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군의 수장 자와카, 황제폐하의 등극을 하례드리나이다.”
그녀의 눈길과 함께 손이 자와카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노고가 많았네, 자와카 수장.”
“망극하옵니다, 폐하.”
“트란드라 1천은 어디에 있는가?”
“이 군영에 각기 결계를 치고 대기 중이옵니다.”
“그렇군….”
그녀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친위군을 살피기라도 하듯 한 차례 군영을 둘러보았다. 비록 잠시 저들의 눈을 속일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 중얼거리던 리토르나가 다시 그에게.
“이곳까지 서둘러 오느라 많이 지쳤을 테지만…, 염치없게도 짐은 다시 그대에게 명을 해야겠구나.”
“받아 듣기 민망하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일단…, 부족한 짐의 황위 승계의식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가다르파의 법사 스무 명을 공신의 반열에 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돌아가서 삼백만 황군의 정신무장을 새로이 한다. 트란드라는 지금부터 발길이 닿는 모든 대륙 곳곳에 무리지어 있는 마도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다. 또한 여기 있는 1천의 트란드라는 보르틴 각국의 사정을 상세하게 살필 것이다. 미키네오스는 물론이고 바이마샤르, 이스마르와 같은 국가들뿐만 아니라 험멜, 칼링거와 같은 독립영지까지도 모조리 살펴야 한다. 그리고 따로 병력을 나누어 실종된 하백의 동족, 한율을 찾아 보고하라.”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리토르나는 거침없이 쏟아내었다.
“분부대로 시행하겠나이다.”
“… ….”
머리를 조아리며 명령을 받은 자와카는 이어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리토르나에게 바쳤다. …뭔가, 이것은…? 법술전대 가다르파의 수장 칼가마나가 폐하께 올리는 첩지이옵니다. 첩지…? 리토르나는 그를 받아 품에 갈무리하였다.
“그럼…. 본국으로 돌아가 다음 명을 기다리도록 하라.”
“예, 폐하. 부디 옥체 보중하시오소서.”
자와카의 하례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리타는 다른 말 없이 군영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리토르나가 군영을 나설 때까지 자와카는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일어서선 명령을 내렸다.
‘황실 특전대에 명한다. 백인대 여덟은 즉시 흩어져 보르틴 각국에 대한 첩보를 최대한 수집하여 폐하께 보고하라. 백인대 둘은 실종된 환국의 생존자, 한율을 찾아 감시할 것이며 그와의 충돌은 최대한 피하도록 하라.’
‘새 황제폐하께 신 칼가마나 아뢰나이다.
마땅히 신이 뫼셔야 할 의전을 뫼시지 못하는 불민함을 굽어 살피소서. 신은 황제폐하의 곁을 지켜온 법술전대 가다르파 내에서 황실에 대한 불경을 저지른 자를 알아냈나이다. 즉시 그 죄를 묻고 속히 폐하를 뫼시러 가려 했사오나 붕어하신 선제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서 정황을 살피고, 그 뿌리를 뽑고자 새 황제폐하의 의전을 뫼시지 못하였나이다. 돌아오시는 날, 신의 죄를 청할 것이니 부디 굽어 살피소서.
선제께오선 마지막 힘을 다하여 미키네오스의 사신을 응대하셨나이다. 그리고는 기력이 다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아타 아디라자를 봉하게 하시고 홀로 떠나셨나이다. 신의 서신을 보실 때에는 아마도 미키네오스의 사신이 답을 받아 황도를 떠났으리라 사료되옵니다.
선제의 유지를 잘 헤아리시어 부디 머나먼 땅에서 잉그라드의 영광과 황제폐하의 위엄을 세우시길 간절히 바라나이다.‘
간결하군…. 서신을 읽은 리토르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선제께서…마지막으로 반격을 한 차례 하신 건가….
“들으라.”
“하명하소서, 폐하.”
“선황제 가이옷 라마 아요디아의 잉그라드에 대한 고결한 헌신을 드높일 것이다. 법도에 따라 3년간 시행해야 마땅할 것이나, 지금은 적지에 있으므로 향후 30일간 선제를 애도하며 그를 추모하도록 하라.”
“분부 받자와 시행하겠나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1천 정도의 병력이라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오늘 오전 1천 정도의 병력이 왕궁 남쪽 구릉지에 나타났다가 방금 사라졌습니다.”
“… ….”
레이네는 비토의 말에 나다니엘과 마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왕궁 남쪽이면 뭐야, 바이마샤르야, 잉그라드야…? 아니지, 바이마샤르일 리가 없지. 그럼 잉그라드란 소린데….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해보다가 다시 물었다.
“잉그라드에 그러니까 천 명 정도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 소리야?”
“이동 속도나 이동 방식, 그리고 느껴진 기운으로 미루어 판단컨대 잉그라드의 병력으로 생각됩니다.”
“… …. 느껴지다니….”
“저는 가능합니다.”
“지금 자랑질 할 때가 아니야. 확실한 거야?”
“확실합니다. 그리고 자랑하는 것 아닙니다.”
나다니엘은 비토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자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네도 따라서 웃다가 이내 담뱃대를 물며 염두를 굴렸다.
“너라면 가능하겠지…. 그래…. 그런데 1천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니….”
“황녀님께 한 번 여쭤보는 건 어떠십니까?”
“… …. 아니야. 아무 일도 없는 걸 보면 뭔가 비밀스러운 일일 거야. 천 명이나 되는 병력이 오갔는데 이렇게 조용할 리가 있었겠어?”
“그것도 그렇군요.”
“나중에 기회를 봐서 넌지시 떠봐야지. 지금은 어쨌든 아니야.”
한편으로 바루나와 정무대신 라크라오스는 근위장의 보고에 적잖이 놀란 기색들이었다. 그들 자신도 마검사였으니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게다가 근위장 정도 되는 기사가 사색이 되어 왔으니.
“뭔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잘못 생각하다니, 무얼…?”
“잉그라드의 힘 말입니다. 그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잉그라드 황군일 테고, 근위장을 이렇게 만들 정도라면…, 게다가 황군의 규모는 삼백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으음… ….”
바루나는 깍지를 끼고 턱을 괴며 낮게 신음했다.
이튿날 치러진 열병식은 바루나의 근위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왕궁 광장을 완전히 개방한 이 날, 보르틴 각 나라, 각 영지로부터 모인 군대의 제식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시민들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광장의 가장자리는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그 주위에 있는 건물 사이사이, 심지어는 지붕에 이르기까지 발 디디고 엉덩이 붙일 수 있는 자리란 자리에는 모여든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긴 겨울 탓에 아직도 바람은 혹독하게 차가웠으나, 서 있기조차 비좁은 터라 추울 새가 없었다.
“… ….”
바루나는 왕궁을 나서다가 이 모습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우리 팡그릿샤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던가…?”
“….”
정무대신도 놀란 듯 개미떼처럼 모여든 시민들을 둘러볼 뿐 말이 없었다. 핫산이 허허 웃으며 바이마샤르의 연말 대연회 이야기를 꺼냈다.
“바이마샤르의 전통인 연말 대연회에서도 이 정도 사람이 모이는 걸 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역시 대륙의 강국다운 면모입니다, 국왕폐하.”
“하하하…, 고맙습니다, 바슈미르 의원.”
그러나 딱 한 명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있었는데, 펠리그로니에프 대영주가 바로 그러했다. 그는 광장 주변 곳곳에 빽빽하게 들어찬 시민들을 못마땅한 얼굴로 쓸어보며 남몰래 중얼거렸다.
“통제되지 않는 시민들은 재앙과도 같은 것이지….”
그들의 앞에는 열병식을 통제할 각 군의 지휘관들이 늘어서서 그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행렬을 이끌 근위장부터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울리마노프 기사단장에 이르는 그들은 국왕 일행을 향해 일렬횡대로 서 있었다.
“전원 부동…!!”
“…?”
지휘관들을 보고 있던 펠리그로니에프가 뭔가 발견한 듯하더니 얼른 손을 들어 근위장의 이어지는 구령을 막았다. 다른 일행들은 왜 그러나 싶어 펠리그로니에프를 일제히 쳐다보았다. 얼른 들었던 것과 달리 손을 천천히 내리는 그의 시선은 오른쪽에서 네 번째에 서 있는 나자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거기…, 서 있는 처자는 어느 군 소속인가…?”
“…!!”
핫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동시에 국왕과 정무대신은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차렸다. 네오시아의 부통령, 그리고 이스마르의 국무관, 발덴, 칼링거, 므스티슬라브, 험멜, 베린트, 폴타바르의 영주들 모두는 펠리그로니에프의 행동을 지지하기라도 하듯 반기는 얼굴들이었다. 레이네마저도 약간 불쾌한 안색을 하는 가운데 리토르나만이 아무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바이마샤르 보위부 의회경비대 2총사 나자르 바슈미르입니다…!”
크지는 않았으나 절도 있는 음성이었다. 속으로는 이 자리에서 대체 무슨 짓인가 싶어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일단 그녀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영주의 중얼거림에 나자르의 표정은 크게 굳었다.
“이름이야 어쨌건 간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린 대영주는 핫산에게 정색하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보시오, 바슈미르 의원.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 울리프 공작.”
“국왕 폐하, 잠시만…. 정벌 결의를 하기 위해 모이는 중요한 외교적 자리올시다. 어째서 그런 사행길에 여자를 데리고 오신 겁니까? 위안부라면 모를까….”
“뭐요…?”
‘위안부’라는 말에 핫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자르의 주먹이 꾸욱 쥐어졌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국왕 바루나는 당황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였고, 대영주의 말이 다소 심해지자 다른 몇몇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펠리그로니에프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갔다.
“국가 간의 중대한 논의를 하는 석상에 한두 번 들어서는 거야 야만의 습속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우리끼리는 적어도 법도와 질서를 지켜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왕 폐하…?”
레이네는 리토르나의 눈치를 살피며 저 인간이 미쳤구나 싶었다. 나자르는 입술까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분기가 차오르기 시작하자 그녀의 동공에 서린 붉은빛이 짙어졌다. 그녀는 눈을 감아 자신의 눈빛을 감추었다.
“바이마샤르에서의 여자에 대한 필요 이상의 존중은 이 사람도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 모두는 성스러운 신의 이름으로 정벌을 결의하였습니다. 교리에 따르면, 여자는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남자들을 위한 부속품이다 이 말이올시다. 귀국 내에서야 어떨는지 몰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교리를 따라주셔야 하지 않겠소?”
듣다 못한 바루나가 이를 말리려는데, 핫산이 선수를 쳤다.
“대영주의 지적이 정당하다는 점에 대해 이 사람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신의 적자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번 정벌의 결의를 다지는 것은 신의 자식들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
오…. 레이네와 바루나는 거의 동시에 그의 언변과 재치에 감탄했다. 다른 이들도 같은 반응을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이 완고한 교리주의자가 또 어떻게 나올는지 몰라 눈치를 살폈다.
“신의 적자들은 남성이오, 어떻게 여자 따위가 남성들의 강건함과 기민함을 따를 수가 있단 말이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일은 없구려.”
“대영주, 자식이 하나이건 열이건 모두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마땅한 마음일 것입니다. 부족하기 그지없는 사람 또한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완전체이신 신께서는 어떠시겠습니까?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열이라고 해서 모두 왕위를 주거나 후계자로 정해지진 않소. 아우는 마땅히 형을 따라야 하고, 여성은 마땅히 남성을 따라야 하는 거요. 지금 의원께서는 나와 교리에 대해 말을 섞자시는 듯한데, 그렇다면 알려드리리다. 만물의 창조주이자 완전체이신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어미 따위는 없다 이 말이올시다.”
서로 지지 않고 열을 올리자 다른 이들은 시민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흥미진진하게 그들의 대결(?)을 감상하는 눈치였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어 하는 이는 레이네였다. 반면에 바루나는 심각한 얼굴로 그들 둘의 설전을 어떻게 말려야 하나 고심 중인 듯 보였다.
“교리 이야기를 먼저 하신 분은 바로 대영주이십니다.”
“이보시오, 바슈미르 의원…!”
대영주가 흥분했다 싶자 얼른 바루나가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들 하시지요. 이런 자리에서 어울리는 논쟁은 아닌 듯싶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울리프 경의 교리에 대한 고견을 듣도록 하지요. 그러나 펠리그로니에프는 완강했다.
“나는 남성들의 고결하고 강건한 기치에 흠이 가는 것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국왕 폐하! 정식으로 요청하건대…!”
“부속품 따위의 몸에서 태어난 자신이 불결하고 부끄러워서 대체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울리프 대영주님…?”
변괴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 노골적인 언사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왕도 팡그릿샤에서 이 자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정적이 감돌았다. 사신단 뿐 아니라 각국의 모든 지휘관들이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것은 나자르의 옆에 서 있던 루카스였다.
“… …!!”
핫산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자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욕을 당한 것은 분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그렇게 도발을 하고 나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루카스는 온몸에서 마투기를 피워 올리며 천천히 눈을 들어 펠리그로니에프를 쏘아보았다.
“듣자듣자 하니까 참 가관이십니다. 독립영주 주제에 나라 체제를 갖춘 지 2백년도 넘은 바이마샤르를 함부로 말씀하시다니요.”
“사령님…!”
나자르가 눈치를 줬으나 루카스는 조금도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비릿하게 웃으며 자신을 쏘아보는 이 당돌한 젊은이를 향해 펠리그로니에프는 눈알을 부라렸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스릉. 울리마노프 기사단장의 검이 뽑혔고, 그 끝이 루카스를 향했다.
“감히 대영주를 모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울리마노프 기사단장 비카레프 라주모프 벨리카야가 그대에게 결투를 청한다!!”
루카스의 손도 느릿하게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소리가 나고, 그는 의도적으로 비카레프의 검을 툭 치며 쇳소리를 냈다.
“정확히 열 토막을 내주지….”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사신단 일행은 어쩔 줄을 몰라 서로 얼굴만 마주보며 허둥지둥 거렸고, 펠리그로니에프는 두 기사의 맞닿은 검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바루나 국왕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분을 삭히고 있었고, 핫산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 헛바람만 툭 툭 내뱉으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두 기사의 몸에서 마투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루나는 ‘에라 나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읊었다.
“하하하…, 때 아닌 오피퀴움이 열리는 것 같구려, 대영주….”
시민들은 왕궁 계단 위에서 벌어지는 이 이상한 상황을 보며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라 바빴다. 뭐야, 뭐? 저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아까부터 분위기가 좀 이상하던데? 싸우는 거야? 그런 거야? 설마 저렇게 모여서 싸우기야 하겠어? 이런 구경거리가 어디 흔하겠어? 오늘 저것들이 아주 제대로 보여줄 모양이야~. 자넨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게야?
이미 결투신청을 하고, 루카스가 그것을 받아들인 이상 나자르는 말릴 수가 없었다. 일이 어떻게 벌어졌건 둘은 이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신단들은 당황한 가운데서도 눈앞에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오? 어떻게 말린단 말이오? 이유야 어떻든 결투가 이미 성립이 되었는데…. 이런 자리에서 결투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핫산은 다른 나라의 사신들이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펠리그로니에프는 차라리 잘됐다는 듯 태연히 그들을 관망하고만 있었다.
“영주님, 저대로 둬도 괜찮은 겁니까…?”
“이렇게 된 바엔 칼로 해결하는 것도 좋은 방책이지….”
‘비카레프가 질 리 없다’고 믿는 것인지,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차 있었다. 곁눈질로 대영주의 기색을 살핀 바루나는 어금니를 꾸욱 깨물며 차오르는 분기를 삼켰다. 이자는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이름을 밝혀라!!”
“루카스…, 루카스 스클로도프…, 네놈의 몸뚱이를 잘라 줄 분의 존성대명이시다. 저승에 가서도 잊지 마시게나.”
루카스의 말이 떨어지고, 몸에서 보랏빛 마투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검으로 수렴되었고, 그가 검을 들자 다시 회오리치며 위로 솟구쳤다. 지휘관들과 사신단 일행은 뒷걸음질 치며 그들에게 공간을 내주었다. 비카레프의 몸에선 시커먼 투기가 꾸물럭 꾸물럭 올라와 검을 타고 흘렀다. 그는 루카스를 향해 검을 겨누며 약간 뒤로 몸을 뺐다.
우와아아아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광장의 병사들과 달리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싸움 구경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펠리그로니에프의 눈살이 다시금 찌푸려졌고, 바루나는 이를 부득 소리가 나도록 갈았다. 그의 손이 세이부를 향했다.
“검을 다오.”
루카스와 비카레프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정신이 팔린 다른 이들은 바루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무대신과 병무대신만이 등 뒤에 서 있다가 이를 발견했다. 플로랑이 나서서 말리려 들자 라크라오스가 그를 제지했다.
“하지만 정무대신…!”
“지금은 방도가 없네. 폐하를 믿어보게.”
대치하던 두 기사의 몸이 움직였다. 그들을 감싸며 흐르고 있던 마투기도 함께 폭발하듯 꼬리를 남기며 서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았던 둘의 검이 순식간이 좁혀졌다. 일격필살의 기세로 내리쳐 지는 루카스의 검과 그에 못지않은 기세를 담은 비카레프의 검이 횡으로 그어져 갔다.
두 자루의 검이 부딪치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한 자루의 다른 검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래에서부터 틈새를 비집고 비스듬히 들어간 그 검은 슬쩍 들리며 두 개의 마투기를 어긋나게끔 비틀었다.
피잉…, 하는 가볍고 경쾌한 소리가 났으나, 그 결과는 루카스와 비카레프의 대망신으로 이어졌다. 루카스는 엉뚱하게도 바닥을 내리치며 앞으로 나동그라졌고, 비카레프는 공중으로 뜨며 정신없이 팽그르르 돌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번에는 시민들과 광장에 도열해 있는 군사들조차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일순 조용해졌다. 비카레프가 거칠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만이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고 난리법석이었으나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는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이번엔 리토르나와 그녀를 호위하는 비사카조차 놀란 모양인지, 검을 수습하고 몸을 바로 하는 바루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한 명, 정무대신만이 동요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는 플로랑에게 라크라오스가 봤지? 하듯 속삭였다.
“내가 뭐라던가.”
“… …!!”
제대로 처박힌 루카스와 비카레프는 정신줄을 놓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바루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놀라서 굳어버린 펠리그로니에프를 향해 노기를 꾹꾹 눌러 담은 음성으로 꾸짖듯 말했다.
“대영주가 짐을 어찌 생각하든 그것은 자유이겠으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마음에만 담아두길 바라오. 더 이상 미키네오스의 왕궁에서 망동하지 마시오. 그것은 곧 짐과 미키네오스를 능멸하는 일이니까….”
경고였다. 펠리그로니에프는 그가 보여준 신기에 기가 질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고, 바루나는 세이부에게 검을 건네준 뒤 리토르나에게 사과했다.
“성스러운 뜻을 모으고자 모인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대국의 황녀께 부끄러운 꼴을 보였습니다. 대신 사과드립니다.”
“….”
리토르나는 가벼운 목례를 그에 응대했다.
펠리그로니에프는 굳은 표정으로 바루나의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리토르나에게로 시선을 옮겨갔다. 눈이 마주친 리토르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피식 웃어보였다.
“… …!!”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펠리그로네의 눈에 핏발이 섰다. 금세 얼굴까지 붉어진 그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떠는 데 반해, 리토르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능청을 떨었다.
“자, 혈기왕성한 기사분들께서 한 차례 의기들을 보여주셨으니, 이제 그만 열병식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루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하며 손뼉을 쳤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었으나, 어쨌든 일단 상황은 수습된 셈이었다. 바루나의 말대로 그들은 헛기침들을 하며 몸가짐을 다시금 정리했다. 루카스가 나자르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지만, 그런 행동은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핫산의 한숨만 깊어질 뿐.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시민들의 반응도 좋았고, 이후 열병식은 별다른 문제없이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바루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병사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연신 흡족해하는 모습이었고, 다른 사신들도 점차 어색함을 걷어내며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곤 하였다. 레이네는 천연덕스러운 부왕을 보면서 못 이기겠다는 듯 헛웃음을 짓곤 했다.
“신하들 주무르는 재미에 칼 한 번 안 잡아본 줄 알았더니….”
“국왕 폐하께서 그렇게 강한 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강하지….”
행사가 끝난 후에도 나다니엘은 바루나가 보여준 모습에 대해 놀라움이 가시질 않는 듯 숨을 진정시켰다. 비토를 향해 레이네는 부왕의 수준에 대한 그의 판단을 물었다.
“국왕 폐하의 무예는 완성된 무도에 가깝습니다.”
“완성된 무도…? 그 정도란 말이야?”
“힘으로 힘을 제압하는 것은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힘을 부드러움으로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예의 경지입니다.”
리토르나 역시 비사카로부터 비슷한 대답을 들었다. 그럼 그대와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라고 생각되는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소인 하나로 감당해내기엔 버거운 줄로 아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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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늦었습니다... 일을 누가 들이붓듯 하네요.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는지...;;;
담엔 늦지 않도록 합져. 죄송합니다..(_ _)
그녀의 눈길과 함께 손이 자와카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노고가 많았네, 자와카 수장.”
“망극하옵니다, 폐하.”
“트란드라 1천은 어디에 있는가?”
“이 군영에 각기 결계를 치고 대기 중이옵니다.”
“그렇군….”
그녀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친위군을 살피기라도 하듯 한 차례 군영을 둘러보았다. 비록 잠시 저들의 눈을 속일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 중얼거리던 리토르나가 다시 그에게.
“이곳까지 서둘러 오느라 많이 지쳤을 테지만…, 염치없게도 짐은 다시 그대에게 명을 해야겠구나.”
“받아 듣기 민망하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일단…, 부족한 짐의 황위 승계의식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가다르파의 법사 스무 명을 공신의 반열에 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돌아가서 삼백만 황군의 정신무장을 새로이 한다. 트란드라는 지금부터 발길이 닿는 모든 대륙 곳곳에 무리지어 있는 마도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다. 또한 여기 있는 1천의 트란드라는 보르틴 각국의 사정을 상세하게 살필 것이다. 미키네오스는 물론이고 바이마샤르, 이스마르와 같은 국가들뿐만 아니라 험멜, 칼링거와 같은 독립영지까지도 모조리 살펴야 한다. 그리고 따로 병력을 나누어 실종된 하백의 동족, 한율을 찾아 보고하라.”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리토르나는 거침없이 쏟아내었다.
“분부대로 시행하겠나이다.”
“… ….”
머리를 조아리며 명령을 받은 자와카는 이어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리토르나에게 바쳤다. …뭔가, 이것은…? 법술전대 가다르파의 수장 칼가마나가 폐하께 올리는 첩지이옵니다. 첩지…? 리토르나는 그를 받아 품에 갈무리하였다.
“그럼…. 본국으로 돌아가 다음 명을 기다리도록 하라.”
“예, 폐하. 부디 옥체 보중하시오소서.”
자와카의 하례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리타는 다른 말 없이 군영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리토르나가 군영을 나설 때까지 자와카는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일어서선 명령을 내렸다.
‘황실 특전대에 명한다. 백인대 여덟은 즉시 흩어져 보르틴 각국에 대한 첩보를 최대한 수집하여 폐하께 보고하라. 백인대 둘은 실종된 환국의 생존자, 한율을 찾아 감시할 것이며 그와의 충돌은 최대한 피하도록 하라.’
‘새 황제폐하께 신 칼가마나 아뢰나이다.
마땅히 신이 뫼셔야 할 의전을 뫼시지 못하는 불민함을 굽어 살피소서. 신은 황제폐하의 곁을 지켜온 법술전대 가다르파 내에서 황실에 대한 불경을 저지른 자를 알아냈나이다. 즉시 그 죄를 묻고 속히 폐하를 뫼시러 가려 했사오나 붕어하신 선제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서 정황을 살피고, 그 뿌리를 뽑고자 새 황제폐하의 의전을 뫼시지 못하였나이다. 돌아오시는 날, 신의 죄를 청할 것이니 부디 굽어 살피소서.
선제께오선 마지막 힘을 다하여 미키네오스의 사신을 응대하셨나이다. 그리고는 기력이 다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아타 아디라자를 봉하게 하시고 홀로 떠나셨나이다. 신의 서신을 보실 때에는 아마도 미키네오스의 사신이 답을 받아 황도를 떠났으리라 사료되옵니다.
선제의 유지를 잘 헤아리시어 부디 머나먼 땅에서 잉그라드의 영광과 황제폐하의 위엄을 세우시길 간절히 바라나이다.‘
간결하군…. 서신을 읽은 리토르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선제께서…마지막으로 반격을 한 차례 하신 건가….
“들으라.”
“하명하소서, 폐하.”
“선황제 가이옷 라마 아요디아의 잉그라드에 대한 고결한 헌신을 드높일 것이다. 법도에 따라 3년간 시행해야 마땅할 것이나, 지금은 적지에 있으므로 향후 30일간 선제를 애도하며 그를 추모하도록 하라.”
“분부 받자와 시행하겠나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1천 정도의 병력이라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오늘 오전 1천 정도의 병력이 왕궁 남쪽 구릉지에 나타났다가 방금 사라졌습니다.”
“… ….”
레이네는 비토의 말에 나다니엘과 마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왕궁 남쪽이면 뭐야, 바이마샤르야, 잉그라드야…? 아니지, 바이마샤르일 리가 없지. 그럼 잉그라드란 소린데….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해보다가 다시 물었다.
“잉그라드에 그러니까 천 명 정도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 소리야?”
“이동 속도나 이동 방식, 그리고 느껴진 기운으로 미루어 판단컨대 잉그라드의 병력으로 생각됩니다.”
“… …. 느껴지다니….”
“저는 가능합니다.”
“지금 자랑질 할 때가 아니야. 확실한 거야?”
“확실합니다. 그리고 자랑하는 것 아닙니다.”
나다니엘은 비토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자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네도 따라서 웃다가 이내 담뱃대를 물며 염두를 굴렸다.
“너라면 가능하겠지…. 그래…. 그런데 1천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니….”
“황녀님께 한 번 여쭤보는 건 어떠십니까?”
“… …. 아니야. 아무 일도 없는 걸 보면 뭔가 비밀스러운 일일 거야. 천 명이나 되는 병력이 오갔는데 이렇게 조용할 리가 있었겠어?”
“그것도 그렇군요.”
“나중에 기회를 봐서 넌지시 떠봐야지. 지금은 어쨌든 아니야.”
한편으로 바루나와 정무대신 라크라오스는 근위장의 보고에 적잖이 놀란 기색들이었다. 그들 자신도 마검사였으니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게다가 근위장 정도 되는 기사가 사색이 되어 왔으니.
“뭔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잘못 생각하다니, 무얼…?”
“잉그라드의 힘 말입니다. 그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잉그라드 황군일 테고, 근위장을 이렇게 만들 정도라면…, 게다가 황군의 규모는 삼백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으음… ….”
바루나는 깍지를 끼고 턱을 괴며 낮게 신음했다.
이튿날 치러진 열병식은 바루나의 근위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왕궁 광장을 완전히 개방한 이 날, 보르틴 각 나라, 각 영지로부터 모인 군대의 제식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시민들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광장의 가장자리는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그 주위에 있는 건물 사이사이, 심지어는 지붕에 이르기까지 발 디디고 엉덩이 붙일 수 있는 자리란 자리에는 모여든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긴 겨울 탓에 아직도 바람은 혹독하게 차가웠으나, 서 있기조차 비좁은 터라 추울 새가 없었다.
“… ….”
바루나는 왕궁을 나서다가 이 모습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우리 팡그릿샤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던가…?”
“….”
정무대신도 놀란 듯 개미떼처럼 모여든 시민들을 둘러볼 뿐 말이 없었다. 핫산이 허허 웃으며 바이마샤르의 연말 대연회 이야기를 꺼냈다.
“바이마샤르의 전통인 연말 대연회에서도 이 정도 사람이 모이는 걸 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역시 대륙의 강국다운 면모입니다, 국왕폐하.”
“하하하…, 고맙습니다, 바슈미르 의원.”
그러나 딱 한 명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있었는데, 펠리그로니에프 대영주가 바로 그러했다. 그는 광장 주변 곳곳에 빽빽하게 들어찬 시민들을 못마땅한 얼굴로 쓸어보며 남몰래 중얼거렸다.
“통제되지 않는 시민들은 재앙과도 같은 것이지….”
그들의 앞에는 열병식을 통제할 각 군의 지휘관들이 늘어서서 그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행렬을 이끌 근위장부터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울리마노프 기사단장에 이르는 그들은 국왕 일행을 향해 일렬횡대로 서 있었다.
“전원 부동…!!”
“…?”
지휘관들을 보고 있던 펠리그로니에프가 뭔가 발견한 듯하더니 얼른 손을 들어 근위장의 이어지는 구령을 막았다. 다른 일행들은 왜 그러나 싶어 펠리그로니에프를 일제히 쳐다보았다. 얼른 들었던 것과 달리 손을 천천히 내리는 그의 시선은 오른쪽에서 네 번째에 서 있는 나자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거기…, 서 있는 처자는 어느 군 소속인가…?”
“…!!”
핫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동시에 국왕과 정무대신은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차렸다. 네오시아의 부통령, 그리고 이스마르의 국무관, 발덴, 칼링거, 므스티슬라브, 험멜, 베린트, 폴타바르의 영주들 모두는 펠리그로니에프의 행동을 지지하기라도 하듯 반기는 얼굴들이었다. 레이네마저도 약간 불쾌한 안색을 하는 가운데 리토르나만이 아무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바이마샤르 보위부 의회경비대 2총사 나자르 바슈미르입니다…!”
크지는 않았으나 절도 있는 음성이었다. 속으로는 이 자리에서 대체 무슨 짓인가 싶어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일단 그녀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영주의 중얼거림에 나자르의 표정은 크게 굳었다.
“이름이야 어쨌건 간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린 대영주는 핫산에게 정색하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보시오, 바슈미르 의원.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 울리프 공작.”
“국왕 폐하, 잠시만…. 정벌 결의를 하기 위해 모이는 중요한 외교적 자리올시다. 어째서 그런 사행길에 여자를 데리고 오신 겁니까? 위안부라면 모를까….”
“뭐요…?”
‘위안부’라는 말에 핫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자르의 주먹이 꾸욱 쥐어졌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국왕 바루나는 당황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였고, 대영주의 말이 다소 심해지자 다른 몇몇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펠리그로니에프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갔다.
“국가 간의 중대한 논의를 하는 석상에 한두 번 들어서는 거야 야만의 습속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우리끼리는 적어도 법도와 질서를 지켜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왕 폐하…?”
레이네는 리토르나의 눈치를 살피며 저 인간이 미쳤구나 싶었다. 나자르는 입술까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분기가 차오르기 시작하자 그녀의 동공에 서린 붉은빛이 짙어졌다. 그녀는 눈을 감아 자신의 눈빛을 감추었다.
“바이마샤르에서의 여자에 대한 필요 이상의 존중은 이 사람도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 모두는 성스러운 신의 이름으로 정벌을 결의하였습니다. 교리에 따르면, 여자는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남자들을 위한 부속품이다 이 말이올시다. 귀국 내에서야 어떨는지 몰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교리를 따라주셔야 하지 않겠소?”
듣다 못한 바루나가 이를 말리려는데, 핫산이 선수를 쳤다.
“대영주의 지적이 정당하다는 점에 대해 이 사람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신의 적자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번 정벌의 결의를 다지는 것은 신의 자식들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
오…. 레이네와 바루나는 거의 동시에 그의 언변과 재치에 감탄했다. 다른 이들도 같은 반응을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이 완고한 교리주의자가 또 어떻게 나올는지 몰라 눈치를 살폈다.
“신의 적자들은 남성이오, 어떻게 여자 따위가 남성들의 강건함과 기민함을 따를 수가 있단 말이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일은 없구려.”
“대영주, 자식이 하나이건 열이건 모두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마땅한 마음일 것입니다. 부족하기 그지없는 사람 또한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완전체이신 신께서는 어떠시겠습니까?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열이라고 해서 모두 왕위를 주거나 후계자로 정해지진 않소. 아우는 마땅히 형을 따라야 하고, 여성은 마땅히 남성을 따라야 하는 거요. 지금 의원께서는 나와 교리에 대해 말을 섞자시는 듯한데, 그렇다면 알려드리리다. 만물의 창조주이자 완전체이신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어미 따위는 없다 이 말이올시다.”
서로 지지 않고 열을 올리자 다른 이들은 시민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흥미진진하게 그들의 대결(?)을 감상하는 눈치였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어 하는 이는 레이네였다. 반면에 바루나는 심각한 얼굴로 그들 둘의 설전을 어떻게 말려야 하나 고심 중인 듯 보였다.
“교리 이야기를 먼저 하신 분은 바로 대영주이십니다.”
“이보시오, 바슈미르 의원…!”
대영주가 흥분했다 싶자 얼른 바루나가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들 하시지요. 이런 자리에서 어울리는 논쟁은 아닌 듯싶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울리프 경의 교리에 대한 고견을 듣도록 하지요. 그러나 펠리그로니에프는 완강했다.
“나는 남성들의 고결하고 강건한 기치에 흠이 가는 것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국왕 폐하! 정식으로 요청하건대…!”
“부속품 따위의 몸에서 태어난 자신이 불결하고 부끄러워서 대체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울리프 대영주님…?”
변괴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 노골적인 언사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왕도 팡그릿샤에서 이 자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정적이 감돌았다. 사신단 뿐 아니라 각국의 모든 지휘관들이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것은 나자르의 옆에 서 있던 루카스였다.
“… …!!”
핫산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자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욕을 당한 것은 분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그렇게 도발을 하고 나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루카스는 온몸에서 마투기를 피워 올리며 천천히 눈을 들어 펠리그로니에프를 쏘아보았다.
“듣자듣자 하니까 참 가관이십니다. 독립영주 주제에 나라 체제를 갖춘 지 2백년도 넘은 바이마샤르를 함부로 말씀하시다니요.”
“사령님…!”
나자르가 눈치를 줬으나 루카스는 조금도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비릿하게 웃으며 자신을 쏘아보는 이 당돌한 젊은이를 향해 펠리그로니에프는 눈알을 부라렸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스릉. 울리마노프 기사단장의 검이 뽑혔고, 그 끝이 루카스를 향했다.
“감히 대영주를 모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울리마노프 기사단장 비카레프 라주모프 벨리카야가 그대에게 결투를 청한다!!”
루카스의 손도 느릿하게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소리가 나고, 그는 의도적으로 비카레프의 검을 툭 치며 쇳소리를 냈다.
“정확히 열 토막을 내주지….”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사신단 일행은 어쩔 줄을 몰라 서로 얼굴만 마주보며 허둥지둥 거렸고, 펠리그로니에프는 두 기사의 맞닿은 검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바루나 국왕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분을 삭히고 있었고, 핫산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 헛바람만 툭 툭 내뱉으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두 기사의 몸에서 마투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루나는 ‘에라 나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읊었다.
“하하하…, 때 아닌 오피퀴움이 열리는 것 같구려, 대영주….”
시민들은 왕궁 계단 위에서 벌어지는 이 이상한 상황을 보며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라 바빴다. 뭐야, 뭐? 저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아까부터 분위기가 좀 이상하던데? 싸우는 거야? 그런 거야? 설마 저렇게 모여서 싸우기야 하겠어? 이런 구경거리가 어디 흔하겠어? 오늘 저것들이 아주 제대로 보여줄 모양이야~. 자넨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게야?
이미 결투신청을 하고, 루카스가 그것을 받아들인 이상 나자르는 말릴 수가 없었다. 일이 어떻게 벌어졌건 둘은 이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신단들은 당황한 가운데서도 눈앞에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오? 어떻게 말린단 말이오? 이유야 어떻든 결투가 이미 성립이 되었는데…. 이런 자리에서 결투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핫산은 다른 나라의 사신들이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펠리그로니에프는 차라리 잘됐다는 듯 태연히 그들을 관망하고만 있었다.
“영주님, 저대로 둬도 괜찮은 겁니까…?”
“이렇게 된 바엔 칼로 해결하는 것도 좋은 방책이지….”
‘비카레프가 질 리 없다’고 믿는 것인지,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차 있었다. 곁눈질로 대영주의 기색을 살핀 바루나는 어금니를 꾸욱 깨물며 차오르는 분기를 삼켰다. 이자는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이름을 밝혀라!!”
“루카스…, 루카스 스클로도프…, 네놈의 몸뚱이를 잘라 줄 분의 존성대명이시다. 저승에 가서도 잊지 마시게나.”
루카스의 말이 떨어지고, 몸에서 보랏빛 마투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검으로 수렴되었고, 그가 검을 들자 다시 회오리치며 위로 솟구쳤다. 지휘관들과 사신단 일행은 뒷걸음질 치며 그들에게 공간을 내주었다. 비카레프의 몸에선 시커먼 투기가 꾸물럭 꾸물럭 올라와 검을 타고 흘렀다. 그는 루카스를 향해 검을 겨누며 약간 뒤로 몸을 뺐다.
우와아아아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광장의 병사들과 달리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싸움 구경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펠리그로니에프의 눈살이 다시금 찌푸려졌고, 바루나는 이를 부득 소리가 나도록 갈았다. 그의 손이 세이부를 향했다.
“검을 다오.”
루카스와 비카레프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정신이 팔린 다른 이들은 바루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무대신과 병무대신만이 등 뒤에 서 있다가 이를 발견했다. 플로랑이 나서서 말리려 들자 라크라오스가 그를 제지했다.
“하지만 정무대신…!”
“지금은 방도가 없네. 폐하를 믿어보게.”
대치하던 두 기사의 몸이 움직였다. 그들을 감싸며 흐르고 있던 마투기도 함께 폭발하듯 꼬리를 남기며 서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았던 둘의 검이 순식간이 좁혀졌다. 일격필살의 기세로 내리쳐 지는 루카스의 검과 그에 못지않은 기세를 담은 비카레프의 검이 횡으로 그어져 갔다.
두 자루의 검이 부딪치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한 자루의 다른 검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래에서부터 틈새를 비집고 비스듬히 들어간 그 검은 슬쩍 들리며 두 개의 마투기를 어긋나게끔 비틀었다.
피잉…, 하는 가볍고 경쾌한 소리가 났으나, 그 결과는 루카스와 비카레프의 대망신으로 이어졌다. 루카스는 엉뚱하게도 바닥을 내리치며 앞으로 나동그라졌고, 비카레프는 공중으로 뜨며 정신없이 팽그르르 돌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번에는 시민들과 광장에 도열해 있는 군사들조차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일순 조용해졌다. 비카레프가 거칠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만이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고 난리법석이었으나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는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이번엔 리토르나와 그녀를 호위하는 비사카조차 놀란 모양인지, 검을 수습하고 몸을 바로 하는 바루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한 명, 정무대신만이 동요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는 플로랑에게 라크라오스가 봤지? 하듯 속삭였다.
“내가 뭐라던가.”
“… …!!”
제대로 처박힌 루카스와 비카레프는 정신줄을 놓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바루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놀라서 굳어버린 펠리그로니에프를 향해 노기를 꾹꾹 눌러 담은 음성으로 꾸짖듯 말했다.
“대영주가 짐을 어찌 생각하든 그것은 자유이겠으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마음에만 담아두길 바라오. 더 이상 미키네오스의 왕궁에서 망동하지 마시오. 그것은 곧 짐과 미키네오스를 능멸하는 일이니까….”
경고였다. 펠리그로니에프는 그가 보여준 신기에 기가 질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고, 바루나는 세이부에게 검을 건네준 뒤 리토르나에게 사과했다.
“성스러운 뜻을 모으고자 모인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대국의 황녀께 부끄러운 꼴을 보였습니다. 대신 사과드립니다.”
“….”
리토르나는 가벼운 목례를 그에 응대했다.
펠리그로니에프는 굳은 표정으로 바루나의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리토르나에게로 시선을 옮겨갔다. 눈이 마주친 리토르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피식 웃어보였다.
“… …!!”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펠리그로네의 눈에 핏발이 섰다. 금세 얼굴까지 붉어진 그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떠는 데 반해, 리토르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능청을 떨었다.
“자, 혈기왕성한 기사분들께서 한 차례 의기들을 보여주셨으니, 이제 그만 열병식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루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하며 손뼉을 쳤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었으나, 어쨌든 일단 상황은 수습된 셈이었다. 바루나의 말대로 그들은 헛기침들을 하며 몸가짐을 다시금 정리했다. 루카스가 나자르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지만, 그런 행동은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핫산의 한숨만 깊어질 뿐.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시민들의 반응도 좋았고, 이후 열병식은 별다른 문제없이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바루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병사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연신 흡족해하는 모습이었고, 다른 사신들도 점차 어색함을 걷어내며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곤 하였다. 레이네는 천연덕스러운 부왕을 보면서 못 이기겠다는 듯 헛웃음을 짓곤 했다.
“신하들 주무르는 재미에 칼 한 번 안 잡아본 줄 알았더니….”
“국왕 폐하께서 그렇게 강한 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강하지….”
행사가 끝난 후에도 나다니엘은 바루나가 보여준 모습에 대해 놀라움이 가시질 않는 듯 숨을 진정시켰다. 비토를 향해 레이네는 부왕의 수준에 대한 그의 판단을 물었다.
“국왕 폐하의 무예는 완성된 무도에 가깝습니다.”
“완성된 무도…? 그 정도란 말이야?”
“힘으로 힘을 제압하는 것은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힘을 부드러움으로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예의 경지입니다.”
리토르나 역시 비사카로부터 비슷한 대답을 들었다. 그럼 그대와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라고 생각되는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소인 하나로 감당해내기엔 버거운 줄로 아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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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늦었습니다... 일을 누가 들이붓듯 하네요.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는지...;;;
담엔 늦지 않도록 합져. 죄송합니다..(_ _)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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