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리버프론트 클럽하우스의 공개 PT와 대원 오페라 하우스 PT 준비로 수석 디자인 팀과 호스피탈리티 팀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원 오페라 하우스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고 나름대로 큰 그림이 그려진 상태였으므로 진희와 미샤에게 도면과 3D 투시도 작업을 지시한 상황이었지만 리버프론트 골프장은 사정이 달랐다.
수도권의 고급 골프장중에 하나였고 회원권을 보유한 사람들 역시 쟁쟁한 사람들이었으므로 많은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와 시공업자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PT였다.
게다가 이번 프로젝트는 경미의 과거를 지워주고 새로운 삶을 완성해주는 일이었으므로 꽤나 신경이 쓰였다.
물론 나보다 경미가 훨씬 더 신경을 많이 쓰고 있겠지만…
“이상이 저희 팀에서 준비한 시안입니다.
이제부터 질문을 받겠습니다.”
호스피탈리티 팀의 이 경미 팀장이 그 동안 작업했던 내용에 대한 예비 PT를 막 마치고 참석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이 팀장.
어디, 최 팀장! 커머셜 팀에서 보기엔 어떤 것 같은가?”
커머셜 팀의 최 경민 팀장은 성실하고 싹싹한 매너로 그리 잘 생기지 않은 외모를 덮고 있는 사내였다.
어느새 가장 탄탄한 팀워크를 다져놓았으나 아직 이렇다 할 프로젝트를 시작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네, 우선 아주 신선한 발상이 돋보입니다.
그런데 실행 단가가 너무 비싸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이 팀장님 예상 공사 견적은 얼마로 책정하셨나요?”
거의 한 달간 지켜본 결과 경미는 일을 할 때 온몸에 생기가 도는 여인이었다.
마치 그 동안의 칩거를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양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최 팀장의 질문에 경미는 역시 자신 있고 당당하게 응수했다.
“설계비를 제외하고 실 공사 견적은 20억에서 약간 빠집니다.”
“이 팀장님이 제안한 그 모든 재료와 디자인을 커버하는데 20억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재료들을 수입해와야 할 것 같은데, 아닌가요?”
“맞습니다, 최 팀장님.
하지만 여기 홍보실장님이 미국 인테리어 재료 업체에 선이 있어서 저희가 직수입해서 시공업자들에게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김 실장님?”
“이 팀장님 말씀이 맞아요.”
진영이 차분하지만 따듯한 목소리로 경미를 응원했다.
“더구나 저희가 직접 수입해서 시공업자에게 공급하는 과정에서 마진까지 얻을 수 있으니 최소한의 견적으로 경쟁력확보와 동시에 추가 수입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죠.”
“전체적으로 그린 계열의 컬러 스킴을 사용하면서도 따듯한 느낌을 유지하도록 한 색 배열이 인상적이네요.
다만, 중간중간 약간의 악센트를 조금 주신다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레지덴샬 팀의 홍 은희 팀장이 물었다.
“네, 홍 팀장님.
저희도 그 부분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
외부의 골프장과 클럽하우스를 하나의 테마로 연결시켜서 자연을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 기본 컨셉인데 홍 팀장님 말씀대로 약간 밋밋하고 지루한 것 같아 그 부분을 보완해야 할 것 같아요.
좋은 지적 고마워요, 홍 팀장.”
직원들이 서로 토의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생산적인 토론에 내가 끼어 들어 이래라 저래라 할 이유도 없었다.
“오케이!
전반적으로 방향 설정은 잘 된 것 같네.
오늘 크리틱에서 제시된 문제점이나 보완해야 할 점 고려해서 이 팀장이 잘 마무리 해 줘요.”
“네, 회장님.”
“자, 그럼 각자 정리들 하고 퇴근들 하도록 하지.”
호스피탈리티 팀 회의실을 나와 올라가니 진희가 비서실에서 내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손에는 붉은 리본을 단 자그마한 상자가 들려있었다.
가슴이 훤하게 파인 실크 원피스의 넓은 치마자락이 시원해 보인다.
진희의 허리를 안아 소파 위 내 무릎에 앉히며 푹 파인 원피스 안으로 손을 넣어 진희의 가슴을 쥐며 물었다.
“그건 뭐야?”
“아잉… 몰라… 또 이렇게 불만 질러 놓고 나가서 일보라고 할 거지?”
“왜? 싫어?
만지지 말고 손 뺄까?”
“잉… 몰라… 치… 그냥 만져…”
“하하하…”
진희와 이렇게 장난을 치고 있으면 모든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토라진 척 하는 그녀의 예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키스를 마무리하며 진희가 입을 연다.
“대원의 한 영숙 관장이 보낸 거야, 오빠 주라고.”
“뭘까? 어디 열어봐.”
여전히 진희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말했다.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자 포르쉐 문양을 한 자동차 열쇠와 작은 카드가 들어있었다.
“카드도 있네. 읽어 볼까?”
“응”
“음… 이 회장.
업무상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할 텐데 그때마다 거마비를 주기도 뭐하고 해서 생각 끝에 준비한 거야. 편한 맘으로 받아주고 업무용으로 써줬으면 좋겠어. 상자 뒤편에 어디에 주차돼 있는지 적어놓으라고 했으니 확인해 봐. 그럼 수고해, 이 회장.”
진희가 또박또박 카드를 읽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째려본다.
“아주 아줌마를 환장하게 만들었구만… 으이구… 이 바람둥이…”
“하하하… 그래 어쩔래?”
토라진 그녀의 옆구리를 간질이자 진희가 몸을 배배 튼다.
“하지마!
크크크… 하지마… 하나도 안 재밌어…. 크크크”
그런 진희와 또 한번의 키스… 그 때 방문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진희가 일어서서 옷을 가다듬고 문을 열자 진영이었다.
“회장님, 이 경미 팀장과 상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들어와!”
“들어오세요, 팀장님.”
진영이와 함께 들어온 경미가 나와 진희에게 목례를 하고 내가 권한 소파에 앉았다.
“오 실장, 우선 이건 오 실장이 보관하고 있도록 하지.
그리고 내 이름으로 한 관장에게 장미 꽃바구니 하나 보내주고.”
“네, 회장님.”
진희가 내가 건넨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그래, 나하고 의논할 일이 뭡니까, 이 팀장?”
“네, 홍보실장이 얘기해 준 재료 수입에 대해 말씀 드리고 몇 가지 조언을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래요?
김 실장. 에델만과 접촉 중이라고 했던가?”
“네, 회장님.
거기 세일즈 메니저와 제가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선후배 관계인 거 아시죠?
그 쪽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 추진해 보려고 합니다.”
그와 관련된 얘기라면 더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진영이 모든 일을 성사시켜 놓은 상황이었고 경미를 자연스럽게 내게 유도하기 위해 간단한 일을 다소 복잡한 듯 만들어 계속해서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었고 이미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그렇게 한 동안 재료 수입에 관해 토의를 이어갔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회장님.”
“좋습니다. 그대로 진행하세요, 이 팀장.”
“회장님,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도 지났는데 저희 밥 한번 사주시면 안될까요?”
다분히 의도적인 진영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럴까? 나도 오래간만에 스테이크 생각이 났는데…
어때요, 이 팀장?”
“네, 회장님. 맛있는 스테이크 사 주세요.
우리 실장님 덕분에 비싼 거 먹게 생겼네요. 호호호…”
“사긴 내가 사는데 김 실장 덕분이라… 이거 참.
암튼 나갑시다.”
“호호호…”
“깔깔깔…”
두 여인의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방을 나서 역삼동의 한 호텔 프랑스 요리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이동하는 동안 진희가 미리 예약을 해 놓아 식당의 별실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암송아지 스테이크로 하지.
뭐 다른 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른 거 시켜도 되고…”
“아뇨, 저도 그걸로 할게요.”
“저도 좋아요. 이 집에서 제일 비싼 것 같기도 하구요.
회장님이 쏘시는 건데 싼 거 먹으면 가오가 죽으시겠죠?”
원래 발랄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던 경미가 진영을 만나 예전의 성격이 많이 살아난 듯 보였다.
그러나 문뜩문뜩 보이는 우울함은 감춰지지 않고 있었다.
오늘 그 어두움을 걷어내 줄 참이다.
정말로 맛있게 먹는 경미의 모습에 뜻 모를 연민이 솟아올랐다.
저런 여자가 그렇게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던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회장님, 기왕 쏘시는 거 2차도 쏘시면 안 될까요?”
식사에 곁들인 와인이 과했던 것일까?
경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하하하… 2차 좋죠.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요, 이 팀장?”
“춤추러 가요, 회장님.
이 호텔 지하 나이트가 물이 아주 좋대요.
취하고 싶기도 하고 그 핑계로 좀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크크크”
과하지 않게 취해있는 경미의 웃음이 귀여웠다.
“김 실장은 어때?”
“제가 또 한 춤 하잖아요, 회장님.
우리 경미 언니도 은근히 끼가 많은 것 같은데…”
“좋아, 그럼. 일어납시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니 이미 실내는 커다란 음악소리와 현란한 조명에 몸을 맡긴 수 많은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거리고 있었다.
“이런데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회장님.”
“뭐라구요?”
“정~말 오래간만에 이런데 온다구요.”
음악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자 경미가 내 귀에 소리를 질렀다.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넓은 VIP 룸으로 들어가 적당히 술과 안주를 주문하자 마자 진영이 나와 경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우선 몸부터 풀어요, 회장님. 언니도 빨랑 나가자.”
음악에 맞춰 원초적 본능을 발산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플로어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약간씩 몸을 움직이며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두 여인의 움직임이 음악과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파워풀하고 섹시한 스트립쇼를 내게 종종 보여주었던 진영이었지만 오늘은 의도적으로 경미를 띄워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열정적이긴 하지만 어색한 경미의 춤을 따라 해가며 적절히 보조를 맞춰주고 있었다.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할 즈음 음악이 바뀌며 플로어에는 잠깐 동안의 혼란이 찾아 들었다.
이미 짝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은 다정히 서로를 끌어 안았지만 짝이 없는 사내들은 야수가 되어 먹이 감을 노리고 있었고 여인들은 내숭을 떨며 그런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다가 좀 있어 보이는 사내에게 못 이기는 척 몸을 맡겼다.
“이거 놓으세요!”
앙칼진 목소리에 돌아보니 누군가 경미의 어깨를 잡고 있었고 그런 사내를 뿌리치는 경미의 눈초리에 살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 그 참… 성격 무지하게 까칠하네.
어차피 놀러 온 거 같이 좀 놀면 안돼나…?”
사내는 억지로 경미의 팔을 잡아 끌어안으려 하고 있었다.
“이거 놔!”
‘쫘~악!!!’
비명과 같은 외마디 소리를 지른 경미가 사내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매운 경미의 손맛에 고개가 휙 돌아갔던 사내의 무지막지한 손이 경미의 따귀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런 그의 손을 허공에서 잡아 챘다.
“뭐야 이건?”
난 아무 말없이 손목을 꽉 쥔 채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런 씨발놈이…”
‘툭!!!’
내게 주먹을 날리려는 사내의 미간을 가운데 손가락을 접어 내리쳤다.
고통에 일그러진 사내가 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고 일행으로 보이는 사내 넷이 내게 달려들었다.
“죽여, 저 씨발놈.”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녀석들은 명품으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강남 졸부의 자식들임이 뻔했다.
느긋하게 브루스 타임을 즐기던 플로어가 일순 난장판이 되었다.
쓰러진 사내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았고 난 정확히 녀석들의 급소를 가격했다.
상황이 종료되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쓰러졌던 녀석들이 사태파악을 하고는 쪽 팔린 듯 자리를 떴고 어느 틈에 플로어의 음악이 다시 한 번 바뀌어 강한 비트와 사람들로 넘실거렸다.
“목 좀 축이고 나오죠.”
큰소리로 두 사람에게 말하고 룸으로 돌아왔다.
방음이 잘 된 룸은 문을 닫자 혼돈 속의 평화처럼 고요해졌다.
“저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네요… 죄송해요, 회장님, 그리고 진영씨.”
“어딜 가나 저런 찌질이들이 꼭 있다니까…
괜찮아요, 언니.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건배해요. 회장님두요, 네?”
“그래… 자 기왕 기분 내러 온 거 신경 쓰지 말자구.”
스트레이트 잔에 가득 채운 양주가 출렁였고 나와 진영은 단번에 잔을 비웠다.
그러나 경미는 달랐다.
분명 마시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나와 진영의 눈을 피해 테이블 밑 쓰레기통에 술을 버리고 있었다.
의도가 궁금했다. 취하고 싶다던 사람이 왜 그럴까?
우선은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술을 버린 뒤 보인 경미의 행동이었다.
지나치다 싶게 과장된 표정과 행동으로 안주를 집어먹었고 점점 취한 척을 하는 정도가 심해져 갔다. 마치 진짜 취한 사람처럼…
“회장님… 후~… 기분이 너무 좋아요… 후~”
마치 술에 취해 숨을 쉬기도 곤란한 듯 하는 말투까지… 경미는 지금 의도된 연극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의 플로어 방문과 커다란 양주 병 네댓 개가 비워질 즈음 경미가 소파에 털썩 쓰러졌다.
비워진 네댓 개의 양주병중에서 최소한 세 개 이상은 경미에 의해 테이블 밑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이다.
룸의 벨을 눌러 인터폰을 눌렀다.
“네, 사장님.”
“위층 객실 있나 확인해서 있으면 바로 잡아주세요.
가급적이면 남아있는 객실 중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십만원 수표 한 장을 집어주며 말했다.
“네, 사장님.
바로 모시겠습니다.”
“김 실장. 우리 이 팀장님이 많이 취한 것 같지?
자네도 많이 취한 것 같은 데 괜찮겠어?”
“아뇨, 저는 견딜 만 해요.
그런데 에델만에서 오는 전화 받아야 해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쩌죠?”
“이 밤에 무슨 전화?”
“아이 참, 회장님. 미국에서 오는 전화잖아요.”
“아… 그렇지.”
우리 둘은 경미가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말을 다 듣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거의 드러난 지금, 난 그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럼 김 실장은 신디 차 타고 들어가 난 이 팀장 객실에 들여보내고 갈 테니까.”
“네, 회장님. 죄송해요.”
“아냐… 김 실장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사장님, 스위트 룸이 하나 비어있다고 해서 일단 잡아 놨습니다.”
“그래, 수고했어요.”
술값 결재를 마치고 일부러 더 축 늘어져있는 경미를 부축해 스위트 룸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고 다리를 모아 똑바로 눕혀놓고 치마를 단정히 해 주고는 취침 등을 제외한 나머지 불을 꺼주고 그 옆 의자에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아니 자는 척 하고 있음이 분명한 경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자는 척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경미가 샛눈으로 나를 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다시 눈을 감았다.
“이 팀장.”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무 대답도 움직임도 없었으나 감겨진 눈꺼풀 밑에서 눈동자가 움직였다.
“경미씨 얘기 다 들었어요.
얼마나 외로웠을지, 또 얼마나 분노에 떨었을지 다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이렇게 밝고 활달한 모습을 보이고자 애쓰는 경미씨를 보니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애처롭군요.
그래도 김 실장에게라도 털어놓은 경미씨의 용기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여전히 자는 척 누워있던 경미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양쪽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당신의 처지를 동정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것은 아니에요.
난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얼굴에 숨어있는 어두움이 모두 사라지고 진짜 경미씨의 모습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미경이 일어나 앉았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응시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운다.
“엉엉엉… 회장님…”
“그냥 대훈씨라고 불러요.
우리 서로 동갑이죠?”
어깨를 들썩이며 경미가 다시 나를 올려다 본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고 함께 일어서며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엉엉… 대훈씨… 몇 번을 죽으려고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엉엉엉… 그런데 너무 억울했어요.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엉엉엉… 왜 내가 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엉엉엉…”
마음껏 울게 내버려 두었다.
경미는 지금 잃어버렸던 그간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마지막 앙금을 털어버려야 할 때였다.
내 가슴에 안겨 울고 있는 경미를 천천히 인도해 침대 모서리에 나란히 앉아 그녀의 어깨를 꼬옥 끌어 안았다.
“흐~윽… 엉엉엉…
대훈씨의 따뜻한 미소를 보며 나도 다시 여자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내 얘길 아무 편견 없이 편안하게 들어준 진영씨의 눈이 대훈씨를 바라보는 걸 봤어요.
그 눈 안에는 무한한 사랑과 존경이 가득했어요.
그런 대훈씨라면, 아니 꼭 그런 분의 품 안에서 다시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엉엉엉… 흐윽… 엉엉엉…
그래서… 그래서… 술 마시는 척만하고 쓰레기통에 술을…”
손가락 하나를 들어 경미의 입을 막았다.
놀란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경미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다가갔다.
경미의 눈이 천천히 감긴다.
그런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린다.
입술을 옮겨 다른 한쪽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오똑한 코끝을 살짝 입술로 깨물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흐~~~응….”
편안함과 설레임에 무너져 내리는 경미의 한숨이 깊었다.
8장에서 계속…
리버프론트 클럽하우스의 공개 PT와 대원 오페라 하우스 PT 준비로 수석 디자인 팀과 호스피탈리티 팀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원 오페라 하우스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고 나름대로 큰 그림이 그려진 상태였으므로 진희와 미샤에게 도면과 3D 투시도 작업을 지시한 상황이었지만 리버프론트 골프장은 사정이 달랐다.
수도권의 고급 골프장중에 하나였고 회원권을 보유한 사람들 역시 쟁쟁한 사람들이었으므로 많은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와 시공업자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PT였다.
게다가 이번 프로젝트는 경미의 과거를 지워주고 새로운 삶을 완성해주는 일이었으므로 꽤나 신경이 쓰였다.
물론 나보다 경미가 훨씬 더 신경을 많이 쓰고 있겠지만…
“이상이 저희 팀에서 준비한 시안입니다.
이제부터 질문을 받겠습니다.”
호스피탈리티 팀의 이 경미 팀장이 그 동안 작업했던 내용에 대한 예비 PT를 막 마치고 참석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이 팀장.
어디, 최 팀장! 커머셜 팀에서 보기엔 어떤 것 같은가?”
커머셜 팀의 최 경민 팀장은 성실하고 싹싹한 매너로 그리 잘 생기지 않은 외모를 덮고 있는 사내였다.
어느새 가장 탄탄한 팀워크를 다져놓았으나 아직 이렇다 할 프로젝트를 시작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네, 우선 아주 신선한 발상이 돋보입니다.
그런데 실행 단가가 너무 비싸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이 팀장님 예상 공사 견적은 얼마로 책정하셨나요?”
거의 한 달간 지켜본 결과 경미는 일을 할 때 온몸에 생기가 도는 여인이었다.
마치 그 동안의 칩거를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양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최 팀장의 질문에 경미는 역시 자신 있고 당당하게 응수했다.
“설계비를 제외하고 실 공사 견적은 20억에서 약간 빠집니다.”
“이 팀장님이 제안한 그 모든 재료와 디자인을 커버하는데 20억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재료들을 수입해와야 할 것 같은데, 아닌가요?”
“맞습니다, 최 팀장님.
하지만 여기 홍보실장님이 미국 인테리어 재료 업체에 선이 있어서 저희가 직수입해서 시공업자들에게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김 실장님?”
“이 팀장님 말씀이 맞아요.”
진영이 차분하지만 따듯한 목소리로 경미를 응원했다.
“더구나 저희가 직접 수입해서 시공업자에게 공급하는 과정에서 마진까지 얻을 수 있으니 최소한의 견적으로 경쟁력확보와 동시에 추가 수입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죠.”
“전체적으로 그린 계열의 컬러 스킴을 사용하면서도 따듯한 느낌을 유지하도록 한 색 배열이 인상적이네요.
다만, 중간중간 약간의 악센트를 조금 주신다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레지덴샬 팀의 홍 은희 팀장이 물었다.
“네, 홍 팀장님.
저희도 그 부분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
외부의 골프장과 클럽하우스를 하나의 테마로 연결시켜서 자연을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 기본 컨셉인데 홍 팀장님 말씀대로 약간 밋밋하고 지루한 것 같아 그 부분을 보완해야 할 것 같아요.
좋은 지적 고마워요, 홍 팀장.”
직원들이 서로 토의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생산적인 토론에 내가 끼어 들어 이래라 저래라 할 이유도 없었다.
“오케이!
전반적으로 방향 설정은 잘 된 것 같네.
오늘 크리틱에서 제시된 문제점이나 보완해야 할 점 고려해서 이 팀장이 잘 마무리 해 줘요.”
“네, 회장님.”
“자, 그럼 각자 정리들 하고 퇴근들 하도록 하지.”
호스피탈리티 팀 회의실을 나와 올라가니 진희가 비서실에서 내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손에는 붉은 리본을 단 자그마한 상자가 들려있었다.
가슴이 훤하게 파인 실크 원피스의 넓은 치마자락이 시원해 보인다.
진희의 허리를 안아 소파 위 내 무릎에 앉히며 푹 파인 원피스 안으로 손을 넣어 진희의 가슴을 쥐며 물었다.
“그건 뭐야?”
“아잉… 몰라… 또 이렇게 불만 질러 놓고 나가서 일보라고 할 거지?”
“왜? 싫어?
만지지 말고 손 뺄까?”
“잉… 몰라… 치… 그냥 만져…”
“하하하…”
진희와 이렇게 장난을 치고 있으면 모든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토라진 척 하는 그녀의 예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키스를 마무리하며 진희가 입을 연다.
“대원의 한 영숙 관장이 보낸 거야, 오빠 주라고.”
“뭘까? 어디 열어봐.”
여전히 진희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말했다.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자 포르쉐 문양을 한 자동차 열쇠와 작은 카드가 들어있었다.
“카드도 있네. 읽어 볼까?”
“응”
“음… 이 회장.
업무상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할 텐데 그때마다 거마비를 주기도 뭐하고 해서 생각 끝에 준비한 거야. 편한 맘으로 받아주고 업무용으로 써줬으면 좋겠어. 상자 뒤편에 어디에 주차돼 있는지 적어놓으라고 했으니 확인해 봐. 그럼 수고해, 이 회장.”
진희가 또박또박 카드를 읽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째려본다.
“아주 아줌마를 환장하게 만들었구만… 으이구… 이 바람둥이…”
“하하하… 그래 어쩔래?”
토라진 그녀의 옆구리를 간질이자 진희가 몸을 배배 튼다.
“하지마!
크크크… 하지마… 하나도 안 재밌어…. 크크크”
그런 진희와 또 한번의 키스… 그 때 방문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진희가 일어서서 옷을 가다듬고 문을 열자 진영이었다.
“회장님, 이 경미 팀장과 상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들어와!”
“들어오세요, 팀장님.”
진영이와 함께 들어온 경미가 나와 진희에게 목례를 하고 내가 권한 소파에 앉았다.
“오 실장, 우선 이건 오 실장이 보관하고 있도록 하지.
그리고 내 이름으로 한 관장에게 장미 꽃바구니 하나 보내주고.”
“네, 회장님.”
진희가 내가 건넨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그래, 나하고 의논할 일이 뭡니까, 이 팀장?”
“네, 홍보실장이 얘기해 준 재료 수입에 대해 말씀 드리고 몇 가지 조언을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래요?
김 실장. 에델만과 접촉 중이라고 했던가?”
“네, 회장님.
거기 세일즈 메니저와 제가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선후배 관계인 거 아시죠?
그 쪽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 추진해 보려고 합니다.”
그와 관련된 얘기라면 더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진영이 모든 일을 성사시켜 놓은 상황이었고 경미를 자연스럽게 내게 유도하기 위해 간단한 일을 다소 복잡한 듯 만들어 계속해서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었고 이미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그렇게 한 동안 재료 수입에 관해 토의를 이어갔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회장님.”
“좋습니다. 그대로 진행하세요, 이 팀장.”
“회장님,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도 지났는데 저희 밥 한번 사주시면 안될까요?”
다분히 의도적인 진영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럴까? 나도 오래간만에 스테이크 생각이 났는데…
어때요, 이 팀장?”
“네, 회장님. 맛있는 스테이크 사 주세요.
우리 실장님 덕분에 비싼 거 먹게 생겼네요. 호호호…”
“사긴 내가 사는데 김 실장 덕분이라… 이거 참.
암튼 나갑시다.”
“호호호…”
“깔깔깔…”
두 여인의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방을 나서 역삼동의 한 호텔 프랑스 요리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이동하는 동안 진희가 미리 예약을 해 놓아 식당의 별실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암송아지 스테이크로 하지.
뭐 다른 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른 거 시켜도 되고…”
“아뇨, 저도 그걸로 할게요.”
“저도 좋아요. 이 집에서 제일 비싼 것 같기도 하구요.
회장님이 쏘시는 건데 싼 거 먹으면 가오가 죽으시겠죠?”
원래 발랄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던 경미가 진영을 만나 예전의 성격이 많이 살아난 듯 보였다.
그러나 문뜩문뜩 보이는 우울함은 감춰지지 않고 있었다.
오늘 그 어두움을 걷어내 줄 참이다.
정말로 맛있게 먹는 경미의 모습에 뜻 모를 연민이 솟아올랐다.
저런 여자가 그렇게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던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회장님, 기왕 쏘시는 거 2차도 쏘시면 안 될까요?”
식사에 곁들인 와인이 과했던 것일까?
경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하하하… 2차 좋죠.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요, 이 팀장?”
“춤추러 가요, 회장님.
이 호텔 지하 나이트가 물이 아주 좋대요.
취하고 싶기도 하고 그 핑계로 좀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크크크”
과하지 않게 취해있는 경미의 웃음이 귀여웠다.
“김 실장은 어때?”
“제가 또 한 춤 하잖아요, 회장님.
우리 경미 언니도 은근히 끼가 많은 것 같은데…”
“좋아, 그럼. 일어납시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니 이미 실내는 커다란 음악소리와 현란한 조명에 몸을 맡긴 수 많은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거리고 있었다.
“이런데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회장님.”
“뭐라구요?”
“정~말 오래간만에 이런데 온다구요.”
음악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자 경미가 내 귀에 소리를 질렀다.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넓은 VIP 룸으로 들어가 적당히 술과 안주를 주문하자 마자 진영이 나와 경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우선 몸부터 풀어요, 회장님. 언니도 빨랑 나가자.”
음악에 맞춰 원초적 본능을 발산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플로어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약간씩 몸을 움직이며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두 여인의 움직임이 음악과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파워풀하고 섹시한 스트립쇼를 내게 종종 보여주었던 진영이었지만 오늘은 의도적으로 경미를 띄워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열정적이긴 하지만 어색한 경미의 춤을 따라 해가며 적절히 보조를 맞춰주고 있었다.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할 즈음 음악이 바뀌며 플로어에는 잠깐 동안의 혼란이 찾아 들었다.
이미 짝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은 다정히 서로를 끌어 안았지만 짝이 없는 사내들은 야수가 되어 먹이 감을 노리고 있었고 여인들은 내숭을 떨며 그런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다가 좀 있어 보이는 사내에게 못 이기는 척 몸을 맡겼다.
“이거 놓으세요!”
앙칼진 목소리에 돌아보니 누군가 경미의 어깨를 잡고 있었고 그런 사내를 뿌리치는 경미의 눈초리에 살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 그 참… 성격 무지하게 까칠하네.
어차피 놀러 온 거 같이 좀 놀면 안돼나…?”
사내는 억지로 경미의 팔을 잡아 끌어안으려 하고 있었다.
“이거 놔!”
‘쫘~악!!!’
비명과 같은 외마디 소리를 지른 경미가 사내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매운 경미의 손맛에 고개가 휙 돌아갔던 사내의 무지막지한 손이 경미의 따귀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런 그의 손을 허공에서 잡아 챘다.
“뭐야 이건?”
난 아무 말없이 손목을 꽉 쥔 채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런 씨발놈이…”
‘툭!!!’
내게 주먹을 날리려는 사내의 미간을 가운데 손가락을 접어 내리쳤다.
고통에 일그러진 사내가 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고 일행으로 보이는 사내 넷이 내게 달려들었다.
“죽여, 저 씨발놈.”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녀석들은 명품으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강남 졸부의 자식들임이 뻔했다.
느긋하게 브루스 타임을 즐기던 플로어가 일순 난장판이 되었다.
쓰러진 사내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았고 난 정확히 녀석들의 급소를 가격했다.
상황이 종료되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쓰러졌던 녀석들이 사태파악을 하고는 쪽 팔린 듯 자리를 떴고 어느 틈에 플로어의 음악이 다시 한 번 바뀌어 강한 비트와 사람들로 넘실거렸다.
“목 좀 축이고 나오죠.”
큰소리로 두 사람에게 말하고 룸으로 돌아왔다.
방음이 잘 된 룸은 문을 닫자 혼돈 속의 평화처럼 고요해졌다.
“저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네요… 죄송해요, 회장님, 그리고 진영씨.”
“어딜 가나 저런 찌질이들이 꼭 있다니까…
괜찮아요, 언니.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건배해요. 회장님두요, 네?”
“그래… 자 기왕 기분 내러 온 거 신경 쓰지 말자구.”
스트레이트 잔에 가득 채운 양주가 출렁였고 나와 진영은 단번에 잔을 비웠다.
그러나 경미는 달랐다.
분명 마시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나와 진영의 눈을 피해 테이블 밑 쓰레기통에 술을 버리고 있었다.
의도가 궁금했다. 취하고 싶다던 사람이 왜 그럴까?
우선은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술을 버린 뒤 보인 경미의 행동이었다.
지나치다 싶게 과장된 표정과 행동으로 안주를 집어먹었고 점점 취한 척을 하는 정도가 심해져 갔다. 마치 진짜 취한 사람처럼…
“회장님… 후~… 기분이 너무 좋아요… 후~”
마치 술에 취해 숨을 쉬기도 곤란한 듯 하는 말투까지… 경미는 지금 의도된 연극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의 플로어 방문과 커다란 양주 병 네댓 개가 비워질 즈음 경미가 소파에 털썩 쓰러졌다.
비워진 네댓 개의 양주병중에서 최소한 세 개 이상은 경미에 의해 테이블 밑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이다.
룸의 벨을 눌러 인터폰을 눌렀다.
“네, 사장님.”
“위층 객실 있나 확인해서 있으면 바로 잡아주세요.
가급적이면 남아있는 객실 중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십만원 수표 한 장을 집어주며 말했다.
“네, 사장님.
바로 모시겠습니다.”
“김 실장. 우리 이 팀장님이 많이 취한 것 같지?
자네도 많이 취한 것 같은 데 괜찮겠어?”
“아뇨, 저는 견딜 만 해요.
그런데 에델만에서 오는 전화 받아야 해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쩌죠?”
“이 밤에 무슨 전화?”
“아이 참, 회장님. 미국에서 오는 전화잖아요.”
“아… 그렇지.”
우리 둘은 경미가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말을 다 듣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거의 드러난 지금, 난 그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럼 김 실장은 신디 차 타고 들어가 난 이 팀장 객실에 들여보내고 갈 테니까.”
“네, 회장님. 죄송해요.”
“아냐… 김 실장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사장님, 스위트 룸이 하나 비어있다고 해서 일단 잡아 놨습니다.”
“그래, 수고했어요.”
술값 결재를 마치고 일부러 더 축 늘어져있는 경미를 부축해 스위트 룸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고 다리를 모아 똑바로 눕혀놓고 치마를 단정히 해 주고는 취침 등을 제외한 나머지 불을 꺼주고 그 옆 의자에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아니 자는 척 하고 있음이 분명한 경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자는 척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경미가 샛눈으로 나를 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다시 눈을 감았다.
“이 팀장.”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무 대답도 움직임도 없었으나 감겨진 눈꺼풀 밑에서 눈동자가 움직였다.
“경미씨 얘기 다 들었어요.
얼마나 외로웠을지, 또 얼마나 분노에 떨었을지 다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이렇게 밝고 활달한 모습을 보이고자 애쓰는 경미씨를 보니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애처롭군요.
그래도 김 실장에게라도 털어놓은 경미씨의 용기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여전히 자는 척 누워있던 경미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양쪽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당신의 처지를 동정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것은 아니에요.
난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얼굴에 숨어있는 어두움이 모두 사라지고 진짜 경미씨의 모습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미경이 일어나 앉았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응시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운다.
“엉엉엉… 회장님…”
“그냥 대훈씨라고 불러요.
우리 서로 동갑이죠?”
어깨를 들썩이며 경미가 다시 나를 올려다 본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고 함께 일어서며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엉엉… 대훈씨… 몇 번을 죽으려고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엉엉엉… 그런데 너무 억울했어요.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엉엉엉… 왜 내가 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엉엉엉…”
마음껏 울게 내버려 두었다.
경미는 지금 잃어버렸던 그간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마지막 앙금을 털어버려야 할 때였다.
내 가슴에 안겨 울고 있는 경미를 천천히 인도해 침대 모서리에 나란히 앉아 그녀의 어깨를 꼬옥 끌어 안았다.
“흐~윽… 엉엉엉…
대훈씨의 따뜻한 미소를 보며 나도 다시 여자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내 얘길 아무 편견 없이 편안하게 들어준 진영씨의 눈이 대훈씨를 바라보는 걸 봤어요.
그 눈 안에는 무한한 사랑과 존경이 가득했어요.
그런 대훈씨라면, 아니 꼭 그런 분의 품 안에서 다시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엉엉엉… 흐윽… 엉엉엉…
그래서… 그래서… 술 마시는 척만하고 쓰레기통에 술을…”
손가락 하나를 들어 경미의 입을 막았다.
놀란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경미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다가갔다.
경미의 눈이 천천히 감긴다.
그런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린다.
입술을 옮겨 다른 한쪽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오똑한 코끝을 살짝 입술로 깨물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흐~~~응….”
편안함과 설레임에 무너져 내리는 경미의 한숨이 깊었다.
8장에서 계속…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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