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기서 제국기사단 본부로 바로 가봐야겠다.”
“예? 혼자서요?”
칸피니스가 마차를 세우고 내려서자 와르디가 따라 내리며 물어온다. 칸피니스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와르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심하라는 듯 웃음을 지어준다.
“제국기사단 본부는 세습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너희들이 갈만한 곳은 아니야.”
“하지만...”
“세습작위를 받은 귀족 가운데는 쓰레기들이 많다. 너희들이 그런 쓰레기들 사이에서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칸피니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와르디는 너무도 잘 안다. 칸피니스와의 관계 때문에 황도에서는 물론 고향에서까지 숱한 모욕과 경멸을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후우... 알겠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그럼 먼저 가있을게요.”
“그래. 먼저 가서 펠란제스 부인께 인사도 드리고”
와르디가 고개를 숙여 납득한다는 표시를 보이고 한걸음 물러서자 칸피니스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웃어보인다. 20살이 넘은 다큰 처녀인 자신의 머리를 스스럼없이 쓰다듬어오는 칸피니스의 큰 손에 와르디는 항의의 표시로 칸피니스를 째려보며 얼굴을 붉힌다. 그녀의 그런 모습이 보기 좋은지 와르디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거칠어지더니 얼굴 가득 떠오른 웃음이 더욱 짙어진다.
“롯시!”
“예!”
거친 손길을 이기지 못하고 와르디가 몸을 뒤로 물리자 더 이상 와르디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없게 된 칸피니스는 입맛을 다시며 롯시를 부른다.
“네가 일행의 선임이지?”
“네!”
나이라면 레인이 27살, 루시가 25살로 롯시보다 많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델킨피에르가의 가신에 불과한 기사들이다. 델킨피에르가의 일족이 포함된 일행을 이끌기에는 그 신분이 따라주지 않는다. 따라서 레인이나 루시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델킨피에르 일족에 속하는 롯시에게 선임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다.
“네가 책임지고 일행을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저택으로 인솔해야 한다. 펠란제스 백작부인은 파트리샤의 어머니이기도 하니까 가는데 무리는 없을거야. 너도 몇 번 가본 곳이고. 할 수 있겠지?”
“네.”
칸피니스의 물음에 답하는 롯시의 대답에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롯시가 황도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4년 전 15살 때 처음 칸피니스를 따라 황도에 온 후 4년 째 매년 칸피니스의 일행으로 황도에 온 적이 있다. 거기다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저택은 황도에 올 때마다 머물렀엇다. 실수로라도 일행의 인솔에 실패할 수 없는 너무도 익숙한 곳들인 것이다.
“벌써 4년 째 가본 곳이니까 아마 파트리샤의 도움이 없더라도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거야. 저택의 경비병들도 네 얼굴을 알고 있으니 들어가는 데도 문제가 없을테구. 더구나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저택에는 디이즈가 있을테니까.”
“디이즈님이요?”
디이즈의 이름이 나오자 반색하며 반응해온 것은 롯시가 아닌 딜레인이다.
“디이즈님을 뵐 수 있는건가요?”
얼굴까지 붉게 상기된 것을 보니 디이즈의 이름이 꽤나 딜레인을 흥분시킨 모양이다. 하긴 디이즈가 아직 델킨피에르 성에 있을 때 그녀를 가장 따랐던 게 딜레인이다. 디이즈를 동경하여 닮고싶다는 마음 하나로 검술수련에 전념하여 고작 17살의 어린나이에 델킨피에르에서도 손꼽히는 검술을 지닌 검사가 되었을 정도니 딜레인이 디이즈의 이름을 듣고 흥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당연히!”
“와아아~~!!”
3년 전부터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호위 겸 황도 파견기사로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작년에도 칸피니스 일행에 포함되었던 딜레인이 그녀를 보지 못했을 리 없다. 아마도 올해도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리 기뻐하는 것을 보니 딜레인이 디이즈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알 수 있다.
“조금 있으면 만날 수 있을거야. 아니 우리가 황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테니 그쪽에서 먼저 마중나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래. 그렇게 좋니, 딜레인?”
“그럼, 좋구 말구요. 디이즈님인걸요. 디이즈 엘라프. 델킨피에르 최강의 여기사. 단순히 기술만으로 따지면 아빠하고도 겨룰 수 있는 검술을 지닌 분이잖아요.”
“그렇지.”
디이즈 엘라프는 칸피니스가 알고 있는 한 최강의 여기사다. 남자를 포함하더라도 그녀를 검술로 이길 수 있는 기사는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된다. 그나마 슈베르티 백작 정도가 아니라면 그녀를 확실히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녀의 나이가 이제 고작 24살인 것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재능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그렇다고 검기(劍技)로 칸피니스와 겨룰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타고난 유연성과 민첩함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검격이 너무도 화려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아직까지 그녀의 검기는 칸피니스에게 미치지 못한다. 10년 정도 뒤라면 모를까 아직까지 그녀의 검술은 미숙하기만 하다. 물론 칸피니스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아아... 정말 기대되요. 디이즈님의 검술을 다시 볼 수 있다니... 그 화려하고 날카로운 검기를 옆에서 보면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흥분되요.”
딜레인의 직관은 때때로 칸피니스조차도 놀라게 한다. 칸피니스의 강함을 단순히 강함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재능과 능력과 비교해 거리를 재는 능력은 그 대단하다는 디이즈조차도 갖지 못한 것이다.
디이즈가 칸피니스와 자신의 거리를 깨닫고 자신만의 강함을 추구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녀의 강함이 칸피니스의 강함을 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런데 딜레인은 그녀의 강함에조차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직관만으로 그녀가 느낀 것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잇는 것이다. 디아즈의 강함에 필적하는 그녀의 직관은 그녀가 가진 최고의 재능이다.
신체적인 능력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그녀의 직관은 항상 그녀로 하여금 그순간 가장 좋은 행동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줄 것이다. 그녀의 떨어지는 힘과 속도가 적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베어갈 수 있도록 그 길을 보여줄 것이다. 아직 17살 밖에 안되는 그녀가 지닌 강함은 이러한 직관에 의한 것이다.
“흐음... 그럼 너도 디이즈와 함께 황도에 남아있을래?”
“그... 그래도 되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딸이기 이전에 연인이기도 한 여자가 다른 누군가로 인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반기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칸피니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딜레인은 그가 사랑하는 딸이다. 디아즈 또한 신뢰할 수 있는 뛰어난 기사이기 이전에, 그가 아끼는 제자이며, 또한 그가 사랑하는 그의 여자 가운데 한 명이다. 질투가 나더라도 질투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음... 어떻게 하지? 델킨피에르 성이 좋기는 한데... 엄마도 있고... 동생들도... 무엇보다 아빠가...”
살짝 눈을 치켜뜨며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이미 마음을 정했으면서도 아빠의 서운함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진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황도에 있을수는 없으니까. 네가 돌아오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단다. 어차피 나도 매년 황도에 들러야 하니까 그때 성의 사람들과 함께 올 수도 있는거고.”
“음...”
“네가 원하는대로 결정하면 된다. 아빠는 네가 원하는 바를 들어줄테니까.”
“음... 나중에 말할게요. 지금은 결정내리기 그렇네요. 나중에 말해도 되죠?”
“하하하하... 네가 나중에 말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도 네가 바라는 바 아니겠니? 나는 이미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단다. 네 뜻대로 하렴.”
말은 그렇게 해도 딜레인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녀가 디이즈를 얼마나 동경하고 있으며, 그녀의 강함을 닮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대답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저 칸피니스가 서운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배려하는 마음에서 대답을 미루는 것을 뿐이다.
“알았어요.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러렴.”
“예.”
딜레인이 인사하고 물러서자 칸피니스는 선임을 맡긴 롯시를 다시 찾는다.
“롯시!”
“예!”
“그럼 잘 부탁한다.”
“걱정마세요.”
평소 롯시의 모습은 부드럽고 순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그녀의 본질은 칸피니스에 의해 엄격하게 훈련된 기사다. 같은 나이대의 남자 가운데 그녀를 이길 수 있는 기사가 거의 없다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가 그녀의 본모습이다. 칸피니스에게 당당하게 답하는 롯시의 모습이야말로 유약해보이는 외모 뒤에 숨겨진 그녀의 참모습인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칸피니스는 안심하고 그녀에게 일행을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달링~~ 나는~~?”
왠일로 조용히 있나 싶더니 시안이 끼어든다.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것이 말하지 않아도 칸피니스를 따라가겠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안돼! 시안도 롯시들과 함께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저택으로 가!”
“하지마안~~”
평소와 같이 애교를 부리며 졸라보지만 칸피니스는 흔들리지 않는다.
“장난은 장난으로 끝날 수 있을 때나 허용되는거다. 나는 지금 장난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냐. 장난치러 가는 것도 아니고.”
“히이잉~~ 달링의 애정이 식었어~”
“나중에 저택에 가서 또 놀아줄테니까 지금은 일행과 먼저 가 있어.”
“치잇~~”
시안 정도 되면 한눈에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어느정도 가능하다. 특히 칸피니스처럼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라면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녀가 파악한 바로 칸피니스는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이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적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자신을 구속하거나 위협하는 존재를 결코 그대로 보아넘기지 않는 잔혹한 독재자다.
시안이 그동안 칸피니스를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칸피니스가 그녀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을 구속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여기고 그녀의 행동을 칸피니스가 용인해주었기에 지나치다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도 허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안은 처음 칸피니스를 덮치던 그 순간 칸피니스에게 죽었을 것이다. 물론 칸피니스가 허용해줄 것임을 알고 벌인 일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시안은 칸피니스의 진지한 눈빛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의 너무도 진지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잔폭한 광기는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자신을 산산히 파괴해버릴 수 있는 그 힘에 시안은 끝내 굴복하고야 만다.
“알았어. 갔다와서 놀야줘야해애~~”
“그래.”
하지만 그정도에 기죽을 거라면 시안이 아니다. 어차피 칸피니스 스스로가 정한 선을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하든 칸피니스는 상관치 않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그 선을 넘으려 한다면 알아서 경고해줄 것이니 안심하고 응석을 부리듯 마음대로 행동하면 된다. 칸피니스의 광기에 주눅들어 수그러들었던 적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시안은 다시금 장난기어린 활기찬 모습을 되찾는다.
칸피니스는 그런 시안을 향해 웃음을 지어준다. 어찌되었던 지난 2주간 관계를 맺어온 여자다. 그런 그녀가 주눅들어 겁먹은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아니 주눅들지 않을 여자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저렇게 뻔뻔할 정도로 자유로운 모습이 어울린다. 비록 그 때문에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을 알더라도 그녀가 저 모습을 계속 유지하기를 칸피니스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것이 그녀의 진정한 매력일테니까.
“말썽부리지 말고 롯시 말 잘 들어야해. 나중에 롯시한테 물어봐어 말 안들었다고 하면 가만 안놔둘거야.”
“히이잉~~ 롯시보다 내가 더 예쁜데?”
“어허!!”
“내가 롯시보다 싸움도 잘해!”
“말 안들을래?”
“롯시보다 나이도 많... 헙!! 못들었지?”
“못들었던 것으로 해주길 바래?”
“으... 응”
“그럼 말 들어!”
“알았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안에게 웃음을 지어주며 칸피니스는 자신의 애마인 로엔에 오른다. 마차 안에서 자신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며 웃어보이는 클라이안이 보인다.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려니 그녀의 주위에 올망졸망 모여있는 라일리안과 그녀의 동생들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칸피니스는 그녀들을 향해 살짝 윙크해준다.
“꺄르르르~~”
“바람둥이 자작님~~!!”
“넘 멋져요오~~”
아이들이 꺄아꺄아 거리는 소리를 등뒤로 하고 칸피니스는 서서히 제국기사단 본부 방향으로 말을 몰아간다.
똑똑--
“들어오세요.”
한참 제국기사단 운영에 관련된 서류를 검토하던 터라 슈베르티는 자신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별반 관심을 갖지 못한 채 무심히 대꾸할 뿐이다.
덜컥--
“여어~~”
하지만 그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그가 결코 무심히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데... 델킨피에르... 자작...?”
습관적으로 열린 문으로 시선을 돌린 슈베르티는 문을 가득 채우며 들어서는 거구의 사내의 모습에 살펴보던 서류마저 떨구며 몸을 굳힌다.
“오랜만입니다. 단장님.”
“어... 어떻게...?”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의 보고로 칸피니스가 입성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례상 황도에서 묵을 숙소에 먼저 들를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렇게 일찍 들이닥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 조그 서둘러 왔습니다.”
“하... 할 말...?”
“예.”
“무... 무슨...?”
“그런데 자리도 안권하십니까? 아무리 자작에 불과한 변두리 영주라지만 대우가 너무 박한데요?”
다급한 슈베르티와는 달리 칸피니스의 태도에서는 여유가 묻어난다. 볼 일이 있어 방문한 쪽은 칸피니스지만 엉뚱하게도 슈베르티가 몸이 달아 다급해하는 때문이다.
“아... 이런 실례가... 우선 앉게.”
“예. 그럼...”
칸피니스가 책상 앞에 놓인 적객용 소파에 자리잡고 앉자 슈베르티도 보던 서류를 정리하고 급히 일어나 칸피니스의 맞은편 소파에 앉는다.
“그래, 할 말이라는건...?”
“얼마전 재미있는 얘기를 들어서 말이죠...”
“재미있는?”
“예... 동남제후령의 델킨피에르 자작이 상당히 강한 기사라고 하더군요. 뭐라더라... 제국에서 제일 강하다던가?”
“무... 무슨...?”
슈베르티는 숨이 멎을 듯 놀란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칸피니스의 말은 누군가 칸피니스의 정체에 대해 누설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말을 자신에게 한다는 것은 누설한 범인으로 자신을 의심한다는 뜻 아닌가?
“아주 귀여운 여자애가 하나 있거든? 그 여자애가 그러더라구요. 기사에게 들었다면서 제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할 거라구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자아이라는 말에 슈베르티의 안색이 눈에 띌 정도로 창백해진다. 라쥴의 보고를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칸피니스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나니 억지로 묻어뒀던 최악의 상황이 떠오른 때문이다.
“여... 여자애라면...?”
“라쥴에게 보고받지 못하셨나보죠?”
“라쥴?”
“표정이 재미있게 바뀌길래 계속 지켜보고 있었죠. 뭔가 흥미로운 걸 본 모양이더라구요. 아무말 한하던가요?”
“보... 보고는 들었지만...”
“아하... 그럼 아시겠네요? 그 여자아이가 누구인지... 누구일까요?”
“그... 그건...”
“아,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여자아이가 누구인지야 그 아이한테서 직접 들으면 되는거니까. 이제 내 여자가 되었는데 남의 입을 통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니까요. 그렇게 고민하시지 않아도 되요.”
“자... 자작의 여자라니...”
“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하... 그 꼬맹이가 꽤 예쁘거든요. 장차 자라면 대단한 미인이 될 것같기도 하구요. 그래서 미리 도장찍어뒀습니다.”
“그... 그런...”
“솔직히 좀 쑥스럽네요. 이제 14살밖에 안된 어린아이라서...”
“크흠...”
14살이라고 하니 모든 것이 확실해진다. 그녀는 지금 칸피니스의 여자가 되어 그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다.
“그... 그럼 그 여자아이는 자네의 보호 아래 있게 되는건가?”
“제 여자만큼은 철저히 지키니까요. 설사 제국 전체와 전쟁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죠.”
눈은 웃고 있지만 눈동자에는 광폭한 살기가 비치고 있다. 마스터에 이른 실력을 지닌 슈베르티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은밀한 살기지만, 은밀하기에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콘벨른 백작가의 이야기는 들었죠?”
“드... 들었네. 자네 여자를 납치했었다고...”
“그렇죠. 그래서 디포르챠라는 애송이와 성 하나를 날려보냈는데 부족했는지 나중에는 기사도 백 여명이나 보냈더라구요. 라쥴에게 말했으니 들으셨으면 잘 아시겠네요?”
“흠... 흠...”
노골적인 협박이다.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라일리안을 건드리면 콘벨른가와 같은 꼴로 만들어주겠다는 협박.
고작 자작에 불과한 변두리 영주에게 백작이자 제국기사단의 단장인 슈베르티가 협박당하는 상황이 얼핏 어이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슈베르티가 아는 칸피니스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작위라든가 권력과 같은 힘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힘, 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콘벨른가는 더 이상 자네를 귀찮게 하지 못할걸세. 가주와 일가족이 어느날 갑자기 의문의 도적떼들의 습격을 받아 몰살했거든.”
“호오... 도적떼요?”
“그렇네. 콘벨른가의 성에 머물고 있는데 갑자기 수백의 산적떼들이 성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바람에 그만 백작의 일가족과 기사단이 몰살당하고 말았다고 하더군.”
“기사들까지 몰살시키는 산적이란 말이죠?”
“무서운 일이지. 어디서 그런 무도한 무리들이 나타났는지...”
실천 능력이 있는 자의 협박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방법은 굴복이다. 협박에 저항해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명예가 목숨보다 귀중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슈베르티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마스터의 지위에 오른 이 답게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기꺼이 저항할 수 없는 무력에 굴복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콘벨른가의 일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칸피니스의 협박에 굴복하겠다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명목상 상급자이고 작위도 높은 슈베르티가 노골적으로 협박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리 보기 좋은 것은 아니기에 간접적으로 말을 돌려 전한 것이다. 칸피니스도 바보는 아니니 슈베르티의 그같은 의도를 모를 리 없다. 칸피니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것은 슈베르티의 뜻이 그만큼 잘 전달된 때문일 것이다.
“산적 토벌을 한 번 해야겠군요.”
“그렇겠지. 어떤가? 자네가 토벌작전을 지휘해보겠나?”
“산적의 정체는 밝혀내셨습니까?”
“몰론가의 잔당이라더군. 몰론 근처의 산속에 마을을 이루고 몰론가의 부흥을 노리고 힘을 기르고 있었다더군.”
“호오... 몰론가의 부흥을 노리는 잔당이라구요?”
“그렇네.”
칸피니스의 눈이 재미있다는 듯 가늘게 휘어진다. 몰론가라면 칸피니스와도 무관한 가문이 아니다. 델킨피에르가의 시조가 몰론가의 방계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몰론가의 방계분가라고도 할 수 있다. 몰론가의 거성을 흔적도 없이 무너뜨린 장본인이 바로 칸피니스 자신이기에 몰론가라는 이름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역시 몰론가로군요. 콘벨른가 정도 되는 가문을 멸망시킬 정도의 힘을 그렇게 은밀하게 숨길 수 있었다니. 그쪽 지방을 다스리던 콘벨른가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도 얼마전에야 알았네. 처음엔 고작 수십명 정도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수 백의 무장병력이 웅크리고 있었더구먼.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한때 제국의 동남쪽을 지배하던 백작가 다운 용의주도함이라고나 할까?”
“정말 대단하군요. 몰론가의 저력이라는 것은.”
말인즉슨 콘벨른가에 복종하기를 거부한 몰론가의 후예 수십명이 몰론 성 근처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그들을 이번 사건의 원흉으로 만들고 싶다는 뜻이다. 콘벨른가조차도 그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묵인해주었을 정도로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하는 작은 마을을 수백의 무장집단으로 만들어 콘벨른가의 멸망의 책임을 물어 토벌함으로써 이번 사건을 덮어버리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동남제후령이라면 저와 무관한 지역이 아닌데다 디포르챠 콘벨른은 제 사촌누이의 약혼자이기도 하니 제가 그들을 토벌하는 작전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겠나?”
“기사로서의 의무로.”
“정말 고맙군.”
“그런데...”
“뭔가?”
“도적들을 토벌하고 나서 그들의 수급을 가져와야 합니까?”
“흠...”
수십 명 정도가 사는 마을을 토벌해봐야 수백이 수급은 나오지 않는다. 수백의 수급을 가져오려면 어딘가에서 목을 베어와야 한다. 제국 안에서 그 목을 만들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기에 수급을 가져올 것인가의 여부에 대한 결론은 중요한 만큼 단순하다.
“수급은 필요없겠지. 무도한 무리들이니 수급을 베어 올 것까지는 없네. 그런 수고를 할 가치도 없는 천한 것들일세.”
“하하하... 그렇겠네요.”
칸피니스의 눈이 가늘게 휘어지는 것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슈베르티는 그의 표정을 마주하는 것이 거북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린다.
“몰론가의 잔당 토벌은 언제쯤 하게 됩니까?”
“지난주에 서류를 조정에 올렸으니 다음주쯤 토벌명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하네.”
“그렇겠군요. 그럼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까?”
“그렇지. 일단 토벌에 참여할 병사들을 자네에게 배속시켜줄테니 그들을 데리고 토벌준비를 해두도록 하게.”
“그러죠. 더 하실 말씀은 없구요?”
“그렇네.”
어차피 슈베르티에게 아첨하러 온 것이 아닌 이상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다. 필요한 용건만 간단히 전달하고 일어서는 것이 둘 사이에는 그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가 적절하다.
“더이상 용무가 없으면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가려는가?”
“그래야죠.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는데. 괜히 단장님께 아첨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여러 가지로 곤란하거든요. 지장의 소영주라는 위치라는 게 아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라서...”
“그렇군.”
말같지 않은 소리다. 칸피니스가 슈베르티에게 아첨을 한다니. 헛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칸피니스가 자신에게 아첨해오는 상황을 생각하니 끔찍하기만 하다. 아첨이란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인데 칸피니스가 목적을 가지고 아첨을 해온다면 슈베르티에게 있어 그건 협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칸피니스로부터 아첨을 가장한 협박을 당하는 것은 상상조차도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어쨌든 라일리안이라는 꼬맹이, 정말 귀엽더군요. 아주 마음에 드는 아이에요. 훗... 언제 한 번 소개시켜드릴게요.”
“라... 일... 리안인가? 그 아이의 이름이?”
“아는 이름이에요?”
“아아... 비슷한 이름을 하나 알고 있네.”
“그런가요? 비슷한... 이름이겠죠?”
“그렇지.”
아는 이름이라면 슈베르티는 필히 칸피니스와 충돌해야 한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아는 이름이어서는 안된다. 그저 아는 이름과 비슷한 이름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적당하다.
“하시는 일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이신 일인데 좋은 결과를 보셔야죠.”
“나도 그러고 싶다네.”
“아이를 돌보는 입장이라 도와드릴 수 없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하하... 말만이라도 고맙네. 모쪼록 그 여자아이와 잘 지내기를 바라겠네.”
“그래야죠. 누가 끼어들어 꼬맹이를 납치해가지만 않는다면요.”
“그럴 일은 없을거네. 내가 장담하지.”
“그 장담을 믿겠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칸피니스의 말은 슈베르티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치 않을테니 자신의 여자가 된 라일리안을 건드리지 말라는 요구다. 다시 말하면 라일리안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자신도 슈베르티가 하는 일을 모른체 하겠다는 조건부 중립선언인 것이다. 슈베르티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너무도 유리한 거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단 제 집무실도 돌아봐야 하고, 집무실을 돌아본 다음에는 일찍 돌아가 쉬어야 하니까요.”
“그렇군. 먼 여행이었으니 피곤하기도 할게요. 그럼 들어가 쉬도록 하게.”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보도록 하지.”
인사를 마치고 칸피니스는 주저없이 몸을 돌리고 문을 열러 슈베르티의 집무실을 빠져나간다. 그의 거대한 등이 문 밖으로 사라지고 다시 문이 닫히며 그의 모습을 가리고서야 슈베르티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휴우...”
차라리 칸피니스가 황제라도 된다면 이리 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대공의 작위를 받은 대귀족이라면 이토록 불안하고 떨리지는 않을 것이다. 욕심이 없는 사내.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그 어떠한 것도 용납지 않는 성품의 사내임을 알기에 이토록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그의 욕심없는, 욕심이 없어 걸리는 것 없는 분노가 언제 자신을 향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공주 추격건은 어떻게든 무마해야겠군. 어디서 아이들 시체라도 장만해야 하는건가?”
겨우 긴장된 몸과 마음을 추스른 슈베르티는 칸피니스가 제안한 거래를 어떠한 식으로 완수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칸피니스가 자신의 일에 끼어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강대한 상대를 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슈베르티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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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연참입니다. 연재 초기 이후 정말 오랜만에 연참을 하는 것 같네요. 그토록 바라시던 연참을 했으니 가열찬 조회수와 추천과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조회수 낮으면 다시는 연참 않습니다. 저 삐질겁니다.--+++
작가는 수십회 앞을 보면서 글을 쓰고 독자는 지금까지의 읽은 내용만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여러가지로 작가의 입장가 독자의 입장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안의 경우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제 입장에서 시안은 미워할만한 캐릭터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시안의 모습 때문에 시안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결국 보는 범위의 차이에서 나오는 엇갈림이라 생각합니다. 시안의 오버는 당분간 계속됩니다. 보기 싫으시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회예고>> 자신의 부재동안 집무실을 지키며 관리하던 충직한 비서를 농락하는 악덕기사 칸피니스. 여자와 관련된 그의 비리는 끊이지 않는데...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과 스쳐지나가는 순간 스치듯 발생한 스파크에 칸피니스의 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색마검천황의 야오이화 반대를 외치며 탄핵안을 들고나온다. 과연 칸피니스 탄핵은 성공할 것인가?
예고편은 예고편이고 본편은 본편이다.
“예? 혼자서요?”
칸피니스가 마차를 세우고 내려서자 와르디가 따라 내리며 물어온다. 칸피니스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와르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심하라는 듯 웃음을 지어준다.
“제국기사단 본부는 세습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너희들이 갈만한 곳은 아니야.”
“하지만...”
“세습작위를 받은 귀족 가운데는 쓰레기들이 많다. 너희들이 그런 쓰레기들 사이에서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칸피니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와르디는 너무도 잘 안다. 칸피니스와의 관계 때문에 황도에서는 물론 고향에서까지 숱한 모욕과 경멸을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후우... 알겠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그럼 먼저 가있을게요.”
“그래. 먼저 가서 펠란제스 부인께 인사도 드리고”
와르디가 고개를 숙여 납득한다는 표시를 보이고 한걸음 물러서자 칸피니스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웃어보인다. 20살이 넘은 다큰 처녀인 자신의 머리를 스스럼없이 쓰다듬어오는 칸피니스의 큰 손에 와르디는 항의의 표시로 칸피니스를 째려보며 얼굴을 붉힌다. 그녀의 그런 모습이 보기 좋은지 와르디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거칠어지더니 얼굴 가득 떠오른 웃음이 더욱 짙어진다.
“롯시!”
“예!”
거친 손길을 이기지 못하고 와르디가 몸을 뒤로 물리자 더 이상 와르디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없게 된 칸피니스는 입맛을 다시며 롯시를 부른다.
“네가 일행의 선임이지?”
“네!”
나이라면 레인이 27살, 루시가 25살로 롯시보다 많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델킨피에르가의 가신에 불과한 기사들이다. 델킨피에르가의 일족이 포함된 일행을 이끌기에는 그 신분이 따라주지 않는다. 따라서 레인이나 루시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델킨피에르 일족에 속하는 롯시에게 선임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다.
“네가 책임지고 일행을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저택으로 인솔해야 한다. 펠란제스 백작부인은 파트리샤의 어머니이기도 하니까 가는데 무리는 없을거야. 너도 몇 번 가본 곳이고. 할 수 있겠지?”
“네.”
칸피니스의 물음에 답하는 롯시의 대답에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롯시가 황도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4년 전 15살 때 처음 칸피니스를 따라 황도에 온 후 4년 째 매년 칸피니스의 일행으로 황도에 온 적이 있다. 거기다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저택은 황도에 올 때마다 머물렀엇다. 실수로라도 일행의 인솔에 실패할 수 없는 너무도 익숙한 곳들인 것이다.
“벌써 4년 째 가본 곳이니까 아마 파트리샤의 도움이 없더라도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거야. 저택의 경비병들도 네 얼굴을 알고 있으니 들어가는 데도 문제가 없을테구. 더구나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저택에는 디이즈가 있을테니까.”
“디이즈님이요?”
디이즈의 이름이 나오자 반색하며 반응해온 것은 롯시가 아닌 딜레인이다.
“디이즈님을 뵐 수 있는건가요?”
얼굴까지 붉게 상기된 것을 보니 디이즈의 이름이 꽤나 딜레인을 흥분시킨 모양이다. 하긴 디이즈가 아직 델킨피에르 성에 있을 때 그녀를 가장 따랐던 게 딜레인이다. 디이즈를 동경하여 닮고싶다는 마음 하나로 검술수련에 전념하여 고작 17살의 어린나이에 델킨피에르에서도 손꼽히는 검술을 지닌 검사가 되었을 정도니 딜레인이 디이즈의 이름을 듣고 흥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당연히!”
“와아아~~!!”
3년 전부터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호위 겸 황도 파견기사로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작년에도 칸피니스 일행에 포함되었던 딜레인이 그녀를 보지 못했을 리 없다. 아마도 올해도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리 기뻐하는 것을 보니 딜레인이 디이즈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알 수 있다.
“조금 있으면 만날 수 있을거야. 아니 우리가 황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테니 그쪽에서 먼저 마중나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래. 그렇게 좋니, 딜레인?”
“그럼, 좋구 말구요. 디이즈님인걸요. 디이즈 엘라프. 델킨피에르 최강의 여기사. 단순히 기술만으로 따지면 아빠하고도 겨룰 수 있는 검술을 지닌 분이잖아요.”
“그렇지.”
디이즈 엘라프는 칸피니스가 알고 있는 한 최강의 여기사다. 남자를 포함하더라도 그녀를 검술로 이길 수 있는 기사는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된다. 그나마 슈베르티 백작 정도가 아니라면 그녀를 확실히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녀의 나이가 이제 고작 24살인 것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재능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그렇다고 검기(劍技)로 칸피니스와 겨룰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타고난 유연성과 민첩함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검격이 너무도 화려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아직까지 그녀의 검기는 칸피니스에게 미치지 못한다. 10년 정도 뒤라면 모를까 아직까지 그녀의 검술은 미숙하기만 하다. 물론 칸피니스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아아... 정말 기대되요. 디이즈님의 검술을 다시 볼 수 있다니... 그 화려하고 날카로운 검기를 옆에서 보면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흥분되요.”
딜레인의 직관은 때때로 칸피니스조차도 놀라게 한다. 칸피니스의 강함을 단순히 강함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재능과 능력과 비교해 거리를 재는 능력은 그 대단하다는 디이즈조차도 갖지 못한 것이다.
디이즈가 칸피니스와 자신의 거리를 깨닫고 자신만의 강함을 추구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녀의 강함이 칸피니스의 강함을 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런데 딜레인은 그녀의 강함에조차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직관만으로 그녀가 느낀 것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잇는 것이다. 디아즈의 강함에 필적하는 그녀의 직관은 그녀가 가진 최고의 재능이다.
신체적인 능력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그녀의 직관은 항상 그녀로 하여금 그순간 가장 좋은 행동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줄 것이다. 그녀의 떨어지는 힘과 속도가 적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베어갈 수 있도록 그 길을 보여줄 것이다. 아직 17살 밖에 안되는 그녀가 지닌 강함은 이러한 직관에 의한 것이다.
“흐음... 그럼 너도 디이즈와 함께 황도에 남아있을래?”
“그... 그래도 되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딸이기 이전에 연인이기도 한 여자가 다른 누군가로 인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반기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칸피니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딜레인은 그가 사랑하는 딸이다. 디아즈 또한 신뢰할 수 있는 뛰어난 기사이기 이전에, 그가 아끼는 제자이며, 또한 그가 사랑하는 그의 여자 가운데 한 명이다. 질투가 나더라도 질투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음... 어떻게 하지? 델킨피에르 성이 좋기는 한데... 엄마도 있고... 동생들도... 무엇보다 아빠가...”
살짝 눈을 치켜뜨며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이미 마음을 정했으면서도 아빠의 서운함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진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황도에 있을수는 없으니까. 네가 돌아오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단다. 어차피 나도 매년 황도에 들러야 하니까 그때 성의 사람들과 함께 올 수도 있는거고.”
“음...”
“네가 원하는대로 결정하면 된다. 아빠는 네가 원하는 바를 들어줄테니까.”
“음... 나중에 말할게요. 지금은 결정내리기 그렇네요. 나중에 말해도 되죠?”
“하하하하... 네가 나중에 말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도 네가 바라는 바 아니겠니? 나는 이미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단다. 네 뜻대로 하렴.”
말은 그렇게 해도 딜레인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녀가 디이즈를 얼마나 동경하고 있으며, 그녀의 강함을 닮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대답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저 칸피니스가 서운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배려하는 마음에서 대답을 미루는 것을 뿐이다.
“알았어요.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러렴.”
“예.”
딜레인이 인사하고 물러서자 칸피니스는 선임을 맡긴 롯시를 다시 찾는다.
“롯시!”
“예!”
“그럼 잘 부탁한다.”
“걱정마세요.”
평소 롯시의 모습은 부드럽고 순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그녀의 본질은 칸피니스에 의해 엄격하게 훈련된 기사다. 같은 나이대의 남자 가운데 그녀를 이길 수 있는 기사가 거의 없다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가 그녀의 본모습이다. 칸피니스에게 당당하게 답하는 롯시의 모습이야말로 유약해보이는 외모 뒤에 숨겨진 그녀의 참모습인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칸피니스는 안심하고 그녀에게 일행을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달링~~ 나는~~?”
왠일로 조용히 있나 싶더니 시안이 끼어든다.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것이 말하지 않아도 칸피니스를 따라가겠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안돼! 시안도 롯시들과 함께 펠란제스 백작부인의 저택으로 가!”
“하지마안~~”
평소와 같이 애교를 부리며 졸라보지만 칸피니스는 흔들리지 않는다.
“장난은 장난으로 끝날 수 있을 때나 허용되는거다. 나는 지금 장난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냐. 장난치러 가는 것도 아니고.”
“히이잉~~ 달링의 애정이 식었어~”
“나중에 저택에 가서 또 놀아줄테니까 지금은 일행과 먼저 가 있어.”
“치잇~~”
시안 정도 되면 한눈에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어느정도 가능하다. 특히 칸피니스처럼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라면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녀가 파악한 바로 칸피니스는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이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적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자신을 구속하거나 위협하는 존재를 결코 그대로 보아넘기지 않는 잔혹한 독재자다.
시안이 그동안 칸피니스를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칸피니스가 그녀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을 구속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여기고 그녀의 행동을 칸피니스가 용인해주었기에 지나치다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도 허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안은 처음 칸피니스를 덮치던 그 순간 칸피니스에게 죽었을 것이다. 물론 칸피니스가 허용해줄 것임을 알고 벌인 일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시안은 칸피니스의 진지한 눈빛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의 너무도 진지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잔폭한 광기는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자신을 산산히 파괴해버릴 수 있는 그 힘에 시안은 끝내 굴복하고야 만다.
“알았어. 갔다와서 놀야줘야해애~~”
“그래.”
하지만 그정도에 기죽을 거라면 시안이 아니다. 어차피 칸피니스 스스로가 정한 선을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하든 칸피니스는 상관치 않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그 선을 넘으려 한다면 알아서 경고해줄 것이니 안심하고 응석을 부리듯 마음대로 행동하면 된다. 칸피니스의 광기에 주눅들어 수그러들었던 적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시안은 다시금 장난기어린 활기찬 모습을 되찾는다.
칸피니스는 그런 시안을 향해 웃음을 지어준다. 어찌되었던 지난 2주간 관계를 맺어온 여자다. 그런 그녀가 주눅들어 겁먹은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아니 주눅들지 않을 여자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저렇게 뻔뻔할 정도로 자유로운 모습이 어울린다. 비록 그 때문에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을 알더라도 그녀가 저 모습을 계속 유지하기를 칸피니스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것이 그녀의 진정한 매력일테니까.
“말썽부리지 말고 롯시 말 잘 들어야해. 나중에 롯시한테 물어봐어 말 안들었다고 하면 가만 안놔둘거야.”
“히이잉~~ 롯시보다 내가 더 예쁜데?”
“어허!!”
“내가 롯시보다 싸움도 잘해!”
“말 안들을래?”
“롯시보다 나이도 많... 헙!! 못들었지?”
“못들었던 것으로 해주길 바래?”
“으... 응”
“그럼 말 들어!”
“알았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안에게 웃음을 지어주며 칸피니스는 자신의 애마인 로엔에 오른다. 마차 안에서 자신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며 웃어보이는 클라이안이 보인다.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려니 그녀의 주위에 올망졸망 모여있는 라일리안과 그녀의 동생들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칸피니스는 그녀들을 향해 살짝 윙크해준다.
“꺄르르르~~”
“바람둥이 자작님~~!!”
“넘 멋져요오~~”
아이들이 꺄아꺄아 거리는 소리를 등뒤로 하고 칸피니스는 서서히 제국기사단 본부 방향으로 말을 몰아간다.
똑똑--
“들어오세요.”
한참 제국기사단 운영에 관련된 서류를 검토하던 터라 슈베르티는 자신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별반 관심을 갖지 못한 채 무심히 대꾸할 뿐이다.
덜컥--
“여어~~”
하지만 그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그가 결코 무심히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데... 델킨피에르... 자작...?”
습관적으로 열린 문으로 시선을 돌린 슈베르티는 문을 가득 채우며 들어서는 거구의 사내의 모습에 살펴보던 서류마저 떨구며 몸을 굳힌다.
“오랜만입니다. 단장님.”
“어... 어떻게...?”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의 보고로 칸피니스가 입성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례상 황도에서 묵을 숙소에 먼저 들를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렇게 일찍 들이닥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 조그 서둘러 왔습니다.”
“하... 할 말...?”
“예.”
“무... 무슨...?”
“그런데 자리도 안권하십니까? 아무리 자작에 불과한 변두리 영주라지만 대우가 너무 박한데요?”
다급한 슈베르티와는 달리 칸피니스의 태도에서는 여유가 묻어난다. 볼 일이 있어 방문한 쪽은 칸피니스지만 엉뚱하게도 슈베르티가 몸이 달아 다급해하는 때문이다.
“아... 이런 실례가... 우선 앉게.”
“예. 그럼...”
칸피니스가 책상 앞에 놓인 적객용 소파에 자리잡고 앉자 슈베르티도 보던 서류를 정리하고 급히 일어나 칸피니스의 맞은편 소파에 앉는다.
“그래, 할 말이라는건...?”
“얼마전 재미있는 얘기를 들어서 말이죠...”
“재미있는?”
“예... 동남제후령의 델킨피에르 자작이 상당히 강한 기사라고 하더군요. 뭐라더라... 제국에서 제일 강하다던가?”
“무... 무슨...?”
슈베르티는 숨이 멎을 듯 놀란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칸피니스의 말은 누군가 칸피니스의 정체에 대해 누설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말을 자신에게 한다는 것은 누설한 범인으로 자신을 의심한다는 뜻 아닌가?
“아주 귀여운 여자애가 하나 있거든? 그 여자애가 그러더라구요. 기사에게 들었다면서 제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할 거라구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자아이라는 말에 슈베르티의 안색이 눈에 띌 정도로 창백해진다. 라쥴의 보고를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칸피니스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나니 억지로 묻어뒀던 최악의 상황이 떠오른 때문이다.
“여... 여자애라면...?”
“라쥴에게 보고받지 못하셨나보죠?”
“라쥴?”
“표정이 재미있게 바뀌길래 계속 지켜보고 있었죠. 뭔가 흥미로운 걸 본 모양이더라구요. 아무말 한하던가요?”
“보... 보고는 들었지만...”
“아하... 그럼 아시겠네요? 그 여자아이가 누구인지... 누구일까요?”
“그... 그건...”
“아,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여자아이가 누구인지야 그 아이한테서 직접 들으면 되는거니까. 이제 내 여자가 되었는데 남의 입을 통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니까요. 그렇게 고민하시지 않아도 되요.”
“자... 자작의 여자라니...”
“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하... 그 꼬맹이가 꽤 예쁘거든요. 장차 자라면 대단한 미인이 될 것같기도 하구요. 그래서 미리 도장찍어뒀습니다.”
“그... 그런...”
“솔직히 좀 쑥스럽네요. 이제 14살밖에 안된 어린아이라서...”
“크흠...”
14살이라고 하니 모든 것이 확실해진다. 그녀는 지금 칸피니스의 여자가 되어 그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다.
“그... 그럼 그 여자아이는 자네의 보호 아래 있게 되는건가?”
“제 여자만큼은 철저히 지키니까요. 설사 제국 전체와 전쟁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죠.”
눈은 웃고 있지만 눈동자에는 광폭한 살기가 비치고 있다. 마스터에 이른 실력을 지닌 슈베르티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은밀한 살기지만, 은밀하기에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콘벨른 백작가의 이야기는 들었죠?”
“드... 들었네. 자네 여자를 납치했었다고...”
“그렇죠. 그래서 디포르챠라는 애송이와 성 하나를 날려보냈는데 부족했는지 나중에는 기사도 백 여명이나 보냈더라구요. 라쥴에게 말했으니 들으셨으면 잘 아시겠네요?”
“흠... 흠...”
노골적인 협박이다.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라일리안을 건드리면 콘벨른가와 같은 꼴로 만들어주겠다는 협박.
고작 자작에 불과한 변두리 영주에게 백작이자 제국기사단의 단장인 슈베르티가 협박당하는 상황이 얼핏 어이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슈베르티가 아는 칸피니스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작위라든가 권력과 같은 힘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힘, 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콘벨른가는 더 이상 자네를 귀찮게 하지 못할걸세. 가주와 일가족이 어느날 갑자기 의문의 도적떼들의 습격을 받아 몰살했거든.”
“호오... 도적떼요?”
“그렇네. 콘벨른가의 성에 머물고 있는데 갑자기 수백의 산적떼들이 성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바람에 그만 백작의 일가족과 기사단이 몰살당하고 말았다고 하더군.”
“기사들까지 몰살시키는 산적이란 말이죠?”
“무서운 일이지. 어디서 그런 무도한 무리들이 나타났는지...”
실천 능력이 있는 자의 협박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방법은 굴복이다. 협박에 저항해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명예가 목숨보다 귀중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슈베르티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마스터의 지위에 오른 이 답게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기꺼이 저항할 수 없는 무력에 굴복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콘벨른가의 일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칸피니스의 협박에 굴복하겠다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명목상 상급자이고 작위도 높은 슈베르티가 노골적으로 협박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리 보기 좋은 것은 아니기에 간접적으로 말을 돌려 전한 것이다. 칸피니스도 바보는 아니니 슈베르티의 그같은 의도를 모를 리 없다. 칸피니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것은 슈베르티의 뜻이 그만큼 잘 전달된 때문일 것이다.
“산적 토벌을 한 번 해야겠군요.”
“그렇겠지. 어떤가? 자네가 토벌작전을 지휘해보겠나?”
“산적의 정체는 밝혀내셨습니까?”
“몰론가의 잔당이라더군. 몰론 근처의 산속에 마을을 이루고 몰론가의 부흥을 노리고 힘을 기르고 있었다더군.”
“호오... 몰론가의 부흥을 노리는 잔당이라구요?”
“그렇네.”
칸피니스의 눈이 재미있다는 듯 가늘게 휘어진다. 몰론가라면 칸피니스와도 무관한 가문이 아니다. 델킨피에르가의 시조가 몰론가의 방계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몰론가의 방계분가라고도 할 수 있다. 몰론가의 거성을 흔적도 없이 무너뜨린 장본인이 바로 칸피니스 자신이기에 몰론가라는 이름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역시 몰론가로군요. 콘벨른가 정도 되는 가문을 멸망시킬 정도의 힘을 그렇게 은밀하게 숨길 수 있었다니. 그쪽 지방을 다스리던 콘벨른가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도 얼마전에야 알았네. 처음엔 고작 수십명 정도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수 백의 무장병력이 웅크리고 있었더구먼.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한때 제국의 동남쪽을 지배하던 백작가 다운 용의주도함이라고나 할까?”
“정말 대단하군요. 몰론가의 저력이라는 것은.”
말인즉슨 콘벨른가에 복종하기를 거부한 몰론가의 후예 수십명이 몰론 성 근처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그들을 이번 사건의 원흉으로 만들고 싶다는 뜻이다. 콘벨른가조차도 그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묵인해주었을 정도로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하는 작은 마을을 수백의 무장집단으로 만들어 콘벨른가의 멸망의 책임을 물어 토벌함으로써 이번 사건을 덮어버리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동남제후령이라면 저와 무관한 지역이 아닌데다 디포르챠 콘벨른은 제 사촌누이의 약혼자이기도 하니 제가 그들을 토벌하는 작전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겠나?”
“기사로서의 의무로.”
“정말 고맙군.”
“그런데...”
“뭔가?”
“도적들을 토벌하고 나서 그들의 수급을 가져와야 합니까?”
“흠...”
수십 명 정도가 사는 마을을 토벌해봐야 수백이 수급은 나오지 않는다. 수백의 수급을 가져오려면 어딘가에서 목을 베어와야 한다. 제국 안에서 그 목을 만들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기에 수급을 가져올 것인가의 여부에 대한 결론은 중요한 만큼 단순하다.
“수급은 필요없겠지. 무도한 무리들이니 수급을 베어 올 것까지는 없네. 그런 수고를 할 가치도 없는 천한 것들일세.”
“하하하... 그렇겠네요.”
칸피니스의 눈이 가늘게 휘어지는 것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슈베르티는 그의 표정을 마주하는 것이 거북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린다.
“몰론가의 잔당 토벌은 언제쯤 하게 됩니까?”
“지난주에 서류를 조정에 올렸으니 다음주쯤 토벌명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하네.”
“그렇겠군요. 그럼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까?”
“그렇지. 일단 토벌에 참여할 병사들을 자네에게 배속시켜줄테니 그들을 데리고 토벌준비를 해두도록 하게.”
“그러죠. 더 하실 말씀은 없구요?”
“그렇네.”
어차피 슈베르티에게 아첨하러 온 것이 아닌 이상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다. 필요한 용건만 간단히 전달하고 일어서는 것이 둘 사이에는 그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가 적절하다.
“더이상 용무가 없으면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가려는가?”
“그래야죠.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는데. 괜히 단장님께 아첨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여러 가지로 곤란하거든요. 지장의 소영주라는 위치라는 게 아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라서...”
“그렇군.”
말같지 않은 소리다. 칸피니스가 슈베르티에게 아첨을 한다니. 헛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칸피니스가 자신에게 아첨해오는 상황을 생각하니 끔찍하기만 하다. 아첨이란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인데 칸피니스가 목적을 가지고 아첨을 해온다면 슈베르티에게 있어 그건 협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칸피니스로부터 아첨을 가장한 협박을 당하는 것은 상상조차도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어쨌든 라일리안이라는 꼬맹이, 정말 귀엽더군요. 아주 마음에 드는 아이에요. 훗... 언제 한 번 소개시켜드릴게요.”
“라... 일... 리안인가? 그 아이의 이름이?”
“아는 이름이에요?”
“아아... 비슷한 이름을 하나 알고 있네.”
“그런가요? 비슷한... 이름이겠죠?”
“그렇지.”
아는 이름이라면 슈베르티는 필히 칸피니스와 충돌해야 한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아는 이름이어서는 안된다. 그저 아는 이름과 비슷한 이름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적당하다.
“하시는 일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이신 일인데 좋은 결과를 보셔야죠.”
“나도 그러고 싶다네.”
“아이를 돌보는 입장이라 도와드릴 수 없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하하... 말만이라도 고맙네. 모쪼록 그 여자아이와 잘 지내기를 바라겠네.”
“그래야죠. 누가 끼어들어 꼬맹이를 납치해가지만 않는다면요.”
“그럴 일은 없을거네. 내가 장담하지.”
“그 장담을 믿겠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칸피니스의 말은 슈베르티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치 않을테니 자신의 여자가 된 라일리안을 건드리지 말라는 요구다. 다시 말하면 라일리안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자신도 슈베르티가 하는 일을 모른체 하겠다는 조건부 중립선언인 것이다. 슈베르티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너무도 유리한 거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단 제 집무실도 돌아봐야 하고, 집무실을 돌아본 다음에는 일찍 돌아가 쉬어야 하니까요.”
“그렇군. 먼 여행이었으니 피곤하기도 할게요. 그럼 들어가 쉬도록 하게.”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보도록 하지.”
인사를 마치고 칸피니스는 주저없이 몸을 돌리고 문을 열러 슈베르티의 집무실을 빠져나간다. 그의 거대한 등이 문 밖으로 사라지고 다시 문이 닫히며 그의 모습을 가리고서야 슈베르티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휴우...”
차라리 칸피니스가 황제라도 된다면 이리 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대공의 작위를 받은 대귀족이라면 이토록 불안하고 떨리지는 않을 것이다. 욕심이 없는 사내.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그 어떠한 것도 용납지 않는 성품의 사내임을 알기에 이토록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그의 욕심없는, 욕심이 없어 걸리는 것 없는 분노가 언제 자신을 향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공주 추격건은 어떻게든 무마해야겠군. 어디서 아이들 시체라도 장만해야 하는건가?”
겨우 긴장된 몸과 마음을 추스른 슈베르티는 칸피니스가 제안한 거래를 어떠한 식으로 완수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칸피니스가 자신의 일에 끼어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강대한 상대를 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슈베르티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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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연참입니다. 연재 초기 이후 정말 오랜만에 연참을 하는 것 같네요. 그토록 바라시던 연참을 했으니 가열찬 조회수와 추천과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조회수 낮으면 다시는 연참 않습니다. 저 삐질겁니다.--+++
작가는 수십회 앞을 보면서 글을 쓰고 독자는 지금까지의 읽은 내용만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여러가지로 작가의 입장가 독자의 입장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안의 경우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제 입장에서 시안은 미워할만한 캐릭터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시안의 모습 때문에 시안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결국 보는 범위의 차이에서 나오는 엇갈림이라 생각합니다. 시안의 오버는 당분간 계속됩니다. 보기 싫으시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회예고>> 자신의 부재동안 집무실을 지키며 관리하던 충직한 비서를 농락하는 악덕기사 칸피니스. 여자와 관련된 그의 비리는 끊이지 않는데...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과 스쳐지나가는 순간 스치듯 발생한 스파크에 칸피니스의 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색마검천황의 야오이화 반대를 외치며 탄핵안을 들고나온다. 과연 칸피니스 탄핵은 성공할 것인가?
예고편은 예고편이고 본편은 본편이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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