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남들보다 부유한 집안환경 덕분에 내가 귀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실제로도 아버지는 평민임에도 커다란 상단을 운영하시며, 귀족 부럽지 않은 큰 집과 함께 많은 하인, 그리고 호위기사들을 대동하고 다니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무슨 장난을 쳐도 돈으로 무마해주시는 아버지 덕분에 정말로 영지 내에서는 손을 쓸 수 없는 사고뭉치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었다. 많은 아이를 울렸고, 그 대상에는 귀족 가의 여식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 아버지에게도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나의 건강이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3살 때쯤 알 수 없는 병이 나타났다고 하셨다. 왕국의 내로라하는 의사들과 신관들을 불러보았지만, 그 누구도 명확하게 치료를 장담하지 못했다. 병의 증상은 지속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며 그것을 겪는 나로서는 항상 몸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발작이 끝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하게 생활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많은 걱정을 하시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치료는 포기하기로 하셨다. 대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신전에 많은 돈을 기부하여, 집안에 신관을 상주시키는 것으로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이 깨지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날이 오게 되었다. 아마 비가 오던 날이었을 것이다. 며칠간 계속된 나의 부탁으로 수도로 향하는 상단에 동참하게 되었고, 날이 저물어 산속에서 야영하게 되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공터 한가운데에 불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나는 마차 안에서 잠이 들었고, 점점 커지는 빗방울 소리에 한밤중에 잠이 깨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하으윽…! 그, 그만…."
처음에는 잠결에 잘못들은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를 잘못들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마차 안에 있던 사람은 자신과 아버지밖에 없었는데…,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여인의 목소리였다. 당시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순간 닥쳐온 무서움에 온몸이 쭈뼛 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살며시 소리가 들리는 진원지로 눈을 옮겼다. 다행히 그곳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다만 그의 양손에 발가벗은 여인의 허리가 잡혀있다는 것이 아까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조용히 하지 못해! 네년 때문에 내 사랑스러운 아들이 깨기라도 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알 텐데?"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호통이 들려왔다. 아버지의 얼굴은 마치 악귀의 형상을 그대로 본뜻 것처럼 탐욕과 무언가를 향한 욕망으로 가득 차 보였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여인의 목소리로 몰려온 공포감보다 더 큰 두려움의 파도가 온몸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엄습해온 것이 있다면, 여인이 누구냐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렇게 다시 질끈 감았던 눈을 여인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고, 사건의 발단이 된 장면과 말을 보고, 듣게 되었다.
"후후…. 이번 사냥은 정말로 순조로웠어, 누가 감히 이런 곳에 엘프 마을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겠어, 안 그래?"
"하아…. 하아…."
여인은 무엇이 그렇게 숨이 가쁜 것인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다르게 해석하신 것 것 같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하란 말이야! 이 노예년아!"
"꺄-악!"
아버지는 여인을 강하게 밀어내셨고, 여인은 그 충격으로 마차의 벽에 강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아, 그렇지. 노예라면 노예표식이 있어야 하는 데 그게 없으니까 네년이 이렇게 건방진 것인가 보군.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아버지는 조금 전까지 보였던 분노를 일순간에 잠재우신 채, 아까 보였던 악귀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잠시 마차 밖으로 나가셨다. 쾅하고 닫힌 문소리와 함께 여인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왔고, 나는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지만. 공포심에 굳어버린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아버지께서는 무언가 치이익- 하는 소리가 들리는 막대기를 들고 마차 안으로 다시 들어오셨다.
"자, 말해봐라. 찍는 곳은 네가 원하는 곳에 해주도록하지."
그 말에 실눈을 뜬 나에게도 보일정도로 여인은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것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행동이었다.
"싫다고 한다면…. 여기다 해주도록 하지, 제일 잘 보이도록 말이지 크크.."
그리고 몇 초 후,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물론 그 소리는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얼마 후에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그 비명은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너무나도 끔찍한 상황. 그리고 처음 보았던 아버지의 무서움. 15살이라는 나이 동안 아버지께서 많은 돈을 들여 평민은 받지 못할 여러 교육을 받았던 나였기에, 아버지의 행동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예임을 알려주는 인장을 찍어주는 일. 역사학을 배울 때 치욕적인 흔적이라고 배웠던 바로 그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인장이 찍혀진 상태에서 거래된다. 그런데 아버지처럼 노예의 인장을 직접 찍는다면 남은 것은 바로….
[노예상인]
그것이 아버지의 직업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 어떻게 아버지가 평민으로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가 그 노예상인이었다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분노 또한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누려온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버린 누군가의 비명, 그리고 슬픔과 맞바꾼 것이었다는 사실에,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음껏 즐긴 스스로에게도 극심한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당연히 인장을 찍던 아버지는 당혹감에 휩싸인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애써 그 눈빛을 외면한 채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딱히 목적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극심한 혼란과 분노때문에 일단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떨어져 내리는 비는 그 분노를 가라앉혀주듯 온몸을 차갑게 적셔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더 크게 느끼기 위해 더욱더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알지 못했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은 수도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많은 산맥 중….
"으아악-!"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을.
* * *
"으으…."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파져 왔지만, 그래도 정신이 깨어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지 않았던 것인지 아직도 차가운 빗방울이 몸 이곳저곳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만큼은 뜰 수가 없었다.
"뭐, 뭐지…."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눈을 뜨려 하면 강렬하게 파고들어 오는 빛줄기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생각도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래가지 않았다.
[인간인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울려 퍼졌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을 걸어왔다.
[소년이여,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부탁이다.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겠다. 부를 원한다면 막대한 부를 안겨줄 것이고, 강함을 원한다면 모두 들어주겠다. 그러니 제발 부탁을 들어다오.]
"무, 무엇을 들어 드리면 되는 거에요…?"
물론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부탁에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딱히 그의 목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차 안에서 보았던 여인의 슬픔 울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 자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컸다.
[2년. 단 2년만 너의 몸을 빌려주기를 바란다. 2년이 지나면 그 어떠한 상처 없이 몸을 돌려주겠다.]
"제... 몸을요?"
[그렇다. 무리한 부탁이고, 갑작스럽다는 것 또한 잘 안다.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다. 그러니 제발 외면하지 말아다오. 내 간절한 부탁을 들어다오….]
그의 말대로였다. 갑작스럽고 무리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아, 알겠어요."
들어주고 싶었다. 내 몸을 더럽게 옭아매는 이 죄책감을 빗물과 함께 씻어버리고 싶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나 골드드래곤 하르마니안의 이름을 걸고 절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온몸이 타들어 갈 것만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고, 끝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알 수 없는 목소리의 "고맙다"는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서 메아리쳤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3살 때쯤 알 수 없는 병이 나타났다고 하셨다. 왕국의 내로라하는 의사들과 신관들을 불러보았지만, 그 누구도 명확하게 치료를 장담하지 못했다. 병의 증상은 지속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며 그것을 겪는 나로서는 항상 몸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발작이 끝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하게 생활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많은 걱정을 하시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치료는 포기하기로 하셨다. 대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신전에 많은 돈을 기부하여, 집안에 신관을 상주시키는 것으로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이 깨지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날이 오게 되었다. 아마 비가 오던 날이었을 것이다. 며칠간 계속된 나의 부탁으로 수도로 향하는 상단에 동참하게 되었고, 날이 저물어 산속에서 야영하게 되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공터 한가운데에 불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나는 마차 안에서 잠이 들었고, 점점 커지는 빗방울 소리에 한밤중에 잠이 깨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하으윽…! 그, 그만…."
처음에는 잠결에 잘못들은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를 잘못들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마차 안에 있던 사람은 자신과 아버지밖에 없었는데…,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여인의 목소리였다. 당시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순간 닥쳐온 무서움에 온몸이 쭈뼛 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살며시 소리가 들리는 진원지로 눈을 옮겼다. 다행히 그곳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다만 그의 양손에 발가벗은 여인의 허리가 잡혀있다는 것이 아까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조용히 하지 못해! 네년 때문에 내 사랑스러운 아들이 깨기라도 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알 텐데?"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호통이 들려왔다. 아버지의 얼굴은 마치 악귀의 형상을 그대로 본뜻 것처럼 탐욕과 무언가를 향한 욕망으로 가득 차 보였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여인의 목소리로 몰려온 공포감보다 더 큰 두려움의 파도가 온몸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엄습해온 것이 있다면, 여인이 누구냐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렇게 다시 질끈 감았던 눈을 여인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고, 사건의 발단이 된 장면과 말을 보고, 듣게 되었다.
"후후…. 이번 사냥은 정말로 순조로웠어, 누가 감히 이런 곳에 엘프 마을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겠어, 안 그래?"
"하아…. 하아…."
여인은 무엇이 그렇게 숨이 가쁜 것인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다르게 해석하신 것 것 같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하란 말이야! 이 노예년아!"
"꺄-악!"
아버지는 여인을 강하게 밀어내셨고, 여인은 그 충격으로 마차의 벽에 강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아, 그렇지. 노예라면 노예표식이 있어야 하는 데 그게 없으니까 네년이 이렇게 건방진 것인가 보군.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아버지는 조금 전까지 보였던 분노를 일순간에 잠재우신 채, 아까 보였던 악귀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잠시 마차 밖으로 나가셨다. 쾅하고 닫힌 문소리와 함께 여인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왔고, 나는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지만. 공포심에 굳어버린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아버지께서는 무언가 치이익- 하는 소리가 들리는 막대기를 들고 마차 안으로 다시 들어오셨다.
"자, 말해봐라. 찍는 곳은 네가 원하는 곳에 해주도록하지."
그 말에 실눈을 뜬 나에게도 보일정도로 여인은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것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행동이었다.
"싫다고 한다면…. 여기다 해주도록 하지, 제일 잘 보이도록 말이지 크크.."
그리고 몇 초 후,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물론 그 소리는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얼마 후에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그 비명은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너무나도 끔찍한 상황. 그리고 처음 보았던 아버지의 무서움. 15살이라는 나이 동안 아버지께서 많은 돈을 들여 평민은 받지 못할 여러 교육을 받았던 나였기에, 아버지의 행동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예임을 알려주는 인장을 찍어주는 일. 역사학을 배울 때 치욕적인 흔적이라고 배웠던 바로 그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인장이 찍혀진 상태에서 거래된다. 그런데 아버지처럼 노예의 인장을 직접 찍는다면 남은 것은 바로….
[노예상인]
그것이 아버지의 직업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 어떻게 아버지가 평민으로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가 그 노예상인이었다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분노 또한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누려온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버린 누군가의 비명, 그리고 슬픔과 맞바꾼 것이었다는 사실에,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음껏 즐긴 스스로에게도 극심한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당연히 인장을 찍던 아버지는 당혹감에 휩싸인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애써 그 눈빛을 외면한 채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딱히 목적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극심한 혼란과 분노때문에 일단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떨어져 내리는 비는 그 분노를 가라앉혀주듯 온몸을 차갑게 적셔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더 크게 느끼기 위해 더욱더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알지 못했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은 수도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많은 산맥 중….
"으아악-!"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을.
* * *
"으으…."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파져 왔지만, 그래도 정신이 깨어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지 않았던 것인지 아직도 차가운 빗방울이 몸 이곳저곳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만큼은 뜰 수가 없었다.
"뭐, 뭐지…."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눈을 뜨려 하면 강렬하게 파고들어 오는 빛줄기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생각도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래가지 않았다.
[인간인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울려 퍼졌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을 걸어왔다.
[소년이여,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부탁이다.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겠다. 부를 원한다면 막대한 부를 안겨줄 것이고, 강함을 원한다면 모두 들어주겠다. 그러니 제발 부탁을 들어다오.]
"무, 무엇을 들어 드리면 되는 거에요…?"
물론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부탁에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딱히 그의 목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차 안에서 보았던 여인의 슬픔 울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 자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컸다.
[2년. 단 2년만 너의 몸을 빌려주기를 바란다. 2년이 지나면 그 어떠한 상처 없이 몸을 돌려주겠다.]
"제... 몸을요?"
[그렇다. 무리한 부탁이고, 갑작스럽다는 것 또한 잘 안다.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다. 그러니 제발 외면하지 말아다오. 내 간절한 부탁을 들어다오….]
그의 말대로였다. 갑작스럽고 무리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아, 알겠어요."
들어주고 싶었다. 내 몸을 더럽게 옭아매는 이 죄책감을 빗물과 함께 씻어버리고 싶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나 골드드래곤 하르마니안의 이름을 걸고 절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온몸이 타들어 갈 것만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고, 끝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알 수 없는 목소리의 "고맙다"는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서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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