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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8 414회 0건
플로랑이 돌아간 후 레이네는 내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라도 대신하려는 듯 남겨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으며 술과 연초를 마음껏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나다니엘은 과정이야 어쨌든 그녀가 즐거워하고, 또한 신임 병부대신을 그녀가 틀어쥐게 되었으니 일단 함께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너도 앉아. 같이 한 잔 하자.”
“공주님…!”
“시종관씩이나 됐으면서…. 어서 앉지 못해…?”
눈을 흘기며 재촉하는 그 모습에선 아까의 그 오만함과 치밀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다니엘은 어색하게 병부대신이 앉았던 빈 의자에 앉았다. 레이네가 술병을 들자 그는 크게 당황했다.
“공주님, 어떻게 직접…!”
“잔소리 참 많네. 어서 들어.”
나다니엘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레이네는 대뜸 그의 잔에 술을 채우기 시작했고, 이미 잔을 들기에는 늦어버린 나다니엘은 두 손으로 잔을 감싼 채 어쩔 줄을 몰라 쩔쩔 맸다. 마시자. 잔을 들며 찡긋 웃는 모습이 무척 쾌활했다. 나다니엘은 그녀가 이렇게 기분 좋아 하는 것을 본 것이 대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을 비우고, 두어 순배가 더 도는 동안 그는 황송하고 어색해 하는 모습을 걷어버렸다.
“이제 좀 같이 마시는 것 같네.”
“… ….”
멋쩍게 웃은 나다니엘은 조심스럽게 음식을 담아 입에 넣었다. 귀족적이라고까지 하긴 어려웠지만 그의 몸가짐 하나하나는 항상 공손하고 조심스러웠다. 레이네는 그의 손을 보고 있다가 앞접시에 남아 있는 고깃점을 입에 넣고 잔을 기울였다.
“처음엔….”
“…?”
“되게 싫었는데…. 그런 거….”
“….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거. 싫었다고…. 에반더 그 놈하고 둘이 좀 적당히 섞였으면 좋았으련만….”
“…!”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에반더라는 말에 반응을 보인 나다니엘에게 레이네가 물었다. 그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네가 먼저 말해봐. 에반더가 미운지 어떤지…. 나다니엘은 잠시 레이네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고통…받지 않고 죽었기를 바랍니다.”
“…. 네 옆구리에 칼을 두 번이나 찔러 넣고 나한테 그런 짓을 했는데도…?”
“…. 죄송합니다, 공주님….”
고개를 숙이는 나다니엘을 향한 레이네의 눈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나다니엘은 숙연해 보일 정도로 얌전하게 있었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전혀 가라앉지도 긴장되지도 않았다. 레이네는 한참 그를 쳐다보다가 잔을 비웠다. 술기운이 올랐는지 목덜미가 조금 후끈거렸다. 레이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다니엘도 덩달아 얼른 몸을 일으켰다. 레이네는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
“….”
늘 그렇듯 바르게 서서 약간 고개를 숙인 나다니엘을 보던 레이네는 손을 들어 응접탁자를 가리켰다. 음식…. 좀 담아서 갖다 줄래? 앞접시를 들어 양고기며 구운 채소를 정성스럽게 담는 나다니엘의 모습을 레이네는 음미하듯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손끝과 팔과 목, 옆얼굴, 그리고 더 자세히 봤다. 가볍게 내리 뜬 눈과 코, 단정하게 다문 입술까지.
“….”
그가 다가오자 레이네는 몸을 일으켰다. 나다니엘은 한 손에 앞접시와 포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베개를 들어 레이네의 등을 받쳐주었다. 그가 몸을 숙이는 찰나에 레이네는 나다니엘의 목을 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기습적으로 당한 나다니엘은 허리를 숙인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듯 경직되어 버렸다. 레이네는 그를 녹이기라도 하듯 혀를 밀어 넣어 그의 입안을 핥으며 손으로 목덜미와 어깨 등을 더듬었다. 한 손에 포크와 음식이 얹혀져 있는 접시를 든 채 나다니엘은 우스운 꼴이 되었다. 엉거주춤 서서 경직된 몸은 좀처럼 풀어질 줄을 몰랐다. 레이네는 그에게 매달리듯 끌어안으며 더욱 열정적으로 엉겨 붙었다. 여자라 해도 체중이 실리자 나다니엘도 그제야 경직이 풀리며, 아니 풀렸다기보다는 무너지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 포크가 떨어져 나갔으나, 앞접시를 쥔 손은 거의 필사적으로 버틴 듯 음식이 아슬아슬하게 접시에 얹혀져 있었다.
“안아줘….”
그녀의 손이 나다니엘의 손에서 앞접시를 빼내어 침대 한쪽으로 밀었다. 나다니엘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앞의 레이네를 보고만 있었다.
“공주님….”
“말해 봐…. 내가 공주라서…, 그래서 망설여…?”
“… ….”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 하고 묻는 레이네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나다니엘에게 레이네는 상전이었다. 마음에 품는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고, 스스로에게 항상 다짐 두곤 하는 사람이었다. 대답을 주저하며 눈길을 피하려는 나다니엘의 얼굴을 레이네의 손이 부드럽게 감쌌다.
“피하지 말고…. 말해 봐, 망설이는 이유가 그것뿐이니…?”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레이네를 이 자리에서 안으면 자신의 처지에선 그녀를 모욕하는 꼴이 되었고, 요구를 거절하면 그녀의 입장에서 그녀를 모욕하는 꼴이 되었다. 어느 쪽이건 레이네를 모욕하는 모양새가 되긴 매한가지였다. 대답을 재촉하는 레이네의 눈빛에 나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쑥을 씹지 않았습니다.”
“뭐…?”
이번엔 레이네가 우뚝 멈춰버린 듯했다. 둘 사이에 흐르던 애틋하고 잔잔한 공기마저 멈춰버린 듯 분위기가 굳어버렸다. 아주 잠깐의 정적과, 곧이어 그 정적을 깨고 레이네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 말이 그렇게 우습나…. 나다니엘은 조금 머쓱해져선 어색하게 서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하하하하하… 아-, 정말…. 너…. 너 뭐야…하하하하하-!”
“… …”
어쨌든 레이네가 웃으니 나다니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쭙잖게 웃음 짓는 나다니엘을 보며 한참을 웃던 레이네는 어쨌든 분위기가 깨져 버렸다며 발딱 일어나 한쪽으로 밀어 놓은 앞접시를 들어 고깃점을 입에 넣었다. 열기가 사라진 고기를 씹는 것이 조금 불편해 보이자 나다니엘은 얼른 잔을 채워 그녀에게 건넸다. 에반더의 일이 계속 생각났다.
“저…, 공주님.”
“…, 왜…?”
그는 조심스럽게 에반더의 일을 물어보았고, 레이네의 표정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래도 지금 묻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오물거리는 레이네의 입술이 술로 적셔지고, 입에 있던 고깃점을 삼킨 레이네가 짧게 답했다.
“이미 죽었어.”
거짓말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레이네는 나다니엘이 시종관 업무를 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에반더를 가두어 놓았던 왕궁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공주님 오셨습니까.”
“열어라.”
“예.”
고문관이 두꺼운 목재와 쇠로 겹겹이 짠 견고한 옥문을 열자 횃불이 두 개 밝혀진 옥서 안에서 피비린내와 살 썩는 냄새가 확 풍겨 왔다. 모든 지시를 직접 했으면서도 그 냄새는 역겨웠던지 레이네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말씀하신 대로 아직 살려놓았습니다.”
“… ….”
에반더의 몰골은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천장에서부터 이어진 밧줄 끝에 매달린 꼬챙이들은 두 눈과 혀를 꿰고 있었고, 양 팔과 다리에도 꼬챙이가 서너 개씩은 꿰어진 채 피부를 잡아 늘이며 매달려 있었다.
“저대로 꼬챙이에 매달아 두면 죽을 것 같아서…, 밧줄로 묶어놓고 남겨뒀습지요. 꼬챙이는 뺄 수가 없었습니다.”
살펴보니 꼬챙이는 이미 피부 조직과 유착이 된 듯했다. 어떻게 의식을 살려뒀을까. 고문관은 고문관이었다. 에반더는 살아 숨쉬는 정도를 넘어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몸은 군데군데 가죽이 벗겨졌다가 아물고 있는 듯한 상처로 성한 곳이 없었고, 가슴팍에는 근육 조직이 드러난 곳에 피가 말라 붙어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찬찬히 에반더의 모습을 뜯어보던 레이네의 입이 열렸다.
“이제 그만…. 죽게 해 줘.”

임지에 도착한 이후 예스프리는 하루도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무너진 성곽 보수에 병사들의 병장기를 교체하는 일도 일이었지만, 정말로 마도들은 안식일을 지키기라도 하듯 몰려왔다. 한 차례의 전투를 치르고 난 후에는 더 정신이 없었다. 전사자를 애도하는 행사는 사치였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발 빠른 병사로 하여금 의원과 약재를 구해오게끔 하고, 또 언제 올 지 모를 적에 대비해 경계 태세 정비와 전략수립에 고심해야 했다.
통제실에 앉아 지도를 펴놓은 채 지난 전투를 곱씹고 있던 예스프리는 새삼 부친이 존경스러워 졌다. 한 번 부딪쳐 본 마도들은 거칠고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뭐가 팔이고 뭐가 다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머리통이 달려 있는 것을 보지 않았으면, 어느 쪽이 팔 쪽인지 알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마치 성난 들짐승처럼 달려드는 기세가 살기등등하여 카몬 협곡에 오기 전까지 자신이 봤던 병사들은 주눅부터 들었을 거란 생각에 예스프리는 식은땀이 다 흘렀다. 그런 마도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국경선을 확보한 부친의 업적이 왜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대대장님은 놈들을 처음 대하셨습니까?”
“음…. 론지니아 전투는 말로만 들었지만…. 저 정도로 사나울 줄은 몰랐네.”
“하하하…! 그나마 이번엔 적게 온 겁니다. 한 3천쯤 됐었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묻는 아펠에게 제라르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3천이면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공성을 하는 상대로 대등한 병력으로만 몰려왔으니, 아예 함락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무모하게 성벽을 기어오르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도주한 마도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네들 보기가 민망하군…. 첫 전투에서부터 그런 꼴을 보였으니….”
“뭐, 됐습니다. 선전포고를 하고 오는 놈들도 아니고, 어차피 국지전인데 당황하실 수도 있는 거지요. 다음부턴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펠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시원시원하게 말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예스프리의 자존심을 깎아내렸다. 지난 전투에서 예스프리는 제대로 지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침입이기도 했고, 또한 마도들의 드센 모습에 위축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민망해 하는 예스프리를 1중대장 레미 벨보가 달랬다.
“기운 내십시오, 대대장님.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번 전투에선 특히 놈들의 기세가 전에 없이 대단하기도 했었고요.”
“으음….”
예스프리가 그렇게 자책하고 있을 그 시각, 하백은 레이네의 명령을 수행하여 1백만 팡그의 군자금을 갖고 카몬 협곡 독립대대의 요새에 도착했다. 성문 경비를 맡고 있던 경비병이 그에게 신분 확인을 요구하자, 하백은 근위대의 군령패를 보였다. 왕궁 근위대 근위무사 하백입니다. 대대장님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병사는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린 뒤 성문을 열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저 수레는 뭐고…?”
“그…, 글쎄. 근위대에서까지 오고…, 대대장이 중앙에 있는 사람으로 바뀌니까 참 별 놈들이 다 오네.”
“우리야 나쁠 거 있나 어디, 먹는 것도 더 나아졌고, 옷도 이런 거 받았으니 됐지, 뭘. 안 그래?”
“쳇…! 전쟁 하면 이쪽으로 다 몰려올 텐데, 그것 때문에 꾸며주는 거 아니겠어? 뻔하지…. 정벌 같은 거 안 할 생각이었으면 아마 우린 여기서 얼어 죽거나 맞아죽었을 걸?”
“제기….”
보통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청각이 예민한 하백은 그들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벌이 아니었다면 이런 군자금을 보낼 이유도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떠나오기 전 잠시 찾아갔던 자리에서 리토르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앞으로 그대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을 만큼 추악한 모습들을 많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들도 많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스스로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오. 당분간은 무조건 물러서야 합니다. 물러서서 관망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욕망이 어떤 식으로 오고 가는지, 그것들을 잘 살피고 배우며 익혀야 합니다.
“대대장님.”
“…. 음.”
예스프리는 지도를 든 채 3중대장 제롬과 함께 성곽에 나가 있던 중 하백의 방문을 맞았다. 병사 하나가 와서 그의 방문을 전했다.
“근위무사…? 근위무사가 여긴 왜….”
의아해하며 성벽을 내려가는 하백의 뒷모습을 보는 제롬이 피식 웃었고, 성곽을 돌며 병사들의 병장기를 살피던 아펠이 다가오며 혀를 끌끌 찼다. 정무대신의 위세가 대단하긴 하구먼…. 거액의 군자금에…, 오자마자 근위무사라니. 제롬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지평선에 걸린 몬듀아르크의 양 봉우리 쪽을 돌아보며 마도들의 침입에 대해 염려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요즘 들어서 놈들 기세가 더 사나워졌어. 일전엔 3천밖에 안 왔었지만 우리 쪽 피해가 심해.”
“그래봐야 3천이었잖은가…?”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5천, 아니 1만이 왔을 때도 이번처럼 전사자나 부상자가 많은 경우는 별로 없었어. 놈들이 점점 드세지고 있다는 거야.”
“사기가 올라갈 만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모르지 뭔가…. 우리가 정벌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놈들도 눈치채고 있거나…. 아니면….”
“…아니면…?”
“…정말로 예언서의 종말이 현실이 되고 있거나….”
“허, 이 사람…. 군인이 돼서 그런 말장난에 겁이나 집어 먹고 있다니….”
겁은 누가 겁을 먹었다고 그래? 그럼 뭔가? 자넨 그 종말에 대한 예언을 믿기라도 한다는 거야? 내가 믿고 안 믿고가 문제가 아니라, 병사들 사기에 문제가 되니까 하는 소리지. 자네 그 한숨 소리 때문에 더 사기가 떨어지겠네. 병사들 앞에서 이러지 말라구….
-카몬 협곡의 임지가 몹시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신임 병부대신으로부터 들었습니다. 험지에서 이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소홀했던 것을 왕실의 사람 중 하나로서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실권은 없으나 나는 이 나라의 왕녀로서, 그래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나는 왕실과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지를 마다하지 않는 예스프리 경의 고결한 충정을 믿고 또한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런 내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작은 성의입니다. 비록 크진 않지만, 예스프리 경께서 미키네오스의 최전방을 지키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정무대신이신 그대의 부친 라크라오스 그라토레 트레제게 후작의 아드님이시라면, 무도한 무리들이 기승을 부리는 이 나라의 국경을 튼실히 지켜 줄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왕실 사람으로서 직접 그대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대의 이 노고들을 반드시 잊지 않을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다만 언제나 몸을 돌보시고, 스스로를 귀히 여기며 병사들과 함께 저와 왕실, 그리고 미키네오스의 모든 시민들을 지켜주시기를, 어렸을 적의 친구로서, 또한 이 나라의 왕녀로서 당부합니다.
레이네의 서한을 읽은 예스프리는 황송하기도 하고 조금은 어리둥절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잠시 어색해 하던 그는 곧 진정하며 하백에게 일단 자리를 권했다.
“좀 앉지. 어쨌든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 헌데…. 못 보던 얼굴이군. 이 곳 사람도 아닌 것 같고…?”
“…. 얼마 전 아슈람에서 귀환자들과 함께 왔다가 국왕 폐하의 은덕으로 새롭게 근위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아, 그래…, 그렇군…. 나도 원래는 근위대에 있었네. 소대장직을 지냈었지. 반갑구먼.”
“….”
함께 자리한 3중대장 제롬과 5중대장 엔드릭손은 그리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독립대대의 예산이 풍족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정벌 준비가 현실화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예산들이 병사들을 위해 쓰일 공산은 별로 없어 보였다. 눈짓으로 서로에게 그런 것을 확인한 둘은 이내 공주의 의중을 짚어보기 시작했다.
“대대장님, 1백만 팡그면 우리 대대의 1년 예산보다도 많은 금액입니다. 정벌이 사실처럼 굳어지고 있다면 이 군자금이 우리 대대에 쏟아붓는 예산이겠습니까, 아니면 정벌 준비를 하라며 비축분으로 보내 온 것이겠습니까?”
“…이보게.”
“그렇게 정색하실 일이 아닙니다. 병사들도 그런 말을 하는 마당에 중대장들이라고 그런 생각 한 번 안 하겠습니까? 대대 예산이 풍족해지는 거야 반길 일이지만, 꼭 물자가 풍부해진다고 해서 사기가 올라가는 건 아닙니다. 특히 여기처럼 전투가 잦은 변방에선 더 그렇습니다.”
“… ….”
예스프리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그런 이야기를 싫어하는 부류 중의 하나였다. 말을 하자니 하기 싫고, 말을 안 하자니 중대장들과 척을 질 것 같았다. 그저 한숨만 지으며 예스프리가 침묵에 잠기는 것을 보며 하백도 덩달아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처음 면식을 익힌 예스프리에 대한 동질감이라기보다는, 그런 것들까지도 하나하나 생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자신에 대한 한탄 정도랄까.
‘이런 것까지 생각하며 살아야 하나…. 정말 이런 게 나한테 기회일까….’
통제실 내의 분위기가 저마다의 생각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갑작스러운 적습을 알렸다. 콰당 하고 문이 부서질 듯 열어젖힌 병사의 표정을 보고 엔드릭손과 제롬은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대대장님!! 적습입니다!! 기습입니다!!”
“뭐라?!”
‘…적습…? 마도들…?!’
누구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쯤 오고 있는가?! 봉화가 어디서 올랐어?!”
“지금 협곡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봉화는 오르지 않았습니다!!”
“뭐야?! 정찰대의 눈을 피해서 왔단 말이야?!!”
“병력은, 적수는 얼마나 되는가?!!”
“여태까지 보인 것으로는 5천 정도입니다! 하지만 끝도 없이 협곡 안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럴 수가…!!”
의구심이 가득한 제롬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예스프리는 급히 검을 차며 중대장들과 밖으로 나서다 하백에게 통제실에 남으라 명령했다. 하백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도울 뜻을 전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대대장님…!!”
“자네는 이 곳 사람이 아닐세. 괜히 험한 일 자처하지 말게.”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하백에게 엔드릭손이 냉담한 말을 남기고 먼저 통제실을 나갔다. 예스프리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그에게 남을 것을 다시 한 번 말했으나, 하백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거듭 자신의 뜻을 밝혔다.
“돕게 해 주십시오, 대대장님! 한 명이라도 더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대대장님…!!”
밖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던 제롬이 이 모습을 보더니 예스프리에게 받아주라 청했다.
“그 말도 맞습니다. 대대장님. 전투 경험이 있건 없건 우린 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이니까요.”
“이보게…!”
“그래도 왕궁의 근위무산데, 발목은 잡겠습니까. 같이 가지…!”
“고맙습니다!”
하백은 제롬을 향해 꾸벅 인사하곤 예스프리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검을 쥐며 밖으로 나섰다. 예스프리는 뭐가 생각났는지 그런 하백의 뒷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그들을 따라 나섰다.
마도의 무리들은 어느 새 협곡 안을 새카맣게 채우고 있었다. 눈어림으로 보아도 1만은 넘을 듯한 적수였다. 성루에서 전열을 가다듬으며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던 레미 벨보는 눈살을 찌푸린 채 이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잦다, 잦다 해도 이번엔 좀 의외로세…. 제라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리며 옆에 와 섰다. 함께 온 아펠은 이미 검을 뽑아 든 모습이었다. 흥…! 어디 와 보라지. 허약해 빠진 놈들…. 기세 좋게 덤비다가 죽어나간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오셨습니까.”
“음…. 아, 여긴 왕궁에서 온 근위무사일세.”
“하백이라 합니다.”
세 중대장은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몰려오는 마도의 군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꾸역꾸역 협곡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모습이 마치 좁은 수로로 밀려드는 물길처럼 보였다. 병사들은 근위무사의 차림새를 하고 있는 하백이 낯설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틈들은 없었다. 궁병, 마병, 창병 할 것 없이 모두 활을 들어 거기에 살을 매기고 있었다. 명령이 내려지는 순간 무차별로 쏘아 댈 준비를 단단히 한 채 몰려드는 마도들에 집중했다. 마도들의 모양새를 보고 있던 아펠이 문득 씨익 웃으며 검을 수습했다.
“기싸움을 걸어오는데요, 저 놈들이….”
“…?”
“일기토를 치르러 온단 말인가?”
“그런 거 같어. 저길 보라구.”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얼굴로 가리키는 아펠의 손을 따라가니, 이리도, 말도 아닌 네 발 짐승을 탄 마도 하나가 검을 들어 전체 군사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하백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나…?”
“…. 론지니아 전투에서 저도 마도들과 싸워봤지만…. 이들은 뭔가 다릅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귀환자들과 함께 왔었다고 했지?”
“예.”
“재주가 대단한 모양입니다, 대대장님. 귀환자들과 왔는데 근위무사 자리에 앉았다면 솜씨가 제법 있다는 건데….”
눈앞에 마도의 대군을 두고도 마치 휴전이라도 한 듯 태연하게 말을 늘어놓는 아펠을 보면서 하백은 이 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거기에 딱히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자신이 봤던 마도들과 이 순간 눈앞에 있는 마도의 군사들의 다른 점에 대해 계속 말했다.
“적어도 제가 봤던 그들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무작정 덤벼들었었습니다. 저들처럼 통제된 군사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봐, 애송이.”
한율의 ‘애송이’와 달리 제라르의 말은 그의 신경을 긁었다. 우린 여기서 수백 번이나 저놈들하고 맞서 싸워왔어. 자네가 부딪쳤던 놈들이 어떤 놈들이건, 여기 이놈들은 우리가 잘 알아. 엔드릭손이 그 말을 받았다.
“지난번 전투는 이 근위무사의 말처럼 놈들이 무작정 덤볐었지만, 대체로 보면 이놈들은 군략을 주무를 줄 안다고 봐야 합니다. 자폭하듯 덤빈 뒤에 지금처럼 기세 싸움을 벌이거나, 아니면 기세 싸움을 벌여놓고는 기습전을 펼치기도 하고 그러지요. 다만 정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면 다르달까요.”
“정찰을 하지 않는다…?”
예스프리가 이상하다는 듯 엔드릭손을 쳐다보며 물었다.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전열이 정비되는 마도의 군사를 보고 있던 레미가 그 부분을 지적하고 나섰다.
“병력의 우세만 믿는다기보단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현재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며 상황을 타진하는 동안 전열을 정비한 마도의 군사들 사이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대장인 듯한 자가 타고 있던 괴상한 들짐승을 타고서. 아펠은 역시…! 하는 얼굴로 뒤쪽을 보며 고갯짓을 했다.
“일기토를 하는 건가…?”
“예. 한 댓 놈만 죽여주면 알아서들 물러 갈 겁니다.”
“그 동안은 어땠는가…?”
“뭐….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그랬지요. 하하하하…!! 항상 볕만 들겠습니까, 전투에서…!”
부하들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아펠 앞에서 하백은 괜히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한율 정도나 될까. 키도 그렇고 덩치도 그렇고, 텁수룩한 수염과 삭풍에 군데군데 갈라져 터진 흔적이 보이는 뺨이 야전의 냄새를 짙게 풍겼다. 성문 밖에는 어느새 아펠의 명령을 받은 병사 하나가 두꺼운 방패와 창을 들고 적과 대치중이었다. 병사들이 숨을 죽인 채 바라보고, 중대장들도 이야기를 멈추며 대결에 집중했다.
“마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하백에게 예스프리가 설명했다.
“마도의 무리들을 규합한 건 원래 이 근방의 귀족이었네. 저들 중에는 그 가신들도 많아.”
“우두머리가…마도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 시작하는 모양이군.”
예스프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하백에게 신경 쓰지 않고 성 밖을 주시했다. 둔해 보이는 방패와 창을 든 병사, 그리고 들짐승 위에 올라탄 병사 하나가 서로 틈을 엿보고 있었다.
“병사 하나로 되겠는가?”
“아펠 중대장은 일기토를 위해 따로 병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합니다.”
엔드릭손의 말이 끝남 무렵, 마도의 병사가 먼저 움직였다. 늑대처럼 커다란 입을 가진 짐승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아펠의 병사는 재빨리 몸을 낮추며 방패를 눕혀 짐승의 입을 향해 후려쳐 갔다. 콰직 소리와 함께 두꺼운 방패 속으로 짐승의 이빨이 깊이 박혔고, 병사는 길게 잡은 창으로 짐승의 목을 올려 찔렀다.
“오…!”
==========================================================================================
어느새 30부를 넘었군요.
그리고 지난회 이후 어느새 열흘이..;;
최근 들어서 소라넷 접속이 안될 때가 종종 있네요. 그래도 꾸준히 업뎃을 해 주시는
소라넷 운영자님께 감사를... 그리고 뭣보다 꾸준히 찾아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젤 추운 날이라고 하던데.. 생각보다 춥진 않더군요.

혹시 찾아주시는 분들 중 성남시민이 계신가욤.
성남시향이 지난 6월 이후 상당히 괜찮아졌답니다. 송년공연 겸 12월 정기공연
프로그램이 무척 기대되던데, 예매하여 한 번 가보심도 좋을 듯.
2부보단 1부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시향 공연이라서 값도 싸고요(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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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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