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앤더슨! 기다려! 기다려봐!”
“놔! 아젠티를 찾으러 가야한다고! 놔! 말리지 마!”
아젠티. 그녀 하나만을 생각하고 바라며 달려온 길이다. 아젠티만 있다면, 그녀만 있다면 전장의 악몽도 패터슨의 죽음으로 겪은 슬픔도 아젠티만 있다면 모두 다 치유되리라 생각하고 쉬지도 않고 달려온 길이다. 하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라파엘 왕자와 그의 기사들에게 강제로 끌려갔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들로선 그 행방을 찾을 수도 찾을 방법도 없어. 그리고 운이 좋아 찾는다 해도 아젠티와 마을 여자들을 구할 방법은 없다고! 기사들한테 맞아죽지만 않으면 다행일 테지….”
“하지만! 난, 난 가야해! 죽는다 하더라도!”
“그래, 가! 가는 걸 말리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지금 너처럼 서둘면 아무것도 못해. 우선은, 우선은 생각을 좀 해보고,”
“생각은 무슨 생각. 방법이 없다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자를 찾을 거야. 찾아서 왕자를 찾아서 복수하고 말거야. 전쟁을 일으키고 패터슨을 죽이고 아젠티마저 빼앗아간 왕자에게 복수하고 말거야. 반드시 복수할거야.”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너무도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분명 방법은 있을 거야. 없다면 만들면 돼. 하지만 지금은 안돼. 왕자를 찾을 수도 없고 지금 우리의 신분으론 이곳을 벗어날 수도 없어.”
“그럼 어쩌라는 거야?”
“용병이 되는 거야. 아직 우리가 살아 온 걸 영주는 모를 테니 신분을 숨기고 용병이 되는 거야. 용병이 된다면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을 테니까, 아젠티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 용병이 돼자.”
앤더슨의 얼굴에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해. 돈도 필요하고 수도의 용병길드로 가야할 테니까 여행도구도 필요하고. 자,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우리 한번 모험을 해보는 거야!”
“응, 고마워 맥키….”
(10)
“휴, 드디어 내일이면 수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고 내일 일찍 출발하자.”
맥키언은 여행자를 위해 마련된 야영지에 짐을 내려놓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제 드디어 수도구나. 이제 몬스터들의 공격은 없겠지?”
뒤따라 온 앤더슨이 맥키언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앤더슨과 맥키언의 몰골은 그야말로 누더기 그 자체였다. 전신엔 여기저기 생체기가 가득해 성한 곳이 없었고 옷은 군데군데 찢어지고 더럽혀져 있었다.
“아아, 이곳은 수도와 하루거리고 사람들의 통행도 잦으니까, 오크나 고블린들도 쉽게 다다오진 않을 거야.”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만난 몬스터들의 수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았어. 지금껏 쭉 수도로 향하는 가장 보편적인 길로 왔는데도 말이야.”
“걱정하지 말고 육포나 씹어. 나타나봤자 오크나 고블린 뿐이잖아. 많은 수로 몰려다니는 것도 아니고.”
앤더슨의 말에 맥키언은 불에 구운 육포를 앤더슨에게 건네며 피식 웃었다.
“아, 고마워. 그나저나 내일은 여관에서 뜨뜻한 음식도 먹을 수 있겠구나. 나흘 동안 육포만 씹었더니 이빨이 다 아프다니까. 뭐 전장에서의 그 돌덩이 빵보다야 훌륭하지만….”
앤더슨은 노릇노릇 잘 구워진 육포를 돌돌 말아 한입에 우겨넣었다. 하나씩 씹으려니 짜증이 날 것 같았기 때문 이였다. 그때였다. 멀찍이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여어~ 여행자이신가 보군요. 같이 불 좀 쐬도 될 런지요?”
앤더슨과 맥키언이 먼저 선점해 있던 야영지에 나타난 한 무리의 인파는 남자 셋과 여자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두 제각기 독특한 스타일의 무구들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봐서는 용병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물론이지요. 그러라고 만들어진 야영지 아니겠어요.”
“하하,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맥키언의 말에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훤칠한 키에 롱소드를 옆구리에 차고 있는 금발머리의 청년이 감사를 표하며 맥키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를 따라 붉은 머리에 바스타드 소드를 등 뒤에 둘러멘 여자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도 제각각 맥키언이 피워놓은 모닥불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용병….이십니까?”
“그렇소. 우린 모두 용병단의 일원이고 난 용병단의 수장인 게리라고 한다오. 지금 우리는 의뢰받은 일을 마치고 수도의 용병길드로 대금을 받으로 가는 길이지요. 하하하핫.”
앤더슨의 질문에 게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금발의 사내는 유쾌한 듯 웃었다. 물론 앤더슨의 질문 때문이 아니고 임무를 마치고 받을 그 결실에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그런데 댁들은 여행객들인가 보오?”
용병단 일행 중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물었다. 그리고는 연신 혼자 흐뭇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게리의 모습을 한심한 듯 쳐다봤다.
“예, 뭐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 그래, 목적지가 어딘가? 보통의 여행자 차림은 아니네만?”
“수도입니다. 수도로 가서 용병이 되려고요.”
“아하, 그렇구만, 역시 그렇구먼. 요즘 같이 몬스터들이 날뛰는 때에 여행객이라면 단 둘만 다니진 않을 테니까. 그나저나 둘 다 실력이 보통이 아닌가 보군?”
“아뇨. 운이 좋았죠. 근데 요즘 몬스터들이 많이 날뛰나 보죠?”
“근데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모두 통성명이나 하죠? 전 라나라고 해요.”
맥키언과 검은 로브의 사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붉은 머리의 소녀가 대화가 좀 딱딱해져 가는 듯하자 둘의 대화를 끊고 끼어들었다.
“아,그렇구만.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난 올드만이라고 하네. 보다시피 마법을 쓰는 마법사이지. 하지만 고위급마법사는 아니니 너무들 놀라지 말게나.”
“예에?”
“마,마법사!”
앤더슨과 맥키언은 마법사라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사라는 것이 기사에 비해 흔치 않기도 했지만 농노에 불과한 이들이 마법사라는 존재를 보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허허, 놀라지 말래도. 난 그리 대단한 마법사가 아니라네. 어려서부터 몇 십년간 마법만을 배워 왔는데 이제 겨우 3클래스 마스터로 마법사 호칭을 받았을 뿐이지. 후후.”
마법사 올드만의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어렸다.
“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올드만 당신이 아니라면 이 용병단은 상상할 수도 없죠. 하, 자자, 그리고 내 소개는 이미 했고 저쪽에 있는 저 치는 오닐이라고 하지. 자, 그럼 당신들의 이름은 뭐요?”
어느새 다가온 게리가 침울해 있는 올드만의 어께를 양손으로 감싸며 유쾌하게 일행의 소개를 마쳤다.
“앤더슨이라고 합니다…”
“맥키언입니다…”
“근데 용병이 되려고 한다고요?”
라나가 물었다.
“예. 수도의 용병 길드로 가서 승인을 얻으려고요…”
“오호…이봐요 대장. 괜찮지 않아요, 이 둘?”
라나는 맥키언의 대답에 올드만을 위로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게리를 향해 소리쳤다.
“뭐, 나야 괜찮지…실력도 보통은 되는 것 같고, 하지만 저들의 의사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게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라나와 게리의 자리는 거의 지척에 있었다. 그런데도 라나는 소리를 질러 말했기 때문에 게리는 귀가 아팠던 것이었다. 목소리 큰게 뭐 자랑이라고…쯧쯧…
“무슨 말인가요?”
“아, 당신들 우리 용병단에 들어오지 않을래요? 수도로 가서 승인 절차를 거치는 것 보다 나을텐데? 절차가 여간 까다로운 것도 아니고, 마침 우리도 새로운 단원을 모집 중이었거든요.”
“흠…”
맥키언은 라나의 제안에 고민하는 척 하며 앤더슨을 슬쩍 바라 보았다. 자신 보다는 앤더슨의 의사가 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앤더슨도 맥키언의 시선을 느꼈는지 맥키언을 바라보며 망설이는 눈짓을 보냈다. 앤더슨의 입장에서는 이 용병단의 규모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지금 자신은 라파엘 왕자와 그의 패주병들의 행방을 찾아야 했고 그게 어렵다면 전쟁이 발발 했을 때 전쟁터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했고 그 정보를 보다 빠르게 들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규모 용병단은 어렵더라도 최소한 중소규모의 용병단에는 들어가야지 군상의 호위로라도 전쟁터에 들어가 아젠티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리라는 남자가 이끄는 용병단은 단 4명에 불과했다. 물론 마법사까지 있는 꽤 강한 파티의 용병단인 듯 보였지만 앤더슨의 기대치에는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다.
“뭐, 싫음 할 수 없지만 용병 길드로 가서 승인 절차를 거친다고 해도 일류 용병단엔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거예요…물론 A등급이나 B+등급을 받는다면 몰라도 처음엔 다 소규모 용병단에서 경험을 쌓는게 대부분 이죠…그리고 우리 용병단이 이래 보여도 실력 하나는 최고라구요…”
라나가 앤더슨과 맥키언의 눈치를 보고 속마음을 읽은 듯 불쾌하다는 투로 틱틱 거렸고 게리와 올드만이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라나의 성격이 원래 그런 것 같았다.
단순무식 붉은 마녀…
앤더슨과 맥키언은 나중에야 알게되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라나의 닉네임이였다.
“아아,아니…그게 아니라…”
“됐네요~흥!”
라나의 살벌한 태도에 당황한 것은 앤더슨과 맥키언 이였다. 싫다고 거절의 의사를 표현한 것도 아닌데 앤더슨과 맥키언은 억울했다.
“저기…라나씨…저흰 그러니까, 싫다는 것이 아니라…”
“오! 그럼 입단 하는거예요? 하하하…역시, 자알~ 생각했어요, 하하하하~ 앞으로 잘 지내봐요, 맥키언 그리고 에…앤더슨? 맞죠? 그리고~ 라나씨가 뭐예요~ 이제 한식군데~ 그냥 라나라고 불러요 라나~ 음…확 이참에 말도 놔 버릴까? 몇살이야 둘다?”
“윽..그러니까..우린….”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말들. 마치 패터슨이 다시 환생 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라나는 그렇게 한참을 혼자 신나 떠들어 댔고 앤더슨과 맥키언은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선 게리와 올드만이 불쌍하다는 눈으로 앤더슨과 맥키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자, 이럴게 아니라, 어서 입단 계약서 작성해요, 계약서~ 어이~ 대장, 계약서 줘요!”
“하하, 라나, 진정하라고 진정~ 심호흡 하고..후~ 후~ 따라 해봐. 이러니 단순무식 붉은 마녀라는 소릴 듣지…”
“뭐욧?!”
“큭큭…”
게리의 말에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노려보는 라나였다. 더욱이 라나를 화나게 하는건 혼자 구석에서 자신의 검을 묵묵히 닦고 있던 오닐의 웃음이었다.
“이이…”
“자자, 일단 난 당신들을 강제로 입단 시킬 맘은 없으니 안심 하시요. 뭐, 우리 쪽에선 새로운 단원이 필요하지만, 그리 급한 것도 아니고, 실력이 뛰어나다면 굳이 우리 용병단에 드는 것 보다야 심사를 거쳐 등급을 받은 후 더 큰 용병단에 입단 하는 것이 더 나을 테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다만…”
“다만?”
“후…”
맥키언은 잠시 한 숨을 내쉬고 앤더슨을 힐끔 보고는 말을 이었다.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 그런 것이라면 정보 길드니 도둑 길드에 의뢰하면 될 것이 아니요?”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데려간 자들의 정체는 알지만 찾을 수 없고, 어디 있는지 알아도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자들 입니다…”
“전쟁…에 관한 것이요?”
올드만이 맥키언의 말을 알아듣고 물었다.
“그래서 우린…힘있는 집단이 필요합니다…그래야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을테니까요…”
“흠…전쟁통에 빼앗긴 이들이 있는 거구만…하긴 이렇게 작은 용병단으로서 전쟁터 근처의 의뢰를 받긴 힘들지…이거 더 권하긴 힘들겠는걸?”
“죄송합니다…”
앤더슨이 정말로 죄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냐, 아냐…억지로 권한 우리한테 잘못이 있지, 안그런가 대장?”
“하하…그렇죠…그 중 누구누구의 잘못이 가장 크죠…”
“뭐요? 그럼 나한테 잘못이 있다는 건가요? 쳇~ 남자들이 쪼잔하긴~ 용병단이 작아서 맘에 안들면 키우면 될 일이지~ 쳇~ 입단 하는 줄 알고 여기 육포 다 먹어버렸는데…물려달란 말은 안하겠죠? 이랬다 저랬다 한 소심한 당신들 탓이니까~”
“하하..하…예…괜찮습니다…하하…”
앤더슨과 맥키언은 텅 비어 있는 육포 주머니를 보고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저 붉은 머리 여자에겐 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로나 힘으로나…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내일이면 수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요. 같은 용병길드라 하더라도 의뢰를 받는 곳과 심사를 하는 곳은 방향이 다르니까…”
“예, 그러도록 하죠…”
“후후, 그럼 일이 잘 풀리길 바라겠소…그리고 만에 하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우리 용병단에 들어오시요. 언제든 환영이니…”
“예, 감사합니다…그럼…”
앤더슨과 맥키언은 하룻밤의 인연이 섭섭했지만 게리 일행과 작별인사를 하고 발길을 돌렸다.
“참! 우린 다음 의뢰가 있을때까지 ‘엠마의 여관’에 묶을 거요~ 거기서 키틀란 용병단을 찾으시요~ 하하~ 또 봅시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우리 용병단에 들어올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흠…모르지 또…저 두사람 또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그리고 처지가 불쌍하잖아…나하고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아…”
“쳇~ 웃겨~ 비슷하긴 뭐가 비슷해요? 멍청해서 몰락한 귀족 주제에~ 불쌍한 처지의 사연만 들으면 자기하고 비슷하대지~ 흥!”
“윽…”
“하하하…”
“큭큭…..”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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