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TWO - the beginning
" 흐읍~! "
수분을 머금어 마른 회초리보다 더 무거워지고 유연해진 버치의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페릴의 연약한 피부 위에 붉은 자국들을 남겼고 거기서 느껴지는 아픔은 페릴이 헛바람을 삼키게 만들었다.
" 으읍! "
그러나 페릴의 피부가 얼마나 약한지 버치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기게 될지는 베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어떻게 하면 맘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건방진 하녀가 다시는 그런 행동을 못하도록 만들 수 있을지 손에 든 도구를 어떻게 사용해야 더 고통을 줄 수 있는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 쉬이~익 ]
" 아악! "
베스의 손에 들린 버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페릴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유린하고 있었다. 단순히 부딪치는 것만 아니라 베스의 팔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그녀의 엉덩이를 쓸면서 지나가는 버치는 페릴에게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만들었다.
" 아아악! "
페릴은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고통과 그 후에 이어지는 피부를 할퀴는 듯한 고통에 정신 없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비명과는 상관없이 매질은 더 강하고 빠르게 계속될 뿐이었다. 그녀의 작고 약한 몸은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매질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그녀의 행동을 구속하고 있는 형틀 때문에 의도한 만큼의 목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 쐐애~액 ]
" 아악! 용서해 주... 악~! 주세요! 제발! "
이미 페릴의 엉덩이 위에는 수없이 많은 맷자국이 이리저리 내달리고 중간중간 보기 흉한 검푸른 멍울이 생겨 있었지만 베스는 그런 모습에 아랑곳 하지 않고 버치를 더욱 빠르게 휘두르고 있었다.
" 아직 멀었어! "
- RoL -
" 아아아... "
한쪽으로 누워 양 무릎을 가슴께로 끌어 올리던 페릴은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엉덩이의 통증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몇 시간이나 계속된 것처럼 느껴지던 매질이 끝난 후 베스가 버치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페릴을 묶고 있던 가죽 끈만 풀어놓은 채 그냥 나가버린 방안에 홀로 남은 페릴은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하고 형틀에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베스가 다시 돌아오면 또 한차례 매질을 당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통증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움직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바닥에 잔뜩 떨어져 있는 버치의 부스러기들을 한참이나 걸려서 치운 페릴은 하녀들이 함께 쓰는 숙소에 돌아와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 흑흑... "
누가 들을까봐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고 있던 페릴은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으며 몸을 움직여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던 주머니를 찾아내어 조심스럽게 안에 들어있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한때 평민들 사이에 유행하던 얇게 편 쇠로 만들어진 평범한 펜던트였다. 아주 조금이라도 금이나 은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페릴의 손에 들린 펜던트는 그런 장식조차 없는 가장 싼 종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것들보다 더 두꺼운 쇠로 만들어져 있어 무게도 꽤 나가는 것으로 목에 걸고 다니기에는 부담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페릴 같은 처지에서는 이런 조악한 것이라고 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었기에 혹시 누군가에게 발견될까 두려워 늘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곤 했었다.
" 페릴. "
페릴이 펜던트를 한 손에 꼭 쥐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날 때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페릴은 깜짝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 쉿~ "
손가락을 입에 대고 그녀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듯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페릴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휴우우~ "
" 이거. "
저녁시간에 베스의 행동을 말리려고 했던 바로 그 하녀였다. 마리라는 이름의 그 하녀는 페릴이 처음 이곳에 온 이래로 계속 친 동생처럼 그녀를 아껴주었고 페릴 역시 마리를 언니처럼 따르고 있었다. 마리는 베스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숨겨가지고 온 빵 하나를 페릴을 향해 내밀었다.
" 배고프지? "
페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빵을 받아 들며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 울지 말고 들키지 않게 조심해. 알았지? "
마리는 더 목소리를 낮춰 페릴에게 속삭였고 페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는 마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마리가 침대에 눕는 것을 확인한 페릴은 뒤꿈치를 들고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하아... "
우물이 있는 뒤뜰까지 나온 페릴은 들키는 것이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었는지 크게 숨을 내쉬며 한쪽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그녀는 버릇처럼 고개를 들어 검게 물든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 있으면 만월일(滿月日)이라 그런지 동그랗게 빛을 뿌리고 있는 금(金)월의 달이 저택의 지붕에 닿을 듯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페릴은 아까 마리가 준 빵을 한입 베어 물고 손에 들고 있던 펜던트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페릴과 비슷하게 생긴 여자가 자상한 미소를 짓고 웃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은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 RoL -
" 할아버지. "
" 왜 그러니, 페릴? "
" 할아버지는 왜 제게 이렇게 잘해주세요? "
통나무를 대충 잘라 만든 벤치에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주는 노인과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보고 있던 페릴이 갑자기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 허허, 녀석, 별소릴 다 하는구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잘해주는데도 이유가 필요한 것이냐?"
" 하지만... 전... 노예잖아요... "
노인은 페릴의 말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 누가 그런 소리를 해? "
페릴은 오른손을 들어 입고 있던 옷을 끌어내려 왼쪽 어깨가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문양이 보기 흉한 검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 이게 노예의 낙인이라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어요. "
노인은 페릴이 낙인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짐짓 표정을 감추며 어깨 밑으로 내려가 있는 그녀의 옷을 끌어올려 문양을 다시 감추어 주었다.
" 넌 노예가 아니란다. "
페릴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는데도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고 말을 하는 할아버지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페릴은 부모님의 얼굴이 기억나니? "
할아버지의 물음에 페릴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 하지만 가끔 꿈을 꿔요. "
페릴은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며 말을 계속했다.
" 아빠가 커다란 도끼로 나무를 잘라서 잔뜩 쌓아놓은 다음에 무등을 태워주시면 전 하늘을 보며 팔을 쭉 뻗어요. 손바닥을 쫙 펴면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스쳐가는 느낌이 너무 재미있거든요. "
페릴은 꿈속에서의 느낌을 느껴보려는 듯 양팔을 위로 쭉 뻗으며 손바닥을 폈다.
"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꼭 아빠한테 잔소리를 하죠. 전 계속 그렇게 있고 싶은데... 엄마는 내려오지 않으면 새로 구워놓은 쿠키를 주지 않겠다고 겁을 줘요. 엄마가 구워주는 쿠키는 너무 맛있어서 말을 안들을 수가 없거든요. "
" 그런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
" 네, 아빠는 늘 제게 등을 돌린 채 나무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제가 무등을 타고 있어서 아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엄마 얼굴은... 이상하게 잘 생각이 안나요. 꿈속에서는 늘 절 보며 웃어주는 것 같은데... 깨고 나면 기억이 안나요. "
노인은 페릴의 말을 들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페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페릴의 부모님과 나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단다. "
노인은 페릴이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 그녀가 노예의 신분이 되었는지, 페릴의 부모가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페릴이 노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그녀를 찾아내고 또 노예시장에서 그녀를 사가지고 이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오게 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페릴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용에 놀란 눈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비록 네 어깨에 있는 낙인은 지울 수 없지만 노예 문서를 태우고 널 풀어주었기 때문에 페릴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란다. "
" 할아버지. "
아무리 세상을 모르는 페릴이라도 노예와 평민의 신분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노예를 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페릴은 노인의 품에 안기며 그에 대한 고마움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페릴의 작은 몸을 살며시 안아주는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눈에도 어느덧 눈물이 고여 있었다.
" 미안하네, 친구. 이것 밖에는 해줄게 없네그려... "
- RoL -
「 수많은 귀족들이 나의 결정에 반대를 하고 나섰지만 결코 그들의 주장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진 명예와 지위는 어차피 제국과 황제폐하께 받은 것이니 어찌 귀족으로서의 자존심 따위를 제국의 영광에 비할 수 있겠는가. 죽음으로 지키는 명예보다 비록 시궁창을 헤매는 신세가 되어도 제국과 황제폐하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수 있다면 나는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위대한 나의 조국 크란도르 제국을 위해 나는 살아남고자 한다. 」
"티에르 공작의 일기" 中 발췌
" 흐읍~! "
수분을 머금어 마른 회초리보다 더 무거워지고 유연해진 버치의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페릴의 연약한 피부 위에 붉은 자국들을 남겼고 거기서 느껴지는 아픔은 페릴이 헛바람을 삼키게 만들었다.
" 으읍! "
그러나 페릴의 피부가 얼마나 약한지 버치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기게 될지는 베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어떻게 하면 맘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건방진 하녀가 다시는 그런 행동을 못하도록 만들 수 있을지 손에 든 도구를 어떻게 사용해야 더 고통을 줄 수 있는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 쉬이~익 ]
" 아악! "
베스의 손에 들린 버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페릴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유린하고 있었다. 단순히 부딪치는 것만 아니라 베스의 팔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그녀의 엉덩이를 쓸면서 지나가는 버치는 페릴에게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만들었다.
" 아아악! "
페릴은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고통과 그 후에 이어지는 피부를 할퀴는 듯한 고통에 정신 없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비명과는 상관없이 매질은 더 강하고 빠르게 계속될 뿐이었다. 그녀의 작고 약한 몸은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매질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그녀의 행동을 구속하고 있는 형틀 때문에 의도한 만큼의 목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 쐐애~액 ]
" 아악! 용서해 주... 악~! 주세요! 제발! "
이미 페릴의 엉덩이 위에는 수없이 많은 맷자국이 이리저리 내달리고 중간중간 보기 흉한 검푸른 멍울이 생겨 있었지만 베스는 그런 모습에 아랑곳 하지 않고 버치를 더욱 빠르게 휘두르고 있었다.
" 아직 멀었어! "
" 아아아... "
한쪽으로 누워 양 무릎을 가슴께로 끌어 올리던 페릴은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엉덩이의 통증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몇 시간이나 계속된 것처럼 느껴지던 매질이 끝난 후 베스가 버치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페릴을 묶고 있던 가죽 끈만 풀어놓은 채 그냥 나가버린 방안에 홀로 남은 페릴은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하고 형틀에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베스가 다시 돌아오면 또 한차례 매질을 당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통증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움직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바닥에 잔뜩 떨어져 있는 버치의 부스러기들을 한참이나 걸려서 치운 페릴은 하녀들이 함께 쓰는 숙소에 돌아와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 흑흑... "
누가 들을까봐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고 있던 페릴은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으며 몸을 움직여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던 주머니를 찾아내어 조심스럽게 안에 들어있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한때 평민들 사이에 유행하던 얇게 편 쇠로 만들어진 평범한 펜던트였다. 아주 조금이라도 금이나 은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페릴의 손에 들린 펜던트는 그런 장식조차 없는 가장 싼 종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것들보다 더 두꺼운 쇠로 만들어져 있어 무게도 꽤 나가는 것으로 목에 걸고 다니기에는 부담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페릴 같은 처지에서는 이런 조악한 것이라고 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었기에 혹시 누군가에게 발견될까 두려워 늘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곤 했었다.
" 페릴. "
페릴이 펜던트를 한 손에 꼭 쥐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날 때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페릴은 깜짝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 쉿~ "
손가락을 입에 대고 그녀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듯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페릴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휴우우~ "
" 이거. "
저녁시간에 베스의 행동을 말리려고 했던 바로 그 하녀였다. 마리라는 이름의 그 하녀는 페릴이 처음 이곳에 온 이래로 계속 친 동생처럼 그녀를 아껴주었고 페릴 역시 마리를 언니처럼 따르고 있었다. 마리는 베스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숨겨가지고 온 빵 하나를 페릴을 향해 내밀었다.
" 배고프지? "
페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빵을 받아 들며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 울지 말고 들키지 않게 조심해. 알았지? "
마리는 더 목소리를 낮춰 페릴에게 속삭였고 페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는 마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마리가 침대에 눕는 것을 확인한 페릴은 뒤꿈치를 들고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하아... "
우물이 있는 뒤뜰까지 나온 페릴은 들키는 것이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었는지 크게 숨을 내쉬며 한쪽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그녀는 버릇처럼 고개를 들어 검게 물든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 있으면 만월일(滿月日)이라 그런지 동그랗게 빛을 뿌리고 있는 금(金)월의 달이 저택의 지붕에 닿을 듯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페릴은 아까 마리가 준 빵을 한입 베어 물고 손에 들고 있던 펜던트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페릴과 비슷하게 생긴 여자가 자상한 미소를 짓고 웃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은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 할아버지. "
" 왜 그러니, 페릴? "
" 할아버지는 왜 제게 이렇게 잘해주세요? "
통나무를 대충 잘라 만든 벤치에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주는 노인과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보고 있던 페릴이 갑자기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 허허, 녀석, 별소릴 다 하는구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잘해주는데도 이유가 필요한 것이냐?"
" 하지만... 전... 노예잖아요... "
노인은 페릴의 말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 누가 그런 소리를 해? "
페릴은 오른손을 들어 입고 있던 옷을 끌어내려 왼쪽 어깨가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문양이 보기 흉한 검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 이게 노예의 낙인이라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어요. "
노인은 페릴이 낙인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짐짓 표정을 감추며 어깨 밑으로 내려가 있는 그녀의 옷을 끌어올려 문양을 다시 감추어 주었다.
" 넌 노예가 아니란다. "
페릴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는데도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고 말을 하는 할아버지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페릴은 부모님의 얼굴이 기억나니? "
할아버지의 물음에 페릴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 하지만 가끔 꿈을 꿔요. "
페릴은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며 말을 계속했다.
" 아빠가 커다란 도끼로 나무를 잘라서 잔뜩 쌓아놓은 다음에 무등을 태워주시면 전 하늘을 보며 팔을 쭉 뻗어요. 손바닥을 쫙 펴면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스쳐가는 느낌이 너무 재미있거든요. "
페릴은 꿈속에서의 느낌을 느껴보려는 듯 양팔을 위로 쭉 뻗으며 손바닥을 폈다.
"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꼭 아빠한테 잔소리를 하죠. 전 계속 그렇게 있고 싶은데... 엄마는 내려오지 않으면 새로 구워놓은 쿠키를 주지 않겠다고 겁을 줘요. 엄마가 구워주는 쿠키는 너무 맛있어서 말을 안들을 수가 없거든요. "
" 그런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
" 네, 아빠는 늘 제게 등을 돌린 채 나무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제가 무등을 타고 있어서 아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엄마 얼굴은... 이상하게 잘 생각이 안나요. 꿈속에서는 늘 절 보며 웃어주는 것 같은데... 깨고 나면 기억이 안나요. "
노인은 페릴의 말을 들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페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페릴의 부모님과 나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단다. "
노인은 페릴이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 그녀가 노예의 신분이 되었는지, 페릴의 부모가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페릴이 노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그녀를 찾아내고 또 노예시장에서 그녀를 사가지고 이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오게 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페릴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용에 놀란 눈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비록 네 어깨에 있는 낙인은 지울 수 없지만 노예 문서를 태우고 널 풀어주었기 때문에 페릴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란다. "
" 할아버지. "
아무리 세상을 모르는 페릴이라도 노예와 평민의 신분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노예를 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페릴은 노인의 품에 안기며 그에 대한 고마움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페릴의 작은 몸을 살며시 안아주는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눈에도 어느덧 눈물이 고여 있었다.
" 미안하네, 친구. 이것 밖에는 해줄게 없네그려... "
「 수많은 귀족들이 나의 결정에 반대를 하고 나섰지만 결코 그들의 주장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진 명예와 지위는 어차피 제국과 황제폐하께 받은 것이니 어찌 귀족으로서의 자존심 따위를 제국의 영광에 비할 수 있겠는가. 죽음으로 지키는 명예보다 비록 시궁창을 헤매는 신세가 되어도 제국과 황제폐하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수 있다면 나는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위대한 나의 조국 크란도르 제국을 위해 나는 살아남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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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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