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sen of Mar-tul V2
1장 임프로브드 게이트 Improved Gate
story 01 마법사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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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현은 정신을 수습하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창문하나 없어 어두워야 할 방안이었지만 여기저기 밝혀져 있는 촛불과 무엇보다도 천장 한가운데에 위치한 낡은 샹들리에에서 강하진 않지만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온다. 마치 옛날의 서양식 서재같은 분위기의 방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낡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든다.
벽면 전체에 빽빽이 책이 꽂혀있는 책장, 먼지가 잔뜩 낀 책상과 그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두꺼운 책들, 북스탠드 BookStand 옆에는 붉고 커다란 생물체에서 뽑아낸 듯한 깃털로 만든 펜촉들이 여러 개 잉크범벅이 되어 굴러다닌다.
영화에나 나올 법 한 양피지 재질의 스크롤 Scroll 등등이 굴러다니는 바닥에도 역시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집기들이 거의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덮고 있다. 한 쪽 벽면의 선반에는 기괴한 동물의 신체부위라던가 알 수 없는 덩어리, 뼈 등으로 채워진 유리병들이 가득 진열되어있다. 그리고 그 방 한 켠에 놓여있던 낡은 나무재질의 침대에서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살피던 현은 케케묵은 종이냄새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한다.
"읭..."
역시 상당히 낡은 듯 했지만 깨끗한 하얀 시트와 이불에 쌓여있던 그는 우선 다리사이의 불쾌한 끈적임에 무언가 정액을 닦아 낼 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침대 맡에는 자신이 입던 티셔츠와 바지가 반듯하게 개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저건 안되겠고..."
다시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조금 떨어진 책상 위 한쪽에 놓여있는 털가죽 재질의 무언가를 보고는 몸을 일으켜 다가간다. 그리고 곧장 집어들어 침대로 돌아와서는 몸을 닦아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흩뿌려져 달라붙어있는 끈끈한 정액은 털 속에도 고여있어 여간 찝찝한게 아니었다.
"...으잌"
인상을 찌푸리며 대충 닦아냈다싶자, 닦던 걸레를 대충 책상위에 던져놓고는 침대맡의 옷을 집어들어 입기 시작한다.
"저벅..저벅"
그때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문 밖에서 발소리가 명확하게 울리며 들려온다. 아마 전체적으로 석조 구조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이 대충 몸을 닦아내고 다시 이불속에 파묻히자 느리게 문이 열리고는 초췌한 안색의 한 노인이 얼굴을 내민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 고집스럽고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피곤한 기색을 한 달라티룬이다.
"할아버지..?"
"....."
아무말 없이 근처에 굴러다니는 의자하나를 세워들고는 마치 애써 견디고 있던 신체가 무너지듯이 앉는다.
"휴우...."
"?"
무언가 무겁고 침울한 방안의 공기에 짓눌려 달라티룬의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현 역시도 몸을 일으켜 침대에 똑바로 앉는다.
"네가 살던 곳에서.. 난 못난 할애비였지?"
"...예?"
달라도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마치 다른사람처럼...
들어오자마자 갑작스러운 질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멍청하게 반문하는 마현.
사실 ‘진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그다지 좋은 기억은 나질 않았다.
시골 무지랭이 노인이었던 그는 자신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며 가족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그저 한낮 촌로村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만난 이 노인은 워낙 당황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겉모습만 같을 뿐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하다. 아니, 겉모습도 찬찬히 뜯어보면 마치 ‘혼혈아’같은 이질적 생김새가 느껴진다. 한국인이나 동양인 특유의 느낌보다는 약간 서양인에 가까운 외국인같은 느낌.
아무튼 그렇기에 위화감은 여전했고 쉽사리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는 것이리라..
지그시 현을 바라보던 달라티룬은 힘겹게 입을 떼고는 말한다.
"클론 Clone이라는 마법이 있단다. 말그대로 자신의 복제를 만들어내는게지... 나와 같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너의 세상에서 분신의 존재는 적응이 잘 안되었던 것 같구나."
"...에..?"
기괴한 악마형상의 괴물에, 이상한 여자들과의 섹스에, 다른세상으로의 이동.. 뇌가 상식적으로 처리할 만한 상황을 넘어서고 또다시 자신이 인식했던 현실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듣자, 마현은 기껏해야 바람빠진듯 한 대사를 반복적으로 내뱉을 수 밖에 없다. 이 늙은이는 대체 뭐라고 떠드는 걸까? 자신은 티비에서 한참 떠들던 생명공학 관련의 실험체였던 것일까?
".... 전 복제인간의 자손인가요?"
"...아니. 그런게 아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그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단지 그건 너의 보호자 역할을 했던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라는거지... "
"하..."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기뻐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도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노인의 손자가 맞기는 한 것 같지만.. 단순한 의문이 생겨 그가 되묻는다.
"...왜 절 데려왔나요? 아니, 애초에 왜 전 ‘이쪽’에 있지 않았던거죠?"
"...."
잠시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지그시 자신을 쳐다보는 노인. 눈빛은 처음 봤을 때의 괴팍한 느낌은 없고 자애로운 느낌마저 들 정도로 차분하다.
"...넌 마지막 씨앗이다. 거목으로 성장 할 수 있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설명을 해보라구요.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서 무슨 이해가 되겠어요."
다소 답답한 마음에 짜증을 부리며 대답하는 현을 보며 달라티룬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마르-툴Mar-tul이라는 고대신이 있었단다. 우리 가문은 그에게 선택되었었지... 신에게 선택 된 자, 그러니까 초즌Chosen이란다.”
“예?”
“그러나 그건 축복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했어. 평범한 일반인이 갑자기 감당못할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되면 어찌 될거라 보느냐?”
“에.....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후훗...”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로 조심스레 예상을 해보자 달라티룬은 그를 바라보며 재차 푸근한 웃음을 짓는다.
“그래.. 큰 힘엔 큰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지..”
“아, 스파이더맨!”
“응?”
“아.. 아뇨.”
반사적으로 반갑게 맞장구치던 마현은 그의 심각한 분위기에 다소 경솔한 발언이었음을 감지하고는 딴청을 피운다.
“...그래서요?”
“수 많은 악당, 악마, 그리고 선한자들과도 싸우게 되는 숙명을 얻었단다.”
“우리...가문이요?”
“.....”
대답은 뒤로 한 채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이는 달라티룬. 다만 손길엔 씁쓸함이 묻어나왔고 마현은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초즌은... 한 명 뿐이었단다.”
“??”
“....너의 본질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네?”
“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어떤 역할을 요구해서일까? 네가 할 일은 무엇일까?”
“....데려온 사람이 알려줘야죠.”
다소 엉뚱한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마현은 미간을 슬쩍 찌푸린다.
“없다.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은.”
“??”
“그저, 살아남아서 네가 하고 싶은일을 하면 된단다.”
“....그게.. 절 데려온 이유에요?”
“마지막 씨앗은 종자가 좋아서 물과 양분만 충분하면 알아서 싹을 틔울테니까. 구태여 씨앗더러 어떤 행동을 요구할 필요는 없지.”
웃음을 지으며 연기를 내뿜는 달라티룬.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미안하구나. 너만은... 그저 아무 걱정없이 평범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에... ”
희망도 없는 밑바닥 인생을 살며 거의 자살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는 차마 꺼낼수가 없기에 마현은 그저 모호한 신음소리를 낸다.
"미안하구나.. 더 이상은 시간이 없어서 세세히 설명 해 줄 수가 없다. 뭐, 자세한 건 차차 클라나가 설명 해 줄테고..."
"그러니까.. 에? "
"너 하나만은 그저 조용한 삶을 영위하길 바랬는데... 미안하구나....“
재차 사과하는 달라티룬은 고개를 숙인채 손에 든 파이프를 바라본다.
“큰 위험이 닥치고 있고 네가 이 세계에 존재함으로 해서 그것을 막을수도 있다. 그렇기에 데려온 거라고 해두자."
"....."
“알아듣기 힘들고 혼란스러운 것도 알고있다.. 하지만 말이지.. 너의 본질에 가까워진거라고 할 수 있을게다. .. 내면의 소리를 잘 들어보면 될게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본질....”
현은 그 말을 두번째 듣는순간 등골을 타고 오싹하게 느껴진 불쾌감에 작게 진저리를 친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황망함, 의문을 젖혀두고 그 단어를 다시금 되뇌어본다.
-너의 그런면이 싫다구!
-날 사랑하긴 하는거야?
- 난 이 세계에 잘못 태어난 느낌이야....
예전 여자친구에게 들었던 말들, 침대에 누울때마다 되뇌었던 현실도피적 망상의 대사들..
만약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본질과 맞지 않아 일어난것들이라면..?
우울하고 재미없었던 학창시절, 변변치 못한 대학졸업, 취업난, 애인과 이별...
전체적으로 무엇하나 행복하지 않았던 그 빌어먹을 인생.
-본질-이라는 한마디가 떨어지자 마치 주마등처럼 마현은 스스로 큰 인생의 줄기를 더듬어본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넌 결실을 맺을 거목으로 자랄것이다."
당황해서인지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마현을 아랑곳 하지않고 노인은 말을 잇는다
.
"그리고... 초즌Chosen이란 것과 별개로 마치 티플링-Tiefling-이라던가 디사이플-disciple-처럼 우리 가문의 피 역시도 무언가가 섞여 들어가 있는 듯 하다. 마르-툴이외에도 마치 어떤 잊혀진 악신이라던가, 알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같지만... 그건 나로서도 알 수 없고.."
어느새 담배파이프를 털어버리며 내용물을 비워낸 달라티룬은 천천히 일어나 반대쪽 손으로는 알 수 없는 손동작을 천천히 이어가며 계속 말한다.
"이 할애비같은 경우에는 바테주-Baatezu-들에게 어떤 호감을 갖게하는 아우라-Aura-가 나타나는것 같고... 손녀인 클라나는 베제키라 Bezekira를 소환한 적이있지. 아마 너는... 타나"리-Tanar"ri-들과 연관된 어떤 능력이 있을 것 같구나."
타나‘리 라는 단어를 듣는순간 깨달았다.
꿈이 아니다. 아니, 방금 전 까지의 일은 꿈인 것 같지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실 그의 심각한 이야기도 꿈속에서 듣는듯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지만...
서큐버스가 자신과 그때 봤던 ‘그것들’을 가리켜 했던 말.
‘타나’리??‘
그리고 검붉은 빛의 기분 나쁜 스피어에 가슴을 꿰뚫리고... 서서히 의식이 멀어졌다는 것을 이제야 기억해 내고는 반사적으로 외친다.
"솔!!"
"?!"
다급하게 외치는 마현을 의외라는는 듯. 바라보는 달라티룬. 희미한 빛줄기를 뿌리며 허공에 그어지던 손동작도 잠시간 멈추고 그를 바라본다.
"꿈이 아니었어! 같이 있던 서큐버스-Succubus-는 어떻게 된 거죠? 그 뱀 괴물은..? 내 상처.."
어이없다는 듯 달라티룬이 대답했다.
"...섄딜라브리-Shendilavri-에 내가 도착했을 땐 너 혼자 널부러져 있었는데 무슨 소리냐? 광휘의 자매들의 노랫가락도 안 들릴 정도로 외진 말카나-트-Malchanau-te로 보내놨더니만... "
자신과 기스양키-Githyanki-와의 싸움의 충격파라던가 멀티버스의 고통으로 혼절한 줄로만 알았던 손자가 헛소리를 해대자, 의아한듯 달라티룬은 다시 말했다. 애초에 노파심으로 잠시 들렸던 어비스-Abyss-였지만 달라티룬의 예상대로 그것은 단순한 기우에 지나지 않았기에 현의 말에 무언가 있음을 직감한다.
"말카나-트는 섄딜라브리에 거주하는 타나"리 들의 유배지 같은 곳이다. 가끔 죽어가는 서큐버스 한 마리 정도야 볼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뱀 괴물이라... 마릴리쓰Marilith 라도 본 게냐?"
"아마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처음에 본건 수 천 마리의 괴물들이었다구요. 수 없이 많은 서큐버스가 갇힌 뼈다귀같은 감옥들을 호위하고 실어나르는...."
한가로이 담배 파이프를 빨아들이던 얼굴에 일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기우라 여겼건만... 어째서 멜켄세트 측도 움직이는건가...”
“아.. 진짜! 알아듣지 못할 말씀만 하지 말구요! 같이 있던 서큐버스는요!"
달라티룬이 손에 들고 있던 짤막한 완드 Wand 가 바람을 가르며 마현의 머리통에 작렬한다.
"딱!"
"아욱!"
"이녀석아! 에라나-루셀레Erana Rousselet가 통째로 타나"리 소굴이 되어버릴 판이다! 내가 본적도 없는 하급 타나"리 따위는 쳐들어올 타나"리 틈에 끼어있겠지!"
역시 같은 피가 맞는 것일까,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잠시 놀랐던 달라티룬은 답답하다는 듯 마주 짜증을 부린다.
“그래, 내가 준 ‘검은 돌’은 어쨌느냐??”
“아....”
그제서야 퍼뜩 생각난 ‘암흑’으로 감싸인 돌멩이.
‘어떻게 되었더라...’
서큐버스와 "트러블‘이 일어나면서 빼앗은 칼, 그 돌멩이 전부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 기억났다.
‘그... 칼이 그 돌처럼 검게 변했던 건가...’
몽롱한 정신상태에서의 애매한 기억. 꿈과 과거라는 둘의 경계점에 서 있는 듯 어느것이 자신이 경험한 ‘사실’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모...모르겠어요 정신이 반쯤나가서..”
“그건 매니스트락세Manistrakse라는 차원간의 틈새를 메꿔주고, 만일 강력한 촉매제가 있다면 ‘게이트’라는 것들 자체적으로 생성해내는 돌의 일부란다... 마이너 매니스트락세 Minor Manistrakse라고 나 할까... 여하튼... 차원간 이동의 차지Charge는 소모되어버렸지만, 그건 그것 나름의 가치가 상당한 물건인데.. 뭐 별수없지.”
입맛이 쓴 듯 눈살을 찌푸리며 아쉬워하는 노인을 앞에 두고 마현은 딱히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질 않는다.
"클라나~! 밖에 있는거 다 안다! 들어오너라."
"..."
그러자 간편한 로브차림을 한 숏컷의 빨간머리 여성이 어색한 듯 한 표정으로 방 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마도 뛰쳐나가 달라티룬을 부르고선 문 밖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리라.. 닮은 구석이라고는 그다지 없어보였지만 마현이 다시 보니 굉장한 미인이라 생각된다. 달라티룬과 마찬가지로 서양인이나 혼혈인 듯한 약간의 위화감.
조금 전의 충격적인 장면을 봐서인지 마현 자신에게는 그다지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진 않고있기에 다소 찔끔한다.
"배다르긴 하지만 네 여동생이다."
"....."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단지 대답 할 수 없던 것은 뭐든 제멋대로 처리하던 달라티룬의 태도와 클라나라고 불린 여동생의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매에 잠시 멍했기 때문이다.
"설령 그 뱀 괴물이 제 여동생이라고 해도 안놀라워요."
콧방귀를 뀌는 현의 태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금 노인은 손가락에서 엷은 빛과 함께 무언가의 주문을 중얼 거리는 듯 하다. 들어와서 멀뚱히 서 있던 클라나가 깜짝 놀라듯이 묻는다.
"다시 시길로 가실건가요? 더 이상은 무리라구요!"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나지막한 진동음과 함께 달라티룬이 가리킨 방 한켠에 공간이 찢어지고 짙은 어둠의 틈새가 보인다. 그는 천천히 다가서며 어둠속에 손목을 천천히 담근다. 마현의 착각일까, 노인의 얼굴이 더욱 핼쓱해지고 눈동자는 빛을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호문클루스Homunculus라고 해도... 내 증손녀나 마찬가지겠구나.. 어쩌면 그 아이가 메니스트락세-Manistrakse-와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크게 희망을 가지는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꼭 태어나게 만들려무나.."
"알았어요."
"....."
황당해 있던 현은 마치 작별인사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에 노인이 또다시 어디로 먼 길을 떠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다시 만났을 때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초라한 뒷모습만이 비칠 뿐이다.
"너희 둘 다.. 내겐 소중한 아이들이다..."
"...."
클라나의 눈시울이 붉어진 듯 했지만 표정은 애써 감정의 기복을 억누르려는 듯 하다. 서서히 또다른 플레인-Plane-으로 사라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그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도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맞은편의 허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
클라나와 단 둘이 가만히 있자니 오히려 달라티룬과 대화 할 때 보다 더욱 무거워진 방안의 공기를 느낌다. 그는 진땀을 흘리며 목소리를 짜내어 말을 붙여본다.
".....저기... 클라나.. 라고 했나?"
"....."
그러나 그녀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대답 않는다. 상황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시점에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듯 한 감각에 현은 말할 수 없이 불편하기만 하다. 앉아서 올려다 봄에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시계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로브차림에 허리어림에는 작은 주머니들이 부착된 벨트를 둘러 약간의 굴곡이 드러나는 몸매가 의외로 상당한 수준이라는 걸 깨닫는다. 커다란 가슴에 상당히 가느다란 허리... 불편한 와중에 슬그머니 성욕이 고개를 드는 듯 하다.
"..클라나?"
순간 그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본다.
"....뭐! 이 변태같은 자식아! 다리사이에 그건 뭐야!!"
"윽..."
상냥하게 비위를 맞추며 불러주었다고 생각했지만.. 마현 다리사이의 그 물건은 이불속에서 우뚝 솟아 발기했음을 눈 앞의 여동생-이라 생각되는-여성에게 들켜버린다. 당황해서 허리를 빼고 앉으며 가리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너같은 자식이 무슨 오빠는, 무슨 도움이 될 녀석이라고!"
기분 나쁜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를 치며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마현은 잘록한 허리 아래의 걸을 때 마다 흔들거리는 엉덩이도 상당히 섹시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 쪽팔려.."
달라티룬은 한참 먼 길을 떠난 것 같은데, 한동안 얼굴을 봐야 할 남은 사람에게 상당히 안 좋은 첫인상을 심어준 듯 해 마현은 입맛이 쓰다. 하필이면...
"...."
낭패라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막막해진다.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온 노인은 다시 돌아가 버리고.. 이상한 건물에 여동생?과 둘 뿐인 듯 하다.
하릴없이 느릿느릿 침대에서 기어나오자 침대 아랫부분엔 갈색의 낡은 가죽부츠가 한 켤레 놓여있다. 흔히보던 합성 피혁은 아닌 것 같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듯 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알 수도 없었고, 굳이 관심이 가진 않았다. 여기저기 꿰멘자국이 미세하게 뜯겨있고, 관절부위의 주름 역시도 상당히 마모되어있었지만 제작했을 당시엔 상당한 고급품이리라 여겨진다.
"대충 사이즈가 맞네.."
그다지 기대않고 발을 집어넣었지만 허름하게 생긴 외양과 달리 발에 착 감기는 의외의 착용감에 그는 상당히 만족한다. 일어서서 정신을 차릴 때 눈에 들어왔던 책상에 다가가 책들을 훑어본다. 역시 상당히 낡아 보이는 책상이었지만 깔끔하며 튼튼해 보이는데다가 북스탠드를 비롯, 의외로 효율적인 디자인과 배치에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저기에 스크롤 등이 책 사이사이 끼워져 있던 것을 훑어보다가 맨 위의 두꺼운 스크롤을 아무 생각없이 집어들자, 뒷면의 짧은 털가죽이 만져진다.
"이런건 양피지로 만들지 않나"
무언가 짐승의 가죽 그 자체다. 푹신푹신한 후면 때문에 어떻게 안쪽에 글을 썼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것에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고 그저 내용을 바라본다.
"으익!"
손에 묻어나는 미끌거리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며 가죽을 내려놓자, 좀전에 자신의 정액을 닦아내버렸던 걸레대용이라는 것을 깨닫고 만다. 그리고는 손에 묻어나는 정액을 대충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재차 유심히 스크롤의 내용을 바라본다.
"에이.... 어라..? 내가 이동네 글자를 읽을 수 있었던가..?"
기이하게 생긴 룬 Rune 문자는 그저 그림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비쳐졌지만, 그 외에 일부 특별한 발음이나 쓰여있는 나머지 설명등은 캐스팅 Casting 시의 세세한 동작과 주문까지 모조리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손가락을 곧게 펴고는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캐스팅을 시작한다.
"매니.. 스트락..세? 좀전의...? 그리고 쿠..아니, 크라.쥬.. 뭐야 이게?"
"저벅 저벅 저벅..."
그러나 그 때 들리는 발소리에 멈추고 문가를 바라보자, 예의 빨간머리 아가씨가 재차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뭐하는거야! 그건 만지지마."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
"그래도 정신을 잃었다고 간호해주는 도중이었던 것 같은데.. 싸는 장면을 보여줬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마현은 책상에서 약간 떨어져 그녀가 걸어오는 것을 멀거니 바라본다. 금방 다시 들어오기는 싫었을테지만 무언가를 가지러 온 듯 자신을 지나쳐 안쪽으로 걸어간다. 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이상한 차림인 그를 흘끗 바라보지만 역시나 적개심 가득한 눈동자의 그녀는 여전히 화가 난 듯 보인다. 다가온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책상 위의 스크롤이나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마법 서적 등을 대충 정리해 차곡차곡 포개기 시작한다. 그러자 책이 두꺼워서인지 거의 갓난아기 키만한 책더미가 두 개나 쌓인다. 약간 당황한 표정의 그녀는 가느다란 양 팔로 전부를 집어들어 가져가려 하나 될 턱이 없다.
"....이익.."
바로 앞에서 보란듯이 낑낑대는 그녀를 보자, 현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 중 가벼워 보이는 책더미에서 몇 권을 집어들어 한쪽으로 전부 옮기고는 집어 들었다. 스크롤더미와 몇 권의 책들 밖에 남지 않자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남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멋대로 방을 나간다.
"어디로 가져가는거야?"
급히 뒤따르며 마현이 말을 붙여보았으나 역시나 찬바람 쌩쌩부는 태도에 헛수고라는 걸 깨닫는다. 현은 허리곡선에서 급격히 늘어나는 풍만한 엉덩이의 형태를 따라가며 복도로 들어섰다. 그래도 환심을 사야 할 것 같아 도왔지만 뒷모습을 보니 불손한 생각만 가득히 드는 것 같다.
눈앞은 어둑어둑한 석조벽이 길게 이어져 점차 내리막을 형성한다. 벽 군데군데에 걸려있는 마법의 빛인듯한 조명이 희미하게 앞서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비쳐준다.
"....름."
"...응?"
"이름 말이야 바보야."
"아...."
앞서가며 그녀가 물었는데 듣지 못했음을 깨달은 마현. 그녀가 재차 묻자, 걸을 때 마다 탄력적으로 움직이는 엉덩이에 시선을 빼앗겼던 현은 그제서야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마..마현이라고 해. 클라나..라고 했지?"
"클라나. 클라나-낫세."
"아... 성은 처음 듣네.. "
"...."
"할아버지한테 끌려오고 제대로 들은게 없어서..."
"...."
또다시 한참의 정적. 마현은 길게 굽어진 복도를 말없이 따르며 어색한 분위기에 어쩔 줄을 모른다.
"...마히..어? 바보같은 발음이네."
"...마현"
"마히..욘?"
"큭큭...."
"....아 몰라몰라, 그냥 마이어라고 해."
어눌한 발음을 듣고 무심코 웃음이 나온다. 무언가 발끈해서 반박하는 듯이 클라나는 멋대로 이름을 정해버린다.
"..."
"아... 그럼 좋을대로 해. 여긴 한국도 아닌것 같고.."
졸지에 이름이 바뀌어 버린 마이어는 굳이 고집 할 필요가 없을 듯 느껴 대충 타협선을 정한다. 그렇게 계속 따라가자 이윽고 완만한 내리막 끝에 또다른 나무문이 나타나고 안으로 들어서는 클라나를 따라 들어간다. 크기도 비슷하고 살풍경한 방안의 정경도 비슷한 방이었지만, 좀 전처럼 무지막지한 책장들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비슷하게 여기저기 이상한 종이들이 굴러다니고 실험도구로 보이는 플라스크, 책더미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바닥 한가운데에 무언가로 정교하게 그려진 문양과 그 중심에 놓여있는 흙덩이가 눈길을 끌 뿐이다.
"마이어."
"...응?"
"이제 됐으니까 돌아가서 잠이나 자."
"아.."
책더미를 내려놓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마이어에게, 그녀는 마치 익숙한듯이 마이어라 부르며 돌아가기를 종용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딱히 들을 요량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듯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쌀쌀맞다.
“아니 뭐... 도와 줄..거 없을까?”
“없어.”
딱잘라 대답하는 그녀.
"아... 그럼."
‘쌀쌀맞기는..’
자신의 이름이 부르기 힘드니 마이어라 불리는 느낌도 그다지 나쁘게는 생각되지 않았다. 외국의 닉네임 같은 느낌에 조금 우스운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어색한 듯 대답하고는 이내 자신의 방-이라 생각되는 위쪽의 방-으로 돌아간 마이어. 아직까지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잠시 움직인 것만으로도 졸음이 쏟아진다. 기괴한 일들을 겪어서인지, 그런 환경에서 급격히 또다시 다른 환경으로 왔기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확신하기가 어렵다.
"휴...."
무거운 한숨과 함께 부츠를 벗고 침대에 눕자마자 일련의 사건들이 눈앞을 스쳐가는 듯 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태에서의 이상한 여자와의 만남, 그리고 찾아온 할아버지에 어딘가로 이동, 악마적 형상의 괴물들...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것이 분명하지만 마치 1년은 지난 일들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자기위해 누운 침대에서 보이는 천장이 자취방에서 언제나처럼 보던 빛바랜 무늬의 벽지가 아닌 낯선 나무판자의 모습이란 것이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은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다.
‘항상 낙담한 기분으로 바라봤는데...’
벽지가 잘못된 것은 없었지만, 눈앞의 나무판자로 이루어진 바닥을 바라보며 기분이 새롭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인생에 낙담스러운 그런기분, 감상적이 되고 비관적이 되고, 그러면서도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적당히 보냈던, 그런날의 잠들기 전 천장. 새삼스럽게 하찮은 천장의 나무판자가 취업난에 허덕이며 사회에 찌들었던 지금까지의 위치가 아님을 증명해주는 듯 느껴진다.
"....일단.. 자자.."
갖가지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는 몸을 고쳐 누웠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잡념들이 머릿속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애써 머리를 흔들고 생각을 지워나가자 피로 때문인지 어느결에 서서히 잠드는 마이어.
...
......
.,...............
..........................................
"으음..."
얼마를 잤을까, 잠결에 무언가 미세한 기척을 느끼곤 얕은 신음소릴 냈지만 역시 피곤했던 탓일까...마이어는 눈조차 뜨지 못하고 다시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려고 한다. 그러나 조금 후 서서히 아랫도리에서 다시 무언가가 느껴진다.
"으..?"
조심스럽게 자신의 다리사이에서 반쯤 발기된 물건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감촉에 깊게 가라앉았던 의식이 점차 선명해짐을 느낀다. 무의식적으로 한 손을 가져다 대자 무언가 손 끝에 닿은 것이 흠칫 떨고는 순식간에 피해버리는 것이 느껴진다.
"....??"
천천히 게슴츠레 눈을 뜨고 바라보자 잠들기 전과 같은 방안의 정경이 어슴푸레 보이는 듯 하다.
"착각인가..."
문이 약간은 열려있는 듯도 했지만 확실치 않았고 마이어는 어설피 깬 정신으로 또다시 몰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골아떨어져버린다.
...
.........
..................
"...어나."
"......으 응?"
"일어나라고!"
아침을 신경질적인 고함과 함께 맞이하고픈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그리고 ‘마이어’가 되어버린 마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나라는 고함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자 침대 앞에는 양 손을 허리에 얹고 불만섞인 표정의 클라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여전히 이쁘네...’
"...왜?"
생각과는 반대로 귀찮은듯 반문한다.
사실 거의 매일 실업자 신분으로 늦잠을 실컷 자던 마이어는 아직도 잠이 부족하긴 했다. 게다가 여긴 딴 동네인데 구태여 일찍 일어날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가 무슨 공짜 여관인줄 아나본데.. 넌 손님이 아니거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마이어를 바라보는 클라나. 어짜피 더 자려고 누워봐야 좋은 일은 안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과 냉랭한 말투 한마디에 이미 싹 달아나버린 잠에 입맛을 다시며 일어난다. 그제서야 물러나며 방을 나가는 클라나가 한마디 한다.
"1층으로와 아침먹고 갈 데가 있으니까."
"....흐아아암"
크게 기지개를 펴면서 하품을 하는 마이어. 아침이라 그런지 다리사이가 꼿꼿하게 일어나 이불을 들어올리고 있다. 보는 순간 클라나의 신경질적인 외침이 단순한 짜증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아 이거..."
멋적은 듯 웃으며 다시 옷을 입은 후 몸을 추스르고 문 밖으로 나가자 예의 그 완만하게 굽어진 복도가 보인다. 창문 하나도 없어 어딘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왠지 지하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리란 생각에 살짝 경사진 복도를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내가 몇 층에 있던건진 알려줘야 할거아냐... 여긴가.."
아무도 듣는사람이 없음에도 마이어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고는 굽어진 복도를 한 바퀴쯤 돌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타난 목재문 앞에 섰다. 복도는 계속해서 아래쪽으로 통해 있었지만 그게 지하인지 목적지인지뭔지 알 수가 없다. 어제 클라나를 따라 들어갔던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제와 거의 비슷한 방안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갖가지 이상한 도구들, 책들, 책상과 몇 개의 수납장 등등... 다만 바뀐건 방안 한가운데에 있던 진흙덩이였다. 기괴한 무늬가 들어간 그림이 바닥에 그려져 있고 한가운데에 척 보기에도 어설픈 솜씨로 대충 빚은 듯한 인간형상의 진흙. 대충 어린아이를 만들고 싶었던지 어린아이 키만한 크기의 조잡한 덩어리가 서 있다.
"헤에.. 악마소환이나 뭐 저주같은거??"
지금까지의 경험을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니다. 그래도... 피로 쓴 글씨라던가 사방에 촛불을 켜 놓던가.. 이런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보기에도 예사로운 작업은 아닌 듯 하다. ‘여동생’ 클라나도 달라티룬을 닮아 마법사인걸까? 아니, 그것 이전에 어느샌가 ‘마법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자신에 놀란다.
‘마법사라...’
쓴웃음을 짓는다. 마이어 자신의 뇌구조가 이젠 그 어떤 ‘기적’도 다 일어날법하다고 인식하고 있음에 다소의 유쾌한 기분이 든다. 뭐, 어찌되었건 할아버지...아니, 달라티룬이라는 별개의 존재로 봄이 옳음직한 그의 말에 의하면 뭘 소환도 했었다는 것 같은데... 관심없는 마이어로서는 확실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는 마법진의 반대편 구석에도 비슷한 여럿의 진흙인형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같이 어린아이가 만들었나 싶을정도로 엉성하고 인체비례따위는 싹 무시한 조잡한 작품이다. 그러나 제작자 역시도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있는지 일부의 진흙덩이는 주먹자국과 함께 반쯤 으깨져있다. 실패작에 신경질적인 화풀이를 한 모양이다.
"이...이게 완성작..?"
마이어는 바닥의 문양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역시나 비슷한 수준의 진흙인형을 보고는 대충 짐작한다. 개중에는 그나마 나은 상태였지만, 여기저기 이지러지고 밋밋한 몸뚱아리는 마이어가 보기에 구석에 있는 진흙덩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어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떨어져 있는 진흙이 잔뜩 묻은 얇은 장갑 한 쌍. 팔짱을 끼고 그것을 내려다보던 그는 슬쩍 거만한 웃음을 짓는다.
"흐으음."
1장 임프로브드 게이트 Improved Gate
story 01 마법사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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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현은 정신을 수습하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창문하나 없어 어두워야 할 방안이었지만 여기저기 밝혀져 있는 촛불과 무엇보다도 천장 한가운데에 위치한 낡은 샹들리에에서 강하진 않지만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온다. 마치 옛날의 서양식 서재같은 분위기의 방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낡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든다.
벽면 전체에 빽빽이 책이 꽂혀있는 책장, 먼지가 잔뜩 낀 책상과 그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두꺼운 책들, 북스탠드 BookStand 옆에는 붉고 커다란 생물체에서 뽑아낸 듯한 깃털로 만든 펜촉들이 여러 개 잉크범벅이 되어 굴러다닌다.
영화에나 나올 법 한 양피지 재질의 스크롤 Scroll 등등이 굴러다니는 바닥에도 역시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집기들이 거의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덮고 있다. 한 쪽 벽면의 선반에는 기괴한 동물의 신체부위라던가 알 수 없는 덩어리, 뼈 등으로 채워진 유리병들이 가득 진열되어있다. 그리고 그 방 한 켠에 놓여있던 낡은 나무재질의 침대에서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살피던 현은 케케묵은 종이냄새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한다.
"읭..."
역시 상당히 낡은 듯 했지만 깨끗한 하얀 시트와 이불에 쌓여있던 그는 우선 다리사이의 불쾌한 끈적임에 무언가 정액을 닦아 낼 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침대 맡에는 자신이 입던 티셔츠와 바지가 반듯하게 개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저건 안되겠고..."
다시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조금 떨어진 책상 위 한쪽에 놓여있는 털가죽 재질의 무언가를 보고는 몸을 일으켜 다가간다. 그리고 곧장 집어들어 침대로 돌아와서는 몸을 닦아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흩뿌려져 달라붙어있는 끈끈한 정액은 털 속에도 고여있어 여간 찝찝한게 아니었다.
"...으잌"
인상을 찌푸리며 대충 닦아냈다싶자, 닦던 걸레를 대충 책상위에 던져놓고는 침대맡의 옷을 집어들어 입기 시작한다.
"저벅..저벅"
그때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문 밖에서 발소리가 명확하게 울리며 들려온다. 아마 전체적으로 석조 구조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이 대충 몸을 닦아내고 다시 이불속에 파묻히자 느리게 문이 열리고는 초췌한 안색의 한 노인이 얼굴을 내민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 고집스럽고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피곤한 기색을 한 달라티룬이다.
"할아버지..?"
"....."
아무말 없이 근처에 굴러다니는 의자하나를 세워들고는 마치 애써 견디고 있던 신체가 무너지듯이 앉는다.
"휴우...."
"?"
무언가 무겁고 침울한 방안의 공기에 짓눌려 달라티룬의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현 역시도 몸을 일으켜 침대에 똑바로 앉는다.
"네가 살던 곳에서.. 난 못난 할애비였지?"
"...예?"
달라도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마치 다른사람처럼...
들어오자마자 갑작스러운 질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멍청하게 반문하는 마현.
사실 ‘진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그다지 좋은 기억은 나질 않았다.
시골 무지랭이 노인이었던 그는 자신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며 가족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그저 한낮 촌로村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만난 이 노인은 워낙 당황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겉모습만 같을 뿐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하다. 아니, 겉모습도 찬찬히 뜯어보면 마치 ‘혼혈아’같은 이질적 생김새가 느껴진다. 한국인이나 동양인 특유의 느낌보다는 약간 서양인에 가까운 외국인같은 느낌.
아무튼 그렇기에 위화감은 여전했고 쉽사리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는 것이리라..
지그시 현을 바라보던 달라티룬은 힘겹게 입을 떼고는 말한다.
"클론 Clone이라는 마법이 있단다. 말그대로 자신의 복제를 만들어내는게지... 나와 같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너의 세상에서 분신의 존재는 적응이 잘 안되었던 것 같구나."
"...에..?"
기괴한 악마형상의 괴물에, 이상한 여자들과의 섹스에, 다른세상으로의 이동.. 뇌가 상식적으로 처리할 만한 상황을 넘어서고 또다시 자신이 인식했던 현실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듣자, 마현은 기껏해야 바람빠진듯 한 대사를 반복적으로 내뱉을 수 밖에 없다. 이 늙은이는 대체 뭐라고 떠드는 걸까? 자신은 티비에서 한참 떠들던 생명공학 관련의 실험체였던 것일까?
".... 전 복제인간의 자손인가요?"
"...아니. 그런게 아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그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단지 그건 너의 보호자 역할을 했던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라는거지... "
"하..."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기뻐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도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노인의 손자가 맞기는 한 것 같지만.. 단순한 의문이 생겨 그가 되묻는다.
"...왜 절 데려왔나요? 아니, 애초에 왜 전 ‘이쪽’에 있지 않았던거죠?"
"...."
잠시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지그시 자신을 쳐다보는 노인. 눈빛은 처음 봤을 때의 괴팍한 느낌은 없고 자애로운 느낌마저 들 정도로 차분하다.
"...넌 마지막 씨앗이다. 거목으로 성장 할 수 있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설명을 해보라구요.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서 무슨 이해가 되겠어요."
다소 답답한 마음에 짜증을 부리며 대답하는 현을 보며 달라티룬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마르-툴Mar-tul이라는 고대신이 있었단다. 우리 가문은 그에게 선택되었었지... 신에게 선택 된 자, 그러니까 초즌Chosen이란다.”
“예?”
“그러나 그건 축복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했어. 평범한 일반인이 갑자기 감당못할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되면 어찌 될거라 보느냐?”
“에.....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후훗...”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로 조심스레 예상을 해보자 달라티룬은 그를 바라보며 재차 푸근한 웃음을 짓는다.
“그래.. 큰 힘엔 큰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지..”
“아, 스파이더맨!”
“응?”
“아.. 아뇨.”
반사적으로 반갑게 맞장구치던 마현은 그의 심각한 분위기에 다소 경솔한 발언이었음을 감지하고는 딴청을 피운다.
“...그래서요?”
“수 많은 악당, 악마, 그리고 선한자들과도 싸우게 되는 숙명을 얻었단다.”
“우리...가문이요?”
“.....”
대답은 뒤로 한 채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이는 달라티룬. 다만 손길엔 씁쓸함이 묻어나왔고 마현은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초즌은... 한 명 뿐이었단다.”
“??”
“....너의 본질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네?”
“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어떤 역할을 요구해서일까? 네가 할 일은 무엇일까?”
“....데려온 사람이 알려줘야죠.”
다소 엉뚱한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마현은 미간을 슬쩍 찌푸린다.
“없다.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은.”
“??”
“그저, 살아남아서 네가 하고 싶은일을 하면 된단다.”
“....그게.. 절 데려온 이유에요?”
“마지막 씨앗은 종자가 좋아서 물과 양분만 충분하면 알아서 싹을 틔울테니까. 구태여 씨앗더러 어떤 행동을 요구할 필요는 없지.”
웃음을 지으며 연기를 내뿜는 달라티룬.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미안하구나. 너만은... 그저 아무 걱정없이 평범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에... ”
희망도 없는 밑바닥 인생을 살며 거의 자살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는 차마 꺼낼수가 없기에 마현은 그저 모호한 신음소리를 낸다.
"미안하구나.. 더 이상은 시간이 없어서 세세히 설명 해 줄 수가 없다. 뭐, 자세한 건 차차 클라나가 설명 해 줄테고..."
"그러니까.. 에? "
"너 하나만은 그저 조용한 삶을 영위하길 바랬는데... 미안하구나....“
재차 사과하는 달라티룬은 고개를 숙인채 손에 든 파이프를 바라본다.
“큰 위험이 닥치고 있고 네가 이 세계에 존재함으로 해서 그것을 막을수도 있다. 그렇기에 데려온 거라고 해두자."
"....."
“알아듣기 힘들고 혼란스러운 것도 알고있다.. 하지만 말이지.. 너의 본질에 가까워진거라고 할 수 있을게다. .. 내면의 소리를 잘 들어보면 될게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본질....”
현은 그 말을 두번째 듣는순간 등골을 타고 오싹하게 느껴진 불쾌감에 작게 진저리를 친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황망함, 의문을 젖혀두고 그 단어를 다시금 되뇌어본다.
-너의 그런면이 싫다구!
-날 사랑하긴 하는거야?
- 난 이 세계에 잘못 태어난 느낌이야....
예전 여자친구에게 들었던 말들, 침대에 누울때마다 되뇌었던 현실도피적 망상의 대사들..
만약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본질과 맞지 않아 일어난것들이라면..?
우울하고 재미없었던 학창시절, 변변치 못한 대학졸업, 취업난, 애인과 이별...
전체적으로 무엇하나 행복하지 않았던 그 빌어먹을 인생.
-본질-이라는 한마디가 떨어지자 마치 주마등처럼 마현은 스스로 큰 인생의 줄기를 더듬어본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넌 결실을 맺을 거목으로 자랄것이다."
당황해서인지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마현을 아랑곳 하지않고 노인은 말을 잇는다
.
"그리고... 초즌Chosen이란 것과 별개로 마치 티플링-Tiefling-이라던가 디사이플-disciple-처럼 우리 가문의 피 역시도 무언가가 섞여 들어가 있는 듯 하다. 마르-툴이외에도 마치 어떤 잊혀진 악신이라던가, 알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같지만... 그건 나로서도 알 수 없고.."
어느새 담배파이프를 털어버리며 내용물을 비워낸 달라티룬은 천천히 일어나 반대쪽 손으로는 알 수 없는 손동작을 천천히 이어가며 계속 말한다.
"이 할애비같은 경우에는 바테주-Baatezu-들에게 어떤 호감을 갖게하는 아우라-Aura-가 나타나는것 같고... 손녀인 클라나는 베제키라 Bezekira를 소환한 적이있지. 아마 너는... 타나"리-Tanar"ri-들과 연관된 어떤 능력이 있을 것 같구나."
타나‘리 라는 단어를 듣는순간 깨달았다.
꿈이 아니다. 아니, 방금 전 까지의 일은 꿈인 것 같지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실 그의 심각한 이야기도 꿈속에서 듣는듯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지만...
서큐버스가 자신과 그때 봤던 ‘그것들’을 가리켜 했던 말.
‘타나’리??‘
그리고 검붉은 빛의 기분 나쁜 스피어에 가슴을 꿰뚫리고... 서서히 의식이 멀어졌다는 것을 이제야 기억해 내고는 반사적으로 외친다.
"솔!!"
"?!"
다급하게 외치는 마현을 의외라는는 듯. 바라보는 달라티룬. 희미한 빛줄기를 뿌리며 허공에 그어지던 손동작도 잠시간 멈추고 그를 바라본다.
"꿈이 아니었어! 같이 있던 서큐버스-Succubus-는 어떻게 된 거죠? 그 뱀 괴물은..? 내 상처.."
어이없다는 듯 달라티룬이 대답했다.
"...섄딜라브리-Shendilavri-에 내가 도착했을 땐 너 혼자 널부러져 있었는데 무슨 소리냐? 광휘의 자매들의 노랫가락도 안 들릴 정도로 외진 말카나-트-Malchanau-te로 보내놨더니만... "
자신과 기스양키-Githyanki-와의 싸움의 충격파라던가 멀티버스의 고통으로 혼절한 줄로만 알았던 손자가 헛소리를 해대자, 의아한듯 달라티룬은 다시 말했다. 애초에 노파심으로 잠시 들렸던 어비스-Abyss-였지만 달라티룬의 예상대로 그것은 단순한 기우에 지나지 않았기에 현의 말에 무언가 있음을 직감한다.
"말카나-트는 섄딜라브리에 거주하는 타나"리 들의 유배지 같은 곳이다. 가끔 죽어가는 서큐버스 한 마리 정도야 볼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뱀 괴물이라... 마릴리쓰Marilith 라도 본 게냐?"
"아마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처음에 본건 수 천 마리의 괴물들이었다구요. 수 없이 많은 서큐버스가 갇힌 뼈다귀같은 감옥들을 호위하고 실어나르는...."
한가로이 담배 파이프를 빨아들이던 얼굴에 일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기우라 여겼건만... 어째서 멜켄세트 측도 움직이는건가...”
“아.. 진짜! 알아듣지 못할 말씀만 하지 말구요! 같이 있던 서큐버스는요!"
달라티룬이 손에 들고 있던 짤막한 완드 Wand 가 바람을 가르며 마현의 머리통에 작렬한다.
"딱!"
"아욱!"
"이녀석아! 에라나-루셀레Erana Rousselet가 통째로 타나"리 소굴이 되어버릴 판이다! 내가 본적도 없는 하급 타나"리 따위는 쳐들어올 타나"리 틈에 끼어있겠지!"
역시 같은 피가 맞는 것일까,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잠시 놀랐던 달라티룬은 답답하다는 듯 마주 짜증을 부린다.
“그래, 내가 준 ‘검은 돌’은 어쨌느냐??”
“아....”
그제서야 퍼뜩 생각난 ‘암흑’으로 감싸인 돌멩이.
‘어떻게 되었더라...’
서큐버스와 "트러블‘이 일어나면서 빼앗은 칼, 그 돌멩이 전부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 기억났다.
‘그... 칼이 그 돌처럼 검게 변했던 건가...’
몽롱한 정신상태에서의 애매한 기억. 꿈과 과거라는 둘의 경계점에 서 있는 듯 어느것이 자신이 경험한 ‘사실’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모...모르겠어요 정신이 반쯤나가서..”
“그건 매니스트락세Manistrakse라는 차원간의 틈새를 메꿔주고, 만일 강력한 촉매제가 있다면 ‘게이트’라는 것들 자체적으로 생성해내는 돌의 일부란다... 마이너 매니스트락세 Minor Manistrakse라고 나 할까... 여하튼... 차원간 이동의 차지Charge는 소모되어버렸지만, 그건 그것 나름의 가치가 상당한 물건인데.. 뭐 별수없지.”
입맛이 쓴 듯 눈살을 찌푸리며 아쉬워하는 노인을 앞에 두고 마현은 딱히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질 않는다.
"클라나~! 밖에 있는거 다 안다! 들어오너라."
"..."
그러자 간편한 로브차림을 한 숏컷의 빨간머리 여성이 어색한 듯 한 표정으로 방 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마도 뛰쳐나가 달라티룬을 부르고선 문 밖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리라.. 닮은 구석이라고는 그다지 없어보였지만 마현이 다시 보니 굉장한 미인이라 생각된다. 달라티룬과 마찬가지로 서양인이나 혼혈인 듯한 약간의 위화감.
조금 전의 충격적인 장면을 봐서인지 마현 자신에게는 그다지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진 않고있기에 다소 찔끔한다.
"배다르긴 하지만 네 여동생이다."
"....."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단지 대답 할 수 없던 것은 뭐든 제멋대로 처리하던 달라티룬의 태도와 클라나라고 불린 여동생의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매에 잠시 멍했기 때문이다.
"설령 그 뱀 괴물이 제 여동생이라고 해도 안놀라워요."
콧방귀를 뀌는 현의 태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금 노인은 손가락에서 엷은 빛과 함께 무언가의 주문을 중얼 거리는 듯 하다. 들어와서 멀뚱히 서 있던 클라나가 깜짝 놀라듯이 묻는다.
"다시 시길로 가실건가요? 더 이상은 무리라구요!"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나지막한 진동음과 함께 달라티룬이 가리킨 방 한켠에 공간이 찢어지고 짙은 어둠의 틈새가 보인다. 그는 천천히 다가서며 어둠속에 손목을 천천히 담근다. 마현의 착각일까, 노인의 얼굴이 더욱 핼쓱해지고 눈동자는 빛을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호문클루스Homunculus라고 해도... 내 증손녀나 마찬가지겠구나.. 어쩌면 그 아이가 메니스트락세-Manistrakse-와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크게 희망을 가지는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꼭 태어나게 만들려무나.."
"알았어요."
"....."
황당해 있던 현은 마치 작별인사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에 노인이 또다시 어디로 먼 길을 떠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다시 만났을 때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초라한 뒷모습만이 비칠 뿐이다.
"너희 둘 다.. 내겐 소중한 아이들이다..."
"...."
클라나의 눈시울이 붉어진 듯 했지만 표정은 애써 감정의 기복을 억누르려는 듯 하다. 서서히 또다른 플레인-Plane-으로 사라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그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도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맞은편의 허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
클라나와 단 둘이 가만히 있자니 오히려 달라티룬과 대화 할 때 보다 더욱 무거워진 방안의 공기를 느낌다. 그는 진땀을 흘리며 목소리를 짜내어 말을 붙여본다.
".....저기... 클라나.. 라고 했나?"
"....."
그러나 그녀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대답 않는다. 상황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시점에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듯 한 감각에 현은 말할 수 없이 불편하기만 하다. 앉아서 올려다 봄에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시계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로브차림에 허리어림에는 작은 주머니들이 부착된 벨트를 둘러 약간의 굴곡이 드러나는 몸매가 의외로 상당한 수준이라는 걸 깨닫는다. 커다란 가슴에 상당히 가느다란 허리... 불편한 와중에 슬그머니 성욕이 고개를 드는 듯 하다.
"..클라나?"
순간 그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본다.
"....뭐! 이 변태같은 자식아! 다리사이에 그건 뭐야!!"
"윽..."
상냥하게 비위를 맞추며 불러주었다고 생각했지만.. 마현 다리사이의 그 물건은 이불속에서 우뚝 솟아 발기했음을 눈 앞의 여동생-이라 생각되는-여성에게 들켜버린다. 당황해서 허리를 빼고 앉으며 가리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너같은 자식이 무슨 오빠는, 무슨 도움이 될 녀석이라고!"
기분 나쁜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를 치며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마현은 잘록한 허리 아래의 걸을 때 마다 흔들거리는 엉덩이도 상당히 섹시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 쪽팔려.."
달라티룬은 한참 먼 길을 떠난 것 같은데, 한동안 얼굴을 봐야 할 남은 사람에게 상당히 안 좋은 첫인상을 심어준 듯 해 마현은 입맛이 쓰다. 하필이면...
"...."
낭패라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막막해진다.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온 노인은 다시 돌아가 버리고.. 이상한 건물에 여동생?과 둘 뿐인 듯 하다.
하릴없이 느릿느릿 침대에서 기어나오자 침대 아랫부분엔 갈색의 낡은 가죽부츠가 한 켤레 놓여있다. 흔히보던 합성 피혁은 아닌 것 같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듯 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알 수도 없었고, 굳이 관심이 가진 않았다. 여기저기 꿰멘자국이 미세하게 뜯겨있고, 관절부위의 주름 역시도 상당히 마모되어있었지만 제작했을 당시엔 상당한 고급품이리라 여겨진다.
"대충 사이즈가 맞네.."
그다지 기대않고 발을 집어넣었지만 허름하게 생긴 외양과 달리 발에 착 감기는 의외의 착용감에 그는 상당히 만족한다. 일어서서 정신을 차릴 때 눈에 들어왔던 책상에 다가가 책들을 훑어본다. 역시 상당히 낡아 보이는 책상이었지만 깔끔하며 튼튼해 보이는데다가 북스탠드를 비롯, 의외로 효율적인 디자인과 배치에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저기에 스크롤 등이 책 사이사이 끼워져 있던 것을 훑어보다가 맨 위의 두꺼운 스크롤을 아무 생각없이 집어들자, 뒷면의 짧은 털가죽이 만져진다.
"이런건 양피지로 만들지 않나"
무언가 짐승의 가죽 그 자체다. 푹신푹신한 후면 때문에 어떻게 안쪽에 글을 썼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것에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고 그저 내용을 바라본다.
"으익!"
손에 묻어나는 미끌거리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며 가죽을 내려놓자, 좀전에 자신의 정액을 닦아내버렸던 걸레대용이라는 것을 깨닫고 만다. 그리고는 손에 묻어나는 정액을 대충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재차 유심히 스크롤의 내용을 바라본다.
"에이.... 어라..? 내가 이동네 글자를 읽을 수 있었던가..?"
기이하게 생긴 룬 Rune 문자는 그저 그림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비쳐졌지만, 그 외에 일부 특별한 발음이나 쓰여있는 나머지 설명등은 캐스팅 Casting 시의 세세한 동작과 주문까지 모조리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손가락을 곧게 펴고는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캐스팅을 시작한다.
"매니.. 스트락..세? 좀전의...? 그리고 쿠..아니, 크라.쥬.. 뭐야 이게?"
"저벅 저벅 저벅..."
그러나 그 때 들리는 발소리에 멈추고 문가를 바라보자, 예의 빨간머리 아가씨가 재차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뭐하는거야! 그건 만지지마."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
"그래도 정신을 잃었다고 간호해주는 도중이었던 것 같은데.. 싸는 장면을 보여줬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마현은 책상에서 약간 떨어져 그녀가 걸어오는 것을 멀거니 바라본다. 금방 다시 들어오기는 싫었을테지만 무언가를 가지러 온 듯 자신을 지나쳐 안쪽으로 걸어간다. 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이상한 차림인 그를 흘끗 바라보지만 역시나 적개심 가득한 눈동자의 그녀는 여전히 화가 난 듯 보인다. 다가온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책상 위의 스크롤이나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마법 서적 등을 대충 정리해 차곡차곡 포개기 시작한다. 그러자 책이 두꺼워서인지 거의 갓난아기 키만한 책더미가 두 개나 쌓인다. 약간 당황한 표정의 그녀는 가느다란 양 팔로 전부를 집어들어 가져가려 하나 될 턱이 없다.
"....이익.."
바로 앞에서 보란듯이 낑낑대는 그녀를 보자, 현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 중 가벼워 보이는 책더미에서 몇 권을 집어들어 한쪽으로 전부 옮기고는 집어 들었다. 스크롤더미와 몇 권의 책들 밖에 남지 않자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남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멋대로 방을 나간다.
"어디로 가져가는거야?"
급히 뒤따르며 마현이 말을 붙여보았으나 역시나 찬바람 쌩쌩부는 태도에 헛수고라는 걸 깨닫는다. 현은 허리곡선에서 급격히 늘어나는 풍만한 엉덩이의 형태를 따라가며 복도로 들어섰다. 그래도 환심을 사야 할 것 같아 도왔지만 뒷모습을 보니 불손한 생각만 가득히 드는 것 같다.
눈앞은 어둑어둑한 석조벽이 길게 이어져 점차 내리막을 형성한다. 벽 군데군데에 걸려있는 마법의 빛인듯한 조명이 희미하게 앞서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비쳐준다.
"....름."
"...응?"
"이름 말이야 바보야."
"아...."
앞서가며 그녀가 물었는데 듣지 못했음을 깨달은 마현. 그녀가 재차 묻자, 걸을 때 마다 탄력적으로 움직이는 엉덩이에 시선을 빼앗겼던 현은 그제서야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마..마현이라고 해. 클라나..라고 했지?"
"클라나. 클라나-낫세."
"아... 성은 처음 듣네.. "
"...."
"할아버지한테 끌려오고 제대로 들은게 없어서..."
"...."
또다시 한참의 정적. 마현은 길게 굽어진 복도를 말없이 따르며 어색한 분위기에 어쩔 줄을 모른다.
"...마히..어? 바보같은 발음이네."
"...마현"
"마히..욘?"
"큭큭...."
"....아 몰라몰라, 그냥 마이어라고 해."
어눌한 발음을 듣고 무심코 웃음이 나온다. 무언가 발끈해서 반박하는 듯이 클라나는 멋대로 이름을 정해버린다.
"..."
"아... 그럼 좋을대로 해. 여긴 한국도 아닌것 같고.."
졸지에 이름이 바뀌어 버린 마이어는 굳이 고집 할 필요가 없을 듯 느껴 대충 타협선을 정한다. 그렇게 계속 따라가자 이윽고 완만한 내리막 끝에 또다른 나무문이 나타나고 안으로 들어서는 클라나를 따라 들어간다. 크기도 비슷하고 살풍경한 방안의 정경도 비슷한 방이었지만, 좀 전처럼 무지막지한 책장들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비슷하게 여기저기 이상한 종이들이 굴러다니고 실험도구로 보이는 플라스크, 책더미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바닥 한가운데에 무언가로 정교하게 그려진 문양과 그 중심에 놓여있는 흙덩이가 눈길을 끌 뿐이다.
"마이어."
"...응?"
"이제 됐으니까 돌아가서 잠이나 자."
"아.."
책더미를 내려놓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마이어에게, 그녀는 마치 익숙한듯이 마이어라 부르며 돌아가기를 종용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딱히 들을 요량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듯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쌀쌀맞다.
“아니 뭐... 도와 줄..거 없을까?”
“없어.”
딱잘라 대답하는 그녀.
"아... 그럼."
‘쌀쌀맞기는..’
자신의 이름이 부르기 힘드니 마이어라 불리는 느낌도 그다지 나쁘게는 생각되지 않았다. 외국의 닉네임 같은 느낌에 조금 우스운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어색한 듯 대답하고는 이내 자신의 방-이라 생각되는 위쪽의 방-으로 돌아간 마이어. 아직까지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잠시 움직인 것만으로도 졸음이 쏟아진다. 기괴한 일들을 겪어서인지, 그런 환경에서 급격히 또다시 다른 환경으로 왔기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확신하기가 어렵다.
"휴...."
무거운 한숨과 함께 부츠를 벗고 침대에 눕자마자 일련의 사건들이 눈앞을 스쳐가는 듯 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태에서의 이상한 여자와의 만남, 그리고 찾아온 할아버지에 어딘가로 이동, 악마적 형상의 괴물들...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것이 분명하지만 마치 1년은 지난 일들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자기위해 누운 침대에서 보이는 천장이 자취방에서 언제나처럼 보던 빛바랜 무늬의 벽지가 아닌 낯선 나무판자의 모습이란 것이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은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다.
‘항상 낙담한 기분으로 바라봤는데...’
벽지가 잘못된 것은 없었지만, 눈앞의 나무판자로 이루어진 바닥을 바라보며 기분이 새롭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인생에 낙담스러운 그런기분, 감상적이 되고 비관적이 되고, 그러면서도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적당히 보냈던, 그런날의 잠들기 전 천장. 새삼스럽게 하찮은 천장의 나무판자가 취업난에 허덕이며 사회에 찌들었던 지금까지의 위치가 아님을 증명해주는 듯 느껴진다.
"....일단.. 자자.."
갖가지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는 몸을 고쳐 누웠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잡념들이 머릿속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애써 머리를 흔들고 생각을 지워나가자 피로 때문인지 어느결에 서서히 잠드는 마이어.
...
......
.,...............
..........................................
"으음..."
얼마를 잤을까, 잠결에 무언가 미세한 기척을 느끼곤 얕은 신음소릴 냈지만 역시 피곤했던 탓일까...마이어는 눈조차 뜨지 못하고 다시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려고 한다. 그러나 조금 후 서서히 아랫도리에서 다시 무언가가 느껴진다.
"으..?"
조심스럽게 자신의 다리사이에서 반쯤 발기된 물건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감촉에 깊게 가라앉았던 의식이 점차 선명해짐을 느낀다. 무의식적으로 한 손을 가져다 대자 무언가 손 끝에 닿은 것이 흠칫 떨고는 순식간에 피해버리는 것이 느껴진다.
"....??"
천천히 게슴츠레 눈을 뜨고 바라보자 잠들기 전과 같은 방안의 정경이 어슴푸레 보이는 듯 하다.
"착각인가..."
문이 약간은 열려있는 듯도 했지만 확실치 않았고 마이어는 어설피 깬 정신으로 또다시 몰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골아떨어져버린다.
...
.........
..................
"...어나."
"......으 응?"
"일어나라고!"
아침을 신경질적인 고함과 함께 맞이하고픈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그리고 ‘마이어’가 되어버린 마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나라는 고함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자 침대 앞에는 양 손을 허리에 얹고 불만섞인 표정의 클라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여전히 이쁘네...’
"...왜?"
생각과는 반대로 귀찮은듯 반문한다.
사실 거의 매일 실업자 신분으로 늦잠을 실컷 자던 마이어는 아직도 잠이 부족하긴 했다. 게다가 여긴 딴 동네인데 구태여 일찍 일어날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가 무슨 공짜 여관인줄 아나본데.. 넌 손님이 아니거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마이어를 바라보는 클라나. 어짜피 더 자려고 누워봐야 좋은 일은 안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과 냉랭한 말투 한마디에 이미 싹 달아나버린 잠에 입맛을 다시며 일어난다. 그제서야 물러나며 방을 나가는 클라나가 한마디 한다.
"1층으로와 아침먹고 갈 데가 있으니까."
"....흐아아암"
크게 기지개를 펴면서 하품을 하는 마이어. 아침이라 그런지 다리사이가 꼿꼿하게 일어나 이불을 들어올리고 있다. 보는 순간 클라나의 신경질적인 외침이 단순한 짜증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아 이거..."
멋적은 듯 웃으며 다시 옷을 입은 후 몸을 추스르고 문 밖으로 나가자 예의 그 완만하게 굽어진 복도가 보인다. 창문 하나도 없어 어딘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왠지 지하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리란 생각에 살짝 경사진 복도를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내가 몇 층에 있던건진 알려줘야 할거아냐... 여긴가.."
아무도 듣는사람이 없음에도 마이어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고는 굽어진 복도를 한 바퀴쯤 돌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타난 목재문 앞에 섰다. 복도는 계속해서 아래쪽으로 통해 있었지만 그게 지하인지 목적지인지뭔지 알 수가 없다. 어제 클라나를 따라 들어갔던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제와 거의 비슷한 방안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갖가지 이상한 도구들, 책들, 책상과 몇 개의 수납장 등등... 다만 바뀐건 방안 한가운데에 있던 진흙덩이였다. 기괴한 무늬가 들어간 그림이 바닥에 그려져 있고 한가운데에 척 보기에도 어설픈 솜씨로 대충 빚은 듯한 인간형상의 진흙. 대충 어린아이를 만들고 싶었던지 어린아이 키만한 크기의 조잡한 덩어리가 서 있다.
"헤에.. 악마소환이나 뭐 저주같은거??"
지금까지의 경험을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니다. 그래도... 피로 쓴 글씨라던가 사방에 촛불을 켜 놓던가.. 이런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보기에도 예사로운 작업은 아닌 듯 하다. ‘여동생’ 클라나도 달라티룬을 닮아 마법사인걸까? 아니, 그것 이전에 어느샌가 ‘마법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자신에 놀란다.
‘마법사라...’
쓴웃음을 짓는다. 마이어 자신의 뇌구조가 이젠 그 어떤 ‘기적’도 다 일어날법하다고 인식하고 있음에 다소의 유쾌한 기분이 든다. 뭐, 어찌되었건 할아버지...아니, 달라티룬이라는 별개의 존재로 봄이 옳음직한 그의 말에 의하면 뭘 소환도 했었다는 것 같은데... 관심없는 마이어로서는 확실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는 마법진의 반대편 구석에도 비슷한 여럿의 진흙인형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같이 어린아이가 만들었나 싶을정도로 엉성하고 인체비례따위는 싹 무시한 조잡한 작품이다. 그러나 제작자 역시도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있는지 일부의 진흙덩이는 주먹자국과 함께 반쯤 으깨져있다. 실패작에 신경질적인 화풀이를 한 모양이다.
"이...이게 완성작..?"
마이어는 바닥의 문양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역시나 비슷한 수준의 진흙인형을 보고는 대충 짐작한다. 개중에는 그나마 나은 상태였지만, 여기저기 이지러지고 밋밋한 몸뚱아리는 마이어가 보기에 구석에 있는 진흙덩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어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떨어져 있는 진흙이 잔뜩 묻은 얇은 장갑 한 쌍. 팔짱을 끼고 그것을 내려다보던 그는 슬쩍 거만한 웃음을 짓는다.
"흐으음."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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