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헤헷.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무사히 나오지 못 했을걸요……."
무사히 란브랜트 성을 빠져나온 제론드는 그 후 한참동안 론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헌데 그 신성력은 마지막 남은 신성력이 아니었던가요?"
"커헉…….제,제론드. 정, 정말이냐?"
론의 잔소리가 조금 누그러질 때쯤 묵묵히 뒤따르던 라이젠느의 한마디에 론의 눈은 뒤집히고 말았다.
"하하.하하하하…….뭐 그렇죠 뭐…….하하……."
"크악! 제,제론드 이…….미친……."
"하핫…….론 아저씨.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요…….으아악!! 그 검 내려놔욧~!"
"크윽.서라 이노무자식~! 오늘 내 파계를 하리라~!"
광분해 길길이 날뛰는 론과 허약한 신관의 몸으론 낼 수 없는 스피드로 요리조리 론의 검을 피해 달아나는 제론드. 라이젠느는 그 우스꽝스런 모습이 왠지 믿음직스럽고 듬직하게 느껴졌다. 대륙 전체에 퍼져있는 이 음험한 기운도 그들과 함께라면 그리 절망스럽지 않을 것 같은 희망을 가지게 했다.
"자, 두 사람 다 그만하고, 가요, 앨프의 숲으로~"
" " " "
"저하. 크윽……."
"퀼튼 백작…….전황은 어떤가. 보고하게……."
달란트 왕국과 트란실바니아의 경계이자, 이제는 전쟁터가 되어버린 에 누스(Eh Nuse)지역의 자랑 아스가르 대 평원. 달란트왕국의 징집 병들의 본진에 위치한 천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초소. 그곳은 라파엘 왕자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총 삼만의 징집 병 중 일만의 병사가 사망 했습니다…….중상자는 오천이고 경상자는 일만을 넘고 있습니다…….그리고 오백의 기사들 중에도 이십 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후…….그런가…….적의 피해 상황은."
"저, 적군의 피해는…….버서커 전사 이십 명이 죽었으며 기사 오십여 명의 사상자가……."
"후후후…….첫 전투는 대패란 말인가……."
악의 제국 트란실바니아와의 첫 전투. 그것은 달란트 왕국, 아니 라파엘 라 무스타니 달란트 왕자의 패배로 끝이 났다. 사상자 이만 오천 대 백여 명이란 이 엄청난 수치는 비단 정규군과 징집 병의 전투라는 변명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충격적인 결과였다.
"나. 때문이야…….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설마 징집 병을 상대로 유인책을 사용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크윽…….처음 오백의 기마대만이 나타났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전략의 가장 기초인 것을 상대방의 자만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일만의 무고한 생명을 적의 매복병들에게…….크으흑……."
"저하..."
매복. 흔히 전쟁에서 수적 열세인 쪽이 대군을 상대하기 위해 쓰는 전략이다. 물론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흔히들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쓰여 왔다. 하지만 그런 고정관념은 지금의 라파엘 왕자에게는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십만의 정예병과 오천의 버서커 군단을 이끄는 트란실바니아의 선봉 프랭크 제피로스 백작은 삼만의 오합지졸 징집 병들과 기사 오백을 상대로 매복이란 술책을 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술책은 기가 막히게 성공했다. 본대를 제외한 버서커 이천 명과 기사 오백만으로 우왕좌왕하는 징집 병들을 썩은 집단 베듯 일만이나 베어버렸다.
"아무것도…….아무것도 하지 못했어…….병사들이 죽어 가는데…….크윽…….난 아무것도……."
라파엘 왕자는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떨려오는 듯 했다. 그 떨림의 정체는 패배로 인한 분함 덕분이 아닌 듯 했다. 두려움 이었다. 넘지 못할 산을 눈앞에 둔 자의 두려움.
"떨림이. 멈추질 않네…….멈추지 않아…….매일같이 상상해오고 각오해왔던 패전인데……."
"저하…….누구에게나 패배란 있기 마련입니다…….한 번의 패배를 교훈 삼아 열 번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 입니다.그것이 진정한 무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져서. 패해서 분해서 그런 게 아니네…….솔직히. 무섭네. 아니 무서웠네…….그 빌어먹을 버서커 들이 삼만의 병사를 다 죽이고 이곳까지 진격해와 내 목을 따버릴까봐…….무서웠네…….하하핫. 내 병사들은 무참히 도륙 당하고 있었는데…….난 아직 맞서보지도 않은 적의 모습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그런 내가 용서가 안 돼…….내 자신이 너무 싫어서 용서가 안 되네…….크흐흑……."
라파엘 왕자의 눈앞엔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선했다. 목이 잘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지칠 줄 모르고 싸우는 트란실바니아의 버서커 전사와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 하다 무참히 도륙당하는 자신의 병사들. 그것은 이미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이었으며 사냥이었다.
"저하…….하지만 저하께선 도망치시지 않으셨습니다…….수많은 전투를 치러본 저도 전장에 나설 때 마다 두려움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답니다…….저하. 저하께옵선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저하의 첫 전투였고 첫 전투는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입니다…….크게 생각하십시오. 한 번의 전투에서 이길 생각 하지마시고 전쟁에서 이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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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아젠티…….
몸 건강히 잘 지내시나요?
전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속에서도 운 좋게 아직까지 어느 곳 하나 다친 곳 없이 무사하답니다. 물론 패터슨과 맥키언도 무사하답니다. 그들 부모님께도 안부의 말 부탁할게요. 아직 그곳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 지지 않았겠죠. 더욱 그리워집니다. 클라라 아주머니의 갓 구운 애플파이도 언제나 우리의 얘기를 묵묵히 들어만 주던 언덕 위 오래된 아카시아 나무도 평화롭던 시절의 모든 것이 다 그립습니다.
한여름의 더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전쟁터에는 그 열기로 인해 부패하고 썩은 시체들의 악취가 진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차라리 시체가 되어버리는 편이 이 전장의 광기를 견뎌내는 것보다 편하겠다는 착각마저 듭니다. 지금 우리는 왜 싸우는 걸까요? 매일매일 동료들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드넓은 초원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처음 삼만 명에 달하던 사람들은 이제 겨우 삼천여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죽어야 끝날 전쟁인 것일까요. 처음 전장에 도착한날 눈부신 백마에 올라 황금빛 갑주를 걸치고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검을 들고 있던 태자 라파엘 왕자의 얼굴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멋있었습니다. 마치 헤르메스께서 현신이라도 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우리의 피를 빨아먹는 악귀로만 보입니다. 그 황금 갑옷은 이젠 핏빛의 갑옷으로 보이고 투구 사이로 삐져나온 금빛 머리칼은 악귀 메두사의 그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운 아젠티…….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일까요? 누구를 위해 피 흘리고 있는 것일까요? 이제 그만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습니다. 아젠티, 당신의 미소가 그립습니다. -
에 누스(Eh Nuse)지역의 아스가르(As gar) 대 평원.
트란실바니아와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이곳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푸른 초원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와도 같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이곳은 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푸른 초원은 이미 예전부터 그러한 것인 듯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적 아 구분도 없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시체는 무더운 날씨 탓에 부패해 구더기와 각종 벌레들의 먹잇감이 되고 있었다. 지옥이었다. 지옥 그만 이외에는 설명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 전쟁은 언제쯤 끝날까?"
"여기 징집된 사람들 전부 죽으면 끝나겠지 뭐……."
한숨 섞인 앤더슨의 말에 패터슨이 배식된 빵을 물도 없이 우적우적 씹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비록 물기 하나 없는 돌덩이와 같은 빵이었지만 그것도 이틀만의 배식이라 주린 배를 채워 주기엔 충분한 것 이었다.
"후…….빵이나 드셔……."
"으…….정말이지 이놈의 빵은 정말 못 참겠다니까…….으아~ 클라라 아줌마네 빵이 그리워~"
"다 삼키고나 입 열어! 더럽게 시리~"
"무덤덤한 놈…….성격은 정말 안 변하는군……."
정말 그랬다. 반복돼는 피 비린내 나는 전투는 사람의 성격을 변하게 했다. 소심하고 겁 많던 앤더슨의 성격도 무뚝뚝하지만 인정 많은 맥키언의 성격도 자신들이 느끼지 못한 사이 거칠고 어둡게 변해갔다. 하지만 패터슨은 놀라울 정도로 바뀌지 않았다. 언제나 수다스러웠고 유쾌했다.
"하긴 뭐. 저런 성격 때문에 이 전쟁터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거니까……."
"내가 뭐! 나 가지고 지랄들이야?!"
앤더슨과 맥키언이 자신을 가지고 쑥덕거리자 패터슨은 광분해 주위로 빵가루 파편을 날렸다.
"야이.썅! 삼키고 입 열라니까……."
"야야, 그건 그렇고 그거 들었냐?"
이리저리 튀는 빵가루를 피하며 패터슨의 입을 막으려는 앤더슨을 무시하고 또 다시 수다모드로 돌입하는 패터슨 이였다.
"거 있지, 라파엘 왕자 막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그랜트 아저씨 말이야."
"그 아저씨가 왜?"
앤더슨은 패터슨의 페이스에 말려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 특유의 붙임성으로 여기저기서 전쟁에 관한 정보를 많이 얻어오는 패터슨 이였기에 앤더슨은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맞장구 쳐주었다.
"그 아저씨가 나랑 같은 막사서 자자나……."
"그래, 그래, 그래서?"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봐~ 어젯밤에 들은 이야긴데 말이야…….이 전쟁이 라파엘 왕자의 반역으로 인해 터진 거래……."
"뭐, 뭣?"
"…….?"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이야기가 패터슨의 입에서 나오자 앤더슨은 물론이고 패터슨의 수다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던 맥키언과 주위의 병사들 까지도 놀라 패터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이렇게 죽어나가고 있는데 왕국 정규군과 중앙 기사단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이유가 그거라더군. 지금 달란트 왕국에는 왕비를 따르는 왕비파 귀족과 태자를 따르는 쪽의 귀족, 두 패로 나뉘어져 있는데 트란실바니아가 침략하자 성질 급한 라파엘 왕자가 제 멋대로 전쟁을 낸 거라더군. 근데 문제는 왕비파 귀족들이 태자 쪽 귀족들보다 월등히 많고 군부도 기사단도 장악하고 있다는데 있었던 거지. 그래서 태자는 우리들 같은 평민들을 징집해 전쟁에 나선 거고, 이렇게 매일 매일 패전을 거듭하고 있어도 후퇴도 못한다는 거지. 만약 전쟁에서 이긴다면 구국의 영웅이 되어 단번에 왕비파를 뒤엎을 수 있지만 패하고 후퇴한다면 왕명도 없이 군대를 움직여 전쟁을 일으킨 반역도가 될 뿐인 거야……."
패터슨은 오랜만에 가져보는 스포트라이트에 들떴다. 전쟁이 지속 되면서 자신의 수다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항상 그리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트란실바니아의 침략은 이미 시작된 거고 아무리 왕비와 태자가 서로 반목하는 사이일 지라도 일단 전쟁은 끝내놓고 봐야 하는 거 아냐? 왕자가 일으킨 전쟁이라서 왕비와 정규군이 침묵한다는 것은 좀 말이 안돼…”
맥키언이 나지막하게 반박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그건…흠…나도 모르지 뭐…무슨 모종의 밀약이 있었던 것 아닐까?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왕비는 트란실바니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그리고 트란실바니아 측도 지금 압도적인 군세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격하지 않는걸 보면 단순한 무력도발이었을 지도 모르고 솔직히 지금 트란실바니아가 우리 달란트 왕국에 신경 쓸 여유가 없잖아? 무력도발 아니면 단순히 길을 빌리자는 속셈으로 군대를 내세운 걸거야..그걸 태자가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무모한 도박을 한거지…”
“흠…”
"그, 그럼 왕자의 마지막 도박에 우리가 말려든 거야?"
"그렇지. 우리는 그야 말로 왕자의 노름에 말려든 거지…….잘되면 반역도당으로 낙인찍혀 살아가는 거고 못하면 죽는 거고."
"하, 하지만. 여기서 이긴다면……."
"미친놈.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 건 아니겠지? 지금 우리들로선 지금 당장 저 빌어먹을 버서커 전사 200만 쳐들어와도 전멸이라고~ 무슨 이유에선지 트란실바니아 놈들이 요새 좀 잠잠해져서 다행이지. 참, 그렇지. 여기서 죽지 않고 반역도로도 안 내몰릴 방법이 한 가지 있다더군."
"그 방법이 뭔데?"
"탈영이지…….운이 좋아 탈영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자유의 몸이 되는 거지. 우린 정식으로 징집된 것이 아니라서 탈영을 한다하더라도 아무런 죄가 없다더군……."
탈영. 농담반 진담반으로 내뱉은 이 말이 어떠한 파장을 불러올지 패터슨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패터슨의 이 한마디로 패터슨의 말에 귀 기울이던 병사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헤헷.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무사히 나오지 못 했을걸요……."
무사히 란브랜트 성을 빠져나온 제론드는 그 후 한참동안 론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헌데 그 신성력은 마지막 남은 신성력이 아니었던가요?"
"커헉…….제,제론드. 정, 정말이냐?"
론의 잔소리가 조금 누그러질 때쯤 묵묵히 뒤따르던 라이젠느의 한마디에 론의 눈은 뒤집히고 말았다.
"하하.하하하하…….뭐 그렇죠 뭐…….하하……."
"크악! 제,제론드 이…….미친……."
"하핫…….론 아저씨.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요…….으아악!! 그 검 내려놔욧~!"
"크윽.서라 이노무자식~! 오늘 내 파계를 하리라~!"
광분해 길길이 날뛰는 론과 허약한 신관의 몸으론 낼 수 없는 스피드로 요리조리 론의 검을 피해 달아나는 제론드. 라이젠느는 그 우스꽝스런 모습이 왠지 믿음직스럽고 듬직하게 느껴졌다. 대륙 전체에 퍼져있는 이 음험한 기운도 그들과 함께라면 그리 절망스럽지 않을 것 같은 희망을 가지게 했다.
"자, 두 사람 다 그만하고, 가요, 앨프의 숲으로~"
" " " "
"저하. 크윽……."
"퀼튼 백작…….전황은 어떤가. 보고하게……."
달란트 왕국과 트란실바니아의 경계이자, 이제는 전쟁터가 되어버린 에 누스(Eh Nuse)지역의 자랑 아스가르 대 평원. 달란트왕국의 징집 병들의 본진에 위치한 천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초소. 그곳은 라파엘 왕자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총 삼만의 징집 병 중 일만의 병사가 사망 했습니다…….중상자는 오천이고 경상자는 일만을 넘고 있습니다…….그리고 오백의 기사들 중에도 이십 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후…….그런가…….적의 피해 상황은."
"저, 적군의 피해는…….버서커 전사 이십 명이 죽었으며 기사 오십여 명의 사상자가……."
"후후후…….첫 전투는 대패란 말인가……."
악의 제국 트란실바니아와의 첫 전투. 그것은 달란트 왕국, 아니 라파엘 라 무스타니 달란트 왕자의 패배로 끝이 났다. 사상자 이만 오천 대 백여 명이란 이 엄청난 수치는 비단 정규군과 징집 병의 전투라는 변명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충격적인 결과였다.
"나. 때문이야…….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설마 징집 병을 상대로 유인책을 사용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크윽…….처음 오백의 기마대만이 나타났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전략의 가장 기초인 것을 상대방의 자만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일만의 무고한 생명을 적의 매복병들에게…….크으흑……."
"저하..."
매복. 흔히 전쟁에서 수적 열세인 쪽이 대군을 상대하기 위해 쓰는 전략이다. 물론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흔히들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쓰여 왔다. 하지만 그런 고정관념은 지금의 라파엘 왕자에게는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십만의 정예병과 오천의 버서커 군단을 이끄는 트란실바니아의 선봉 프랭크 제피로스 백작은 삼만의 오합지졸 징집 병들과 기사 오백을 상대로 매복이란 술책을 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술책은 기가 막히게 성공했다. 본대를 제외한 버서커 이천 명과 기사 오백만으로 우왕좌왕하는 징집 병들을 썩은 집단 베듯 일만이나 베어버렸다.
"아무것도…….아무것도 하지 못했어…….병사들이 죽어 가는데…….크윽…….난 아무것도……."
라파엘 왕자는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떨려오는 듯 했다. 그 떨림의 정체는 패배로 인한 분함 덕분이 아닌 듯 했다. 두려움 이었다. 넘지 못할 산을 눈앞에 둔 자의 두려움.
"떨림이. 멈추질 않네…….멈추지 않아…….매일같이 상상해오고 각오해왔던 패전인데……."
"저하…….누구에게나 패배란 있기 마련입니다…….한 번의 패배를 교훈 삼아 열 번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 입니다.그것이 진정한 무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져서. 패해서 분해서 그런 게 아니네…….솔직히. 무섭네. 아니 무서웠네…….그 빌어먹을 버서커 들이 삼만의 병사를 다 죽이고 이곳까지 진격해와 내 목을 따버릴까봐…….무서웠네…….하하핫. 내 병사들은 무참히 도륙 당하고 있었는데…….난 아직 맞서보지도 않은 적의 모습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그런 내가 용서가 안 돼…….내 자신이 너무 싫어서 용서가 안 되네…….크흐흑……."
라파엘 왕자의 눈앞엔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선했다. 목이 잘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지칠 줄 모르고 싸우는 트란실바니아의 버서커 전사와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 하다 무참히 도륙당하는 자신의 병사들. 그것은 이미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이었으며 사냥이었다.
"저하…….하지만 저하께선 도망치시지 않으셨습니다…….수많은 전투를 치러본 저도 전장에 나설 때 마다 두려움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답니다…….저하. 저하께옵선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저하의 첫 전투였고 첫 전투는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입니다…….크게 생각하십시오. 한 번의 전투에서 이길 생각 하지마시고 전쟁에서 이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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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아젠티…….
몸 건강히 잘 지내시나요?
전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속에서도 운 좋게 아직까지 어느 곳 하나 다친 곳 없이 무사하답니다. 물론 패터슨과 맥키언도 무사하답니다. 그들 부모님께도 안부의 말 부탁할게요. 아직 그곳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 지지 않았겠죠. 더욱 그리워집니다. 클라라 아주머니의 갓 구운 애플파이도 언제나 우리의 얘기를 묵묵히 들어만 주던 언덕 위 오래된 아카시아 나무도 평화롭던 시절의 모든 것이 다 그립습니다.
한여름의 더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전쟁터에는 그 열기로 인해 부패하고 썩은 시체들의 악취가 진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차라리 시체가 되어버리는 편이 이 전장의 광기를 견뎌내는 것보다 편하겠다는 착각마저 듭니다. 지금 우리는 왜 싸우는 걸까요? 매일매일 동료들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드넓은 초원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처음 삼만 명에 달하던 사람들은 이제 겨우 삼천여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죽어야 끝날 전쟁인 것일까요. 처음 전장에 도착한날 눈부신 백마에 올라 황금빛 갑주를 걸치고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검을 들고 있던 태자 라파엘 왕자의 얼굴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멋있었습니다. 마치 헤르메스께서 현신이라도 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우리의 피를 빨아먹는 악귀로만 보입니다. 그 황금 갑옷은 이젠 핏빛의 갑옷으로 보이고 투구 사이로 삐져나온 금빛 머리칼은 악귀 메두사의 그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운 아젠티…….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일까요? 누구를 위해 피 흘리고 있는 것일까요? 이제 그만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습니다. 아젠티, 당신의 미소가 그립습니다. -
에 누스(Eh Nuse)지역의 아스가르(As gar) 대 평원.
트란실바니아와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이곳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푸른 초원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와도 같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이곳은 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푸른 초원은 이미 예전부터 그러한 것인 듯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적 아 구분도 없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시체는 무더운 날씨 탓에 부패해 구더기와 각종 벌레들의 먹잇감이 되고 있었다. 지옥이었다. 지옥 그만 이외에는 설명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 전쟁은 언제쯤 끝날까?"
"여기 징집된 사람들 전부 죽으면 끝나겠지 뭐……."
한숨 섞인 앤더슨의 말에 패터슨이 배식된 빵을 물도 없이 우적우적 씹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비록 물기 하나 없는 돌덩이와 같은 빵이었지만 그것도 이틀만의 배식이라 주린 배를 채워 주기엔 충분한 것 이었다.
"후…….빵이나 드셔……."
"으…….정말이지 이놈의 빵은 정말 못 참겠다니까…….으아~ 클라라 아줌마네 빵이 그리워~"
"다 삼키고나 입 열어! 더럽게 시리~"
"무덤덤한 놈…….성격은 정말 안 변하는군……."
정말 그랬다. 반복돼는 피 비린내 나는 전투는 사람의 성격을 변하게 했다. 소심하고 겁 많던 앤더슨의 성격도 무뚝뚝하지만 인정 많은 맥키언의 성격도 자신들이 느끼지 못한 사이 거칠고 어둡게 변해갔다. 하지만 패터슨은 놀라울 정도로 바뀌지 않았다. 언제나 수다스러웠고 유쾌했다.
"하긴 뭐. 저런 성격 때문에 이 전쟁터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거니까……."
"내가 뭐! 나 가지고 지랄들이야?!"
앤더슨과 맥키언이 자신을 가지고 쑥덕거리자 패터슨은 광분해 주위로 빵가루 파편을 날렸다.
"야이.썅! 삼키고 입 열라니까……."
"야야, 그건 그렇고 그거 들었냐?"
이리저리 튀는 빵가루를 피하며 패터슨의 입을 막으려는 앤더슨을 무시하고 또 다시 수다모드로 돌입하는 패터슨 이였다.
"거 있지, 라파엘 왕자 막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그랜트 아저씨 말이야."
"그 아저씨가 왜?"
앤더슨은 패터슨의 페이스에 말려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 특유의 붙임성으로 여기저기서 전쟁에 관한 정보를 많이 얻어오는 패터슨 이였기에 앤더슨은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맞장구 쳐주었다.
"그 아저씨가 나랑 같은 막사서 자자나……."
"그래, 그래, 그래서?"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봐~ 어젯밤에 들은 이야긴데 말이야…….이 전쟁이 라파엘 왕자의 반역으로 인해 터진 거래……."
"뭐, 뭣?"
"…….?"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이야기가 패터슨의 입에서 나오자 앤더슨은 물론이고 패터슨의 수다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던 맥키언과 주위의 병사들 까지도 놀라 패터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이렇게 죽어나가고 있는데 왕국 정규군과 중앙 기사단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이유가 그거라더군. 지금 달란트 왕국에는 왕비를 따르는 왕비파 귀족과 태자를 따르는 쪽의 귀족, 두 패로 나뉘어져 있는데 트란실바니아가 침략하자 성질 급한 라파엘 왕자가 제 멋대로 전쟁을 낸 거라더군. 근데 문제는 왕비파 귀족들이 태자 쪽 귀족들보다 월등히 많고 군부도 기사단도 장악하고 있다는데 있었던 거지. 그래서 태자는 우리들 같은 평민들을 징집해 전쟁에 나선 거고, 이렇게 매일 매일 패전을 거듭하고 있어도 후퇴도 못한다는 거지. 만약 전쟁에서 이긴다면 구국의 영웅이 되어 단번에 왕비파를 뒤엎을 수 있지만 패하고 후퇴한다면 왕명도 없이 군대를 움직여 전쟁을 일으킨 반역도가 될 뿐인 거야……."
패터슨은 오랜만에 가져보는 스포트라이트에 들떴다. 전쟁이 지속 되면서 자신의 수다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항상 그리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트란실바니아의 침략은 이미 시작된 거고 아무리 왕비와 태자가 서로 반목하는 사이일 지라도 일단 전쟁은 끝내놓고 봐야 하는 거 아냐? 왕자가 일으킨 전쟁이라서 왕비와 정규군이 침묵한다는 것은 좀 말이 안돼…”
맥키언이 나지막하게 반박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그건…흠…나도 모르지 뭐…무슨 모종의 밀약이 있었던 것 아닐까?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왕비는 트란실바니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그리고 트란실바니아 측도 지금 압도적인 군세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격하지 않는걸 보면 단순한 무력도발이었을 지도 모르고 솔직히 지금 트란실바니아가 우리 달란트 왕국에 신경 쓸 여유가 없잖아? 무력도발 아니면 단순히 길을 빌리자는 속셈으로 군대를 내세운 걸거야..그걸 태자가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무모한 도박을 한거지…”
“흠…”
"그, 그럼 왕자의 마지막 도박에 우리가 말려든 거야?"
"그렇지. 우리는 그야 말로 왕자의 노름에 말려든 거지…….잘되면 반역도당으로 낙인찍혀 살아가는 거고 못하면 죽는 거고."
"하, 하지만. 여기서 이긴다면……."
"미친놈.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 건 아니겠지? 지금 우리들로선 지금 당장 저 빌어먹을 버서커 전사 200만 쳐들어와도 전멸이라고~ 무슨 이유에선지 트란실바니아 놈들이 요새 좀 잠잠해져서 다행이지. 참, 그렇지. 여기서 죽지 않고 반역도로도 안 내몰릴 방법이 한 가지 있다더군."
"그 방법이 뭔데?"
"탈영이지…….운이 좋아 탈영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자유의 몸이 되는 거지. 우린 정식으로 징집된 것이 아니라서 탈영을 한다하더라도 아무런 죄가 없다더군……."
탈영. 농담반 진담반으로 내뱉은 이 말이 어떠한 파장을 불러올지 패터슨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패터슨의 이 한마디로 패터슨의 말에 귀 기울이던 병사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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