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킨피에르 성의 서별저의 어둠 속으로 은밀히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있다. 달이 밝은 밤에 검은 색 옷을 입고 조용히 움직인다고 눈에 띄지 않을까마는, 정작 순찰을 도는 사람 가운데 누구도 신경쓰는 이가 없으니 은밀히 움직인다 여겨줄 밖에.
“여긴가?”
작은 소리조차도 유난히 크게 들리는 어둠속에서 지나치게 큰 목소리다. 하지만 여전히 누구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하다. 당직 기사가 한 명 쯤 있을 법 하건만 조금의 반응도 없다. 역시나 그만큼 은밀하게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이 바로 위야.”
“흠... 그냥 현관으로 들어가면 안되나?”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역시 현관으로 들어가면 폼이 안나잖아?”
“폼? 무슨 폼?”
“생각해봐. 현관으로 당당히 들어서는 암살자와 벽을 타고 은밀히 잠입해서 몰래 목표를 처치하는 암살자, 어느 쪽이 그럴싸 하겠냐구?”
“미친...”
쓸데없는 농담을 할 정도로 두 그림자는 여유가 있다. 들킨다거나 하는 건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태도다. 무언가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일 것이다.
“줄 꺼내봐.”
“꼭 그거 해야 해?”
“응!”
“젠장...”
투덜거리면서도 한 그림자는 품에서 밧줄을 꺼낸다. 끝에 반짝거리는 쇠고리가 달린 침투용 밧줄이다. 한밤중에 움직이는 주제에 광을 죽이는 검은 칠도 해두지 않아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달빛을 받아 유난히 빛나고 있다. 물론 여전히 그 빛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 던져.”
“왜 내가 해야 하는데?”
“내가 선배니까.”
“선배?”
“내가 너보다 두 달 먼저 기사 서임 받은 거 알지?”
“그래서 선배야?”
“당연히! 한 달은 맞먹어도 두 달은 맞먹을 수 없는거라구.”
“기사가 서임날짜로 선후배 따진다는 소리는 못들어봤는데?”
“당연하지.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은 나 뿐이니까. 영광으로 알라구. 어디 가서 이런 소리 못들으니까.”
“빌어먹을! 지금 장난하냐?”
“어! 어떻게 알았어?”
“진짜 장난이었던거야?”
“응. 진담일 리 없잖아?”
“으드득... 썩을 자식이...!!!”
“어쨌든 서두르자구.”
말은 서두른다고 하는데 농담따먹기나 하며 미적대는 것이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다. 달빛에 드러난 흰 얼굴 어디에도 긴장이나 다급함은 보이지 않는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롭기만 한 모습들이다.
“그런데 꼭 죽여서 묻어야 하는거야?”
“왜?”
“하고 죽인 다음에 묻으면 안되나?”
“하긴 뭘 해?”
“그거...”
입맛을 다시며 들어올린 손은 엄지손가락을 집게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 사이에 넣어 쥐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그 손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본 다른 그림자가 한심스럽다는 듯 손의 주인을 바라본다.
“너는 이 상황에서도 그 생각이 나냐?”
“하지만 그년이 꽤 미인이란 말야. 몸매도 그럴싸하고. 무엇보다 수파니잖아? 수파니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아? 죽여준다구. 그 조이는 맛 하며, 그 뜨겁고 축축한 속이 정말... 으흐흐...”
몸까지 떨어대는 것이 상당히 흥분한 듯하다. 하지만 다른 그림자의 한심하다는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꼭 수파니와 해본 적 있는 사람같다?”
“뭐 해보진 않았지만... 꼭 해봐야 아나? 다 들려오는 이야기로...”
“그래서 한 번 해보고 싶다구?”
“응. 어차피 다리병신에 앞도 못본다며? 그냥 한 번 꿀꺽 한 다음에 사악 죽여버려도...”
“뒷처리는 어떻게 하고?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방안에 흔적이 남을텐데.”
“그정도야 어떻게 안될까? 어차피 자작이라는 인간은 허수아비 아냐?”
“그래서 그냥 막 나가자고?”
“안될까?”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 모양이다. 입맛을 다시며 노골적으로 한 번 만 봐달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절대 안돼!”
“어이~~!!!”
“명목상이라고는 하지만 자작은 우리의 주군이다. 저 수파니는 그 주군의 여자고. 사정이 이렇게 되어 죽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지만 죽이더라도 그런 욕까지 보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이 기사로서의 최소한의 명예이고 양심이다.”
“기사? 명예? 양심? 이렇게 여자 하나 암살하러 쥐새끼처럼 살금거리는 주제에?”
“이건 기사로서의 임무다.”
“얼씨구~~!! 요즘 기사는 한밤중에 여자를 암살하러 잠입하기도 하는 모양이지?”
“그래도 임무는 임무다!”
아무래도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 어디서 기사 서약서만 삶아먹고 왔는지 기사도만은 죽어도 지키겠다고 고집이다. 한 번 즐기고 끝내면 될 것을 저리도 꼬장꼬장하게 반대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젠장...!!”
힘으로 누른다면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검술로만 따진다면 자신이 조금 우위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 자칫 그로 인해 소란이 벌어져 오늘의 일이 표면으로 드러나면 모든 책임을 그들이 뒤집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아쉽더라도 미련을 접는 편이 현명하다.
“알았다. 이번만은 내가 양보하도록 하지.”
“고맙네.”
충돌로까지 번질까 걱정했던 듯 노골적으로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자신을 무슨 자제력 없는 바보쯤으로 여긴 듯 보인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용조용 넘어가기로 한 것 이번에도 참는 수밖에.
“알았으면 어서 밧줄을 던지라구. 3층이니까 정확히 맞춰야 하네.”
“걱정말게. 투척은 내가 가장 주전공 가운데 하나라구.”
“호오... 그럼 기대해보지.”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는 듯 약간은 빈정거리는 듯한 기색이 드러난다. 하지만 밧줄을 든 사내는 듣지 못했다는 듯 갈고리가 달린 쪽의 밧줄을 들고 원심력을 받기 위해 서서히 돌리기 시작한다.
“헙!!”
슈루룩--!!
충분히 원심력을 받았다고 생각되자 한줄기 기합성과 함께 탄력을 받은 밧줄을 위로 힘껏 던져올린다. 위로 돌던 힘을 그대로 위로 풀어버리자 은빛으로 반짝이는 갈고리가 밧줄을 끌고 힘차게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달칵--!!
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제 무게를 못이긴 밧줄이 스스르 미끌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정도 흘러내리더니 이내 팽팽하게 고정된다. 갈고리가 발코니에 제대로 걸린 것이다.
탁탁--!!
그래도 혹시 몰라 확인을 위해 몇 번 밧줄을 강하게 당겨본다. 한 사람이 매달린 정도의 힘을 주어도 끄떡없는 것을 보니 예상했던 대로 단단히 걸린 모양이다. 손바닥을 강하게 쓸어오는 밧줄의 거친 표면이 믿음직하게 느껴진다.
“됐어!”
“그래? 그럼 가자구!”
“알았어!”
“근데 쟤들 왜 안가고 구경하고 있냐?”
“누구?”
“저기...”
“자네라면 구경하고 싶지 않겠나?”
“나라면 달려들어서 같이 하자고 조르지.”
“훗... 미안하군. 자네를 몰라봐서.”
“알면 됐어.”
“어쨌든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구. 이렇게 은밀히 잠입해서 암살하는 것 같은 건 말야. 더구나 일 끝나고 나면 시체도 업어 날라야 하지 않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은밀? 잠입?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게 그런건가?”
“대충 그렇다고 쳐줘야지. 안그럼 성의 모든 사람들이 짜고 일을 벌였다고 할까?”
“아무래도 그건 좀 무리겠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잠입하고 있는 중이란 말야.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그럼 쟤들은?”
“달구경이라도 하고 있나보지. 아니면 수파니의 미모에 반해 그 방을 바라보고 있던지.”
“흐흐흐... 그런건가?”
“그런거야. 어쨌든 서두르자구.”
“알았어!!”
달빛이 밝은 밤. 그 밝은 어둠속으로 유난히 검은 두 개의 그림자가 밧줄을 타고 서별저의 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목적지는 3층 에렌프의 방. 안타깝게도 누구도 이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멋모르는 순찰병 몇 명이 달구경삼아 별저쪽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두 개의 그림자는 어느새 3층 발코니로 넘어들어가고 있다.
“헉!!”
나무의 섬유를 꼬아 만든 셔츠 아래로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무언가가 줄기를 이루며 흐르는 것이 선뜻한 느낌을 준다. 칼날에 베이는 듯한, 아니 그보다는 얼음의 칼날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불쾌감이다.
“젠장... 설마...”
불길한 예감에 급히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가보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흑암의 숲의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뿐이다. 별빛조차도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빽빽이 들어선 아름드리 나무들로 인해 마치 어둠 속에 그대로 내던져진 듯 막막하기만 하다.
“지금...? 지금인건가...?”
코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둠 속이지만 델킨피에르 영지가 어느쪽에 있는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처음 천막을 칠 때 방향을 미리 기억해두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칸피니스는 슬픔과 아픔으로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델킨피에르 영지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아니 노려본다는 말은 맞지 않은지도 모른다.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으로 무언가를 노려본다는 것은 불가능할테니.
“어... 어머.... 어머니...”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무언가 기도를 꽉 매운 듯 답답하게 눌러오던 것이 서서히, 그러다 급격히 빠르게 치밀어오른다. 울컥거리는 습기가 목을 타고 스며들어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헤집고 새어나온다.
“어... 어머... 어머...”
눈이 뜨겁지만 눈물은 말라있다. 한 방울, 두 방울, 서너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고 나니 더 이상의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대신 습기찬 울음이 눈물 대신 서럽게 흘러내린다. 입술을 뚫고 흘러내린 슬픔 때문인지 어느새 깊은 어둠이 눅눅하게 젖어있다.
“으... 으윽... 으윽...”
하지만 목을 타고 흘러내리기엔 슬픔의 크기가 너무 크다. 어느새 빠져나오지 못한 채 잔뜩 몰려든 슬픔이 기도륵 막고, 식도를 억눌러 서러운 울음소리마저 잦아들고 있다. 아니 잦아들었다기보다는 목 아래에서 더욱 격렬하게 안으로 터져들어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 어머... 어머니...”
슬픔이 시킨 것일까? 채 터져나오지 못한 서러움이 그를 그리 움직이게 한 것일까? 자신도 모르는 새 칸피니스는 흑암의 숲의 어둠 속으로 허브적거리며 걸어들어가고 있다. 초점조차 잡히지 못한 그의 눈은 그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어둠의 저편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으윽... 윽... 윽... 흐... 흐으... 흑... 으윽... 윽...”
억눌린 답답한 숨소리와 함께 취한 듯 흐느적거리며 어둠 속을 걷기 시작한 지 어느덧 한 시간.어디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왔는지 알지 못하니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그저 습관처럼 슬픔이 시키는대로 허브적 숲속을 헤맬 뿐이다.
“흑... 흑...”
눈물은 말라버린 지 오래다. 울음도 더 이상 새어나오지 않는다. 남은 것은 토해내지 못한 감정의 앙금 뿐이다. 가슴을 틀어막고 들어안은 채 여전히 옭죄어오는 그 답답함이 만들어내는 가늘고 거친 소음 뿐이다.
“윽... 으윽... 윽... 윽...”
분명 무언가를 말하려 했을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칸피니스는 자신이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채 깨닫기도 전에 억눌린 숨소리가 되어 그의 속 깊은 곳으로 다시 터져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습관처럼 말이 되지 못한 말은 억눌린 숨소리로 입술을 뚫고 어둠속에 묻혀간다.
하지만 슬픔을 마음껏 누리기엔 칸피니스는 너무도 뛰어난 전사다. 뛰어난 것을 넘어 경이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최고의 전사다. 그의 모든 세포는 전투를 위해 최적하되었고, 그의 모든 신경은 전투를 위해 항상 최상의 상태로 깨어나 있다. 그의 감정 또한 예외는 아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조차도 전사로서의 본능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바스락--!!
작은 낙엽소리. 너무도 작아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소리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결코 들려서는 안되는 소리다. 짐승이나 몬스터라면 이보다 더 큰 소리여야 한다.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도 이처럼 작지는 않다. 분명 지능이 있는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칸피니스의 입이 강하게 앙다물어진다. 흘러나오던 습기찬 숨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슬픔으로 이완되었던 근육이 강하게 당겨지고, 심장은 격렬하게 아직 남아있는 슬픔을 녹여가며 뜨거운 피를 그의 온몸으로 보내고 있다. 붉게 충혈된 눈이나 뺨에 남아있는 눈물자국이 슬픔의 흔적을 말해줄 뿐 이미 그의 몸과 마음 어디에도 슬픔은 남아있지 않다. 그가 너무도 뛰어난 전사인 때문이다.
“누구냐?”
나직한 목소리. 하지만 한껏 살기가 응축되어 있어 결코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소리다. 하물며 나뭇잎 소리를 저토록 억제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 살기를 더욱 무겁게 느낄 것이다.
저벅--!!
아니나 다를까! 나뭇잎 소리가 들려왔던 오른쪽 후방에서 선명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온다. 나뭇잎이 부스러지는 사이로 작은 돌이 발에 밟혀 부딪히는, 숲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소리다. 다만 사람에 비해 가벼운 듯한 것이 신경쓰일 뿐이다.
“누구냐?”
짧은 외침과 함께 칸피니스는 재빨리 몸을 띄워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다. 나아가던 방향으로 몸을 살짝 빼내어 안착했을 때 이미 칸피니스의 눈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매섭게 고정되어 있다.
“누구냐?”
분명 상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건만 상대의 위치나 정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상대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다. 다만 칸피니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기보다는 그의 뇌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의 눈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고 있음을 신호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냐?”
바스락--!!
다시 한 번 소리치니 그제서야 다시 한 번 나뭇잎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발자국 소리가 아닌 것이 칸피니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일부러 낸 듯하다.
“거기냐?”
그리 큰 소리는 아니지만 상대의 위치를 포착하기에는 충분하다. 칸피니스는 소리가 가르쳐준 방향에 신경을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정면에 누군가가 서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한다. 분명 상대는 자신의 눈이 멈추는 자리, 자신의 정면 20미터 앞에 서있다. 그것도 검을 든 채로. 다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수파니인가?”
어둠 속에 이토록 완벽하게 동화될 수 있는 종족은 둘 뿐이다. 다크엘프와 수파니다. 마족도 있기는 하지만 마족의 마기는 자연계에서 지나칠 정도로 쉽게 드러난다. 조금만 감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별다른 수련 없이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다.
“아니면 다크엘프인가?”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살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적의를 가진 것은 아닌 듯 하다. 칸피니스와 적대하고자 했다면 일부러 소리를 내어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 호의는 아니더라도 적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지켜보겠다는 것인가? 나에게 무언가 확인할 것이 있나?”
크게 소리쳐 물어보지만 상대는 계속해서 침묵할 뿐이다. 그러나 조금전과는 다른 움직임이 느껴진다. 작은 움직임. 체온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흐름의 작은 변화일 뿐이지만 분명 보이지 않는 상대의 심리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가 분명하다. 칸피니스는 큰 기대를 가지고 정면을 주시하는 시선을 늦추지 않는다.
“나에게 볼 일이 있나?”
이번에는 무언가 반응이 있다. 그러나 칸피니스가 생각한 것과는 한참 거리가 먼 반응이다.
“@$$%$^&**^((((*()”
낮은 허스키 보이스지만 그 안에 섞인 맑은 울림은 분명 여자의 그것이다. 중성적인 느낌이라 약간 모호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칸피니스는 목소리의 주인이 여자일 것이라 확신한다. 칸피니스이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목소리에 실려온 말은 들어본 적 없는 말이다. 제국 공통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남제후령 토착어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너무도 생소한 말이다. 어쩌면 인간의 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인거지?]
칸피니스의 짐작대로 상대가 하는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니다. 하지만 칸피니스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인간의 말이 아니면서 칸피니스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단 한 가지 뿐이다. 그의 어머니 에렌프가 쓰던 수파니어. 여자가 쓰고 있는 말은 수파니어가 분명하다.
[수파니인가?]
[수파니어를 아나?]
역시 수파니어가 맞다. 에렌프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어설프게 배운 수파니어에 상대가 정확히 반응해온다. 인간이 수파니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기색이 그녀의 대꾸에 역력히 드러나 있다.
[내 어머니가 수파니였다]
[수파니?]
칸피니스가 수파니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놀란 모습이다. 숲의 어둠에 동화되어 있던 것이 깨져버려 그 모습이 고스란히 칸피니스에게 노출된 것을 보니 말이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상대는 다른 수파니가 그렇듯 아름다운 얼굴에 갸녀린 몸매를 지닌 칸피니스가 놀랄 정도의 미인이다. 수파니 특유의 검고 곧은 머리카락과 빛마저 삼켜버릴 듯한 검은 눈동자가 갈색 피부와 절묘하게 어울리며 뿜어내는 독특한 아름다움은 여자에 익숙한 칸피니스마저도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던져준다. 지금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사랑을 구걸하고 싶어질 정도로 그녀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호... 혹시 에... 렌프?]
그녀에게 매혹되어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그에게 수파니는 전혀 의외의 이름을 물어온다. 수파니의 입에서 들으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름이다.
[어머니를 아나?]
[저... 정말 에렌프의 아들?]
[당신... 어머니를 아나?]
[믿기지 않아. 인간에게서 너무도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기에 순전히 호기심으로 쫓아왔던 것 뿐인데... 설마... 설마 에렌프의 아들이라니!]
칸피니스가 놀란 만큼 상대 수파니도 많이 놀란 모양이다. 칸피니스가 묻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칸피니스가 에렌프의 자식이라는 사실만을 계속 반복해서 되뇌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다... 당신... 어머니를 알아?]
[아아... 에렌프가 낳은 아이가 너구나. 인간에게 붙잡혀가서 낳은 인간의 아이가 바로 너였어.]
증오일까 슬픔일까? 어느새 수파니와 동화되어버린 어둠이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채 제 무게에 못 이겨 힘없이 늘어져 내린다. 어둠 그 자체인 듯한 검은 눈동자에도 습기찬 반사막이 작은 빛을 반사하며 빛나기 시작한다. 아마도 눈물일 것이다.
[어... 어머니를 알아? 당신... 당신... 어머니의 가족이야? 호... 혹시... 엘디란? 아... 아니면 야미? 그도 아니면 디오?...]
칸피니스의 다급한 외침에 수파니 주위의 어둠이 다시 살아난다. 놀라움이 수파니를 다시 일깨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 그 이름들을 어떻게...? 네... 네가... 에... 에렌... 프가... 말해준거야?]
칸피니스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의 혈육인 듯한 수파니를 만났으니 조금이라도 발리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조금전 토해내지 못한 슬픔의 잔재일까? 어느새 칸피니스의 눈에도 뿌연 습막이 어려있다.
[어... 어머니가 항상 말했었어. 자상한 언니 엘디란... 왈가닥 여동생 야미... 그리고 가장 친했던 사촌 디오... 그리고 그 외에도 몇 명의 이름을 더 말했어. 더 말해줄까? 당신의 이름이 지금가지 부른 이름 가운데 없다면 얼마든지 내가 아는 이름을 말해주겠어. 말해줘. 당신은 누구지? 당신의 이름은?]
칸피니스의 말이 결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수파니는 모든 경계심을 풀고 어둠속으로부터 벗어나 칸피니스에게 자신의 모든 모습을 보여준다.
“아아...”
드러난 상대의 모습은 전율 그 자체다. 선이 가는, 하지만 나올 데는 나온 육감적인 몸매가 어둠 속에 하얗게 서있다. 살짝 검게 그을은 피부가 하얗게 보일 정도로 황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빛나는 사이로 보이는 검은 수풀은 마치 그 어둠 속으로 몸을 한껏 담궈보라는 듯 칸피니스를 욕망을 끌어당긴다.
“꿀꺽...”
이제껏 칸피니스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아름다운 몸이다. 히리스의 알몸도 충분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눈앞의 수파니에 비하면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소녀의 그것에 불과하다. 절망과 좌절 속에 퇴락해버린 에렌프의 몸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활력과 성적인 에너지는 그 자체로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완벽이라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너무도 아름다운 몸이다.
“아... 아름답다.”
전사로서의 본능만큼이나 강한 색마로서의 본능이 지금처럼 원망스러운 때는 없었다. 어머니의 혈육인지도 모르는 수파니와 만나 그 정체를 묻고 있는 와중에도 절로 입이 벌어지며 감탄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훗...”
“아...?”
그의 모습이 우스웠던 것일까? 수파니는 칸피니스를 바라보며 살짝 웃음을 토해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매혹적인 하얀 이가 보인다. 칸피니스는 다시 침을 삼킨다.
[그게... 그... “아름답다”라는 게 예쁘다는 뜻이니?]
[아... 예.]
[훗... 내가 그렇게 예뻐?]
[예... 예뻐요. 정말... 정말 아름다워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진짜?]
[예...]
[흐흥... 그렇구나?]
역시 수파니답게 아름답다는 말에 호기심을 내비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에렌프도 그랬다. 에렌프도 표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에는 반응이 없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외모를 칭찬하거나 비하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수파니다. 익숙한 모습이기에 칸피니스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반응을 받아들인다.
[지금 유혹하려고 한건데... 안통하네요?]
[유혹? 나를 꼬시려 한거야?]
[예쁜 여자를 보면 꼬시고 싶어하는 건 남자의 본능 아닌가요?]
[하하하... 하긴 그렇지. 그래, 나랑 자고 싶은거니?]
[자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또 그것도 하고, 하여튼 다 하고 싶어요.]
[욕심이 많구나.]
[욕심 낼 만큼 매혹적이니까요.]
[칭찬이니?]
[당연히.]
[고맙구나.]
아름답다거나 매혹적이라거나 하는 말 자체가 기쁜 것은 아니다. 칭찬하는 마음, 그녀를 추구하는 마음이 기쁜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필요로 해준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녀로 하여금 진심으로 웃게 만드는 것이다.
[유혹은 유혹이고 아까 하던 말을 마저 해야겠지?]
[아...]
수파니의 말이 있고서야 비로소 칸피니스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가를 겨우 떠올린다. 색마로서의 본능이 혈연에 대한 호기심을 이긴 까닭이다.
[내 이름은 야미... 아까 네가 말한 에렌프 언니의 왈가닥 동생이야.]
[아...]
인간의 혈연으로 따지면 이모가 된다. 하지만 수파니에게는 부모와 형제 이외의 혈연은 의미가 없다. 수파니인 야미에게 있어 칸피니스는 그녀의 가족인 에렌프의 아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카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 혈연이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인연이 이어진 인간의 남자에 불과할 뿐이다.
[들어본 모양이구나? 에렌프 언니한테서 나에 대한 험담을 많이 들었겠는데?]
[하하하하...]
[웃는 것 보니까 그런 모양이구나?]
[하하하하...]
[정말인 모양인데?]
할 말이 없어서 웃는 것뿐이다. 제정신인 때가 그리 많지 않은 에렌프가 야미에 대해 많이 이야기할 게 무언가? 그저 이름이나 가끔 듣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저리 지레짐작하고 안달하는 것이 뭔가 찔리는 구석이 많은 모양이라 여겨 더욱 웃음이 터져나온다.
[뭐야? 그만 웃어!]
[하하하하... 알았어요.]
[쳇... 도대체 언니는 나에 대해 무슨 얘길 한거야?]
[글쎄요...]
[또 웃으려고? 웃지마~~!!]
[알았어요. 웃지 않을게요.]
[웃지 않을거지?]
[예.]
칸피니스를 노려보던 야미의 매서운 눈매가 웃지 않겠다 다짐하고 나니 그제서야 풀린다. 살짝 풀려내리며 반짝이는 눈빛에 칸피니스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매료되어 이끌리는 자신을 느낀다.
[그럼 말해봐.]
[예?]
[언니에 대해서.]
[예?]
[말귀를 못알아듣니? 내 언니, 그러니까 네 엄마 에렌프에 대해서 말해보라구. 잘 지내고 있겠지? 너만한 아이를 두었을 정도니까 잘 지내고 있을거야. 그렇지?]
그녀의 눈빛에 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금방이라도 폭포수처럼 흘러내를 듯 물기어린 그리움이 그녀의 큰 눈을 가득 채우고 있다. 키스해주고 싶을 정도로 그 그리움이 애절하기만 하다.
그가 들은 바로 에렌프가 델킨피에르 영지로 붙잡혀 왔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은 완벽할 정도로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 살던 수파니 가운데 살아있는 자가 에렌프까지 포함해도 열 명이 채 안될 거라 할 정도로 철저하게 학살되었다.
아마도 야미는 그 학살에서 살아남은 댓가로 친인을 모두 잃은 채 혼자서 흠악의 숲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칸피니스에게서 느껴지는 미약하고도 모호한 느낌을 무작정 쫓아왔을 정도이니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얘기해줘. 언니는... 언니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지? 응? 잘 있어? 말해줘.]
그 마음을 알기에 칸피니스는 그녀의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없다. 차마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슬픈 눈이 더 깊은 슬픔에 짐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리도 절실한 표정으로 묻고 있음에도 칸피니스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니는... 지금 행복하겠지? 지금 잘 지내고 있을거야? 그렇지? 응?]
다급하게 다그쳐 물어오는 야미의 젖은 눈을 마주하며 칸피니스는 어찌할 바 모르는 침묵 속에 잠겨 있다. 어둠조차도 더욱 큰 어둠 속에 묻혀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침묵 속에 묻힌 채 야미를 슬프게 바라볼 뿐이다.
===================================================================================================
색마검천황에 비해 색검마도지성전을 쓰는 것이 몇 배나 힘든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색마검천황은 1부 전체를 할애해서 모든 설정을 미리 실컷 떠들고 시작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1부의 연장선상에서 그 흐름에 맞추어 이끌어가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색검마도지성전은 아니죠. 색마검천황이라는 족쇄는 있는데 정작 색검마도지성전의 전반적인 흐름을 주도할 설정은 잡혀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매회 쓸 때마다 색마검천황을 쓸때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덕분에 쓰는 시간도 많이 걸려서 저로서는 무척 골치가 아픕니다. 이러다가 연재나 종료할 수 있을지...
다음회예고)) 뻔히 알면서 뭘? 어떤 내용일 것 같아요? 알아맞춰도 상품 없음.
“여긴가?”
작은 소리조차도 유난히 크게 들리는 어둠속에서 지나치게 큰 목소리다. 하지만 여전히 누구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하다. 당직 기사가 한 명 쯤 있을 법 하건만 조금의 반응도 없다. 역시나 그만큼 은밀하게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이 바로 위야.”
“흠... 그냥 현관으로 들어가면 안되나?”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역시 현관으로 들어가면 폼이 안나잖아?”
“폼? 무슨 폼?”
“생각해봐. 현관으로 당당히 들어서는 암살자와 벽을 타고 은밀히 잠입해서 몰래 목표를 처치하는 암살자, 어느 쪽이 그럴싸 하겠냐구?”
“미친...”
쓸데없는 농담을 할 정도로 두 그림자는 여유가 있다. 들킨다거나 하는 건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태도다. 무언가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일 것이다.
“줄 꺼내봐.”
“꼭 그거 해야 해?”
“응!”
“젠장...”
투덜거리면서도 한 그림자는 품에서 밧줄을 꺼낸다. 끝에 반짝거리는 쇠고리가 달린 침투용 밧줄이다. 한밤중에 움직이는 주제에 광을 죽이는 검은 칠도 해두지 않아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달빛을 받아 유난히 빛나고 있다. 물론 여전히 그 빛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 던져.”
“왜 내가 해야 하는데?”
“내가 선배니까.”
“선배?”
“내가 너보다 두 달 먼저 기사 서임 받은 거 알지?”
“그래서 선배야?”
“당연히! 한 달은 맞먹어도 두 달은 맞먹을 수 없는거라구.”
“기사가 서임날짜로 선후배 따진다는 소리는 못들어봤는데?”
“당연하지.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은 나 뿐이니까. 영광으로 알라구. 어디 가서 이런 소리 못들으니까.”
“빌어먹을! 지금 장난하냐?”
“어! 어떻게 알았어?”
“진짜 장난이었던거야?”
“응. 진담일 리 없잖아?”
“으드득... 썩을 자식이...!!!”
“어쨌든 서두르자구.”
말은 서두른다고 하는데 농담따먹기나 하며 미적대는 것이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다. 달빛에 드러난 흰 얼굴 어디에도 긴장이나 다급함은 보이지 않는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롭기만 한 모습들이다.
“그런데 꼭 죽여서 묻어야 하는거야?”
“왜?”
“하고 죽인 다음에 묻으면 안되나?”
“하긴 뭘 해?”
“그거...”
입맛을 다시며 들어올린 손은 엄지손가락을 집게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 사이에 넣어 쥐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그 손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본 다른 그림자가 한심스럽다는 듯 손의 주인을 바라본다.
“너는 이 상황에서도 그 생각이 나냐?”
“하지만 그년이 꽤 미인이란 말야. 몸매도 그럴싸하고. 무엇보다 수파니잖아? 수파니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아? 죽여준다구. 그 조이는 맛 하며, 그 뜨겁고 축축한 속이 정말... 으흐흐...”
몸까지 떨어대는 것이 상당히 흥분한 듯하다. 하지만 다른 그림자의 한심하다는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꼭 수파니와 해본 적 있는 사람같다?”
“뭐 해보진 않았지만... 꼭 해봐야 아나? 다 들려오는 이야기로...”
“그래서 한 번 해보고 싶다구?”
“응. 어차피 다리병신에 앞도 못본다며? 그냥 한 번 꿀꺽 한 다음에 사악 죽여버려도...”
“뒷처리는 어떻게 하고?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방안에 흔적이 남을텐데.”
“그정도야 어떻게 안될까? 어차피 자작이라는 인간은 허수아비 아냐?”
“그래서 그냥 막 나가자고?”
“안될까?”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 모양이다. 입맛을 다시며 노골적으로 한 번 만 봐달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절대 안돼!”
“어이~~!!!”
“명목상이라고는 하지만 자작은 우리의 주군이다. 저 수파니는 그 주군의 여자고. 사정이 이렇게 되어 죽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지만 죽이더라도 그런 욕까지 보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이 기사로서의 최소한의 명예이고 양심이다.”
“기사? 명예? 양심? 이렇게 여자 하나 암살하러 쥐새끼처럼 살금거리는 주제에?”
“이건 기사로서의 임무다.”
“얼씨구~~!! 요즘 기사는 한밤중에 여자를 암살하러 잠입하기도 하는 모양이지?”
“그래도 임무는 임무다!”
아무래도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 어디서 기사 서약서만 삶아먹고 왔는지 기사도만은 죽어도 지키겠다고 고집이다. 한 번 즐기고 끝내면 될 것을 저리도 꼬장꼬장하게 반대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젠장...!!”
힘으로 누른다면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검술로만 따진다면 자신이 조금 우위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 자칫 그로 인해 소란이 벌어져 오늘의 일이 표면으로 드러나면 모든 책임을 그들이 뒤집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아쉽더라도 미련을 접는 편이 현명하다.
“알았다. 이번만은 내가 양보하도록 하지.”
“고맙네.”
충돌로까지 번질까 걱정했던 듯 노골적으로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자신을 무슨 자제력 없는 바보쯤으로 여긴 듯 보인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용조용 넘어가기로 한 것 이번에도 참는 수밖에.
“알았으면 어서 밧줄을 던지라구. 3층이니까 정확히 맞춰야 하네.”
“걱정말게. 투척은 내가 가장 주전공 가운데 하나라구.”
“호오... 그럼 기대해보지.”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는 듯 약간은 빈정거리는 듯한 기색이 드러난다. 하지만 밧줄을 든 사내는 듣지 못했다는 듯 갈고리가 달린 쪽의 밧줄을 들고 원심력을 받기 위해 서서히 돌리기 시작한다.
“헙!!”
슈루룩--!!
충분히 원심력을 받았다고 생각되자 한줄기 기합성과 함께 탄력을 받은 밧줄을 위로 힘껏 던져올린다. 위로 돌던 힘을 그대로 위로 풀어버리자 은빛으로 반짝이는 갈고리가 밧줄을 끌고 힘차게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달칵--!!
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제 무게를 못이긴 밧줄이 스스르 미끌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정도 흘러내리더니 이내 팽팽하게 고정된다. 갈고리가 발코니에 제대로 걸린 것이다.
탁탁--!!
그래도 혹시 몰라 확인을 위해 몇 번 밧줄을 강하게 당겨본다. 한 사람이 매달린 정도의 힘을 주어도 끄떡없는 것을 보니 예상했던 대로 단단히 걸린 모양이다. 손바닥을 강하게 쓸어오는 밧줄의 거친 표면이 믿음직하게 느껴진다.
“됐어!”
“그래? 그럼 가자구!”
“알았어!”
“근데 쟤들 왜 안가고 구경하고 있냐?”
“누구?”
“저기...”
“자네라면 구경하고 싶지 않겠나?”
“나라면 달려들어서 같이 하자고 조르지.”
“훗... 미안하군. 자네를 몰라봐서.”
“알면 됐어.”
“어쨌든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구. 이렇게 은밀히 잠입해서 암살하는 것 같은 건 말야. 더구나 일 끝나고 나면 시체도 업어 날라야 하지 않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은밀? 잠입?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게 그런건가?”
“대충 그렇다고 쳐줘야지. 안그럼 성의 모든 사람들이 짜고 일을 벌였다고 할까?”
“아무래도 그건 좀 무리겠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잠입하고 있는 중이란 말야.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그럼 쟤들은?”
“달구경이라도 하고 있나보지. 아니면 수파니의 미모에 반해 그 방을 바라보고 있던지.”
“흐흐흐... 그런건가?”
“그런거야. 어쨌든 서두르자구.”
“알았어!!”
달빛이 밝은 밤. 그 밝은 어둠속으로 유난히 검은 두 개의 그림자가 밧줄을 타고 서별저의 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목적지는 3층 에렌프의 방. 안타깝게도 누구도 이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멋모르는 순찰병 몇 명이 달구경삼아 별저쪽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두 개의 그림자는 어느새 3층 발코니로 넘어들어가고 있다.
“헉!!”
나무의 섬유를 꼬아 만든 셔츠 아래로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무언가가 줄기를 이루며 흐르는 것이 선뜻한 느낌을 준다. 칼날에 베이는 듯한, 아니 그보다는 얼음의 칼날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불쾌감이다.
“젠장... 설마...”
불길한 예감에 급히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가보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흑암의 숲의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뿐이다. 별빛조차도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빽빽이 들어선 아름드리 나무들로 인해 마치 어둠 속에 그대로 내던져진 듯 막막하기만 하다.
“지금...? 지금인건가...?”
코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둠 속이지만 델킨피에르 영지가 어느쪽에 있는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처음 천막을 칠 때 방향을 미리 기억해두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칸피니스는 슬픔과 아픔으로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델킨피에르 영지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아니 노려본다는 말은 맞지 않은지도 모른다.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으로 무언가를 노려본다는 것은 불가능할테니.
“어... 어머.... 어머니...”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무언가 기도를 꽉 매운 듯 답답하게 눌러오던 것이 서서히, 그러다 급격히 빠르게 치밀어오른다. 울컥거리는 습기가 목을 타고 스며들어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헤집고 새어나온다.
“어... 어머... 어머...”
눈이 뜨겁지만 눈물은 말라있다. 한 방울, 두 방울, 서너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고 나니 더 이상의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대신 습기찬 울음이 눈물 대신 서럽게 흘러내린다. 입술을 뚫고 흘러내린 슬픔 때문인지 어느새 깊은 어둠이 눅눅하게 젖어있다.
“으... 으윽... 으윽...”
하지만 목을 타고 흘러내리기엔 슬픔의 크기가 너무 크다. 어느새 빠져나오지 못한 채 잔뜩 몰려든 슬픔이 기도륵 막고, 식도를 억눌러 서러운 울음소리마저 잦아들고 있다. 아니 잦아들었다기보다는 목 아래에서 더욱 격렬하게 안으로 터져들어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 어머... 어머니...”
슬픔이 시킨 것일까? 채 터져나오지 못한 서러움이 그를 그리 움직이게 한 것일까? 자신도 모르는 새 칸피니스는 흑암의 숲의 어둠 속으로 허브적거리며 걸어들어가고 있다. 초점조차 잡히지 못한 그의 눈은 그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어둠의 저편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으윽... 윽... 윽... 흐... 흐으... 흑... 으윽... 윽...”
억눌린 답답한 숨소리와 함께 취한 듯 흐느적거리며 어둠 속을 걷기 시작한 지 어느덧 한 시간.어디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왔는지 알지 못하니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그저 습관처럼 슬픔이 시키는대로 허브적 숲속을 헤맬 뿐이다.
“흑... 흑...”
눈물은 말라버린 지 오래다. 울음도 더 이상 새어나오지 않는다. 남은 것은 토해내지 못한 감정의 앙금 뿐이다. 가슴을 틀어막고 들어안은 채 여전히 옭죄어오는 그 답답함이 만들어내는 가늘고 거친 소음 뿐이다.
“윽... 으윽... 윽... 윽...”
분명 무언가를 말하려 했을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칸피니스는 자신이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채 깨닫기도 전에 억눌린 숨소리가 되어 그의 속 깊은 곳으로 다시 터져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습관처럼 말이 되지 못한 말은 억눌린 숨소리로 입술을 뚫고 어둠속에 묻혀간다.
하지만 슬픔을 마음껏 누리기엔 칸피니스는 너무도 뛰어난 전사다. 뛰어난 것을 넘어 경이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최고의 전사다. 그의 모든 세포는 전투를 위해 최적하되었고, 그의 모든 신경은 전투를 위해 항상 최상의 상태로 깨어나 있다. 그의 감정 또한 예외는 아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조차도 전사로서의 본능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바스락--!!
작은 낙엽소리. 너무도 작아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소리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결코 들려서는 안되는 소리다. 짐승이나 몬스터라면 이보다 더 큰 소리여야 한다.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도 이처럼 작지는 않다. 분명 지능이 있는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칸피니스의 입이 강하게 앙다물어진다. 흘러나오던 습기찬 숨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슬픔으로 이완되었던 근육이 강하게 당겨지고, 심장은 격렬하게 아직 남아있는 슬픔을 녹여가며 뜨거운 피를 그의 온몸으로 보내고 있다. 붉게 충혈된 눈이나 뺨에 남아있는 눈물자국이 슬픔의 흔적을 말해줄 뿐 이미 그의 몸과 마음 어디에도 슬픔은 남아있지 않다. 그가 너무도 뛰어난 전사인 때문이다.
“누구냐?”
나직한 목소리. 하지만 한껏 살기가 응축되어 있어 결코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소리다. 하물며 나뭇잎 소리를 저토록 억제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 살기를 더욱 무겁게 느낄 것이다.
저벅--!!
아니나 다를까! 나뭇잎 소리가 들려왔던 오른쪽 후방에서 선명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온다. 나뭇잎이 부스러지는 사이로 작은 돌이 발에 밟혀 부딪히는, 숲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소리다. 다만 사람에 비해 가벼운 듯한 것이 신경쓰일 뿐이다.
“누구냐?”
짧은 외침과 함께 칸피니스는 재빨리 몸을 띄워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다. 나아가던 방향으로 몸을 살짝 빼내어 안착했을 때 이미 칸피니스의 눈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매섭게 고정되어 있다.
“누구냐?”
분명 상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건만 상대의 위치나 정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상대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다. 다만 칸피니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기보다는 그의 뇌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의 눈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고 있음을 신호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냐?”
바스락--!!
다시 한 번 소리치니 그제서야 다시 한 번 나뭇잎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발자국 소리가 아닌 것이 칸피니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일부러 낸 듯하다.
“거기냐?”
그리 큰 소리는 아니지만 상대의 위치를 포착하기에는 충분하다. 칸피니스는 소리가 가르쳐준 방향에 신경을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정면에 누군가가 서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한다. 분명 상대는 자신의 눈이 멈추는 자리, 자신의 정면 20미터 앞에 서있다. 그것도 검을 든 채로. 다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수파니인가?”
어둠 속에 이토록 완벽하게 동화될 수 있는 종족은 둘 뿐이다. 다크엘프와 수파니다. 마족도 있기는 하지만 마족의 마기는 자연계에서 지나칠 정도로 쉽게 드러난다. 조금만 감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별다른 수련 없이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다.
“아니면 다크엘프인가?”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살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적의를 가진 것은 아닌 듯 하다. 칸피니스와 적대하고자 했다면 일부러 소리를 내어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 호의는 아니더라도 적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지켜보겠다는 것인가? 나에게 무언가 확인할 것이 있나?”
크게 소리쳐 물어보지만 상대는 계속해서 침묵할 뿐이다. 그러나 조금전과는 다른 움직임이 느껴진다. 작은 움직임. 체온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흐름의 작은 변화일 뿐이지만 분명 보이지 않는 상대의 심리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가 분명하다. 칸피니스는 큰 기대를 가지고 정면을 주시하는 시선을 늦추지 않는다.
“나에게 볼 일이 있나?”
이번에는 무언가 반응이 있다. 그러나 칸피니스가 생각한 것과는 한참 거리가 먼 반응이다.
“@$$%$^&**^((((*()”
낮은 허스키 보이스지만 그 안에 섞인 맑은 울림은 분명 여자의 그것이다. 중성적인 느낌이라 약간 모호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칸피니스는 목소리의 주인이 여자일 것이라 확신한다. 칸피니스이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목소리에 실려온 말은 들어본 적 없는 말이다. 제국 공통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남제후령 토착어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너무도 생소한 말이다. 어쩌면 인간의 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인거지?]
칸피니스의 짐작대로 상대가 하는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니다. 하지만 칸피니스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인간의 말이 아니면서 칸피니스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단 한 가지 뿐이다. 그의 어머니 에렌프가 쓰던 수파니어. 여자가 쓰고 있는 말은 수파니어가 분명하다.
[수파니인가?]
[수파니어를 아나?]
역시 수파니어가 맞다. 에렌프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어설프게 배운 수파니어에 상대가 정확히 반응해온다. 인간이 수파니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기색이 그녀의 대꾸에 역력히 드러나 있다.
[내 어머니가 수파니였다]
[수파니?]
칸피니스가 수파니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놀란 모습이다. 숲의 어둠에 동화되어 있던 것이 깨져버려 그 모습이 고스란히 칸피니스에게 노출된 것을 보니 말이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상대는 다른 수파니가 그렇듯 아름다운 얼굴에 갸녀린 몸매를 지닌 칸피니스가 놀랄 정도의 미인이다. 수파니 특유의 검고 곧은 머리카락과 빛마저 삼켜버릴 듯한 검은 눈동자가 갈색 피부와 절묘하게 어울리며 뿜어내는 독특한 아름다움은 여자에 익숙한 칸피니스마저도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던져준다. 지금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사랑을 구걸하고 싶어질 정도로 그녀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호... 혹시 에... 렌프?]
그녀에게 매혹되어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그에게 수파니는 전혀 의외의 이름을 물어온다. 수파니의 입에서 들으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름이다.
[어머니를 아나?]
[저... 정말 에렌프의 아들?]
[당신... 어머니를 아나?]
[믿기지 않아. 인간에게서 너무도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기에 순전히 호기심으로 쫓아왔던 것 뿐인데... 설마... 설마 에렌프의 아들이라니!]
칸피니스가 놀란 만큼 상대 수파니도 많이 놀란 모양이다. 칸피니스가 묻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칸피니스가 에렌프의 자식이라는 사실만을 계속 반복해서 되뇌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다... 당신... 어머니를 알아?]
[아아... 에렌프가 낳은 아이가 너구나. 인간에게 붙잡혀가서 낳은 인간의 아이가 바로 너였어.]
증오일까 슬픔일까? 어느새 수파니와 동화되어버린 어둠이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채 제 무게에 못 이겨 힘없이 늘어져 내린다. 어둠 그 자체인 듯한 검은 눈동자에도 습기찬 반사막이 작은 빛을 반사하며 빛나기 시작한다. 아마도 눈물일 것이다.
[어... 어머니를 알아? 당신... 당신... 어머니의 가족이야? 호... 혹시... 엘디란? 아... 아니면 야미? 그도 아니면 디오?...]
칸피니스의 다급한 외침에 수파니 주위의 어둠이 다시 살아난다. 놀라움이 수파니를 다시 일깨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 그 이름들을 어떻게...? 네... 네가... 에... 에렌... 프가... 말해준거야?]
칸피니스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의 혈육인 듯한 수파니를 만났으니 조금이라도 발리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조금전 토해내지 못한 슬픔의 잔재일까? 어느새 칸피니스의 눈에도 뿌연 습막이 어려있다.
[어... 어머니가 항상 말했었어. 자상한 언니 엘디란... 왈가닥 여동생 야미... 그리고 가장 친했던 사촌 디오... 그리고 그 외에도 몇 명의 이름을 더 말했어. 더 말해줄까? 당신의 이름이 지금가지 부른 이름 가운데 없다면 얼마든지 내가 아는 이름을 말해주겠어. 말해줘. 당신은 누구지? 당신의 이름은?]
칸피니스의 말이 결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수파니는 모든 경계심을 풀고 어둠속으로부터 벗어나 칸피니스에게 자신의 모든 모습을 보여준다.
“아아...”
드러난 상대의 모습은 전율 그 자체다. 선이 가는, 하지만 나올 데는 나온 육감적인 몸매가 어둠 속에 하얗게 서있다. 살짝 검게 그을은 피부가 하얗게 보일 정도로 황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빛나는 사이로 보이는 검은 수풀은 마치 그 어둠 속으로 몸을 한껏 담궈보라는 듯 칸피니스를 욕망을 끌어당긴다.
“꿀꺽...”
이제껏 칸피니스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아름다운 몸이다. 히리스의 알몸도 충분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눈앞의 수파니에 비하면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소녀의 그것에 불과하다. 절망과 좌절 속에 퇴락해버린 에렌프의 몸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활력과 성적인 에너지는 그 자체로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완벽이라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너무도 아름다운 몸이다.
“아... 아름답다.”
전사로서의 본능만큼이나 강한 색마로서의 본능이 지금처럼 원망스러운 때는 없었다. 어머니의 혈육인지도 모르는 수파니와 만나 그 정체를 묻고 있는 와중에도 절로 입이 벌어지며 감탄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훗...”
“아...?”
그의 모습이 우스웠던 것일까? 수파니는 칸피니스를 바라보며 살짝 웃음을 토해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매혹적인 하얀 이가 보인다. 칸피니스는 다시 침을 삼킨다.
[그게... 그... “아름답다”라는 게 예쁘다는 뜻이니?]
[아... 예.]
[훗... 내가 그렇게 예뻐?]
[예... 예뻐요. 정말... 정말 아름다워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진짜?]
[예...]
[흐흥... 그렇구나?]
역시 수파니답게 아름답다는 말에 호기심을 내비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에렌프도 그랬다. 에렌프도 표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에는 반응이 없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외모를 칭찬하거나 비하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수파니다. 익숙한 모습이기에 칸피니스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반응을 받아들인다.
[지금 유혹하려고 한건데... 안통하네요?]
[유혹? 나를 꼬시려 한거야?]
[예쁜 여자를 보면 꼬시고 싶어하는 건 남자의 본능 아닌가요?]
[하하하... 하긴 그렇지. 그래, 나랑 자고 싶은거니?]
[자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또 그것도 하고, 하여튼 다 하고 싶어요.]
[욕심이 많구나.]
[욕심 낼 만큼 매혹적이니까요.]
[칭찬이니?]
[당연히.]
[고맙구나.]
아름답다거나 매혹적이라거나 하는 말 자체가 기쁜 것은 아니다. 칭찬하는 마음, 그녀를 추구하는 마음이 기쁜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필요로 해준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녀로 하여금 진심으로 웃게 만드는 것이다.
[유혹은 유혹이고 아까 하던 말을 마저 해야겠지?]
[아...]
수파니의 말이 있고서야 비로소 칸피니스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가를 겨우 떠올린다. 색마로서의 본능이 혈연에 대한 호기심을 이긴 까닭이다.
[내 이름은 야미... 아까 네가 말한 에렌프 언니의 왈가닥 동생이야.]
[아...]
인간의 혈연으로 따지면 이모가 된다. 하지만 수파니에게는 부모와 형제 이외의 혈연은 의미가 없다. 수파니인 야미에게 있어 칸피니스는 그녀의 가족인 에렌프의 아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카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 혈연이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인연이 이어진 인간의 남자에 불과할 뿐이다.
[들어본 모양이구나? 에렌프 언니한테서 나에 대한 험담을 많이 들었겠는데?]
[하하하하...]
[웃는 것 보니까 그런 모양이구나?]
[하하하하...]
[정말인 모양인데?]
할 말이 없어서 웃는 것뿐이다. 제정신인 때가 그리 많지 않은 에렌프가 야미에 대해 많이 이야기할 게 무언가? 그저 이름이나 가끔 듣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저리 지레짐작하고 안달하는 것이 뭔가 찔리는 구석이 많은 모양이라 여겨 더욱 웃음이 터져나온다.
[뭐야? 그만 웃어!]
[하하하하... 알았어요.]
[쳇... 도대체 언니는 나에 대해 무슨 얘길 한거야?]
[글쎄요...]
[또 웃으려고? 웃지마~~!!]
[알았어요. 웃지 않을게요.]
[웃지 않을거지?]
[예.]
칸피니스를 노려보던 야미의 매서운 눈매가 웃지 않겠다 다짐하고 나니 그제서야 풀린다. 살짝 풀려내리며 반짝이는 눈빛에 칸피니스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매료되어 이끌리는 자신을 느낀다.
[그럼 말해봐.]
[예?]
[언니에 대해서.]
[예?]
[말귀를 못알아듣니? 내 언니, 그러니까 네 엄마 에렌프에 대해서 말해보라구. 잘 지내고 있겠지? 너만한 아이를 두었을 정도니까 잘 지내고 있을거야. 그렇지?]
그녀의 눈빛에 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금방이라도 폭포수처럼 흘러내를 듯 물기어린 그리움이 그녀의 큰 눈을 가득 채우고 있다. 키스해주고 싶을 정도로 그 그리움이 애절하기만 하다.
그가 들은 바로 에렌프가 델킨피에르 영지로 붙잡혀 왔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은 완벽할 정도로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 살던 수파니 가운데 살아있는 자가 에렌프까지 포함해도 열 명이 채 안될 거라 할 정도로 철저하게 학살되었다.
아마도 야미는 그 학살에서 살아남은 댓가로 친인을 모두 잃은 채 혼자서 흠악의 숲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칸피니스에게서 느껴지는 미약하고도 모호한 느낌을 무작정 쫓아왔을 정도이니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얘기해줘. 언니는... 언니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지? 응? 잘 있어? 말해줘.]
그 마음을 알기에 칸피니스는 그녀의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없다. 차마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슬픈 눈이 더 깊은 슬픔에 짐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리도 절실한 표정으로 묻고 있음에도 칸피니스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니는... 지금 행복하겠지? 지금 잘 지내고 있을거야? 그렇지? 응?]
다급하게 다그쳐 물어오는 야미의 젖은 눈을 마주하며 칸피니스는 어찌할 바 모르는 침묵 속에 잠겨 있다. 어둠조차도 더욱 큰 어둠 속에 묻혀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침묵 속에 묻힌 채 야미를 슬프게 바라볼 뿐이다.
===================================================================================================
색마검천황에 비해 색검마도지성전을 쓰는 것이 몇 배나 힘든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색마검천황은 1부 전체를 할애해서 모든 설정을 미리 실컷 떠들고 시작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1부의 연장선상에서 그 흐름에 맞추어 이끌어가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색검마도지성전은 아니죠. 색마검천황이라는 족쇄는 있는데 정작 색검마도지성전의 전반적인 흐름을 주도할 설정은 잡혀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매회 쓸 때마다 색마검천황을 쓸때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덕분에 쓰는 시간도 많이 걸려서 저로서는 무척 골치가 아픕니다. 이러다가 연재나 종료할 수 있을지...
다음회예고)) 뻔히 알면서 뭘? 어떤 내용일 것 같아요? 알아맞춰도 상품 없음.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
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0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태그 | |||
황진이-무료한국야동,일본야동,중국야동,성인야설,토렌트,성인야사,애니야동
야동토렌트, 국산야동토렌트, 성인토렌트, 한국야동, 중국야동토렌트, 19금토렌트 |
추천 0 비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