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신 아이누의 전생, 발큐리아스 뱅가드의 기사단장, 백은의 기사왕녀라 불리는 세리오트 왕녀의 별명이다. 그런 세리오트 왕녀가 드디어 로제스의 눈앞에 서 있었다.
과연 소문대로 얼음으로 미녀의 조각상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이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으며 당당하고 냉정했다. 그리고 세리오트에게는 무언가 로제스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비유하자면 마치 높은 벼랑에 홀로 피어있는 꽃을 꺾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세리오트와 발큐리아스 뱅가드 전원이 도착하자 로제스들은 공격을 멈추고 그녀들을 견제했다. 그리고 백은의 기사왕녀 세리오트가 로제스에게 말했다.
“당신이 바로 아르트제 제국의 황태자 로제스인가?”
“그러면 네가 바로 소문의 기사왕녀 세리오트겠네. 소문대로인데.”
두 사람은 서로 통성명을 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치 그 사이에 불꽃이 튀는 것과도 같은 탐색이 이루어졌다. 로제스는 유심히 세리오트의 전신을 훑어봤다. 신비로운 은발, 기품 있고 강단 있어 보이는 자태, 그리고 전투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연한 적색의 눈동자와 로제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큰 키에 그리고 왕녀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럽게 몸에 밴 고고한 행동거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제스는 그녀의 가슴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예리하게 눈치 챘다. 비록 두터운 중갑으로 몸매를 가리고 있었지만 가슴이 큰 여성들은 늘 어깨 결림으로 고생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어깨에 부담이 가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을 수많은 여자를 품어본 로제스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세리오트의 가슴이 흔히 말하는 거유라는 것을 대번에 눈치 챘다.
‘음, 정말 쿠테일이나 에리나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미인이구나.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역시 다른 이들과는 다른 매력이 돋보인다.’
그렇게 속으로 세리오트를 품평한 로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쪽이 피해자인 만큼 문제제기를 해 줘야 갰군. 여기 있는 너의 부하들이 하얀 로브로 모습을 감추고 우리 아르트제 제국 민들의 영토를 습격하며 제물을 약탈해갔다. 이에 대해 뭐라도 할 말이 있나?”
로제스가 이미 국제적인 문제로 번진 북쪽마을 약탈 건에 대해서 말을 하자 세리오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게 한 동안 대답이 없다가 세리오트는 말에서 내려 로제스에게 다가간 후 정중히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사과하겠어. 죄송하다.”
세리오트의 깍듯한 태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랐다. 그도 그럴 듯이 국가 간의 문제가 벌어진 경우에는 누가 잘못을 했던 간에 먼저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잘못을 했더라도 일단 큰소리를 치고 봐야 나중에 유리한 것이기 때문에 기선제압 차원에서 먼저 사과하는 행위는 좋지 않다.
또한 세리오트는 로제스들이 본 발큐리아스 기사단의 저열한 이미지하고는 딴판이었다. 발큐리아스 기사단이 대륙에서 통하는 기사도 정신이 없는 자들이라면 반대로 이 기사왕녀 세리오트야 말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진정한 기사인 것이다. 로제스는 겉모습이 아름답기만 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성품도 올곧음을 알고 조금은 감동했다.
“그렇게나 잘못 했다고 인정한다면 너희들이 지금 순순히 우리에게 투항하는 것이 이치 아니겠나?”
그때, 뒤에 있던 글로둔 백작이 나서서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역시 국가 간의 알력싸움에 대해 잘 알듯이 세리오트의 정중한 사과를 발판으로 지금 상황을 유리하게 잡으려는 것이다. 로제스는 내심 이런 아름다운 미녀와의 대화를 방해한 글로둔 백작에 대해 심술이 났다.
‘거참. 이야기 좀 나누게 내버려둘 것이지. 저 아저씨는...’
한편 글로둔 백작의 말을 들은 세리오트의 표정이 다시 처음과 같이 냉정하고도 무언가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귀하의 나라에 침입하고 힘없는 제국 민들을 대상으로 약탈을 한 것은 죄송하다.”
그리고 세리오트 왕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귀하의 의견을 들어줄 수 없다. 나는 제니오디 왕국의 왕녀. 그리고 발큐리아스 뱅가드의 기사단장으로서 우리 단원들을 구해야할 의무가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제니오디 왕국의 여왕폐하의 검이다. 검은 오로지 주인의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나 자신이 원치 않지만 여왕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그 일을 행한다.”
백은의 기사왕녀 세리오트는 그 말과 함께 등에 차고 있는 거대한 검을 뽑았다.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대검은 검신만 해도 1m는 족히 넘고 검신의 넓이도 사람 머리 크기만 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검이었다. 보통 여자의 힘으로 아니 힘 좋은 장사의 손으로도 들 수 없는 무게의 검을 세리오트가 쉽게 한 손으로 들어 올린 것을 보니 그 검의 정체는 신화에 전여신 아이누가 신화의 마수 루비아탄을 무찌르는데 사용했다는 제니오디 왕가에 내려오는 마법검 아이시클 소드가 분명했다. 그리고 세리오트는 그 대검을 로제스에게 겨누며 계속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당신들에게 죽을 위험에 처해있는 우리 단원들을 구하고, 더불어 오늘 일이 타국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 말은 곧 여기 있는 아르트제 제국의 모두를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로제스는 그 말을 듣고 마음에 든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같이 검을 뽑았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 재미있지. 어디한번 백은의 기사왕녀님의 검술실력 좀 보자고.”
로제스 역시 검의 길을 걷는 검사답게 세리오트의 도발에 응했다. 지금의 발큐리아스 기사단의 수는 알제르*아르티어스 기사단의 수보다 많았다. 당연히 발큐리아스 기사단은 전원이 전부 모였고 이쪽은 본국에서 소수만 파견 나왔기 때문에 그 수가 적다. 이대로 기사단 간의 전투가 벌어지면 수에 밀려 백전백패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지금은 후퇴하는 것이 답이다. 그리고 로제스는 자신이 나서 세리오트의 앞길을 막음으로서 그 퇴로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글로둔 백작님. 후퇴지휘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전원 서둘러서 후퇴한다. 전원 후퇴.”
글로둔 백작 입장에서는 이미 적들의 전술에 농락되어 패한 장수의 입장이고 로제스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입장임으로 순순히 로제스의 제안을 받아드렸다. 그래도 로제스를 방패막이 삼아 달아나는 것은 기사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 글로둔 백작은 명령을 내린 후에 로제스와 같이 남아 있으려 했다.
“로제스 저하. 저도 같이 남아 돕겠습니다.”
하지만 로제스는 싱긋이 웃었다.
“그러지 마세요. 당신들을 보내고 나 혼자 죽겠다는 것이 아니고 퇴로를 지키는 사람이 많으면 나중에 도망가기 힘들어서 그럽니다. 안 죽을 테니까 걱정 말고 이곳에서 벗어나세요.”
그 말에 글로둔 백작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로제스 황태자님. 무운을.”
로제스는 그렇게 기사단을 후퇴시키면서 다가오는 발큐리아스 기사단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로제스의 곁에는 에리나와 그래드, 딘저, 그리고 소수의 알제르 기사단만이 남아서 퇴로를 확보하기로 했다.
알제르 기사단은 비록 아르티어스 기사단처럼 무용이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대신 적의 공격을 피하고 도망가는 재주 하나는 알아주었다. 아르트제 제국의 기사단 중 가장 강력한 기사단은 단연 아르티어스 기사단이었지만 기동력에서는 알제르 기사단을 능가하는 기사단은 없었다.
다다다다!!
먼저 발큐리아스 기사단의 세 사람이 로제스에게 다가가 공격을 가했다.
“건방진 제국의 황자놈. 각오!”
채챙~~
그러자 로제스는 가볍게 검을 받아 넘기고는 한명을 그대로 종아리를 걷어 차 넘어뜨리고 다른 한명은 검을 들어 막는 동시에 주먹을 복부에 내질러 날려버렸으며, 그 동작을 이어 검의 옆면을 마치 야구방망이 삼아 나머지 한명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이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순식간에 진행되자 발큐리아스의 세 기사는 그야말로 한 동작으로 쓰러졌다.
털썩~
“이, 이럴 수가...”
“이렇게나 허무하게...”
방금 전의 세 기사는 발큐리아스 분대 내에서도 2~3위 정도의 실력을 갖춘 베테랑 기사였는데 그런 베테랑 기사를 죽이지도 않고 순식간에 때려눕힌 것이다. 쓰러진 기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로제스의 공격을 받아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자, 빨리빨리 덤비라고 언니들. 어디 그 잘난 발큐리아스 기사단의 무용을 보여 달라고.”
로제스는 밑에 쓰러진 발큐리아스 기사단을 신경 쓰지 않고 손짓을 하며 말하면서 공격 태세를 갖추는 300명에 달하는 발큐리아스 기사단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것은 마치 굴러오는 마차바퀴에 맞서는 사마귀와 같은 당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발큐리아스 기사단들은 방금 전의 로제스의 검술실력에 기세가 눌려 섣불리 진격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를 틈타 아르티어스 기사단은 서둘러서 호수를 벗어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르티어스 기사단을 놓쳐 이 일이 밖으로 새 나갈 것임을 깨달은 세리오트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로제스를 상대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당신의 상대는 나 인 것 같군. 로제스 황태자.”
그러자 로제스는 상큼하게 마성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세리오트 누나. 빨리 나와 한번 겨뤄보자고. 헤헤.”
로제스가 세리오트를 누나라고 부르면서 장난스럽고도 천박하게 말했지만 세리오트는 묵묵히 그 말을 받아드리며 발큐리아스 기사단에게 명령했다.
“황태자는 내가 막을 테니 전 병력은 아르트제의 기사단을 추격한다!”
“알겠습니다!”
이 말에 모든 발큐리아스 기사단이 말 위에 오르며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아르트제의 기사단을 추격하려 했다.
“그걸 우리가 넋 놓고 보고 있을 소냐!”
“우리들을 잊으면 섭섭하지 언니들.”
그때 그래드와 딘저, 그리고 알제르 기사단이 나서서 그녀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딱 봐도 다수 대 소수의 상황이라 불리하기 그지없는데도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그녀들의 추격 길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들은 뭐라도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지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당당했다. 그리고 그 믿는 구석이 무엇인지는 에리나를 통해 금방 들어났다.
“에리나 왕녀님. 시작해 주십시오.”
“알겠다고! 타올라라! 파이어!”
그래드의 말에 에리나가 대답하며 전번에 로제스와의 대결에 썼던 화염구 세례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 대상은 발큐리아스 기사단이 아니라 바로 얼어붙은 호수 바닥이었다.
펑~펑~펑~
에리나의 화염구에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차가운 호수 물을 들어냈다. 이에 알제르 기사단은 2인 1조로 행동하면서 구멍 난 호수바닥을 이용하여 발큐리아스 기사단을 견제하였다. 발큐리아스 기사단은 비록 말을 타고 있었지만 기마실력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기에 잘못 헛딛으면 차가운 호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자고 말에서 내려 싸우자니 도망간 아르트제 기사들을 쫓기 위해 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들로선 도저히 호수를 건널 방법이 보이지를 않았다.
“제길, 저들 중에 마법사가 있었을 줄이야.”
또한 에리나가 호수 바닥에 적절히 구멍을 내고나서 본격적으로 견제공격에 들어가자 추격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한동안 알제르 기사단과 발큐리아스 기사단간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드디어 로제스와 세리오트간의 전투가 시작됐다.
“타앗!”
먼저 선공한 것은 세리오트였다. 세리오트는 거대한 대검을 마치 젓가락 휘두르듯 한 손으로 내려찍기를 가했다.
쿠웅~
세리오트의 마법검 아이시클 소드가 호수바닥과 닺으면서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간발의 차이로 황급히 몸을 굴려 공격을 피한 로제스가 말했다.
“휴우. 설마 했는데 저 검은 역시 마법검 이었나? 방심하다 골로 갈 뻔했네.”
세리오트의 마법검 아이시클 소드는 주인을 선택하는 마법검인 모양이었다. 저런 마법검은 주인 이외의 자에게는 손잡이를 잡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반대로 주인에게는 무게에 대한 딜레이를 받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때문에 무게가 저렇게 무거운데도 세리오트가 여자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한손으로 저 대검을 가볍게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차 세리오트의 검격이 이어졌다.
부웅~ 부웅~
육중한 대검이 이리저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쏟아졌지만, 로제스는 다람쥐 마냥 미꾸라지처럼 피하기도 하고 공중제비도 넘으면서 마치 서커스의 곡예사같이 재주 좋게 공격을 피했다.
로제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르트제 기사단이 후퇴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고, 덤으로 세리오트의 검술실력을 되도록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때문에 로제스는 힘을 아끼면서 진심으로 세리오트를 상대하지 않고 잔재주만으로 세리오트의 공격을 피하는데 집중했다.
‘확실히 대단한 실력이군. 마법검 하나만 믿고 기사놀이를 하며 설치는 왕녀님인 줄 알았는데, 이 검술실력은 진짜다.’
세리오트의 날카로운 검격이 수많은 세월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 진 것을 느낀 로제스는 점점 세리오트에게 감탄했다. 그리고 동시에 세리오트에 대한 욕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름다운 외모에 냉정한 성격. 기사도를 숭배하는 모습과 뛰어난 검술실력. 그 밖의 세리오트의 매력이 로제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로제스에게 세리오트를 노예 메이드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심어줬다.
‘대단해. 대단하다. 기사왕녀 세리오트. 너무나 가지고 싶다. 내 것으로 하고 싶다.’
로제스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세리오트의 공격을 피했다.
어느 덧, 시간이 흘러 아르트제의 기사들이 무사히 후퇴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로제스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좋았어! 모두들 이제 우리도 도망이다! 모두들 후퇴!”
그 말에 알제르 기사단은 일제히 부리나케 호수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동시에 에리나가 얼어붙은 호수바닥에 손을 집고 주문을 외웠다.
“내 눈앞의 적을 멸살하라. 플레임 필드!”
쿠구궁!!!
그러자 드문드문 에리나의 마법으로 구멍이 생긴 호수바닥이 이제는 완전히 녹으면서 박살이 나 커다란 호수가 되었다. 발큐리아스 기사단과 달아난 알제르 기사단 사이에 건너기 힘든 커다란 호수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발큐리아스 기사단이 있는 곳에는 아직 로제스 황태자가 남아있다.
“하지만 아직 황태자가 남았다! 붙잡아!”
“흐아아아아!!”
발큐리아스 기사단은 알제르 기사단마저 놓치자 크게 분노하며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로제스에게 달려들었다. 적어도 로제스 황태자만이라도 생포하면 협상의 여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본 로제스는 웃으며 말했다.
“이런이런. 이놈의 인기는 이 북쪽 땅에서도 알아주는구먼. 저런 예쁜 언니들이 나를 보고 이리도 환호하며 달려들다니.”
그리고 슬슬 도망 갈 준비를 하면서 로제스는 세리오트에게 말했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군. 세리오트 누나. 누나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누나라고 불러도 되지? 다음에 다시 놀아보자고. 하하하.”
“기다려라!”
세리오트도 로제스를 사로잡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로제스는 녹아내린 차가운 호수로 몸을 던진 후였다. 아무런 장비 없이 그저 무방비하게 몸을 던진 로제스를 보고 세리오트와 발큐리아스 기사단은 경악했지만 그때 호수 건너편에 있던 에리나가 주문을 외웠다.
“적을 꿰뚫어라! 아이스 스피어!”
그러자 두꺼운 얼음의 창들이 생성되면서 로제스가 빠질 호수의 바로 밑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촌장에게 이곳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음으로서 사전에 이런 방식으로 도주하기로 미리 에리나와 약속을 한 것이다. 마치 나룻배가 표류하듯 둥실 떠 있는 얼음의 창들을 로제스는 균형한번 안 잃고 하나 둘씩 디뎌가며 알제르 기사단이 있는 호수건너편까지 도착했다.
“자, 그럼 다음 이 시간에 계속! 하하하!”
“!!!”
로제스가 세리오트와 발큐리아스 기사단을 놀리며 그렇게 떠나가자 다들 분한 듯 땅을 차고 묵묵히 그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야말로 세리오트와 발큐리아스 기사단은 닭 쫓던 개꼴이 되어 로제스들이 달아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발큐리아스 기사단의 추격을 따돌리고 돌아온 로제스는 아까 전에 구호활동을 해 준 마을 쪽으로 움직였다. 알제르 기사단의 캠프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너는 언제 봐도 무모한 행동만 한다니까. 짜식.”
딘저가 로제스가 타고 있는 말에 옆으로 붙으며 말을 걸었다.
“그러게 말이다. 너의 무용이 대단하기에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겠지만 조금은 우리의 기분도 생각해다오.”
“맞아. 나는 정말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어.”
그러자 그래드도 로제스의 다른 쪽 옆에 붙으며 딘저의 말을 거들었고 에리나도 한 말했다. 기본적으로 지휘관이 할 일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선두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뒤에서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로제스는 한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면서도 아까전과 같이 툭 하면 앞으로 나서서 적들을 상대하곤 했다. 장수로서는 유능할지는 몰라도 지휘관으로서는 점수를 낮게 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로제스가 머리가 전술전략을 펼치는데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피를 이어 받아 무술실력이 뛰어나듯이, 천재전략가였던 아버지의 피도 이어 받았기에 잔머리 하나는 기발했다. 다만 로제스의 성격상 뒤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성미에 안 맞을 뿐인 것이다.
덕분에 로제스가 전투에 선두로 나설 경우 항상 알제르 기사단의 맏형격인 철두철미 그래드가 전투의 지휘를 어쩔 수 없이 도맡았다.
“하지만 방금 같은 경우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세리오트라는 그 예쁜 누나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고 그 누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나 뿐 이었을걸?”
그렇게 로제스가 변명을 하자 순간 다들 숙연해지며 무언의 긍정을 표시했다. 방금 전 보았던 세리오트의 무시무시한 실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로제스의 말 대로 백은의 왕녀기사 세리오트는 생각보다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세리오트를 정면에서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로제스 뿐이었고. 잘 쳐줘야 황금의 마법왕녀 에리나 정도가 간신히 견제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만 앞에 나서서 녀석들을 막은 게 아니라 너희들도 도와줬잖아. 그것에 대해서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고. 너희들 때문에 나는 뒤를 걱정 안하니까.”
“짜식아. 대장이 앞서 나가는 데 쫄다구가 따라가야 하는 건 당연하지.”
“하하하.”
로제스의 말에 딘저가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그 모습에 우스꽝스러웠는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오늘은 다들 작전대로 잘 해주었어. 내일 있을 전투도 잘 해 달라고.”
* * *
로제스와 알제르 기사단이 마을에 있는 캠프에 도착하니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로제스는 에리나와 쿠테일 그리고 그 밖의 알제르 기사단의 간부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간단한 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자 로제스는 내일 있을 전투에 대비하여 알제르 기사단에게 휴식을 명했다. 먼저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마친 로제스는 곁에 있던 마을 촌장에게 말했다.
“촌장님. 혹시 마을 안에 마구간이 있나요?”
“예예. 마을입구의 외각에 마구간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마적들이 전부 말들을 다 쓸어가 버리는 바람에 텅 비어있지요.”
그러자 로제스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 됐네요. 그러면 오늘 하루만 그 마구간을 빌려 주시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동안만 마을 사람들이 마구간 근처에 오지 못하게도 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사님이 원하신다면 백번 천 번이라도 해 드려야지요. 제가 마을사람들에게도 언질을 놓겠습니다.”
촌장은 아직도 로제스의 정체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황태자인 줄도 모르고 그저 높은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말했다. 로제스의 태도가 워낙에 털털해서 설마 황태자일 줄이야 하고 생각하진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옆에 있던 쿠테일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로제스가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바로 눈치 채고 농염하고 웃으면서 요염하게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이어서 로제스는 그래드와 딘저를 불러서 알제르 기사단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뭐?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서 오늘의 공중화장실을 하자고?”
“그래, 딱히 위로를 주기 위하기보다는 우선 내일 있을 전투에 필요하니까 그런 거야. 그러니까 오늘 당번만 돌리지 말고 알제르 기사단 전 단원들을 돌리라고. 왜. 싫어?”
로제스가 능글맞게 웃자 딘저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아... 아니아니! 미쳤냐. 남자인 내가 싫다고 하면 백프로 미친 거지. 나하고 뭐 알제르 기사단이야 좋지만 쿠테일님이...”
딘저는 그렇게 말하면서 쿠테일을 슬쩍 쳐다보며 눈치를 봤지만 쿠테일은 그저 쿡쿡 웃으며 말했다.
“걱정 하지 마. 평소 하루에 대여섯 명에서 즐겼지만 사실 난 하루 만에 백 명이든 천명이든 가능하니까.”
그 말에 딘저는 얼굴이 확 밝아지면서 좋아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 그러면 지금 당장 애들한테 전하겠습니다.”
그때 로제스는 걸음을 치려는 딘저의 뒤에 그렇게 말했다.
“아. 그전에 오늘 당번인 녀석들이 먼저 하도록 하고 전부 순번이 돌아가면 다시 오늘 당번인 녀석들이 한 번 더 하게 해줘. 오늘 전부 돌리면 당번인 녀석들이 불만일 것 아냐.”
“오우! 알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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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신이 없으니 하나 더 갑니다. 텐션도 올랐고 하니...ㅋ
과연 소문대로 얼음으로 미녀의 조각상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이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으며 당당하고 냉정했다. 그리고 세리오트에게는 무언가 로제스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비유하자면 마치 높은 벼랑에 홀로 피어있는 꽃을 꺾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세리오트와 발큐리아스 뱅가드 전원이 도착하자 로제스들은 공격을 멈추고 그녀들을 견제했다. 그리고 백은의 기사왕녀 세리오트가 로제스에게 말했다.
“당신이 바로 아르트제 제국의 황태자 로제스인가?”
“그러면 네가 바로 소문의 기사왕녀 세리오트겠네. 소문대로인데.”
두 사람은 서로 통성명을 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치 그 사이에 불꽃이 튀는 것과도 같은 탐색이 이루어졌다. 로제스는 유심히 세리오트의 전신을 훑어봤다. 신비로운 은발, 기품 있고 강단 있어 보이는 자태, 그리고 전투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연한 적색의 눈동자와 로제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큰 키에 그리고 왕녀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럽게 몸에 밴 고고한 행동거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제스는 그녀의 가슴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예리하게 눈치 챘다. 비록 두터운 중갑으로 몸매를 가리고 있었지만 가슴이 큰 여성들은 늘 어깨 결림으로 고생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어깨에 부담이 가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을 수많은 여자를 품어본 로제스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세리오트의 가슴이 흔히 말하는 거유라는 것을 대번에 눈치 챘다.
‘음, 정말 쿠테일이나 에리나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미인이구나.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역시 다른 이들과는 다른 매력이 돋보인다.’
그렇게 속으로 세리오트를 품평한 로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쪽이 피해자인 만큼 문제제기를 해 줘야 갰군. 여기 있는 너의 부하들이 하얀 로브로 모습을 감추고 우리 아르트제 제국 민들의 영토를 습격하며 제물을 약탈해갔다. 이에 대해 뭐라도 할 말이 있나?”
로제스가 이미 국제적인 문제로 번진 북쪽마을 약탈 건에 대해서 말을 하자 세리오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게 한 동안 대답이 없다가 세리오트는 말에서 내려 로제스에게 다가간 후 정중히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사과하겠어. 죄송하다.”
세리오트의 깍듯한 태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랐다. 그도 그럴 듯이 국가 간의 문제가 벌어진 경우에는 누가 잘못을 했던 간에 먼저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잘못을 했더라도 일단 큰소리를 치고 봐야 나중에 유리한 것이기 때문에 기선제압 차원에서 먼저 사과하는 행위는 좋지 않다.
또한 세리오트는 로제스들이 본 발큐리아스 기사단의 저열한 이미지하고는 딴판이었다. 발큐리아스 기사단이 대륙에서 통하는 기사도 정신이 없는 자들이라면 반대로 이 기사왕녀 세리오트야 말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진정한 기사인 것이다. 로제스는 겉모습이 아름답기만 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성품도 올곧음을 알고 조금은 감동했다.
“그렇게나 잘못 했다고 인정한다면 너희들이 지금 순순히 우리에게 투항하는 것이 이치 아니겠나?”
그때, 뒤에 있던 글로둔 백작이 나서서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역시 국가 간의 알력싸움에 대해 잘 알듯이 세리오트의 정중한 사과를 발판으로 지금 상황을 유리하게 잡으려는 것이다. 로제스는 내심 이런 아름다운 미녀와의 대화를 방해한 글로둔 백작에 대해 심술이 났다.
‘거참. 이야기 좀 나누게 내버려둘 것이지. 저 아저씨는...’
한편 글로둔 백작의 말을 들은 세리오트의 표정이 다시 처음과 같이 냉정하고도 무언가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귀하의 나라에 침입하고 힘없는 제국 민들을 대상으로 약탈을 한 것은 죄송하다.”
그리고 세리오트 왕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귀하의 의견을 들어줄 수 없다. 나는 제니오디 왕국의 왕녀. 그리고 발큐리아스 뱅가드의 기사단장으로서 우리 단원들을 구해야할 의무가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제니오디 왕국의 여왕폐하의 검이다. 검은 오로지 주인의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나 자신이 원치 않지만 여왕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그 일을 행한다.”
백은의 기사왕녀 세리오트는 그 말과 함께 등에 차고 있는 거대한 검을 뽑았다.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대검은 검신만 해도 1m는 족히 넘고 검신의 넓이도 사람 머리 크기만 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검이었다. 보통 여자의 힘으로 아니 힘 좋은 장사의 손으로도 들 수 없는 무게의 검을 세리오트가 쉽게 한 손으로 들어 올린 것을 보니 그 검의 정체는 신화에 전여신 아이누가 신화의 마수 루비아탄을 무찌르는데 사용했다는 제니오디 왕가에 내려오는 마법검 아이시클 소드가 분명했다. 그리고 세리오트는 그 대검을 로제스에게 겨누며 계속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당신들에게 죽을 위험에 처해있는 우리 단원들을 구하고, 더불어 오늘 일이 타국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 말은 곧 여기 있는 아르트제 제국의 모두를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로제스는 그 말을 듣고 마음에 든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같이 검을 뽑았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 재미있지. 어디한번 백은의 기사왕녀님의 검술실력 좀 보자고.”
로제스 역시 검의 길을 걷는 검사답게 세리오트의 도발에 응했다. 지금의 발큐리아스 기사단의 수는 알제르*아르티어스 기사단의 수보다 많았다. 당연히 발큐리아스 기사단은 전원이 전부 모였고 이쪽은 본국에서 소수만 파견 나왔기 때문에 그 수가 적다. 이대로 기사단 간의 전투가 벌어지면 수에 밀려 백전백패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지금은 후퇴하는 것이 답이다. 그리고 로제스는 자신이 나서 세리오트의 앞길을 막음으로서 그 퇴로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글로둔 백작님. 후퇴지휘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전원 서둘러서 후퇴한다. 전원 후퇴.”
글로둔 백작 입장에서는 이미 적들의 전술에 농락되어 패한 장수의 입장이고 로제스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입장임으로 순순히 로제스의 제안을 받아드렸다. 그래도 로제스를 방패막이 삼아 달아나는 것은 기사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 글로둔 백작은 명령을 내린 후에 로제스와 같이 남아 있으려 했다.
“로제스 저하. 저도 같이 남아 돕겠습니다.”
하지만 로제스는 싱긋이 웃었다.
“그러지 마세요. 당신들을 보내고 나 혼자 죽겠다는 것이 아니고 퇴로를 지키는 사람이 많으면 나중에 도망가기 힘들어서 그럽니다. 안 죽을 테니까 걱정 말고 이곳에서 벗어나세요.”
그 말에 글로둔 백작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로제스 황태자님. 무운을.”
로제스는 그렇게 기사단을 후퇴시키면서 다가오는 발큐리아스 기사단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로제스의 곁에는 에리나와 그래드, 딘저, 그리고 소수의 알제르 기사단만이 남아서 퇴로를 확보하기로 했다.
알제르 기사단은 비록 아르티어스 기사단처럼 무용이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대신 적의 공격을 피하고 도망가는 재주 하나는 알아주었다. 아르트제 제국의 기사단 중 가장 강력한 기사단은 단연 아르티어스 기사단이었지만 기동력에서는 알제르 기사단을 능가하는 기사단은 없었다.
다다다다!!
먼저 발큐리아스 기사단의 세 사람이 로제스에게 다가가 공격을 가했다.
“건방진 제국의 황자놈. 각오!”
채챙~~
그러자 로제스는 가볍게 검을 받아 넘기고는 한명을 그대로 종아리를 걷어 차 넘어뜨리고 다른 한명은 검을 들어 막는 동시에 주먹을 복부에 내질러 날려버렸으며, 그 동작을 이어 검의 옆면을 마치 야구방망이 삼아 나머지 한명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이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순식간에 진행되자 발큐리아스의 세 기사는 그야말로 한 동작으로 쓰러졌다.
털썩~
“이, 이럴 수가...”
“이렇게나 허무하게...”
방금 전의 세 기사는 발큐리아스 분대 내에서도 2~3위 정도의 실력을 갖춘 베테랑 기사였는데 그런 베테랑 기사를 죽이지도 않고 순식간에 때려눕힌 것이다. 쓰러진 기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로제스의 공격을 받아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자, 빨리빨리 덤비라고 언니들. 어디 그 잘난 발큐리아스 기사단의 무용을 보여 달라고.”
로제스는 밑에 쓰러진 발큐리아스 기사단을 신경 쓰지 않고 손짓을 하며 말하면서 공격 태세를 갖추는 300명에 달하는 발큐리아스 기사단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것은 마치 굴러오는 마차바퀴에 맞서는 사마귀와 같은 당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발큐리아스 기사단들은 방금 전의 로제스의 검술실력에 기세가 눌려 섣불리 진격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를 틈타 아르티어스 기사단은 서둘러서 호수를 벗어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르티어스 기사단을 놓쳐 이 일이 밖으로 새 나갈 것임을 깨달은 세리오트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로제스를 상대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당신의 상대는 나 인 것 같군. 로제스 황태자.”
그러자 로제스는 상큼하게 마성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세리오트 누나. 빨리 나와 한번 겨뤄보자고. 헤헤.”
로제스가 세리오트를 누나라고 부르면서 장난스럽고도 천박하게 말했지만 세리오트는 묵묵히 그 말을 받아드리며 발큐리아스 기사단에게 명령했다.
“황태자는 내가 막을 테니 전 병력은 아르트제의 기사단을 추격한다!”
“알겠습니다!”
이 말에 모든 발큐리아스 기사단이 말 위에 오르며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아르트제의 기사단을 추격하려 했다.
“그걸 우리가 넋 놓고 보고 있을 소냐!”
“우리들을 잊으면 섭섭하지 언니들.”
그때 그래드와 딘저, 그리고 알제르 기사단이 나서서 그녀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딱 봐도 다수 대 소수의 상황이라 불리하기 그지없는데도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그녀들의 추격 길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들은 뭐라도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지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당당했다. 그리고 그 믿는 구석이 무엇인지는 에리나를 통해 금방 들어났다.
“에리나 왕녀님. 시작해 주십시오.”
“알겠다고! 타올라라! 파이어!”
그래드의 말에 에리나가 대답하며 전번에 로제스와의 대결에 썼던 화염구 세례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 대상은 발큐리아스 기사단이 아니라 바로 얼어붙은 호수 바닥이었다.
펑~펑~펑~
에리나의 화염구에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차가운 호수 물을 들어냈다. 이에 알제르 기사단은 2인 1조로 행동하면서 구멍 난 호수바닥을 이용하여 발큐리아스 기사단을 견제하였다. 발큐리아스 기사단은 비록 말을 타고 있었지만 기마실력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기에 잘못 헛딛으면 차가운 호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자고 말에서 내려 싸우자니 도망간 아르트제 기사들을 쫓기 위해 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들로선 도저히 호수를 건널 방법이 보이지를 않았다.
“제길, 저들 중에 마법사가 있었을 줄이야.”
또한 에리나가 호수 바닥에 적절히 구멍을 내고나서 본격적으로 견제공격에 들어가자 추격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한동안 알제르 기사단과 발큐리아스 기사단간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드디어 로제스와 세리오트간의 전투가 시작됐다.
“타앗!”
먼저 선공한 것은 세리오트였다. 세리오트는 거대한 대검을 마치 젓가락 휘두르듯 한 손으로 내려찍기를 가했다.
쿠웅~
세리오트의 마법검 아이시클 소드가 호수바닥과 닺으면서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간발의 차이로 황급히 몸을 굴려 공격을 피한 로제스가 말했다.
“휴우. 설마 했는데 저 검은 역시 마법검 이었나? 방심하다 골로 갈 뻔했네.”
세리오트의 마법검 아이시클 소드는 주인을 선택하는 마법검인 모양이었다. 저런 마법검은 주인 이외의 자에게는 손잡이를 잡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반대로 주인에게는 무게에 대한 딜레이를 받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때문에 무게가 저렇게 무거운데도 세리오트가 여자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한손으로 저 대검을 가볍게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차 세리오트의 검격이 이어졌다.
부웅~ 부웅~
육중한 대검이 이리저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쏟아졌지만, 로제스는 다람쥐 마냥 미꾸라지처럼 피하기도 하고 공중제비도 넘으면서 마치 서커스의 곡예사같이 재주 좋게 공격을 피했다.
로제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르트제 기사단이 후퇴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고, 덤으로 세리오트의 검술실력을 되도록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때문에 로제스는 힘을 아끼면서 진심으로 세리오트를 상대하지 않고 잔재주만으로 세리오트의 공격을 피하는데 집중했다.
‘확실히 대단한 실력이군. 마법검 하나만 믿고 기사놀이를 하며 설치는 왕녀님인 줄 알았는데, 이 검술실력은 진짜다.’
세리오트의 날카로운 검격이 수많은 세월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 진 것을 느낀 로제스는 점점 세리오트에게 감탄했다. 그리고 동시에 세리오트에 대한 욕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름다운 외모에 냉정한 성격. 기사도를 숭배하는 모습과 뛰어난 검술실력. 그 밖의 세리오트의 매력이 로제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로제스에게 세리오트를 노예 메이드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심어줬다.
‘대단해. 대단하다. 기사왕녀 세리오트. 너무나 가지고 싶다. 내 것으로 하고 싶다.’
로제스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세리오트의 공격을 피했다.
어느 덧, 시간이 흘러 아르트제의 기사들이 무사히 후퇴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로제스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좋았어! 모두들 이제 우리도 도망이다! 모두들 후퇴!”
그 말에 알제르 기사단은 일제히 부리나케 호수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동시에 에리나가 얼어붙은 호수바닥에 손을 집고 주문을 외웠다.
“내 눈앞의 적을 멸살하라. 플레임 필드!”
쿠구궁!!!
그러자 드문드문 에리나의 마법으로 구멍이 생긴 호수바닥이 이제는 완전히 녹으면서 박살이 나 커다란 호수가 되었다. 발큐리아스 기사단과 달아난 알제르 기사단 사이에 건너기 힘든 커다란 호수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발큐리아스 기사단이 있는 곳에는 아직 로제스 황태자가 남아있다.
“하지만 아직 황태자가 남았다! 붙잡아!”
“흐아아아아!!”
발큐리아스 기사단은 알제르 기사단마저 놓치자 크게 분노하며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로제스에게 달려들었다. 적어도 로제스 황태자만이라도 생포하면 협상의 여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본 로제스는 웃으며 말했다.
“이런이런. 이놈의 인기는 이 북쪽 땅에서도 알아주는구먼. 저런 예쁜 언니들이 나를 보고 이리도 환호하며 달려들다니.”
그리고 슬슬 도망 갈 준비를 하면서 로제스는 세리오트에게 말했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군. 세리오트 누나. 누나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누나라고 불러도 되지? 다음에 다시 놀아보자고. 하하하.”
“기다려라!”
세리오트도 로제스를 사로잡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로제스는 녹아내린 차가운 호수로 몸을 던진 후였다. 아무런 장비 없이 그저 무방비하게 몸을 던진 로제스를 보고 세리오트와 발큐리아스 기사단은 경악했지만 그때 호수 건너편에 있던 에리나가 주문을 외웠다.
“적을 꿰뚫어라! 아이스 스피어!”
그러자 두꺼운 얼음의 창들이 생성되면서 로제스가 빠질 호수의 바로 밑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촌장에게 이곳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음으로서 사전에 이런 방식으로 도주하기로 미리 에리나와 약속을 한 것이다. 마치 나룻배가 표류하듯 둥실 떠 있는 얼음의 창들을 로제스는 균형한번 안 잃고 하나 둘씩 디뎌가며 알제르 기사단이 있는 호수건너편까지 도착했다.
“자, 그럼 다음 이 시간에 계속! 하하하!”
“!!!”
로제스가 세리오트와 발큐리아스 기사단을 놀리며 그렇게 떠나가자 다들 분한 듯 땅을 차고 묵묵히 그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야말로 세리오트와 발큐리아스 기사단은 닭 쫓던 개꼴이 되어 로제스들이 달아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발큐리아스 기사단의 추격을 따돌리고 돌아온 로제스는 아까 전에 구호활동을 해 준 마을 쪽으로 움직였다. 알제르 기사단의 캠프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너는 언제 봐도 무모한 행동만 한다니까. 짜식.”
딘저가 로제스가 타고 있는 말에 옆으로 붙으며 말을 걸었다.
“그러게 말이다. 너의 무용이 대단하기에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겠지만 조금은 우리의 기분도 생각해다오.”
“맞아. 나는 정말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어.”
그러자 그래드도 로제스의 다른 쪽 옆에 붙으며 딘저의 말을 거들었고 에리나도 한 말했다. 기본적으로 지휘관이 할 일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선두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뒤에서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로제스는 한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면서도 아까전과 같이 툭 하면 앞으로 나서서 적들을 상대하곤 했다. 장수로서는 유능할지는 몰라도 지휘관으로서는 점수를 낮게 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로제스가 머리가 전술전략을 펼치는데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피를 이어 받아 무술실력이 뛰어나듯이, 천재전략가였던 아버지의 피도 이어 받았기에 잔머리 하나는 기발했다. 다만 로제스의 성격상 뒤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성미에 안 맞을 뿐인 것이다.
덕분에 로제스가 전투에 선두로 나설 경우 항상 알제르 기사단의 맏형격인 철두철미 그래드가 전투의 지휘를 어쩔 수 없이 도맡았다.
“하지만 방금 같은 경우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세리오트라는 그 예쁜 누나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고 그 누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나 뿐 이었을걸?”
그렇게 로제스가 변명을 하자 순간 다들 숙연해지며 무언의 긍정을 표시했다. 방금 전 보았던 세리오트의 무시무시한 실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로제스의 말 대로 백은의 왕녀기사 세리오트는 생각보다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세리오트를 정면에서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로제스 뿐이었고. 잘 쳐줘야 황금의 마법왕녀 에리나 정도가 간신히 견제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만 앞에 나서서 녀석들을 막은 게 아니라 너희들도 도와줬잖아. 그것에 대해서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고. 너희들 때문에 나는 뒤를 걱정 안하니까.”
“짜식아. 대장이 앞서 나가는 데 쫄다구가 따라가야 하는 건 당연하지.”
“하하하.”
로제스의 말에 딘저가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그 모습에 우스꽝스러웠는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오늘은 다들 작전대로 잘 해주었어. 내일 있을 전투도 잘 해 달라고.”
* * *
로제스와 알제르 기사단이 마을에 있는 캠프에 도착하니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로제스는 에리나와 쿠테일 그리고 그 밖의 알제르 기사단의 간부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간단한 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자 로제스는 내일 있을 전투에 대비하여 알제르 기사단에게 휴식을 명했다. 먼저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마친 로제스는 곁에 있던 마을 촌장에게 말했다.
“촌장님. 혹시 마을 안에 마구간이 있나요?”
“예예. 마을입구의 외각에 마구간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마적들이 전부 말들을 다 쓸어가 버리는 바람에 텅 비어있지요.”
그러자 로제스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 됐네요. 그러면 오늘 하루만 그 마구간을 빌려 주시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동안만 마을 사람들이 마구간 근처에 오지 못하게도 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사님이 원하신다면 백번 천 번이라도 해 드려야지요. 제가 마을사람들에게도 언질을 놓겠습니다.”
촌장은 아직도 로제스의 정체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황태자인 줄도 모르고 그저 높은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말했다. 로제스의 태도가 워낙에 털털해서 설마 황태자일 줄이야 하고 생각하진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옆에 있던 쿠테일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로제스가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바로 눈치 채고 농염하고 웃으면서 요염하게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이어서 로제스는 그래드와 딘저를 불러서 알제르 기사단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뭐?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서 오늘의 공중화장실을 하자고?”
“그래, 딱히 위로를 주기 위하기보다는 우선 내일 있을 전투에 필요하니까 그런 거야. 그러니까 오늘 당번만 돌리지 말고 알제르 기사단 전 단원들을 돌리라고. 왜. 싫어?”
로제스가 능글맞게 웃자 딘저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아... 아니아니! 미쳤냐. 남자인 내가 싫다고 하면 백프로 미친 거지. 나하고 뭐 알제르 기사단이야 좋지만 쿠테일님이...”
딘저는 그렇게 말하면서 쿠테일을 슬쩍 쳐다보며 눈치를 봤지만 쿠테일은 그저 쿡쿡 웃으며 말했다.
“걱정 하지 마. 평소 하루에 대여섯 명에서 즐겼지만 사실 난 하루 만에 백 명이든 천명이든 가능하니까.”
그 말에 딘저는 얼굴이 확 밝아지면서 좋아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 그러면 지금 당장 애들한테 전하겠습니다.”
그때 로제스는 걸음을 치려는 딘저의 뒤에 그렇게 말했다.
“아. 그전에 오늘 당번인 녀석들이 먼저 하도록 하고 전부 순번이 돌아가면 다시 오늘 당번인 녀석들이 한 번 더 하게 해줘. 오늘 전부 돌리면 당번인 녀석들이 불만일 것 아냐.”
“오우! 알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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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신이 없으니 하나 더 갑니다. 텐션도 올랐고 하니...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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