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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마녀의 전설(The Legend of Five Witches) - 8부3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09:48 640회 0건
창작

다섯 마녀의 전설(The Legend of Five Witches) 8부 3장


본 야설은 강간, 윤간, 성고문 수준의 SM 등 비윤리적이고 중범죄에 해당하며 잔인하고 하드코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취향의 글을 좋아하시지 않는 분은 읽으시지 말 것을 미리 권고 드립니다.





- 8부 - 이어지는 전설 (랑구르시아 대로 : 전사와 도살자) - 3장 -


"쾅! 콰앙! 촹! 쿠웅!"

"끄으으윽!"

"우와아아아악!"

묵직한 쇠들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설사 귀를 막는다고 해도 들릴 듯, 마치 사방이 지옥이 돼버린 것 같은 끔찍한 소리들이었다.

보르카의 오르크들이 네 번째 돌격을 감행한 듯,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부상자들이 한꺼번에 몰리는가 싶더니, 이해가 가지 않게도 운반되어 오던 부상자들이 뚝 끊겨 버렸다.
그것이 전혀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도끼들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점점 더 시끄럽게 가까와지는 걸로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몇 배나 많은 적들을 상대로 이제까지 잘 싸워왔지만, 아무래도 이번의 공격은 막아내기 힘든 듯 했다.


"미영이 언니가 가장 바깥쪽, 그것도 적의 주력부대 방향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괜찮을까?"

아름다운 은빛 눈동자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가씨" 지선이 중얼거렸다.
그로피아 마을에서 구한, 고급스런 녹색의 긴 여신관복 곳곳이 온통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중상을 입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쟈르칼의 부하 오르크들을 치료해 주면서 피가 튄 덕분이었다.
이런 아비규환같은 아수라장속에서도, "젖소" 은주가 옆에서 어린애처럼 코까지 가볍게 색색 골면서 자고 있었다.
그 모습에 눈이 간 아가씨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말로 입을 열었다.

"미안, 은주 언니!
이번에는 우리 모두 죽을 것 같아!
나 사실..... 언니에게 말못할 큰 잘못을 저지른 적도 있었는데..... ("강제로 길들이기" 8부 내용 참조)
고백하고 용서를 빌 기회는 없을 것 같아.
미안해, 언니!

주영아! 어리고 철없는 마이 달링!
정말 미안해! 구하러 돌아와 주겠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아!"

조용히 눈을 감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아가씨가 평온해진 음성으로 손을 모은 채 기도하기 시작했다.

"자비로운 사랑과 생명의 여신 귀니아님!
이 나라에 갑자기 오게 된 이래 특별한 힘을 주셔서 여러 생명을 살릴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저는..... 저는...... 항상 남들 뒤에 숨어서 편하고 쉬운 일만 하면서....."

눈을 감고 있는 아가씨의 두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언니들 뒤에, 심지어는 어린 주영이 뒤에, 모두들 위험한 일을 할 때 항상 뒤에 숨어서 어리광만 부렸어요.
이제와서 갑자기 싸움을 잘 하게 될 수는 없겠지만 저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있게 해주셔요!
나의 여신이시여! 부디..... 도와 주십시오!"


시끄러운 아비규환의 소리들이 갑자기 멎으며 사방이 고요해졌다.
포근하게..... 마치 산들바람이 몸을 감싸는 듯한 편안한 느낌에 아가씨가 감고 있던 눈을 조용히 떴다.
놀랍게도, 시끄럽게 사방에서 전투의 함성을 지르던 녹색 피부의 오르크들도, 옆에서 가볍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던 "젖소" 은주도.....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혼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부드러운, 하지만 어쩐지 익숙한 듯한 느낌의 누군가가 소리도 없이 머리속에 바로 말을 걸어왔다.

[이.제.야. 나.를. 부.를. 생.각.이. 들.었.나.요? 나.의. 아.름.다.운. 종.이.여!]

아름다운 은빛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귀니아 여신님?"

대답은 없었지만 누군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이것이 신을 접한다는 거로군요!
하지만, 그로피아에서 신관 서품식을 하고 기도를 드려도 아무 소용없었는데, 이번에는 어째서....."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듯한 느낌과 함께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음성이 머릿속에서 다시 울려왔다.

[남.이. 하.는. 기.도.를. 단.순.히. 따.라.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자.기. 스.스.로. 마.음.을. 열.고. 손.을. 내.민.다.는. 것.이. 중.요.하.죠.]

"그렇다면..... 신을 접한다는 것의 의미는....."

[신.을. 접.한.다.는. 것.은.....
도.와.주.고. 싶.어.서. 항.상. 손.을. 내.밀.고. 있.는. 신.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 손.을. 잡.는. 것.....

나.의. 아.름.다.운. 종.이.여! 어.떻.게. 도.와.주.길. 원.하.나.요?]

아름다운 은빛 눈동자에서 기쁨인지 감동인지 스스로도 모를, 따뜻한 눈물을 흘리며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괴롭게 죽어가고 있어요.
그들 모두를 살릴 수 있는 힘을 원해요!"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쾅! 퍼어억!"

"우아아아아아악!"

아가씨는 어느새 귀청이 나갈 만큼 시끄러운 전장으로 다시 돌아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조금전 귀니아 여신을 접한 일이 꿈이 아니었는가 싶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확신에 찬 표정으로 몸을 조용히 일으킨 아가씨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고 새하얀 고운 손을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었다.
은빛으로 돌아와 있던 아름다운 눈동자가 다시 한번 붉은 빛으로 변했다.


.......................................................................................................................


"이제야 겨우 돌아왔군."

황소처럼 큰 갈색 멧돼지 통바의 등에 주영과 함께 올라탄 채 수진이 한숨을 쉬었다.
삼각대형으로 뒤에 늘어선 오백여 마리의 갈색 멧돼지 기병대의 선두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바로 눈앞 백여 미터 전방에, 오르크 보르카의 주력부대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수의 오르크들이 이쪽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모두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시간을 너무 소모해 버려서, 아까 포위망을 빠져나온 이후 최소한 두시간 반은 걸린게 틀림없었다.
갈색 멧돼지들은 단거리를 달릴 때는 말들에 비해 손색없이, 아니, 어쩌면 말들 이상의 주파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장거리를 달리게 하자 바로 그 약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빠른 속도를 계속 유지하는 지구력 면에서는 말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뒤쳐진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이제껏 오랫동안 갈색 멧돼지들을 길들이고 키워온 오르크들조차도 그런 문제점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이제까지 - 주영이 오기 전에는 - 아무도 갈색 멧돼지들이 지칠 만큼 장거리를 강제로 달리게 할 수 없었거니와, 또 그럴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보르카의 주력부대 뒷면으로 돌아온 후에는, 거리가 점점 가까와짐에 따라 안 그래도 말에 비해서는 많이 느린 전진속도를 더욱 늦춰야만 했다.
육중한 갈색 멧돼지들의 발소리가 울려서 들키지 않고 접근해서, 기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바람에 시간을 너무 소모하기는 했으나, 일단 눈앞에 있는 보르카의 주력 부대를 완벽하게 기만하고 뒤를 잡는데 성공한 듯 했다.
그리고 더욱 다행스럽게도 분위기로 봐서 너무 늦지 않게 도착했는지, 아직까지 싸움은 한창 계속되고 있는 듯 했다.

"이대로 잠시 한숨돌린 후에 바로 돌격한다!"

각오를 다잡은 수진이 어느 오르크에게 빌려서 등에 메고 온, 자루가 긴 도끼를 오른손에 들었다.
바로 앞에 앉아 멧돼지 통바의 등에 같이 타고 온 주영은 아직까지도 루비처럼 크고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를 마치 불타는 것처럼 이글거리면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여전히 뭔가에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화가 풀린 듯한 모습에, 아까부터 궁금했던 호기심을 더이상 참지 못한 수진이 입을 열었다.

"주영아! 그런데..... 조금 아까부터 왜 이렇게 화가 난 거니?"

그러자, 주영이 어리고 귀여운 얼굴에 안 어울리게도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를 내더니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아까..... 그 돼지같은 오르크 두목 개새끼가.....
그 개새끼가 자기 부하들 만오천 명 전부에게 미영이 언니를 강간하게 만들겠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수진은 충격으로 눈앞이 새하얘지는 듯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혹시 이미 늦어버린 거라면.....
눈앞에서 등을 보이고 흥분한 듯 도끼를 높이 들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는 검은 갑옷의 오르크들에게 이미 미영이 잡혀서 일을 당하고 있는 거라면......

"지르르!"

자기도 모르게 너무 세게 악문 아랫입술이 터져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렇다면 보르카라는 놈은 물론, 눈앞의 오르크들 모두 단 한 놈도 살려둘 수 없다!"

너무 화가 나서 가슴속에 가득히 끓어 넘치는 분노를 수진은 목청껏 소리쳐 밖으로 뿜어내야 했다.


.......................................................................................................................


"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정면 방향인 보르카의 주력부대 뒤쪽에서부터, 갑자기 길고 힘찬 여자의 함성 소리가 터져나와 드넓은 초원에 울려 퍼졌다.

여러 군데의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악전고투하고 있던, 미영의 루비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이 소리는..... 수진이?
정말로 갈색 멧돼지들을 타고 돌아와서 적의 뒤를 잡는데 성공했구나!"


소리도 없이..... 희미하고 약하게 겨우 빛나고 있던 긴 칼의 새파란 셍뜨 바인(신성한 빛)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이건.....!"

오른쪽 허벅지와 몇 군데의 상처들이 어느새 모두 사라진 채, 다시 멀쩡하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전방과 양옆을 경계하며 흘낏 뒤를 돌아본 미영의 눈에 아군의 원형진 한 복판에서 거대한 녹색의 빛의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라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백여 미터가 넘던 반지름이 이제는 겨우 몇십 미터 정도로까지 줄어들어 버린, 쟈르칼 부대의 원형진 전체를, 부드러운 느낌의 녹색의 빛이 밝게 비추며 덮고 있었다.

미영만이 아니라, 오르크 족장 쟈르칼도, 오르키스 메르타도, 아니 피를 줄줄 흘리며 크건 작건 부상을 입은 채 쓰러지기 직전이던 쟈르칼의 남은 부하 오르크들 모두가 어느새 멀쩡한 모습으로 모든 상처들이 치유되어 있었다.

"지선이가?"

미영의 루비처럼 붉은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새로운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망이 아닌 희망과 기쁨의 눈물이었다.

"우우우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르크 족장 쟈르칼이 자루가 긴 묵직한 도끼를 오른손으로 높이 들며 우렁한 함성을 질렀다.
쟈르칼의 도끼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새하얀 빛과 함께 지쳐있던 팔과 다리에 다시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진이 지른 소리를 듣고 일제히 잠깐 뒤를 돌아봤던 보르카의 부하 오르크들이 쟈르칼이 지른 함성을 듣고 다시 이쪽으로 돌아섰다.
이어, 도끼를 휘두르며 또다시 사방에서 육박해 들어왔다.
손에 들고 있는, 흰 빛을 내며 빛나는 도끼를 통해 커진, 쟈르칼의 우렁찬 목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나의 전사들이여!
이 녹색의 빛 속에서는 어떤 상처를 입어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
날아오는 도끼를 막거나 방어에 신경쓰지 말고 힘을 모아서 정확하게 적의 목을 후려 갈겨라!"


"퍼어억!"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오르크의 도끼가 거세게 갈색 가죽 갑옷 오르크의 머리를 후려 갈겼다.
투구가 찌그러지면서 피가 튀었다.
그러나, 휘청거리면서도 갈색 갑옷의 오르크는 침착하게 손에 든 도끼를 높이 쳐들더니 사형 집행이라도 하듯 상대편의 목을 큰 동작으로 후려쳤다.

"썩둑!"

썸뜩한 소리와 함께 검은 갑옷 오르크의 머리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어느새 갈색 갑옷 오르크의 머리에 흐르고 있던 붉은 피는 멎어 있었고 찌그러진 투구 사이로 드러난 이마도 멀쩡해 보였다.


"썩둑!"

"싹드득!"

"쓱득!"

사방에서 도끼들이 높이 쳐들리는가 싶더니 뿔달린 투구를 쓴 머리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어 검은 갑옷 오르크들의 머리 없는 몸통들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 갔다.
하늘을 찌를 듯 끝도 없이 뻗어있는 거대한 녹색의 빛의 기둥이, 쟈르칼 부대의 원형진 전체를 밝게 비추는 가운데, 전세는 다시 한번 완전히 역전되었다.


"아가씨" 지선이 만든 녹색의 빛 기둥 아래서는 이쪽 편은 어떠한 상처도 마술처럼 바로바로 회복되어 버렸다.
이쪽 편의 몸을 후려갈긴 상대방의 도끼가 두번째 타격을 주기위해 쳐들리면, 어느새 멀쩡한 몸이 된 이쪽 편이 바로 반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회복 속도였다.

조금 아까, 쟈르칼의 부하들이 쳐했던 상황과는 정반대인 셈이었다.
하지만 사키아에 홀린 보르카의 부하 오르크들이 목을 잘라서 머리를 떨어뜨리지 않는 한, 잘 죽지 않았던 데 비해서, 녹색 빛 기둥이 비춰주고 있는 쟈르칼의 부하들은 아예 전혀 죽지 않았다.
아마도 목을 자르거나, 머리를 보호하고 있는 투구를 먼저 쪼갠 후 같은 자리를 다시 도끼로 후려쳐서 즉사시키면 죽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키아에 홀려 광기에 사로잡힌 채, 엄청난 속도로 아무데나 닥치는 대로 도끼를 휘둘러대고 있는 보르카의 부하들에게는 그런 생각있는 공격은 불가능했다.

사실..... 인간의 병사들이었다면, 설사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더라도 자기를 향해 내려치는 도끼를 무시하고 고통을 견디며 태연히 잘 겨눠서 상대방의 목을 내려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쟈르칼의 부하들은 그 일을 당연한 듯 해냄으로써 전투종족 오르크의 무서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후우....."

바로 눈앞의 적 오르크 둘의 머리를 베어 떨어뜨려 아주 잠시의 시간을 번 미영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온통 사방에서 아군이 쓰러지는 통에 뒤로 물러서며 정신없이 긴 칼을 휘둘러야 했던 조금전에 비해, 정면에서 오는 적만 신경쓸 수 있게 되어 조금은 한숨 돌리게 된 상황이었다.
다시 반짝 눈꺼풀이 열리면서 크고 아름다운 붉은 색의 눈동자가 - 조명을 받은 루비처럼 - 타오르는 듯 붉게 빛났다.
이어, 양손에 들고 있던 긴 칼의 새파란 빛이 갑자기 더욱 밝아지면서..... 마치 파란색의 작은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저 빛은 셍뜨 바인(신성한 빛)? 하지만 오르크들에게는 눈을 부시게 하는 이상의 의미는 없을....."

그 빛을 힐끔 쳐다보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쟈르칼의 검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사강! 사강! 사가강!"

매섭게 휘둘러지는 미영의 긴 칼 앞에 검은 갑옷 오르크들의 머리가 연거푸 뚝뚝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전까지의 다소 둔탁한 소리대신 작고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마치 아주 잘드는 칼로 두부라도 베는 것처럼, 아무 저항이 없어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썩둑!"

눈앞을 막아선 검은 갑옷 오르크 한 명의 목을 후려갈기며 오르크 족장 쟈르칼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건..... 아무래도 단순한 셍뜨 바인이 아닌 것 같군.
저 인간의 여자..... 또 한 단계 강해졌구나!"


.......................................................................................................................


"응?"

대형 마차 안 승객석에서, 클로아의 입술을 거칠게 입술로 문지르고 혀로 핥으며 탐하고 있던, 여검사 재연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최면술에 걸린 듯 몽롱한 파란 눈동자를 하고 있는 클로아의 반팔 웃옷을 속옷과 함께 위로 올려, 적당한 크기의 새하얀 유방과 조그만 분홍빛 젖꼭지를 드러나게 하고.....
하얀 팬티같은 속옷은 한쪽 다리에만 걸리도록 끌어내려 놓고 다리를 활짝 벌려.....
아주 짧은 흰 치마를 입은 클로아의 성기가 드러나게 해놓은 채로.....
클로아에게 한창 사랑의 애무를 해주고 있던 - 요컨데 성추행하고 있던 - 중이었다.
재연으로서는 처음 클로아에 눈독을 들인 이래 꿈에서도 바라 마지않던 시간이었다.

최면술에 걸린 중에도 성적으로 흥분하는지, 클로아의 조그맣고 귀여운 두개의 분홍 젖꼭지는 흥분해서 뾰족하게 서 있었다.
성기 아래로는 촉촉하게 애액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뭐야, 이 느낌은? 지선이 년?
이게 미영이 년이 종종 말하던,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다는 건가?
방금 수진이 년이 길게 외치는 소리도 멀리서 들린 것 같았는데.....
그러고보니 그 소리도 아까 그 재수없는 오르크 지랄칼 놈이 외치던 소리와 어딘지 비슷한 느낌이....."

"주인님! 창밖 좀 보셔요!"

마부석의 엘루시족 소니야의 놀란 목소리를 듣고 재연이 창을 살짝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걷었다.
저 멀리서 녹색의 빛의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끝도 없이 솟아올라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저 녹색의 빛은..... 설마 저렇게 큰게 통째로 셍뜨 바인(신성한 빛)?"

재연의 감탄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소니야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주인님!"

안경쓴 얼굴을 찌푸려 인상을 쓰며 재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렇게 강한 셍뜨 바인이 있으면 어떻게 되지?"

아까에 비해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엘루시족 소니야가 대답했다.

"저는 인간분들의 셍뜨 바인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아마 틀림없이, 아군은 즉사하지 않는 한 아무도 죽지 않게 될 것입니다."

소니야의 대답에, 더욱 인상을 쓰는 듯 하던 재연이 갑자기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깔깔깔깔깔! 깔깔깔깔!
역시..... 이렇게 쉽게 죽을 년들이 아니지!
클로아를 잘 지켜줘라!"

재연의 갑작스런 명령에 놀란 소니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

"이제부터 저 년들을 구해주러 갈테니까 그 동안 클로아를 잘 지키고 있으라구!
저기 있는 오르크 놈들이 한 놈이라도 이쪽으로 뛰어올 기미가 보이면 바로 마차를 달려서 도망쳐라!"

재연의 말에 엘루시족 소니야가 파란 눈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주인님!
동료 분들도 정말 기뻐하실 겁니다!"

기뻐하던 엘루시족 소니야가 갑자기 머뭇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르크들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주인님이시라도 위험하신게 아닐까요?"

"치잇! 멍청한 엘루시년!"

재연이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라!
오르크 놈들은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할 방법이 있으니까.

어차피 여기서 오늘 죽을 년들은 아닌 것 같으니 생색이나 내두는게 좋겠지.
덤으로 클로아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서, 내 이미지도 좀 좋게 해 보고....."

뒷말을 하면서 재연이, 어쩐지 안 어울리게도 얼굴을 약간 붉혔다.
마차 뒷쪽에 손을 뻗어 깨끗한 수건을 찾더니 보석을 닦듯 조심조심 온통 침 범벅이 된, 클로아의 입 주위와 젖가슴, 그리고 애액이 흘러나온 성기를 말끔히 닦아 주었다.
그리고 가슴위로 올라가 있는 속옷과 웃도리를 다시 내려 주고, 한쪽 발목에 걸려 있던 아래 속옷도 다시 올린 후, 하얀 짧은 치마를 가지런히 내려 주었다.
한편으로는 몹시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재연이 클로아의 파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자, 몽롱하게 풀려 있던 클로아의 두 눈에 갑자기 촛점이 돌아왔다.
이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클로아가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죠?
엄마는? 엄마는 어디 있어요?"

다급하게 소리치며 마차 문을 열려는 클로아의 하얀 손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잡아서 진정시키며, 재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네가 갑자기 정신을 잃어서, 오르크들의 포위진 밖으로 일단 빠져 나왔어!
마차 안에서 소니야와 함께 기다리고 있어.
내가 플로라(은주)씨, 그러니까 엄마를 구해줄테니까."

그 말에 클로아의 어리고 귀여운 예쁜 얼굴이 울상이 되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흐흑흑흑! 하지만..... 훌쩍! 클로디아(재연)님은 아까 오르크 한 명한테도, 싸워서 지셨잖아요!
저렇게 많은 오르크들을 무슨 수로 이겨요? 흑흑!
엄마를 구하고 싶지만..... 클로디아님이 공연히 죽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아요! 흐흐흑! 흐윽!"

딴 사람이 말했다면 한 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싶어질 내용의 말이었다.
그러나, 재연은 안 어울리게도 당황한 표정이 되더니, 마지막 말을 들으면서는 기쁜 듯 미소까지 지었다.
주머니에서 아주 고급스런 분홍 손수건을 꺼내든 재연이 부드럽게 클로아의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그로피아 마을의 어느 가게주인에게서 최면술을 걸고 뺏어온 걸로 보이는 손수건이었다.

"클로디아님이라고 하지 말고 클로디아 언니라고 불러!
자! 불러 봐!"

"클로디아 언니! 훌쩍!"

울먹이면서도 순진하게 시키는 대로 말하는 클로아를 보고 재연의 얼굴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아까 그 지랄... 아니 쟈르칼에게는 방심해서 졌던 거야!"

부드러운 분홍 손수건을 클로아의 손에 쥐어준 후, 재연이 마차 문을 열고 바닥에 내려섰다.

"내 귀여운 클로아! 잘 보렴!

언니는 말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단다!"

말을 마치며 재연이 이백여 미터 정도 떨어진 보르카의 오르크 부대들쪽으로 돌아섰다.
검은 두 눈동자가 안경속에서 타오르는 것처럼 새빨갛게 변하더니, 양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꽈악 쥐어졌다.

"바레라! 바레라! 바레라! 바레라! 바레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루시족 소니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뭘하신거지, 주인님은?
인간족의 오스콜(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저렇게 하신다고 방어막이 다섯 겹으로 쳐지진 않을텐데....."

하지만, 재연은 만족스런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양팔을 양옆으로 뻗으며 꽈악 주먹을 쥐고 있던 양손을 활짝 폈다.
그러자 양손의 열 손가락 끝에서 소리도 없이 - 주영처럼 - 손톱들이 길게 늘어났다.
30 센치 정도.....
아니,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늘어난 손톱들이 어느새 2미터 가까운 길이로 길게 늘어나 예리하게 반짝였다.

"다녀올게, 클로아!"

뒤를 돌아본 재연이 어쩐지 안 어울리게도 활짝 웃으며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위로 들어 보였다.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만 높이 들면서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한 듯 했지만, 2미터 길이나 자라난 손톱들 때문에 손가락들을 편 채 그냥 엄지 손가락만 위로 들어 보였다.
그리고..... 재연이 알았다면 유감스러웠겠지만, 차가운 느낌의 은빛테 안경속에서 맹수처럼 잔인하게 빛나는 새빨간 눈동자와 2미터 길이로 길어진 손톱들 때문에..... 재연의 모습은 - 본인이 생각한 대로 - "멋진 화이팅 포즈를 짓는 아름다운 여전사" 라기보다는,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잔인한 "살인 괴물" 처럼 보였다.

"간다!"

소리와 함께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재연이 이백여 미터 앞에 몰려있는 엄청난 수의 검은 가죽 갑옷의 오르크들에게 돌진했다.
여차하면 도망치려는 모습으로 반대편을 향한 채 달랑 마차 한 대 서 있는 모습에, 아까부터 계속 무시하고 다른 쪽을 향해 서 있던 오르크들이었다.


.......................................................................................................................


"쩔꺽! 쩔꺽! 쩔꺽!"

"하아! 으음! 아아아아! 아파요, 보르카님! 으으으음!"

발가벗겨진 채인 긴 갈색머리 여자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저쪽 편 총대장 오르크 보르카는 본진 한 복판에서 아직까지도 그의 인간 여자 수집품들과 한창 즐기고 있는 참이었다.

그 때였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본진 뒷쪽 멀리로부터 여자의 함성 소리가 길게 들려온 것은......

"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응?"

어쨌든 나름대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보르카의 눈이 놀라움으로 빛을 발했다.

"이 소리는..... 크라프(에너지, 마나)가 실려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본진 뒷쪽에서..... "

"이.... 이건..... 와! 와! 와! 와! 와!"

짐승 해골을 머리에 쓴 샤먼 무파카의 호들갑떠는 소리에 오르크 보르카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갑자기 왜 난리냐?"

샤먼 오르크 무파카가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오른손 끝으로 - 함성 소리가 방금 들려온 방향의 반대편인 - 정면쪽을 가리켰다.

"저 녹색 빛의 기둥을 보십시오, 보르카님!"

"응? 저런게 있었던가? 저게 뭐냐?"

경악한 표정으로 샤먼 오르크 무파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셍뜨 바인(신성한 빛)입니다!
그것도 이제까지 들어본 적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와 강도의....."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오르크 총대장 보르카가 뿔달린 투구를 쓴 녹색의 큰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그러나, 샤먼 무파카가 자세히 설명해줄 필요도 없이, 앞쪽에서 지휘하고 있던 오르크 대장 한 명이 구르듯 달려와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사실 사키아의 힘에 홀린 오르크들은 광기에 사로잡혀 지휘가 거의 전혀 안되었으므로, 오르크 대장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큰일났습니다, 보르카님!"

"뭐냐?"

짜증스런 목소리로 대답하는 보르카에게 그 오르크 대장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쟈르칼의 부하 놈들.....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습니다!
저 녹색 빛줄기가 생긴 다음부터 우리 편만 계속 죽어 쓰러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오르크 총대장 보르카가 미쳐 자세히 묻기도 전에, 뒤쪽에서 또 한 명의 오르크 대장이 급하게 뛰어오며 외쳤다.

"큰일났습니다, 보르카님!
도망치십시오! 기습입니다!"

"뭐? 도망이라구?"

보르카가 큰 덩치를 부르르 떨며 발광하듯 소리쳤다.

"멍청한 놈아! 뒤에서 보어(멧돼지) 몇 마리가 기습해 올 건 알고 있었잖아!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오긴 하지만.....
막으면 그만이지 무슨 헛소리냐?"

그 오르크 대장이 고개를 저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마리가 아닙니다!
몇백 마리나 됩니다!
게다가 제일 앞에 있는 괴물 인간 년때문에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오르크 총대장 보르카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 때, 또다른 오르크 대장이 이번에는 옆에서 뛰어와 다급하게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보르카님!"

"넌 또 뭐냐?"

오른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짜증스럽게 묻는 보르카에게 그 오르크 대장이 와들와들 떨며 대답했다.
마치 뭔가에 잔뜩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전투종족인 오르크로서는 - 그것도 전투에는 이골이 난 대장급 오르크로서는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괴물이 쳐들어 옵니다! 괴물이.....
우릴 전부 죽일 겁니다!"

"퍼어억!"

사정없이 후려친 보르카의 주먹질에, 추하게 떠는 모습을 보이던 오르크 대장이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주위의 오르크 호위병들을 돌아보며 보르카가 소리를 질렀다.


"무슨 헛소리들인지 내가 직접 봐야겠다!
저걸 들어 봐!"

밑판만 있는 가마같은 탈 것 위에 보르카가 올라서자 네 명의 오르크들이 네 귀퉁이의 손잡이들을 잡고 높이 위로 쳐들었다.
정면을 향해 서 있던 보르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모습은..... 저 멀리 보이는 녹색의 빛 기둥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뭉쳐있는 쟈르칼의 부대와 그 주위를 포위하고 치열하게 공격중인 자기 부하들의 모습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자기 부하들만 계속 쓰러져가고 있는 상황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키아에 홀린 부하들은 마치 모닥불에 달려드는 나방떼처럼 겁도 없이 계속 달려들면서 죽어 나가고 있었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지만 - 방금 보고받은 대로 - 쟈르칼의 부하들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게 왠 거지같은 상황이란 말이냐!"


인상을 쓰며 가마 위에 서서, 주춤주춤 뒤로 돌아선 보르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저 멀리, 오백 마리는 돼 보이는, 오르크들을 등에 태운 갈색 멧돼지떼들이 삼각 대형을 이룬 채 거세게 밀고 들어오고 있는 장관이었다.
황소처럼 큰 덩치의 멧돼지들이 거세게 들이받을 때마다 부하 오르크들이 마치 녹색과 검정의 짚덤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튕겨 나갔다.
그때마다, 주위에 서 있던 오르크들까지 한꺼번에 여러 명씩 우르르르 밀려 넘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갈색 멧돼지들의 돌파력에 대해 들은 바는 있었지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게다가, 제일 선두의 갈색 멧돼지에 두 명이 같이 올라타고 있는 인간들중, 뒷쪽에 앉은 인간이 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막아선 오르크들이 마치 도끼로 후려친 닭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방팔방으로 튕겨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괴물같은 갈색 멧돼지들보다도 더 힘이 센게 아닌가 싶은 광경이었다.

그 인간의 여자가 이끄는 갈색 멧돼지의 기병들이, 마치 대나무를 날카로운 칼로 쭈욱 쪼개듯, 어마어마한 수를 자랑하는 자신의 주력부대 한 복판을 둘로 쪼개며 돌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돼지 새끼들이!
어떻게 돼지들이 대형을 지어서 달려올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저 인간 년! 뭐가 저러냐?
설사 오르크 최강의 전사라는 위대하신 부쳐크님이라도 저렇게 하실 수는....."


그때, 왠지 머리가 쭈뻣하는 기분을 느낀 오르크 총대장 보르카가, 누가 화살이라도 쏜 듯, 몸을 움추리며 다급하게 오른쪽을 돌아 보았다.

"저건 또 뭐냐?
빨간 물감이라도 뿌리고 있는거냐?"

저 멀리서, 위에서 보면 녹색과 검은색이 섞인 바다처럼 보이는 자신의 부하들이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이쪽으로 달려오는 대로 연거푸 붉은 색으로 바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며, 보르카는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그쪽으로 기울였다.
마치 아주 넓은 붉은 색 카페트라도 쭈욱 깔면서 달려오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욱! 우웨엑!"

문제가 있는 성격이긴 했지만, 이제껏 수십 년간, 수백 번도 넘을 전투에서 별의별 끔찍한 모습을 다 봐왔던 보르카였지만 난생 처음으로 전쟁터에서 구역질을 느꼈다.
그것은..... 빨간 물감이나, 붉은 카페트가 아니었다.
인간 여자로 보이는 검은 머리의 존재가 달려오면서 양팔을 휘두르는 대로 자신의 부하들이 온통 갈기갈기 온몸이 찢어져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토막토막난 고깃덩이들로 변해버린 부하들의 피로 온통 피바다가 돼가고 있는 모습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순간, 아직도 백여 미터는 떨어진 거리였지만, 그 괴물이 새빨갛게 빛나는 눈을 쳐들어 가마위의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의 여자 모습의 괴물이 씨익 웃는 듯하다고 느낀 순간 공포에 질려버린 보르카가 허억 숨을 들이켰다.
온몸이 어느새 식은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살인 괴물! 아니, 악마다!
저건..... 악마 그 자체야!"

가마를 메고 있는 부하들에게 내려 놓으라고 말할 정신도 없을 지경이 된 보르카가 굴러 떨어지듯 가마에서 내려왔다.
어느새, 오르크 대장들 거의 전원이 몰려와 가마 주위에 서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밀리고 있는 전황을 급히 보고하고 대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덩치 큰 오르크 보르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쟈르칼 놈이 문제가 아니다!
모두 전력을 다해서 부대 왼편, 북쪽 방향에서 쳐들어오는 악마, 그리고 뒤편, 서쪽 방향에서 밀고 들어오는 보어(멧돼지)떼를 막아라!"

어떻게 막아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총대장 보르카가 시키는 대로 오르크 대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에 건 깨알만한 갈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들을 손에 쥔 채로, 사키아에 홀린 일반 전사 오르크들을 부대 왼편과 뒤편으로 향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보르카는 손에 자루가 긴 도끼를 쥔 채로, 주춤주춤 뒷걸음질로 부대 오른편, 남쪽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망가야 돼!
부쳐크님의 벌이 문제가 아니다!
악마가 쳐들어온다!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저 악마에게 갈기갈기 찢겨서 죽는다!"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앙!"

"쿠와아아아악! 쿠웨에에에!"

갑자기, 요란한 부딪치는 소리가 연거푸 들리더니, 바로 눈앞의 오르크들이 사방으로 튕겨나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이어, 온통 피를 덮어쓴, 황소처럼 큰 갈색의 멧돼지와 그 위에 탄 두 명의 인간 여자가 대열을 뚫고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만 도망치겠다는 보르카의 판단은 이미 너무 늦어버린 듯 했다.


"보르카아!"

갈색 머리의, 남자처럼 짧은 머리의 덩치 큰 여자가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붉은 빛 눈동자가 시선만으로도 죽일 듯한 살기를 띠고 보르카를 노려 보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도끼날에서 뚝뚝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콰아아앙!"

"크와아아악!

"쿠당탕탕탕!"

그 와중에 옆에서 덤비려던 보르카의 부하 오르크 한 명이 갈색 머리 여자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 투구를 쓴 머리가 박살나며 공처럼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마치 갈색 멧돼지에게 들이받히기라도 한 듯한 엄청난 힘에, 기가 질린 보르카가 도끼를 들며 중얼거렸다.

"브라우니 보어 섬 카팅(갈색 멧돼지 같은 년)!"


"촤아아아아아아아악!"

다음 순간, 질긴 천들을 연거푸 찢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한쪽 옆의 오르크들이 한꺼번에 바닥을 굴렀다.
이어, 끔찍하게도 피보라를 뿜으며 머리, 팔, 다리, 몸통할 것 없이 몽땅 토막토막 나버린 붉은 고깃덩이 더미로 변해 버렸다.

"스으으으윽!"

전신에 새빨갛게 온통 피를 덮어써서 인간인지, 정말 악마인지 조차 구별이 안가는 새빨간 괴물이 어느새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이 미터는 돼 보이는 길고 예리한 오른손 손톱들을 보르카의 목에 갖다 대며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두목 보르카냐? 돼지같은 오르크 놈아!"

역시나 여자 목소리인 것이 아까 쟈르칼과 함께 있었던 인간 여자들중 하나였던 검은 머리 여자인게 틀림없었다.


"검사 아줌마?"

수진과 함께 갈색 멧돼지 통바의 등위에 타고 있던 주영이 놀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콰아앙! 콰앙!"

그 와중에도 사방에서 보르카의 부하 오르크들이 겁도 없이 미친 듯이 덤벼들고 있었다.
수진이 크게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끼에 맞아 튕겨난 오르크들이 여러 명씩 한꺼번에 겹쳐 쓰러지며 바닥을 굴렀다.


온통 피범벅이 돼서 잘 보이지도 않게 생긴 안경 속에서, 힐끔 주영쪽을 쳐다 본 괴물 - 여검사 재연이 거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늦진 않았나 보군요.
자, 오르크 놈아! 부하들을 전부 멈춰!
싫으면 돼지든지....."

날카로운 오른손 손톱중 하나가 보르카의 목을 누르자, 손쉽게 베어지며 지르르 붉은 피가 보르카의 굵은 녹색 목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공격을 전부 멈추게 해라, 무파카!"

머리에 짐승 해골을 덮어쓴 샤먼 오르크가 얼빠진 표정으로 그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보르카님! 그럴려면 사키아의 힘을 풀어야 합니다!
지금 사키아의 힘을 풀어버리면....."

"빨리 해, 멍청아!"

따끔거리는 목의 통증을 느끼며 오르크 총대장 보르카가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겁도 없이 재연에게 덤벼들던 부하 오르크들이 가볍게 휘둘러대는 재연의 왼손 손톱에 의해 순식간에 토막토막이 나버리고 있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면서, 보르카는 공포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감히 덤벼볼 엄두도 안날 정도의 괴물, 아니 악마 그 자체였다.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태도로, 샤먼 오르크 무파카가 깨알만한 갈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왼손에, 수정구슬이 달린 지팡이를 오른손에 들었다.
이어, 양손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살육과 광기의 정령 사키아여!
그대의 광기를 거두어 가소서!"

무파카의 외침과 함께 지팡이의 수정구슬이 빛을 내는가 싶더니, 아직도 엄청난 수가 남아 있던, 보르카 휘하의 검은 가죽갑옷을 입은 오르크들의 눈이 갑자기 몽롱해졌다.
그리고, 한꺼번에 "털퍼덕! 털퍼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아 힘없이 늘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아직도 만 명이 가깝게 남아있던, 보르카의 거의 전 병력이 바닥에 쓰러져서 전투불능 상태가 돼버렸다.
남아 있는 병력은 총대장 보르카를 중심으로 가까이에 모여 있던 대장들과 호위병 오르크들, 그리고 샤먼 오르크 무파카 등 잘해야 백 명이 조금 넘을 정도에 불과했다.


"고마워!
그럼..... 잘 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를 덮어쓴 모습의 악마 - 재연 - 이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걸 직감한 덩치 큰 오르크 보르카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 두르카이! 두르카이를 원한다!"

그 말에 안경 속에서 새빨간 눈동자를 빛내며, 재연이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돌깨? 일대 일 결투라는거? 네가 나하고?"

마치 모기가 앵앵거리며 "결투를 신청한다!" 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것처럼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오르크 보르카가 다급하게 다시 외쳤다.

"아니다! 쟈르칼과다!
아까 쟈르칼이 원했던 두르카이를 이제 받아들이겠다!"


루비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반짝이며, 미영이 얼굴 가득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한꺼번에 우르르 쓰러져 버리는 보르카의 부하 오르크들을 보며 잠시 놀랐지만, 저편에 보르카와 함께 서 있는 수진과 주영, 그리고 갈색 멧돼지떼를 보면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칠갑을 한 새빨간 모습으로, 손톱으로 보이는 아주 긴 뭔가로 보르카를 위협하고 서 있는 저 모습은.....

"재연씨?"

미영의 붉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클로아를 데리고 도망쳤던 재연이 돌아왔다니.....
그것도 오르크 무리 한가운데 뛰어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일행을 구하다니.....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허억! 허억! 저기서 뭘하고 있는 건지 알겠소?"

한숨돌린 표정으로 다가온 오르크 족장 쟈르칼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미영에게 물었다.
미영과 그 부하들에게 지친 몸의 활력을 다시 돌려줬던 쟈르칼의 함성은 정작 쟈르칼 본인에게는 크게 효과가 없었던 듯 했다.
여전히 몹시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이 나라에 온 이래, 귀가 좋아진 미영이 방금 들은 소리를 쟈르칼에게 전했다.

"보르카가 쟈르칼님과의 두르카이를 원한다는 군요.
하지만 클로디아(재연)씨가 그냥 죽일 것 같아요."

오르크 족장 쟈르칼이 고개를 저었다.

"두르카이를 원한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명예로운 오르크의 전사다운 일이요. 헉! 허억!
받아들이겠소!"

오르키스 메르타가 다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상처는 치유되셨다지만 지금은 너무 지치셔서 안됩니다!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재연이 차가운 음성으로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친 지랄칼과 그 졸개 년!
내가 없었으면 돼져 버렸을 녹색 도깨비들 주제에 명예 좋아하네!
죽어 버려, 보드카!"

놀랍게도 미영이나 주영 이상의 청력으로 백여 미터도 더 떨어진 거리에서 하고 있는 말을 전부 듣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재연의 말을 들은 미영이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멈추세요, 재연씨!"


여전히 혼잣말을 하듯 재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미영과 주영 자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신이 나가서 혼자서 말하는 걸로 보일 듯한 모습이었다.

"왜 멈춰야 하죠?"


다시, 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미영이 대답했다.
역시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혼자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걸로 들리겠지만.....

"쟈르칼님이 원하니까요.
그리고..... 이미 너무 깊이 말려 들어 버렸지만 (미영이 잠시 한숨을 쉬었다), 이 일은 오르크들간의 문제이니 결말은 오르크들간에 내게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쟈르칼님이 너무 지쳐 보여서 망설여지지만요."


저쪽 편 총대장 보르카의 굵은 녹색의 목에 날카로운 손톱을 들이댄 채로, 별 웃기는 소리 다 듣겠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재연의 눈이 - 쟈르칼이 지쳐 보인다는 말을 듣고 - 차갑게 반짝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일어나라, 보드카!
지랄칼이 돌깨인가 뭔가를 받아들인단다!"

목에 대고 있던 길게 늘어나있던 2미터 길이의 손톱을 원래의 짧은 길이로 줄이며 재연이 말하자, 보르카가 멈칫거리며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우뚝 일어서자 거의 이 미터에 달하는 키에 정말로 덩치가 큰, 거인같은 오르크였다.

"고맙소!"

녹색 얼굴에 간사해보이는 웃음까지 지으며, 오르크 보르카가 재연의 원래대로 줄어든 손톱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놀랄 만한 속도로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해 보이는 긴 자루 도끼로 사정없이 재연의 머리를 후려치..... 려고 했다.
그러나..... 채 재연의 몸에 닿기 전에, 마치 도끼가 공중에서 뭔가에 부딪친 듯 "퍼억!" 소리가 났다.
이어, "지지지직!" 하고 뭔가가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들려왔다.

재연이 씨익 잔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자, 오르크 총대장 보르카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이걸로 다섯 겹의 바레라(방어막)중 두 겹이 깨졌군.
제법이야, 보드카!
약오르지?
나는 너를 칠 수 있는데, 너는 나를 못 친다니....."

장난하듯 까닥거리고 있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의 손톱이 어느새 다시 길게 자라나 보르카의 목께에 와 있었다.
당황스런 웃음을 얼굴에 지으며 보르카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시험해 본 것 뿐이오.
자! 쟈르칼과 겨루러 가 볼까?
자! 여기 간다니까!"

오르크 보르카의 큰 덩치가 급한 걸음으로 휘적휘적 이편을 향하는걸 보면서, 미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레라라고?
그러고보니 다크 매기아러 샤운이라는 자가 그걸 쓴 채로, 엘루시 여자들을 강간하고 애무를 받고 있었지.
악의적인 공격을 막아준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저런 힘이 있는 줄은 몰랐었어.
하지만, 여러 개를 겹쳐서 쓸 수도 있는건가?"


쟈르칼의 부하 오르크들이 온통 바닥에 널려 있는 시체들과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는 보르카의 부하들을 옆으로 치워서 제법 넓은 빈 터를 만들어 주었다.
그 중앙에, 갈색 가죽갑옷을 입고 있는 오르크 쟈르칼과 검은 가죽갑옷의 오르크 보르카 - 양편의 족장과 총대장 오르크가, 자루가 긴 묵직한 도끼를 든 채로 마주 섰다.
둘다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으나, 쟈르칼은 몇 시간이나 계속된 싸움으로 지친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쟈르칼도 이 미터 가까운 엄청난 체구를 자랑하는 오르크였으나, 보르카쪽이 덩치와 키는 오히려 더 컸다.
보르카가 위, 아래 어금니 네 개가 모두 위협적으로 튀어나와 있는 입가에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지쳐 보이는구나, 쟈르칼!
내 상대가 될 수 있겠냐? 끼끽끽끽!"

"내 걱정까지 해 줄 필요는 없다, 보르카! 허억! 허억!"

긴장한 얼굴로 오르키스 메르타와 쟈르칼의 부하들, 미영 일행, 보르카의 대장급 오르크들과 샤먼 무파카 등이 멀찌감치 둘러서서 지켜 보고 있었다.
그때, 원을 그리고 둘러선 쟈르칼의 부하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고 도끼로 땅바닥을 내려쳐 "쿵! 쿵! 쿵!" 울리는 소리를 내며 입을 모아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두르카이! 두르카이! 두르카이!"

원래는 보르카의 부하들도 함께 소리를 내고 함성을 질러야 할 듯 했다.
그러나, 이제야 겨우 어기적거리며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앉기 시작한 보르카의 일반 전사 오르크들은 여전히 몸을 제대로 움직일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사키아 사용의 부작용이 틀림없었다.
둘러 서 있는 중에는, 잘해야 백 명 정도 끼어 있는 보르카의 부하들은 인상을 쓴 채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쟈르칼의 부하들의 기세에 질리기도 했지만, 결국 상황을 여기까지 몰고와버린 보르카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는 듯 했다.

오르크들의 함성이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던 듯, 보르카가 도끼를 높이 위로 치켜들더니 함성과 함께 도끼를 크게 휘두르며 먼저 달려 들었다.

"쿠와와아악!"

"쾅!"

쟈르칼이 아래에서 위로 도끼를 크게 휘둘러 막자, 도끼날끼리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까드드드드득!"

도끼날끼리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역시 지친 탓인지 쟈르칼의 도끼가 아래쪽으로 천천히 밀리기 시작했다.
밀어붙이고 있는 보르카의 입가에 잔인한 웃음이 서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야!"

기합과 함께 쟈르칼이 손에 힘을 주는가 싶더니, 보르카의 도끼를 뒤로 밀어냄과 동시에 어느새 빠른 동작으로 보르카의 빈 옆구리를 향해 도끼를 후려쳤다.

"쾅!"

아슬아슬하게, 겨우 쟈르칼의 도끼를 막아낸 보르카가 얼굴에 인상을 썼다.

"우야!"

"쾅! 쾅! 쾅! 콰앙! 쾅! 끼드득! 쾅!"

위로, 아래로, 양옆으로.....
기합과 함께 숨도 쉴새 없이 쟈르칼의 연속 공격이 이어졌다.
보르카는 연거푸 뒤로 물러나며 쟈르칼의 도끼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지만, 오래 막기는 어려울 듯한 모습이었다.

"쿠와아아아악!"

함성을 지르며 큰 동작으로 쟈르칼의 도끼를 밀어낸 보르카가 뒤로 잽싸게 몇 걸음 물러서더니 다급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잠깐, 쟈르칼!
그리고, 그 부하 오르크들아!
너희의 진짜 적은 내가 아니다!"

갑자기 무슨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건지..... 쟈르칼의 부하들은 물론, 몇 명 안되는 보르카 자신의 부하들조차 이해가 안가는 표정으로 보르카를 쳐다보았다.

보르카는 도끼를 왼손에 들고, 굵은 녹색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미영 일행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다시 외쳤다.

"우리 모두의 진짜 적은 저기 저 인간 계집 년들이다!
네 말을 허투로 듣지 마라!
저 인간 년들이 얼마나 무서운 년들인지 너희들 모두 잘 봤을 것이다.
저 년들을 오늘 여기서 죽이지 못하고 놓치면, 우리 위대한 전투종족 오르크에게 미래는 없다!"


그 말에 오르크 족장 쟈르칼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묵직한 음성으로 마주 입을 열었다.

"다른 종족을 죽이고 침략해서 얻으려는 그런 미래라면 그렇겠지.
내가 원하는 것은 평화와 번영이 있는 다른 미래다!"


덩치 큰 오르크 보르카가 위아래 네 개의 어금니가 입밖으로 삐져나온 녹색 얼굴에 인상을 쓰며 외쳤다.

"이 비열한 겁장이! 종족의 배신자 놈!"


쟈르칼이 다시 고개를 저으며 중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약한 상대를 괴롭히고 죽이는 도살자에 불과한 네가 명예로운 전사인 내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끼끼끽끽끽끽끽끽끽끽!"

쟈르칼이 인간들을 같이 죽이자는 말을 거절한 이상, 실력도 눈에 띄게 떨어지는 보르카에게는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덩치 큰 몸을 흔들며 웃음을 터뜨린 오르크 보르카가 입을 열었다.

"네 놈의 그 잘난 척하는 꼴을 보는데는 질렸다, 쟈르칼!
그렇다면..... 도살자가 얼마나 강한지 잘 보여주마, 잘난 전사 놈아!"

보르카가 목에 걸고 있던 깨알만한 갈색 보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를 오른손에 쥐었다.
부드득 소리와 함께 목걸이를 뜯어내서 목걸이의 팬던트 뒤를 누르자, 깨알만한 갈색 보석이 똑 떨어져 나갔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목걸이인 듯 했다.
빠른 동작으로 깨알만한 갈색 보석을 꿀꺽 삼켜 버린, 보르카의 눈의 흰 자위가 시뻘겋게 충혈되는가 싶더니, 광기에 찬 함성을 질러댔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부웅!"

위에서 아래로 크게 도끼를 휘두르며, 보르카가 무서운 속도로 쟈르칼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조금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속도가 빨라진 동작에, 방어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말그대로 광기에 사로잡힌 듯 했다.


"저 모습은 마치 사키아에 두 번째로 홀렸을 때의 오르크들같군!
역시 저럴 때는 움직이는 속도 자체가 굉장히 올라간다!
아마 쉽게 죽지도 않을거야.
그러면, 저렇게 지친 상태의 쟈르칼님이 당해낼 수 있을까?"

미영의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가 걱정스런 빛으로 흔들렸다.


"부웅! 부우웅! 부우웅!"

광기에 차서, 풍차처럼 연거푸 무시무시한 속도로 도끼를 휘둘러대는 보르카의 공격을 막을 엄두가 안나는 듯, 쟈르칼은 도끼를 마주 부딪치지 않고 계속 뒤로 물러서며 몸을 피하기만 했다.

여검사 재연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잔인한 미소가 엷게 지어졌다.

그러던 중, 미처 피하지 못한 듯, 보르카의 도끼가 쟈르칼의 빈 옆구리에 제대로 들어갔다.

"퐈아아악!"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는 것을 보고, 오르키스 메르타가 다급한 소리로 외쳤다.

"쟈르칼님!"

"꾸르르르르르르르르르....."

쟈르칼의 옆구리에 도끼를 깊숙히 박은 채로, 보르카가 공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쟈르칼의 도끼가 어느새 보르카의 녹색 턱밑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옆구리를 맞으면서, 동시에, 약간 비스듬한 각도로, 내지르듯 밑에서 위로 올려친 듯 했다.

"우우야!"

기합과 함께 쟈르칼의 굵은 녹색 팔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투컥!" 둔탁한 소리가 났다.
뿔달린 투구를 쓴 보르카의 커다란 녹색 머리가 천천히 몸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이어, 마치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덩치 큰 오르크 보르카의 몸이 뒤로 넘어져 바닥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쿠웅! 털퍼덕!"


"두르카이! 두르카이! 두르카이!"

쟈르칼의 부하들이 다시 일제히 발을 구르고 도끼로 땅을 내리치며 결투의 끝을 알리는 소리를 입을 모아 외쳤다.


"와아! 이겼다!"

여전히 갈색 멧돼지 통바의 등에 올라탄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영이 만세를 부르듯 팔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이어, 몹시 지친 듯 창백한 얼굴로 나타나 녹색의 빛으로 쟈르칼의 옆구리 상처를 치료해 주기 시작한 "아가씨" 지선에게 달려들어, 뒤에서 목에 팔을 두르며 매달렸다.


"캑! 캑! 목을 조르지마, 주영아!"

캑캑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아가씨가 약간 창백한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어, 수진아! 정말 고마와!"

어처구니 없게도 여전히 잠든 채인 "젖소" 은주를 찾아서 품에 안아든 채, 다가온 수진의 넓은 어깨에 매달려 미영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수진이 늘 그렇듯 소리없이 무뚝뚝한 느낌의 - 하지만,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


두르카이의 규칙에 따르면, 보르카가 지휘하던 모든 오르크들은 쟈르칼의 휘하에 들어야 마땅하겠지만, 사실 원래 보르카의 개인 군대가 아니라 보르카에게 맡겨진, 오르크 대족장 부쳐크의 군대였다.
그 점 때문인지, 오르크 족장 쟈르칼은 부쳐크에게 돌아가고 싶은 오르크는 자유롭게 돌아가도 좋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보르카 휘하의 오르크들은 대장급, 일반 전사급할 것 없이, 거의 전부 쟈르칼의 밑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두시간이 훨씬 넘게 이어진 격전중, 쟈르칼의 2,000여 명의 보병부대는 500여 명만 살아남아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500여 명의 갈색 멧돼지 기병중에도 적진을 기습 돌파하던 중에 2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나 격렬했던 전투를 생각하면 놀랄만큼 적은 숫자였다.
갈색 멧돼지들은 여러 마리가 크게 다치긴 했으나 죽은 멧돼지는 없었다.

보르카가 데려왔던 15,000여 명에 달했던 대부대는 무려 6,000여 명이 전사하고 9,000여 명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그 9,000여 명중 샤먼 오르크 무파카를 포함한 몇백 명만이 부쳐크에게로 돌아갔을 뿐, 적어도 8,500 명이 넘는 수의 전사들이 새로이 쟈르칼의 부족에 합류했다.

그리하여, 쟈르칼의 브라우니 보어(갈색 멧돼지) 부족은 보병 2,000여 명, 갈색 멧돼지 기병 500여 명에서, 이제 보병 약 9,000여 명, 기병 500여 명으로 그 병력이 대폭 늘어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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