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라드에서는 목욕을 함께 한다는 것이 매우 큰 의미였다. 신이 내린 태초의 모습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세상의 흔적을 씻어냄으로써 거듭난다는 뜻으로 보르틴 교회의 안식일처럼 지켜지는 일종의 종교의식이었다. 황제의 경우는 매일 이 행사를 치러야 했는데, 그것은 신에 가장 가까운 높은 자라는 뜻에서였다. 리토르나의 설명에 레이네는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보르틴에선 목욕이 죄악인 거 아십니까?”
“네…? 목욕이 죄악이라니요…?”
“신의 티끌을 씻어내는 행위라고 해서 교리 상으로는 목욕을 금지하고 있답니다. 민간에서는 목욕을 하면 신의 은총이 내려지지 않는다 해서 두려워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지요.”
리토르나는 멋들어진 주변 경관을 둘러보며, 헌데 왕녀께선 이렇게…근사한 시설까지 갖추고 매일 목욕을 즐기시는군요. 사실 우리나라의 목욕 문화는 이웃의 바이마샤르에서 전해진 것입니다. 바이마샤르는 보르틴 대륙에서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나라이긴 합니다만,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나라이기도 합니다. 여자가 군인이 되는 것만 해도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군요.
“저…, 황녀님께 궁금한 것이 있는데….”
“…? 말씀하시지요.”
“제가 알기로 대국의 황실에서는 마법사들을 중용하고 국정에 관여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런 기관이 있습니다. 주술사와 법사, 학사들을 키워내는 곳이지요.”
“기관…, 그럼 나라에서 관장하는 곳인가요?”
“아닙니다. 나라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곳이지요. 대륙의 중앙부에 있는 거대한 브란다트 고원지대에 자리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지난 2천 년에 걸쳐 있어왔죠. 앙카라시아 대륙의 왕조는 바로 거기에서 정통성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대륙의 주인으로 인정을 받게 된답니다.”
“그렇다면 황실보다도 더욱 권위가 있는 곳이로군요.”
“어떻게 보면 그렇습니다. 지금은 멸망하고 없는 나라이긴 하지만 하백의 모국인 환국에서도 사무랑이라는 비슷한 집단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실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오직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의 흥망을 위해서 움직이는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가나파티와 비슷하지요.”
“가나파티…, 생소한 명칭이군요. 헌데 하백은 그런 걸 모르는 것 같던데요.”
“그럴 것입니다. 하백은 환국이 멸망한 이후에 태어났으니까요. 게다가 아슈람에서 자라났으니….”
“…, 듣다 보니 조금….”
“…. 뭔가 걸리시는 거라도…?”
“가나파티가 황조의 정통성을 잇는 데 필요한 곳이라면, 어째서 황녀께선 그 곳에 계시지 않고 아슈람에서….”
예상한 질문인 듯 리토르나는 웃음 지으며 그 유래를 설명했다.
본래 아슈람을 세우신 성현 아시타 구루께선 가나파티의 구루이셨습니다. 구루란 말은 스승을 가리키는 옛 누베르 말이죠. 그 분께선 특정 황조나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인간의 구원을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저 먼 아쿠아리아스 대륙에 아슈람을 세우셨지요.
“아….”
“폐하께선 보다 큰 뜻을 배울 기회를 주신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면, 왕정 체제의 나라에서는 그런 제도들이 다들 있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 미키네오스에서도 왕실에선 대륙의 역사와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교육을 받게끔 되어 있거든요.”
“그럴 테지요.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흘렀습니다만, 궁금하신 점이라는 것이….”
“아, 제가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좀 외람된 질문일지도….”
“무슨….”
“대국 황실의 마법사들이라면 이렇게 먼 곳에 계시더라도 소식을 전할 방도는 있을 텐데…, 지금껏 황녀께서는 본국의 소식을 저희 왕실을 통해서만 접하고 계시는 것으로 압니다만….”
“… ….”
리토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황제폐하의 환후가 위중하시다면 한시바삐 돌아갈 방도를 강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벌 준비로 부왕께서 송구하게도 황녀님을 이곳에 머무르시게는 하고 있지만….”
“물론 왕녀의 말씀대로입니다.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황실 법사들의 법력이라면 충분히 제게 소식을 전할 능력이 있지요. 하지만 이 땅은 그들의 법력이 미치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
“국왕폐하의 실덕을 지적하는 듯하여 불편한 말씀입니다만…, 지난 전쟁 이후 마법사나 주술사들은 이 땅에서 모두 축출되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나마 무리를 지어 세력을 이루고 있던 샤몽 부족은 모조리 대륙의 최남단으로 밀려났고요.”
“….”
“무릇 자연의 기운은 그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떠난 이후 이 땅의 모든 신비는 사라진 것이 아닌지 추측이 됩니다. 목욕이 신의 티끌을 씻어내는 불결한 행위라는 교리는 왕녀께서도 이미 그렇게 여기시는 바와 같이 닫힌 마음과 경직된 생각을 상징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는 아무리 높은 법력을 지닌 법사라 해도 지닌바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기가 어렵습니다.”
“…. 그렇군요.”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리토르나의 말을 경청하던 레이네는 다소 의외라는 얼굴로 말을 마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잠시 주변 경관을 둘러보던 리토르나가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왜 그러시는지…?”
“….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
리토르나는 굳이 더 묻지 않은 채 그저 웃기만 했다. 레이네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연합회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연합회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참석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 단지 형식적인 참석일 뿐입니다. 잉그라드에 사신까지 보내셨으니 명분상 잠시 자리하는 것입니다.”
“…. 부왕이…, 노여우십니까…?”
그럴 리 있느냐는 듯 리토르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정벌 자체는 무난하게 통과가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정벌 후 론도 산맥에 대한 이권의 문제를 놓고는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대영주 펠리그로니에프는 완고한 원리주의자 같지만, 야심이 매우 큰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권을 분할하는 데서 그가 변수가 될 듯합니다.”
그렇겠군요…. 정확하게 짚어내는 리토르나의 말에는 수긍하면서도 레이네는 한편으로 그녀가 정벌의 성공을 확신하듯 하는 근거가 궁금했다.
“귀국의 군주를 감히 평가하는 듯하여 말씀드리긴 민망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말씀해보세요.”
“적어도 국왕 폐하께선…, 질 것 같은 전쟁을 벌이실 분 같지는 않습니다.”
이튿날부터 시작된 연합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대표들은 정벌 자체에 대한 찬반 논쟁으로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바루나는 회의의 필두에서부터 론도 정벌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한바탕 긴 연설을 늘어놓았다.
“20여 년 전 나는 왕국의 영광과 신의 사랑으로 한 몸이 되어 다 함께 내일을 꿈꾸던 이들이 무참히 무너지고 깨어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올시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그들을 구하고자 칼을 들어 싸웠던 사람이올시다. 20년을 그렇게 또한 싸워왔습니다. 머나먼 길을 마다 않고 모여 주신 이 자리의 모든 분들 또한 그렇게 싸워오셨으리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 우리는 저 거대한 론도 산맥의 주인이었으며, 우리의 시민들은 누구 하나 이 위대한 대륙에 발 딛고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후안무치한 자의 정벌욕과 그릇된 믿음으로 인해 그 시민들이, 우리의 시민들이 참담한 시련을 겪어야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멀리는 그 참혹했던 전란으로부터, 가깝게는 론지니아의 참변까지, 우리의 시민들은 지속적으로 저 론도 산맥에 숨어 사는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위대한 대륙의 자존심이 상처 입는 것을 두고만 보아선 안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시민들이 받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이 위대한 대륙의 지도자들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해야 하는 그 무엇이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전능하고 지고하신 신의 적자들로서,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닌, 근본적인 무엇이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께 우리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신의 적자들, 위대한 대륙의 시민들에게 시련을 안겨온 무도한 무리들을 향하여 대대적인 정벌전을 펼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우리 모두의 힘을 합하여 그들을 정벌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 거대하고도 깊은 론도를 되찾고 우리의 시민들로 하여금 주인의식과 스스로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크지 않았으나 매우 결연하고 의기에 찬 목소리로 그가 연설을 마치자 참석한 이들 모두가 각자의 속내와 관계없이 박수를 치며 여기에 호응하였다. 특히 펠리그로니에프는 짐짓 감동한 듯 찬양에 가까운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국왕 폐하의 현철함과 의지를 보여주는 연설이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 감동받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좌중을 돌아보며 동의라도 구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위대한 보르틴의 후예요, 신의 아들들입니다! 먼 옛날 이 땅이 보르틴의 이름으로 하나였을 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우리를 우러르고 우리의 문명을 찬양하였으며, 우리의 신을 향해 경배드렸습니다! 헌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사악한 신을 믿는 자가 이 땅을 범한 후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이 땅은 사분오열되어 서로의 이익만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야만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식탁 밑을 기면서 떨어지는 고깃점이나 주워 먹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고귀한 혈통 속에 흐르는 정신에 대해 무지함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하찮은 것들에게까지 과도한 권리를 주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래서야 어찌 위대한 보르틴의 후예로서, 전지전능하신 아르케의 아들들로서 이 땅에 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대영주의 말씀이 지극히 온당하십니다! 이제는 모두 힘을 합쳐 새로운 보르틴의 역사를 써 나가야 할 때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뭉쳐야 합니다!”
펠리그로니에프의 지지에 다른 이들도 앞 다투어 찬동하였고, 나머지들도 서로 질세라 정벌에 대한 열의를 선보였다. 장내가 다소 흥분되는 조짐이 보이자 바루나가 이를 진정시켰다. 그때까지도 핫산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바이마샤르의 바슈미르 대표께선 이견이 있으신지요?”
“이견이라기보다….”
그는 조심스럽게 정벌의 규모에 대한 염려를 내비쳤다. 정벌의 목표를 론도 산맥에 대한 장악으로 한다면 좀 크지 않은가 싶습니다. 물론 론도 산맥을 장악하게 되면 커다란 효과가 있으리라는 점에는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자부심 또한 대단해지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줄로 압니다. 칼링거의 영주 루드비히 얀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직접적으로 묻고 들어오자 그에 이스마르의 국무관이 핫산의 양해를 구하며 대신 대답하였다. 이 사람이 대신 대답을 드리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저는 바슈미르 대표의 염려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폐하와 울리프 공작을 비롯한 각국의 여러분들의 강력한 의지와 숭고한 뜻에 대해선 저 역시 무척이나 공감합니다.”
“….”
바루나는 가벼운 목례로 그의 지지의사에 화답했다.
“그렇기는 하나…, 이 정벌이 일단 시작이 된다면 우리는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저는 연합군의 실질적인 군사력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국왕 폐하와 울리프 공작께서도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론도 산맥에 자리한 무도한 무리들을 이끄는 베슬리 얀 반 마르크 로이나르는 이전 시대에 이 땅에 있었던 그 많은 마검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자였습니다.”
“음….”
그래, 그랬어…. 그렇지…. 참석한 이들이 다들 정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약간 웅성거리는 가운데 국무관의 말이 계속되었다. 물론 그것은 사악한 이교의 주술이며 악마의 술수이나, 실질적인 전투에 들어갔을 때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듣고 있던 바루나의 눈가에 주름이 지어졌다. 하긴 이스마르의 군력이라고 해봐야 마검의 기사들을 빼면 허수아비지….
“저의 염려를 예하께서는 곡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저의 염려가 신의 뜻을 받들고자 하는 성스러운 군대의 의지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국무관의 신앙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전능하고 지고하신 그 분의 뜻을 받들어 뫼시는 이스마르의 경건한 전통을 그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레오의 말을 펠리그로니에프가 끊고 나섰다. 교총 내에서조차 영향력이 별로 없는 총장이 대영주의 그런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쾌한 내색을 하진 않았으나, 그를 보는 다른 참석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국무관의 염려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런 염려가 있을 수 있음을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대영주께선 뭔가 해결 방도를 갖고 계시는지…?”
바루나의 물음에 펠리그로니에프는 좌중을 쓸어보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전략․전술과 더불어, 그를 수행하기 위한 힘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사악한 주술을 사용하는 저들 마검사에 대항할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은 오랜 시간 신의 은총 아래 살아오며, 기도와 갈구 끝에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신의 권능이 기사의 검 끝에 역사하심을 알았습니다.”
펠리그로니에프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오로지 깊은 신앙심으로 가능할 것이며, 사악한 무리를 향한 결의를 불태우는 기사의 검으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이 장대하고 화려한 사전 설명에 바루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며 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참석자들은 이게 무슨 소리야? 하는 얼굴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참석한 이들 가운데 리토르나만이 이들의 논쟁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처음과 다름없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앗 따거…!”
어깨에 입은 상처의 붕대를 갈던 종군의원이 브로시니의 엄살에 깜짝 놀라며 흠칫했다. 브로시니는 종군의원의 머리만큼이나 커다란 주먹을 들어 한 대 후려칠 듯 시늉했다.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콱 그냥….”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면 내가 붕대까지 감고 있겠어?”
브로시니를 따라온 시종이 한숨을 푹 짧게 내쉬었다. 그나저나, 바이마샤르의 그 루카스라는 기사도 대단합니다. 음…. 브로시니는 시종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탁상에 놓인 술병을 들어 몇 모금 들이켰다.
“성격은 좀 나빠 보였지만…, 어쨌든 꽤 솜씨가 있더라고.”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이놈이….”
“주인님께선 항상 잘 싸우는 자를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뭐, 그거야….”
종군의원이 치료를 마치고 나가자 브로시니는 전포를 추슬렀다. 시종이 다가와 갑주를 걸치고 고정시키는 동안 그는 다시 한 번 술병을 들었다.
“오늘 저녁에 미키네오스의 왕녀께서 연회를 여신답니다.”
“응…? 왜…?”
“사신단을 수행해 온 군사들을 위로한다는군요. 낮부터 그렇게 드시면 취한 상태로 거기 들어가시겠습니다.”
“이까짓 술 따위로 내가 정신줄 놓는 거 봤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꾸하는 브로시니의 아픈 곳을 시종이 찔렀다.
“지난 가을훈련 때 기마병한테 포복훈련 시켰던 거, 벌써 잊어버리셨습니까?”
“어이 어이…, 왜 또 그 이야기는….”
“하긴 취했을 때였으니…, 기억 못하실 지도….”
브로시니의 손이 검을 뽑아들었다.
“자네…, 삶이 무료한가보군.”
“아닙니다, 아닙니다…!! 무척 보람되고 행복합니다!!”
한편 루카스도 브로시니와 일전을 벌인 상처가 만만치 않았다. 따로 종군의원을 두지 않은 터라 나자르가 그의 상처를 돌보았다. 뺨에 난 작은 검상은 아물었지만 옆구리에 입은 상처가 꽤 깊었다.
“피는 이제 더 안 나는 것 같네요.”
상처를 돌보는 나자르는 이전과 달리 조금 냉랭하다 싶을 만큼 무표정이었다. 루카스는 왜 그러는지 알 것도 같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상처를 꿰매기 시작하는 나자르를 내려다보던 그는 얌전히(?) 헛기침을 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환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감각한 어조로 묻자 루카스는 눈을 다른 데로 돌리며 물었다.
“미안…, 하게 됐다, 나자르 총사.”
“뭐가 말입니까?”
“…. 자네가 명예를 위해 결투신청을 하는데…, 흠….”
“… …. 멋지게 무시를 해주시더군요. 그것도 다른 나라의 기사 앞에서.”
“… ….”
“괜찮습니다. 상관의 결정이었으니 따를 수밖에요.”
“어쨌든….”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자르가 치료를 끝내고 붕대를 감기 시작할 쯤 밖에서 브로시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스 사령! 안에 있는가?!”
이윽고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꼴에 나자르는 할 말을 잃었다. 죽일 듯이 싸울 땐 언제고, 그는 마치 오랜 친구를 찾아온 것처럼 흥에 겨운 얼굴로, 품에는 술이 가득 들어 보이는 오크통이 들고 있었다.
“오…, 이런 호강을 하다니…. 하여튼…, 잘 생기고 봐야해.”
내려놓는 술통이 묵직한 소리를 냈다.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루카스를 향해 그는 고개를 끄덕거려 보이며 제 어깨를 가리켰다. 비긴 셈 치세. 내 어깨도 지금 정상이 아니거든. 루카스는 픽 하고 웃어버렸다.
“얼른 끝내고 나자르 총사도 같이 앉읍시다. 화해주 한 잔 하러 왔소.”
“….”
붕대를 모두 감은 나자르는 그의 말에 일언반구도 없이 의료품을 정리해 들고 일어났다. 붕대는 내일 갈아드리지요. 술을 하시려거든 심하게는 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덧날 수 있습니다. 루카스를 향해 말하고 돌아서서 막사를 나서려는 그녀를 브로시니가 막아섰다. 나자르의 반응은 침착하고도 냉정했다. 느릿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짧게 물었다.
“…. 무슨 짓입니까, 지울리니 경…?”
“다 같이 화해하자고 왔는데 너무 쌀쌀…,”
“경과 내가 화해하는 길은 서로 칼을 섞는 것뿐입니다.”
한겨울인 바깥 날씨도 이보다는 더 포근하겠다 싶을 정도로, 나자르의 말투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브로시니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자르와 루카스가 말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아 앞으로 내민 무릎에 얹었다.
“네오시아 백마기사단 선봉대장, 브로시니 캄폴리노 지울리니가 바이마샤르 보위부의 나자르 바슈미르 총사께 무례를 범하고 그 명예를 더럽혔음을 인정합니다. 이에 깊이 사죄하며 반성하는 바이니, 나의 명예를 거두어주시오.”
루카스는 짧게 코웃음 쳤고, 나자르의 표정은 조금 풀어졌다. 명예를 거두어 달라는 표현은 무엇으로든 대가를 치를 수 있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다시 말하면 모욕의 대가를 죽음으로 치러도 관계없다는 의사의 표시였다. 나자르가 돌아보자 어느새 전포를 걸친 루카스는 어깨만 으쓱해 보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브로시니는 그 상태 그대로 나자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경의 사과를 받아들이지요.”
나자르가 검을 뽑아 그의 어깨에 얹으며 수락할 뜻을 전하자, 브로시니는 언제 그렇게 무릎을 꿇고 사과했냐 싶게 밝은 얼굴로 벌떡 일어나 크게 웃었다.
“자자, 이제 됐으니 앉읍시다, 응?! 내가 좋은 술 가져왔소…!”
“하지만 아직도 나는 경과 술을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은 없군요.”
“에이, 거 참…,”
여전히 냉랭한 투로 그녀가 쏘아붙였다.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경께선 여자와 술자리와 잠자리만 한다고…. 난 경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진 않군요.”
그리고는 막사 밖으로 나서려는 그녀는 브로시니의 말에 멈춰 섰다.
“이거 참…, 같은 전사로서 화해주 한 잔 하자는 겁니다.”
“… ….”
“이거 봐, 루카스 사령. 우리가 서로 막말하면서 한 판 붙었지만 말이야, 사실은 자네처럼 나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인 상대는 없었거든.”
브로시니가 어깨를 가리키며 싱글거렸다. 이쯤 되자 루카스로서도 푹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나이들끼리 목숨 걸고 싸워봤으면, 목숨 걸고 술도 한 잔 마셔봐야 하지 않겠나? 그는 시원시원하게 말을 건네며 술통을 열었다. 나자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루카스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앞에 앉았다.
“사령님…!”
“나도 자네만한 상대는 처음이었네.”
“핫핫핫…!! 함께 드십시다, 나자르 총사. 내 사과도 받아주었는데 술 한 잔 대접도 안 받아준다면 내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 ….”
브로시니는 술을 퍼 담은 잔을 내밀며 거의 강권하다시피 했다. 나자르는 술이 넘치는 잔을 낚아채듯 받아 들고는 함께 자리했다. 브로시니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보위부 공관에서 한 세월을 보냈던 집사는 헨야와 함께 시락을 떠나 ?렌 지방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늘 메이드 차림이었던 헨야는 제법 전사의 티가 나는 날렵한 옷차림이었고, 집사는 공관에 있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쩔 생각이세요? 딱히 한율이 어디로 갔는지 알 길도 없잖아요.”
“왜 내가 아이린을 한율에게 데려갈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럴 생각 아니셨어요?”
“아니다.”
집사는 예의 그 능청맞은 투로 짧게 대답하며 말을 재촉했다.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그를 쫓아가며 헨야는 대답을 졸랐다. 어쩌시려고요~?! 만날 그렇게 신비주의로만 일관하실 거에요? 대답이 계속 없는 그에게 헨야는 시비를 걸 듯 그가 탄 말을 발로 툭 찼다. 히힝~! 깜짝 놀란 말이 한 차례 투레질을 했다.
“스승의 말을 걷어차다니, 무슨 짓이냐?”
“언제는 스승이라 부르지 말라더니….”
“험….”
“행세하기 싫다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스승대접 받으시겠다고요?”
“뭐….”
헛기침을 하는 그에게 헨야가 다시 심산을 묻자, 그는 그제야 속내를 털어놓았다.
“너도 알다시피 이 땅은 신비가 사라진 곳이다. 그런 곳에서 법력은 쥐꼬리만한 네가 아이린을 찾아낸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 그거야….”
“아이린이 갖고 있는 영(靈)은 여느 사람들과 달라. 거의 투명에 가까울 만큼 맑은 영을 지닌 아이야. 그러니 너처럼 부족한 법력으로도 그 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게다.”
“그건 저도 어느 정도….”
“아직도 타고난 파멸의 숙명을 씻어내지 못하는 한율에게 그런 아일 데려다 줘 보거라. 어떻게 될는지….”
“… ….”
“한율이 억누르고 있는 절대자의 현신이 눈을 뜨게 되면 곁에 있는 그 아이부터 신탁을 받게 될 테지. 그렇게 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집사님은 그래도 두 사람 이어주려고 했잖아요.”
“그건 한율이 그대로 눌러 있었으면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지. 절대자도 경지에 오른 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그게 가능했겠어요?”
“….”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묻는 헨야에게 집사는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렇다 할 말이 없자 물어본 헨야도 덩달아 안색에 그늘을 들였다. 집사님답지 않으시네요, 그런 도박에 가까운…. 나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 리는 없지 않느냐.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그리고 그들은 ?렌 성이 보이는 곳까지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은 채 길을 재촉했다.
“… …. 넌 대체….”
아로사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슈미르 부인은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시종장도 이 일을 어떡하나 하는 얼굴로 한숨만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니, 아로사? 집사가 어떻게…, 아니, 아니지…. 그보다 그 사람을 어떻게 믿는다고 나한테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 ….”
아로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부인의 손이 팔걸이 끝을 초조하게 두드렸다. 아로사의 말로는, 연금당한 아이린을 데리고 전란의 기운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집사가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마법사나 주술사, 예언가 따위를 전혀 믿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바슈미르 부인에겐 그 집사를 믿을만한 어떤 것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로사가 집사의 말만 믿고 와서 그 이야기를 전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유모.”
“예, 마님.”
“당장 ?렌으로 갈 준비해.”
“예.”
시종장도 두말없이 주인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아로사는 일어서려는 부인을 붙들어 앉혔다.
“어머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집사는 믿을만한 사람이에요.”
“시끄러워!!”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로사의 말을 일축했다. 집사가 여기 있을 때 번번이 아이린이 철없는 짓할 때 장단 맞춰줬던 거 몰라?! 대체 뭘 보고 믿으라는 거니, 너는?! 니가 동족 사람이라고 한율을 감싸는 것까진 이해한다만, 그게 네 가족보다 소중하더냐?!! 가족보다 소중해?!!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야단을 치는지 속을 쏟아내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부인의 말에 아로사는 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시종장이 차비를 차리고 다시 들어왔다.
“마님,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알았어. 넌 다녀와서 이야기 마저 하자.”
아로사는 그 말만 남기고 시종장과 함께 나가버리는 모친을 붙들지 못했다. 곧이어 창밖에서 마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났다. 거실의 문이 열리고, 집사 노이만이 들어왔다.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아로사에게 노이만이 다가왔다.
“술이라도 하시겠습니까?”
“….”
“… ….”
“….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줘.”
“…. 예.”
마차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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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좀 풀렸군요. 맥주 한 잔 간절한 걸 참아가면서 저녁 내내 작업을 했는데..
어느새 세 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그려....;;;
내일은 눈이 많이 온다던데. 아 좀.... 안왔으면 좋겠네요.
“우리 보르틴에선 목욕이 죄악인 거 아십니까?”
“네…? 목욕이 죄악이라니요…?”
“신의 티끌을 씻어내는 행위라고 해서 교리 상으로는 목욕을 금지하고 있답니다. 민간에서는 목욕을 하면 신의 은총이 내려지지 않는다 해서 두려워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지요.”
리토르나는 멋들어진 주변 경관을 둘러보며, 헌데 왕녀께선 이렇게…근사한 시설까지 갖추고 매일 목욕을 즐기시는군요. 사실 우리나라의 목욕 문화는 이웃의 바이마샤르에서 전해진 것입니다. 바이마샤르는 보르틴 대륙에서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나라이긴 합니다만,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나라이기도 합니다. 여자가 군인이 되는 것만 해도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군요.
“저…, 황녀님께 궁금한 것이 있는데….”
“…? 말씀하시지요.”
“제가 알기로 대국의 황실에서는 마법사들을 중용하고 국정에 관여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런 기관이 있습니다. 주술사와 법사, 학사들을 키워내는 곳이지요.”
“기관…, 그럼 나라에서 관장하는 곳인가요?”
“아닙니다. 나라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곳이지요. 대륙의 중앙부에 있는 거대한 브란다트 고원지대에 자리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지난 2천 년에 걸쳐 있어왔죠. 앙카라시아 대륙의 왕조는 바로 거기에서 정통성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대륙의 주인으로 인정을 받게 된답니다.”
“그렇다면 황실보다도 더욱 권위가 있는 곳이로군요.”
“어떻게 보면 그렇습니다. 지금은 멸망하고 없는 나라이긴 하지만 하백의 모국인 환국에서도 사무랑이라는 비슷한 집단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실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오직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의 흥망을 위해서 움직이는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가나파티와 비슷하지요.”
“가나파티…, 생소한 명칭이군요. 헌데 하백은 그런 걸 모르는 것 같던데요.”
“그럴 것입니다. 하백은 환국이 멸망한 이후에 태어났으니까요. 게다가 아슈람에서 자라났으니….”
“…, 듣다 보니 조금….”
“…. 뭔가 걸리시는 거라도…?”
“가나파티가 황조의 정통성을 잇는 데 필요한 곳이라면, 어째서 황녀께선 그 곳에 계시지 않고 아슈람에서….”
예상한 질문인 듯 리토르나는 웃음 지으며 그 유래를 설명했다.
본래 아슈람을 세우신 성현 아시타 구루께선 가나파티의 구루이셨습니다. 구루란 말은 스승을 가리키는 옛 누베르 말이죠. 그 분께선 특정 황조나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인간의 구원을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저 먼 아쿠아리아스 대륙에 아슈람을 세우셨지요.
“아….”
“폐하께선 보다 큰 뜻을 배울 기회를 주신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면, 왕정 체제의 나라에서는 그런 제도들이 다들 있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 미키네오스에서도 왕실에선 대륙의 역사와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교육을 받게끔 되어 있거든요.”
“그럴 테지요.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흘렀습니다만, 궁금하신 점이라는 것이….”
“아, 제가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좀 외람된 질문일지도….”
“무슨….”
“대국 황실의 마법사들이라면 이렇게 먼 곳에 계시더라도 소식을 전할 방도는 있을 텐데…, 지금껏 황녀께서는 본국의 소식을 저희 왕실을 통해서만 접하고 계시는 것으로 압니다만….”
“… ….”
리토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황제폐하의 환후가 위중하시다면 한시바삐 돌아갈 방도를 강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벌 준비로 부왕께서 송구하게도 황녀님을 이곳에 머무르시게는 하고 있지만….”
“물론 왕녀의 말씀대로입니다.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황실 법사들의 법력이라면 충분히 제게 소식을 전할 능력이 있지요. 하지만 이 땅은 그들의 법력이 미치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
“국왕폐하의 실덕을 지적하는 듯하여 불편한 말씀입니다만…, 지난 전쟁 이후 마법사나 주술사들은 이 땅에서 모두 축출되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나마 무리를 지어 세력을 이루고 있던 샤몽 부족은 모조리 대륙의 최남단으로 밀려났고요.”
“….”
“무릇 자연의 기운은 그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떠난 이후 이 땅의 모든 신비는 사라진 것이 아닌지 추측이 됩니다. 목욕이 신의 티끌을 씻어내는 불결한 행위라는 교리는 왕녀께서도 이미 그렇게 여기시는 바와 같이 닫힌 마음과 경직된 생각을 상징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는 아무리 높은 법력을 지닌 법사라 해도 지닌바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기가 어렵습니다.”
“…. 그렇군요.”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리토르나의 말을 경청하던 레이네는 다소 의외라는 얼굴로 말을 마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잠시 주변 경관을 둘러보던 리토르나가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왜 그러시는지…?”
“….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
리토르나는 굳이 더 묻지 않은 채 그저 웃기만 했다. 레이네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연합회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연합회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참석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 단지 형식적인 참석일 뿐입니다. 잉그라드에 사신까지 보내셨으니 명분상 잠시 자리하는 것입니다.”
“…. 부왕이…, 노여우십니까…?”
그럴 리 있느냐는 듯 리토르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정벌 자체는 무난하게 통과가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정벌 후 론도 산맥에 대한 이권의 문제를 놓고는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대영주 펠리그로니에프는 완고한 원리주의자 같지만, 야심이 매우 큰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권을 분할하는 데서 그가 변수가 될 듯합니다.”
그렇겠군요…. 정확하게 짚어내는 리토르나의 말에는 수긍하면서도 레이네는 한편으로 그녀가 정벌의 성공을 확신하듯 하는 근거가 궁금했다.
“귀국의 군주를 감히 평가하는 듯하여 말씀드리긴 민망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말씀해보세요.”
“적어도 국왕 폐하께선…, 질 것 같은 전쟁을 벌이실 분 같지는 않습니다.”
이튿날부터 시작된 연합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대표들은 정벌 자체에 대한 찬반 논쟁으로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바루나는 회의의 필두에서부터 론도 정벌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한바탕 긴 연설을 늘어놓았다.
“20여 년 전 나는 왕국의 영광과 신의 사랑으로 한 몸이 되어 다 함께 내일을 꿈꾸던 이들이 무참히 무너지고 깨어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올시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그들을 구하고자 칼을 들어 싸웠던 사람이올시다. 20년을 그렇게 또한 싸워왔습니다. 머나먼 길을 마다 않고 모여 주신 이 자리의 모든 분들 또한 그렇게 싸워오셨으리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 우리는 저 거대한 론도 산맥의 주인이었으며, 우리의 시민들은 누구 하나 이 위대한 대륙에 발 딛고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후안무치한 자의 정벌욕과 그릇된 믿음으로 인해 그 시민들이, 우리의 시민들이 참담한 시련을 겪어야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멀리는 그 참혹했던 전란으로부터, 가깝게는 론지니아의 참변까지, 우리의 시민들은 지속적으로 저 론도 산맥에 숨어 사는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위대한 대륙의 자존심이 상처 입는 것을 두고만 보아선 안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시민들이 받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이 위대한 대륙의 지도자들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해야 하는 그 무엇이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전능하고 지고하신 신의 적자들로서,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닌, 근본적인 무엇이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께 우리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신의 적자들, 위대한 대륙의 시민들에게 시련을 안겨온 무도한 무리들을 향하여 대대적인 정벌전을 펼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우리 모두의 힘을 합하여 그들을 정벌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 거대하고도 깊은 론도를 되찾고 우리의 시민들로 하여금 주인의식과 스스로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크지 않았으나 매우 결연하고 의기에 찬 목소리로 그가 연설을 마치자 참석한 이들 모두가 각자의 속내와 관계없이 박수를 치며 여기에 호응하였다. 특히 펠리그로니에프는 짐짓 감동한 듯 찬양에 가까운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국왕 폐하의 현철함과 의지를 보여주는 연설이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 감동받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좌중을 돌아보며 동의라도 구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위대한 보르틴의 후예요, 신의 아들들입니다! 먼 옛날 이 땅이 보르틴의 이름으로 하나였을 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우리를 우러르고 우리의 문명을 찬양하였으며, 우리의 신을 향해 경배드렸습니다! 헌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사악한 신을 믿는 자가 이 땅을 범한 후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이 땅은 사분오열되어 서로의 이익만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야만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식탁 밑을 기면서 떨어지는 고깃점이나 주워 먹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고귀한 혈통 속에 흐르는 정신에 대해 무지함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하찮은 것들에게까지 과도한 권리를 주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래서야 어찌 위대한 보르틴의 후예로서, 전지전능하신 아르케의 아들들로서 이 땅에 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대영주의 말씀이 지극히 온당하십니다! 이제는 모두 힘을 합쳐 새로운 보르틴의 역사를 써 나가야 할 때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뭉쳐야 합니다!”
펠리그로니에프의 지지에 다른 이들도 앞 다투어 찬동하였고, 나머지들도 서로 질세라 정벌에 대한 열의를 선보였다. 장내가 다소 흥분되는 조짐이 보이자 바루나가 이를 진정시켰다. 그때까지도 핫산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바이마샤르의 바슈미르 대표께선 이견이 있으신지요?”
“이견이라기보다….”
그는 조심스럽게 정벌의 규모에 대한 염려를 내비쳤다. 정벌의 목표를 론도 산맥에 대한 장악으로 한다면 좀 크지 않은가 싶습니다. 물론 론도 산맥을 장악하게 되면 커다란 효과가 있으리라는 점에는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자부심 또한 대단해지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줄로 압니다. 칼링거의 영주 루드비히 얀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직접적으로 묻고 들어오자 그에 이스마르의 국무관이 핫산의 양해를 구하며 대신 대답하였다. 이 사람이 대신 대답을 드리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저는 바슈미르 대표의 염려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폐하와 울리프 공작을 비롯한 각국의 여러분들의 강력한 의지와 숭고한 뜻에 대해선 저 역시 무척이나 공감합니다.”
“….”
바루나는 가벼운 목례로 그의 지지의사에 화답했다.
“그렇기는 하나…, 이 정벌이 일단 시작이 된다면 우리는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저는 연합군의 실질적인 군사력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국왕 폐하와 울리프 공작께서도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론도 산맥에 자리한 무도한 무리들을 이끄는 베슬리 얀 반 마르크 로이나르는 이전 시대에 이 땅에 있었던 그 많은 마검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자였습니다.”
“음….”
그래, 그랬어…. 그렇지…. 참석한 이들이 다들 정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약간 웅성거리는 가운데 국무관의 말이 계속되었다. 물론 그것은 사악한 이교의 주술이며 악마의 술수이나, 실질적인 전투에 들어갔을 때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듣고 있던 바루나의 눈가에 주름이 지어졌다. 하긴 이스마르의 군력이라고 해봐야 마검의 기사들을 빼면 허수아비지….
“저의 염려를 예하께서는 곡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저의 염려가 신의 뜻을 받들고자 하는 성스러운 군대의 의지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국무관의 신앙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전능하고 지고하신 그 분의 뜻을 받들어 뫼시는 이스마르의 경건한 전통을 그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레오의 말을 펠리그로니에프가 끊고 나섰다. 교총 내에서조차 영향력이 별로 없는 총장이 대영주의 그런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쾌한 내색을 하진 않았으나, 그를 보는 다른 참석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국무관의 염려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런 염려가 있을 수 있음을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대영주께선 뭔가 해결 방도를 갖고 계시는지…?”
바루나의 물음에 펠리그로니에프는 좌중을 쓸어보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전략․전술과 더불어, 그를 수행하기 위한 힘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사악한 주술을 사용하는 저들 마검사에 대항할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은 오랜 시간 신의 은총 아래 살아오며, 기도와 갈구 끝에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신의 권능이 기사의 검 끝에 역사하심을 알았습니다.”
펠리그로니에프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오로지 깊은 신앙심으로 가능할 것이며, 사악한 무리를 향한 결의를 불태우는 기사의 검으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이 장대하고 화려한 사전 설명에 바루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며 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참석자들은 이게 무슨 소리야? 하는 얼굴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참석한 이들 가운데 리토르나만이 이들의 논쟁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처음과 다름없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앗 따거…!”
어깨에 입은 상처의 붕대를 갈던 종군의원이 브로시니의 엄살에 깜짝 놀라며 흠칫했다. 브로시니는 종군의원의 머리만큼이나 커다란 주먹을 들어 한 대 후려칠 듯 시늉했다.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콱 그냥….”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면 내가 붕대까지 감고 있겠어?”
브로시니를 따라온 시종이 한숨을 푹 짧게 내쉬었다. 그나저나, 바이마샤르의 그 루카스라는 기사도 대단합니다. 음…. 브로시니는 시종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탁상에 놓인 술병을 들어 몇 모금 들이켰다.
“성격은 좀 나빠 보였지만…, 어쨌든 꽤 솜씨가 있더라고.”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이놈이….”
“주인님께선 항상 잘 싸우는 자를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뭐, 그거야….”
종군의원이 치료를 마치고 나가자 브로시니는 전포를 추슬렀다. 시종이 다가와 갑주를 걸치고 고정시키는 동안 그는 다시 한 번 술병을 들었다.
“오늘 저녁에 미키네오스의 왕녀께서 연회를 여신답니다.”
“응…? 왜…?”
“사신단을 수행해 온 군사들을 위로한다는군요. 낮부터 그렇게 드시면 취한 상태로 거기 들어가시겠습니다.”
“이까짓 술 따위로 내가 정신줄 놓는 거 봤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꾸하는 브로시니의 아픈 곳을 시종이 찔렀다.
“지난 가을훈련 때 기마병한테 포복훈련 시켰던 거, 벌써 잊어버리셨습니까?”
“어이 어이…, 왜 또 그 이야기는….”
“하긴 취했을 때였으니…, 기억 못하실 지도….”
브로시니의 손이 검을 뽑아들었다.
“자네…, 삶이 무료한가보군.”
“아닙니다, 아닙니다…!! 무척 보람되고 행복합니다!!”
한편 루카스도 브로시니와 일전을 벌인 상처가 만만치 않았다. 따로 종군의원을 두지 않은 터라 나자르가 그의 상처를 돌보았다. 뺨에 난 작은 검상은 아물었지만 옆구리에 입은 상처가 꽤 깊었다.
“피는 이제 더 안 나는 것 같네요.”
상처를 돌보는 나자르는 이전과 달리 조금 냉랭하다 싶을 만큼 무표정이었다. 루카스는 왜 그러는지 알 것도 같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상처를 꿰매기 시작하는 나자르를 내려다보던 그는 얌전히(?) 헛기침을 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환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감각한 어조로 묻자 루카스는 눈을 다른 데로 돌리며 물었다.
“미안…, 하게 됐다, 나자르 총사.”
“뭐가 말입니까?”
“…. 자네가 명예를 위해 결투신청을 하는데…, 흠….”
“… …. 멋지게 무시를 해주시더군요. 그것도 다른 나라의 기사 앞에서.”
“… ….”
“괜찮습니다. 상관의 결정이었으니 따를 수밖에요.”
“어쨌든….”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자르가 치료를 끝내고 붕대를 감기 시작할 쯤 밖에서 브로시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스 사령! 안에 있는가?!”
이윽고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꼴에 나자르는 할 말을 잃었다. 죽일 듯이 싸울 땐 언제고, 그는 마치 오랜 친구를 찾아온 것처럼 흥에 겨운 얼굴로, 품에는 술이 가득 들어 보이는 오크통이 들고 있었다.
“오…, 이런 호강을 하다니…. 하여튼…, 잘 생기고 봐야해.”
내려놓는 술통이 묵직한 소리를 냈다.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루카스를 향해 그는 고개를 끄덕거려 보이며 제 어깨를 가리켰다. 비긴 셈 치세. 내 어깨도 지금 정상이 아니거든. 루카스는 픽 하고 웃어버렸다.
“얼른 끝내고 나자르 총사도 같이 앉읍시다. 화해주 한 잔 하러 왔소.”
“….”
붕대를 모두 감은 나자르는 그의 말에 일언반구도 없이 의료품을 정리해 들고 일어났다. 붕대는 내일 갈아드리지요. 술을 하시려거든 심하게는 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덧날 수 있습니다. 루카스를 향해 말하고 돌아서서 막사를 나서려는 그녀를 브로시니가 막아섰다. 나자르의 반응은 침착하고도 냉정했다. 느릿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짧게 물었다.
“…. 무슨 짓입니까, 지울리니 경…?”
“다 같이 화해하자고 왔는데 너무 쌀쌀…,”
“경과 내가 화해하는 길은 서로 칼을 섞는 것뿐입니다.”
한겨울인 바깥 날씨도 이보다는 더 포근하겠다 싶을 정도로, 나자르의 말투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브로시니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자르와 루카스가 말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아 앞으로 내민 무릎에 얹었다.
“네오시아 백마기사단 선봉대장, 브로시니 캄폴리노 지울리니가 바이마샤르 보위부의 나자르 바슈미르 총사께 무례를 범하고 그 명예를 더럽혔음을 인정합니다. 이에 깊이 사죄하며 반성하는 바이니, 나의 명예를 거두어주시오.”
루카스는 짧게 코웃음 쳤고, 나자르의 표정은 조금 풀어졌다. 명예를 거두어 달라는 표현은 무엇으로든 대가를 치를 수 있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다시 말하면 모욕의 대가를 죽음으로 치러도 관계없다는 의사의 표시였다. 나자르가 돌아보자 어느새 전포를 걸친 루카스는 어깨만 으쓱해 보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브로시니는 그 상태 그대로 나자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경의 사과를 받아들이지요.”
나자르가 검을 뽑아 그의 어깨에 얹으며 수락할 뜻을 전하자, 브로시니는 언제 그렇게 무릎을 꿇고 사과했냐 싶게 밝은 얼굴로 벌떡 일어나 크게 웃었다.
“자자, 이제 됐으니 앉읍시다, 응?! 내가 좋은 술 가져왔소…!”
“하지만 아직도 나는 경과 술을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은 없군요.”
“에이, 거 참…,”
여전히 냉랭한 투로 그녀가 쏘아붙였다.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경께선 여자와 술자리와 잠자리만 한다고…. 난 경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진 않군요.”
그리고는 막사 밖으로 나서려는 그녀는 브로시니의 말에 멈춰 섰다.
“이거 참…, 같은 전사로서 화해주 한 잔 하자는 겁니다.”
“… ….”
“이거 봐, 루카스 사령. 우리가 서로 막말하면서 한 판 붙었지만 말이야, 사실은 자네처럼 나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인 상대는 없었거든.”
브로시니가 어깨를 가리키며 싱글거렸다. 이쯤 되자 루카스로서도 푹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나이들끼리 목숨 걸고 싸워봤으면, 목숨 걸고 술도 한 잔 마셔봐야 하지 않겠나? 그는 시원시원하게 말을 건네며 술통을 열었다. 나자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루카스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앞에 앉았다.
“사령님…!”
“나도 자네만한 상대는 처음이었네.”
“핫핫핫…!! 함께 드십시다, 나자르 총사. 내 사과도 받아주었는데 술 한 잔 대접도 안 받아준다면 내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 ….”
브로시니는 술을 퍼 담은 잔을 내밀며 거의 강권하다시피 했다. 나자르는 술이 넘치는 잔을 낚아채듯 받아 들고는 함께 자리했다. 브로시니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보위부 공관에서 한 세월을 보냈던 집사는 헨야와 함께 시락을 떠나 ?렌 지방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늘 메이드 차림이었던 헨야는 제법 전사의 티가 나는 날렵한 옷차림이었고, 집사는 공관에 있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쩔 생각이세요? 딱히 한율이 어디로 갔는지 알 길도 없잖아요.”
“왜 내가 아이린을 한율에게 데려갈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럴 생각 아니셨어요?”
“아니다.”
집사는 예의 그 능청맞은 투로 짧게 대답하며 말을 재촉했다.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그를 쫓아가며 헨야는 대답을 졸랐다. 어쩌시려고요~?! 만날 그렇게 신비주의로만 일관하실 거에요? 대답이 계속 없는 그에게 헨야는 시비를 걸 듯 그가 탄 말을 발로 툭 찼다. 히힝~! 깜짝 놀란 말이 한 차례 투레질을 했다.
“스승의 말을 걷어차다니, 무슨 짓이냐?”
“언제는 스승이라 부르지 말라더니….”
“험….”
“행세하기 싫다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스승대접 받으시겠다고요?”
“뭐….”
헛기침을 하는 그에게 헨야가 다시 심산을 묻자, 그는 그제야 속내를 털어놓았다.
“너도 알다시피 이 땅은 신비가 사라진 곳이다. 그런 곳에서 법력은 쥐꼬리만한 네가 아이린을 찾아낸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 그거야….”
“아이린이 갖고 있는 영(靈)은 여느 사람들과 달라. 거의 투명에 가까울 만큼 맑은 영을 지닌 아이야. 그러니 너처럼 부족한 법력으로도 그 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게다.”
“그건 저도 어느 정도….”
“아직도 타고난 파멸의 숙명을 씻어내지 못하는 한율에게 그런 아일 데려다 줘 보거라. 어떻게 될는지….”
“… ….”
“한율이 억누르고 있는 절대자의 현신이 눈을 뜨게 되면 곁에 있는 그 아이부터 신탁을 받게 될 테지. 그렇게 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집사님은 그래도 두 사람 이어주려고 했잖아요.”
“그건 한율이 그대로 눌러 있었으면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지. 절대자도 경지에 오른 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그게 가능했겠어요?”
“….”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묻는 헨야에게 집사는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렇다 할 말이 없자 물어본 헨야도 덩달아 안색에 그늘을 들였다. 집사님답지 않으시네요, 그런 도박에 가까운…. 나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 리는 없지 않느냐.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그리고 그들은 ?렌 성이 보이는 곳까지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은 채 길을 재촉했다.
“… …. 넌 대체….”
아로사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슈미르 부인은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시종장도 이 일을 어떡하나 하는 얼굴로 한숨만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니, 아로사? 집사가 어떻게…, 아니, 아니지…. 그보다 그 사람을 어떻게 믿는다고 나한테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 ….”
아로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부인의 손이 팔걸이 끝을 초조하게 두드렸다. 아로사의 말로는, 연금당한 아이린을 데리고 전란의 기운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집사가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마법사나 주술사, 예언가 따위를 전혀 믿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바슈미르 부인에겐 그 집사를 믿을만한 어떤 것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로사가 집사의 말만 믿고 와서 그 이야기를 전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유모.”
“예, 마님.”
“당장 ?렌으로 갈 준비해.”
“예.”
시종장도 두말없이 주인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아로사는 일어서려는 부인을 붙들어 앉혔다.
“어머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집사는 믿을만한 사람이에요.”
“시끄러워!!”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로사의 말을 일축했다. 집사가 여기 있을 때 번번이 아이린이 철없는 짓할 때 장단 맞춰줬던 거 몰라?! 대체 뭘 보고 믿으라는 거니, 너는?! 니가 동족 사람이라고 한율을 감싸는 것까진 이해한다만, 그게 네 가족보다 소중하더냐?!! 가족보다 소중해?!!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야단을 치는지 속을 쏟아내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부인의 말에 아로사는 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시종장이 차비를 차리고 다시 들어왔다.
“마님,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알았어. 넌 다녀와서 이야기 마저 하자.”
아로사는 그 말만 남기고 시종장과 함께 나가버리는 모친을 붙들지 못했다. 곧이어 창밖에서 마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났다. 거실의 문이 열리고, 집사 노이만이 들어왔다.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아로사에게 노이만이 다가왔다.
“술이라도 하시겠습니까?”
“….”
“… ….”
“….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줘.”
“…. 예.”
마차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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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좀 풀렸군요. 맥주 한 잔 간절한 걸 참아가면서 저녁 내내 작업을 했는데..
어느새 세 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그려....;;;
내일은 눈이 많이 온다던데. 아 좀.... 안왔으면 좋겠네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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