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요? 겨우 삼만의 오합지졸들에 의해 우리 대 트란실바니아의 용맹스런 병사들이 한 달이 넘게 발목이 붙잡혀 있다니? 황제의 노여움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는 것이요!"
트란실바니아의 오대 장군중 하나인 프랭크 제피로드 백작. 그는 채근 대는 황제의 칙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여유롭게 태사 의에 앉아있었다. 이곳은 분명 전장이었고 황제의 칙사는 자신의 실책을 나무라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더없이 여유롭기만 하였다.
"후후후. 너무 급할 것 없지 않소? 궁지에 몰린 쥐는 도리어 고양이를 무는 법이라오. 그리고 저 달란트의 태자를 우습게 보아선 아니 되오. 아무리 우리가 왕비와의 밀약이 있다고는 하나 만약을 위해 병사들을 아끼고 쉬게 해야 하오. 우리에겐 아직 헤르메스 기사단과의 전쟁과 이스니안과의 전쟁이 남아있지 않소."
"허나, 여기서 언제까지고 미적거릴 수는 없지 않소! 황제께선 달란트 태자가 헤르메스의 기사단과 결탁해 기가 살아 날뛰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계시오. 그렇게 되면 제국에게도 왕비에게도 다 불리해 지는 것이오. 라파엘 왕자의 목을 베고 헤르메스의 잔당들을 몰살하는 것 그것이 왕비가 우리에게 내건 조건이고 이스니안 제국을 치려면 우리에겐 왕비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실정이오. 그러니 어서 빨리 결말을 내란 말이요!"
칙사는 프랭크 백작의 여유로운 태도에 열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통할 상대가 아닌 듯 프랭크 제피로드 백작은 칙사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탁자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어허. 전쟁에는 모두 순서가 있는 법이요. 전쟁에선 많은 군세로 적을 치는 것은 최하 책이라 그랬소.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 최 상책이요. 기다려 보시요. 이 제피로드 백작이 왜 소드마스터도 아니면서 제국의 오대 장군이 되었는지, 힘만 앞세우는 근육덩어리 들과 어떻게 다른지 확실히 보여 줄 테니.후후후……."
소드 마스터가 아닌 장군. 오러소드를 발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장군. 그것이 세간에 알려진 프랭크 제피로드 백작의 평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프랭크 백작은 명색이 트란실바니아 제국의 군부를 이끄는 한 기둥이였지만 무관이라기보다 문관에 가까웠다. 그랬기 때문에 항상 전투보다는 계략을 사용하길 즐겼다.
"무슨 계책이 있는 것이요?"
"후후후. 기다려 보시요.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요. 그렇게 황제께 전하시요……."
프랭크 백작은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몇 가닥의 은발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프랭크 제피로드 백작의 말대로 라파엘 왕자가 이끄는 군대는 날이 갈수록 와해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계속되는 소규모 전투로 눈에 띄게 초췌해진 라파엘 왕자는 작금의 상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 눈에 띄게 탈영병이 늘고 있는 것 이었다. 첫 전투의 대 패배 이후로 연속되는 소규모 전투에서도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탈영병이 늘어나는 경우는 없었다. 더구나 요즈음은 트란실바니아와의 전투도 잠잠한 시기가 아닌가.
"퀼튼, 자넨 지금의 상황이 무슨 이유 때문 이라고 생각하는가? 탈영병이 너무 많이 늘고 있네. 이대로 가다간 자멸하고 말 것이야……."
"아무래도 징집 병들 내부에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그렇지 않다면……."
"첩자란 말인가?"
첩자. 그 한마디에 라파엘왕자의 초소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지금 은밀히 색출을 하고 있습니다…….곧 보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그들이 왜…….”
라파엘 왕자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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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맥키~ 우리도 탈영 하자!"
패터슨의 말에 막 잠을 청하려던 앤더슨과 맥키언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미쳤냐? 요즘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감시가 심험한데…….요즘 보면 보초병들이 적군을 감시하는 건지 우리를 감시하는 건지 구분도 안 간다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미쳤냐?"
"그래도 이대로 망설이다간 우리가 죽는다고. 벌써 내가 보기엔 절반도 넘는 사람들이 탈영한 것 같은데……."
"좀 오버 아냐?"
앤더슨은 애써 패터슨의 말을 씹어보려 했지만 패터슨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 단적인 예로 처음엔 각각 다른 초소로 배정 받았던 앤더슨들이었지만 지금은 셋 다 한 초소를 쓰고 있었다.
"맥키언 넌 어때? 너도 내 말이 오버 같냐?"
"흠. 패터슨 말도 일리가 있어. 꼴을 보니 이곳은 얼마안가 와해될 거야. 한시라도 빨리 탈영하는 게 방법이 될 수도 있어…….계속 남아 있다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하지만 말이야. 요즘은 트란실바니아의 놈들도 잠잠하고 전쟁이 끝나려고 하는 게 아닐까?"
거듭되는 전투로 인해 성격이 변했다 해도 역시 앤더슨은 앤더슨 이였다. 결정적일 때 이 소심한 성격이 다시 또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야~ 그게 트란실바니아 놈들이 못 쳐들어오는 거냐? 안쳐들어 오는 거지…….내가 전에 정찰조에 끼여 트란실바니아의 본영을 본적 있는데 우리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했어. 그 군대가 다 내려오면 아마 우린 하루도 버티지 못할걸?"
"그, 그래? 흠. 아무튼 그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보자. 어차피 지금은 탈영하려 해도 감시가 너무 심해서 어려울 거야……."
“좋아 그럼 경계가 좀 허술해 지면 탈영 하는 거야…….”
지나치게 신중했던 이날의 일이 평생의 짐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앤더슨과 맥키언은 패터슨의 수다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저하.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병사들이 급격히 줄고 있습니다. 첩자로 밝혀진 그랜트란 작자도 이미 저희가 손을 쓰기도 전에 도망 친 상태고…….”
앤더슨들이 탈영 모의를 포기하고 잠을 청하던 그 시각, 라파엘왕자의 초소엔 아직도 대낮인 듯 불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목숨을 부지한단 말이요.”
언제나 그렇듯 라파엘 왕자의 초소엔 라파엘 왕자와 퀼튼 백작이 있었다.
“퀼튼경. 내 이제껏 그대의 말이라면 모두 따라왔으나…….이번엔 그대의 작전에 따르지 못하겠소…….”
퀼튼이 내세운 작전이 무엇인지 라파엘 왕자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저하. 이대로 가다간 저하의 안위마저 위협을 받을 수 있사옵니다…….”
“하지만 어찌! 인간으로써!”
“저하~! 정신 차리십시오! 저들은 어차피 일회용 이었단 걸 모르시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이제는 버려야 할 때이옵니다! 대의를 위해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퀼튼의 거듭되는 설득에 결연한 표정의 라파엘 왕자의 눈동자도 흔들려갔다. 이에 퀼튼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에드워즈 자작을 위시한 왕자님의 충성스런 신하들이 헤르메스의 신전 기사단을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펜튼 경도 있지 않습니까? 저하께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것은 그들을 버리신다는 것과 같습니다…….겨우 징집된 하찮은 평민 나부랭이들을 위해 그들을 버리실 작정이시옵니까?”
이 말은 라파엘 왕자의 뜨거웠던 가슴을 다시 차갑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를 위해서 소를 버린다는 핑계 아닌 핑계는 라파엘 왕자의 가슴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죄책감마저 지우기에 충분했던 것이었다.
“끄응…….좋소…….내일 아침…….전군 출전. 총공격 명령을 내리시오…….”
“존명! 하하핫…….현명하신 선택 이옵니다…….오늘은 이렇듯 후퇴를 하지만 이 전쟁의 승리는 결국엔 저하의 몫이 될 것 이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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