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수정은 창문을 등지고 서서 자신을 내려다 보는 태호를 보면서도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꿈결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비록 요즘들어, 정확히는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몇차례나 겪었고
또 강간을 당할 뻔 했던 그날의 일을 생각해보자면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직접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녀의 머리는 쉽게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태호를 또다시 보니 수정의 머리속은 명백히 체험한 현상들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성이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며 온통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넌..............누구니?"
그저 혼란스럽기만 한 자신의 머리속 복잡함을 그 한마디에 담아 태호에게로 넘겨버릴 수 밖에 없었다.
수정은 눈은 혹여 태호로부터 자신이 지금 겪는 이 극심한 혼란을 태호라면 납득시켜주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담은 채 반짝거렸다.
방금전까지 엄마의 일로 인해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끼던 수정이지만 태호의 재등장은 그 모든것을 단숨에 잊게 만드는
임팩트가 있었다.
태호는 낮게 한숨을 쉬며 수정이 누워있는 침대의 한쪽 구석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기이한 인연으로 자신과 엮여 있는 수정이었다.
과거의 일도 그렇고 자신의 능력이나 스스로 아직 완전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 자신의 능력도 그렇다.
실오라기 하나 안걸친,
그래서 얇은 이불위로 요염하게 굴곡진 달빛에 젖은 실루엣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뒤죽박죽인 머리속 혼란을 해결해 달라는 듯 눈을 빛내며 순진한 표정으로 누워서 자신을 쳐다보는 수정의 모습은
그녀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낮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지독한 백치미와 요염함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무언가 아쉽기도 하고 입맛이 씁슬한 느낌을 가지며 태호가 입을 열었다.
"얘기가 좀 길어질지도 몰라요, 그전에... 누나.... 뭐라도 좀 걸치는게 좋을것 같은데요..."
"어...어멋!"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태호의 눈에 그제야 자신의 현 상태를 자각한 수정의 모습이 스쳤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른 채 이불을 확 끌어 올려 숨어버리는 수정의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짓는다.
이불만 끌어 올려 숨으면 뭘하겠는가?
얇은 이불은 몸을 웅크리는 여체의 역동적인 실루엣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을...
"나중에... 다시 올게요..."
"아...아니야...가지마! 그냥...그냥 뒤로 돌아서 있어, 금방 갈아입을게..."
갈아입는다는 표현은 맞지 않겟지만 어쨌든 이불밖으로 빼꼼이 눈을 드러낸 수정은
태호가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불을 몸에 두른채 침대를 빠져 나와
눈은 태호를 보면서 옷장으로 향했다.
"도..돌아보지마??"
"네..."
허둥지둥 옷장을 열고 속옷과 츄리닝을 꺼내고는 이불을 등에 뒤집어 쓰고 떨리는 손길로 팬티에 다리를 뀄다.
"왜 매번 이렇게 되는거야.. 태호를 만날 때마다 알몸이 되어서는..."
팬티와 브라를 하고 츄리닝 바지까지 입자 이불을 떨어트리며 수정은 조금 진정이 되었다.
츄리닝 상의를 입고 지퍼를 올리면서 태호의 등을 보노라니 마음이 진정되서 그런지 참 넓고 듬직해 보인다.
"등뒤에서 내가 옷을 입는데 정말 뒤도 안돌아보고 꼼짝도 안하네..."
왠지 태호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수정이다.
"됐어..이..이제 돌아봐도 돼.."
천천히 뒤 돌아서는 태호를 보며 수정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혹시...혹시 말이야...지난번에...니가 내 옷을 입...입혀 준거니...?"
"그 일은 불가항력적인 거였잖아요...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태호의 차분한 말에 오히려 수정은 순간적으로 심통이 났다.
"마음에 두지 말라니... 그게 말이 되니? 난생 처음 남자앞에 알몸을 드러낸건데? 바보같은 녀석 같으니..."
뾰루퉁한 수정의 표정에 태호는 속으로 웃었다.
"이렇게 보면 또 귀여운 면도 있는 누나네..."
하지만 자신이 앞으로 전해줘야 할 말을 생각하니 한편으론 가슴이 무겁다.
흐르는 구름이 달빛을 반쯤 가려주는 밤이었다.
하늘거리는 쉬퐁 재질의 커튼을 투과한 연한 달빛이 숙녀의 침실을 비춘다.
침대 한쪽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는 수정과 맞은 편에 의자를 놓고 앉은 태호.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를 흘렀다.
불을 켜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얼굴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
"난 아직도 그 날의 일도, 지금의 상황도 이해가 안돼...내가 겪었는데도 믿어지지 않아.."
"그 밖에도 이해하기 힘든게 있겠지요...?"
수정의 눈동자가 살짝 커진다.
짐작은 하지만 무슨 의미인지 눈으로 묻는다.
태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누나가 절 처음 본 날을 기억하시나요?"
"응? 그야.. 신입생 환영회 때..."
"아니요, 그 전에도 누나는 절 본 적이 있어요, 다만 기억을 못할 뿐이지만..."
"어..언제?"
태호같은 아이를 전에 봤다면 절대로 기억을 못할리 없다고 생각하는 수정이었다.
"우선은 제 얘기를 해드릴게요, 하다보면 차차 나올 거예요."
태호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수정은 의문이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태호의 이야기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아왔던 수정으로서는 도무지 불가해한 말이었다.
"마법사", "안테나" 어쩌구 하는 말들이 분명 아는 단어인데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태호가 매우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아이라는 것과 그로 인해 자신은 상상도 못할만큼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자신이라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준다고 해도 아기 때부터 그런 식으로는 살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태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들이 수정이 누나에게 줄 충격과 그녀가 다시 느껴야할 해묵은 고통을 가늠해보며 마음이 묵직해졌다.
하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기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우리 반에 이유정이란 아이가 있었어요...유정이가 누나의 동생이죠?"
"으...응"
동그랗게 떠진 수정의 눈이 태호의 얼굴을 직시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냐는 듯한 탐색의 눈길에 태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수정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갑작스런 동생의 죽음과 태호와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은...
"그 아이가 자살하기 전날 제게 고백을 했었어요....절 사랑한다고..."
"아..."
"달리 변명할 생각은 없어요, 당시 전 그 아이에게 싫다고 말했죠. 못생겼다고...."
"아아아..."
수정은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의 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능력을 의식적으로 제한할 줄은 알았지만
무의식중에 드러내는 것까지는 제어하기 힘들었죠.
그 당시에 이미 유정이는 누나와 비슷할 정도의 감응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일찍 강성한 거죠.
그 아이는 저를 느꼈고 그것은 일반적인 감정을 초과하는 것이었죠.
초동학교 6학년 아니가 좋아한다는 표현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표현을..."
"그만"
수정은 소리치며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이미 그녀의 두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만!..그만!...그만!.....흑흑...흐흐흑...제발...그만..."
태호는 기다렸다.
수정의 몸 주위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는 혼탁한 오라가 잠잠해지기를...
그녀에게서 흘러 나오는 격렬한 감정의 동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흐느낌이 서서히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수정의 심장은 조금씩 평온을 되찾아갔다.
수정의 몸이 더이상 떨리지 않게 되었을 때 태호는 입을 열었다.
"누나의 각성이 늦어진 건 아마도 저희 할아버지의 힘일 거예요. 다시는 같은 불행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저를 다시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 것일 테지요.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누나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
"어린 시기에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일인가 봐요.
제가 태어나서 능력이 드러나자마자 할아버지가 저를 키운 것도 그래서 였죠.
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 때는 저의 어머니조차 저를 "괴물"이라고 말했다고 하니까요...
처음엔 누나가 유정이의 언니라고는 생각 못했었는데, 누나를 집에 데려다 주었을 때 누나의 어머니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어요.
이 우주를 지배하는 거대한 인과율의 법칙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기에, 때로는 지독히도 잔인하게 느껴질수도 있다는 것을..."
"......."
"그날 할아버지에게 들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누나의 가족을 보살피고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슬픔을 이겨내고 가족분들이 스스로 다시 살아가실 수 있도록...
어쩌면 저를 대신해서 할아버지가 속죄를 하시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어요.
누나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는 당신께서 미리 막지 못하신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 하셨대요.
하필이면 그 얼마전에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시고 누나의 가족을 은밀히 지켜보게 했던 사람들을 철수시켰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조금만 늦게 결정했어도 막을 수 있었다고 자책하셨어요."
"........"
"제가 이 대학에 입학할 때 할아버지는 막지 않으셨어요.
할아버지는 순리를 거역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전 사실 할아버지를 원망했거든요.
이런 일이 일어날수도 있다는것을 뻔히 예상하시면서도 그대로 두신 것에 대해서...
하지만 할아버지가 옳았다고 생각해요.
밝혀져야 할 것은 어느 때고 밝혀져야 하고 저도 누나의 가족도 결국은 대면하게될 진실 앞에서 온전히 바로 서야 하니까요..."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거기엔 선희가 서 있었다.
경악하며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가슴을 쥐어 뜯고 있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선희가 거기 서 있었다.
"엄마!...으앙..."
뛰어가 엄마에게 안기는 수정과 그런 딸을 끌어 안고 다시 우는 선희.
태호는 서로 얼싸 안고 주저 앉으며 통곡하는 모녀의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하루종일 수정은 강의도 듣는둥 마는둥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저 유미가 이끄는 대로 시체처럼 움직일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옆에서 묻는 유미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다.
도대체 무어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의 가족과 태호의 이야기를...
어젯밤 울다 울다 지쳐 퉁퉁 부운 눈으로 겨우 진정이 된 모녀에게 태호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태호를 바라보는 선희도, 수정도 아무런 할말이 없었다.
이미 너무 울어서 감정적으로 지쳐 있기도 했거니와 어떤 판단을 하기엔 머리속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 아이에게 소리쳐 저주를 퍼부어야 할지, 용서를 해줘야 할지...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는 자신들과 마찬가지인 이 소년에게
무어라 할 말이 있단 말인가...
결국 태호는 그만 돌아가라는 선희의 말에 눈 앞에서 사라져갔다.
"수정아"
"수정아아~~"
옆에서 유미가 흔드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던 수정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하루종일 그러니, 응? 이 언니가 다아 들어줄테니깐 한번 속시원히 말해봐, 응?응?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제까지 말짱하던 애가. 집에 뭔 일 있었니? 응?"
태호의 할아버지와 재혼을 하기로 했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태호보다도 엄마가 더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다.
눈 앞에서 사라지는 태호를 보고도 놀라기는 커녕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놀랍기까지 했다.
태호로 인해 진실을 듣기는 했지만 이미 엄마는 태호의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있고
또 하나 뿐인 손자의 실수로 인해 자신들의 가족을 오랜 시간 돌봐왔던 그 분에게 달리 원망도 없다고 하셨다.
엄마의 말대로 사실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태호에게 뭐라 원망할 일도 아니었고 더더구나 그 할아버지되는 분에게는 오히려
가족을 돌봐주신 것에 감사해야 겠지만 착잡한 마음만은 어쩔수가 없었다.
"저기 태호 온다, 태호야! 여기, 여기!"
유미의 목소리에 수정은 퍼득 정신을 차렸다.
저 앞에서 다가오는 태호의 모습.
"태호를 어떻게 봐야하지...?"
황당하게도 수정은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는 것에 당황했다.
엄마가 태호 할아버지와 정말 재혼이라도 하는 날이면...
"내가 태호의 고모뻘이 되는건가?"
어찌보면 참 이상하고도 또 우습기도 하다고 수정은 생각했다.
신입생 환영회로부터 이제 한달도 안 지났건만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난 듯한 기분이다.
눈 앞에 다가온 태호의 얼굴을 보자 수정은 의외로 자신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안녕? 태호"
"안녕, 누나"
희미하게 미소짓는 수정과 그런 수정을 보며 미소짓는 태호.
유미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머리위에 한가득 의문부호를 띄웠다.
"어머, 어머, 그럼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수정이 니가 태호의 고모가 되는거니, 응? 어쩜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태호의 할아버지와 수정의 어머니가 결혼할 계획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떠는 유미의 말에 수정과 태호는 씁쓸히 웃었다.
막상 생각은 했지만 제 3자의 입에서 말을 듣고 보니 훨씬 더 와닿는 느낌이었다.
"오호호호호...."
갑작스런 유미의 교소에 수정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가장 막강한 경쟁자가 그냥 쓰윽~ 떨어져 나간거네...후후...태호야, 태호야,
이건 운명인가보다, 응? 그치? 그냥 받아들이렴, 사실은 4번이 아니라 1번이었던 것이야, 우리는...오호호호..."
오바하는 유미의 말에 태호의 얼굴에 쓴 웃음이 지어졌고 수정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직 갈길이 멀다는 것을 수정도 태호도 유미도 이 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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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저 떠 오를 때마다 적어서 올리고 있습니다.
매일 올리지 못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수정은 창문을 등지고 서서 자신을 내려다 보는 태호를 보면서도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꿈결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비록 요즘들어, 정확히는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몇차례나 겪었고
또 강간을 당할 뻔 했던 그날의 일을 생각해보자면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직접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녀의 머리는 쉽게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태호를 또다시 보니 수정의 머리속은 명백히 체험한 현상들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성이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며 온통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넌..............누구니?"
그저 혼란스럽기만 한 자신의 머리속 복잡함을 그 한마디에 담아 태호에게로 넘겨버릴 수 밖에 없었다.
수정은 눈은 혹여 태호로부터 자신이 지금 겪는 이 극심한 혼란을 태호라면 납득시켜주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담은 채 반짝거렸다.
방금전까지 엄마의 일로 인해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끼던 수정이지만 태호의 재등장은 그 모든것을 단숨에 잊게 만드는
임팩트가 있었다.
태호는 낮게 한숨을 쉬며 수정이 누워있는 침대의 한쪽 구석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기이한 인연으로 자신과 엮여 있는 수정이었다.
과거의 일도 그렇고 자신의 능력이나 스스로 아직 완전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 자신의 능력도 그렇다.
실오라기 하나 안걸친,
그래서 얇은 이불위로 요염하게 굴곡진 달빛에 젖은 실루엣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뒤죽박죽인 머리속 혼란을 해결해 달라는 듯 눈을 빛내며 순진한 표정으로 누워서 자신을 쳐다보는 수정의 모습은
그녀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낮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지독한 백치미와 요염함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무언가 아쉽기도 하고 입맛이 씁슬한 느낌을 가지며 태호가 입을 열었다.
"얘기가 좀 길어질지도 몰라요, 그전에... 누나.... 뭐라도 좀 걸치는게 좋을것 같은데요..."
"어...어멋!"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태호의 눈에 그제야 자신의 현 상태를 자각한 수정의 모습이 스쳤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른 채 이불을 확 끌어 올려 숨어버리는 수정의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짓는다.
이불만 끌어 올려 숨으면 뭘하겠는가?
얇은 이불은 몸을 웅크리는 여체의 역동적인 실루엣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을...
"나중에... 다시 올게요..."
"아...아니야...가지마! 그냥...그냥 뒤로 돌아서 있어, 금방 갈아입을게..."
갈아입는다는 표현은 맞지 않겟지만 어쨌든 이불밖으로 빼꼼이 눈을 드러낸 수정은
태호가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불을 몸에 두른채 침대를 빠져 나와
눈은 태호를 보면서 옷장으로 향했다.
"도..돌아보지마??"
"네..."
허둥지둥 옷장을 열고 속옷과 츄리닝을 꺼내고는 이불을 등에 뒤집어 쓰고 떨리는 손길로 팬티에 다리를 뀄다.
"왜 매번 이렇게 되는거야.. 태호를 만날 때마다 알몸이 되어서는..."
팬티와 브라를 하고 츄리닝 바지까지 입자 이불을 떨어트리며 수정은 조금 진정이 되었다.
츄리닝 상의를 입고 지퍼를 올리면서 태호의 등을 보노라니 마음이 진정되서 그런지 참 넓고 듬직해 보인다.
"등뒤에서 내가 옷을 입는데 정말 뒤도 안돌아보고 꼼짝도 안하네..."
왠지 태호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수정이다.
"됐어..이..이제 돌아봐도 돼.."
천천히 뒤 돌아서는 태호를 보며 수정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혹시...혹시 말이야...지난번에...니가 내 옷을 입...입혀 준거니...?"
"그 일은 불가항력적인 거였잖아요...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태호의 차분한 말에 오히려 수정은 순간적으로 심통이 났다.
"마음에 두지 말라니... 그게 말이 되니? 난생 처음 남자앞에 알몸을 드러낸건데? 바보같은 녀석 같으니..."
뾰루퉁한 수정의 표정에 태호는 속으로 웃었다.
"이렇게 보면 또 귀여운 면도 있는 누나네..."
하지만 자신이 앞으로 전해줘야 할 말을 생각하니 한편으론 가슴이 무겁다.
흐르는 구름이 달빛을 반쯤 가려주는 밤이었다.
하늘거리는 쉬퐁 재질의 커튼을 투과한 연한 달빛이 숙녀의 침실을 비춘다.
침대 한쪽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는 수정과 맞은 편에 의자를 놓고 앉은 태호.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를 흘렀다.
불을 켜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얼굴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
"난 아직도 그 날의 일도, 지금의 상황도 이해가 안돼...내가 겪었는데도 믿어지지 않아.."
"그 밖에도 이해하기 힘든게 있겠지요...?"
수정의 눈동자가 살짝 커진다.
짐작은 하지만 무슨 의미인지 눈으로 묻는다.
태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누나가 절 처음 본 날을 기억하시나요?"
"응? 그야.. 신입생 환영회 때..."
"아니요, 그 전에도 누나는 절 본 적이 있어요, 다만 기억을 못할 뿐이지만..."
"어..언제?"
태호같은 아이를 전에 봤다면 절대로 기억을 못할리 없다고 생각하는 수정이었다.
"우선은 제 얘기를 해드릴게요, 하다보면 차차 나올 거예요."
태호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수정은 의문이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태호의 이야기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아왔던 수정으로서는 도무지 불가해한 말이었다.
"마법사", "안테나" 어쩌구 하는 말들이 분명 아는 단어인데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태호가 매우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아이라는 것과 그로 인해 자신은 상상도 못할만큼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자신이라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준다고 해도 아기 때부터 그런 식으로는 살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태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들이 수정이 누나에게 줄 충격과 그녀가 다시 느껴야할 해묵은 고통을 가늠해보며 마음이 묵직해졌다.
하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기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우리 반에 이유정이란 아이가 있었어요...유정이가 누나의 동생이죠?"
"으...응"
동그랗게 떠진 수정의 눈이 태호의 얼굴을 직시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냐는 듯한 탐색의 눈길에 태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수정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갑작스런 동생의 죽음과 태호와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은...
"그 아이가 자살하기 전날 제게 고백을 했었어요....절 사랑한다고..."
"아..."
"달리 변명할 생각은 없어요, 당시 전 그 아이에게 싫다고 말했죠. 못생겼다고...."
"아아아..."
수정은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의 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능력을 의식적으로 제한할 줄은 알았지만
무의식중에 드러내는 것까지는 제어하기 힘들었죠.
그 당시에 이미 유정이는 누나와 비슷할 정도의 감응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일찍 강성한 거죠.
그 아이는 저를 느꼈고 그것은 일반적인 감정을 초과하는 것이었죠.
초동학교 6학년 아니가 좋아한다는 표현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표현을..."
"그만"
수정은 소리치며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이미 그녀의 두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만!..그만!...그만!.....흑흑...흐흐흑...제발...그만..."
태호는 기다렸다.
수정의 몸 주위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는 혼탁한 오라가 잠잠해지기를...
그녀에게서 흘러 나오는 격렬한 감정의 동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흐느낌이 서서히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수정의 심장은 조금씩 평온을 되찾아갔다.
수정의 몸이 더이상 떨리지 않게 되었을 때 태호는 입을 열었다.
"누나의 각성이 늦어진 건 아마도 저희 할아버지의 힘일 거예요. 다시는 같은 불행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저를 다시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 것일 테지요.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누나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
"어린 시기에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일인가 봐요.
제가 태어나서 능력이 드러나자마자 할아버지가 저를 키운 것도 그래서 였죠.
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 때는 저의 어머니조차 저를 "괴물"이라고 말했다고 하니까요...
처음엔 누나가 유정이의 언니라고는 생각 못했었는데, 누나를 집에 데려다 주었을 때 누나의 어머니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어요.
이 우주를 지배하는 거대한 인과율의 법칙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기에, 때로는 지독히도 잔인하게 느껴질수도 있다는 것을..."
"......."
"그날 할아버지에게 들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누나의 가족을 보살피고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슬픔을 이겨내고 가족분들이 스스로 다시 살아가실 수 있도록...
어쩌면 저를 대신해서 할아버지가 속죄를 하시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어요.
누나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는 당신께서 미리 막지 못하신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 하셨대요.
하필이면 그 얼마전에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시고 누나의 가족을 은밀히 지켜보게 했던 사람들을 철수시켰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조금만 늦게 결정했어도 막을 수 있었다고 자책하셨어요."
"........"
"제가 이 대학에 입학할 때 할아버지는 막지 않으셨어요.
할아버지는 순리를 거역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전 사실 할아버지를 원망했거든요.
이런 일이 일어날수도 있다는것을 뻔히 예상하시면서도 그대로 두신 것에 대해서...
하지만 할아버지가 옳았다고 생각해요.
밝혀져야 할 것은 어느 때고 밝혀져야 하고 저도 누나의 가족도 결국은 대면하게될 진실 앞에서 온전히 바로 서야 하니까요..."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거기엔 선희가 서 있었다.
경악하며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가슴을 쥐어 뜯고 있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선희가 거기 서 있었다.
"엄마!...으앙..."
뛰어가 엄마에게 안기는 수정과 그런 딸을 끌어 안고 다시 우는 선희.
태호는 서로 얼싸 안고 주저 앉으며 통곡하는 모녀의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하루종일 수정은 강의도 듣는둥 마는둥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저 유미가 이끄는 대로 시체처럼 움직일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옆에서 묻는 유미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다.
도대체 무어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의 가족과 태호의 이야기를...
어젯밤 울다 울다 지쳐 퉁퉁 부운 눈으로 겨우 진정이 된 모녀에게 태호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태호를 바라보는 선희도, 수정도 아무런 할말이 없었다.
이미 너무 울어서 감정적으로 지쳐 있기도 했거니와 어떤 판단을 하기엔 머리속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 아이에게 소리쳐 저주를 퍼부어야 할지, 용서를 해줘야 할지...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는 자신들과 마찬가지인 이 소년에게
무어라 할 말이 있단 말인가...
결국 태호는 그만 돌아가라는 선희의 말에 눈 앞에서 사라져갔다.
"수정아"
"수정아아~~"
옆에서 유미가 흔드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던 수정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하루종일 그러니, 응? 이 언니가 다아 들어줄테니깐 한번 속시원히 말해봐, 응?응?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제까지 말짱하던 애가. 집에 뭔 일 있었니? 응?"
태호의 할아버지와 재혼을 하기로 했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태호보다도 엄마가 더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다.
눈 앞에서 사라지는 태호를 보고도 놀라기는 커녕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놀랍기까지 했다.
태호로 인해 진실을 듣기는 했지만 이미 엄마는 태호의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있고
또 하나 뿐인 손자의 실수로 인해 자신들의 가족을 오랜 시간 돌봐왔던 그 분에게 달리 원망도 없다고 하셨다.
엄마의 말대로 사실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태호에게 뭐라 원망할 일도 아니었고 더더구나 그 할아버지되는 분에게는 오히려
가족을 돌봐주신 것에 감사해야 겠지만 착잡한 마음만은 어쩔수가 없었다.
"저기 태호 온다, 태호야! 여기, 여기!"
유미의 목소리에 수정은 퍼득 정신을 차렸다.
저 앞에서 다가오는 태호의 모습.
"태호를 어떻게 봐야하지...?"
황당하게도 수정은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는 것에 당황했다.
엄마가 태호 할아버지와 정말 재혼이라도 하는 날이면...
"내가 태호의 고모뻘이 되는건가?"
어찌보면 참 이상하고도 또 우습기도 하다고 수정은 생각했다.
신입생 환영회로부터 이제 한달도 안 지났건만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난 듯한 기분이다.
눈 앞에 다가온 태호의 얼굴을 보자 수정은 의외로 자신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안녕? 태호"
"안녕, 누나"
희미하게 미소짓는 수정과 그런 수정을 보며 미소짓는 태호.
유미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머리위에 한가득 의문부호를 띄웠다.
"어머, 어머, 그럼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수정이 니가 태호의 고모가 되는거니, 응? 어쩜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태호의 할아버지와 수정의 어머니가 결혼할 계획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떠는 유미의 말에 수정과 태호는 씁쓸히 웃었다.
막상 생각은 했지만 제 3자의 입에서 말을 듣고 보니 훨씬 더 와닿는 느낌이었다.
"오호호호호...."
갑작스런 유미의 교소에 수정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가장 막강한 경쟁자가 그냥 쓰윽~ 떨어져 나간거네...후후...태호야, 태호야,
이건 운명인가보다, 응? 그치? 그냥 받아들이렴, 사실은 4번이 아니라 1번이었던 것이야, 우리는...오호호호..."
오바하는 유미의 말에 태호의 얼굴에 쓴 웃음이 지어졌고 수정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직 갈길이 멀다는 것을 수정도 태호도 유미도 이 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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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저 떠 오를 때마다 적어서 올리고 있습니다.
매일 올리지 못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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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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