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엄마야 누나야
‘이런!!’
곤란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연무장을 지나가야 하는 지금이 견습기사들의 수련시간이라니! 멀리 올망졸망 모여서 검술을 수련하고 있는 설흔 명 가량의 젊은이들을 보며 칸피니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여어~~!! 귀염둥이 도련님~~! 오늘도 또 뵙게 되었네요?”
귀염둥이라... 15살의 나이라면 남자라도 귀염둥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15살의 나이에 벌써 키가 16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의 사내라면 그 말에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귀염둥이라 부른다면 놀려먹자는 의도 외에는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오늘도 아름다운 검은머리입니다. 귀여우신 도련님. 그 검은 머릿결로 나를 유혹해줘요.”
“이런이런, 조셉 이녀석은 밤일이 시원찮다구요. 보세요. 이 단단한 근육을. 탐나지 않으세요?”
“남자는 뭐니뭐니해도 허리라구요. 이 탄력넘치고 유연한 허리를 보세요. 이 허리로 도련님을 죽여드릴거라구요. 어때요? 생각 없어요?”
“어이, 자네들! 도련님은 내거라구! 17년전 자작님께서 2.부.인.을 들이실 때부터 점찍어두었단 말야!”
어처구니없는 녀석들이다. 자신들만큼이나 덩치가 큰 사내에게 저같은 장난을 걸다니. 더구나 그 사내는 저들보다 힘은 물론이고 검술도 더 뛰어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저런 장난이 통할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하하하... 그때 자넨 세 살밖에 안되었다구. 세 살 때부터 점찍어두었다는건가?”
“그만큼 2.부.인.께서 대단하시다는 것 아니겠나? 세 살짜리 어린아이마저 그 매력에 사로잡혀버렸으니 말야.”
“맞아, 맞아, 나는 그때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혹적인 매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2.부.인의 기사가 되기로 맹새했었지. 보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한 느낌이라 어쩔 수 없었다니까?”
“그렇게 아름다우신 분이란 말인가?”
“아무렴. 그렇지 않고서야 천한 수파니의 여자가 어찌 자작님의 2부인이 될 수 있었겠나? 겉.보.기.가.아.름.답.기.때.문.이.지.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나는 그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네.”
“그럼 조셉의 첫사랑은 2부인이 되는건가?”
“그렇겠지? 주군의 부인과의 사랑이라... 정말 비극이로군.”
“참 2부인도 죄인이시지. 안그런가?”
자신에 대한 모욕은 곧 어머니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진다. 말이 2부인이지 귀족이 아닌데다 숲의 종족인 수파니이기도 한 그의 어머니를 자작가의 2부인으로 인정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인간도 아닌 수파니의 여자가 자작을 유혹해서 2부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더욱 경멸하고 조롱할 뿐이다. 심지어 델킨피에르 영지에 속한 농노들마저도 그러할 정도다.
“그대로 10년만 기다렸으면 자네가 저기 잘생긴 도련님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겠구먼.”
“검은머리의 수파니에게서 태어난 검은머리의 아들이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흐흐흐... 차라리 검은머리의 딸을 여럿 낳아 분양하는 게 어떤가?”
“그게 좋겠군. 정말 명안이야. 폴. 자네는 정말 천재야!”
“흐흐흐... 칭찬해주어 고맙네.”
저들에게 있어 칸피니스 델킨피에르는 수파니의 천한 여자의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천한 자식일 뿐이다. 그의 어머니나 그나 저들은 주군의 부인으로도, 주군의 자식으로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어이~~!! 도련님~~!! 그냥 지나가는거요?”
“이 애끓는 사랑의 고백을 들어달라구~~!”
“도련님의 그 하얀 엉덩이로 내 자식을 보고 싶단 말요~~!!”
“자네 그건 칸피니스 도련님을 모욕하는 소리네. 어찌 수파니의 엉덩이가 하얄 수 있겠는가? 어서 검은 엉덩이로 바꾸게.”
“맞아! 검은 엉덩이야! 검은 엉덩이!!”
“하하하하하!!!”
그래서 저토록 마음껏 조롱하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결코 침범해서는 안되는 주군의 부인과 아들을 태연히 모욕하며 웃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칸피니스나 그의 어머니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다.
‘웃기는 자식들이로군!’
솔직히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저토록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모욕하는데도 화가 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하루이틀 있어온 일도 아니다. 몇 년 째, 아니 칸피니스가 사물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계속되어온 일이다.
‘레파토리라도 좀 바꾸지. 하여간 머리 나쁜 것들은...’
더구나 그 내용이라는 것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끼니 때마다 먹는 빵도 매일 같을 수는 없는데 어찌된 것들인지 하는 말이나 행동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칸피니스는 그것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해버린다.
‘그건 기억력이 딸려서야... 어제 자기가 한 일도 제대로 기억 못하거든.’
저들 중에는 기사 서임을 앞둔 20대 중반에 이른 사내들도 있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젊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칸피니스보다 나이가 많다. 그럼에도 저들 가운데 칸피니스를 이길 수 있는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그들의 무능 외에는 다른 무엇도 아니다.
‘멍청한 것들...’
평화로운 영지라면 조금 무능하더라도 민폐는 되지 않는다. 무능하더라도 그럭저럭 자신의 자리는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델킨피에르 영지는 결코 평화롭지 않다. 아직 채 개척되지 않은 흑암의 숲은 여전히 많은 몬스터를 품고 있고, 그의 어머니의 종족이기도 한 수파니족 또한 호시탐탐 빼앗긴 그들의 땅을 되찾으려 노리고 있다. 일 년에만도 십여차례 이상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는 이곳에서 저토록 생각없이 자신의 무능함을 과시하는 것은 오거 열 마리가 습격하는 것보다 더 큰 해악일 수 있다.
‘하긴... 그러니 일 년에만도 열 차례 이상 서임식을 하는 것 아니겠어?’
다행히 흑암의 숲은 공정하다. 숲을 파괴한 침입자에 대해서도 그 공정함을 잃지 않는다. 무능한 기사들은 흑암의 숲이 제공하는 몬스터들에 의해 선별되어 죽어간다. 몬스터가 죽이지 않은 기사는 다시 수파니들이 죽여서 정리한다. 그 혹독한 시련을 거치다보면 기사서임 삼 년이 지난 시점에는 무능한 기사들은 결코 기사의 직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저 머저리들 가운데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칸피니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살아남을만한 놈들이라면 머저리라고 부르지도 않지. 에휴...’
생각같아서는 흑암의 숲이 처리하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저 머저리들을 처리해버리고만 싶다. 저들 설흔명이 모두 달려든다 하더라도 한 시간 안에 모두 도륙낼 자신도 있다. 저들의 스승인 마스터 게일란마저도 삼십합 안에 제압할 수 있는 칸피니스다. 저까짓 머저리 따위 얼마가 달려들든지 그저 우습기만 할 뿐이다.
“야! 칸피니스!”
듣기 싫은 소리는 듣지 않는 게 상책이다. 괜히 듣기 싫은 소리 일일이 듣고 있어봐야 기분만 나빠진다. 차라리 딴생각을 하면서 아예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무시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칸피니스가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던 것도 모두 그같은 이유 때문이다.
“야! 수파니의 사생아!!”
하지만 이 목소리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아, 일스테아 형님!”
수련기사들 사이에서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저 일스테아 델킨피에르의 말까지 무시했다가는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다.
“형님? 누가 네 형님이냐? 수파니 따위가 어찌 내게 형이라 불러!?”
끼리끼리 논다고 알스테아도 저기 몰려있는 머저리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머저리다. 검술이나 계략 어느 쪽으로든 두려워할만한 인간이 못된다. 다만 칸피니스가 꺼려하는 것은 저 작자가 자신의 형이며 또한 자작가의 둘째 아들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본부인 출생이다. 수파니와의 혼혈이라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칸피니스와는 전혀 다른 입장인 것이다.
“아버님께서 그리 시키셨거든요. 형이라 부르라구요. 따지시려면 아버지께 따지세요.”
“뭐야?”
별 것도 아닌 말에 버럭 화내며 검부터 뽑아드는 것이 정말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나마 저런 머저리가 첫째 아들이 아닌 것이 델킨피에르 가문을 위해서도 다행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나마 첫째는 조금 낫지. 그놈은 음흉맞기는 해도 저렇게 멍청하지는 않거든.’
눈앞의 알스테아나 이 자리에는 없는 첫째 로메르나 그들만 칸피니스를 형제로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존재를 형이라 여길 정도로 칸피니스는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라? 꼴에 휘두르기까지?’
정말 어처구니없는 놈이다. 자신의 검술이 칸피니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난 삼 년간 아프게 몸으로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화가 난다고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 채 검을 휘둘러 달려들다니. 아직까지도 자신의 신분이 그 형편없는 검술을 보충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모양이다.
‘저 머저리는 학습능력까지 결여된 머저리란 말인가?’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저 우습기만 하다. 저렇게 또 한참을 칼을 가지고 춤을 추다가 대충 내지른 칸피니스의 팔에 의해 바닥에 나뒹굴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 분에 못이겨 씩씩거리며 주위의 견습기사들을 시켜 자신을 공격하게 할 것이다.
‘오늘은 그냥 들이받아버릴까?’
대충 앞으로의 전개가 그려지니 그때 상황에 맞춰 어찌 행동할 것인가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면 오늘도 또 적당히 맞아주고 말까?’
눈앞에 땀을 뻘뻘 흘르며 필살의 검초를 휘두르고 있는 알스테아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다. 나름대로 회심의 일격이랍시고 휘두르고는 있지만 열 번의 검격에 벌써부터 숨이 흐트러지고 다리고 후들거리는 멍청이의 검격따위 파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맞으면 아픈데...’
오늘의 일과라 여기고 태연히 넘어가려 해보지만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머니가 인간이 아니라고, 그 인간이 아닌 어머니에게서 난 혼혈아라고 매일 이렇게 당하기만 해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니 울컥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냥 죽여버릴까?’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알스테아라는 생각없는 멍청이와 로메르라는 음흉하기만 한 바보는 이미 몇 년 전에 죽은 시체가 되어 땅위를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혼자 몸이라면야 눈앞의 거슬리는 것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홀가분하게 도망치면 된다. 굳이 이런 수모를 참아가며 성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뭐... 그냥 오늘도 적당히 몇 대 맞아주고 말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어머니의 존재를 생각하면 치밀어오르는 살기를 억누르지 않을 수 없다. 함께 도망칠 수도 없는 어머니가 성에 남아 겪게 될 고초를 생각하면 충동이 시키는 대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라 부르기도 싫은 아버지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 자작이지만 그나마 이런 때는 그가 자신을 아들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진다. 아무리 혼혈이라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자작이 자신의 아들로 인정한 이상 자작 말고는 누구도 함부로 죽이거나 다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야압! 얍!! 헉헉!! 야앗!! 헉헉헉헉!! 헉!! 헉헉!! 얍!”
‘정말 섹시하게 숨을 몰아쉬는군. 밤에 힘쓰는 소리 같잖아?’
마음을 정하고 얼핏 알스테아를 보니 땀에 범벅이 되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이 보인다. 서있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이는 모습임에도 가쁜 숨을 뱉아가며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안쓰럽긴! 멍청이 똥고집이지!’
안되는 걸 알면서도 제 성질에 못이겨 집착하는 모습이 어찌나 답답해 보이는 지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머리가 돌아갈 정도로 제대로 한 대 먹이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척추를 따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조금만 더 이대로 두게 된다면 그 막연한 기대에 자신의 주먹을 맡겨볼 지 모른다. 아무리 나이에 비해 성숙한 칸피니스라 하지만 아직은 나이 15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자칫 자신의 감정에 못이겨 충동적으로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음?’
하지만 다행인지 누군가 칸피니스의 등뒤로 다가오고 있다. 살기랄 것도 없는 미약한 적대감의 수준을 보아하니 검술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듯 하다.
‘그 계집애인가?’
얼핏 향수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여자가 분명하다. 지금 이시간에 자신의 등뒤로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이며 다가설 여자라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알스테아의 동생인 힐레인이다.
‘다리를 걸까? 아니면 몽둥이로 뒤통수를 칠까? 저번에는 돌을 던졌었지, 아마?’
오라비인 알스테아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혼혈아인 칸피니스에 대해 강한 증오심을 갖고 있는 힐레인인지라 꼭 이렇게 싸울 때면 뒤에서 습격해서 자기 오라비를 도와주곤 한다. 오라비조차도 검을 휘둘러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자신을 뒤에서 습격한다고 그 어설픈 공격이 성공하리라 생각하는 그 머릿속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이럴 때 그녀의 개입은 반갑기만 하다.
‘그래도 여자한테 맞아 쓰러지는 게 낫겠지?’
여자에게 맞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칸피니스는 남자에게 맞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멍청한 사내자식들에게 맞는 것보다야 아름답고 현명한 여자들에게 맞아 쓰러지는 것이 아무래도 폼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 자기보다 나은 남자란 없다고 믿는 칸피니스이기에 가능한 사고방식이다.
“얍!”
‘에유, 기합소리도 귀엽지!’
이번에는 나무몽둥이인 모양이다. 그 갸녀린 팔로 나무몽둥이를 휘둘러봐야 얼마나 아프겠냐만 그래도 그 성의가 안타까워서 그대로 맞고 쓰러지는 시늉을 해보인다.
“윽!”
“오라버니! 기회에요! 지금 당장 저 더러운 혼혈아 자식을 죽여버려요! 목을 따버리라구요!”
기껏 오버해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뒹구는 수고까지 해보이고 있음에도 힐레인의 말투는 더없이 살벌하기만 하다. 검술을 익히지 않은 여자아이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살기에 쓰러지는 연기를 즐기던 칸피니스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찔 위축된다.
‘그나마 제 오라비에 비해 한참 낫군.’
성질만 고약한 멍청이인 알스테아에 비해 힐레인은 독기와 행동력이 있다. 분노와 경멸조차도 비겁 속에 숨겨버리는 오라비와는 달리 힐레인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행동으로 옮겨버린다. 아마도 그녀가 검술을 익혔다면 나중에 아버지의 문책을 들을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칸피니스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금 위험했으려나?’
칸피니스가 판단하기에 검술의 자질에 있어서도 힐레인이 알스테아나 로메르에 비해 더 뛰아나다. 힘에서는 딸릴지 모르지만 유연하고 민첩한 그녀의 근육들은 가벼운 검을 쥐고 휘두르기에 적합하다. 레이피어를 그 하얀 손에 쥐어주고 직접 검술을 가르쳐보고 싶어질 정도다.
퍽--!! 퍽--!! 퍽--!!
“개자식! 죽어! 죽어!”
“썩을 자식아! 더러운 혼혈아 자식!! 수파니의 잡종!!”
힐레인의 말에 고무된 것인지 알스테아가 쓰러진 칸피니스에게 달려와 발길질을 해댄다. 역시나 기대대로 검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아마도 검을 휘둘렀을 경우 아버지가 문책해올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검을 써요! 목을 그어버리라구요! 아니면 팔다리를 잘라버리든지! 뭣해요! 검으로 힘줄부터 잘라버려요! 저 더러운 것이 다시는 잘난체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라구요!”
‘어쩜 그렇게 살벌한 말을... 귀여워라...’
멍청이 알스테아는 때리는 데 있어서도 멍청이일 뿐이다. 그렇게 어설프게 때려봐야 아플 리 없다. 다리에 힘을 꽉꽉 준 상태로 아무리 힘껏 차봐야 칸피니스의 단단한 근육을 뚫고 그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리 만무하다.
쓰러진 상대를 때리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알스테아가 힐레인의 말에 따를 리 없다. 얼굴까지 붉혀가며 살기를 풀풀 풍기는 동생의 모습이 아무리 귀엽더라도 근엄한 아버지의 질책이 더 무서울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문계승권도 없는 주제에 저리도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어찌보면 불쌍하기까지 하다.
‘불쌍하기는! 멍청이일 뿐이라니까!’
아까 지쳐있던 모습을 고려해보면 아마도 2분 정도 마음껏 때리고 나면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힘이 빠지면 다른 견습기사들을 시켜 몰매를 주게 할 수도 있으니 그것으로 끝은 아니기 쉽다.
‘아아... 지겨워... 대충 빨리 좀 끝내라!’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한참을 때리던 알스테아가 발길질을 거두고 뒤로 물러난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쓸데없이 힘을 빼느라 지쳐서 더 이상 때리지 못하게 된 모양이다.
“거기 자네들! 와서 이 자식을 밟아버려!”
역시나 알스테아의 행동은 칸피니스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며칠동안 돌아다닐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자근자근 밟아버리라구!”
알스테아의 명령이 떨어지자 평소 자작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조롱하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던 견습기사들이 기회라는 듯 달려들어 칸피니스를 구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도 알스테아에 못지 않은 멍청이들이라 때리는 것도 시원찮다.
“그냥 목을 베어버리면 된다니까요! 그냥 죽여버려요! 아버지가 뭐라 하시면 한 소리 듣고 말죠! 뭣하러 이런 녀석을 살려둬요? 정 안되면 팔다리 중 하나라도 자르자구요!”
“힐레인! 다큰 처녀가 무슨 말이 그러냐?”
“뭐가요? 그럼 저런 더러운 혼혈아 자식이 우리 가문의 일원으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거에요? 아까 들었잖아요? 저 더러운 입으로 오라버니를 형이라 부르는 걸! 난 결코 그런 꼴 못봐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아버지가 그렇게 무서우면 아예 동생으로 인정하든가! 저 더러운 수파니의 혼혈아따위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말을 인정하지 못하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니에요! 기왕 말을 거역할 거면 제대로 확실히 해야죠!”
‘힐레인 말이 맞다!’
칸피니스가 자신의 말에 동조해주고 있음을 모른 채 힐레인은 독기어린 눈으로 몰매를 맞고 있는 칸피니스를 노려보며 예의 살벌한 말을 이어간다.
“어차피 저녀석을 죽여봐야 아버지한테 야단이나 조금 맞고 말거에요. 심하면 방에 갇힌 채 근신해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고작 그정도라구요. 저 쓰레기를 치우는 데 그정도 댓가는 치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어허...!! 힐레인!”
“왜요? 겁나나요?”
“어허...!”
“보세요. 저기 견습기사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는 저 꼴을요. 견습기사에게 몰매를 맞는 주군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극상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때리는 저들이나 시킨 우리들이나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있잖아요? 이미 저들이나 우리나 저녀석을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거라구요. 이미 아버지이 명을 어기고 있다구요. 그러면서 고작 칼질 한 번 하면 되는 일을 그렇게 두려워하는건가요?”
“그것과 이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훗~~! 야단맞을 차원이 다른 일이겠죠.”
“힐레인! 무슨말을...”
“아아... 됐어요. 그럼 검이라도 빌려줘요. 내가 직접 처리할테니까. 내가 저놈을 죽이고 모든 책임을 질테니 겁쟁이 오라버니는 거기서 지켜만보고 있으라구요.”
“그럴수는 없다!”
“훗! 왜요? 그래도 겁나나요?”
“겁나는게 아니라!!”
“걱정마세요. 오라버니께 피해가 가게는 않을테니까. 자... 검을 주세요.”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데도!”
“오라버니!”
“힐레인!”
이렇게 건장한 사내 수십명에게 둘러싸여 뭇매를 맞으면서도 남매의 만담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칸피니스만이 보일 수 있는 재주라 할 것이다.
‘정말 살떨리게 만드는 계집애네.’
힐레인의 살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자신을 걷어차고 있는 떨거지들을 죽여버릴 뻔 했다. 다행히 알스테아의 바보짓 덕분에 살기를 억누르기는 했지만 검보다도 더욱 위협적인 칸피니스의 살기를 머금은 주먹이 살기 위한 본능으로 그들의 머리를 무수고 내장을 터뜨릴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바보짓을 계속 해야 하는거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주체하지 못할 살기에 자신을 맡겨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려는데 불현듯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와 그를 말린다.
“무엇들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이게 무슨 꼴입니까?”
맑고 청량한 목소리를 따라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이 머무는 곳에 실버블론드의 가는 머릿결을 등허리에까지 길게 기른 창백한 외모의 17살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있는 것이 보인다.
“히... 히리스님!”
“히리스님!”
자작가의 장녀 히리스 델킨피에르다.
“칸피니스는 아버지께서 인정한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입니다. 델킨피에르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이 어찌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을 이리 욕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하극상을 하시려는 겁니까?”
“히... 히리스님... 그게...”
“저... 히리스님... 그게 아니오라...”
평소 히리스의 아름다움과 상냥한 성품을 동경해오던 견습기사들인지라 그녀의 질책에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해한다. 그녀의 눈밖에 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로 말과 행동이 경직되는 것에 한눈에 보인다.
“내가 그리 하라 시켰다.”
견습기사들의 꼴불견을 보다 못해 알스테아가 나선다.
“오라버니께서요?”
“그렇다.”
“오라버니께서,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서 누구보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오라버니께서 견습기사들을 시켜 칸피니스에게 몰매를 주게 했다는건가요?”
“그렇다. 뭐가 잘못됐느냐? 저녀석은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이랄 수도 없는 혼혈아다. 그것도 사람도 아닌 수파니와의 혼혈아. 그러 주제에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 행세하고 돌아다니기에 잠시 징계한 것 뿐이다.”
“하! 우습군요. 혼혈이든 뭐든 그는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입니다. 그 어미가 수파니족이든 어쨌든 아버지가 인정한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자작가의 아들이라구요. 그런데 그런 그를 견습기사를 시켜 징계했다는 겁니까? 오라버니 멋대로? 자작님이신 아버지의 동의도 없이?”
“하... 하지만...”
“난 결코 저 더러운 녀석을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어요. 하물며 저 녀석이 나를 동생으로 보는 꼴도 못봐줘요! 견습기사가 아니라 시종들을 시켜서 몰매를 주더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뭐가 문제죠?”
“힐레인!”
히리스의 단호한 태도에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이고 있는 알스테아의 보기 답답했는지 옆에서 듣고있던 힐레인이 나선다.
“다시 말하지만 저녀석은 델킨피에르가의 일원이 아니에요. 우리의 형제도 아니구요. 수파니의 혼혈일 뿐이에요. 오히려 견습기사들을 시켜 징계한 것을 황송하게 여겨야 할걸요?”
“힐레인!”
“언니는 저녀석을 델킨피에르로 인정할 지 몰라도 전 절대 그렇게 못해요. 나뿐만이 아닐거에요. 여기 알스테아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일걸요? 여기는 없지만 로메르 오라버니의 뜻도 별반 다르지 않을거라구요. 어때요? 그래도 잘못되었나요?”
“힐레인...”
“왜요, 히리스 언니?”
“넌 델킨피에르가문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거니?”
“그야 아버... 하지만 아버지라 할지라도 잘못된 건 잘못된 거라구요. 가문의 일원으로서 우리에게는 그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어요!”
“그럼 아버지에게 먼저 네 생각을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도록 하려무나. 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신다면 나도 반대하지는 않을테니.”
“하... 하지만...”
“착각하면 안된다. 물론 우리들은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작이신 아버지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 하지만 또한 그 결정이 바뀌기 전까지 복종해야 할 의무도 있다. 알겠니? 정 칸피니스를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 여기고 싶지 않거든 먼저 아버지의 결정을 바꾸고 나서 네 뜻대로 해도 해야하는 거다.”
“그... 그래도...”
“음?”
무언가 말하려던 힐레인은 자신을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고 힐난하는 듯 냉정하게 바라보는 히리스의 눈빛에 그만 기가 죽어 어쩔줄 모른다. 평소 상냥하고 부드러운 언니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 얼마나 엄격하고 냉혹한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더러운 혼혈아가 자신과 같은 델킨피에르가의 일언이라는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도발적으로 히리스를 노려본다.
“그래요. 언니 말이 맞아요. 델킨피에르 가문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자작이신 아버지이고, 그분의 결정을 그분이 뜻을 바꾸기 전까지 우리는 따라야 하겠죠. 그게 원칙이니까요. 우리의 의무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저는 결코 저 더러운 자식을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어요. 저 더러운 수파니의 혼혈아가 델킨피에르 성을 쓴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건 설사 아버지가 그 때문에 저를 벌하신다 하더라도 절대 굽힐 없는 제 의지에요. 제 의지를 꺾으시려면 아버지가 직접 제 목을 베어야 할거에요!”
“힐레인...”
“오늘은 여기에서 이만 물러나죠. 하지만 앞으로도 저는 아버지의 뜻에 따를 생각이 없으니 오늘과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거에요. 그게 싫거든 저를 죽여요!”
단호히 자신의 생각을 내뱉은 힐레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히리스를 등진 채 성큼성큼 걸어간다. 아마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은 없을 것이다. 그저 지금의 불쾌한 자리와 히리스를 피하고자 서둘러 걷고 있는 것이리라.
잠시 힐레인의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뒤쫓던 히리스는 다시 자신의 오라비 알스테아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단호한 엄격함으로 돌아와있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하실거죠?”
“나... 나도 히... 힐레인과 같은 생각이다.”
히리스의 기세에 눌리고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한 탓인지 말을 더듬는 것이 더없이 추해 보인다. 작은 오라비의 그같은 모습에 히리스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아버지의 뜻을 계속 거역하겠다는건가요?”
“그... 그래...”
“오라버니의 의지로? 죽음만이 꺾을 수 있는 단호한 선택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다는건가요?”
“아... 그... 그건...”
목숨까지 건다는 말에 놀란 듯 알스테아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굳어버린다. 고작 그정도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 생각하니 히리스는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 그렇다.”
“하아...”
“나는 결코 아버지의 뜻이라 할지라도 칸피니스 저 더러운 혼혈아자식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내 의지임과 동시에 힐레인의 뜻이기도 하고, 가문의 정당한 계승자인 로메르 형님의 뜻이기도 하다. 어머니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거다.”
“알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오늘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시겠다는 말이죠?”
“그... 그건...”
“예, 됐어요. 오라버니와 더 얘기를 나누다간 동성애자가 될 것 같으니 그만두도록 하죠.”
“무슨...?”
뜬금없는 말에 당황해하며 물어오는 오라비를 뒤로한 채 히리스는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있는 칸피니스에게로 걸어간다. 칸피니스를 둘러싸고 있던 견습기사들이 히리스의 걸음에 맞춰 좌우로 갈라지며 칸피니스에게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당신들은 어찌 할 건가요? 앞으로도 계속 오늘과 같은 일을 반복하실건가요?”
“저... 저기 그건...”
“히... 히리스님...”
알스테아나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정말 이러다가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버릴 것 같아.’
“누님 왔수?”
한심스러워하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바닥에 누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동생을 바라보는 순간 눈녹듯 사라진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누구나 동경하는 부드러움과 상냥함이 담긴 따뜻한 웃음이다. 알 수 없는 열기를 담은 따뜻한 시선이 바닥을 구르느라 더러워진 동생을 부드럽게 살핀다.
“그래. 몸은 괜찮니?”
“하하하... 어디 하루이틀 일입니까? 맞는 것도 자꾸 하다보면 면역이 생긴답니다.”
“푸훗... 그렇기도 하겠구나. 그래,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을 생각이니?”
“그래도 상관없기는 한데 사람들이 꽤 불편한 듯한 모양이니...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는데요?”
“그러니? 그럼 어서 일어나렴.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나랑요? 나랑 함께 가자는 겁니까?”
“왜 싫으니?”
장난스레 한쪽눈을 찡긋 감아보이는 히리스의 모습에 칸피니스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싫기는요. 미인 누님과 같이 간다면야 나로서는 영광이죠.”
“듣기는 좋구나. 어쨌든 어서 일어나렴. 견습기사들 수련시간에 이러고 있으면 방해되니까.”
“엿차! 알았습니다.”
크게 허리를 튕겨 한 번에 몸을 일으킨 칸피니스는 남몰레 히리스를 향해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의 옆에 몸을 세운다.
이십분 동안 계속된 구타와 모욕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칸피니스의 모습에 알스테아와 견습기사들의 눈이 가늘어진다. 칸피니스의 태연한 태도에 왠지 자신들이 모욕당한 듯한 기분이 든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기분이야 어쨌든 칸피니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히리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야 불쾌하든 말든, 모욕당한 기분이든 말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일. 칸피니스와 히리스는 서로의 이야기만 하면 된다.
“어디로 갈겁니까?”
“글세... 듣자하니 네 검술이 꽤 뛰어난 편이라면서?”
“남들 하는 것보다 조금 잘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그럼 내 호위를 해주겠니? 오랜만에 성밖 구경을 하고 싶은데...”
“그정도야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죠. 아름다운 레이디의 호위기사는 모든 견습기사들의 꿈이기도 하니까.”
“꿈 한 번 야무지구나. 주제에 내 호위기사라니...”
“하하하... 그정도 야심은 있어야 사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푸훗... 그것도 야심인거냐?”
“야심이란 원래 야무진 꿈이란 뜻 아뇨?”
“푸훗... 너는 아무래도 어학공부부터 다시해야겠다.”
“재능이 엿보이는 모양이죠?”
“너다운 대답이구나.”
“하하하... 칭찬 고맙습니다.”
히리스와 웃으며 멀어져가는 칸피니스를 보며 알스테아는 뿌드득 소리내어 이를 간다. 히리스에게서 느꼈던 당혹감과 칸피니스가 멀쩡한 모습을 보였을 때의 황당함이 모욕감으로 변해 그의 증오를 부추긴 때문이다.
“뭣들하나! 언제까지 더 혼혈아 자식만 바라보고 있을건가! 다시 수련을 시작한다!”
“예!”
하지만 히리스가 보는 앞에서 다시 칸피니스에게 시비를 걸 수도 없으니 당장 그 증오를 풀 길이 없다.
“서둘러라! 그래서 델킨피에르 자작가의 서임기사가 될 수 있겠나? 뭐하나?”
“거기 너! 빨리 안움직이나?”
“그게 검격이야? 검이 너를 잡아먹겠다.”
결국 애꿎은 견습기사들만 증오와 질투로 이성을 잃은 알스테아의 희생양이 되어 화풀이의 대상이 될 뿐이다.
“거기 빨리 움직이지 못해? 빨이 안움직여?”
자기도 견습인 주제에 자작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스스로의 위치를 망각해버린 알스테아에 의한 기사들의 수난이 칸피니스가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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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마검천황의 리메이크입니다. 리메이크라고는 하지만 아예 새로운 작품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겁니다. 캐릭터만 비슷할 뿐 시대나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전개되니까요. 특히 전작에서 비현실적으로 설정되었던 캐릭터들의 나이를 현실적으로 재설정함으로서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리메이크는 리메이크. 제목과 설정만 바뀌었을 뿐 색마검천황이 추구하는 바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즐거운 색마류"죠. 색마검천황에서 빠져있던 그림자가 추가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즐거운 색마류라는 저의 지향은 바뀌지 않을 예정입니다.
다음회예고>> 히리스와의 밀회는 즐겁기만 하다. 부드럽고 수줍은 그녀의 모습뒤에 숨은 열정은 아직 어린 칸피니스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뜨겁기만 한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자신을 가누지 못하는 칸피니스에게 어머니의 품은 안식처인가? 아니면 그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지옥의 길인가?
이번에는 본평과 예고편을 최대한 일치시키도록 노력할게요.
‘이런!!’
곤란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연무장을 지나가야 하는 지금이 견습기사들의 수련시간이라니! 멀리 올망졸망 모여서 검술을 수련하고 있는 설흔 명 가량의 젊은이들을 보며 칸피니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여어~~!! 귀염둥이 도련님~~! 오늘도 또 뵙게 되었네요?”
귀염둥이라... 15살의 나이라면 남자라도 귀염둥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15살의 나이에 벌써 키가 16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의 사내라면 그 말에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귀염둥이라 부른다면 놀려먹자는 의도 외에는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오늘도 아름다운 검은머리입니다. 귀여우신 도련님. 그 검은 머릿결로 나를 유혹해줘요.”
“이런이런, 조셉 이녀석은 밤일이 시원찮다구요. 보세요. 이 단단한 근육을. 탐나지 않으세요?”
“남자는 뭐니뭐니해도 허리라구요. 이 탄력넘치고 유연한 허리를 보세요. 이 허리로 도련님을 죽여드릴거라구요. 어때요? 생각 없어요?”
“어이, 자네들! 도련님은 내거라구! 17년전 자작님께서 2.부.인.을 들이실 때부터 점찍어두었단 말야!”
어처구니없는 녀석들이다. 자신들만큼이나 덩치가 큰 사내에게 저같은 장난을 걸다니. 더구나 그 사내는 저들보다 힘은 물론이고 검술도 더 뛰어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저런 장난이 통할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하하하... 그때 자넨 세 살밖에 안되었다구. 세 살 때부터 점찍어두었다는건가?”
“그만큼 2.부.인.께서 대단하시다는 것 아니겠나? 세 살짜리 어린아이마저 그 매력에 사로잡혀버렸으니 말야.”
“맞아, 맞아, 나는 그때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혹적인 매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2.부.인의 기사가 되기로 맹새했었지. 보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한 느낌이라 어쩔 수 없었다니까?”
“그렇게 아름다우신 분이란 말인가?”
“아무렴. 그렇지 않고서야 천한 수파니의 여자가 어찌 자작님의 2부인이 될 수 있었겠나? 겉.보.기.가.아.름.답.기.때.문.이.지.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나는 그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네.”
“그럼 조셉의 첫사랑은 2부인이 되는건가?”
“그렇겠지? 주군의 부인과의 사랑이라... 정말 비극이로군.”
“참 2부인도 죄인이시지. 안그런가?”
자신에 대한 모욕은 곧 어머니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진다. 말이 2부인이지 귀족이 아닌데다 숲의 종족인 수파니이기도 한 그의 어머니를 자작가의 2부인으로 인정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인간도 아닌 수파니의 여자가 자작을 유혹해서 2부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더욱 경멸하고 조롱할 뿐이다. 심지어 델킨피에르 영지에 속한 농노들마저도 그러할 정도다.
“그대로 10년만 기다렸으면 자네가 저기 잘생긴 도련님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겠구먼.”
“검은머리의 수파니에게서 태어난 검은머리의 아들이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흐흐흐... 차라리 검은머리의 딸을 여럿 낳아 분양하는 게 어떤가?”
“그게 좋겠군. 정말 명안이야. 폴. 자네는 정말 천재야!”
“흐흐흐... 칭찬해주어 고맙네.”
저들에게 있어 칸피니스 델킨피에르는 수파니의 천한 여자의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천한 자식일 뿐이다. 그의 어머니나 그나 저들은 주군의 부인으로도, 주군의 자식으로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어이~~!! 도련님~~!! 그냥 지나가는거요?”
“이 애끓는 사랑의 고백을 들어달라구~~!”
“도련님의 그 하얀 엉덩이로 내 자식을 보고 싶단 말요~~!!”
“자네 그건 칸피니스 도련님을 모욕하는 소리네. 어찌 수파니의 엉덩이가 하얄 수 있겠는가? 어서 검은 엉덩이로 바꾸게.”
“맞아! 검은 엉덩이야! 검은 엉덩이!!”
“하하하하하!!!”
그래서 저토록 마음껏 조롱하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결코 침범해서는 안되는 주군의 부인과 아들을 태연히 모욕하며 웃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칸피니스나 그의 어머니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다.
‘웃기는 자식들이로군!’
솔직히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저토록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모욕하는데도 화가 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하루이틀 있어온 일도 아니다. 몇 년 째, 아니 칸피니스가 사물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계속되어온 일이다.
‘레파토리라도 좀 바꾸지. 하여간 머리 나쁜 것들은...’
더구나 그 내용이라는 것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끼니 때마다 먹는 빵도 매일 같을 수는 없는데 어찌된 것들인지 하는 말이나 행동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칸피니스는 그것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해버린다.
‘그건 기억력이 딸려서야... 어제 자기가 한 일도 제대로 기억 못하거든.’
저들 중에는 기사 서임을 앞둔 20대 중반에 이른 사내들도 있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젊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칸피니스보다 나이가 많다. 그럼에도 저들 가운데 칸피니스를 이길 수 있는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그들의 무능 외에는 다른 무엇도 아니다.
‘멍청한 것들...’
평화로운 영지라면 조금 무능하더라도 민폐는 되지 않는다. 무능하더라도 그럭저럭 자신의 자리는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델킨피에르 영지는 결코 평화롭지 않다. 아직 채 개척되지 않은 흑암의 숲은 여전히 많은 몬스터를 품고 있고, 그의 어머니의 종족이기도 한 수파니족 또한 호시탐탐 빼앗긴 그들의 땅을 되찾으려 노리고 있다. 일 년에만도 십여차례 이상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는 이곳에서 저토록 생각없이 자신의 무능함을 과시하는 것은 오거 열 마리가 습격하는 것보다 더 큰 해악일 수 있다.
‘하긴... 그러니 일 년에만도 열 차례 이상 서임식을 하는 것 아니겠어?’
다행히 흑암의 숲은 공정하다. 숲을 파괴한 침입자에 대해서도 그 공정함을 잃지 않는다. 무능한 기사들은 흑암의 숲이 제공하는 몬스터들에 의해 선별되어 죽어간다. 몬스터가 죽이지 않은 기사는 다시 수파니들이 죽여서 정리한다. 그 혹독한 시련을 거치다보면 기사서임 삼 년이 지난 시점에는 무능한 기사들은 결코 기사의 직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저 머저리들 가운데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칸피니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살아남을만한 놈들이라면 머저리라고 부르지도 않지. 에휴...’
생각같아서는 흑암의 숲이 처리하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저 머저리들을 처리해버리고만 싶다. 저들 설흔명이 모두 달려든다 하더라도 한 시간 안에 모두 도륙낼 자신도 있다. 저들의 스승인 마스터 게일란마저도 삼십합 안에 제압할 수 있는 칸피니스다. 저까짓 머저리 따위 얼마가 달려들든지 그저 우습기만 할 뿐이다.
“야! 칸피니스!”
듣기 싫은 소리는 듣지 않는 게 상책이다. 괜히 듣기 싫은 소리 일일이 듣고 있어봐야 기분만 나빠진다. 차라리 딴생각을 하면서 아예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무시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칸피니스가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던 것도 모두 그같은 이유 때문이다.
“야! 수파니의 사생아!!”
하지만 이 목소리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아, 일스테아 형님!”
수련기사들 사이에서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저 일스테아 델킨피에르의 말까지 무시했다가는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다.
“형님? 누가 네 형님이냐? 수파니 따위가 어찌 내게 형이라 불러!?”
끼리끼리 논다고 알스테아도 저기 몰려있는 머저리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머저리다. 검술이나 계략 어느 쪽으로든 두려워할만한 인간이 못된다. 다만 칸피니스가 꺼려하는 것은 저 작자가 자신의 형이며 또한 자작가의 둘째 아들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본부인 출생이다. 수파니와의 혼혈이라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칸피니스와는 전혀 다른 입장인 것이다.
“아버님께서 그리 시키셨거든요. 형이라 부르라구요. 따지시려면 아버지께 따지세요.”
“뭐야?”
별 것도 아닌 말에 버럭 화내며 검부터 뽑아드는 것이 정말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나마 저런 머저리가 첫째 아들이 아닌 것이 델킨피에르 가문을 위해서도 다행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나마 첫째는 조금 낫지. 그놈은 음흉맞기는 해도 저렇게 멍청하지는 않거든.’
눈앞의 알스테아나 이 자리에는 없는 첫째 로메르나 그들만 칸피니스를 형제로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존재를 형이라 여길 정도로 칸피니스는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라? 꼴에 휘두르기까지?’
정말 어처구니없는 놈이다. 자신의 검술이 칸피니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난 삼 년간 아프게 몸으로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화가 난다고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 채 검을 휘둘러 달려들다니. 아직까지도 자신의 신분이 그 형편없는 검술을 보충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모양이다.
‘저 머저리는 학습능력까지 결여된 머저리란 말인가?’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저 우습기만 하다. 저렇게 또 한참을 칼을 가지고 춤을 추다가 대충 내지른 칸피니스의 팔에 의해 바닥에 나뒹굴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 분에 못이겨 씩씩거리며 주위의 견습기사들을 시켜 자신을 공격하게 할 것이다.
‘오늘은 그냥 들이받아버릴까?’
대충 앞으로의 전개가 그려지니 그때 상황에 맞춰 어찌 행동할 것인가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면 오늘도 또 적당히 맞아주고 말까?’
눈앞에 땀을 뻘뻘 흘르며 필살의 검초를 휘두르고 있는 알스테아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다. 나름대로 회심의 일격이랍시고 휘두르고는 있지만 열 번의 검격에 벌써부터 숨이 흐트러지고 다리고 후들거리는 멍청이의 검격따위 파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맞으면 아픈데...’
오늘의 일과라 여기고 태연히 넘어가려 해보지만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머니가 인간이 아니라고, 그 인간이 아닌 어머니에게서 난 혼혈아라고 매일 이렇게 당하기만 해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니 울컥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냥 죽여버릴까?’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알스테아라는 생각없는 멍청이와 로메르라는 음흉하기만 한 바보는 이미 몇 년 전에 죽은 시체가 되어 땅위를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혼자 몸이라면야 눈앞의 거슬리는 것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홀가분하게 도망치면 된다. 굳이 이런 수모를 참아가며 성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뭐... 그냥 오늘도 적당히 몇 대 맞아주고 말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어머니의 존재를 생각하면 치밀어오르는 살기를 억누르지 않을 수 없다. 함께 도망칠 수도 없는 어머니가 성에 남아 겪게 될 고초를 생각하면 충동이 시키는 대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라 부르기도 싫은 아버지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 자작이지만 그나마 이런 때는 그가 자신을 아들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진다. 아무리 혼혈이라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자작이 자신의 아들로 인정한 이상 자작 말고는 누구도 함부로 죽이거나 다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야압! 얍!! 헉헉!! 야앗!! 헉헉헉헉!! 헉!! 헉헉!! 얍!”
‘정말 섹시하게 숨을 몰아쉬는군. 밤에 힘쓰는 소리 같잖아?’
마음을 정하고 얼핏 알스테아를 보니 땀에 범벅이 되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이 보인다. 서있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이는 모습임에도 가쁜 숨을 뱉아가며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안쓰럽긴! 멍청이 똥고집이지!’
안되는 걸 알면서도 제 성질에 못이겨 집착하는 모습이 어찌나 답답해 보이는 지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머리가 돌아갈 정도로 제대로 한 대 먹이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척추를 따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조금만 더 이대로 두게 된다면 그 막연한 기대에 자신의 주먹을 맡겨볼 지 모른다. 아무리 나이에 비해 성숙한 칸피니스라 하지만 아직은 나이 15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자칫 자신의 감정에 못이겨 충동적으로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음?’
하지만 다행인지 누군가 칸피니스의 등뒤로 다가오고 있다. 살기랄 것도 없는 미약한 적대감의 수준을 보아하니 검술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듯 하다.
‘그 계집애인가?’
얼핏 향수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여자가 분명하다. 지금 이시간에 자신의 등뒤로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이며 다가설 여자라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알스테아의 동생인 힐레인이다.
‘다리를 걸까? 아니면 몽둥이로 뒤통수를 칠까? 저번에는 돌을 던졌었지, 아마?’
오라비인 알스테아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혼혈아인 칸피니스에 대해 강한 증오심을 갖고 있는 힐레인인지라 꼭 이렇게 싸울 때면 뒤에서 습격해서 자기 오라비를 도와주곤 한다. 오라비조차도 검을 휘둘러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자신을 뒤에서 습격한다고 그 어설픈 공격이 성공하리라 생각하는 그 머릿속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이럴 때 그녀의 개입은 반갑기만 하다.
‘그래도 여자한테 맞아 쓰러지는 게 낫겠지?’
여자에게 맞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칸피니스는 남자에게 맞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멍청한 사내자식들에게 맞는 것보다야 아름답고 현명한 여자들에게 맞아 쓰러지는 것이 아무래도 폼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 자기보다 나은 남자란 없다고 믿는 칸피니스이기에 가능한 사고방식이다.
“얍!”
‘에유, 기합소리도 귀엽지!’
이번에는 나무몽둥이인 모양이다. 그 갸녀린 팔로 나무몽둥이를 휘둘러봐야 얼마나 아프겠냐만 그래도 그 성의가 안타까워서 그대로 맞고 쓰러지는 시늉을 해보인다.
“윽!”
“오라버니! 기회에요! 지금 당장 저 더러운 혼혈아 자식을 죽여버려요! 목을 따버리라구요!”
기껏 오버해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뒹구는 수고까지 해보이고 있음에도 힐레인의 말투는 더없이 살벌하기만 하다. 검술을 익히지 않은 여자아이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살기에 쓰러지는 연기를 즐기던 칸피니스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찔 위축된다.
‘그나마 제 오라비에 비해 한참 낫군.’
성질만 고약한 멍청이인 알스테아에 비해 힐레인은 독기와 행동력이 있다. 분노와 경멸조차도 비겁 속에 숨겨버리는 오라비와는 달리 힐레인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행동으로 옮겨버린다. 아마도 그녀가 검술을 익혔다면 나중에 아버지의 문책을 들을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칸피니스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금 위험했으려나?’
칸피니스가 판단하기에 검술의 자질에 있어서도 힐레인이 알스테아나 로메르에 비해 더 뛰아나다. 힘에서는 딸릴지 모르지만 유연하고 민첩한 그녀의 근육들은 가벼운 검을 쥐고 휘두르기에 적합하다. 레이피어를 그 하얀 손에 쥐어주고 직접 검술을 가르쳐보고 싶어질 정도다.
퍽--!! 퍽--!! 퍽--!!
“개자식! 죽어! 죽어!”
“썩을 자식아! 더러운 혼혈아 자식!! 수파니의 잡종!!”
힐레인의 말에 고무된 것인지 알스테아가 쓰러진 칸피니스에게 달려와 발길질을 해댄다. 역시나 기대대로 검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아마도 검을 휘둘렀을 경우 아버지가 문책해올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검을 써요! 목을 그어버리라구요! 아니면 팔다리를 잘라버리든지! 뭣해요! 검으로 힘줄부터 잘라버려요! 저 더러운 것이 다시는 잘난체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라구요!”
‘어쩜 그렇게 살벌한 말을... 귀여워라...’
멍청이 알스테아는 때리는 데 있어서도 멍청이일 뿐이다. 그렇게 어설프게 때려봐야 아플 리 없다. 다리에 힘을 꽉꽉 준 상태로 아무리 힘껏 차봐야 칸피니스의 단단한 근육을 뚫고 그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리 만무하다.
쓰러진 상대를 때리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알스테아가 힐레인의 말에 따를 리 없다. 얼굴까지 붉혀가며 살기를 풀풀 풍기는 동생의 모습이 아무리 귀엽더라도 근엄한 아버지의 질책이 더 무서울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문계승권도 없는 주제에 저리도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어찌보면 불쌍하기까지 하다.
‘불쌍하기는! 멍청이일 뿐이라니까!’
아까 지쳐있던 모습을 고려해보면 아마도 2분 정도 마음껏 때리고 나면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힘이 빠지면 다른 견습기사들을 시켜 몰매를 주게 할 수도 있으니 그것으로 끝은 아니기 쉽다.
‘아아... 지겨워... 대충 빨리 좀 끝내라!’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한참을 때리던 알스테아가 발길질을 거두고 뒤로 물러난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쓸데없이 힘을 빼느라 지쳐서 더 이상 때리지 못하게 된 모양이다.
“거기 자네들! 와서 이 자식을 밟아버려!”
역시나 알스테아의 행동은 칸피니스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며칠동안 돌아다닐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자근자근 밟아버리라구!”
알스테아의 명령이 떨어지자 평소 자작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조롱하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던 견습기사들이 기회라는 듯 달려들어 칸피니스를 구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도 알스테아에 못지 않은 멍청이들이라 때리는 것도 시원찮다.
“그냥 목을 베어버리면 된다니까요! 그냥 죽여버려요! 아버지가 뭐라 하시면 한 소리 듣고 말죠! 뭣하러 이런 녀석을 살려둬요? 정 안되면 팔다리 중 하나라도 자르자구요!”
“힐레인! 다큰 처녀가 무슨 말이 그러냐?”
“뭐가요? 그럼 저런 더러운 혼혈아 자식이 우리 가문의 일원으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거에요? 아까 들었잖아요? 저 더러운 입으로 오라버니를 형이라 부르는 걸! 난 결코 그런 꼴 못봐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아버지가 그렇게 무서우면 아예 동생으로 인정하든가! 저 더러운 수파니의 혼혈아따위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말을 인정하지 못하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니에요! 기왕 말을 거역할 거면 제대로 확실히 해야죠!”
‘힐레인 말이 맞다!’
칸피니스가 자신의 말에 동조해주고 있음을 모른 채 힐레인은 독기어린 눈으로 몰매를 맞고 있는 칸피니스를 노려보며 예의 살벌한 말을 이어간다.
“어차피 저녀석을 죽여봐야 아버지한테 야단이나 조금 맞고 말거에요. 심하면 방에 갇힌 채 근신해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고작 그정도라구요. 저 쓰레기를 치우는 데 그정도 댓가는 치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어허...!! 힐레인!”
“왜요? 겁나나요?”
“어허...!”
“보세요. 저기 견습기사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는 저 꼴을요. 견습기사에게 몰매를 맞는 주군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극상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때리는 저들이나 시킨 우리들이나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있잖아요? 이미 저들이나 우리나 저녀석을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거라구요. 이미 아버지이 명을 어기고 있다구요. 그러면서 고작 칼질 한 번 하면 되는 일을 그렇게 두려워하는건가요?”
“그것과 이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훗~~! 야단맞을 차원이 다른 일이겠죠.”
“힐레인! 무슨말을...”
“아아... 됐어요. 그럼 검이라도 빌려줘요. 내가 직접 처리할테니까. 내가 저놈을 죽이고 모든 책임을 질테니 겁쟁이 오라버니는 거기서 지켜만보고 있으라구요.”
“그럴수는 없다!”
“훗! 왜요? 그래도 겁나나요?”
“겁나는게 아니라!!”
“걱정마세요. 오라버니께 피해가 가게는 않을테니까. 자... 검을 주세요.”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데도!”
“오라버니!”
“힐레인!”
이렇게 건장한 사내 수십명에게 둘러싸여 뭇매를 맞으면서도 남매의 만담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칸피니스만이 보일 수 있는 재주라 할 것이다.
‘정말 살떨리게 만드는 계집애네.’
힐레인의 살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자신을 걷어차고 있는 떨거지들을 죽여버릴 뻔 했다. 다행히 알스테아의 바보짓 덕분에 살기를 억누르기는 했지만 검보다도 더욱 위협적인 칸피니스의 살기를 머금은 주먹이 살기 위한 본능으로 그들의 머리를 무수고 내장을 터뜨릴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바보짓을 계속 해야 하는거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주체하지 못할 살기에 자신을 맡겨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려는데 불현듯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와 그를 말린다.
“무엇들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이게 무슨 꼴입니까?”
맑고 청량한 목소리를 따라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이 머무는 곳에 실버블론드의 가는 머릿결을 등허리에까지 길게 기른 창백한 외모의 17살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있는 것이 보인다.
“히... 히리스님!”
“히리스님!”
자작가의 장녀 히리스 델킨피에르다.
“칸피니스는 아버지께서 인정한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입니다. 델킨피에르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이 어찌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을 이리 욕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하극상을 하시려는 겁니까?”
“히... 히리스님... 그게...”
“저... 히리스님... 그게 아니오라...”
평소 히리스의 아름다움과 상냥한 성품을 동경해오던 견습기사들인지라 그녀의 질책에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해한다. 그녀의 눈밖에 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로 말과 행동이 경직되는 것에 한눈에 보인다.
“내가 그리 하라 시켰다.”
견습기사들의 꼴불견을 보다 못해 알스테아가 나선다.
“오라버니께서요?”
“그렇다.”
“오라버니께서,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서 누구보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오라버니께서 견습기사들을 시켜 칸피니스에게 몰매를 주게 했다는건가요?”
“그렇다. 뭐가 잘못됐느냐? 저녀석은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이랄 수도 없는 혼혈아다. 그것도 사람도 아닌 수파니와의 혼혈아. 그러 주제에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 행세하고 돌아다니기에 잠시 징계한 것 뿐이다.”
“하! 우습군요. 혼혈이든 뭐든 그는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입니다. 그 어미가 수파니족이든 어쨌든 아버지가 인정한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자작가의 아들이라구요. 그런데 그런 그를 견습기사를 시켜 징계했다는 겁니까? 오라버니 멋대로? 자작님이신 아버지의 동의도 없이?”
“하... 하지만...”
“난 결코 저 더러운 녀석을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어요. 하물며 저 녀석이 나를 동생으로 보는 꼴도 못봐줘요! 견습기사가 아니라 시종들을 시켜서 몰매를 주더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뭐가 문제죠?”
“힐레인!”
히리스의 단호한 태도에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이고 있는 알스테아의 보기 답답했는지 옆에서 듣고있던 힐레인이 나선다.
“다시 말하지만 저녀석은 델킨피에르가의 일원이 아니에요. 우리의 형제도 아니구요. 수파니의 혼혈일 뿐이에요. 오히려 견습기사들을 시켜 징계한 것을 황송하게 여겨야 할걸요?”
“힐레인!”
“언니는 저녀석을 델킨피에르로 인정할 지 몰라도 전 절대 그렇게 못해요. 나뿐만이 아닐거에요. 여기 알스테아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일걸요? 여기는 없지만 로메르 오라버니의 뜻도 별반 다르지 않을거라구요. 어때요? 그래도 잘못되었나요?”
“힐레인...”
“왜요, 히리스 언니?”
“넌 델킨피에르가문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거니?”
“그야 아버... 하지만 아버지라 할지라도 잘못된 건 잘못된 거라구요. 가문의 일원으로서 우리에게는 그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어요!”
“그럼 아버지에게 먼저 네 생각을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도록 하려무나. 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신다면 나도 반대하지는 않을테니.”
“하... 하지만...”
“착각하면 안된다. 물론 우리들은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작이신 아버지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 하지만 또한 그 결정이 바뀌기 전까지 복종해야 할 의무도 있다. 알겠니? 정 칸피니스를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 여기고 싶지 않거든 먼저 아버지의 결정을 바꾸고 나서 네 뜻대로 해도 해야하는 거다.”
“그... 그래도...”
“음?”
무언가 말하려던 힐레인은 자신을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고 힐난하는 듯 냉정하게 바라보는 히리스의 눈빛에 그만 기가 죽어 어쩔줄 모른다. 평소 상냥하고 부드러운 언니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 얼마나 엄격하고 냉혹한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더러운 혼혈아가 자신과 같은 델킨피에르가의 일언이라는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도발적으로 히리스를 노려본다.
“그래요. 언니 말이 맞아요. 델킨피에르 가문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자작이신 아버지이고, 그분의 결정을 그분이 뜻을 바꾸기 전까지 우리는 따라야 하겠죠. 그게 원칙이니까요. 우리의 의무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저는 결코 저 더러운 자식을 델킨피에르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어요. 저 더러운 수파니의 혼혈아가 델킨피에르 성을 쓴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건 설사 아버지가 그 때문에 저를 벌하신다 하더라도 절대 굽힐 없는 제 의지에요. 제 의지를 꺾으시려면 아버지가 직접 제 목을 베어야 할거에요!”
“힐레인...”
“오늘은 여기에서 이만 물러나죠. 하지만 앞으로도 저는 아버지의 뜻에 따를 생각이 없으니 오늘과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거에요. 그게 싫거든 저를 죽여요!”
단호히 자신의 생각을 내뱉은 힐레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히리스를 등진 채 성큼성큼 걸어간다. 아마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은 없을 것이다. 그저 지금의 불쾌한 자리와 히리스를 피하고자 서둘러 걷고 있는 것이리라.
잠시 힐레인의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뒤쫓던 히리스는 다시 자신의 오라비 알스테아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단호한 엄격함으로 돌아와있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하실거죠?”
“나... 나도 히... 힐레인과 같은 생각이다.”
히리스의 기세에 눌리고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한 탓인지 말을 더듬는 것이 더없이 추해 보인다. 작은 오라비의 그같은 모습에 히리스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아버지의 뜻을 계속 거역하겠다는건가요?”
“그... 그래...”
“오라버니의 의지로? 죽음만이 꺾을 수 있는 단호한 선택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다는건가요?”
“아... 그... 그건...”
목숨까지 건다는 말에 놀란 듯 알스테아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굳어버린다. 고작 그정도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 생각하니 히리스는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 그렇다.”
“하아...”
“나는 결코 아버지의 뜻이라 할지라도 칸피니스 저 더러운 혼혈아자식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내 의지임과 동시에 힐레인의 뜻이기도 하고, 가문의 정당한 계승자인 로메르 형님의 뜻이기도 하다. 어머니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거다.”
“알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오늘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시겠다는 말이죠?”
“그... 그건...”
“예, 됐어요. 오라버니와 더 얘기를 나누다간 동성애자가 될 것 같으니 그만두도록 하죠.”
“무슨...?”
뜬금없는 말에 당황해하며 물어오는 오라비를 뒤로한 채 히리스는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있는 칸피니스에게로 걸어간다. 칸피니스를 둘러싸고 있던 견습기사들이 히리스의 걸음에 맞춰 좌우로 갈라지며 칸피니스에게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당신들은 어찌 할 건가요? 앞으로도 계속 오늘과 같은 일을 반복하실건가요?”
“저... 저기 그건...”
“히... 히리스님...”
알스테아나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정말 이러다가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버릴 것 같아.’
“누님 왔수?”
한심스러워하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바닥에 누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동생을 바라보는 순간 눈녹듯 사라진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누구나 동경하는 부드러움과 상냥함이 담긴 따뜻한 웃음이다. 알 수 없는 열기를 담은 따뜻한 시선이 바닥을 구르느라 더러워진 동생을 부드럽게 살핀다.
“그래. 몸은 괜찮니?”
“하하하... 어디 하루이틀 일입니까? 맞는 것도 자꾸 하다보면 면역이 생긴답니다.”
“푸훗... 그렇기도 하겠구나. 그래,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을 생각이니?”
“그래도 상관없기는 한데 사람들이 꽤 불편한 듯한 모양이니...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는데요?”
“그러니? 그럼 어서 일어나렴.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나랑요? 나랑 함께 가자는 겁니까?”
“왜 싫으니?”
장난스레 한쪽눈을 찡긋 감아보이는 히리스의 모습에 칸피니스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싫기는요. 미인 누님과 같이 간다면야 나로서는 영광이죠.”
“듣기는 좋구나. 어쨌든 어서 일어나렴. 견습기사들 수련시간에 이러고 있으면 방해되니까.”
“엿차! 알았습니다.”
크게 허리를 튕겨 한 번에 몸을 일으킨 칸피니스는 남몰레 히리스를 향해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의 옆에 몸을 세운다.
이십분 동안 계속된 구타와 모욕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칸피니스의 모습에 알스테아와 견습기사들의 눈이 가늘어진다. 칸피니스의 태연한 태도에 왠지 자신들이 모욕당한 듯한 기분이 든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기분이야 어쨌든 칸피니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히리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야 불쾌하든 말든, 모욕당한 기분이든 말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일. 칸피니스와 히리스는 서로의 이야기만 하면 된다.
“어디로 갈겁니까?”
“글세... 듣자하니 네 검술이 꽤 뛰어난 편이라면서?”
“남들 하는 것보다 조금 잘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그럼 내 호위를 해주겠니? 오랜만에 성밖 구경을 하고 싶은데...”
“그정도야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죠. 아름다운 레이디의 호위기사는 모든 견습기사들의 꿈이기도 하니까.”
“꿈 한 번 야무지구나. 주제에 내 호위기사라니...”
“하하하... 그정도 야심은 있어야 사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푸훗... 그것도 야심인거냐?”
“야심이란 원래 야무진 꿈이란 뜻 아뇨?”
“푸훗... 너는 아무래도 어학공부부터 다시해야겠다.”
“재능이 엿보이는 모양이죠?”
“너다운 대답이구나.”
“하하하... 칭찬 고맙습니다.”
히리스와 웃으며 멀어져가는 칸피니스를 보며 알스테아는 뿌드득 소리내어 이를 간다. 히리스에게서 느꼈던 당혹감과 칸피니스가 멀쩡한 모습을 보였을 때의 황당함이 모욕감으로 변해 그의 증오를 부추긴 때문이다.
“뭣들하나! 언제까지 더 혼혈아 자식만 바라보고 있을건가! 다시 수련을 시작한다!”
“예!”
하지만 히리스가 보는 앞에서 다시 칸피니스에게 시비를 걸 수도 없으니 당장 그 증오를 풀 길이 없다.
“서둘러라! 그래서 델킨피에르 자작가의 서임기사가 될 수 있겠나? 뭐하나?”
“거기 너! 빨리 안움직이나?”
“그게 검격이야? 검이 너를 잡아먹겠다.”
결국 애꿎은 견습기사들만 증오와 질투로 이성을 잃은 알스테아의 희생양이 되어 화풀이의 대상이 될 뿐이다.
“거기 빨리 움직이지 못해? 빨이 안움직여?”
자기도 견습인 주제에 자작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스스로의 위치를 망각해버린 알스테아에 의한 기사들의 수난이 칸피니스가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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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마검천황의 리메이크입니다. 리메이크라고는 하지만 아예 새로운 작품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겁니다. 캐릭터만 비슷할 뿐 시대나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전개되니까요. 특히 전작에서 비현실적으로 설정되었던 캐릭터들의 나이를 현실적으로 재설정함으로서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리메이크는 리메이크. 제목과 설정만 바뀌었을 뿐 색마검천황이 추구하는 바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즐거운 색마류"죠. 색마검천황에서 빠져있던 그림자가 추가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즐거운 색마류라는 저의 지향은 바뀌지 않을 예정입니다.
다음회예고>> 히리스와의 밀회는 즐겁기만 하다. 부드럽고 수줍은 그녀의 모습뒤에 숨은 열정은 아직 어린 칸피니스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뜨겁기만 한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자신을 가누지 못하는 칸피니스에게 어머니의 품은 안식처인가? 아니면 그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지옥의 길인가?
이번에는 본평과 예고편을 최대한 일치시키도록 노력할게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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