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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1:04 547회 0건
-분장사-

‘히가시주조….카와구치….와라비….그 다음이 미나미 우라와…. 네 정거장 남았네…’

밖은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나는 앞으로 남아있을 정거장 수를 세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 너머로 저 멀리 보이는 단독주택의 2층 베란다에 널린 이불을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 이불에 오줌을 싸고서 키를 뒤집어 쓴 채, 소금을 얻으러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계면쩍은 웃음이 흐르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지만, 왠지 널린 그 이부자리를 보면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메모가 적혀 있는 주소를 몇 번을 보았지만, 제대로 외우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전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훅하고 다가서는 외부의 후끈한 공기…..숨이 턱 하니 막혀왔다. 출구가 어딘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지만, 난 사람들이 가는 대로 그냥 몸을 맡겨 버렸다. 어차피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소 위성도시인 셈이었고, 갈아탈 수 있는 라인은 무사시노 라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스컬레이터도 없이 무작시리 외부로 뻗어 내려가 있는 계단들…..더운 날씨는 아지랑이까지 만들면서 온 등을 땀으로 금새 젖게 하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아담한 역 주변의 풍광에 아늑함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 아기자기함에 매료되었다. 계단을 내려오기 전에 구석에서 팔고 있던 우동을 사먹을까 생각도 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그건 선입견이 분명했다. 전철역 주변의 음식장사라고 해 봐야 그게 그거 아니겠느냐는 고국에서의 편견 때문이지 싶었다.

계단을 내려서서 보이는 제과점을 향해 나는 길을 건넜다. 고가도로가 뻗어있는 그늘로 인해 조금은 서늘해진 느낌을 받으며, 나는 제과점 앞에 서서 쇼윈도우를 향해 전시되어 있는 요깡(연양갱)세트를 바라다 보면서 이런 더운 날씨에 물도 없이, 그 달디단 요깡을 먹었다가는 죽음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15분…..서울도 같은 시간이겠지? 나는 고가도로가 있는 쪽과 반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목이 말라 뭐라도 마시지 않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조그만 역 광장의 길 모퉁이에 있는 이층 카페로 올라갔다. 별로 시원하지도 않고, 냉면집에서 틀어대는 것 같은 붕붕대는 소리의 선풍기까지 돌아가고 있는 실내……영락없는 읍내 인삼찻집 같은 분위기 였다. 이거 똥 밟은 거 아냐?

‘이랏샤이마세! 고쥬-몽와 나니 니 나사이마스까?(어서오쇼, 뭘로 주문하시려우?)’

‘스미마셍가, 토이레와 도꼬니 아리마스까?(죄송시럽지만, 화장실이 워디래요?)’

‘아노 데구찌노 소바니 아리마스.(저기 입구에 있걸랑요)’

종업원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다 말고, 똥깐을 찾는 나를 보며 퉁명스럽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얼굴 표정으로 봐서 뭘 시킬 것이 아니라, 화장실만 쓰고 달아날 인물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얌체족을 반길 장사치들은 없는 가 보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참았던 오줌을 내갈기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화장실 구석에 놓여 있는 마포자루를 보면서, 여기도 한국과 별다를 바 없다는 안심이 되고도 있었고….
난 소문만을 듣고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고 있었다. 화장실을 나오기 무섭게 그 아지매는 나에게 무엇을 먹을까 다시 추근댔다.

‘아이스 고-히와 이꾸라데스까(냉커피는 얼마래요?)’

‘욘햐꾸규-쥬-엔 데스.(490엔인디…)’

‘스꼬시 다까이데스네!(엄청 비싸넹!)’

무표정한 아지매. 비싸면 처먹질 말든가 라는 눈빛이었다.

‘아이스 고-히, 구다사이.(냉커피 주시구랴)’

‘하이, 와까리마시따.(네, 알았슈.)’

별로 감동 받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나는 냉커피를 들이키면서 서울에서 준비해 온 파일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여름은 사람들에게 신기하고, 괴상한 이야기 꺼리를 기다리게 하는 계절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난 이 동떨어진 일본의 작은 도시로 기어 들어온 것과 도대체 무슨 건덕지가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사실 기자의 할 일은 군인의 그 체제와 다를 바 없다고 항상 느끼고는 있었다. 위에서 주어진 껀 수를, 반드시 사냥개처럼 물고 늘어져 끌고 와야 하는 의무감….남들 다 가는 휴가를 이런 후덥지근한 꼴구석에서 보내야 한다니…..

파일에는 이번에 다루어야 할 기획특집의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그다지 인기를 끌 것 같지도 않은 주제였다. 역 광장을 떠나면서, 나는 주소를 찾아가기에 앞서, 후진 동네 구경을 좀 더 하기로 했다. 다닥다닥 붙은 상점의 촌시러움은 신기하기만 했고, 광장의 앞에 그것도 번화가라고 버티고 있는 은행에는 한국관광을 독려하는 포스터가 같이 붙어 있어서 눈에 띄고 있었다. 작은 위성도시라고 해도 길거리는 깨끗했고, 사람들은 평범해 보였다. 양산을 멋들어지게 둘러쓴 나이 지긋한 부인들도 보였고, 어디론가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부인들의 모습도 특별했다.

누군가 일본 여성들의 벌어진 가랑이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는데, 난 그때마다 그 이유가 무언지 궁금했었다. 누구는 민족성 자체가 음란해서 태어날 때부터 가랑이 사이가 벌어져 씹바람이 숭숭 통하게 되어 있다고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저렇게나 나이 먹도록 타고 다니는 자전거의 안장이 그들의 골반을 그렇듯 벌어지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일본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들의 경제관념은 그 자전거가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었다. 마치 자전거의 사용을 독려 하는 듯한 주변의 시설물들과 그 안에서 당당하게, 나이와 상관없이 이용하는 사용자의 마음이 어우러져 있는 그런 조화. 그걸 보면서, 서울은 아직 자전거를 타고 마음대로 다니기에는 위험한 도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역에서 조금 지나자마자, 나는 왼쪽 길로 틀었다. 역에서 북쪽으로 난 도로의 끝은 별로 번화해 보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대충 사람들은 그 길로 많이 접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소를 알고는 있었어도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그들과 목적지가 같은 사람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을 걸어가자, 내가 걷는 쪽에 보기에도 신기한 전기자동차가 건물 정면에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옴폭 들어간 건물의 입구에 주차되어 있는 걸 보면, 그 건물의 사장쯤 되는 인물이 자기과시용으로 타고 다니는 것임에 분명했다. 그래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멈추는 곳은 편의점이었다. 서울과 별다를 바 없는 편의점의 실내는 먹을 것을 고르기 보다, 먼저 오늘 나온 만화를 고르고, 살펴보는 사람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난 언젠가 일본 여성이 일본 남성들을 가르켜 나약하고 소심하다는 말을 듣고서 이해할 수 없었던 적이 있음을 상기했다. 우리가 영화나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일본의 남성상은 사무라이 정신이네, 야쿠자 끝발이네 하면서 한껏 과장되고 부풀려져 있으며, 실제 일본의 평범한 남자들은 지극히 가정적이면서, 소심하면서도, 현실에 지극히 딸려가는 자세가 보기 가여울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만화와 영화, 미디어를 통해 자신이 절대로 하지 못하는 행위에 대한 대리만족을 백이십 프로 즐감하는 형국이고, 저마다의 꿈은 주머니 속에서 잠들어 있어, 시시 때때로 남모르게 만지작 거리기만 하고 있다는 비유로 봐도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유달리 사람들은 잡지와 만화의 전시대 앞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발길을 재촉했다. 길 건너 보이는 학원은 이미 학생들이 손에는 저마다 핸폰을 들고 들락이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그 어디에서고 일본은 입시의 사슬에서 학생들을 놓아주는 법이 없었다. 학교와 더불어, 학원이나 과외,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학생들을 있는 한계까지 갈구는 일본의 가정풍토는 그만큼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버텨나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모두가 공감하는 결과라고들 했다.

그와 반하여, 놀려고 맘만 먹으면 아주 끝을 보기로도 유명한 곳이 일본이라고도 했다. 그들이 놀 수 있는 여건은 오로지 어른들이 만들고 있는데, 이미 원조가 정착되어 끊임없이 학생들을 향한 마수가 뻗치고 있고, 학생들은 그 안에서 풍족한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가면서, 거의 직장인 수준의 윤락행위라도 기꺼이 따라 나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냉 묻은 팬티를 팔기 시작하면서 시작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발전해서 원조교제에 발을 담그기 시작하면, 겉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다른 형상으로 자신들을 꾸며나가는 그네들이라 했다. 일본의 기성들도 걱정의 눈초리로 보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러나, 자라나는 세대들의 종잡을 수 없는 가치관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고…..그들에게 섹스는, 삶을 영위하는, 혹은 루비똥 가방을 들 수 있는, 때로는 더 신형의 작고, 이쁘고, 값도 오지게 비싼 핸폰을 손에 쥘 수 있는 첩경이라는 데에 공감하는 부류들이 있어왔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수요와 공급의 원칙을 그 정글 안에서 결정지었다고 했다.

어디나 그렇지만, 일본의 부모도 보수적 성향이 짙은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진학시키고 싶어했고, 학원은 그들에게 있어서, 불가분의 선택이기도 한 것 같았다. 더운 날씨도 그러했지만, 표정에는 즐거움이나 기본 나가리로 떠도는 미소들은 없었다. 하라주꾸나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우에노, 내국인 보다 외국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하는 신주꾸나 아끼아바라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인들의 표정과는 사뭇 다른, 진지함과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작은 소도시…..난 그 속에 서 있었다.

‘이제 슬슬 가 볼까? 그런데, 약속 시간이 너무 늦게 잡힌 거 아냐?’

나는 그 길의 끝에 있던 도로 건너편의 한방병원과 조그마한 비디오와 만화를 대여해 주는 상점을 보면서, 옳게 찾아 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관계로 그 비디오 대여점으로 들어갔다. 물론 마음은 음흉하게도 씹빠빠 비디오라도 빌려볼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의도와 다르게 모든 비디오들은 모자이크 처리가 속상하게도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난 그래도 굴하질 않고, 모자이크 처리가 되질 않은 물건을 찾았더니만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눈초리로 멀뚱하게 법이 그런데 어찌 하겠느냐고 반문하는 점원의 퉁명스러움….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정 보고 싶으면, 모자이크 제거기를 사면 되고, 내가 알고 있는 비디오들은 반드시 수출품이라고만 답하는 그의 대답에서 난 일본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이긴 했어도 그들은 원칙의 중요함을 생활에 박은 채 보내는 것이 역력했다. 일본을 욕하기도 하지만, 우리네 삶 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편법의 정법화 라는 독버섯을 그 누구도, 그 어느 정부도 호탕하게 척결하지 못하질 않았던가 말이다.

‘휴! 다 왔다.’

나는 그 대로를 돌쳐 들어, 10여분 간을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저 멀리 보이는 작은 갈래 길의 술집….제대로 찾긴 했네. 아마도 한국의 이런 주택가 중심부에 술집이 들어와 있다간 아마도 주변의 이웃들이 교육상 어떻고 하면서, 성토에, 을러댐에, 아마도 버티기 어려웠을 테지만, 그 가게는 개점연도가 말해 주듯이, 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의 그런 관용은 저렇게 여인네들의 웃음을 섞어 술을 파는 행위 보다 더 난잡한 일들이 이 세상에는 더더욱 많은데, 굳이 내가 나서서 그들의 목을 조일 당위성이 없다는 것에 공감하듯이 말이다.

‘딩동….’

나는 너무 늦게 잡혀있는 약속 시간으로 인해 저녁을 먹고 올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시쯔레-시 마스…고꼬와 기무라상노 우찌 데스까?(실례 쪼까 허겄슈, 여기가 기무라씨 집 아닌감유?)’

‘하이, 소-데스(그런디?)’

‘아노….(에, 그러니까 설라무네…..)’

난 적어간 대로 말을 하려다 덜컹하면서 열리는, 현관 문에 깜짝 놀라, 손에 든 쪽지를 놓치고 말았다. 문이 열리고 나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40을 조금 넘긴 것 같은 중년 여성이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엥? 이기 뭬이야? 한국 사람?

‘반갑습니다. 00잡지에서 취재차 나왔습니다. 한국 분인 줄 몰랐네요. 어저께 호텔에서 전화 드릴 때만 해도 일본 분 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일본 말이 서툴러서야, 어떻게 이곳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호호호….들어오세요. 날씨가 덥죠? 오늘은 그래도 좀 시원한 편인데…..’

누굴 놀리나? 땀이 등에서 비 오듯 흘러 내려, 허리띠 마저 척척해지는 느낌 이구만…나는 그 여인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작게 꾸며진 분수와 정원, 그리고, 연못……집을 갖고자 하는 일본 사람들의 소망은 세 가지 라고 했다. 하나는 시원한 대청 마루에서 그림 같은 정원을 바라다 보는 것과 자신의 자동차를 집어 넣을 차고와, 마지막으로 신당을 위한 방을 갖는 것…..정원이야 그렇다 쳐도 신당은 쫌 그랬다. 조상신부터 시작해서, 길흉화복을 점지해 줄 어떤 종류의 잡신도 일본 내에서는 가벼이 지나치는 법이 없다는 그들의 종교관….생활 속에 신의 존재는 그렇게 편하면서도 갈망의 대상으로서, 그 비싸고, 좁은 땅덩어리에서 조차 방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그들은 신들에게 구하는 것들이 많아 보였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서늘한 기운이 이내 뼛속까지 스며 들었다. 하늘 거리는 약식 기모노가 추워 보일 정도로 선선해진 실내의 공기….서양의 목욕 가운처럼 겉에 걸치고만 있어도 되었지만, 그 디자인은 기모노를 따라 하고 있었다. 거실의 중앙에는 대형 유리창을 통해 정원이 확대된 것처럼 눈 안으로 들어왔고, 식탁보다 넓은 크기의 정사각형 교자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와 그 여인은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기 전에 서로 마주보며, 절을 했다. 나도 얼결에 따라 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인가 부다 하고 구정 기분을 내어 가며, 맞절을 했다. 그녀가 웃으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아래로 향했다가 이내 불럭대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그녀의 유방은, 나이답지 않은 탄력과 탱글거림으로 인해, 얇은 기모노를 타고 내 눈을 단번에 사로잡고 있었다.

‘찾으시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여?’

‘네 별로. 작은 소도시라서 그런지, 찾기는 쉬웠습니다. 그런데, 바깥 양반은?’

‘아, 아니에요. 저 나이는 좀 먹었어도, 아직 결혼하질 않았습니다. 유부녀처럼 보이나요?’

‘그런 건 아닌데…..제가 실수했나요? 맘 같아서는 나이를 여쭈어 보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 거 같아, 아까부터 꾹 참고 있었습니다. 워낙 미인이시고, 젊어 보이셔서, 감히 운을 떼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하하……편히 하세요. 저 마흔 둘 이구요. 토종 한국산 입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구요. 한국에서의 본업은 분장사였습니다.’

‘분장사라뇨?’

‘모르세요? 모델이네, 영화배우네 얼굴 분장해 주는 직업 말이에요.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아! 하시는 분들, 코디도 많이 해드렸었는데……’

‘그래요? 전 몰랐는데여……’

‘각광받는 스타들의 뒤에는, 반드시 저 같이 어두운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때가 가끔 그립긴 하지만……’

‘그런데, 이 일은 언제부터 해 오셨는지요? 제가 머리가 좀 나쁜 관계로 지금부터 녹음기를 쓰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 이죠. 사진이나 비디오로 찍는 것은 금해주시고요.’

‘무슨 연유로…..’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가 무슨 장난질을 치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에요. 주변에 무슨 숨겨 놓은 장치라도 있는가 하고, 카메라를 몰래 숨겨서 들어오기도 하고, 가방 겉에 구멍을 뚫어 놓고 몰카를 해가기도 하죠.’

‘그런 몰상식한 인간들이 있나?’

‘그게 현실이죠, 뭐. 사람들을 욕할 수도 없어요. 워낙 제가 하는 일이 그래 놔서…..’

‘그런데, 어떻게 서울에 있는 저희 잡지사에게 직접 연락하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주로 일본에 있기 때문에, 주변의 문제에만 손을 대는 편이죠. 그런데, 일주일 전에 어떤 분이 물건을 부탁하고 가셨어요. 한국 분이었고, 선생님처럼 직접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아, 그랬군요. 말씀 중에 죄송스럽습니다만, 분장사 일을 하시다가, 어떻게 이 길로 들어 섰는지 말씀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글쎄요.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분이 일본인이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더라도, 제 얘기를 들어 보시면 대강 누구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드실 것 같아서, 자세한 얘기는 드릴 수 없구요. 저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릴께요.’

그녀는 한국에 있을 당시, 그 바닥에서 손꼽히는 재주꾼 이었다고 했다. 그녀의 코디 실력은 좀 독특했다고 하는데, 우선 분장을 해 줄 당사자의 맨 얼굴뿐만이 아니라 대본, 광고콘티 등도 접해야만 분장을 해주었다고 했다.

‘그건 무슨 이유였지요?’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영혼과 세월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각인되어 있어요. 이를테면 얼굴에 생긴 주름 하나라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설명 없이 자라나는 것이 없을 정도라 할 수 있죠. 즉, 그 사람이 배우라고 했을 경우, 다양한 인생 경험을 연기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내려면, 지극히 극중의 인물에 동화되어 갈 수 있는 분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얼굴의 윤곽선, 눈가의 주름과 그늘, 심지어는 안경, 콧수염, 구레나룻, 더 나아가 머리 스타일과 가르마까지 그 사람의 역할에 영향을 줍니다. 여기서 인터넷으로 언젠가 본 적이 있는데, 슈퍼 루키 라고 하든가요? 그 드라마에 나오는 8대2 가르마에, 깻잎머리 하고 나와, 신나게 웃겼던 분이 있던데….., 자신의 아이디어든, 아니면, 코디의 아이디어든 간에, 그 머리에 나있는 가르마와 그 머리를 손으로 다듬어 가는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그 배우의 이미지가 확 드러나는 거….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분장은 그 사람의 얼굴, 영혼의 매무새, 배역의 다양성과 맞아 떨어져야 스타로서 뜰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본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주 중요하죠. 손금이나 관상도 나이에 따라 변화하고 자라나고, 소멸되듯이, 분장도 그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배역이 시시때때로 겪고 있는 심리적인 변화를 분장에서 소화해 내주어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짜처럼 믿게 합니다. 만일 살인을 의도 하고 있는 사람이, 거 이름이 잘 생각 안 나는데, 그 개그맨 중에, 그 분이 오셨어용 하면서 권투 하는 분 있죠? 그 분의 그 머리스타일로 고민에 빠져 있다면 사람들은 이게 무슨 스릴러물인줄 알았는데, 결국 코메디 아닌가 하고 웃어 버릴 거 아니겠어요?’

‘그것도 들어보니 딴은 그렇네요. 그래서요?’

‘그렇게 하고 돌아다녀 보니, 나중에는 반 관상쟁이가 다 되어 가드라 이거죠. 주제넘게도 어떤 때는 그 배우에게 돌아온 배역을 보고서, 넌 죽었다 깨나도, 그 배역으로는 성공할 수 없을 거야 라고 분장을 거부하기도 했죠. 그 배우는 어떻게 해서라도 흉악하게 보여야 한다며, 한 쪽 눈이 애꾸처럼 보이게, 콘텍트 렌즈를 낀다. 뺨에 칼자국을 만든다 하며, 다른 코디를 고용해서 애를 써 봤지만, 결국 그 영화로 뜨는 데에는 실패했어요. 그 다음에 저를 보고는 징하게 재수 때가리 없는 년이라고, 뒤통수에 욕을 해대는 통에, 학발 다 떼긴 했지만 말이죠.’

‘그래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우드 같은 것이 있을 듯싶은데요.’

‘글쎄요. 제일 신이 날 때는 그 배우가 맡은 배역이 그 사람을 위해 만들어 진 것 같은 때죠. 그건 아주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그게 뭐죠?’

‘그 배역은 그 배우가 태어날 때부터 하게끔 정해져 있었다는 겁니다. 그 배우의 전생, 어느 한 부분 즈음에, 그렇게 살았던 적이 있는 거죠. 그 영혼의 흔적이 수 천년 동안, 수없이 다시 태어나면서, 지워지고, 다시 쓰여지고, 또다시 지워지지만, 혹시 그런 거 아세요? 칠판이요…..’

‘칠판 이라뇨?’

‘분필로 쓰는 칠판 말이에요. 그 칠판에 어떤 사람이 분필에 아주 강한 힘을 주어 글씨를 적은 후에 지우개로 지우려고 해도, 잘 지워지지 않고, 희미하게 글씨가 남아있는 그런 거 말입니다. 그 오래된 영혼의 흔적이, 배우가 캐스팅되는 과정에서, 강한 매력을 제작자에게 날리게 됩니다. 배우도 역시 대본을 처음 읽는 순간, 팍 하고 머리에 떠오르게 되죠. 아! 이거야! 이건 나를 위한 배역이야 라고 말입니다. 그 순간이 전생의 어느 한 부분을 다시금 조우하게 되는 타이밍이죠. 그럴 때는 분장도 하기 전에 저는 알아 차립니다. 지금 그 영혼의 흔적이 기름처럼 끓어 올라 이 배우의 전신을 뒤흔들고 있구나 하는 것을요. 같이 배역에 맞는 옷을 사러 가도, 그럴 경우에 저보다 더 먼저 옷이나 액세서리를 찾아내죠. 자신의 과거사를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촬영이 끝나면 배우는 그런 경우, 무척 심한 후유증을 갖게 되죠. 불거진 자신의 영혼 속에 남겨진 흔적이 다시금 자신을 그 배역에서 놓아주질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이 지금의 일과는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요?’

‘저는 그것이 일을 하다 보면, 자연히 발생하게 되는 것으로 알았지요. 그러다, 배우를 따라 일본으로 출장을 가서, 그 분을 만나게 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일본은 그 당시 생소한 시장이어서 무척 들 긴장하고 조심했었죠. 호텔 근처의 작은 술집에서 스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 분을 만나게 된 것이죠. 저는 그 당시, 일본말도 서툴렀고, 통역이 아니고서는 알아듣지도 못하던 때여서 그 분의 접근이 무척 신경 쓰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분은 어떤 일에 종사하시는 분이었습니까?’

‘그건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너무 유명한 분이라서……’

‘아쉽네요…..저 담배 좀 피워도 되겠습니까?’

‘네, 깜박 잊고, 마실 것만 들고 왔지, 재털이를 까먹었네요. 제가 늘 이래요…..’

난 담배를 피우면서 그 의문의 인물이 그녀에게 준 영향과 능력에 대해서 차근차근 물어가려 했지만, 의외로 그녀의 선방은 단호했다. 물러선다는 것이 어쩐지 찝찝했지만, 본론이 그것이 아니었기에 난 그냥 넘어갈 수 밖에 없었고…..

‘저에게 쪽지를 남기고 가셨는데, 그 쪽지에는 영혼을 본다는 것은 스스로의 짐이 아니라, 절대자의 선물이라는 말을 적어 놓으셨지요. 이 세상의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인 것 같았어요. 서울로 돌아와서 저는 그 분의 쪽지와 전화번호를 들고, 그 동행했던 통역해주던 여자분을 졸라서, 그때부터 일본어 공부며, 그 분과의 전화 통화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일본어가 어느 정도 숙달되기 시작하고, 그 분이 저를 일본으로 초청하게 되고…..뭐 암튼 그런 스토리라고만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연락하셨던 목적과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잠시만요. 시간도 시간이니, 제가 간단히 저녁을 봐 올리겠습니다. 기다리세요.’

‘아니, 그렇게 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이거 폐나 되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나는 저어하면서도, 요렇게 한끼, 뽄때 있게 때우는 구나 하면서 쾌재를 부르고 있었고, 들어설 때와 달리, 거실은 조금 더운 듯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여인과 마주한 식탁은 생각과 달리 단촐 했다. 그녀는 오차스끼(밥에 찻물을 말아 먹는 것, 가끔 뿌삐또라는 브랜드의 양념 가루를 뿌려 먹는다거나, 볶은 잔멸치 등을 얻어 먹기도 함)를 먹고 있기에 차려 놓은 반찬에 손도 대지 않았을 뿐더러, 나 혼자만 열나 젓가락이 분주하여 계면쩍기 까지 했다. 나는 저녁 식사에 보답하는 의미로 설거지를 도왔다.

‘금방 끝내셨네요. 저 혼자 하면, 혼자 먹은 밥상도 치우기가 왠 종일인데….’

그녀는 고마워 했다. 별거 아닌데…아마도 혼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했다. 그녀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그릴 수 있는, 낮은 높이의 이젤을 들고 왔고, 하얀 도화지를 이젤 위에 얹고서 기도를 하는 것처럼 주문을 외웠다. 나는 의문점이 많았지만 준비가 끝날 때까지 질문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고….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 옆에 독특한 냄새의 향을 피웠다. 그녀가 어떤 물건을 놓을 때마다 그 기도와 주문은 꼭 따라 다녔다. 그러고 나서, 탁자 위에 작은 호롱과 보기에도 앙증맞은 벼루와 먹, 그리고 붓 같은 것을 올려 놓고, 역시 호롱불도 점화한 후, 기도와 주문을 외웠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방안에서 두 개의 상자를 들고 왔는데, 하나는 화구 통처럼 생긴 것과, 다른 하나는 작은 소품 함처럼 생긴 것이었다. 화구 통을 열어 이젤 옆에 두고, 그녀는 합장을 하면서, 그 작은 소품함의 뚜껑을 열어, 탁자 위의 호롱불 옆에 올렸다.

‘설명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지금까지는 설명을 해드릴 수 있어도 작업에 들어가면 절대 얘기를 할 수 없으니 잘 봐 두세요. 저 이젤은 이 물건의 주인을 그리기 위한 것입니다. 분장과 메이크업을 배우면서 익힌 두상 스케치에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제가 사용하는 도구 중의 하나인 셈이죠. 보시다 시피, 이것은 호롱불 이구요. 이 벼루와 먹, 붓은 부적을 쓰기 위한 것입니다.’

‘부적은 어째서 필요합니까?’

‘물건의 주인을 불러오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 남겨진 물건은 이처럼 형체가 예전 같질 않기에, 생전의 생기 그대로, 형체의 힘을 전달받기 위한 저의 동아줄이죠. 그렇게 해야만 보다 오랜 시간, 영혼이 현세에서 보내어진 힘을 의지해서, 그 모습을 되돌려 전달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난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되질 않는 것 같기도 해서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그럼 종국에 가서는 무엇이 보인다는 말씀인가요?’

‘어떤 분은 보시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는데, 사람마다 다르죠. 자, 이제부터는 말씀을 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그리는 그림이 마무리 될 때까지 말이죠. 한가지만 말씀드릴께요. 지금 제 복장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 물건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한시도 팬티나 내의를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의미는 저 물건의 본인이 음란한 기운의 가운데에 아직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 여파가 저에게로 전달되게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빨리 연락을 취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저보다 느끼시는 것이 많을 것 같은데…..안 그런가요?’

‘아니요. 전 뭐 그냥 그런데…..그럼 어떤 느낌을 받으시는지 여쭈어 봐도 될런지요?’

‘온 전신이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물대는 느낌으로 견딜 수가 없지요. 이 옷 위로 도드라진 거 보이시죠? 벌써 유두가 발기했다는 의미 입니다. 온 전신이 하루 종일 섹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달뜨고, 여기 보시는 것처럼 이런 상태로 오시기 전까지 지냈던 거죠. 제가 왜 음식을 그렇게 허술하게 먹었는지 아세요?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그 음란한 느낌은 더욱 기승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한 발을 탁자 위로 올렸다. 그리고, 그 하늘거리는 옷섶을 좌우로 좌악 열어 째끼는 것이 아닌가! 난 내 두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난 아무런 것도 느끼질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녀의 온 전신은 마치 격렬한 섹스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곳곳이 키스마크처럼 발그레 하게 변해 있었고, 한 다리를 들어 올린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씹살은 이미 적자색이 가깝도록 충혈되고 팅팅하게 부어 올라, 곧 씹물이 주르륵 쏟아질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는데, 아마도, 자신의 중심을 섹스의 환락으로 빼앗기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다리는 나이답지 않게 살집이 탄력 있어 보였고, 태어나 한번도 정리를 안 한 듯, 그녀의 씹털은 온 방향으로 제멋대로 손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씹털 사이로, 떨어져 있어도 보이는, 그녀의 아랫배 운동으로 인해, 그 얌전해 보이는 씹살을 토해 내듯이, 씹구녕 밖으로 불쑥불쑥 내밀어 대고…간간히 흑흑 대는 신음과 함께, 나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그녀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입고 있던 홑겹의 가운 같은 기모노를 벗어 바닥으로 흘러 내리게 놔 두었다. 내 눈 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할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고,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나신이 가져다 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이 전달되고 있을 뿐이었지, 내 심정을 뒤흔드는 그 무엇은 아니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데, 그녀가 무릎을 꿇고서 합장하는 것처럼 조져 앉아 두 손바닥의 사이에 먹을 끼워 넣었다. 주문과 함께 갈려 들어가는 먹의 휘돌림. 곧이어 검은 먹물은 끈끈하게 바뀌어갔고…..

그녀는 이번에는 먹을 내려놓고, 양손바닥 사이에 붓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문과 기도…..난 그 기도와 주문이 끝나는 시점과 비슷하게, 그녀가 옷을 벗으면서 품 안에 꺼내 입에 물고 있던 얇은 종이를, 탁자에 살며시 내려놓는 것을 뚫어져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말로만 들어오던 신필(神筆)…..그 얇은 붓은 저 혼자 신이 들린 것처럼, 그녀의 손아귀 위에서 휘돌아 가고 있었기에…..그 춤 같은 휘돌림이 멈추어 들자, 아까처럼 두 손바닥 사이에 붓을 끼우고, 먹물을 찍었다. 그리고, 단숨에 그어 내려 가면서 써 내려가는 글씨….알아보기 힘든 상형문자 같았다. 처음부터 붓을 떼는 법도 없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부적은 다름아닌 붉은 적색이었다. 벼루에 먹을 갈 때 까지는 검은 색으로 보였지만, 정작 종이에 써 내려갈 때는 핏빛 인주색깔 이었던 것이다. 그건 부적 이었다.

부적의 마지막을 다 썼다고 여겨지는 순간, 그녀의 두 손은 그 붓을 단번에 두 동강을 내버린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기도와 주문…..그녀는 호롱불을 들고, 그 작은 소품 함 위로 가져가 위치한 후, 방금 마무리를 한 부적을 한 손에 가볍게 들고, 흡사 불 위에 던지듯이 날리는데, 한 순간에 부적은 하늘로 말려 올라가듯이 불이 붙어, 공중으로 스산하게 흩어졌다. 난 아무런 것도 볼 수 없었고, 혹시라도 속임수나, 정작,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뚫어지게 살폈지만, 그 어떤 것도 증명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호롱불을 내려 놓고, 이젤을 향해 돌아 섰다. 그녀의 나신은 전신에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으며, 사실, 방안이 좀 덥긴 더웠다. 나는 집 안에 들어서면서, 잠시 서늘했을 뿐, 지금까지도 등에 땀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기에…. 그러나, 이렇게 땀을 재촉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그림 그리는 자세 때문이었다. 낮은 이젤의 높이를 조절도 하질 않고서, 뒤로 돌아 허리를 아래로 수그리면서, 불편하지도 않은지, 다리는 뻐쩡 자세로 그림을 그리니, 흡사 나의 정면을 향해 온 가랑이를 한껏 벌린 것 같은 포우즈가 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뒤로 까발려진 번들거리는 그녀의 엉덩이와 옴찔거리는 항문의 주름들, 그리고 뒤에서 누가 박아 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씹구녕 안쪽의 씹살이 울럭대며 경련하는, 적자색의 충혈된 그녀의 보지가 나를 아찔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엉덩이 마저,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은 중심을 바로 잡기 위해, 간헐적으로 힘을 주는 그 둔부의 근육들이, 흡사 좇대가리가 끼워져, 미친 듯이 요분질에 빠진 형상으로 보인 것도 결코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자세를 유지한 채,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녀의 엎드린 상체로 말미암아, 무엇을 그리는지 알 수 도 없었으려니 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을 확인하려고 다가간다는 것도 그 상황에서는 무리였었다. 그녀의 보지에서 점차 질질 흘러 내리는 것은, 바로 흥분하여 분비되는 씹물이 분명했다. 그 길고 탄력 있어 보이는 가랭이를 타고 그녀의 씹물이 유람을 떠나는 모습은 정말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역시 구경 중에 제일로 재미있는 건 씹구녕, 불, 그리고, 쌈 구경이라고 누가 그러든데….”

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좀 천천히, 그것도 보지나 더 씨 벌떡대면서 그리지 라는 작은 소망을 되뇌며, 그녀의 나신과 풍만한 엉덩이, 그리고, 음란한 보짓살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소망과 달리, 금방 그림을 마쳤다. 전신이 아닌 단지, 두상만을 그리는 것이었기에….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녀는 한동안 자세를 풀지 못하고, 그림을 잡아 먹을 듯이 그러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그 자리에 조용히 다리를 접고 엎드려, 오랜 시간 기도와 주문을 계속 외웠다. 엎드린 그녀의 등과 그 등의 사이로 도드라진 그녀의 등뼈, 그리고, 아직까지 씰룩 거리고 있는 그녀의 둔부가 나의 시선을 붙들고 있었고…..

그녀가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집어 들고, 고개를 숙인 채, 가운을 입어가면서 나에게 다시 자세를 바로잡아 자리에 정좌했다.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말씀 하셔도 되구요.’

‘그렇습니까?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 드려도 될까요?’

‘못 보신 모양 이군요. 꼭 보여서 맛은 아닙니다. 아까 부적을 태우고 공중으로 흩어진 후에 그 재가 천천히 가라 앉으면서, 이 소품 함 위의 내용물 위에 내려 앉았지요. 이 소품 함에는 보시다시피 하얀 가루밖에 없지요. 바로 죽은 여자의 뼛가루 입니다. 그 뼛가루와 부적의 재가 합하여져, 그 상자 위로 안개 같이 뿌연 여자분의 두상이 떠올랐는데, 못 보신 게 분명하죠?’

‘에이, 농담도…재만 날렸지, 어디 그런 게…..’

‘괜찮습니다. 제가 본 그 사진 같이 공중에 떠오른 모습을, 부적으로 싸여있는 화구 통 안의 저 색 펜으로 그려 보았지요. 저 여자가 혹시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저는 한 눈에 알아 보았는데…….아마도 물건을 갖고 오신 분도 정말 이 뼛가루가 그 여자의 것이 맞는가 알고 싶으셨다고 했는데, 맞는가 봅니다. 바로 그 여자 분의 얼굴 이네요. 모르시겠어요?’

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도화지 속의 얼굴이 내 기억 속에 혹시나 자리잡고 있는지, 한참을 대가릴 굴려대고 있었다.

‘저 야리야리한 눈매와 눈웃음, 저 짧은 커트머리, 달걀형의 얼굴선, 얇고 가는 입술……그래…맞다…그 여자 아닌가요? 오래 전, 의문의 실종을 당해서,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는 그 모델 아닌가요?’

‘네, 제대로 보셨네요. 그 물건을 갖고 오신 분은 그 여자 분의 그 당시 연인 사이셨던 분이죠. 부모도 자식의 실종을 세월 속에 가슴속 깊이 묻어 버린 채, 잊고 살아가는데, 유독 그 남자분만이 백방으로 수사 재개를 외치고 다니셨고, 잠잠할 만하면 탄원서에, 진정서로 관련자들을 괴롭히던 분이 바로 그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실종된 지, 저는 잘 모르는데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저도 잘은 모르죠. 이렇게 뼈의 주인이 제대로 임자를 만나 돌아왔다는 것 이외에 제가 갖고 있는 다른 능력은 없습니다. 독재정권 당시, 모델 계에서 떠오르던 풋풋한 스타였던 그 여자는 저도 얼굴은 기억하고 있지요. 실종된 이후 사람들의 추측만이 난무할 따름입니다. 어느 무엇 하나 증명할 수는 없구요.’

‘증명할 수 없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죠? 영혼이 그거까지는 얘기하질 않던가요?’

‘그건 하늘의 족쇄가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영혼의 죽음이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반되는 상황에서 벌어졌다면, 그 영혼은 분한 마음에 지박령이 되었거나, 구천을 떠돌기로 작정한 원혼으로 화했을 겝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제가 볼 때에, 그 죽음의 순간을 백분 즐기고 있었기에 죽어간 이유가 억울하다는 소원을 내세울 수 없는 것이지요. 단지 시신을 제대로 원하는 가족들이나 연인이 거두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이 원통할 뿐이구요. 아마도 그 남자분이 의문의 실종에 대한 정부의 재조사 촉구를 또다시 들고 나올까 두려워, 뼛가루라도 가까스로 돌려 준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따름 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은 그 죽은 여인이 모종의 중요 비밀 접대에 나가서, 그 길로 실종된 것이 분명하고, 아마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뿐이었죠. 굳이 죽일 이유야 없었겠지만, 만일 예를 들어, 집단 혼음 파티를 하는 도중, 수치심을 없애기 위해 주사하는, 마약이나 흥분제를 과다하게 사용했을 경우, 그 쇼크로 그 자리에서 섹스 도중에 절명했을 수도 있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 남자분은 어떻게 그 상자를 받을 수 있었죠?’

‘그건 경고의 의미가 담긴 배달 이었다고 했습니다. 굳게 닫아걸고 외출한 사이,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도 없이, 교묘하게 방안 침대 위에 놓여 있더라는 군요. 아마도 그렇듯 용의주도한 집단이니, 다시 또 건드려, 부스럼 만들 생각 말고, 장례나 후히 치르라는 의미였겠지요. 그렇지만, 그 분은 그 뼛가루를 대하는 순간, 그녀라고 느꼈답니다. 그녀가 그 상황을 절대 즐길 리 없고, 외부의 영향에 어쩔 수 없이 휘말려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섹스 속에 죽어간 것이 틀림없다는 것도 말입니다. 아까 보신 것처럼 제 몸을 휘감고 있던 그 음란한 기운은 생전에 그녀의 임종을 이끌었던 쾌락의 부산물인 셈입니다. 아시겠어요?’

난 그녀가 사람들을 위한 분장사에서 왜 살아가는 방향을 선회했는지 대강 짐작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육신, 혹은 유품과 분리되어 방황하는 영혼들을 감지할 수 있었고, 그 능력을 이용하여 불러 들인 후에, 짝을 맞추어 제대로 된 생전의 모습을 회상케 해주는 영혼의 분장사였던 것이다. 그림 속의 여인은 생전에 인기 있던 모습 그대로의 청순한 얼굴 이었고, 아마도 그녀에게 부탁을 한 사람들은 바로 그런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는 욕망에 의지해서 물어 물어 그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 저런 일을 하고 있다면, 당장에라도 사기 어쩌고 운운 하면서, 떼 잡혀 들어갔을 테지만, 나는 눈 앞에서 목도한 그 사실들로 말미암아, 이런 일도 필요한 구석이 있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었다.

‘오늘 인터뷰 감사 합니다. 어이쿠, 이거 시간이 이렇게나 되었네요. 저는 그럼 이만….서울에 돌아가서 잡지에 기사가 나오는 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에 감사 드리는 의미에서 소정의 감사표시가 같이 전달될 겁니다.’

‘이렇게 늦었는데, 주무시고 가시죠?’

‘엥? 자고 가다뇨? 아닙니다. 호텔로 가면 되는데요. 내일 오후에 출발하려면 짐도 싸야 하고, 여러 가지로 정리할 것도 꽤 있어놔서….암튼 말씀 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어여 자고 가시죠?’

‘아니래도요!’

‘아직도 못 느끼세요? 이렇게 한 여름에 입김이 호호 나올 정도로 추워진 이 거실의 온도가 이상하다는 거 느끼지 못 하셨느냐고요?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등에 땀을 비오듯 흘리고 계시죠? 어떤 여인이 웃으면서 선생님의 등뒤에 달라 붙어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거, 그래서 아까도 그 죽은 영혼이 떠오르는 모습도 보질 못하시던 거, 모르시죠?’

나는 머리카락이 왈칵 서버리고 있었지만, 뒤를 돌아다 볼 엄두도 내질 못한 채,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주무시고 가세요. 네?’

난 두 다리가 떨려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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