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후원에 들게 된 궁정대신은 욕정의 화신이라도 된 듯 벌써 세 번째로 공주의 몸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시녀들은 옆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시중인 나다니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테라스 쪽에 서있을 뿐이었다. 엎드린 채 흐느끼며 엉덩이로 강렬하게 부딪쳐 오는 미셀의 아랫배에 온몸이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레이네는 나다니엘을 간간이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한 공주의 표정을 마주할 적마다 나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이를 악물었으나 금세 평소의 안색을 되찾곤 했다.
“한동안 앓았던 사람을 이렇게까지 괴롭혀도 되는 건가요, 플라시니 경…?”
“앓았던 사람 같지가 않은데요. 하하하….”
지랄 처 웃기는…. 싱글싱글 웃으며 땀에 젖은 채 잔을 기울이는 궁정대신을 향해 몰래 눈을 흘기며 레이네는 입을 비죽거렸다. 그래, 종교재판에 회부된다고요…? 추밀원하고 공동재판이 있을 겁니다. 국왕 폐하를 모욕했기 때문에…. 저런…, 융베리 원로…, 참 배짱도 좋군요….
“교리까지 부정했다고 하니 신성모독만으로도 참수형을 면하기 어려울 겁니다. 나 참…,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하게까지….”
“교리를 부정해요?”
“예. 앙느쿠테의 행사를 우스운 짓이라고 했다나요…?”
“어머나….”
“권력과 결탁한 교회가 타락했다고 열변을 토했답니다, 아주….”
“무덤을 팠군요, 어리석어라….”
“무덤을 팠겠습니까. 스스로 사지를 찢은 거나 마찬가지지요….”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 궁정대신이 웬일로 그렇게 웃느냐며 좀 달라진 게 아니냐 묻자, 레이네는 눈을 흘기며 크게 떴다.
“아닙니다, 공주님 뭔가 달라지신 것 같아요.”
“나도 이제 왕위를 이어 받을 왕녀로서 체통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고 원하는 걸 얻었다고 어린아이처럼 깔깔댈 수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하하하하하…!!”
“궁정대신께서도 웃음소릴 낮추세요. 내가 왕위에 오르면 그 땐 정무대신이 되셔야 할 것 아닙니까?”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이거 제가 왕녀께 화대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려, 하하하하하하…!!”
그 말에 공주도 나다니엘도 속이 확 뒤틀렸으나 둘 다 애써 그런 기색을 감추었다. 오히려 레이네는 맞장구를 치며 웃기까지 했으니, 시녀들 중에선 그런 레이네의 연기력과 독기가 무서워 식은땀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아참, 그런데 이번에 새로 병부대신이 된 플로랑 메르히네 공 말인데요.”
“경입니다. 경…. 이번에 남작 작위를 받았지요.”
“어쨌든요. 그 자는 어떤 자입니까?”
“…. 공주께서 이용하시기엔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재무 부총관 시절엔 꽤 유능한 부관 노릇을 잘 했지요. 오히려 르로아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판도 많았답니다.”
“아깝군요.”
“아깝지요…. 하지만 폐하께서 왕가의 자손들이나 받는 작위까지 내리셨으니, 충성을 다하려 들 겁니다. 제 능력을 십분 발휘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겠지요.”
궁정대신은 자신의 성기를 닦는 시녀를 잡아당겨 쪼그라든 그것을 입으로 애무하도록 하고는 술잔을 다시 기울였다.
“어쨌든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그 자가 이용할 수 있는 자인지 아닌지 가늠해보고 판단이 서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가 돌아간 후 레이네는 목욕물을 네 번이나 갈아가며 몇 번이고 몸을 씻어냈다. 옆에는 나다니엘과 시녀들이 시립해 있었고, 레이네는 표독스러운 얼굴을 한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때문에 나다니엘을 제외한 다른 시녀들 사이에는 살벌할 정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레이네의 욕조는 노천의 형태였다. 왕궁 후원 테라스의 끝에 있어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위치하여, 들어와 앉으면 왕도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 자리였다. 날씨가 추워질 때면 시녀들이 에워싸고 서서 바람을 막아야 했으니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미키네오스의 겨울은 새해가 지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서너 달 이상 지속되었다. 왕도인 팡그릿샤는 론도 산맥으로부터는 말을 타고 열흘 이상 걸릴 정도로 떨어져 있었으나 워낙 거대한 산맥인 탓에 만년설의 설산들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네는 사시사철 이 욕조에서만 목욕을 했으니, 시녀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 위에 뜬 꽃잎들을 밀어내며 레이네가 욕조에서 걸어 나오자 시녀들은 얼른 가운을 입혔고, 설산에 사는 사향의 털로 만들어진 외투를 나다니엘이 그녀의 몸에 둘러 주었다. 장작을 지펴 따뜻하게 데워진 방에 들어오자 레이네는 걸치고 있던 것을 모두 벗고 시녀들에게 물기를 닦게 했다. 나다니엘은 그 뒤에 시립해 있었다.
“이제 살 만한가 보군.”
“….”
“상처 말이다.”
“예, 공주님. 염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염려하지 않았다. 그깟 상처…. 허약한 놈….”
“….”
시녀들이 오일을 바르는 동안 불붙은 연초를 받아든 공주는 몇 차례 연기를 내뿜은 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나다니엘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엄숙할 정도로 얌전히 뒤편에 서 있었다. 뭔지 모를 오기가 치밀어 올랐으나 노예 따위에게 오기를 부리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가.”
“예, 공주님….”
잠시중을 들 시녀를 제외하고 모두 처소로 돌아간 시녀들은 공주의 그 같은 행동에 대해 수군거리며 저희들끼리 그럴싸한 추측들을 내놓았다.
“나다니엘님은 대체 뭐래? 남자가 공주 시종인 것도 이상한데, 목욕시중에 잠시중에….”
“게다가 공주님은 나다니엘 앞에선 홀랑 홀랑 벗고도 잘 있잖아.”
“이상할 것도 없잖아. 내가 궁전에 들어오기 전에 있던 집에서도 마님이 남자 노예들 데려다가 공주님처럼 하는 거 많이 봤어.”
“그렇다고 목욕 시중에 잠시중까지 들어?”
“혹시 공주님이 나다니엘님 좋아하는 거 아냐?”
“설마~, 왕녀가 노예를 좋아하겠니?”
“그냥 한 번 하고 싶은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공주님이 꼭~ 걸을 때 보면 그 엉덩이를 흔들 흔들~ 그러잖아~. 하하하….”
“그게 다~ 꼬시는 거야, 꼬시는 거….”
두 번째 시찰은 한율에겐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던 듯,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내내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늘 그러듯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창을 열고 밖을 구경하던 한율에게 집사가 기마대의 전술이 그리 맘에 들더냐 묻자, 한율은 조금 머쓱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기병들로 싸우는 걸 지난번에 보고선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번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지난번 전투라면…, 그 론지니아에서의 전투 말씀인가요?”
“예. 그 금색 갑옷의…. 이름이 뭐라더라….”
“만샤르차크.”
“아, 예예. 맞아요. 걔네들.”
갑자기 앞에서 요란한 말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마차가 들썩거렸다. 뭐가 앞을 가로막았는지 마차는 급정거를 했고 둘은 몸의 중심을 잡느라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예. 한율의 안전을 먼저 확인한 집사가 창을 열고 마부에게 이유를 물으려는데, 마차의 문이 벌컥 열어 젖혀졌다.
“으악…!!”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아이린이었다. 한율은 그녀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앉았다. 니가 왜 여기 있어? 하고 묻듯 하는 그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아이린의 입에서 그야말로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하실 건데요?”
“…? 예…?”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 한율을 향해 아이린이 호통을 쳤다.
“어쩌실 거냐구요!! 정말로 바이마샤르를 떠날 생각이세요?!!”
이건 호통이라기보단 토로에 가까웠다. 아이린은 신경질적으로 그에게 호소라도 하듯 계속 토해냈다.
“서로에게 득이 될 만한 결정이 뭔데요?!! 결국 사임하고 바이마샤르를 아예 떠나실 작정이세요?!! 뭐가 득인데요, 대체…!! 나는 어쩌라고…!!”
“일단 올라와요, 예? 아이린 아가씨…, 일단 좀 올라와 봐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 바이마샤르를 떠날 만큼 내가 그렇게까지 싫으냐고요!! 한율님 떠나면 난 대체 어떻게 하라고요…!!”
집사는 눈물바람을 일으키며 울부짖는 아이린을 일단 마차 안으로 태웠다. 상황을 보니 아이린은 또 말을 잡아타고 이곳까지 온 듯했다. 말씀들 나누시지요. 집사는 말을 끌고는 마부에게 기다리라고 시킨 뒤 자신도 그 옆에 섰다. 달려오느라 고생한 말을 몇 번 쓰다듬었다.
우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린을 겨우 달래고 달래서 집에 보낸 한율이 그 날 저녁 서재로 들어온 집사에게 처음 건넨 말은 추궁이었다.
“집사님이셨습니까?”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아이린의 일로 오후 내내 골머리를 앓았으니, 목소리까지 침전된 듯했다. 빨지도 않은 담뱃대에서는 이미 연초가 다 타고 불기가 사라져 있었다.
“…무얼 물어보시는 것인지요?”
“아이린 아가씨에게 서신을 보내서 제 시찰 일정을 알린 거, 집사님이셨냐고 물어봤습니다. 맞습니까?”
“예. 제가 그랬습니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당당히 대답하는 집사를 향해 한율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헛바람을 내뱉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집사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향해 다른 질문을 했다.
“아이린 아가씨가 싫으십니까?”
“무슨 생각이시냐고 물었습니다.”
“오히려 좋아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 지금 그런 이야기 할 기분이 아닙니다. 대답하세요. 왜 그러셨습니까?”
“전 이미 제 뜻을 위원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것 보세요!!”
한율은 책상을 쾅 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주먹에 책상에 우지끈 부서지며 움푹 패여버렸다. 집사는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마주서 있었다. 둘 다 키가 무척 큰 편이었기에 차이는 없었지만, 한율의 덩치가 워낙 컸다보니 그가 위협을 하는 꼴처럼 보였다.
“나 역시 내 뜻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아이린 아가씨를 충동질하시는 겁니까?!! 정말 이런 식으로 날 곤란하게 하실 겁니까?!!”
“아이린 아가씨는 놓치기가 참 아까운 분이십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럽니까?!! 다른 문제에 대해선 그렇게 밀고 당기기 수쓰기에 능란하시면서 왜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그렇게 어린애처럼 구십니까!!”
“어린애처럼 구는 건 제가 아니라 위원님이십니다.”
“뭐요…?”
“다른 걸 다 양보하시고 물러나 계신다면 그 하나쯤은 위원님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언제까지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세우실 참입니까?”
“내가 왜 나를 몰아세웁니까?”
“그럼 서로에게 득이 되는 그 결정이란 뭡니까?”
“그건 집사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관여해야 합니다.”
“그게 집사님하고 무슨 상관인데 관여를 하신다는 겁니까!!”
“…!”
문밖에서 헨야가 쿠키를 구워서 가져오려다 방 안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쟁반을 놓칠 뻔했다. 조심스레 쟁반을 내려놓고 귀를 가져가며 이게 무슨 일인지 엿들어 본다.
“짧은 기간이지만…. 저는 위원님과 함께 지내면서 위원님을 아들처럼 생각했습니다. 지금 떠나시면 위원님께선 또다시 오랜 시간을 방랑자로 사셔야 합니다. 한 번 정착하려다 이런 일이 생기면 다시 정착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
“게다가 여기에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 위원님께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지금 위원님께서 바이마샤르를 떠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실 겁니까?”
“….”
“뚫고 나가셔야 합니다. 피하지 마십시오. 위원님께선 편한 길로 가려고 하십니다. 혼자 다니면 좋습니다. 누구 신경 쓸 사람도 없고, 누구 하나 잔소리 할 사람도 없지요. 방랑이 몸에 밴 위원님 같은 분에겐 더 그럴 겁니다.”
“….”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사람은 홀로 왔다가 홀로 갑니다. 하지만 오고 가는 길을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잠시 머무를 적에는 누군가와 함께 지내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한율은 그가 말이 끝났다 싶자 자리에 털퍽 주저앉았다. 연초가 다 타버렸다. 털어내고 다시 연초를 꾹꾹 눌러 담고, 거기에 불을 붙여 몇 차례 빨아들였다. 집사는 그가 그러고 있는 모양을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난들….”
“….”
“난들 왜…, 떠나고 싶겠습니까.”
“그러니 물러서시지 말란 겁니다.”
“…. 하지만 나는 언젠간 떠나야 할 사람입니다.”
“… ….”
“론지니아 전투에서 수천의 마도들이 몰려왔던 건…. …. 아니 그만둡시다, 이건…. 어쨌든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라고 해둡시다.”
“… ….”
“시찰은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일정이 모두 끝나는대로 떠날 겁니다. 내 마음이 변하는 일은 없을테니, 집사님께선 더 이상 신경쓰지 마십시오.”
“왜 여기서 뭔가를 도모할 생각은 안하십니까?”
“…. 집사님께서 날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건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만…. 난 그런 욕심은 없는 사람입니다. 아시잖아요.”
“모릅니다.”
“이보세요…!!”
“저는 모릅니다. 위원님 마음에 그런 욕심이 있는지 없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때와 장소를 좀 가려서 하십시오. 더 이상 집사님께 언성 높이고 싶지 않습니다. 집사님도….”
“… ….”
“집사님도 제게는….”
“저 보기보다 나이 많습니다.”
“…, 압니다. 오래간만에 아버지 같은 분을 만났습니다.”
“… ….”
한율은 연초를 털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지요….”
“위원님은…, 적어도 제가 본 위원님은 참으로 강건한 분이십니다.”
“…. 칭찬 같지가 않군요.”
피식 웃는 한율을 향해 집사도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 강건함이 지독할 만큼 위원님 자신에게만 향하고 있습니다.”
“…. 또 그 말씀이십니까.”
“… …. 결례를 하였습니다. 그만 쉬시지요.”
“….”
집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서재를 나섰다.
안식일, 스클로도프 가의 저택.
루카스는 아침에 오자마자 피곤에 절어 잠들었다가 어머니의 호출 때문에 깨어났다. 시녀가 와서 그를 흔들어 깨우자 루카스는 귀찮다는 듯 몸을 이리 저리 뒤척거리다가 겨우 일어났다.
“나 어제 밤새서 피곤하다고 했잖아…, 왜?”
“마님께서 찾으십니다, 도련님.”
“에이 증말…. 알았어.”
시녀가 입혀주려고 들고 기다리고 있던 가운을 거칠게 나꿔채며 그는 대충 그것을 걸치곤 문밖으로 나섰다. 어머니는 1층 거실에서 아버지 메수트 스클로도프 여당 원내총무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그 꼴이 뭐냐?”
“자다가 일어났어요.”
“군인이란 놈이….”
“사흘 동안 한 숨도 못 잤습니다, 아버지. 시찰 때문에요.”
자리에 앉으며 연초부터 꺼내드는 그를 도끼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어머니가 이윽고 본론을 꺼냈다.
“너, 바슈미르 댁으로 생일 연회 초대장 보냈다는 게 사실이야?”
“…. 예.”
“너 제정신이니?”
기가 막히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어머니를 향해 루카스는 오히려 기가 막힌 건 나라는 듯 되물었다. 아니 왜요? 아이린 아가씨를 소개해 준 건 어머니였잖습니까? 그건 내가 그 집 딸이 어떤 애인지 몰랐을 때 얘기고…!
“언성 낮춰요, 부인…!”
“그 아이는 한율 공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알고 있어?”
“아닌 것 같던데요, 제가 보기엔…?”
“너 지난번에 꽃하고 편지 보내놓고 답신도 못 받았다면서.”
“아…, 아이 그건 또 왜…, 단토 부집사 어디갔어?”
짐짓 그를 당장이라도 한 대 칠 듯한 기세로 벌떡 일어나려던 루카스에게 어머니가 추궁을 계속하려 들자, 아버지가 이를 말리고 나섰다. 그만해. 루카스가 어린애도 아니고 왜 그래요, 계속…? 어린애가 아니니까 그러죠.
“그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아이가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초대를 다 했니? 어디 이유라도 좀 들어보려고 불렀다.”
“…. 마음에 들어서 초대한 거 아닙니다.”
“…. 마음에 들어서 초대한 게 아니면…?”
이번엔 아버지도 반응을 보였다. 루카스는 연초를 빨아 연기를 내뿜으며 몸을 뒤로 묻듯 기댔다. 제가 한 번 모욕을 당했다고 그냥 포기해버리면…, 아버지도 곤란하실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어머니의 표정은 확 펴졌지만, 메수트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채 그를 보고만 있었다.
“생각해주는 건 고맙다만…,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는 건 아니겠지?”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지금 시찰 때문에 정신없는데 그럴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하여튼 우리 아들 참 생각도 깊어, 그렇지 않아요, 자작?”
“바이마샤르에는 작위 같은 거 없어.”
“그래도 일단 받은 작위가 어디 가나요?”
“어쨌든 잘 해라. 실례되지 않게….”
“예, 아버지. 저 좀 더 잘게요.”
“그래, 깨워서 미안하다, 응?”
어머니는 그가 나가자 그런 줄도 모르고 자는 애를 깨워 괜히 괴롭혔다며 연신 싱글거리다가는 돌연 남편을 향해 정색을 했다. 자작께선 왜 작위를 자꾸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하세요? 입을 비죽거리는 부인을 향해 곁눈질을 보낸 그는 책장을 넘기며 찻잔을 집어들었다.
“그 자작 작위 때문에 이스마르에서 여기로 망명해 온 거 아닙니까…. 난 그런 이야기는 이제 지긋지긋해요.”
“그래도요…!”
“왕위 계승이고 뭐고…, 왕궁 안에서 그 권력 조각이라도 얻어보자고 머리 터지게 싸우는 동안 시민들이 어땠는 줄이나 알아요? 거기에 비하면 바이마샤르는 얼마나 좋습니까?”
“흥, 천박한 장사꾼의 나라 따위…. 차라리 울리프 령으로 가자고 했잖아요. 그랬으면…, 루카스도 지금쯤은 벌써 혼인도 했을 테고….”
“오래 전 일입니다. 그쯤 해 두세요.”
“… ….”
엄마는 못내 아쉬운 듯 한숨을 짧게 내쉬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아이린 바슈미르 아가씨에게.
지난번에 보내드렸던 꽃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깊이 사죄드립니다. 허락도 없이 갑작스러운 선물과 편지를 보내드려 불편케 해 드린 점 반성하고 있습니다.
무례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두 번째 안식일 다음날 열리는 제 생일 연회에 아가씨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제게 가장 뜻 깊은 이 날 아이린 아가씨께서 함께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루카스 스클로도프 드림.-
“이번엔 좀 담백하게 썼다?”
“….”
아이린보다는 엄마가 더 신이 났다. 초대장을 던지듯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그녀의 팔을 찰싹 때리곤 엄마는 그것을 집어 들어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이제 보니 글씨를 아주 잘 쓰네…, 역시 좋은 집안이라…. 아무 반응도 없이, 아니 오히려 냉담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쿠키만 씹는 아이린을 보며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얘를 어째야 하나….
“아이린. 이제 그만 한율 공에 대해서 미련을 접어라.”
“….”
“지난번에 너 그렇게 해서 돌려보냈는데도 이렇게 생일 연회에 초대장까지 보낸 거 보면, 아직은 루카스가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거 아니겠니?”
“….”
“생각해 봐. 루카스랑 한율 공이랑. 훨씬 젊은데다 더 잘생기기도 했지. 게다가 능력도 있고. 그것뿐이니? 지금이야 망명자라지만 그래도 그 집안이 왕족 집안 아니니, 왕족…!”
루카스의 집안은 본래 이스마르의 왕족이었다. 왕실 직계와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누대에 걸쳐 왕실에서 자손이 부족해지자 왕의 후사를 방계에서 찾기 시작하여 그 집안도 왕위 승계 구도에 끼어들었다. 그러다 20년 전의 전쟁으로 왕위 승계 순위에서 가장 윗줄에 있었던 전 국왕의 조카손자가 죽자 왕족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 쟁투가 일어났다. 루카스의 부친인 메수트 스클로도프는 거기에서 밀려난 후 권력을 위한 투쟁에 환멸을 느끼고 공화정인 바이마샤르로 정치적 망명을 해 온 것이었다. 엄마는 그 점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왕족이든 황족이든 그런 것을 신경 쓸 아이린이 아니었다. 아무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나서는 그녀의 뒤에 대고 엄마가 엄포를 놓았다.
“너 이번엔 꼭 가야 된다? 어디 도망갈 생각 말고 집에 꼭 붙어있어! 엄마가 직접…, 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엄마는 분을 가라앉히듯 헛바람을 내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옆에서 시종장이 거들었다.
“아가씨는 그런 것에 신경 안 쓰실 걸요?”
“…. 정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저러다 정말 크게 상심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네요.”
“그러게….”
이튿날 저녁, 루카스의 생일 연회는 스클로도프 가의 저택 연회장에서 열렸다. 바이마샤르에서는 드물게 작위를 가진 ‘진짜’ 귀족 자제의 생일 연회답게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모여 연회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뛰어난 통솔력과 지휘력으로 젊은 나이에 대대장에 해당하는 사령의 위치에 오른 그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자 모여든 군부의 젊은 인사들이 반 정도였지만, 진정으로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이들도 그만큼 많았다.
“많이도 모였다. 정말….”
“루카스 사령님은 병사들에게도 각별하시니까….”
“오늘 대대에도 술이랑 음식을 보내셨다며.”
“군장급들까지 초대를 하셨으니….”
아로사와 나자르, 차프라도 여기에 자리해 있었다. 그들은 루카스와 마주치자 칼같이 군례를 올렸으나, 루카스는 멋쩍은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럴 것 없어. 여기서까지 무슨 군례는…. 그래도 사령님이신데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맙다. 건배를 한 후 루카스는 차프라에게 핀의 안부를 물은 뒤 아로사와 나자르를 칭찬했다.
“두 사람 참 대단해. 여자인데도 전투부대를 지휘하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니라는 소리들이 들려.”
“사령님도 참…, 전투부대라뇨. 의회경비대인걸요.”
“전투부대지. 의회경비대가 얼마나 군기가 센 지는 전군이 다 알아.”
“하하…, 남녀가 따로 있겠습니까, 사령님.”
“따로 있지. 따로 있고말고. 보통 여군 부대들은 행정직에 있잖아. 아니면 최후방 방어선의 병참을 맡거나…. 그런데 두 사람은 그 험하고 투박한 놈들을 다루면서도 남자들보다 더 잘한다더군?”
“남자들은 어린애 같으니까요.”
“하하하…! 그런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도착하는 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반색을 띠는 루카스의 얼굴을 보고는 아로사와 나자르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눈에 익은 마차였다. 루카스는 들고 있던 잔을 시종에게 맡겨두고는 얼른 밖으로 나가 마차에서 내리는 아이린을 맞이했다.
“아이린 아가씨…!”
“…. 안녕하세요….”
“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 생일…, 축하드립니다.”
어색하게 예의를 갖추는 아이린의 옆에는 선물을 든 시녀가 따르고 있었다. 미리 알지 못해서….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와주셔서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화색이 가득한 루카스는 아이린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당황하는 그녀의 기색에는 아랑곳 않으며 손을 잡은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린이잖아?”
“야, 뭐야…. 아이린하고 루카스 사령님하고 어떻게 된 거야?”
“낸들 아니? 안식일이나 돼야 집에 들어가는데, 너나 나나….”
“그럼 한율 사무랑님은 어떻게 되시는 거야?”
“넌 아직도 한율 공 얘기야?”
아로사와 나자르만큼이나 자리한 다른 사람들도 술렁거렸다. 참석한 대부분은 군부의 젊은 지휘관들이었기에 연말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아이린이 누구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루카스는 몸을 도사리며 어색하게 따라 들어오는 아이린을 그들 앞에 세우고 소개했다.
“자, 다들 잠시 이쪽을 봐주십시오!”
그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모두의 시선은 그쪽을 향해 있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긴 목선을 드러내고, 쇄골까지 살짝 드러나는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와 옅은 보라색의 아이리스 문양이 수놓아진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남녀를 불문하고 군인들로 득시글대는 이 연회장에서 단연 돋보이고 있었다. 특히 드러난 목 언저리의 피부에 살짝 얹힌 듯 간결하고 세련된 목걸이가 아이린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아로사와 나자르도 아이린이 저렇게 예뻤었냐, 나도 몰랐다 하며 허허 웃었고, 차프라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게 평소에 보던 그 아이린이 맞나 하는 얼굴이었다.
“오늘 제 생일을 맞아 특별히 초대한 손님입니다. 오실지 안 오실지 사실 조마조마했는데,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여당 대표이신 핫산 바슈미르 의원님의 따님 아이린 바슈미르 양이십니다.”
루카스에게 한 손을 잡힌 채 수십 명의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아이린은 얼굴이 붉어진 채 어색하게 인사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그녀가 루카스와 혼약이라도 한 사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로사는 저럴 수 있나 하는 얼굴로 기가 막혀했고, 나자르는 씁쓸한 웃음을 띄우며 잔을 기울였다.
“야, 어떻게…. 아니, 한율 공이 좋다고 밤중에 말 타고 갈 땐 언제고….”
“… ….”
어처구니없어하는 아로사를 쳐다보는 나자르의 얼굴은 ‘니가 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심상치 않은 그 표정에 아로사가 왜 그러느냐 묻자, 나자르는 핀잔을 주며 머리 좀 쓰라고 한 마디 내뱉은 뒤 잔을 비워버렸다.
“뭔데…?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너 루카스 사령님이 어떤 분인지 몰라? 술수로는 고수 중에서도 최고수급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잡고 소개하면서, 아이린이 아무것도 못하게 하려는 거라고.”
“설마….”
“어휴…. 그 칼 쓰는 것만 하지 말고 책 좀 봐라, 책 좀…!”
“에이 진짜… 책 본다고 그런 게 나오냐?”
루카스와 아이린의 사이는 삽시간에 군부에 소문이 퍼졌다. 군대란 곳이 본래 몸 쓰는 일을 빼면 입만 움직일 힘이 남아도는지라 소문이 몹시 빠른 법이다. 아로사와 나자르는 한율을 찾아가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로사는 분개했고, 나자르는 차분하게 그에게 어쩔 생각이냐 물었다.
“… …. 뭘 어째, 어쩌긴….”
말없이 듣고만 있던 한율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한마디 툭 내던지곤 담뱃대만 빨 뿐이었다. 태연하게 자신들을 쳐다보며 연기를 내뿜는 한율에게 아로사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뭔가 대책을 세우셔야죠~! 아이린이 사무랑님께 마음 있는 거 뻔히 아시면서 이대로 당하실 건가요?!”
“아로사…!”
“….”
한율은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연기에 가려진 그의 표정은 약간 무거운 듯도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나자르가 아로사의 손을 잡아 진정시킨 뒤 그의 마음을 물었다.
“전 위원님께서도 잘못이 있다고 봅니다.”
“무슨 소리야, 나자르!”
“위원님께서 아이린에게 마음이 없으시다면 확실하게 거절을 해주시는 편이 옳습니다. 물론 아이린의 성격이 저돌적이고 엉뚱한 데가 많아서 쉽지는 않으실 거란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맞다면 위원님께서는 그저 피하기만 하실 뿐, 아이린에게 확실하게 의사 전달을 하진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
“나자르, 사무랑님께 무슨 무례야?!”
“너야말로 언제까지 위원님께 사무랑님, 사무랑님 할 거야?”
“너 정말…!”
“나자르 말이 맞아.”
둘은 한참 만에 입을 연 한율에게로 동시에 시선을 옮겼다. 연초를 털어낸 한율은 담뱃대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사무랑이 아니라 보위부 군사자문이야. 사무랑이라니, 당치도 않지. 사무랑님…! 원래 말투가 냉소적인 구석이 있는 한율이었지만 그 말이 조금은 비꼬는 투로 들렸다. 그러나 나자르는 내색하지 않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로사도 나자르를 좀 닮는 게 어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환은 이제 없는 나라다. 망한 지가 20년이 넘었어. 게다가 네 나이로 보건대, 그 끔찍한 살겁, 기억도 못할 것 같은데 참 질기게도 원한을 가슴에 품고 사는 거 같아.”
“…!!”
아로사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졌고, 나자르의 표정에도 불쾌한 기색이 깃들었다. 그들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율은 양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안 그래? 하고 묻는 듯 한 몸짓. 얼굴이 붉어져 이마에 핏줄까지 선 아로사의 손을 잡고 진정시키며 나자르가 차가운 투로 물었다.
“그럼 위원님께선 그 일로 인한 마도들에 대한 원한 따위는 조금도 품고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원한…? 그런 걸 갖고 있으면 죽은 사람들이 살아서 돌아오나…?”
“이봐요, 한율님!!”
아로사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며 언성을 높이자 나자르가 다시 그녀를 붙들고 앉혔다. 분을 삭히지 못하고 식식거리는 아로사의 팔을 꽉 붙들고 나자르가 다시 추궁하듯 묻는다.
“그렇다면 위원님께서 그 다섯 자루의 검을 차고 다니실 이유도 없을 것 같은데요?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그렇게 우리 민족의 형식을 갖추고 다니시는 걸 보면, 진심은 아니신 듯 한데요.”
“난 진심이야. 원한 따위 없어. 칼자루 다섯 개도 길 떠날 때 스승님이 가져가라기에 그냥 푸대에 담아서 지고 다녔어.”
아로사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져 핏발이 서고 있었다. 나자르 역시 가늘게 떨며 분기를 삭히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율은 여전히 태연한 안색으로 그들을 향해 양팔을 다시 벌리며 아무것도 없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남은 게 뭐가 있어? 땅이 있길 해, 사람이 있길 해? 그 때 그러고 있던 거야 공식 석상이니 어쩔 수 없이 폼이나 잡자고 그랬던 거지. 난 저 칼자루들 뽑아 본 일도 없어. 착각들도 자유다, 참…, 허허허….”
“난 더 이상 못 듣겠어.”
아로사는 그에게 대들고 따지는 대신 벌떡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고, 나자르는 그 자리에 앉아 한참을 침묵하며 할 말을 정리하는 듯했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져 당장이라도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한 마디라도 찔러주고 나가야 될 듯했다.
“저 역시…. 훌륭하신 아버님과 어머니를 얻어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원한 같은 건 그리 많지 않은 편이지요. 하지만 아로사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
“아로사처럼 원한을 마음에 오랫동안 새기고 사는 사람들은 그 심지도 그만큼 곧기 때문이죠. 저는 적어도 한율님 만큼은 그런 저희들보다는 뭔가 더 실제에 가까운 말씀을 해주실 줄…, 아니 좀 더 옳은…, 아니….”
생각이 정리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인지 나자르는 답지 않게 말을 계속 번복했다. 한율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쨌든…. 저와 아로사의 이 차이에 대해서 뭔가 좋은 답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
“위원님은 그저 도망치는 분이셨군요.”
“… ….”
“….”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초가 다 타서 꺼지자 나자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율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 이제 시찰 때 뵙고 나면…. 뵐 일이 없겠군요. 더 이상 위원님을 찾아 뵐 일은 없을 것으로 압니다. 그럼….”
그녀는 깍듯이 군례를 올리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서재를 나갔다. 나자르가 나가고 나서도 한율은 굳어버린 듯 앉은 모습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아로사와 나자르가 돌아가는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정적이 찾아올 무렵 문을 두드리고 집사가 들어왔다.
“두 아가씨는 가셨습니까?”
“….”
“위원님.”
“….”
집사는 그의 안색이 심상치 않자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촛불을 켤까요? 그대로 두십시오….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집사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그에게 인사를 한 후 서재를 나갔다. 한율은 어렸을 적 눈앞에서 보았던 참혹한 일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마을의 집이란 집은 모조리 불타고, 평소에 나다니던 길 위에는 살점과 뼛조각들이 핏방울과 함께 어지럽게 흩어졌다. 마도들이 난무하며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먹는 가운데 뇌수가 터져 나오고, 안구와 혀와 손가락이 잘려 이리저리 어지럽게 떨어지는 그 가운데 여섯 살 난 한율이 서 있었다. 동공이 초점을 잃은 채 어린 한율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도들의 비호를 받듯 마을을 살점과 뼛조각들을 밟고 다니며 사람이 살아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수십의 마도들이 달려들어 살아있는 이들을 꺼내 사지를 찢어발기고 그 가죽을 벗겨 내장을 뜯어먹고 뼈를 발라냈다. 지옥 같은 그 광경 속에서 오로지 한율만이 입가에 광기가 들린 웃음을 흘리며 생기가 느껴지는 곳이면 가축이든 사람이든 가릴 것 없이 가리켜 마도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원한….”
한율의 입에서 가늘게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내 입꼬리에 쓰디쓴 웃음이 배었고, 그는 쿡쿡쿡 하고 웃음을 삼키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에게 원한을 가진단 말이냐…. 속으로 중얼거리는 한율. 그 엄청난 살겁, 온 나라가 망할 정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처참하게 도륙한 학살의 한 가운데에 그 자신이 있었다. 눈을 가린 손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위원님….”
“… ….”
헨야였다.
한율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린 채 울음만을 삼켜버렸다. 지난 일을 생각하느라 누가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어두웠지만, 달빛에 비친 한율의 얼굴이 반짝이고 있어 헨야는 그가 울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심각한 모습이었으나, 단순히 심각한 모습이라기엔 너무나 무거워 보였다.
“… …. 우세요…. 괜찮아요….”
헨야는 작은 몸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가슴에 품었다. 젖가슴이 이마에 닿으며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감쌌고, 한율은 눈을 가린 손을 내렸다.
“….”
“….”
한율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은 헨야의 가느다란 팔에 가만히 얹었다. 조금은 창피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다…, 다 울었어요. 내가 좀… 창피한 꼴을 보였네….”
“… ….”
헨야는 얼굴을 쓸어내려가던 손으로 한율의 턱을 받치며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럽지는 않았기에 한율도 놀라진 않았다. 깊진 않았지만 긴 입맞춤이 끝나고 입술을 뗀 헨야는 시녀복 차림이 아니었다. 레이스가 달린 슬립은 소매가 없었다. 달빛에 비쳐 슬립 안으로 헨야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를 본 한율의 얼굴이 굳어졌다.
“…. 집사가… 시켰습니까…?”
“… ….”
헨야는 말없이 목끈을 풀어 슬립을 발밑으로 떨어뜨렸다. 파르스름한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몸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린애 같진 않았다. 적당하게 솟아오른 젖가슴과 약간 큰 듯한 젖꼭지, 그리고 주위에 옅게 흩어진 유륜을 지나 한율의 시선은 어느새 그녀의 몸을 훑고 있었다. 작은 키였으나 골반은 꽤 높은 편이었다. 짧은 허리에서 골반이 튀어나와 약간 일찍 벌어지는 헨야의 허리선을 타고 아랫배에 시선이 닿자 헨야는 약간 몸을 도사렸다. 일자 형태로 돋은 음모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
“원하신다면…. 절 가지셔도 돼요.”
이렇게까지 나오는 여자에게 모욕을 줄 만큼 한율은 그다지 매정한 편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 날만큼은 다 잊어버리고 욕정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도 전에 없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는 이날 밤 헨야를 안았다.
이튿날 새벽 한율은 평소와 다름없이 상쾌한 기분으로 뒤뜰에서 윗도리를 벗은 채 수련을 하고 있었다. 주먹을 내지르고 발차기를 하는 대신 그는 목도를 들고 검무라도 추듯, 눈을 감은 채 기운이 흐르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헨야! 너 진짜야?!”
“뭐야, 얘네들…. 소식도 빠르네.”
“어때, 어때?”
“몸 진짜 좋아? 잘해?”
“돈들이나 내, 빨랑~. 내기 얘기는 쏙 빼버리고 이것들이….”
“여우같은 게…. 자…!”
시녀들은 은화를 하나씩 꺼내어 헨야에게 내던지듯 건넸고, 그녀는 신나라하며 그것들을 받아 품에 챙겼다. 가짜 은은 아니지? 이게 속고만 살았나~, 야 빨리 말해봐. 어때? 어땠어? 잘해?
“음…. 응!”
“어머머, 어떡해, 어떡해~ 잘한대~!”
“뭘 어떡해, 해봐야지.”
“꿈도 야무지다~.”
“해보니까….”
헨야가 말을 꺼내자 저희들끼리 신이 나서 손뼉을 치며 수선을 떨던 시녀들이 이내 약속이나 한 듯 그녀에게 집중했다. 역시…. 남자는 힘이야, 힘…!
“그 봐, 그 봐…. 그 덩치를 보면 힘세게 생겼잖아.”
“헨야, 그거는, 그거는…? 그것도 커…?”
“음….”
헨야는 또 뜸을 들인다. 그러더니 돌연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척을 했다.
“토할 뻔 했어.”
“어머, 토할 뻔 했대~!”
“그 봐, 남자는 기술이고 뭐고 간에 어쨌든 크고 세야 돼~.”
“뭣들 하는 건가, 지금…? 위원님 벌써 수련 중이신데 아침 준비들 안 해?”
시녀들이 소란을 떨고 있는 것을 지나는 길의 집사가 해산시켜버렸다. 다들 부산을 떨며 입을 막고는 제 위치로 바삐 움직였다. 그나저나 헨야는 저래서 혼인이나 하겠어? 내버려 둬라~, 저러다 나중에 누구처럼 새끼 시녀들 모아놓고 남자 후린 무용담 늘어놓으며 추억 삼겠지….
“… ….”
지난밤의 일이 궁금하긴 했지만 집사는 딱히 묻지 않았다. 한율도 그 일에 대해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시락 동쪽 성문 밖의 제 31 병참연대로 가실 예정입니다. 그 날의 일정을 말하는 집사의 말에도 한율은 고개만 끄덕거릴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조금 빠른 듯합니다. 일단 잡아놓은 일정이긴 합니다만….”
“…. 하는 수 없지요. 얼른 끝내버려야지, 눈치 보여서 못해먹겠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
“…, 의회의 눈치를 살피시는 거라면 그만두셔도 좋을 듯합니다.”
“의회가 아니라…. … ….”
“….”
“…, 관둡시다.”
“…. 정치적으로도 그렇다는 겁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한율을 따라나서며 집사가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한율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돌아보았고, 집사는 그에게 권고하듯, 차라리 공격적으로 생각을 바꿔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바루나 국왕이 바이마샤르를 견제하려 든다 해도 선봉에 서서 막아낼 수 있도록…. 한율은 되지도 않을 소리라는 듯 피식 웃었다.
“내가 뿌리내릴 토양은 이곳이 아닙니다.”
“위원님…!”
“그만하십시오. 더 이상 막으려 들면 어느 날 훌쩍 사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절 생각하시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이오.”
한율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무거워져 있었다. 역시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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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전편이 어디까지였는지 항상 보고 올리는데... 16부를 봐버렸던 것 같슴다.ㅡ.ㅡ;;;;
“한동안 앓았던 사람을 이렇게까지 괴롭혀도 되는 건가요, 플라시니 경…?”
“앓았던 사람 같지가 않은데요. 하하하….”
지랄 처 웃기는…. 싱글싱글 웃으며 땀에 젖은 채 잔을 기울이는 궁정대신을 향해 몰래 눈을 흘기며 레이네는 입을 비죽거렸다. 그래, 종교재판에 회부된다고요…? 추밀원하고 공동재판이 있을 겁니다. 국왕 폐하를 모욕했기 때문에…. 저런…, 융베리 원로…, 참 배짱도 좋군요….
“교리까지 부정했다고 하니 신성모독만으로도 참수형을 면하기 어려울 겁니다. 나 참…,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하게까지….”
“교리를 부정해요?”
“예. 앙느쿠테의 행사를 우스운 짓이라고 했다나요…?”
“어머나….”
“권력과 결탁한 교회가 타락했다고 열변을 토했답니다, 아주….”
“무덤을 팠군요, 어리석어라….”
“무덤을 팠겠습니까. 스스로 사지를 찢은 거나 마찬가지지요….”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 궁정대신이 웬일로 그렇게 웃느냐며 좀 달라진 게 아니냐 묻자, 레이네는 눈을 흘기며 크게 떴다.
“아닙니다, 공주님 뭔가 달라지신 것 같아요.”
“나도 이제 왕위를 이어 받을 왕녀로서 체통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고 원하는 걸 얻었다고 어린아이처럼 깔깔댈 수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하하하하하…!!”
“궁정대신께서도 웃음소릴 낮추세요. 내가 왕위에 오르면 그 땐 정무대신이 되셔야 할 것 아닙니까?”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이거 제가 왕녀께 화대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려, 하하하하하하…!!”
그 말에 공주도 나다니엘도 속이 확 뒤틀렸으나 둘 다 애써 그런 기색을 감추었다. 오히려 레이네는 맞장구를 치며 웃기까지 했으니, 시녀들 중에선 그런 레이네의 연기력과 독기가 무서워 식은땀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아참, 그런데 이번에 새로 병부대신이 된 플로랑 메르히네 공 말인데요.”
“경입니다. 경…. 이번에 남작 작위를 받았지요.”
“어쨌든요. 그 자는 어떤 자입니까?”
“…. 공주께서 이용하시기엔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재무 부총관 시절엔 꽤 유능한 부관 노릇을 잘 했지요. 오히려 르로아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판도 많았답니다.”
“아깝군요.”
“아깝지요…. 하지만 폐하께서 왕가의 자손들이나 받는 작위까지 내리셨으니, 충성을 다하려 들 겁니다. 제 능력을 십분 발휘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겠지요.”
궁정대신은 자신의 성기를 닦는 시녀를 잡아당겨 쪼그라든 그것을 입으로 애무하도록 하고는 술잔을 다시 기울였다.
“어쨌든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그 자가 이용할 수 있는 자인지 아닌지 가늠해보고 판단이 서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가 돌아간 후 레이네는 목욕물을 네 번이나 갈아가며 몇 번이고 몸을 씻어냈다. 옆에는 나다니엘과 시녀들이 시립해 있었고, 레이네는 표독스러운 얼굴을 한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때문에 나다니엘을 제외한 다른 시녀들 사이에는 살벌할 정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레이네의 욕조는 노천의 형태였다. 왕궁 후원 테라스의 끝에 있어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위치하여, 들어와 앉으면 왕도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 자리였다. 날씨가 추워질 때면 시녀들이 에워싸고 서서 바람을 막아야 했으니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미키네오스의 겨울은 새해가 지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서너 달 이상 지속되었다. 왕도인 팡그릿샤는 론도 산맥으로부터는 말을 타고 열흘 이상 걸릴 정도로 떨어져 있었으나 워낙 거대한 산맥인 탓에 만년설의 설산들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네는 사시사철 이 욕조에서만 목욕을 했으니, 시녀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 위에 뜬 꽃잎들을 밀어내며 레이네가 욕조에서 걸어 나오자 시녀들은 얼른 가운을 입혔고, 설산에 사는 사향의 털로 만들어진 외투를 나다니엘이 그녀의 몸에 둘러 주었다. 장작을 지펴 따뜻하게 데워진 방에 들어오자 레이네는 걸치고 있던 것을 모두 벗고 시녀들에게 물기를 닦게 했다. 나다니엘은 그 뒤에 시립해 있었다.
“이제 살 만한가 보군.”
“….”
“상처 말이다.”
“예, 공주님. 염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염려하지 않았다. 그깟 상처…. 허약한 놈….”
“….”
시녀들이 오일을 바르는 동안 불붙은 연초를 받아든 공주는 몇 차례 연기를 내뿜은 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나다니엘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엄숙할 정도로 얌전히 뒤편에 서 있었다. 뭔지 모를 오기가 치밀어 올랐으나 노예 따위에게 오기를 부리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가.”
“예, 공주님….”
잠시중을 들 시녀를 제외하고 모두 처소로 돌아간 시녀들은 공주의 그 같은 행동에 대해 수군거리며 저희들끼리 그럴싸한 추측들을 내놓았다.
“나다니엘님은 대체 뭐래? 남자가 공주 시종인 것도 이상한데, 목욕시중에 잠시중에….”
“게다가 공주님은 나다니엘 앞에선 홀랑 홀랑 벗고도 잘 있잖아.”
“이상할 것도 없잖아. 내가 궁전에 들어오기 전에 있던 집에서도 마님이 남자 노예들 데려다가 공주님처럼 하는 거 많이 봤어.”
“그렇다고 목욕 시중에 잠시중까지 들어?”
“혹시 공주님이 나다니엘님 좋아하는 거 아냐?”
“설마~, 왕녀가 노예를 좋아하겠니?”
“그냥 한 번 하고 싶은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공주님이 꼭~ 걸을 때 보면 그 엉덩이를 흔들 흔들~ 그러잖아~. 하하하….”
“그게 다~ 꼬시는 거야, 꼬시는 거….”
두 번째 시찰은 한율에겐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던 듯,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내내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늘 그러듯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창을 열고 밖을 구경하던 한율에게 집사가 기마대의 전술이 그리 맘에 들더냐 묻자, 한율은 조금 머쓱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기병들로 싸우는 걸 지난번에 보고선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번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지난번 전투라면…, 그 론지니아에서의 전투 말씀인가요?”
“예. 그 금색 갑옷의…. 이름이 뭐라더라….”
“만샤르차크.”
“아, 예예. 맞아요. 걔네들.”
갑자기 앞에서 요란한 말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마차가 들썩거렸다. 뭐가 앞을 가로막았는지 마차는 급정거를 했고 둘은 몸의 중심을 잡느라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예. 한율의 안전을 먼저 확인한 집사가 창을 열고 마부에게 이유를 물으려는데, 마차의 문이 벌컥 열어 젖혀졌다.
“으악…!!”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아이린이었다. 한율은 그녀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앉았다. 니가 왜 여기 있어? 하고 묻듯 하는 그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아이린의 입에서 그야말로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하실 건데요?”
“…? 예…?”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 한율을 향해 아이린이 호통을 쳤다.
“어쩌실 거냐구요!! 정말로 바이마샤르를 떠날 생각이세요?!!”
이건 호통이라기보단 토로에 가까웠다. 아이린은 신경질적으로 그에게 호소라도 하듯 계속 토해냈다.
“서로에게 득이 될 만한 결정이 뭔데요?!! 결국 사임하고 바이마샤르를 아예 떠나실 작정이세요?!! 뭐가 득인데요, 대체…!! 나는 어쩌라고…!!”
“일단 올라와요, 예? 아이린 아가씨…, 일단 좀 올라와 봐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 바이마샤르를 떠날 만큼 내가 그렇게까지 싫으냐고요!! 한율님 떠나면 난 대체 어떻게 하라고요…!!”
집사는 눈물바람을 일으키며 울부짖는 아이린을 일단 마차 안으로 태웠다. 상황을 보니 아이린은 또 말을 잡아타고 이곳까지 온 듯했다. 말씀들 나누시지요. 집사는 말을 끌고는 마부에게 기다리라고 시킨 뒤 자신도 그 옆에 섰다. 달려오느라 고생한 말을 몇 번 쓰다듬었다.
우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린을 겨우 달래고 달래서 집에 보낸 한율이 그 날 저녁 서재로 들어온 집사에게 처음 건넨 말은 추궁이었다.
“집사님이셨습니까?”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아이린의 일로 오후 내내 골머리를 앓았으니, 목소리까지 침전된 듯했다. 빨지도 않은 담뱃대에서는 이미 연초가 다 타고 불기가 사라져 있었다.
“…무얼 물어보시는 것인지요?”
“아이린 아가씨에게 서신을 보내서 제 시찰 일정을 알린 거, 집사님이셨냐고 물어봤습니다. 맞습니까?”
“예. 제가 그랬습니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당당히 대답하는 집사를 향해 한율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헛바람을 내뱉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집사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향해 다른 질문을 했다.
“아이린 아가씨가 싫으십니까?”
“무슨 생각이시냐고 물었습니다.”
“오히려 좋아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 지금 그런 이야기 할 기분이 아닙니다. 대답하세요. 왜 그러셨습니까?”
“전 이미 제 뜻을 위원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것 보세요!!”
한율은 책상을 쾅 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주먹에 책상에 우지끈 부서지며 움푹 패여버렸다. 집사는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마주서 있었다. 둘 다 키가 무척 큰 편이었기에 차이는 없었지만, 한율의 덩치가 워낙 컸다보니 그가 위협을 하는 꼴처럼 보였다.
“나 역시 내 뜻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아이린 아가씨를 충동질하시는 겁니까?!! 정말 이런 식으로 날 곤란하게 하실 겁니까?!!”
“아이린 아가씨는 놓치기가 참 아까운 분이십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럽니까?!! 다른 문제에 대해선 그렇게 밀고 당기기 수쓰기에 능란하시면서 왜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그렇게 어린애처럼 구십니까!!”
“어린애처럼 구는 건 제가 아니라 위원님이십니다.”
“뭐요…?”
“다른 걸 다 양보하시고 물러나 계신다면 그 하나쯤은 위원님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언제까지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세우실 참입니까?”
“내가 왜 나를 몰아세웁니까?”
“그럼 서로에게 득이 되는 그 결정이란 뭡니까?”
“그건 집사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관여해야 합니다.”
“그게 집사님하고 무슨 상관인데 관여를 하신다는 겁니까!!”
“…!”
문밖에서 헨야가 쿠키를 구워서 가져오려다 방 안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쟁반을 놓칠 뻔했다. 조심스레 쟁반을 내려놓고 귀를 가져가며 이게 무슨 일인지 엿들어 본다.
“짧은 기간이지만…. 저는 위원님과 함께 지내면서 위원님을 아들처럼 생각했습니다. 지금 떠나시면 위원님께선 또다시 오랜 시간을 방랑자로 사셔야 합니다. 한 번 정착하려다 이런 일이 생기면 다시 정착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
“게다가 여기에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 위원님께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지금 위원님께서 바이마샤르를 떠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실 겁니까?”
“….”
“뚫고 나가셔야 합니다. 피하지 마십시오. 위원님께선 편한 길로 가려고 하십니다. 혼자 다니면 좋습니다. 누구 신경 쓸 사람도 없고, 누구 하나 잔소리 할 사람도 없지요. 방랑이 몸에 밴 위원님 같은 분에겐 더 그럴 겁니다.”
“….”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사람은 홀로 왔다가 홀로 갑니다. 하지만 오고 가는 길을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잠시 머무를 적에는 누군가와 함께 지내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한율은 그가 말이 끝났다 싶자 자리에 털퍽 주저앉았다. 연초가 다 타버렸다. 털어내고 다시 연초를 꾹꾹 눌러 담고, 거기에 불을 붙여 몇 차례 빨아들였다. 집사는 그가 그러고 있는 모양을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난들….”
“….”
“난들 왜…, 떠나고 싶겠습니까.”
“그러니 물러서시지 말란 겁니다.”
“…. 하지만 나는 언젠간 떠나야 할 사람입니다.”
“… ….”
“론지니아 전투에서 수천의 마도들이 몰려왔던 건…. …. 아니 그만둡시다, 이건…. 어쨌든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라고 해둡시다.”
“… ….”
“시찰은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일정이 모두 끝나는대로 떠날 겁니다. 내 마음이 변하는 일은 없을테니, 집사님께선 더 이상 신경쓰지 마십시오.”
“왜 여기서 뭔가를 도모할 생각은 안하십니까?”
“…. 집사님께서 날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건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만…. 난 그런 욕심은 없는 사람입니다. 아시잖아요.”
“모릅니다.”
“이보세요…!!”
“저는 모릅니다. 위원님 마음에 그런 욕심이 있는지 없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때와 장소를 좀 가려서 하십시오. 더 이상 집사님께 언성 높이고 싶지 않습니다. 집사님도….”
“… ….”
“집사님도 제게는….”
“저 보기보다 나이 많습니다.”
“…, 압니다. 오래간만에 아버지 같은 분을 만났습니다.”
“… ….”
한율은 연초를 털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지요….”
“위원님은…, 적어도 제가 본 위원님은 참으로 강건한 분이십니다.”
“…. 칭찬 같지가 않군요.”
피식 웃는 한율을 향해 집사도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 강건함이 지독할 만큼 위원님 자신에게만 향하고 있습니다.”
“…. 또 그 말씀이십니까.”
“… …. 결례를 하였습니다. 그만 쉬시지요.”
“….”
집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서재를 나섰다.
안식일, 스클로도프 가의 저택.
루카스는 아침에 오자마자 피곤에 절어 잠들었다가 어머니의 호출 때문에 깨어났다. 시녀가 와서 그를 흔들어 깨우자 루카스는 귀찮다는 듯 몸을 이리 저리 뒤척거리다가 겨우 일어났다.
“나 어제 밤새서 피곤하다고 했잖아…, 왜?”
“마님께서 찾으십니다, 도련님.”
“에이 증말…. 알았어.”
시녀가 입혀주려고 들고 기다리고 있던 가운을 거칠게 나꿔채며 그는 대충 그것을 걸치곤 문밖으로 나섰다. 어머니는 1층 거실에서 아버지 메수트 스클로도프 여당 원내총무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그 꼴이 뭐냐?”
“자다가 일어났어요.”
“군인이란 놈이….”
“사흘 동안 한 숨도 못 잤습니다, 아버지. 시찰 때문에요.”
자리에 앉으며 연초부터 꺼내드는 그를 도끼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어머니가 이윽고 본론을 꺼냈다.
“너, 바슈미르 댁으로 생일 연회 초대장 보냈다는 게 사실이야?”
“…. 예.”
“너 제정신이니?”
기가 막히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어머니를 향해 루카스는 오히려 기가 막힌 건 나라는 듯 되물었다. 아니 왜요? 아이린 아가씨를 소개해 준 건 어머니였잖습니까? 그건 내가 그 집 딸이 어떤 애인지 몰랐을 때 얘기고…!
“언성 낮춰요, 부인…!”
“그 아이는 한율 공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알고 있어?”
“아닌 것 같던데요, 제가 보기엔…?”
“너 지난번에 꽃하고 편지 보내놓고 답신도 못 받았다면서.”
“아…, 아이 그건 또 왜…, 단토 부집사 어디갔어?”
짐짓 그를 당장이라도 한 대 칠 듯한 기세로 벌떡 일어나려던 루카스에게 어머니가 추궁을 계속하려 들자, 아버지가 이를 말리고 나섰다. 그만해. 루카스가 어린애도 아니고 왜 그래요, 계속…? 어린애가 아니니까 그러죠.
“그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아이가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초대를 다 했니? 어디 이유라도 좀 들어보려고 불렀다.”
“…. 마음에 들어서 초대한 거 아닙니다.”
“…. 마음에 들어서 초대한 게 아니면…?”
이번엔 아버지도 반응을 보였다. 루카스는 연초를 빨아 연기를 내뿜으며 몸을 뒤로 묻듯 기댔다. 제가 한 번 모욕을 당했다고 그냥 포기해버리면…, 아버지도 곤란하실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어머니의 표정은 확 펴졌지만, 메수트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채 그를 보고만 있었다.
“생각해주는 건 고맙다만…,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는 건 아니겠지?”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지금 시찰 때문에 정신없는데 그럴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하여튼 우리 아들 참 생각도 깊어, 그렇지 않아요, 자작?”
“바이마샤르에는 작위 같은 거 없어.”
“그래도 일단 받은 작위가 어디 가나요?”
“어쨌든 잘 해라. 실례되지 않게….”
“예, 아버지. 저 좀 더 잘게요.”
“그래, 깨워서 미안하다, 응?”
어머니는 그가 나가자 그런 줄도 모르고 자는 애를 깨워 괜히 괴롭혔다며 연신 싱글거리다가는 돌연 남편을 향해 정색을 했다. 자작께선 왜 작위를 자꾸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하세요? 입을 비죽거리는 부인을 향해 곁눈질을 보낸 그는 책장을 넘기며 찻잔을 집어들었다.
“그 자작 작위 때문에 이스마르에서 여기로 망명해 온 거 아닙니까…. 난 그런 이야기는 이제 지긋지긋해요.”
“그래도요…!”
“왕위 계승이고 뭐고…, 왕궁 안에서 그 권력 조각이라도 얻어보자고 머리 터지게 싸우는 동안 시민들이 어땠는 줄이나 알아요? 거기에 비하면 바이마샤르는 얼마나 좋습니까?”
“흥, 천박한 장사꾼의 나라 따위…. 차라리 울리프 령으로 가자고 했잖아요. 그랬으면…, 루카스도 지금쯤은 벌써 혼인도 했을 테고….”
“오래 전 일입니다. 그쯤 해 두세요.”
“… ….”
엄마는 못내 아쉬운 듯 한숨을 짧게 내쉬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아이린 바슈미르 아가씨에게.
지난번에 보내드렸던 꽃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깊이 사죄드립니다. 허락도 없이 갑작스러운 선물과 편지를 보내드려 불편케 해 드린 점 반성하고 있습니다.
무례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두 번째 안식일 다음날 열리는 제 생일 연회에 아가씨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제게 가장 뜻 깊은 이 날 아이린 아가씨께서 함께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루카스 스클로도프 드림.-
“이번엔 좀 담백하게 썼다?”
“….”
아이린보다는 엄마가 더 신이 났다. 초대장을 던지듯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그녀의 팔을 찰싹 때리곤 엄마는 그것을 집어 들어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이제 보니 글씨를 아주 잘 쓰네…, 역시 좋은 집안이라…. 아무 반응도 없이, 아니 오히려 냉담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쿠키만 씹는 아이린을 보며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얘를 어째야 하나….
“아이린. 이제 그만 한율 공에 대해서 미련을 접어라.”
“….”
“지난번에 너 그렇게 해서 돌려보냈는데도 이렇게 생일 연회에 초대장까지 보낸 거 보면, 아직은 루카스가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거 아니겠니?”
“….”
“생각해 봐. 루카스랑 한율 공이랑. 훨씬 젊은데다 더 잘생기기도 했지. 게다가 능력도 있고. 그것뿐이니? 지금이야 망명자라지만 그래도 그 집안이 왕족 집안 아니니, 왕족…!”
루카스의 집안은 본래 이스마르의 왕족이었다. 왕실 직계와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누대에 걸쳐 왕실에서 자손이 부족해지자 왕의 후사를 방계에서 찾기 시작하여 그 집안도 왕위 승계 구도에 끼어들었다. 그러다 20년 전의 전쟁으로 왕위 승계 순위에서 가장 윗줄에 있었던 전 국왕의 조카손자가 죽자 왕족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 쟁투가 일어났다. 루카스의 부친인 메수트 스클로도프는 거기에서 밀려난 후 권력을 위한 투쟁에 환멸을 느끼고 공화정인 바이마샤르로 정치적 망명을 해 온 것이었다. 엄마는 그 점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왕족이든 황족이든 그런 것을 신경 쓸 아이린이 아니었다. 아무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나서는 그녀의 뒤에 대고 엄마가 엄포를 놓았다.
“너 이번엔 꼭 가야 된다? 어디 도망갈 생각 말고 집에 꼭 붙어있어! 엄마가 직접…, 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엄마는 분을 가라앉히듯 헛바람을 내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옆에서 시종장이 거들었다.
“아가씨는 그런 것에 신경 안 쓰실 걸요?”
“…. 정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저러다 정말 크게 상심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네요.”
“그러게….”
이튿날 저녁, 루카스의 생일 연회는 스클로도프 가의 저택 연회장에서 열렸다. 바이마샤르에서는 드물게 작위를 가진 ‘진짜’ 귀족 자제의 생일 연회답게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모여 연회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뛰어난 통솔력과 지휘력으로 젊은 나이에 대대장에 해당하는 사령의 위치에 오른 그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자 모여든 군부의 젊은 인사들이 반 정도였지만, 진정으로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이들도 그만큼 많았다.
“많이도 모였다. 정말….”
“루카스 사령님은 병사들에게도 각별하시니까….”
“오늘 대대에도 술이랑 음식을 보내셨다며.”
“군장급들까지 초대를 하셨으니….”
아로사와 나자르, 차프라도 여기에 자리해 있었다. 그들은 루카스와 마주치자 칼같이 군례를 올렸으나, 루카스는 멋쩍은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럴 것 없어. 여기서까지 무슨 군례는…. 그래도 사령님이신데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맙다. 건배를 한 후 루카스는 차프라에게 핀의 안부를 물은 뒤 아로사와 나자르를 칭찬했다.
“두 사람 참 대단해. 여자인데도 전투부대를 지휘하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니라는 소리들이 들려.”
“사령님도 참…, 전투부대라뇨. 의회경비대인걸요.”
“전투부대지. 의회경비대가 얼마나 군기가 센 지는 전군이 다 알아.”
“하하…, 남녀가 따로 있겠습니까, 사령님.”
“따로 있지. 따로 있고말고. 보통 여군 부대들은 행정직에 있잖아. 아니면 최후방 방어선의 병참을 맡거나…. 그런데 두 사람은 그 험하고 투박한 놈들을 다루면서도 남자들보다 더 잘한다더군?”
“남자들은 어린애 같으니까요.”
“하하하…! 그런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도착하는 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반색을 띠는 루카스의 얼굴을 보고는 아로사와 나자르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눈에 익은 마차였다. 루카스는 들고 있던 잔을 시종에게 맡겨두고는 얼른 밖으로 나가 마차에서 내리는 아이린을 맞이했다.
“아이린 아가씨…!”
“…. 안녕하세요….”
“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 생일…, 축하드립니다.”
어색하게 예의를 갖추는 아이린의 옆에는 선물을 든 시녀가 따르고 있었다. 미리 알지 못해서….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와주셔서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화색이 가득한 루카스는 아이린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당황하는 그녀의 기색에는 아랑곳 않으며 손을 잡은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린이잖아?”
“야, 뭐야…. 아이린하고 루카스 사령님하고 어떻게 된 거야?”
“낸들 아니? 안식일이나 돼야 집에 들어가는데, 너나 나나….”
“그럼 한율 사무랑님은 어떻게 되시는 거야?”
“넌 아직도 한율 공 얘기야?”
아로사와 나자르만큼이나 자리한 다른 사람들도 술렁거렸다. 참석한 대부분은 군부의 젊은 지휘관들이었기에 연말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아이린이 누구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루카스는 몸을 도사리며 어색하게 따라 들어오는 아이린을 그들 앞에 세우고 소개했다.
“자, 다들 잠시 이쪽을 봐주십시오!”
그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모두의 시선은 그쪽을 향해 있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긴 목선을 드러내고, 쇄골까지 살짝 드러나는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와 옅은 보라색의 아이리스 문양이 수놓아진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남녀를 불문하고 군인들로 득시글대는 이 연회장에서 단연 돋보이고 있었다. 특히 드러난 목 언저리의 피부에 살짝 얹힌 듯 간결하고 세련된 목걸이가 아이린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아로사와 나자르도 아이린이 저렇게 예뻤었냐, 나도 몰랐다 하며 허허 웃었고, 차프라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게 평소에 보던 그 아이린이 맞나 하는 얼굴이었다.
“오늘 제 생일을 맞아 특별히 초대한 손님입니다. 오실지 안 오실지 사실 조마조마했는데,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여당 대표이신 핫산 바슈미르 의원님의 따님 아이린 바슈미르 양이십니다.”
루카스에게 한 손을 잡힌 채 수십 명의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아이린은 얼굴이 붉어진 채 어색하게 인사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그녀가 루카스와 혼약이라도 한 사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로사는 저럴 수 있나 하는 얼굴로 기가 막혀했고, 나자르는 씁쓸한 웃음을 띄우며 잔을 기울였다.
“야, 어떻게…. 아니, 한율 공이 좋다고 밤중에 말 타고 갈 땐 언제고….”
“… ….”
어처구니없어하는 아로사를 쳐다보는 나자르의 얼굴은 ‘니가 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심상치 않은 그 표정에 아로사가 왜 그러느냐 묻자, 나자르는 핀잔을 주며 머리 좀 쓰라고 한 마디 내뱉은 뒤 잔을 비워버렸다.
“뭔데…?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너 루카스 사령님이 어떤 분인지 몰라? 술수로는 고수 중에서도 최고수급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잡고 소개하면서, 아이린이 아무것도 못하게 하려는 거라고.”
“설마….”
“어휴…. 그 칼 쓰는 것만 하지 말고 책 좀 봐라, 책 좀…!”
“에이 진짜… 책 본다고 그런 게 나오냐?”
루카스와 아이린의 사이는 삽시간에 군부에 소문이 퍼졌다. 군대란 곳이 본래 몸 쓰는 일을 빼면 입만 움직일 힘이 남아도는지라 소문이 몹시 빠른 법이다. 아로사와 나자르는 한율을 찾아가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로사는 분개했고, 나자르는 차분하게 그에게 어쩔 생각이냐 물었다.
“… …. 뭘 어째, 어쩌긴….”
말없이 듣고만 있던 한율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한마디 툭 내던지곤 담뱃대만 빨 뿐이었다. 태연하게 자신들을 쳐다보며 연기를 내뿜는 한율에게 아로사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뭔가 대책을 세우셔야죠~! 아이린이 사무랑님께 마음 있는 거 뻔히 아시면서 이대로 당하실 건가요?!”
“아로사…!”
“….”
한율은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연기에 가려진 그의 표정은 약간 무거운 듯도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나자르가 아로사의 손을 잡아 진정시킨 뒤 그의 마음을 물었다.
“전 위원님께서도 잘못이 있다고 봅니다.”
“무슨 소리야, 나자르!”
“위원님께서 아이린에게 마음이 없으시다면 확실하게 거절을 해주시는 편이 옳습니다. 물론 아이린의 성격이 저돌적이고 엉뚱한 데가 많아서 쉽지는 않으실 거란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맞다면 위원님께서는 그저 피하기만 하실 뿐, 아이린에게 확실하게 의사 전달을 하진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
“나자르, 사무랑님께 무슨 무례야?!”
“너야말로 언제까지 위원님께 사무랑님, 사무랑님 할 거야?”
“너 정말…!”
“나자르 말이 맞아.”
둘은 한참 만에 입을 연 한율에게로 동시에 시선을 옮겼다. 연초를 털어낸 한율은 담뱃대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사무랑이 아니라 보위부 군사자문이야. 사무랑이라니, 당치도 않지. 사무랑님…! 원래 말투가 냉소적인 구석이 있는 한율이었지만 그 말이 조금은 비꼬는 투로 들렸다. 그러나 나자르는 내색하지 않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로사도 나자르를 좀 닮는 게 어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환은 이제 없는 나라다. 망한 지가 20년이 넘었어. 게다가 네 나이로 보건대, 그 끔찍한 살겁, 기억도 못할 것 같은데 참 질기게도 원한을 가슴에 품고 사는 거 같아.”
“…!!”
아로사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졌고, 나자르의 표정에도 불쾌한 기색이 깃들었다. 그들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율은 양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안 그래? 하고 묻는 듯 한 몸짓. 얼굴이 붉어져 이마에 핏줄까지 선 아로사의 손을 잡고 진정시키며 나자르가 차가운 투로 물었다.
“그럼 위원님께선 그 일로 인한 마도들에 대한 원한 따위는 조금도 품고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원한…? 그런 걸 갖고 있으면 죽은 사람들이 살아서 돌아오나…?”
“이봐요, 한율님!!”
아로사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며 언성을 높이자 나자르가 다시 그녀를 붙들고 앉혔다. 분을 삭히지 못하고 식식거리는 아로사의 팔을 꽉 붙들고 나자르가 다시 추궁하듯 묻는다.
“그렇다면 위원님께서 그 다섯 자루의 검을 차고 다니실 이유도 없을 것 같은데요?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그렇게 우리 민족의 형식을 갖추고 다니시는 걸 보면, 진심은 아니신 듯 한데요.”
“난 진심이야. 원한 따위 없어. 칼자루 다섯 개도 길 떠날 때 스승님이 가져가라기에 그냥 푸대에 담아서 지고 다녔어.”
아로사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져 핏발이 서고 있었다. 나자르 역시 가늘게 떨며 분기를 삭히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율은 여전히 태연한 안색으로 그들을 향해 양팔을 다시 벌리며 아무것도 없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남은 게 뭐가 있어? 땅이 있길 해, 사람이 있길 해? 그 때 그러고 있던 거야 공식 석상이니 어쩔 수 없이 폼이나 잡자고 그랬던 거지. 난 저 칼자루들 뽑아 본 일도 없어. 착각들도 자유다, 참…, 허허허….”
“난 더 이상 못 듣겠어.”
아로사는 그에게 대들고 따지는 대신 벌떡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고, 나자르는 그 자리에 앉아 한참을 침묵하며 할 말을 정리하는 듯했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져 당장이라도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한 마디라도 찔러주고 나가야 될 듯했다.
“저 역시…. 훌륭하신 아버님과 어머니를 얻어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원한 같은 건 그리 많지 않은 편이지요. 하지만 아로사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
“아로사처럼 원한을 마음에 오랫동안 새기고 사는 사람들은 그 심지도 그만큼 곧기 때문이죠. 저는 적어도 한율님 만큼은 그런 저희들보다는 뭔가 더 실제에 가까운 말씀을 해주실 줄…, 아니 좀 더 옳은…, 아니….”
생각이 정리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인지 나자르는 답지 않게 말을 계속 번복했다. 한율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쨌든…. 저와 아로사의 이 차이에 대해서 뭔가 좋은 답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
“위원님은 그저 도망치는 분이셨군요.”
“… ….”
“….”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초가 다 타서 꺼지자 나자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율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 이제 시찰 때 뵙고 나면…. 뵐 일이 없겠군요. 더 이상 위원님을 찾아 뵐 일은 없을 것으로 압니다. 그럼….”
그녀는 깍듯이 군례를 올리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서재를 나갔다. 나자르가 나가고 나서도 한율은 굳어버린 듯 앉은 모습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아로사와 나자르가 돌아가는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정적이 찾아올 무렵 문을 두드리고 집사가 들어왔다.
“두 아가씨는 가셨습니까?”
“….”
“위원님.”
“….”
집사는 그의 안색이 심상치 않자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촛불을 켤까요? 그대로 두십시오….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집사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그에게 인사를 한 후 서재를 나갔다. 한율은 어렸을 적 눈앞에서 보았던 참혹한 일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마을의 집이란 집은 모조리 불타고, 평소에 나다니던 길 위에는 살점과 뼛조각들이 핏방울과 함께 어지럽게 흩어졌다. 마도들이 난무하며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먹는 가운데 뇌수가 터져 나오고, 안구와 혀와 손가락이 잘려 이리저리 어지럽게 떨어지는 그 가운데 여섯 살 난 한율이 서 있었다. 동공이 초점을 잃은 채 어린 한율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도들의 비호를 받듯 마을을 살점과 뼛조각들을 밟고 다니며 사람이 살아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수십의 마도들이 달려들어 살아있는 이들을 꺼내 사지를 찢어발기고 그 가죽을 벗겨 내장을 뜯어먹고 뼈를 발라냈다. 지옥 같은 그 광경 속에서 오로지 한율만이 입가에 광기가 들린 웃음을 흘리며 생기가 느껴지는 곳이면 가축이든 사람이든 가릴 것 없이 가리켜 마도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원한….”
한율의 입에서 가늘게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내 입꼬리에 쓰디쓴 웃음이 배었고, 그는 쿡쿡쿡 하고 웃음을 삼키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에게 원한을 가진단 말이냐…. 속으로 중얼거리는 한율. 그 엄청난 살겁, 온 나라가 망할 정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처참하게 도륙한 학살의 한 가운데에 그 자신이 있었다. 눈을 가린 손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위원님….”
“… ….”
헨야였다.
한율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린 채 울음만을 삼켜버렸다. 지난 일을 생각하느라 누가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어두웠지만, 달빛에 비친 한율의 얼굴이 반짝이고 있어 헨야는 그가 울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심각한 모습이었으나, 단순히 심각한 모습이라기엔 너무나 무거워 보였다.
“… …. 우세요…. 괜찮아요….”
헨야는 작은 몸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가슴에 품었다. 젖가슴이 이마에 닿으며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감쌌고, 한율은 눈을 가린 손을 내렸다.
“….”
“….”
한율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은 헨야의 가느다란 팔에 가만히 얹었다. 조금은 창피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다…, 다 울었어요. 내가 좀… 창피한 꼴을 보였네….”
“… ….”
헨야는 얼굴을 쓸어내려가던 손으로 한율의 턱을 받치며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럽지는 않았기에 한율도 놀라진 않았다. 깊진 않았지만 긴 입맞춤이 끝나고 입술을 뗀 헨야는 시녀복 차림이 아니었다. 레이스가 달린 슬립은 소매가 없었다. 달빛에 비쳐 슬립 안으로 헨야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를 본 한율의 얼굴이 굳어졌다.
“…. 집사가… 시켰습니까…?”
“… ….”
헨야는 말없이 목끈을 풀어 슬립을 발밑으로 떨어뜨렸다. 파르스름한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몸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린애 같진 않았다. 적당하게 솟아오른 젖가슴과 약간 큰 듯한 젖꼭지, 그리고 주위에 옅게 흩어진 유륜을 지나 한율의 시선은 어느새 그녀의 몸을 훑고 있었다. 작은 키였으나 골반은 꽤 높은 편이었다. 짧은 허리에서 골반이 튀어나와 약간 일찍 벌어지는 헨야의 허리선을 타고 아랫배에 시선이 닿자 헨야는 약간 몸을 도사렸다. 일자 형태로 돋은 음모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
“원하신다면…. 절 가지셔도 돼요.”
이렇게까지 나오는 여자에게 모욕을 줄 만큼 한율은 그다지 매정한 편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 날만큼은 다 잊어버리고 욕정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도 전에 없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는 이날 밤 헨야를 안았다.
이튿날 새벽 한율은 평소와 다름없이 상쾌한 기분으로 뒤뜰에서 윗도리를 벗은 채 수련을 하고 있었다. 주먹을 내지르고 발차기를 하는 대신 그는 목도를 들고 검무라도 추듯, 눈을 감은 채 기운이 흐르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헨야! 너 진짜야?!”
“뭐야, 얘네들…. 소식도 빠르네.”
“어때, 어때?”
“몸 진짜 좋아? 잘해?”
“돈들이나 내, 빨랑~. 내기 얘기는 쏙 빼버리고 이것들이….”
“여우같은 게…. 자…!”
시녀들은 은화를 하나씩 꺼내어 헨야에게 내던지듯 건넸고, 그녀는 신나라하며 그것들을 받아 품에 챙겼다. 가짜 은은 아니지? 이게 속고만 살았나~, 야 빨리 말해봐. 어때? 어땠어? 잘해?
“음…. 응!”
“어머머, 어떡해, 어떡해~ 잘한대~!”
“뭘 어떡해, 해봐야지.”
“꿈도 야무지다~.”
“해보니까….”
헨야가 말을 꺼내자 저희들끼리 신이 나서 손뼉을 치며 수선을 떨던 시녀들이 이내 약속이나 한 듯 그녀에게 집중했다. 역시…. 남자는 힘이야, 힘…!
“그 봐, 그 봐…. 그 덩치를 보면 힘세게 생겼잖아.”
“헨야, 그거는, 그거는…? 그것도 커…?”
“음….”
헨야는 또 뜸을 들인다. 그러더니 돌연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척을 했다.
“토할 뻔 했어.”
“어머, 토할 뻔 했대~!”
“그 봐, 남자는 기술이고 뭐고 간에 어쨌든 크고 세야 돼~.”
“뭣들 하는 건가, 지금…? 위원님 벌써 수련 중이신데 아침 준비들 안 해?”
시녀들이 소란을 떨고 있는 것을 지나는 길의 집사가 해산시켜버렸다. 다들 부산을 떨며 입을 막고는 제 위치로 바삐 움직였다. 그나저나 헨야는 저래서 혼인이나 하겠어? 내버려 둬라~, 저러다 나중에 누구처럼 새끼 시녀들 모아놓고 남자 후린 무용담 늘어놓으며 추억 삼겠지….
“… ….”
지난밤의 일이 궁금하긴 했지만 집사는 딱히 묻지 않았다. 한율도 그 일에 대해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시락 동쪽 성문 밖의 제 31 병참연대로 가실 예정입니다. 그 날의 일정을 말하는 집사의 말에도 한율은 고개만 끄덕거릴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조금 빠른 듯합니다. 일단 잡아놓은 일정이긴 합니다만….”
“…. 하는 수 없지요. 얼른 끝내버려야지, 눈치 보여서 못해먹겠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
“…, 의회의 눈치를 살피시는 거라면 그만두셔도 좋을 듯합니다.”
“의회가 아니라…. … ….”
“….”
“…, 관둡시다.”
“…. 정치적으로도 그렇다는 겁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한율을 따라나서며 집사가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한율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돌아보았고, 집사는 그에게 권고하듯, 차라리 공격적으로 생각을 바꿔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바루나 국왕이 바이마샤르를 견제하려 든다 해도 선봉에 서서 막아낼 수 있도록…. 한율은 되지도 않을 소리라는 듯 피식 웃었다.
“내가 뿌리내릴 토양은 이곳이 아닙니다.”
“위원님…!”
“그만하십시오. 더 이상 막으려 들면 어느 날 훌쩍 사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절 생각하시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이오.”
한율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무거워져 있었다. 역시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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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전편이 어디까지였는지 항상 보고 올리는데... 16부를 봐버렸던 것 같슴다.ㅡ.ㅡ;;;;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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