사…!”
느물거리던 브로시니는 나자르가 홱 돌아서서 군막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자 당황하며 그녀를 쫓았다. 마침 군막에서 나오던 루카스는 이를 보고 멈춰섰다. 무슨 일이야? 보시는 대롭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하는 나자르의 뒤에 어느새 브로시니가 다가왔다.
“이거 루카스 사령이 아니십니까? 하하하…. 술 한 잔 하자고 왔는데 총사께서 계속 거절을…,”
“삼백 기사단의 명성은 옛말인가 봅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어먹자 브로시니는 어라…? 하는 얼굴로 술병을 내렸다. 저럴 줄 알았지….
“하긴 그게 벌써 20년 전인데…. 20년 전 명성으로 어떻게 먹어주지 않을까, 뭐 그런 건가?”
빈정거리는 루카스의 말에 브로시니의 표정에서 여유가 가셨다. 나자르는 조금 심하다 싶은 루카스의 말로 인해 싸움이라도 날까 싶어 초조해졌지만, 타국의 지휘관 앞에서 제 상관을 말리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지금 상단 호위무사들이 실력행사 한 번 해 보이겠다…?”
바이마샤르가 상업대국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브로시니가 노골적으로 그를 폄하하고 나서자 이번엔 나자르가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여 검을 뽑아 브로시니를 향해 겨누었다.
“지금 그 말씀 사과하시죠. 먼저 무례를 저지른 건 그쪽입니다.”
“…. 술 한 잔 하는 게 그렇게 큰일입니까? 대체 왜 그렇게 거절하시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나자르에게는 존대를 쓴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브로시니를 쏘아보며 재차 사과를 요구했다.
“어서 사과하시지요. 지금 한 말씀과, 그간의 모든 무례에 대한 사과까지 이 자리에서 받아야겠습니다.”
“…. 난 무례를 저지른 기억이 없는데….”
“아비들의 이름값으로 먹고 사는 자들이니…, 분별 따위가 있을 리 없지.”
“…뭐야…?”
브로시니의 표정에서도 전의가 오르기 시작했다. 나자르는 검을 거두고는 돌아서서 루카스를 향해 곧게 섰다.
“사령님. 브로시니 캄폴리노 지울리니 경은 오는 내내 제게 무례를 저질렀고, 또한 사과는커녕 우리 바이마샤르 군부뿐만 아니라 공화국을 모욕했습니다. 국가를 대표하여 온 보위부의 총사로서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결투를 신청하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십시오.”
“….”
“…난 여자랑은 술자리랑 잠자리만 하는데….”
그 말에 나자르가 독기를 품은 눈으로 홱 돌아봤으나, 브로시니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루카스를 자극했다. 기왕에 한다면 대장끼리 해 보는 게 어때? 어차피 막말한 건 우리들인데…. 루카스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나쁠 것 없지….”
“사령님…!!”
“물러서.”
그는 나자르의 결투 신청에 대해 일축해버리고는 투기를 내뿜으며 앞으로 나섰다. 루카스의 몸 주위에 일어나는 투기를 본 브로시니가 비릿하게 웃으며 술병을 내던졌다.
“뭐야, 이거…. 별 구경을 다 하게 되는군.”
“피차일반인 것 같은데….”
밖에서 일어나는 이 소동에 무슨 일인가 싶어 모인 병사들은 그들 주위를 맴돌고 있는 투기를 보며 술렁거렸지만, 감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나자르도 이 정체불명의 기운을 보며 설마설마 했다. 이스마르가 마검사의 근원지라는 거야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미키네오스의 영향권 내에 있는 바이마샤르에선 마검사는커녕 마법사나 심지어 점술가조차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애들 놀라게 할 것 없이 검술로 하자고….”
검을 이마 위로 들며 자세를 잡는 브로시니를 향해 대답 대신 루카스가 먼저 공격해 들어갔다. 마투기가 실린 맹렬한 검격이 브로시니를 조각내버릴 듯 달려들었다.
“흥…!”
몸을 숙이며 쳐낸 브로시니의 기운도 보통이 아니었다. 한 번 부딪칠 때마다 검이 부서질 것처럼 격렬한 소리가 나고 불똥이 튀겼다. 목, 어깨, 허리, 다리 등을 향해 사정없이 그어지는 루카스의 검격이나 찌르기 위주로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는 브로시니의 검격이나 누구 하나 아니랄 것 없이 살의를 띠고 있었다.
나자르의 청이 무시된 것은 이제 둘째 문제였다. 이대로만 가면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날 것 같았다. 그녀가 말린다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단이나 지키는 주제에 꽤 하는…구먼…!!”
“그 입은…, 죽어야 다물어지겠군…!”
루카스는 그를 끌어들이듯 검을 수평으로 긋더니 회전력을 이용해 그대로 브로시니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제대로 맞은 브로시니는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고, 루카스는 그가 숨 고를 틈도 없이 무릎을 향해 대각선으로 검을 내리그으며 쫓아갔다. 그대로 두면 무릎 아래가 뎅겅 잘려나갈 기세였다. 브로시니는 검끝을 아래로 늘어뜨려 검격을 흘려내며 그대로 검날을 타고 올라가 목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사령님…!!”
왕궁에서의 연회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저마다의 속내는 따로따로였어도, 굳이 이 자리에서 연합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는 없었다. 연회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리토르나와 레이네였다. 옅은 녹색의 데이지가 수놓아진 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이네는 부왕의 당부대로 단정한 몸가짐을 유지하며 자리한 이들의 시선을 달고 다녔다. 펠리그로니에프 대영주 역시 그녀의 몸가짐을 연신 칭찬하며 시선을 자주 주었다.
“대영주께서 다스리시는 곳은 늘 기강이 바로 서 있고 거짓된 말과 행동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광대한 지역을 훌륭히 다스리시는 방도에 대해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언을 좀 얻을 수 있을는지요?”
“이 사람이 아무리 그렇다 한들, 20년 만에 미키네오스의 국권을 일으켜 세우신 여기 국왕폐하만 하겠습니까.”
“울리프 대영주께선 짐을 놀리십니다 그려, 허허….”
“무슨 말씀을….”
“대영주의 고결하신 인품과 노련하신 통치는 우리 보르틴 전체에 널리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고견을 들려주시지요.”
“무릇 통치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잘 따르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민들은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권리가 많아지고, 모이게 되면 늘 충동적이고 우매한 주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듣고 있던 핫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으나 펠리그로니에프는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어갔다. 따라서 법제를 엄히 하고, 그것을 두려워하게끔 한다면 시민들은 단합하여 제 이권을 주장하며 난동을 일으키거나 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본보기를 제대로 보여야 한다, 이런 소리였다. 공화정을 수백 년간 이어온 바이마샤르의 입장에선 과히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으나 핫산은 짐짓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법제를 엄히 한다. 정말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대영주는 입꼬리를 슬쩍 올릴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대국의 황녀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아직 식견이 좁고 통치에 관하여 아는 바 없어 감히 이 자리에서 말을 꺼낼 게재가 못 된답니다.”
“여인은 통치보다는 부군의 위안이 되는 법을 알아야지요. 언제나 겸손하게 물러설 줄 알고 말을 아낄 줄 알며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봐도 펠리그로니에프는 리토르나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한참 먼 곳이라 해도 그녀를 앞에서 대놓고 폄하하는 대영주의 태도에 핫산은 무슨 일이라도 날까 싶어 불안불안했다.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리토르나는 그 말로 응수했다.
“아주 오래간만에 입맛 가시는 인간을 만나셨어요.”
그들로부터 떨어져 리토르나가 홀로 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레이네가 다가와 속삭였다.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리토르나를 대영주는 노골적으로 고깝게 쳐다보았다.
“영주님, 아깐 좀 심하셨던 것 아닙니까? 잉그라드는 대국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그럼 내가 야만인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단 말인가?”
수행하는 시종의 고언을 그는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웃는 법도 모르는 천박한 것들…. 그때 근위장이 바쁜 걸음으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뭔가 다급한 일이 생긴 듯 그는 바루나에게 다가와 소식을 알렸다.
“폐하, 사신단 호위기사단에서 문제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무슨 말인가?”
“그게….”
근위장의 눈길이 네오시아의 부통령과 핫산을 가리켰다. 대충 감 잡은 바루나가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을 땐 브로시니나 루카스나 둘 다 독기가 오를 만큼 올라 한 치 양보 없는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표정들엔 여유 대신 살의와 전의만이 번득거렸고, 보는 사람의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그들의 모습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핫산과 부통령은 이 비상사태에 당황하여 허옇게 질려버렸고, 바루나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부통령이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동안 핫산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국왕을 향해 능청을 떨었다.
“하하핫핫하하하…!! 기운 넘치는 젊은 지휘관들이 벌써부터 기량을 뽐내고들 있습니다, 그려…! 안 그렇습니까?”
“…, 그렇구려….”
푹 하고 같이 웃음을 터뜨리는 바루나는 그의 순간적인 대응에 제법인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곤 이내 박수를 치며 그들의 기량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숨죽이며 이 대결을 지켜보던 병사들의 시선이 일순 그들 셋에게로 향했고, 서로를 향해 죽일 듯이 덤벼들던 루카스와 브로시니도 검을 멈추었다.
“대단들 합니다. 정말 대단한 기량이오…!”
“부…부통령 각하….”
“…!”
바루나는 짐짓 감격했다는 듯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다.
“저만한 기사는 우리 미키네오스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든데…. 역시 삼백 기사단과 보위부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하하…. 소란을 피워 송구합니다. 젊은이들의 치기라 여기시고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부통령도 정치에 몸담은 이답게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무마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바루나는 일을 크게 벌여놓고자 했다. 둘을 떼어 말려놓고 돌아온 연회장에서 바루나는 오피퀴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말인즉슨 오피퀴움의 전초전 형태로 열병식을 열어 이번 회의 중의 여흥을 즐겨 보자는 얘기였다.
“어떻습니까? 짐은 좋은 여흥거리가 될 거라 보는데….”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국왕폐하께서 참으로 탁월한 제안을 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찬성을 표한 것은 대영주였고 모두들 질세라 그에 응하는 가운데 부통령과 핫산만이 민망한 낯색으로 마지못해 찬성의 뜻을 밝혔다.
“공주는 각국의 지휘관들에게 전달도 할 겸해서 연회를 열어 주거라. 그래줄 수 있겠지…?”
“공주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하하…, 기실 연회라는 게 위안과 여흥 아니겠습니까. 그 점에서는 이 아이가 짐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폐하….”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민망한 기색을 연출하는 레이네를 보고 대영주는 볼수록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하며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그렇군요. 수행하느라 지친 젊은 지휘관들에게 공주님의 아름답고 기품 있는 모습은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국왕폐하의 탁견에 감복했습니다. 찬사가 지나치십니다, 대영주….
“얼마나 피곤하게 구는지, 넌 못 봐서 모를 거야. 세상에 황녀를 앞에 놓고 여자는 남편을 위안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느니, 얌전해야 한다느니….”
레이네는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목까지 올라오는 갑갑한 드레스를 벗으며 대영주에 대해 쉴 새 없이 험담을 늘어놓았다. 시녀들은 당황하여 서로 눈치만 살피며 네네 맞장구만 쳤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레이네가 뒤를 돌아보자, 등에 묶인 매듭을 풀던 시녀가 긴장한 낯으로 말했다.
“나다니엘님은 객궁으로 보내셨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황녀를 부르러 나다니엘을 보냈었다.
“이 늦은 시각에 황녀를…?”
“…. 무슨 다른 일이야 있겠습니까. 들어보니, 황녀와 공주님의 사이가 요즘 들어 상당히 친근해졌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그 얘기는 나도 들어 알고 있네. 너무 가까워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대국의 황위계승권자와 친분이 생기는 일은 공주님께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터놓을 벗이라면 더욱 좋은 일이겠지요.”
정무대신의 말에 바루나는, 어찌 아비인 나보다 자네가 더 아비 같네 그려, 하며 허허 웃었다. 웃음 뒤에 정무대신은 슬쩍 바루나를 힐난하듯 한 마디 덧붙였다. 조금 짓궂으셨던 것 같습니다, 오피퀴움 말입니다.
“그게 왜…?”
“본래 그 제안은 비센테 추기경께서 하셨던 것이잖습니까. 하필 그런 자리에서 말씀하셔서 바이마샤르와 네오시아 측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시다니요.”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툭 툭 쳐 주는 편이 좋지.”
“비센테 추기경은 좋아하겠습니다.”
국왕은 정무대신의 말에 그저 가볍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어차피 교총의 입장이야 바루나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상징적이나마 교총의 권위를 세워주려는 바루나의 의도에 교총이 반대할 리는 없었다. 문제는 펠리그로니에프였다. 대륙의 동북방을 장악하고 있는 트로이센 제국 부흥군의 군주로, 이미 선대에 이르러 대부분 수복한 옛 제국의 영토를 이어받았다. 때마침 보르틴 전체를 뒤흔든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대륙의 극동 지역으로 물러나 세를 유지하였다.
“우리가 허덕거리고 있는 동안 세를 확장했으니…, 비바람은 우리가 다 막아주고 그 동안 제 살을 찌운 격입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쩌겠나. 그보다는 앞으로가 문제일세.”
“…, 그렇습니다. 아마도 정벌을 통해 대륙의 패권을 가져가려 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
일리는 있었으나, 바루나는 수긍하는 대신 눈을 들어 정무대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묻듯 마주 쳐다보는 라크라오스에게 묻는다.
“자넨 마치 이 전쟁…, 다 이긴 것처럼 말하는군…?”
“…,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할 폐하가 아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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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한파로군요. 며칠 전 여자친구가 저보고 "작년과 올해 들어 부쩍
춥다는 소릴 한다"며 나이먹었다고 핀잔을 주더군요. 처음엔 저도 정말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작년부터 겨울이 부쩍 추워졌잖습니까.-_-
암튼 오늘내일은 영하 17도까지 내려간다네요. (여기는 성남시~)
추운 날씨를 무척 좋아하는데... 오늘밤(토요일밤)은 나가서 맥주라도
한 잔 션~하게 해야겠습니다. 크헛헛.....;;;
----아참... 펠리그로네의 이름을 펠리그로니에프로 바꾼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언어적인 통일성을 좀 주고자 그렇게 바꿨습니다.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께 늘 그러듯,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추운 날씨에
건강을 늘 챙기시길. 날이 혹독하게 추우면 오히려 감기에 안 걸린다고는
합니다마는.. 그것도 거짓말인 것 같습니다. ㅎㅎ.
그럼 또 다음주에...(_ _)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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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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