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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8 388회 0건
“오…!”
예스프리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훈련된 몸짓이었다.
“저 짐승들은 그랑카라고 합니다. 말 몸뚱아리에 늑대 대가리가 있죠. 저 놈들은 주인을 태우지 않아도 말처럼 가만히 있질 않습니다. 다리를 자르든, 모가질 자르든 어떻게든 먼저 죽여 놓아야 하죠.”
“방패는 방어를 위한 게 아니었군….”
“그렇습니다.”
그랑카의 목을 관통해서 목젖까지 치고 올라온 창날을 피해 떨어져 내린 마도의 병사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덤벼들었다. 아펠의 병사도 양손으로 창을 넓게 벌려 잡고 응수했다. 그는 창을 돌려가며 양 끝을 활용해 주로 방어에 치중했다. 마도의 병사는 더욱 사납게 몰아쳤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양쪽의 절벽처럼 가파른 산등성이에 부딪쳐 협곡 안을 울렸다.
“기량이 상당하군…. 양쪽 다….”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예스프리. 아닌 게 아니라 하백도 아펠이 키운 병사의 창술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근위무사 세이부 만큼은 아니었지만, 언뜻 수세에 몰리는 듯한 모습이면서도 그가 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계속 뒤로 밀리며 방어하던 병사는, 상대가 회전하며 검격에 위력을 더해오자 눈을 빛냈다. 기회다…! 창을 바닥에 찍어 곧추세우며 장대높이뛰기를 하듯 몸을 솟구치는 그의 한 손이 어느새 등 뒤에 꽂은 검을 뽑고 있었다.
“걸렸다 이놈…!!”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검격에 창이 부러진 것은 이미 그 병사가 창을 놓고 베기 동작에 들어간 후였다. 공중에서 몸을 웅크려 회전한 병사는 등 뒤에서부터 온 힘을 다해 상대를 향해 검을 내려쳤다. 크고 둔중한 검에 체중이 실린 묵직한 일격이었다. 필살의 검격에 상대는 어깨와 목이 한꺼번에 잘려나갔고, 아펠의 병사는 땅을 한 번 구르며 중심을 잡고 일어났다.
우아아아-!!!!
카몬 독립대대의 전 병사들이 가슴의 갑주를 치며 함성을 질렀고, 일전을 끝낸 병사가 피 묻은 검을 들어 힘껏 하늘을 찔렀다. 아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답례했다.
“어떻게 보면 이 싸움이 훨씬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엔드릭손이 도끼와 둥근 방패를 들고 무리 속에서 나오는 적병을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집단으로 맞서 싸울 땐 누가 더 많이 죽이느냐의 문제지만, 이런 싸움은 사기와 직결되니까요. 한 차례씩 이렇게 맞붙고 난 결과에 따라 다음번 전면전의 결과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하백은 비로소 기싸움을 걸어온다고 했던 아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아펠이 충고하듯 말했다.
“어이, 근위무사. 잘 봐두라구. 중앙에선 이런 구경 흔치 않아.”
“….”
제 병사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구경’이라니. 납득하긴 어려웠으나 하백은 내색하지 않았다. 태연하게 웃고 떠드는 가운데서도 중대장들에게선 무수한 전투를 치른 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종의 강인함과 결연함이 느껴졌다. 문득, 평소엔 느슨한 듯하면서도 수백의 마도들을 향해 돌진할 땐 누구보다도 사납고 맹렬했던 한율이 떠올랐다.
‘그 분도 마찬가지였지…. 정말 나는 너무 모르는 게 많구나. 어쩌면 지금 저 병사보다도 싸워나갈 수 없을지도….’
“기운 내~! 그런 말 들었다고 기죽을 것 없어…!”
아펠이 그의 등을 거칠게 후려치며 격려했다.
그리고 또 다시 격돌이 일어났다. 이번엔 적병이 휘두르는 도끼의 기세에 밀린 듯 아펠의 병사가 뒤로 몇 걸음씩이나 물러났다. 젠장…. 어찌나 힘이 장사인지, 손목이 욱신거리고 엄지손가락의 뼈가 어긋난 듯 뻐근거려 왔다. 상대는 일격에 승세를 잡았다고 확신했는지 얼굴 가득 살기어린 웃음을 띠며 도끼를 몇 차례 휘둘렀다. 양날의 도끼가 가르는 허공에서 휘잉 휘이잉 소리가 났다.
“공평하게, 공평하게…, 안 그래? 서로 목 하나씩은 주고받아야지.”
여유있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는 일개 병사가 아닌 듯했다. 아펠의 병사는 엄지손가락의 통증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온다…! 그리고 순식간에 자신의 간격 안으로 들어온 적의 도끼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정면에서 내리쳐져 왔다. 받아낼 수 없는 일격, 병사는 땅을 구르며 앞으로 나가 어깨로 상대의 복부를 들이받았다. 헉…! 소리를 내며 두어 걸음 물러선 틈을 놓치지 않고 품에 접고 있던 검으로 가슴을 겨누며 찔러 들어갔다.
챙…. 그러나 숨이 턱 막히는 소리를 내던 상대는 어느 새 정신을 수습했는지, 도끼자루로 그의 검을 걷어내며 뒤로 물러서 피해냈다. 찌르기에 실패한 병사가 검을 수습하며 다시 자세를 잡는 것을 보며 상대가 다시 말을 꺼냈다.
“제법 하는 놈이로구나. 일개 병사인 것 같은데…. 그래, 한 번 제대로 붙어보자…!!”
이번엔 도끼가 돌아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어떤 식의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바짝 긴장한 병사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상대의 눈과 어깨, 허리를 살폈다. 성곽 위의 병사들은 손에 땀을 쥐고 둘이 격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강렬한 파찰음이 협곡 안을 쉬지 않고 울려댔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도끼의 기세에 병사는 방어하는 데만도 힘겨워 보였다. 반격을 하려고 해도 쉴 새 없이 도끼가 그의 목, 어깨, 허리 등을 노리며 짓쳐들어오는 데다, 그 힘도 보통이 아닌지라 한 번 받아낼 때마다 병사는 온 몸이 울리는 듯한 충격을 감내해야 했다. 제 병사가 수세에 몰리자 아펠의 표정에서도 여유가 사라졌다. 가로로 쳐들어오면 이번엔 세로로 내리쳐 지고, 그 다음은 대각선으로 올려치거나 내려치기를 반복하며 도끼는 계속 병사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검이…버티지 못할 것 같군….”
예스프리의 신음과 같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쨍…소리와 함께 병사의 검이 두동강 나버렸다. 이미 그 공격을 받아내느라 온 몸의 힘이 빠져버린 병사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간신히 버티고 서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많이 버텼어, 그만하면…. 이제 네 목을 거둘 차롄가?”
“병장기가 없다고…! ….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나…?!”
“기백은 좋군…!”
마도의 전사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곧바로 도끼를 들어 휘둘렀다. 상대를 죽이고 싶어 하는 모습이 역력한 그 표정에 하백은 소름이 끼쳤으나, 동시에 분기도 함께 올랐다. 이겼으면 됐지, 굳이 상대를 죽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저항하지 못하는 병사의 목이 도끼에 잘려 날아갈 때, 하백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병사의 목을 친 마도의 전사는 도끼날에 묻은 그의 피를 얼굴에 쓰윽 묻히며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저만치 내동댕이쳐져 있는 머리를 들었다.
“받으라구…!!”
그가 힘껏 던진 목이 성벽을 넘어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하백은 죽은 병사의 시신을 마치 놀잇감처럼 농락하는 그 행위에 이를 악물고 부르르 떨었다.
“자…!! 또 없나…?!! 더 나와 봐, 이 허약한 놈들아…!!”
“…. 함락 한 번 못 시켰던 놈들이 말은 잘하는군….”
아펠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기는 누르고 전의는 끌어올렸다. 직접 나갈 심산이었다. 또 나오라며 한 차례 더 고함을 지르는 상대를 보는 예스프리의 눈빛에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다녀오겠습니다.”
“자네가 직접…?”
“병사로는 안 되는 놈입니다.”
살기등등한 얼굴로 돌아서는 아펠을 하백이 가로막았다. 의외의 행동에 중대장들도, 예스프리도 굳은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하백은 결연한 얼굴을 하고는 자신을 내보내 달라 청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나가게 해 주십시오.”
“자네가 싸울 곳이 아니야.”
“전사가 싸울 곳을 가린단 말입니까…?!”
반발하는 하백의 말에 예스프리는 한숨지었다. 아래에선 또 한 차례 상대를 찾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가운데 예스프리는 그의 임무를 상기시켰다.
“자네는 여기 공주님의 명을 받고 왔네. 돌아가야 할 사람이야…!”
“제가 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보내주시죠, 대대장님. 어린 친구가 칼에 피를 묻히고 싶은 모양입니다.”
선선하게 말하는 아펠은 ‘어디 한 번 봅시다’ 하는 얼굴로 예스프리의 말을 가로챘다. 이보게…! 돌아보던 예스프리는 그러나 아펠의 눈빛에 말을 삼켜야 했다. 전의에 불타는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성벽 아래의 적을 쏘아보고 있었다.
“우리는…. 죽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곳 카몬 협곡의 모든 병사들 말입니다.”
“… ….”
“한 번쯤…. 근위무사에게 기회를 줘 보시죠. 전방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직접 부딪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엔드릭손이 거들고 나섰다. 이쯤 되고 보니 예스프리로서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일단은 이 어린 검사에게 기대를 걸어볼 밖에. 예스프리는 하백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성벽 밖에선 더 이상 상대를 찾는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나오려고 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것이었는지. 그러나 하백은 성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분기에 사로잡혔다. 성문이 열리고 눈앞에 보인 풍경은, 상대가 죽은 병사의 배에서 뭔가를 꺼내는 모습이었다. 간이었다.
“싱싱하구먼…, 으응…?”
그는 온 입가에 피를 묻히며 크게 한 입 베어 물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씹다가, 아직 여물지도 않은 어린 소년이 나오자 의외라는 얼굴로 다가오는 상대를 쳐다보았다.
“이건 또 뭐야…. 내가 꼬맹이하고 다 싸워 보네…? 하하하하하…!”
사람의 내장을 꺼내 먹는 것을 보니 마도가 틀림없었다. 하백은 그렇게 단정 지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상대를 향해 나아갔다. 전의를 불태우며 다가오는 하백을 보고 그는 얼른 한 입 더 베어 물어 입 안 가득 죽은 자의 간을 씹으며 도끼를 어깨에 걸쳤다.
“어어…, 이거 맛있어 보이는 놈인데….”
“생명을 해하는 것은…, 가장 금기시해야 할 일…. 생명을 해하고도…, 그 몸을 훼손하고 탐욕을 채우는 자….”
“…응…? 이놈 뭐라는 거야…?”
다가오는 하백의 눈이 점점 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어어…? 하백의 크지 않은 몸 주위로 투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마도의 전사는 그의 투기에 묶인 듯 몸이 굳어 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도, 중대장들과 예스프리도 감탄하며 숨을 죽였다.
“마도가 틀림없을 것이다…. 네 놈을 처단하여…, 그 옛날 죽어 간 내 동족들과 이 자리에 시신마저 훼손된 병사의 마음을 달래 줄 것이다…!”
“…. 이… 이… 꼬마놈…!!”
마치 사형선고라도 하는 듯한 하백의 말에 마도 전사는 기가 막힌 듯했지만, 그의 투기에 눌려 꼼짝하지 못했다. 자와카를 통해 물려받은 아비의 검을 뽑는 하백의 동작은 느릿했지만, 묵직한 기세로 그를 압박해 갔다. 검 끝이 자신을 겨누자 예리한 투기가 집중되어 오는 느낌에 가슴이 꿰뚫리는 듯했다.
“이…이놈…!!”
먼저 움직인 것은 마도의 전사였다. 하백의 기세를 더 내버려 뒀다간 자신은 싸워 보지도 못할 것 같았다. 조급함이 담긴 도끼가 사납게 하백을 향해 쳐들어갔지만, 하백은 그의 모든 동작을 보고 있었다. 이 순간 하백의 집중력은 전에 없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도끼가 어디로 올 지, 그가 어떻게 발을 움직이고 있으며 어느 시점에서 그것이 내리쳐 질 지, 모든 것이 똑똑히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온몸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쨍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하백은 부딪치지 않고 도끼날에 검등이 닿는 순간 내리쳐 오던 방향으로 검을 젖히며 위력을 반감시켰다. 그리곤 그대로 검등을 도끼자루에 미끄러뜨리며 검자루의 끝으로 상대의 미간을 찍었다. 녹청색의 체액이 솟구치고, 비틀거리며 제 기세를 이기지 못해 앞으로 몇 걸음씩이나 내디딘 상대를 향해 하백은 다시 검을 수습하며 자세를 잡았다.
“윽…!!”
피가 한쪽 눈을 덮자 그는 털어내듯 세차게 머리를 한 차례 흔들었다. 하백은 자신의 투기를 가감없이 발산하며 기운을 응축시키는 몸을 구부렸다.
“대단하군요, 저 애송이….”
“음….”
“실력이야 근위무사니까 있다손 치더라도…. 저 기백이 더 놀랍습니다.”
“아슈람에서 제대로 배운 모양이군.”
“저 꼬맹이가 아슈람 출신이란 말입니까?”
아슈람에서 왔다는 말에 아펠이 예스프리를 보는 순간 하백의 몸이 움직였다. 갈짓 자를 그리며 상대를 어지럽히는 하백의 보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동작을 보게. 우리처럼 일격필살로 검격을 내뻗는 것과는 궤가 다르지만, …상대를 교란시키는 움직임이…, 꽤 훈련을 받은 모양이야….”
하백은 좌측으로 도는 듯 하더니 상대가 도끼를 휘두르자 슬쩍 몸을 숙여 피하며 다시 검자루 끝으로 상대의 목을 강하게 후려쳤다.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제대로 맞은 마도 전사는 뒤로 물러서며 목을 감싸 쥐었고, 하백은 그 틈을 노려 양손으로 검을 쥐어 체중을 싣고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서걱 하는 소리가 나며 목을 쥐었던 손목이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오오…! 제대로 배운 모양인데요?”
감탄하는 것은 아펠만이 아니었다. 다른 중대장들을 비롯한 그 자리의 다른 병사들 모두가 이 어린 근위무사의 몸놀림과 기술에 탄복하며 웅성거렸다.
“더 해 볼 텐가…?”
“크으…!! 이 놈…!! 이 애송이 꼬마놈…!!”
“….”
하백은 더 말하지 않고 다시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이번엔 직선이었다. 일도양단이라도 할 듯 검을 늘어뜨린 채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하백을 보고는 마도 전사도 잘됐다는 듯 도끼를 앞으로 내밀며 버티어 섰다. 힘으로 해 보자는 식이었다.
“이번 격돌로 승부가 나겠군….”
양쪽이 다 일격필살의 기세로 맞서는 모양새를 보며 엔드릭손이 해설을 곁들였다. 그러나 하백은 정면대결을 피했다. 그의 움직임은 마도의 전사가 간격을 가늠하는 것보다 더욱 빨랐고, 순식간에 간격을 빼앗긴 마도의 전사가 물러서기도 전에 도끼가 검등에 걸려들었다. 후려쳐 올 줄 알았던 검이 오히려 도끼날의 안쪽을 휘어 감았다. 하백은 그 힘을 이용해 또 다시 검자루로 이번엔 상대의 명치를 강렬하게 찔렀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멎으며 상대의 몸이 굳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하백의 발꿈치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위력을 배가시켜 어깨를 내리 찍었다. 우직 소리와 함께 어깨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야아… 저 애송이, 다시 봐야겠는데요…?”
아펠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확실히 하백의 움직임은 미키네오스 뿐만 아니라 보르틴 대륙에서 보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아군의 승리를 자축했다. 이야~!! 꼬맹이라도 근위무사는 근위무사네, 그려~응~?! 뭐 하나 제대로 보여주는데~! 하백은 더 이상 상대를 해치려 하지 않고 이내 검을 수습하곤 대군을 향해 마주 섰다.
“더 할 모양입니다…?”
“그냥 둬 보지. 기세가 올랐어. 두세 놈 쯤 더 상대할 수 있을 거야.”
당당한 기세로 서 있는 어린 근위무사의 앞으로 다른 전사 한 명이 나섰다. 큰 키에 구부정한 등 뒤로 두 자루의 검을 교차시켜 차고 있었다. 한율님…, 아니 키만 놓고 보자면 좀 더…. 눈짐작으로 가까워져 오는 상대의 간격을 짚어보며 하백은 몸을 긴장시켰다.
“흠…! 가까이서 보니 정말 어린애로군…!”
“….”
“솜씨 잘 봤다. 아주 훌륭해…! 얼굴도 예쁘고….”
하는 말은 칭찬이었지만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다. 언뜻 마도 같기도 하고, 또는 아닌 듯 하기도 했다. 보라색의 동공은 어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초점이 문제가 아니라 눈동자가 바깥쪽으로 몰린 사시였다.
“이름이 뭔가, 어린 친구? 난 피노, 피노라고 한다. 서로 칼 섞기 전에 이름이라도 알아두자구…!”
“…. 하백, 하백이다.”
“…이상한 이름이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이내 검 두 자루를 뽑아 들었다. 검집을 긁어내기라도 하듯, 스릉…하는 거친 소리가 울리자 웅성거리던 병사들은 다시 숨을 죽이며 하백의 두 번째 대결에 집중했다. 하백은 그가 검을 뽑는 것과 거의 동시에 몸을 낮추며 검집을 뒤로 뺐다. 발검 자세였다.
“뭐 하는 겁니까, 저 친구는…? 검도 뽑지 않고….”
“발검술을 할 생각인 것 같군….”
“발검술이라니요…?”
의아해 하는 것은 제롬만이 아니었다. 중대장들 모두의 눈길을 한 차례씩 받은 예스프리가 부친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아버님으로부터 듣기만 했어. 북쪽 대륙에선 지금 하백이 차고 있는 것처럼 활처럼 휘어진 검을 쓴다더군. 날도 한쪽으로 서 있고….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아펠이 거기에 부연했다.
“그럼 검집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걸 이용해서 위력을 늘린다, 뭐 그런 거로군요.”
“정확히 그렇지.”
“여러 가지 좋은 구경 하는군요, 저 애송이 덕에…, 하하하…!”
성벽 위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백은 눈앞의 상대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움직임은 없었으나,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더해져 갔다. 뭘 하려는지 모르지만…, 이번엔 일격에 승부를 걸겠단 얘긴데…. 피노는 하백의 자세를 보고는 얼른 덤벼들지 않고 틈을 노리며 천천히 하백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일단…, 한 번 해 보자…! 피노의 눈빛이 달라지는가 싶더니 거의 동시에 그의 몸이 낮게 쇄도해 들어왔다. 하백은 검날을 아래로 하며 발목을 향해 쳐들어 오는 피노의 검을 피해 훌쩍 몸을 날렸다.
챙….
하백이 위로 뛰어오르며 베어 올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반사적이었는지, 피노는 검 한 자루를 등 뒤로 돌리며 발검술로 제 몸을 두 동강 낼 듯 날아든 검격을 막아내고는 땅을 굴렀다. 착지한 하백은 어느새 검을 수습하고 다시 발검 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대단한 물건이군…. 대단한 물건이야….”
피노는 감탄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큰일 날 뻔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의 방심도 없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하백을 지그시 노려보는 갈라진 눈동자에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다시 피노의 양 손에 들린 쌍검이 하백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검집에 검을 넣은 채로 막아내는군요.”
“음….”
“저래서야 어디 발검술을 제대로 구사할 수나 있겠습니까.”
“틈을 보는 것 같은데…. 워낙 빠르게 치고 들어오니 쉽지 않겠군….”
중대장들이 하는 말에 대꾸하는 예스프리의 손이 검을 찬 허리띠를 한 번 추어올렸다. 하백이 실패하고 거기서 죽게 된다면, 자신이 나갈 생각이었다.
하백은 애를 먹고 있었다. 딱히 어떤 형식 없이 공격을 해 오는 듯했는데, 두 개의 검격은 정확하게 짜 맞춰진 듯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해 들어왔다. 그는 검을 검집에 여전히 넣은 채로 마치 봉을 쓰든 검자루와 검집을 이용해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흥…! 발검술처럼 간격이 필요한 것도 없지…! 그 긴 검으로 이 짧은 간격에선 엄두도 못 낼 일…! 피노는 속으로 승리를 확신하며 하백을 몰아붙였다. 하나로는 얼굴을 찔러 들어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 부근을 베어 들어가는가 하면, 찌르던 검이 방향을 바꾸며 팔을 베어가고, 검집에 튕겨져 나간 다른 하나가 이번엔 다리를 노렸다. 병사들은 저거 위험한 거 아냐? 계속 밀리는데? 하며 술렁거렸다. 그러나 하백은 여전히 침착하게 피노의 공격을 모조리 쳐내고 있었다.
“대결이 지루해지는군….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가 문제겠어.”
“하백이라고 했지요…, 대단한 아이로군요. 저런 상황에선 먼저 공격하려고 서두를 수도 있을 텐데….”
끈질기게 틈을 노리며 수세를 이어가는 하백에게 아펠은 더 이상 ‘꼬맹이’라든가 ‘애송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피노는 공격이 먹히지 않자 조금 다급해졌다. 완력으로 공격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으나, 자신의 특기인 빠르기에서 상대가 조금도 밀리지 않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백은 돌연 피노의 공격이 허허실실의 전략으로 바뀌자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발목을 노리며 쳐 들어오던 칼날이 발목 바로 앞을 가르는가 하면 뒤이어 강렬하게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오고, 허리 쪽으로 찌르는가 하면 다시 목을 향해 베어 들어오는 등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피노의 공격에 정신을 다시금 바짝 차렸다.
‘당황할 것 없어…. 이러다 큰 공격이 하나 들어올 거야….’
“탐이 나는군요, 저 근위무사….”
엔드릭손이 경탄하는 기색으로 말하자, 아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피노가 전력을 다한 일격을 내놓았다. 몸으로 밀치는 척하더니 하백의 어깨를 밟고 공중제비를 돌며 그의 검집을 쳐서 방어를 무너뜨렸다. 기회라고 판단한 하백의 손이 본능적으로 피노의 힘을 이용해 검집을 수평으로 놓으며 발검 자세를 취했다. 득의만면한 얼굴의 피노가 쌍검으로 그를 후려쳐 갔다.
“이 간격에선 안 돼…!!”
“위험합니다…!!”
아펠이 저도 모르게 소리친 순간 피노의 검이 양쪽에서 하백을 향해 벼락처럼 베어져 들어갔다. 하백의 몸이 피노의 간격보다 훨씬 안으로 들어섰고, 그 바람에 피노의 검격은 하백의 검집에 작렬했다. 무슨 짓이야, 이 놈…!! 예스프리조차 긴장한 그 순간 하백의 검이 검집에서 솟구쳤다. 여기서 발검을 해봐야…!!
쩍 소리가 나며 피노의 미간에서 피가 솟구쳤고, 눈이 풀린 피노의 뒤로 몸이 젖혀진 순간 하백의 이어지는 발차기가 가슴팍에 작렬했다. 철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하백의 검은 도로 검집으로 들어갔다. 피노의 일격으로 검집에 박힌 쌍검이 그의 검집을 잡아주는 격이었다.
“여-엇-!!”
검까지 놓친 채 속절없이 뒤로 튕겨져 나가는 피노의 몸을 향해 일도양단의 기세로 하백의 발검술이 펼쳐졌다. 머리끝에서 회음부까지 직선으로 내리 그어진 하백의 검격에 피노의 몸이 깨끗하게 두 동강 나버렸다.
“…!!”
제법 뛰어난 전사가 둘이나 하백의 검 아래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당하자 마도의 군사들은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통솔하던 지휘관 역시 크으음…하고 침음성을 내며 이를 악물었다. 하백은 검을 수습한 후 아군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치켜들었다.
우아아아-!! 수천 병사들의 사기충천한 함성이 협곡 내를 쩌렁 쩌렁 울렸다. 성벽을 사이에 둔 두 군대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었다. 예스프리는 하백을 향해 화답해 보인 후 망토를 벗었다.
“다음번엔…. 내가 나가야겠군….”
“예…? 아직 저 친구가 저기 있잖습니까?”
의아해 하는 제라르의 말에 예스프리는 대답 대신 명령을 내렸다.
“기색을 보니 대장이 나올 모양이네.”
“대대장님…!”
“내가 대장의 목을 베면, 2중대장은 즉시 돌격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오라. 4중대장.”
“예, 대대장님!”
“백병전을 준비하라. 돌격대가 진영을 흩트리는 직후 무차별 공격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치 당연히 이길 것이라는 듯한 예스프리의 말에 아펠은 의심하지 않고 명령을 받들었다. 어차피 기세 싸움이라면 확실하게 꺾어 줘야지….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리는 예스프리의 몸에서 투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성 밖에선 적의 수장이 직접 나서고 있었다.
“하백이라고 했지…? 아직 어려 보이는데도 솜씨가 대단하구나.”
“…. 네놈들에게서 칭찬 받자고 수련한 것이 아니다.”
“…. 전장에서의 예의조차 모르는 놈이 칼 좀 쓴답시고….”
흐릿하게 웃는 그는 하백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내면서도 태연하게 서 있었다. 창을 한 차례 휘둘러 옆에 낀 그는 성문을 열고 나오는 예스프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너희 대장이 날 상대할 모양이군…. 돌아보는 하백의 얼굴에 불쾌감이 내비쳐 졌다. 예스프리는 산책이라도 하듯 천천히 걸어왔다.
“대대장…. 괜찮을까? 저 놈…. 베슬리의 가신 아니야?”
“이기기만 한다면…. 그런데 베슬리의 가신들은 모두 마검사라던데….”
“그대가 이 곳 카몬 협곡의 신임 지휘관인 모양이군.”
“예스프리 그라토레 트레제게라고 한다. 그대는…?”
“흠…! 역시….”
피식 웃은 적수의 손이 힘차게 제 가슴을 두드렸다.
“앙헬이다! 앙헬 데르트…! 론도 산맥의 주인이신 베슬리 얀 반 마르크 로이나르 백작님의 가신이다…!”
“….”
서로 이름을 밝히는 가운데 하백은 조금 짜증스러웠다. 자신의 차례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자신은 없는 듯 이야기를 나누는 이 분위기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의를 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예스프리가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 싸웠다, 하백…. 이 자는 내가 상대하마.”
“대대장님…!”
“넌 공주님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왔다. 돌아갈 자가 여기서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는 없지.”
“제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군령이다.”
“…!!”
=================================================================================================
대니테일러님 지적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2권 후반부부터 약간씩 늘어지는 감이 있어서
저도 느끼고 있던 점이었습니다. 이번 회가 2권에서 3권으로 넘어가는 부분입니다.
3권의 전반부를 좀 손을 봐야 하는데, 지금은 마감 때문에 정신이 없네요..;;
(전문직인지라...;;)

다음 편은 1월 2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와주시는 분들이 얼마가 되었건
제가 들쭉 날쭉 올리는 것 때문에 헛걸음하시는 분들도 이따금씩은 계실 듯해서요. 그리고
저도 이렇게 정해놓는 편이 잊지 않고 업로드하는 데 좋을 듯싶습니다.

미리 송년인사 드립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어느새 찾아주시는 분들도 생기고.
감사드립니다. 올해 마무리 잘들 하시고,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요.
그럼 1월 2일에 33부와 함께 새해인사 올리겠습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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