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린이 집을 나가고 바슈미르 부인은 내내 시름에 잠겨 건강을 해치고 있었다. 수차례의 안식일이 지났지만 아이린에게선 아무 소식도 없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온 아로사의 낯색도 밝지 못했다.
“오늘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까?”
집사의 물음에 아로사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 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는 좀 어떠셔…? 그나마 저녁식사는 조금 드셨습니다. 그녀는 2층에서 잠시 멈춰서서 어머니의 방을 물끄러미 보고는 다시 올라갔다.
검을 풀어놓고 근무복을 벗자 목욕 준비를 마친 시녀가 들어왔다. 더운 목욕물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쏟아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침대에 파자마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지 밖은 어두웠다. 아로사는 경대 앞으로 나아가 커튼을 열었다.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바깥 풍경은 고즈넉하게 차가운 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래층에선 일찍 일어난 하인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멀찍이 들려왔다.
“에그머니나…!”
마침 세숫물을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서던 시녀가 깜짝 놀라며 우뚝 멈춰섰다. 실루엣으로만 보인 아로사의 모습을 유령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로사는 말없이 고갯짓으로 아는 체를 하며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가씨.”
시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그마한 불길이 남은 벽난로 옆에 대야를 올려놓았다. 새벽수련…, 하실 건가요? 다시 고갯짓으로 대답하며 대야 앞으로 다가오는 아로사에게 시녀는 수건을 받쳐 든 채 옆으로 물러섰다.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눈은 조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아로사는 차분한 마음으로 검을 천천히 운용하며 눈을 감은 채 수천 번도 더 연습했던 검식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하늘의 마음과 대기의 흐름을 담아 내뻗은 검식…이라고 했던가. 거창하기도 하군…. 아로사는 책 속의 구절을 되뇌이며 피식 웃었다. 문득 이전에 한율이 읊었던 환의 법문이 떠올랐다. 하늘보다 높은 자 없고, 땅보다 낮은 자 없으니…. 그리곤 집사가 떠올랐다. 종놈이란 말을 했던 자신이 조금 민망해졌다. 늦었어도 어쨌든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로사는 의회당으로 가기 전 먼저 보위부 자문위원의 공관으로 향했다.
“아로사 아가씨로군요.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나이를 알 수 없는 집사는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로사는 막상 그를 마주대하자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아 머뭇거렸고, 집사는 일단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드시지요.”
“아…. 고맙….”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찻잔을 들었지만, 아로사는 먼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 지 몰라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집사는 헨야를 내보낸 뒤 연초를 권했다. 아로사가 연초를 받아 불을 붙였다. 저도 태우겠습니다. 집사가 연초를 피워 물고는 의자를 끌어다 앉는 동안 아로사는 집사를 계속 흘끔거렸다.
“바슈미르 부인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좀 어떠십니까?”
“뭐…. 그냥….”
“… ….”
연초가 다 타들어가도록 둘은 말이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집사였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떠나기 전에 아가씨를 뵐 수 있었으니….”
“…? 이제 여기 그만두는 건가?”
“…예. 저도 이제 나이가 있지 않습니까. 하하….”
“… ….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보기보다 전 나이가 많습니다.”
“… ….”
하나 마나 한 말들이 오가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몇 차례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로사가 하려던 말을 꺼냈다.
“지난번엔….”
“….”
“미안했다.”
“…. 뭐가 말입니까?”
“… ….”
정말 미안했던 모양이다.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아로사는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입술을 떼었다.
“종놈…이라고 했던 거….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어.”
“….”
빙긋이 웃는 집사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의 얼굴이 아로사는 더욱 불편했다. 집사는 연초를 껐다.
“수련에 진전은 좀 보고 계십니까?”
“…. 그건 왜…?”
“…. 아마도 수년째 답보 상태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
“…!”
아로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태연한 집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가씨의 마음이 굳어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호흡법과 심법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러면 길이 보일 겁니다.”
“…!!”
거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침묵이 이어졌다. 아로사는 중얼거리듯 그에게 물었다.
“당신…, 누구야…?”
“강해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가씨가 품은 검이 베어야 할 것은 먼저 마도들이 아니라, 마도들을 향한 아가씨의 마음이지요.”
“…,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아로사는 발끈하여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집사도 마주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로사에게 집사는 여전히 깍듯한, 그러나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 말했다.
“복수심으로 검을 휘두르는 사람은 결국 그 검에 자신이 베이게 되어 있습니다. 원한이나 탐욕을 버리고 나는 왜 검을 휘두르는가,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사무랑의 정신이었습니다.”
“…!”
뭔가로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의 아로사를 향해 집사는 가볍게 목례했다. 말이 길었습니다. 늦으셨을 것 같은데…. 집사의 말을 아로사가 끊고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당신은 대체…?”
“… ….”
“…혹시….”
“말씀드려도 믿지 못하실 겁니다. 한율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라고만 말씀드리지요.”
사과하러 왔다가 머릿속을 한바탕 휘젓는 소릴 들은 아로사는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어쨌든 집사가 했던 말이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 물어봐야 집사가 뭔가를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고, 들은 이야기를 곱씹어 본다고 무슨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아로사는 손을 내저으며 도망치듯 그 곳을 나섰다.
“왜 저러세요?”
“집안이 시끄러우니 마음이 어지러운 모양이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얼른 집을 나서서는 말을 몰고 멀어지는 아로사를 보곤 헨야가 물었지만 집사는 짐짓 걱정하듯 한숨지으며 하나 마나 한 답변만 내놓았다.
“그보다…, 알아는 봤나?”
“지금 ?렌 성 근처에 다다랐을 걸요? 며칠 전에 브로이켈라인 성을 떠난 걸로 확인됐으니까….”
“… ….”
생각보다 오래 가는군…. 집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헨야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생각보다 안 잡히고 오래 가네요 하며 팔짱을 꼈다.
“아이린의 성격으로 봐선 꼬리를 줄줄 달고 다닐 것 같은데 벌써 국경 근처까지 가다니….”
“한율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나?”
헨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난감한 얼굴로 한숨울 푹 내쉬었다. 전 마법사도 아니잖아요. 제 법력으로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겠어요?
“그러게 평소에 좀 열심히 수련해두라니까.”
“집안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메이드 생활을 어디 해봤어야지, 하긴….”
“가자, 어쨌든…. 국경지역이면 붙잡힐 수도 있어. 여기 있으면 더 안 좋은 일만 생긴다.”
“더 안 좋은 일이라뇨?”
“그건 나중에. 얼른 짐 싸.”
“만날 나만 부려먹어.”
“씁~!”
집을 떠나 몇 차례의 안식일이 지나자 아이린의 행낭은 부쩍 가벼워져 있었다. 까칠해진 얼굴에 옷도 영락없는 방랑객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에 없이 밝았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이린은 곧 한율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다가 이내 떠난 목적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추스르곤 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중얼거리며 지도를 펴 보는 아이린은 거의 국경 지역에 다다라 있었다. 서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미키네오스와 맞닿은 국경이었다. 국경을 넘으려니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하룻밤 묵어가기로 생각하고 멀리 보이는 ?렌 성으로 말을 몰았다. 장이 열리는 날이었는지, 반쯤 비어 있는 수레를 싣고 성에서 나오는 시민들이 줄지어 그녀의 옆을 지나쳤다.
“시민권을 보여주게.”
성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아이린은 품을 뒤졌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러는 모양이 못마땅했는지, 병사는 고까운 눈으로 아이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다 이내 아이린이 내민 명예시민권을 보고는 창을 곧추세우며 군례를 올렸다.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사람을 찾고 있는데, 한율 공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알려진 게 있어?”
“예…? 한율 공…이라면.”
들어가려다 말을 멈추곤 묻는 아이린에게 병사가 말을 더듬었다. 바이마샤르 전역에 수배령이 떨어진 탈영병이었으니, 명예시민이 ‘공’이란 존칭을 붙이는 것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글쎄요, 저는 그저 성문을 지키는….”
“…. 그래. 여기 행정관님을 찾아가서 물어보지 뭐.”
“아, 예….”
마침 교대 시간이었는지 병사 두 명이 다가와 물었다. 뭐야? 명예시민이야? 명예시민인지 뭔지…, 어디 좋은 집안 딸 같은데…. 툴툴거리며 방패를 챙겨 메는 그에게 왜 그래? 뭘 물어보는데? 성문지기한테 탈영병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보잖어.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알아? 헛, 참…. 어쨌든 수고들 해.
장이 끝나가는 ?렌 성의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의외로 번화가라는 생각에 아이린은 천천히 말을 몰면서 남은 물목들을 팔아치우느라 소리소리 지르는 장사치들과 막장에 이르러 가격이 내린 물건들을 사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멀리서 온 상인들이 많았는지 남은 객실이 없음을 알리는 팻말을 붙여 둔 여각들이 제법 많았다. 목욕 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이린은 큰 여각이 없는지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다시 말을 몰았다.
의회당만큼이나 높은 탑이 솟은 큰 여각의 종업원은 아이린의 행색에 당장 내쫓으려 하다가 명예시민권을 보고는 다시 안으로 들여놓고도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욕실 달린 방으로 주세요.”
“돈은… 갖고 계신가요?”
“… …. 얼만데요?”
아이린은 행낭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12몰트 400지젤입니다요. 명예시민이시니 세금까지 합치면 거의 14몰트입니다. 아이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로서는 금전에 대한 개념이 있을 리 없었다. 무턱대고 금화와 은화를 묵직하게 챙겼으니 모자라지는 않겠지 여기는 정도였다.
“난 또…. 여기요.”
서슴없이 은화를 몇 개 꺼내어 주니 종업원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굽신거리더니 아이린에게 시녀까지 붙여주며 방으로 안내하게끔 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부르시지요, 아가씨.”
“음…. 혹시 한율 공에 대한 소식은 이곳에서 아는 사람 없나요?”
“예…?”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얼굴을 하던 종업원이 다시 당황스러운 낯색을 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 그… 탈영병 말씀이신가요.
“탈영병이라뇨! 한율 공을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발끈하여 언성을 높이는 아이린에게 종업원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거듭 읍소를 했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올라가는 그녀를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는 그에게 다른 종업원이 다가왔다. 방금 한율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어…. 수배령 붙은 사람이잖아. 어떡하지? 어떡하긴~! 그래도 명예시민인데…. 명예시민이고 뭐고 간에 어쨌든 관청에 알려야지~!
수배령이 내려진 이상 한율은 일단 죄인이었다.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아이린은 오래간만에 뜨끈한 물에 몸을 푹 담갔다. 기세 좋게 집을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체 한율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게다가 밥 먹고 옷 입는 것까지도 시중을 받던 생활이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리니 그것도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내일은 옷이라도 좀 사든가 해야지….’
이 철없는 인사는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하룻밤 편안하게 보내고 다시 떠날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한율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과 함께.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아이린은 ?렌 지역 치안부 군사들의 방문을 맞았다. 그들은 명예시민에 대한 예우로 포박은 하지 않은 채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왜들 이러세요? 내가 뭘 어쨌다고…?”
“어젯밤 수배령이 떨어진 탈영병 한율에 대해 물어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몇 가지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조사라뇨?”
“일단 함께 가주시죠.”
“….”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관청을 찾아갈 생각이었으니 아이린은 그들과 동행하기로 했다. 장이 열렸던 거리를 지나 광장에 이르니 그 곳에 관청이 서 있었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관청 앞 광장에는 군사들만이 오락가락하고 있었고, 옥사처럼 생긴 양쪽의 건물엔 뿔처럼 삐죽이 탑들이 솟아 괴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조금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며 정면에 보이는 곳으로 군사들과 함께 말을 몰아갔다.
“한율 전 보위부 군사자문의 탈영 사건 때문에…, 한동안 여기가 좀 시끄러웠습니다. 지금은 거의 뭐…, 포기상태이긴 하지만.”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치안관은 불룩 솟은 배를 짓누르는 근무복 때문에 몹시 힘겨워 보였다. 누가 없으면 늘 앞단추를 풀고 지내야만 할 것 같았다. 힘겹게 매무새를 유지하는 앞단추를 보자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푹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날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은 탓인지, 한층 인물이 돋보이는 그녀가 그렇게 웃자 치안관은 민망하게 따라 웃었다.
“일단…, 어제 들은 바로는 아가씨가 ‘한율 공’이라고 부르면서 편드는 말을 했다고 하던데. 그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편드는 말이 아니에요…!”
그녀가 뾰족하게 언성을 높이자 치안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실수했다 싶은 느낌에 아이린은 얼른 목소리를 수습하며 대답을 이었다.
“처음 그 분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저희 집에서 지내셨어요. 그… 자문 하시기 전까지….”
“아, 네…. 보위부 군사자문이셨죠.”
“네, 보위부 군사자문…!”
“명예시민권이 있으시던데, 그건 본인의 것인가요?”
“….”
“이름과 직위를 좀 말해보실래요? 뭐 아버지 직위라든가 뭐든….”
“아이….”
신원확인을 하는 데서 아이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말을 하려다 말고 뜸을 들이며 뭔가 생각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하자 치안관의 표정에 의구심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이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로사. 아로사 바슈미르입니다. 보위부에 있어요. 수배령이 떨어진 죄인을 찾으러 조사차 들렀습니다.”
“… ….”
치안관은 못 믿는 눈치였다. 흠…. 이름과 직책을 적어 넣으면서도 치안관의 눈은 이따금씩 아이린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바슈미르라면…. 치안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방이라 해도 일단은 치안관이었으니, 바슈미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명예시민권을 가진데다 중앙의회의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대는지라 함부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도 어려웠다.
“바슈미르라면…. 혹시 핫산 바슈미르 최고의원님과는 어떻게 되시는지….”
“…. 저희 아버지세요.”
“….”
사실이라면 당장 방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감한 얼굴로 한참 입맛을 다시더니 치안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율이 저희 관할구역에서 사고를 친 건 사실이지만…. 작성하던 문서를 내려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사실상 그 자를 잡아들이려고 애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은….”
“…? 왜요…?”
“….”
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보위부 총사는커녕 군대 근처에도 안 가본 사람이다. 치안관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어갔다.
“일단 국경을 넘어가 버린 것 같으니까요….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게다가 뭐…, 다른 나라에 협조를 구하면서까지 잡아들여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렇죠~. 나쁜 놈 손봐준 건데요~.”
“… ….”
얼른 반색하며 맞장구를 치던 아이린은 아차 싶어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치안관의 기색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어서 나오는 그의 말씨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보다 똑바로 말하지. 이 명예시민권과 돈은 어디서 훔쳤어?”
“네…?”
“바른대로 대. 이래 뵈도 내가 치안관 생활만 십 년이 넘었어. 척 보면 모를 것 같아? 네년은 군대 근처에도 안 가봤어. 안 그래?”
“… …!”
“얼굴 반반한 걸로 어디 부잣집 도련님이라도 후려서 시민권이랑 돈 훔쳐 돌아다니는 것들 한두 번 본 줄 알아?”
“아…, 아니에요…!”
“바른대로 말 못해?!!”
쾅 소리가 나도록 치안관이 책상을 내리치자 아이린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첫인상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말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아이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낭패다. 연초를 피워 문 치안관이 연기를 얼굴에 대고 내뿜었다. 손을 내저어 연기를 흐트러뜨리는 아이린의 턱을 어느새 치안관이 움켜쥐었다.
“바른대로 말하고 장 맞고 때울래, 아니면 고문이라도 받을래?”
이쯤 되니 당황했던 그녀로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이린의 성질이 폭발하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야!! 내가 거짓말 좀 했기로서니 어디다 대고 이년 저년이야?!!”
어라…? 하는 얼굴의 치안관.
“그래, 나 군대 근처에도 안 가봤다!! 집 나와서 한율님 찾아가는데 도로 끌려갈까 봐 거짓말 좀 했다, 왜?!!”
“아니 뭐 이런 계집이 다….”
“의심나면 확인해 봐!! 이씨…!”
아이린은 목에 건 펜던트를 꺼내어 그에게 열어보였다. 가문의 표식 아래로 조그맣게 새겨진 바슈미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치안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는 펜던트와 아이린의 강단에 찬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걸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난감해 하며 제자리에서 서성거렸다. 아이린은 자리에 앉아 펜던트를 닫고는 신경질적으로 팔짱을 꼈다. 어디 한 번 두고 보라지. 씨근거리는 아이린에게 치안관이 잠시 기다리라며 방을 나섰다. 당황해서였는지, 옷이 힘들어서였는지, 어쨌든 그는 식식거리며 바삐 걸음을 옮겨갔다.
“바슈미르 의원댁 따님이라고?!”
말을 전해들은 행정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치안관은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며 난처해했다. 행정관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일단은 사실 여부를 확인해봐야지.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행정관은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단 시락으로 사람을 보내 봐. 확인할 사람 한 명 보내달라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사실 확인 안하고 그냥 처리해버리면, 나중에 감당할 자신 있나?”
“…!”
“일단 구금해 두고 그렇게 처리해.”
잠시 기다리라던 치안관은 꽤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왔다. 뭔가 결정을 한 것 같은 얼굴로 병사 둘을 대동한 채. 아이린은 그가 나갈 때와 똑같이 팔짱을 낀 채로 고개만 휙 돌려 굳은 얼굴의 치안관을 똑바로 쳐다봤다.
“연금해.”
“아니, 뭐라고요?!”
당당하게 쳐다보던 아이린의 표정이 치안관의 말에 돌변했다. 병사 둘이 다가와 팔을 붙들었다. 아이린은 뿌리친답시고 애를 써 보았지만 뿌리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치안관이 여전히 굳은 얼굴로 그녀를 향해 대충 설명했다.
“의원댁 따님이란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일단 확인될 때까지는 여기 있어줘야겠소. 소지품은 확인된 후에 돌려줄 테니 걱정은 마시오.”
“뭐…?! 어쩔 생각인데요? 나 좀 보내줘요~! 나 한율님 만나야 돼요~!!”
“시락으로 연통을 했으니 곧 사람이 올 거요. 그 때가 되면 알겠지.”
“안돼…!! 안돼요!! 집에 알리면 안돼~!! 이거 놔요~!!”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턱이 없는 치안관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린의 반응에 의구심만 더욱 일어났지만, 일단은 명령이니 그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울다시피 하며 버둥거리는 아이린이 병사들에게 이끌려 나갔다. 치안관은 자리에 앉아 연초를 꺼내 물었다. 제기랄…. 갑갑한 듯 앞단추를 풀어헤치며 불을 붙인 그는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아이린의 행낭을 뒤졌다. 제법 묵직한 금화와 은화, 그리고 빵 몇 조각이 아무렇게나 접힌 지도 안쪽에 구겨져 있었다. 오랜 치안관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귀한 댁 따님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한율을 만나야 한다는 건 또 뭐고, 집에 알리면 안 된다는 건 또 뭔가. 철없는 아가씨가 좋아하는 사람 쫓아간다며 집 나간 건가. 하고 정확하게 짚어 생각하면서 그는 발을 책상 위에 포개 얹었다.
론도 정벌을 위한 연합회의 소집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울리프 지역으로부터였다. 울리프 령의 대영주 펠리그로네 폰 마르크 울리프 공작이 직접 온다는 전령의 소식에 바루나는 직접 나가 그를 맞이할 뜻을 밝혔다. 병무대신과 정무대신이 이를 말리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울리프 대영주 정도면 그 정도 성의는 보여줘야지.”
“폐하, 아무리 대영주라고 해도 일개 부흥군의 군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국의 국왕 폐하께서 직접 나가시는 것은….”
“병무대신은 그만하게. 제국 선포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세로만 치자면 네오시아나 이스마르에 결코 뒤지지 않는 곳일세. 내가 직접 나가는 편이 좋아.”
“…. 차라리 울리프 제국으로 선포해도 될 텐데 말입니다.”
시침을 뚝 뗀 채 한 마디 던지는 정무대신.
“정무대신…!”
플로랑이 정색을 하자 바루나가 이를 말리고 나섰다.
“트레제게 경이 음흉스러운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뭘 새삼 그러나.”
“폐…폐하….”
잠시 가벼운 이야기와 웃음이 지나가고, 정무대신이 일 얘기를 꺼냈다. 이번 회의에는 아무래도 추기경을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바루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추기경이라니요. 비센테 추기경 말씀입니까?”
“…. 그 자 말고 더 있겠는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당연히 총장 예하를 모셔야지요.”
“…. 형식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으니….”
“총장 예하를 모시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비센테 추기경도 모셔야 한단 말일세, 병무대신.”
“….”
“그만 가서 일 보지.”
“…. 예, 폐하. 그럼….”
자못 착잡한 표정이 되어 있는 플로랑을 보고, 바루나가 정무대신을 먼저 보내곤 근위장까지 내보냈다. 바루나가 무슨 할 말이 있을 거라 여긴 플로랑은 가만히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대는 유능한 사람일세.”
“…. 황공하옵니다, 폐하.”
“헌데 아직은 정치에 익숙하진 않은 듯하네.”
“폐하…!”
“그대가 소신 있고 의욕이 넘치는 것만은 내 높이 사지. 어느 누구보다도 그 점에 있어서 그대는 믿을만한 신하일세.”
“….”
“하지만…,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을 하는 것, 그게 정치라는 점을 그대는 주지해야 할 것 같네.”
“하오나….”
“말해보라.”
“… ….”
말을 하려다 마는 플로랑.
“괜찮으니 말해보라. 오늘은 무슨 말을 해도 좋다.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든 뭐든….”
“…. 폐하께선….”
“그래. 어서.”
“후회하신 적은 없습니까…?”
“…!”
늘 냉정하던 바루나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플로랑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물었다.
“정도보다는 술수를 앞세우며 다스려 오신 여정에 대해서 후회를 하신 적은 없으신지 알고 싶습니다.”
“… ….”
국왕의 집무실에 정적이 일었다. 플로랑은 대답을 기다리며, 바루나는 신하의 대담한 질문에 노기를 가라앉히며 침묵했다. 플로랑은 자신의 질문이 왕의 심기를 건드릴 것을 알았다. 질문을 하고서도 잘못한 것은 아닌지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일단 말을 뱉었으니 어쩔 수 없다. 지금이 아니면 이 같은 질문을 할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없네.”
바루나의 짧은 대답이 정적은 깨뜨렸으나, 경색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약간의 뜸을 들이고 바루나가 말을 이었다.
“자네 참…, 대단한 사람일세.”
“….”
“…. 오늘은…, 그만하지.”
“…. 물러가겠습니다.”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바루나를 향해 읍소하고 플로랑은 집무실을 나섰다. 거기엔 정무대신이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는 조각상이라도 되는 듯 플로랑을 향해 서 있었다.
“이 사람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
“… …? 트레제게 경….”
“…. 웬만하면….”
“….”
“되는 쪽으로…. 일을 되게 만들도록 애쓰는 편이 좋네.”
“… ….”
“…. 다음에 보세.”
마치 국왕으로부터 반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 몇 마디를 끝으로 라크라오스는 몸을 돌려 회랑 밖으로 사라졌다. 플로랑은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각주>----------------------------
명예시민 : 바이마샤르 시민 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 명예시민, 시민, 양민, 평민, 노예로 나뉘며
명예시민은 의회선거에 대한 출마자격을 갖는다. 전지역에 대해 통행세를 면제받는 특권이 있는
대신 세금은 매 안식일마다 내야 하는 의무도 동시에 지게 된다. 시민은 선거권을, 양민부터는
사유지를 가질 수 있으며, 평민은 경작지 대여의 권리가, 노예에겐 아무 권리도 없다. 말하자면
명예시민은 바이마샤르의 귀족 계층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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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의 이야기에 약간의 추가된 사항들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시나리오 흐름에는 변화가 없으나, 짜임새를 좀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추가되었습니다.
추가된 내용은
1. 리토르나는 바이마샤르에서 황제의 밀서를 받아 특사자로서 미키네오스에 갑니다.
황제의 특사자는 국외에서 황제의 전권을 위임받아 그 밀명을 수행하는 외교사절로서,
잉그라드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보르틴 북방의 두 세력-울리프 령과 미키네오스-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들어갑니다. 뭐... 들어갔다가 바루나한테 얽혀서 좀 곤란을 겪고는
있습니다만...;;
2. 레이네 마리 공주는 내사부장을 자기 사람으로 얻습니다. 앞부분을 보시면(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내사부장이 론지니아 전투에서 만샤르차크의 무훈에 묻혀
드러나지 않은 한율의 존재를 공주에게 전하지 않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내사부장은 한참만에 공주를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빌고, 공주는 자애로써 그를 용서하는
척하며 충성 서약을 받아냅니다.
3. 바루나 국왕 또한 마검사입니다. 이 내용은 레이네의 비웃음 속에 아주 살짝 나옵니다.
나중을 위해서 복선으로 몇 줄 적어넣었습니다. 윌토르 대주교를 포섭하러 왕도 대교구의
사원으로 향하는 길에 레이네는 "마검사 주제에 교회를 이렇게 크게 지어주었다"며
부왕을 비웃습니다.
4. 예스프리가 카몬 협곡의 독립대대로 부임하기 전, 부친인 라크라오스로부터 정식으로
레테르의 수호자로서 그 마법력을 승계받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다시 읽어보면서, 서술방식이나 시점 등이 조금 혼란스러워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내용상 크게 바뀌는 점은 없습니다만, 앞으로도 조금씩 추가되거나 수정되는 부분이 있으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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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국가 설정이라든가 하는 부분을 올려달라 요청하신 분이 계셨는데요,
저도 올리겠다고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아직도 올리질 못하고 있군요.;; 죄송합니다.
내용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설정을 그대로 올려드리기보다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각주를 다는 식으로 가면 어떨까 하여 이번에 처음으로 각주를 달아봅니다.
(처음 맞죠..ㅡ ㅡ??)
그럼... 다음주 일요일....아직 토요일 밤이로군요.;; 암튼 그 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까?”
집사의 물음에 아로사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 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는 좀 어떠셔…? 그나마 저녁식사는 조금 드셨습니다. 그녀는 2층에서 잠시 멈춰서서 어머니의 방을 물끄러미 보고는 다시 올라갔다.
검을 풀어놓고 근무복을 벗자 목욕 준비를 마친 시녀가 들어왔다. 더운 목욕물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쏟아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침대에 파자마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지 밖은 어두웠다. 아로사는 경대 앞으로 나아가 커튼을 열었다.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바깥 풍경은 고즈넉하게 차가운 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래층에선 일찍 일어난 하인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멀찍이 들려왔다.
“에그머니나…!”
마침 세숫물을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서던 시녀가 깜짝 놀라며 우뚝 멈춰섰다. 실루엣으로만 보인 아로사의 모습을 유령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로사는 말없이 고갯짓으로 아는 체를 하며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가씨.”
시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그마한 불길이 남은 벽난로 옆에 대야를 올려놓았다. 새벽수련…, 하실 건가요? 다시 고갯짓으로 대답하며 대야 앞으로 다가오는 아로사에게 시녀는 수건을 받쳐 든 채 옆으로 물러섰다.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눈은 조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아로사는 차분한 마음으로 검을 천천히 운용하며 눈을 감은 채 수천 번도 더 연습했던 검식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하늘의 마음과 대기의 흐름을 담아 내뻗은 검식…이라고 했던가. 거창하기도 하군…. 아로사는 책 속의 구절을 되뇌이며 피식 웃었다. 문득 이전에 한율이 읊었던 환의 법문이 떠올랐다. 하늘보다 높은 자 없고, 땅보다 낮은 자 없으니…. 그리곤 집사가 떠올랐다. 종놈이란 말을 했던 자신이 조금 민망해졌다. 늦었어도 어쨌든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로사는 의회당으로 가기 전 먼저 보위부 자문위원의 공관으로 향했다.
“아로사 아가씨로군요.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나이를 알 수 없는 집사는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로사는 막상 그를 마주대하자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아 머뭇거렸고, 집사는 일단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드시지요.”
“아…. 고맙….”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찻잔을 들었지만, 아로사는 먼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 지 몰라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집사는 헨야를 내보낸 뒤 연초를 권했다. 아로사가 연초를 받아 불을 붙였다. 저도 태우겠습니다. 집사가 연초를 피워 물고는 의자를 끌어다 앉는 동안 아로사는 집사를 계속 흘끔거렸다.
“바슈미르 부인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좀 어떠십니까?”
“뭐…. 그냥….”
“… ….”
연초가 다 타들어가도록 둘은 말이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집사였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떠나기 전에 아가씨를 뵐 수 있었으니….”
“…? 이제 여기 그만두는 건가?”
“…예. 저도 이제 나이가 있지 않습니까. 하하….”
“… ….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보기보다 전 나이가 많습니다.”
“… ….”
하나 마나 한 말들이 오가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몇 차례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로사가 하려던 말을 꺼냈다.
“지난번엔….”
“….”
“미안했다.”
“…. 뭐가 말입니까?”
“… ….”
정말 미안했던 모양이다.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아로사는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입술을 떼었다.
“종놈…이라고 했던 거….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어.”
“….”
빙긋이 웃는 집사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의 얼굴이 아로사는 더욱 불편했다. 집사는 연초를 껐다.
“수련에 진전은 좀 보고 계십니까?”
“…. 그건 왜…?”
“…. 아마도 수년째 답보 상태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
“…!”
아로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태연한 집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가씨의 마음이 굳어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호흡법과 심법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러면 길이 보일 겁니다.”
“…!!”
거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침묵이 이어졌다. 아로사는 중얼거리듯 그에게 물었다.
“당신…, 누구야…?”
“강해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가씨가 품은 검이 베어야 할 것은 먼저 마도들이 아니라, 마도들을 향한 아가씨의 마음이지요.”
“…,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아로사는 발끈하여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집사도 마주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로사에게 집사는 여전히 깍듯한, 그러나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 말했다.
“복수심으로 검을 휘두르는 사람은 결국 그 검에 자신이 베이게 되어 있습니다. 원한이나 탐욕을 버리고 나는 왜 검을 휘두르는가,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사무랑의 정신이었습니다.”
“…!”
뭔가로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의 아로사를 향해 집사는 가볍게 목례했다. 말이 길었습니다. 늦으셨을 것 같은데…. 집사의 말을 아로사가 끊고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당신은 대체…?”
“… ….”
“…혹시….”
“말씀드려도 믿지 못하실 겁니다. 한율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라고만 말씀드리지요.”
사과하러 왔다가 머릿속을 한바탕 휘젓는 소릴 들은 아로사는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어쨌든 집사가 했던 말이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 물어봐야 집사가 뭔가를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고, 들은 이야기를 곱씹어 본다고 무슨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아로사는 손을 내저으며 도망치듯 그 곳을 나섰다.
“왜 저러세요?”
“집안이 시끄러우니 마음이 어지러운 모양이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얼른 집을 나서서는 말을 몰고 멀어지는 아로사를 보곤 헨야가 물었지만 집사는 짐짓 걱정하듯 한숨지으며 하나 마나 한 답변만 내놓았다.
“그보다…, 알아는 봤나?”
“지금 ?렌 성 근처에 다다랐을 걸요? 며칠 전에 브로이켈라인 성을 떠난 걸로 확인됐으니까….”
“… ….”
생각보다 오래 가는군…. 집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헨야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생각보다 안 잡히고 오래 가네요 하며 팔짱을 꼈다.
“아이린의 성격으로 봐선 꼬리를 줄줄 달고 다닐 것 같은데 벌써 국경 근처까지 가다니….”
“한율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나?”
헨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난감한 얼굴로 한숨울 푹 내쉬었다. 전 마법사도 아니잖아요. 제 법력으로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겠어요?
“그러게 평소에 좀 열심히 수련해두라니까.”
“집안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메이드 생활을 어디 해봤어야지, 하긴….”
“가자, 어쨌든…. 국경지역이면 붙잡힐 수도 있어. 여기 있으면 더 안 좋은 일만 생긴다.”
“더 안 좋은 일이라뇨?”
“그건 나중에. 얼른 짐 싸.”
“만날 나만 부려먹어.”
“씁~!”
집을 떠나 몇 차례의 안식일이 지나자 아이린의 행낭은 부쩍 가벼워져 있었다. 까칠해진 얼굴에 옷도 영락없는 방랑객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에 없이 밝았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이린은 곧 한율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다가 이내 떠난 목적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추스르곤 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중얼거리며 지도를 펴 보는 아이린은 거의 국경 지역에 다다라 있었다. 서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미키네오스와 맞닿은 국경이었다. 국경을 넘으려니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하룻밤 묵어가기로 생각하고 멀리 보이는 ?렌 성으로 말을 몰았다. 장이 열리는 날이었는지, 반쯤 비어 있는 수레를 싣고 성에서 나오는 시민들이 줄지어 그녀의 옆을 지나쳤다.
“시민권을 보여주게.”
성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아이린은 품을 뒤졌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러는 모양이 못마땅했는지, 병사는 고까운 눈으로 아이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다 이내 아이린이 내민 명예시민권을 보고는 창을 곧추세우며 군례를 올렸다.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사람을 찾고 있는데, 한율 공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알려진 게 있어?”
“예…? 한율 공…이라면.”
들어가려다 말을 멈추곤 묻는 아이린에게 병사가 말을 더듬었다. 바이마샤르 전역에 수배령이 떨어진 탈영병이었으니, 명예시민이 ‘공’이란 존칭을 붙이는 것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글쎄요, 저는 그저 성문을 지키는….”
“…. 그래. 여기 행정관님을 찾아가서 물어보지 뭐.”
“아, 예….”
마침 교대 시간이었는지 병사 두 명이 다가와 물었다. 뭐야? 명예시민이야? 명예시민인지 뭔지…, 어디 좋은 집안 딸 같은데…. 툴툴거리며 방패를 챙겨 메는 그에게 왜 그래? 뭘 물어보는데? 성문지기한테 탈영병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보잖어.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알아? 헛, 참…. 어쨌든 수고들 해.
장이 끝나가는 ?렌 성의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의외로 번화가라는 생각에 아이린은 천천히 말을 몰면서 남은 물목들을 팔아치우느라 소리소리 지르는 장사치들과 막장에 이르러 가격이 내린 물건들을 사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멀리서 온 상인들이 많았는지 남은 객실이 없음을 알리는 팻말을 붙여 둔 여각들이 제법 많았다. 목욕 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이린은 큰 여각이 없는지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다시 말을 몰았다.
의회당만큼이나 높은 탑이 솟은 큰 여각의 종업원은 아이린의 행색에 당장 내쫓으려 하다가 명예시민권을 보고는 다시 안으로 들여놓고도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욕실 달린 방으로 주세요.”
“돈은… 갖고 계신가요?”
“… …. 얼만데요?”
아이린은 행낭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12몰트 400지젤입니다요. 명예시민이시니 세금까지 합치면 거의 14몰트입니다. 아이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로서는 금전에 대한 개념이 있을 리 없었다. 무턱대고 금화와 은화를 묵직하게 챙겼으니 모자라지는 않겠지 여기는 정도였다.
“난 또…. 여기요.”
서슴없이 은화를 몇 개 꺼내어 주니 종업원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굽신거리더니 아이린에게 시녀까지 붙여주며 방으로 안내하게끔 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부르시지요, 아가씨.”
“음…. 혹시 한율 공에 대한 소식은 이곳에서 아는 사람 없나요?”
“예…?”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얼굴을 하던 종업원이 다시 당황스러운 낯색을 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 그… 탈영병 말씀이신가요.
“탈영병이라뇨! 한율 공을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발끈하여 언성을 높이는 아이린에게 종업원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거듭 읍소를 했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올라가는 그녀를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는 그에게 다른 종업원이 다가왔다. 방금 한율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어…. 수배령 붙은 사람이잖아. 어떡하지? 어떡하긴~! 그래도 명예시민인데…. 명예시민이고 뭐고 간에 어쨌든 관청에 알려야지~!
수배령이 내려진 이상 한율은 일단 죄인이었다.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아이린은 오래간만에 뜨끈한 물에 몸을 푹 담갔다. 기세 좋게 집을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체 한율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게다가 밥 먹고 옷 입는 것까지도 시중을 받던 생활이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리니 그것도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내일은 옷이라도 좀 사든가 해야지….’
이 철없는 인사는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하룻밤 편안하게 보내고 다시 떠날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한율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과 함께.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아이린은 ?렌 지역 치안부 군사들의 방문을 맞았다. 그들은 명예시민에 대한 예우로 포박은 하지 않은 채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왜들 이러세요? 내가 뭘 어쨌다고…?”
“어젯밤 수배령이 떨어진 탈영병 한율에 대해 물어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몇 가지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조사라뇨?”
“일단 함께 가주시죠.”
“….”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관청을 찾아갈 생각이었으니 아이린은 그들과 동행하기로 했다. 장이 열렸던 거리를 지나 광장에 이르니 그 곳에 관청이 서 있었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관청 앞 광장에는 군사들만이 오락가락하고 있었고, 옥사처럼 생긴 양쪽의 건물엔 뿔처럼 삐죽이 탑들이 솟아 괴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조금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며 정면에 보이는 곳으로 군사들과 함께 말을 몰아갔다.
“한율 전 보위부 군사자문의 탈영 사건 때문에…, 한동안 여기가 좀 시끄러웠습니다. 지금은 거의 뭐…, 포기상태이긴 하지만.”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치안관은 불룩 솟은 배를 짓누르는 근무복 때문에 몹시 힘겨워 보였다. 누가 없으면 늘 앞단추를 풀고 지내야만 할 것 같았다. 힘겹게 매무새를 유지하는 앞단추를 보자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푹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날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은 탓인지, 한층 인물이 돋보이는 그녀가 그렇게 웃자 치안관은 민망하게 따라 웃었다.
“일단…, 어제 들은 바로는 아가씨가 ‘한율 공’이라고 부르면서 편드는 말을 했다고 하던데. 그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편드는 말이 아니에요…!”
그녀가 뾰족하게 언성을 높이자 치안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실수했다 싶은 느낌에 아이린은 얼른 목소리를 수습하며 대답을 이었다.
“처음 그 분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저희 집에서 지내셨어요. 그… 자문 하시기 전까지….”
“아, 네…. 보위부 군사자문이셨죠.”
“네, 보위부 군사자문…!”
“명예시민권이 있으시던데, 그건 본인의 것인가요?”
“….”
“이름과 직위를 좀 말해보실래요? 뭐 아버지 직위라든가 뭐든….”
“아이….”
신원확인을 하는 데서 아이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말을 하려다 말고 뜸을 들이며 뭔가 생각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하자 치안관의 표정에 의구심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이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로사. 아로사 바슈미르입니다. 보위부에 있어요. 수배령이 떨어진 죄인을 찾으러 조사차 들렀습니다.”
“… ….”
치안관은 못 믿는 눈치였다. 흠…. 이름과 직책을 적어 넣으면서도 치안관의 눈은 이따금씩 아이린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바슈미르라면…. 치안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방이라 해도 일단은 치안관이었으니, 바슈미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명예시민권을 가진데다 중앙의회의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대는지라 함부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도 어려웠다.
“바슈미르라면…. 혹시 핫산 바슈미르 최고의원님과는 어떻게 되시는지….”
“…. 저희 아버지세요.”
“….”
사실이라면 당장 방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감한 얼굴로 한참 입맛을 다시더니 치안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율이 저희 관할구역에서 사고를 친 건 사실이지만…. 작성하던 문서를 내려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사실상 그 자를 잡아들이려고 애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은….”
“…? 왜요…?”
“….”
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보위부 총사는커녕 군대 근처에도 안 가본 사람이다. 치안관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어갔다.
“일단 국경을 넘어가 버린 것 같으니까요….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게다가 뭐…, 다른 나라에 협조를 구하면서까지 잡아들여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렇죠~. 나쁜 놈 손봐준 건데요~.”
“… ….”
얼른 반색하며 맞장구를 치던 아이린은 아차 싶어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치안관의 기색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어서 나오는 그의 말씨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보다 똑바로 말하지. 이 명예시민권과 돈은 어디서 훔쳤어?”
“네…?”
“바른대로 대. 이래 뵈도 내가 치안관 생활만 십 년이 넘었어. 척 보면 모를 것 같아? 네년은 군대 근처에도 안 가봤어. 안 그래?”
“… …!”
“얼굴 반반한 걸로 어디 부잣집 도련님이라도 후려서 시민권이랑 돈 훔쳐 돌아다니는 것들 한두 번 본 줄 알아?”
“아…, 아니에요…!”
“바른대로 말 못해?!!”
쾅 소리가 나도록 치안관이 책상을 내리치자 아이린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첫인상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말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아이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낭패다. 연초를 피워 문 치안관이 연기를 얼굴에 대고 내뿜었다. 손을 내저어 연기를 흐트러뜨리는 아이린의 턱을 어느새 치안관이 움켜쥐었다.
“바른대로 말하고 장 맞고 때울래, 아니면 고문이라도 받을래?”
이쯤 되니 당황했던 그녀로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이린의 성질이 폭발하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야!! 내가 거짓말 좀 했기로서니 어디다 대고 이년 저년이야?!!”
어라…? 하는 얼굴의 치안관.
“그래, 나 군대 근처에도 안 가봤다!! 집 나와서 한율님 찾아가는데 도로 끌려갈까 봐 거짓말 좀 했다, 왜?!!”
“아니 뭐 이런 계집이 다….”
“의심나면 확인해 봐!! 이씨…!”
아이린은 목에 건 펜던트를 꺼내어 그에게 열어보였다. 가문의 표식 아래로 조그맣게 새겨진 바슈미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치안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는 펜던트와 아이린의 강단에 찬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걸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난감해 하며 제자리에서 서성거렸다. 아이린은 자리에 앉아 펜던트를 닫고는 신경질적으로 팔짱을 꼈다. 어디 한 번 두고 보라지. 씨근거리는 아이린에게 치안관이 잠시 기다리라며 방을 나섰다. 당황해서였는지, 옷이 힘들어서였는지, 어쨌든 그는 식식거리며 바삐 걸음을 옮겨갔다.
“바슈미르 의원댁 따님이라고?!”
말을 전해들은 행정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치안관은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며 난처해했다. 행정관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일단은 사실 여부를 확인해봐야지.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행정관은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단 시락으로 사람을 보내 봐. 확인할 사람 한 명 보내달라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사실 확인 안하고 그냥 처리해버리면, 나중에 감당할 자신 있나?”
“…!”
“일단 구금해 두고 그렇게 처리해.”
잠시 기다리라던 치안관은 꽤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왔다. 뭔가 결정을 한 것 같은 얼굴로 병사 둘을 대동한 채. 아이린은 그가 나갈 때와 똑같이 팔짱을 낀 채로 고개만 휙 돌려 굳은 얼굴의 치안관을 똑바로 쳐다봤다.
“연금해.”
“아니, 뭐라고요?!”
당당하게 쳐다보던 아이린의 표정이 치안관의 말에 돌변했다. 병사 둘이 다가와 팔을 붙들었다. 아이린은 뿌리친답시고 애를 써 보았지만 뿌리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치안관이 여전히 굳은 얼굴로 그녀를 향해 대충 설명했다.
“의원댁 따님이란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일단 확인될 때까지는 여기 있어줘야겠소. 소지품은 확인된 후에 돌려줄 테니 걱정은 마시오.”
“뭐…?! 어쩔 생각인데요? 나 좀 보내줘요~! 나 한율님 만나야 돼요~!!”
“시락으로 연통을 했으니 곧 사람이 올 거요. 그 때가 되면 알겠지.”
“안돼…!! 안돼요!! 집에 알리면 안돼~!! 이거 놔요~!!”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턱이 없는 치안관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린의 반응에 의구심만 더욱 일어났지만, 일단은 명령이니 그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울다시피 하며 버둥거리는 아이린이 병사들에게 이끌려 나갔다. 치안관은 자리에 앉아 연초를 꺼내 물었다. 제기랄…. 갑갑한 듯 앞단추를 풀어헤치며 불을 붙인 그는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아이린의 행낭을 뒤졌다. 제법 묵직한 금화와 은화, 그리고 빵 몇 조각이 아무렇게나 접힌 지도 안쪽에 구겨져 있었다. 오랜 치안관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귀한 댁 따님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한율을 만나야 한다는 건 또 뭐고, 집에 알리면 안 된다는 건 또 뭔가. 철없는 아가씨가 좋아하는 사람 쫓아간다며 집 나간 건가. 하고 정확하게 짚어 생각하면서 그는 발을 책상 위에 포개 얹었다.
론도 정벌을 위한 연합회의 소집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울리프 지역으로부터였다. 울리프 령의 대영주 펠리그로네 폰 마르크 울리프 공작이 직접 온다는 전령의 소식에 바루나는 직접 나가 그를 맞이할 뜻을 밝혔다. 병무대신과 정무대신이 이를 말리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울리프 대영주 정도면 그 정도 성의는 보여줘야지.”
“폐하, 아무리 대영주라고 해도 일개 부흥군의 군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국의 국왕 폐하께서 직접 나가시는 것은….”
“병무대신은 그만하게. 제국 선포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세로만 치자면 네오시아나 이스마르에 결코 뒤지지 않는 곳일세. 내가 직접 나가는 편이 좋아.”
“…. 차라리 울리프 제국으로 선포해도 될 텐데 말입니다.”
시침을 뚝 뗀 채 한 마디 던지는 정무대신.
“정무대신…!”
플로랑이 정색을 하자 바루나가 이를 말리고 나섰다.
“트레제게 경이 음흉스러운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뭘 새삼 그러나.”
“폐…폐하….”
잠시 가벼운 이야기와 웃음이 지나가고, 정무대신이 일 얘기를 꺼냈다. 이번 회의에는 아무래도 추기경을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바루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추기경이라니요. 비센테 추기경 말씀입니까?”
“…. 그 자 말고 더 있겠는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당연히 총장 예하를 모셔야지요.”
“…. 형식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으니….”
“총장 예하를 모시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비센테 추기경도 모셔야 한단 말일세, 병무대신.”
“….”
“그만 가서 일 보지.”
“…. 예, 폐하. 그럼….”
자못 착잡한 표정이 되어 있는 플로랑을 보고, 바루나가 정무대신을 먼저 보내곤 근위장까지 내보냈다. 바루나가 무슨 할 말이 있을 거라 여긴 플로랑은 가만히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대는 유능한 사람일세.”
“…. 황공하옵니다, 폐하.”
“헌데 아직은 정치에 익숙하진 않은 듯하네.”
“폐하…!”
“그대가 소신 있고 의욕이 넘치는 것만은 내 높이 사지. 어느 누구보다도 그 점에 있어서 그대는 믿을만한 신하일세.”
“….”
“하지만…,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을 하는 것, 그게 정치라는 점을 그대는 주지해야 할 것 같네.”
“하오나….”
“말해보라.”
“… ….”
말을 하려다 마는 플로랑.
“괜찮으니 말해보라. 오늘은 무슨 말을 해도 좋다.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든 뭐든….”
“…. 폐하께선….”
“그래. 어서.”
“후회하신 적은 없습니까…?”
“…!”
늘 냉정하던 바루나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플로랑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물었다.
“정도보다는 술수를 앞세우며 다스려 오신 여정에 대해서 후회를 하신 적은 없으신지 알고 싶습니다.”
“… ….”
국왕의 집무실에 정적이 일었다. 플로랑은 대답을 기다리며, 바루나는 신하의 대담한 질문에 노기를 가라앉히며 침묵했다. 플로랑은 자신의 질문이 왕의 심기를 건드릴 것을 알았다. 질문을 하고서도 잘못한 것은 아닌지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일단 말을 뱉었으니 어쩔 수 없다. 지금이 아니면 이 같은 질문을 할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없네.”
바루나의 짧은 대답이 정적은 깨뜨렸으나, 경색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약간의 뜸을 들이고 바루나가 말을 이었다.
“자네 참…, 대단한 사람일세.”
“….”
“…. 오늘은…, 그만하지.”
“…. 물러가겠습니다.”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바루나를 향해 읍소하고 플로랑은 집무실을 나섰다. 거기엔 정무대신이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는 조각상이라도 되는 듯 플로랑을 향해 서 있었다.
“이 사람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
“… …? 트레제게 경….”
“…. 웬만하면….”
“….”
“되는 쪽으로…. 일을 되게 만들도록 애쓰는 편이 좋네.”
“… ….”
“…. 다음에 보세.”
마치 국왕으로부터 반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 몇 마디를 끝으로 라크라오스는 몸을 돌려 회랑 밖으로 사라졌다. 플로랑은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각주>----------------------------
명예시민 : 바이마샤르 시민 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 명예시민, 시민, 양민, 평민, 노예로 나뉘며
명예시민은 의회선거에 대한 출마자격을 갖는다. 전지역에 대해 통행세를 면제받는 특권이 있는
대신 세금은 매 안식일마다 내야 하는 의무도 동시에 지게 된다. 시민은 선거권을, 양민부터는
사유지를 가질 수 있으며, 평민은 경작지 대여의 권리가, 노예에겐 아무 권리도 없다. 말하자면
명예시민은 바이마샤르의 귀족 계층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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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의 이야기에 약간의 추가된 사항들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시나리오 흐름에는 변화가 없으나, 짜임새를 좀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추가되었습니다.
추가된 내용은
1. 리토르나는 바이마샤르에서 황제의 밀서를 받아 특사자로서 미키네오스에 갑니다.
황제의 특사자는 국외에서 황제의 전권을 위임받아 그 밀명을 수행하는 외교사절로서,
잉그라드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보르틴 북방의 두 세력-울리프 령과 미키네오스-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들어갑니다. 뭐... 들어갔다가 바루나한테 얽혀서 좀 곤란을 겪고는
있습니다만...;;
2. 레이네 마리 공주는 내사부장을 자기 사람으로 얻습니다. 앞부분을 보시면(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내사부장이 론지니아 전투에서 만샤르차크의 무훈에 묻혀
드러나지 않은 한율의 존재를 공주에게 전하지 않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내사부장은 한참만에 공주를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빌고, 공주는 자애로써 그를 용서하는
척하며 충성 서약을 받아냅니다.
3. 바루나 국왕 또한 마검사입니다. 이 내용은 레이네의 비웃음 속에 아주 살짝 나옵니다.
나중을 위해서 복선으로 몇 줄 적어넣었습니다. 윌토르 대주교를 포섭하러 왕도 대교구의
사원으로 향하는 길에 레이네는 "마검사 주제에 교회를 이렇게 크게 지어주었다"며
부왕을 비웃습니다.
4. 예스프리가 카몬 협곡의 독립대대로 부임하기 전, 부친인 라크라오스로부터 정식으로
레테르의 수호자로서 그 마법력을 승계받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다시 읽어보면서, 서술방식이나 시점 등이 조금 혼란스러워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내용상 크게 바뀌는 점은 없습니다만, 앞으로도 조금씩 추가되거나 수정되는 부분이 있으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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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국가 설정이라든가 하는 부분을 올려달라 요청하신 분이 계셨는데요,
저도 올리겠다고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아직도 올리질 못하고 있군요.;; 죄송합니다.
내용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설정을 그대로 올려드리기보다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각주를 다는 식으로 가면 어떨까 하여 이번에 처음으로 각주를 달아봅니다.
(처음 맞죠..ㅡ ㅡ??)
그럼... 다음주 일요일....아직 토요일 밤이로군요.;; 암튼 그 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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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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