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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8 390회 0건
“군령이다.”
“…!!”
예스프리는 더 말하지 않은 채 하백을 뒤로 하고 앙헬의 앞으로 나아갔다. 전투 시 지휘관의 군령이 어떤 것인지 교육을 받은 하백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만 주먹을 움켜쥔 채 전의를 억누를 수밖에.
크르르르…. 적이 다가오자 그랑카가 잇몸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마치 강아지를 다루듯, 예스프리는 그랑카를 향해 쉬-하며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나는 레테르의 홍염을 수호하는 자…. 모든 야성을 다스리는 불꽃의 권능으로 명하노니…. 별안간 그랑카가 끼잉 끼잉 소리를 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드러냈던 잇몸을 숨기고는 심지어 벌벌 떨기까지 했다. 앙헬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그랑카의 배를 걷어찼지만, 그것은 예스프리의 눈빛에 질려버린 듯 뒷걸음질만 계속 쳤다. 다가오는 적의 수장과 그랑카 사이에 흐르는 공기를 그제야 알아차린 앙헬이 어이없다는 듯 헛-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교권국 미키네오스의 지휘관이 이교도였다니, 별 일일세.”
“…. 그대들을 상대하려면…, 어쩔 수 있겠나.”
“…. 좋아…!!”
앙헬은 만족한다는 얼굴로 그랑카에서 내려와 끝이 뭉툭하게 잘린 모양새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대와는 제대로 싸워 볼 수 있겠군…! 앙헬의 검에서 무형의 검기가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보이진 않았으나 하백은 느낄 수 있었다. 마법을 무예에 활용한다는 마검사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일단 하백에게 그 모습은 검기가 내뻗치는 것으로 보였다. 무형의 검기라니…, 저 자가 저렇게까지 강한 자였나…? 일전에 한율의 검세에서 느꼈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였지만 맥이 통한다는 것쯤은 하백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자를 상대로 예스프리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으니, 하백은 이 대결이 어떻게 될 지 사뭇 궁금해졌다.
“증강마법까지 쓸 줄 아나…?”
선선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검을 한 차례 휘둘러 보이는 앙헬, 아~, 저게 마법이었어? 다소 어이없다는 듯한 하백의 눈초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예스프리도 그처럼, 마치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얼굴로 검을 뽑아들어 한 차례 휘둘러 보였다. 화르륵~ 하고 검붉은 화염이 검결을 따라 일어났다.
“뭐야, 뭐…, 대대장이 마검사였어…?!”
“마법은 금기잖아…!”
“대대장이 이교도라고…?!”
예스프리의 검에서 불꽃이 일어나자 성벽에 포진한 채 지켜보던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오랜 시간의 종교 숙청을 통해 미키네오스에는 마법사들이 발붙일 곳이 없어져 버렸으니 그는 당연한 일이었다. 중대장들조차 술렁거릴 기미가 보이는 가운데 아펠이 벼락처럼 병사들을 향해 호통쳤다.
“닥치고 지켜보지 못하겠나…?!! 적에게 우스운 꼴을 보이지 마라…!!”
마치 산짐승의 포효성처럼 아펠의 목소리는 협곡 안을 메아리쳤고 병사들은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엔드릭손이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속삭였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대대장이 마검사라는 게 알려지면….”
“이기는 게 먼저다, 엔드릭손…. 그건 그 다음에 생각하면 돼.”
“그건 4중대장 말이 맞아. 일단 이기고 보자고.”
제라르가 거들자 엔드릭손은 더 말하지 않았다. 성 아래의 두 지휘관은 아직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지 않고 태연히 서 있었다.
“이제 독자들의 상황 파악도 끝났으니 시작해 볼까…?”
“흥….”
피식 웃으며 검을 들어 올리는 예스프리의 몸 주위로 불길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검을 곧게 뻗는 예스프리의 자세를 보고 앙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특이한 자세로군…. 검을 머리 위로 치켜 든 앙헬의 입이 달싹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나를 지키는 어둠의 심연…, 모든 죄악을 가르는 심판의 칼날이 내리리라. 신의 뜻을 받들어 종 된 자의 무지를 벌하고자 하노니, 맞서는 모든 이에게 나아가 그 살을 가르고 피를 뿌리리라…!”
검기가 구불거리며 예스프리의 몸을 조각조각으로 썰어버릴 듯 뿜어져 나왔다. 앙헬을 향해 검을 겨눈 자세로 예스프리는 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마음속으로 주문을 암송했다. 홍염의 주인…, 나의 검 끝으로 나아가 저항하는 모든 야성을 제압할 지어다…!
쿠르릉…! 하고, 뭔가가 포효하는 소리와 함께 예스프리가 그린 원을 따라 맹렬한 화염이 일어났다. 화염의 형태를 보고 깜짝 놀란 앙헬이 화급히 마법을 거두었지만 어느새 불길은 그의 모든 검기를 타고 들어가 순식간에 손목까지 뻗쳐갔다.
“…!”
“이럴 수가…!”
열기가 심장에까지 스밀 뻔한 위험천만한 순간을 피한 앙헬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예스프리를 노려보았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홍염의 사자, 야성의 맹주까지 소환할 줄 알았다니…, 그대는….”
“그래, 내가 바로 레테르의 수호신장이다.”
다가오는 예스프리의 검 끝에서 불기가 사그라지는 것을 본 앙헬이 코웃음쳤다.
“흥…! 마법 대결에선 이겼다 이건가…?”
“이깟 마법으로 승부를 낸다면…, 그대도 명색이 대장끼리 맞붙는 한 판인데 체면이 서질 않을 게 아닌가?”
어서 일어나라는 듯 검을 늘어뜨린 채 여유를 부리는 예스프리는 그러나 마법 대신 강렬한 전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육탄전을 벌이자는 무언의 시위에 앙헬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듯 앙헬은 검을 집어 들어 손목을 풀기라도 하듯 한 차례 털어냈다.
“대대장 성질이 원래 저랬나…?”
“어째 화풀이하는 것 같은데…?”
“화풀이라니…?”
싱글거리는 아펠에게 제라르가 물었다. 엔드릭손은 피식 웃으며 아펠 대신 제라르에게 설명했다.
“지난 전투에서 당한 불명예를 병사들에게 화풀이할 수는 없을 테고…, 아마 오늘 같은 날을 벼르고 있었을 테지.”
“마법에서 이겼다고 해도 상대가 로이나르의 가신인데, 그래도….”
“시작한다.”
레미의 말과 거의 동시에 검과 검이 부딪치는 강렬한 쇳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육중한 검을 든 두 사람은 마치 나뭇가지를 휘두르듯 빠르게 검격을 주고받았다. 한 번의 부딪침이 일어날 때마다 마치 검이 부러질 것 같은 쇳소리가 온 협곡 안을 메웠다. 강맹함과 강맹함의 충돌이 연이어 졌다.
‘이놈…보통 힘이 아니다…!’
‘어린놈이…, 한 번 받아낼 때마다 몸이 저리는군…!’
대결을 펼치는 예스프리와 앙헬은 서로에게 감탄해 마지않았다. 특히 앙헬은, 별로 크지도 않은 몸집의 예스프리가 자신과 완력으로 정면대결을 펼쳐오는 데 놀란 기색이었다.
“제법… 힘이 장관이구나…!!”
“흥…! 꼭 죽을 놈들이…! 제법, 제법 해대지…!!”
다리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을 피해 예스프리는 훌쩍 뛰며 몸을 회전시켰다. 공중에서 회전하며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검날의 섬?한 기세에 앙헬의 검세가 먼저 바뀌었다. 급히 검을 세워 막아낸 예스프리의 검이 위로 솟아오르고, 앙헬의 검날이 그를 타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예스프리는 검을 수습하며 목으로 짓쳐들어오는 검끝의 방향을 틀어내곤 자세를 낮춰 몸으로 밀어붙였다.
허극…! 숨이 턱 막히는 신음소리와 함께 뒷걸음질 치는 앙헬을 향해 예스프리의 몸이 솟아올랐다. 그의 발이 앙헬의 검을 걷어차 간격 안을 비워내고, 이어서 무릎이 앙헬의 턱에 작렬했다.
부러진 잇조각과 함께 피가 튀었다. 제대로 한 방 먹인 예스프리는 숨을 고르며 무릎 공격에 실신해 버린 앙헬을 잠시 살폈다. 머리에 큰 충격을 입은 듯 앙헬은 눈까지 뒤집혀 움직이지 않았고, 승리를 확신한 예스프리는 당황한 마도의 대군을 뒤로 하며 자신의 병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우아아아아-!! 지휘관이 검을 번쩍 쳐들자 병사들의 사기충천한 함성이 협곡 안을 진동시켰고, 곧이어 성문이 열렸다. 예스프리의 검이 마도의 군사들을 향해 겨누어 졌다.
“모조리 섬멸하라-!! 돌격대는 나를 따르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3백여의 기마대가 성문 밖으로 나오고, 뒤이어 아펠의 백병전 부대가 쏟아져 나왔다. 대장을 잃은 마도의 군사들은 맨 먼저 자신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예스프리에게 밀려 진세가 흐트러졌고, 뒤이어 밀려드는 기마병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갔다. 제라르는 한가운데로 파고들며 검을 들어 병사들을 지휘했다.
“양쪽으로 갈라져라-!! 적진을 흩트려라-!!”
“4중대 돌격-!!!”
당황한 적군들의 진세가 흩어지는 곳으로 아펠이 보병을 이끌고 돌진했다. 남은 부대라도 수습하려는 듯 앙헬의 부하 지휘관이 검을 뽑아들고 퇴각을 명령하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우리 군세가 더 많다!! 진형 유지-!!”
“저희가 놈들 돌격대를 막겠습니다!!”
그랑카를 탄 기병대의 대장이 앞으로 나서고, 남아 있던 보병들이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이미 선두에서 제라르의 돌격대에 의해 떨어져 나간 천여 명의 군사들은 아펠의 보병과 맞붙어 무너지고 있었다. 그 전선의 한가운데에 예스프리가 있었다.
“대대장님…! 이제 뒤로 물러서십시오, 여긴 위험합니다!”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생각은 없어!!”
“침착하십시오! 놈들의 주력 보병은 벌써 뒤로 빠졌습니다!”
“뭐라…?!”
치열한 전장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예스프리로서는 이미 돌격대와 상대의 기병대가 부딪친 것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직접 베어 넘긴 적수가 수십이 넘었지만, 전장을 살펴야 하는 지휘관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아펠이 그를 지적하자 예스프리는 이를 부득 갈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돌격대에 퇴각 명령을 전달하고, 4중대는 방어진을 구축하라.”
“예, 대대장님…!”
“여긴 내가 맡지.”
“대대장님!!”
“걱정 마. 더 이상 무모한 짓 안 할 테니까….”
단호하게 말하며 아펠에게 등을 돌린 예스프리는 들으라는 듯 창피를 당하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며 검을 들어 적을 겨누었다. 더 말릴 수가 없었다. 아펠은 그를 믿기로 하고 휘하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나는 레테르의 홍염을 수호하는 자…, 만년의 세월에 묻힌 심연의 불꽃은 나의 목소리를 들으라. 피로 맺은 그대와의 맹약으로 적의 심장을 태우리니, 거치는 모든 살과 뼈를 재로 만들지어다…!! 주문과 함께 예스프리의 검 끝에서 거센 불길이 일어났다. 뒤에서 방패를 앞세워 진을 형성하고 있던 아펠의 4중대는 이 광경을 구경할 틈도 없이 열기를 피해 방패 뒤로 몸을 숙였고, 정면으로 달려들던 기마대를 향해 검푸른 화염이 사납게 몰아쳐 갔다.
으악…. 크릉…, 하는 적의 기병대원들과 그랑카들의 비명 소리가 화염 속에 묻혔다. 맹수의 아가리 같은 화염의 기세에 눌려 그랑카들이 방향을 잃고 날뛰었다. 그 탓에 기병대의 진세가 엉망으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물러선 제라르의 돌격대 중앙에서 적의 기병대가 우왕좌왕하는 한복판을 불길이 마음대로 휘저어 댔다. 마검사의 힘을 처음으로 본 아펠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으나, 전투 중인 마당에 구경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의 손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구경들 하지 말고 전진해-!! 적의 진세가 흩어졌다-!! 전군 진군-!!”
지휘관을 잃은 마도의 부대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친 예스프리의 마법 공격과 백병전 부대의 연공에 의해 금세 와해되었다. 병사들은 4중대 병사들이 내세우는 방패에 달린 송곳에 찔리거나 혹은 밀리면서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예스프리의 화염에 밀린 기병대원들은 벌써 뿔뿔이 흩어졌다. 마법의 불길에 크게 데인 그랑카들은 통제 불능이었다.
절반 가까이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는 적들을 병사들은 더 이상 쫓지 않았다. 협곡을 나서는 순간 매복이 있을 수도 있고,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넓은 곳으로 나가게 되면 전세가 바뀔 수도 있는 터였다.
신임 대대장이 부임한 후 두 번째로 치러진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카몬 독립대대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승리를 자축했다. 처음 예스프리가 마법을 쓸 때 술렁이던 분위기는 승리의 기쁨에 묻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군에서 마검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첫 전투에서 망신살이 뻗쳤던 예스프리는 이 전투를 통해 제대로 설욕을 했다.
“이제 좀 시원~하십니까?”
그의 속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아펠이 잔을 권하며 묻자 예스프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한테 좀 민망하군. 전투 중에 그런 꼴을 보였으니…. 아닙니다, 대대장님. 화가 날 만큼 났으니 그럴 수도 있지요. 아펠은 그가 전투 중에 앞서 나가 싸웠던 일에 대해선 크게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중대장들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모두 들떠있는 가운데 하백만이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이보게, 근위무사. 자네도 한 잔 받지.”
“아아~깜짝 놀랐어.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것 같은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구먼.”
“아닙니다. 아직은….”
얼굴 좀 풀어~, 적장을 두 명이나 잡아먹은 사람 표정이 왜 그래?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하백의 얼굴을 보고 있던 제라르가 픽 웃었다.
“그런 싸움은 처음 해 본 모양이군….”
“…, 예.”
정곡을 찔린 하백은 조금 뜨끔했다. 막상 기세등등하게 나가 싸워 이긴 것은 좋았지만, 처음으로 제 의지로 상대를 벤 느낌은 마냥 그렇게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정신을 온전히 수습하지 못한 하백에게 그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의 무관심은 마치 ‘다 그런 거야’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대대장님.”
제롬 모로니에가 조심스럽게 예스프리가 썼던 마법에 대해 말을 꺼냈다. 아까 쓰셨던 건…. 기분 좋게 술 한 잔씩 걸치는 자리에서 소위 ‘이교의 사악한 술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약간씩 긴장하는 눈치였다. 예스프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잔을 비우고는 픽 웃었다.
“그건 이교의 사악한 술법이 아닐세.”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마검사는 이제 성스러운 미키네오스의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아니…,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세례를 받은 기사들 중에선 나처럼 신의 은총을 무력으로 나타내는 검사들이 있어. 그들을 성기사라고 부른다네.”
“성기사요…?”
아펠이 어이없어하며 말을 되받아 물었다. 아무리 봐도 그건 말장난이었다. 아직 미키네오스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하백이 볼 때도 그랬다. 예스프리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중대장들을 하나하나 쓸어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니까, 그건 이교의 사악한 술법이 아니라 기사의 검을 통한 신의 역사일세. 그렇지 않은가…?”
“아, 뭐…. 그건….”
“뭐 그렇다고 합시다. 어쨌든 박투술만으로 저놈들하고 싸울 수는 없으니까.”
시큰둥하게 잔을 기울여 입안으로 술을 털어넣은 아펠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동료들에게도 더 따지지 말자는 눈치를 주었다. 예스프리는 조금 민망했는지 아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잔을 채워주었다.
“어쨌든…, 고생들 했어. 이게 희소식일는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또 뭡니까?”
“곧 대대에 위안부를 설치할 예정이네.”
마법 이야기보다 이 대목에서 중대장들은 더 놀랐다. 이건 챙겨줘도 너무 챙겨주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게 웬 자다 떡 얻어먹는 소린가 하는 얼굴로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제롬 모로니에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3중대장은 뭔가 불만이라도 있나?”
“좀 심하게 챙겨주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위안부가 생기는 거야 좋은 일이지만, 이러다가 이거 나중에 이 빚을 톡톡히 갚아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대장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어차피 놈들하고 전면전이라도 벌이면 우리가 최전선에 나갈 거야 뻔한 일인데….”
“뭐, 그거야….”
한편 플로랑으로부터 카몬 독립대대의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부총관은 깜짝 놀라며 확인이라도 하듯 되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플로랑의 안색이 조금 무거워졌다. 한숨과 함께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벌의 전초부대가 될 테니 그만한 예우는 해야 하겠지만…, 성전의 전초부대에 위안부라니…,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어디….”

바이마샤르 사신단 일행은 왕도까지 나흘길을 앞두고 네오시아 공화국의 사신단과 마주쳤다. 네오시아 측의 사신으로 온 부통령은 짐짓 반가운 체하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핫산은 어차피 목적지도 같으니 함께 숙영지를 차릴 것을 제안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긴 여행길에 지치기도 하셨을 텐데 오늘 함께 여독도 풀어보시지요.”
“집정관 각하께선 잘 계십니까? 의회에 들고 나선 저도 네오시아 공화국을 찾을 일이 없던 터라….”
“그러잖아도 각하로부터 의원님 이야기는 자주 듣곤 했었습니다. 큰 상단을 운영하시다가 정치를 하신다고요.”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되는 양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된 막사로 향했다. 그 모양새를 보고 있던 루카스는 턱짓으로 부통령을 가리키며 나자르에게, 아는 자야? 나자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래도 네오시아 공화국 부통령이신데…. 본 적도 없던 놈인걸 뭐…. 내던지듯 말을 하며 픽 웃는 루카스. 나자르는 돌아서서 군영 정리를 하는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왜 저래….
“사신단 수행을 하는 모양이군….”
“…?”
“여군이라…. 참 바이마샤르는 신기한 나라야.”
“…. 누구신데 이렇게 무례하신지…?”
“뭐라…? 하하하핫핫…!”
루카스가 날카로운 쾌남형이라면 온몸에 철갑주를 두른 눈앞의 남자는 선이 굵직굵직한 호남형이었다. 어두운 갈색의 머리카락과 짙은 눈썹이 각진 턱과 함께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나자르는 불쾌해진 얼굴로 그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런 것보다는 일단 자네 군영 막사를 세우는 데 신경 써야 하지 않나?”
“나는 바이마샤르 보위부 산하 의회경비대 총사 나자르 바슈미르입니다. 보아하니 네오시아 공화국 사신단 호위대에 계신 분 같은데…, 무척…, 무례하기 짝이 없으시군요.”
“에…?”
뭐야 이 사람…. 어찌 보면 바보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사과하며 제 소개를 하는 그는 네오시아 사신단의 호위를 책임지는 지휘관이었다. 백마기사단의 선봉대장 브로시니 캄폴리노 지울리니입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총사. 백마기사단이란 말에 나자르의 표정도 바뀌었다.
“백마기사단이라면…, 네오시아 삼백 기사단의…?”
“아시는군요. 역시 우리 삼백 기사단의 명성이란…, 흠흠흠….”
이상하게 웃는군…. 인상은 강인해 보이는데, 조금은 경박스러워보였다. 나자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픽 하고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
이 바보 같은 사내는 그렇다 치고, 군막을 세우는 병사들을 둘러보는 나자르의 시선에 병사 하나를 발로 걷어차는 루카스가 들어왔다. 평소 병사들에게 손찌검은커녕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기로 유명한 루카스였다. 놀란 나자르는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
“생긴 건 곱상한 친구가 하는 짓은 꽤….”
브로시니는 팔짱을 낀 채 서서 루카스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루카스에게 걷어차인 병사는 보급품이 든 상자의 모서리에 부딪쳤는지 얼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전도유망한 이 젊은 사령의 행동에 겁을 집어먹어 그를 일으켜 세울 엄두를 못 냈다. 나자르는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미키네오스 국경에 들어오면서 기강 세우라고 그 정도 말했으면 듣기 싫어서라도 이런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올바르지 않나?”
“시정하겠…습니다.”
“지휘관 앞에서 아픈 내색 해가며 대답하게 되어 있나?”
“사령님…!”
“… ….”
“제가 잘 교육시키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 정리해.”
“예.”
나자르는 깍듯하게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으나 루카스는 이미 돌아서서 군막으로 향해버렸다. 병사들의 군례조차 일일이 받아주는 그의 행동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왜 저러나 하며 웅성거렸다. 요즘 좀 이상해. 왜 저러시지…? 나자르는 잡담들 하지 말고 움직이라며 지시를 내렸다.
“각하께서 그런 말씀을요?”
“우리 네오시아는 공화정으로 바뀐 지가 아직 30여 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귀국의 오랜 공화정의 전통으로부터 겸허한 자세로 배울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까…. 사실 우리 바이마샤르의 공화정 형태는 무척 자랑거리이긴 합니다만, 막상 그런 말씀을 들으니 좀 민망합니다, 하하하….”
“귀환자들 사이에서 나돌던 소문이라던데…, 론지니아 전투의 영웅께서 귀국에 머무르고 계신다는 말이 있더군요. 사실입니까…?”
“아….”
핫산의 표정에 살짝 당혹감이 묻어났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나라 망신이고 뭐라 갖다 붙일 말도 딱히 없었다. 그 분은 얼마 전에 떠나셨습니다. 만나 보아야 할 분이 있다시면서…. 아 그러셨습니까. 안타깝군요…. 기회가 있다면 한 번 뵈었으면 싶었는데…. 핫산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술잔을 비웠다.
“그보다 이번 정벌전에 대해서 혹시 들으신 바가 있습니까?”
“음…. 사행길에 함께 한 미키네오스 측 사신의 말을 들어보니…, 국왕께서 이번 전쟁에 사력을 다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론도 산맥 전체에 대한 장악력을 목표로 삼는 것 같더군요.”
“부통령께서도 들으셨군요.”
“그랬지요…. 사실 좀 지겹기도 했습니다. 하하….”
“이런 자리에서 하기엔 좀 불편해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좀 염려가 됩니다. 제 생각엔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전쟁인데….”
“너무 크지요. 규모가….”
“….”
핫산은 말없이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거렸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어차피 회의에서 이야기를 해 보면 국왕의 의중은 명명백백히 밝혀질 일이었다. 여기서 갑론을박하는 일은 기껏해야 푸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국왕께선 공정하고 현철하신 분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공정하고 현철하다, 바꿔 말하면 회의석상에 나가면 뭔가 그만한 대가를 제시하면서 명분도 그럴싸하게 꾸며댈 것이다, 이런 말이었다. 핫산은 쓰게 웃으며 그 말에 동감했다.
나자르는 한율이 탈영한 이후 루카스의 군막에서 이전보다 더 자주 시간을 보냈다. 그와 몸을 섞는 일이 만족스럽기도 만족스러웠거니와, 더 중요하게는 자존심 강한 루카스가 치욕이라면 치욕이랄 수 있는 일을 당했기에 위로 차원에서도 그렇게 했다.
“이제 턱은 완전히 괜찮은 거죠?”
“어, 뭐…. 약간 얼얼한 것만 빼면.”
“천만다행이에요.”
갑주와 점포를 벗은 나자르는 탁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루카스는 침상에 앉아 이따금씩 술잔을 기울이며 홀짝거렸다. 여긴 정말 춥네요. 겨울 피복을 걸쳤는데도 바람 불 땐 정말 참기 힘들어요. 음…. 밖에서 부는 매서운 바람소리가 군막 안까지 들이쳤다. 루카스의 눈은 셔츠를 풀고 편한 복장으로 앞에 서 있는 나자르의 몸을 훑었다. 가슴 앞섶이 슬쩍 드러난 모습에 슬슬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기색을 모르는 듯 나자르는 술잔만 기울일 뿐이었다.
“으응? 이젠 아주 맘대로네?”
루카스가 손을 허벅지에 얹자 나자르는 정색을 하며 그를 쳐다봤다. 굳이 피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 날 나자르는 별로 생각이 없었다. 손이 점점 안쪽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잔을 내려놓고는 루카스의 다리 위에 앉았다.
“오늘은 참아주세요, 사령님. 나 피곤해요.”
아이를 달래듯 그의 머리를 품어 안으며 타일렀지만 루카스의 손은 아예 셔츠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몸을 도사리며 피하려 했으나 그는 완력으로 나자르를 붙들어 안으며 목을 강하게 빨았다.
“아니, 잠시만요…!”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그에게 붙들려 침대에 누운 꼴이 된 나자르는 대뜸 입을 맞춰오는 루카스에게 일단 응하고 보자는 심산으로 그를 꼭 끌어안았다. 차라리 달래는 편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대번에 자신의 바지를 허벅지까지 끌어 내리고는 확 뒤집어 버렸다.
“아니, 저기…, 사령님! 나 이거 싫진 않지만… 악…!!”
젖지도 않은 그 곳으로 루카스의 몸이 거칠게 찢고 들어왔다. 나자르는 생살이 뚫리는 것 같은 아찔한 통증에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루카스의 몸짓은 처음부터 사나웠다. 엉덩이를 누르며 밀어 닥치는 그의 몸이 마치 통나무가 온 몸을 밀어붙이는 듯 느껴졌다. 몇 차례 그렇게 움직이자 통증은 곧 사그라지고 나자르도 조금은 느끼게 되었지만, 영 즐겁지가 못했다. 게다가 몸속에 사정까지 해 버렸으니 뒤끝이 개운할 수가 없었다.
“푸우….”
엎드린 그녀의 몸속에 사정을 잔뜩 해놓고 루카스는 숨을 고르며 그대로 침상에 누워버렸다. 잠시 얼얼하여 엎드려 있던 나자르는 몸을 일으켜 침상 옆에 걸린 수건으로 정액이 새어나오는 아래를 받치고 일어나 앉았다. 루카스는 얼굴에 손을 얹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 ….”
“…요즘 좀 이상해요. 내가 자주 와서 그렇기도 하지만….”
“뭐가.”
“….”
“….”
나자르는 이야기하기를 포기하곤 수건을 빼서 그의 성기를 감아쥐고 닦아주었다. 달리 무슨 말을 해봐야 잔소리밖에 안 될 것 같았다. 루카스는 나자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얼추 닦이고 나자 그녀는 바지를 올리고 일어나 수건을 빨기 시작했다.
“뭔가 맘에 안 들어?”
“…. 내가 뭐라고 하겠어요.”
“…. 무슨 소리야?”
“… ….”
나자르는 말없이 수건의 물기를 짜내곤 다시 와서 루카스를 닦기 시작했다. 아래쪽까지 말끔하게 닦아냈을 쯤 루카스가 몸을 일으켰다. 할 말이라도 있어? 평소의 그와 달리 조금도 여유가 없는 표정이었다. 나자르는 손을 뻗어 그를 다시 눕히며 입으로 시작했다.
“혼자만 즐기니까 그러지.”
그녀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뭐라 해보아야 먹힐 리 없었다. 루카스는 못 이기는 척 푹 하고 웃더니 벌렁 누워선 위아래로 완만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래가 뻐근해지며 나자르의 입안에서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심산인지 그녀는 다 커진 그것을 바지로 덮어버리고는 스프링처럼 침상에서 일어섰다.
“뭐 하는 짓이야? 다 키워놓곤….”
“내가 당신 위안부면, 당신도 내 위안부라는 거 몰라? 이건 벌이야.”
“뭐야…?”
“좀 아쉬운 줄 알아야지. 잘자요~.”
어이없어하는 루카스를 뒤로 하고 막사를 나선 나자르는 실상 더 해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워낙 거칠게 그가 해댄 터라 아래가 시큰거렸다. 아무래도 좀 이상해…, 예전엔 안 그랬는데…. 한율 때문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팔짱을 낀 채 군막으로 들어섰다. 브로시니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자르는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어멋…!”
“불도 안 지펴놓고 어딜 다녀오십니까?”
“이보세요…!!”
“하하핫핫…, 앉으십셔. 아까 실수한 것도 죄송하고 해서….”
그는 술병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요거 한 잔 대접할까 하고 왔습니다? 괜찮으시죠? 뭐 이런 인사가 다 있나…. 나자르는 그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어 버렸다. 어? 웃었다, 웃었다. 웃었으면 진 거야. 어서 앉아요. 친한 척을 하며 그녀에게 의자를 갖다 밀었다.
“그냥 나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에이 참…, 딱딱하게 구시네. 미안합니다, 예? 남자가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무례하신 걸 제가 어떻게 참고 있는지도 신기하네요.”
“…거 참….”
나자르는 기실 그렇게까지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으나, 이 날은 누군가와 함께 술잔을 기울일 기분이 아니었다. 팔짱을 낀 채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지울리니 경이라고 하셨죠? 명색이 삼백 기사단의 선봉대장이신데다 일국을 대표해서 오시는 분이 이러시면 나라 망신인 건 아실 텐데요. 오늘은 없던 일로 생각해드릴 테니 어서 나가주시죠.”
“… ….”
서릿발처럼 내리꽂히는 나자르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브로시니는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되겠구먼…, 에잉….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알 수 없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나자르의 막사를 나섰다. 나자르는 그의 기척이 사라지자 머리를 쓸어 올리며, 뭐 저런 게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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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는 잘 보내고 계신가요.
새해 첫 인사드립니다. ㅎㅎ 새해 복 많이들 받으시고 돈도 많이...(복보다는 돈이 더 좋을 듯..)
올 한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것이 쉽진 않겠지만...암튼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재 중단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약속드립니다.

앞으로는 7일 간격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은 1월 9일이로군요. 날씨가 그때까지
계속 춥다고 합니다. 영하 10도는 기본이더군요.
바람까지 불면 완전 작살일듯...;;; 건강들 조심하십셔~.(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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