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몽(千日夢) - 50부-
한편, 재식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린이 엄마, 아니 정애씨가 소파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물론 어젯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암캐같이 행동하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정숙한 모습으로 되돌아 와 있었고 어떻게 보면 근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앉으세요~ 피곤하시죠?"
"아...아니...아...예...예~ 조금...."
"대단하세요~ 어젯밤 몹시 지치셨을텐데...후 훗!!"
재식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정애씨의 말에는 필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뜻이 다분히 담겨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조금전 지현이와의 일을 모두 안다는 말인가? 하긴 비밀이 없는 집안이니까...
"아...저어~ 그...그건..."
재식은 몹시 당황했으나 여인의 표정으로 봐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저어~ 제가 제안한 그 일 때문에...드리는 말씀인데...생각을 해 보셨나요?"
재식은 또다시 말문이 막힌다.
어쩌면 깊이 생각을 해 본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으 흐 흠~ 그...그게...저어~"
물론 재식이 생각 나는대로 말을 해 버리면 될 문제지만
정애의 눈치를보니 아마 재식의 대답에 따라서 또 다른 결정이 내려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저어~ 그건 저...정애씨가 저 대신 겨...결정을 지어 주시면 안될까요?"
정애는 순간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흘렀다.
"흐흠~ 그 말씀은 상동에 계신 그 분을 잊지 못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예에~ 그..그것도 마..맞는 말이죠... 아무래도 전... 그 쪼...그 쪽을...."
재식은 말을 하면서도 바로 후회가 되었다.
비록 버벅거리는 말이었지만 그 말 자체에서 모든 것이 들어났으며
정애가 제시하는 것들을 포기 한다는 말인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더 이상 매달리진 않겠습니다...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아니...그 동 안 이 라 면...그..그 말 은???"
재식의 머리에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없다.
침묵이 지속되자 재식은 정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무척 긴장이 된다.
"저어~ 이젠 선생님을 놓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네엣??? 놓아 주다니요? 그게 무...무슨...?"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으셔도 되고... 저희들도 더 이상 찾지 않겠습니다..."
재식은 잠시 현기증이 일어나는 듯 했다.
물론 올 것이 오고야 말았지만
그 말은 마치 오랫동안 맺어진 인연의 고리를 끊어버리겠다는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당연히 기뻐해야겠지만 왜 그리 허탈하게 느껴지는지...
재식은 지금 정애의 말이 귓가에 윙윙거릴 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저어~ 이것은 그동안 저희들을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사례입니다..."
정애는 탁자위에 자그마한 통장 하나를 내 민다.
아마 정애씨의 배포라면 그 통장 안에는 엄청난 금액의 돈이 들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식은 그 통장이 반갑기는 커녕 오히려 서운하게 느껴지는 것은 왠일일까?
"잊지 않을꺼예요~ 예린이나 수린이도 그럴꺼구요~ "
"저어~자..잘 알겠습니다...그..그동안...정도..많이..."
재식은 더 이상 말을 잇질 못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정애의 눈에서 이슬이 맺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아..안 돼~~ 엄마~~ 아빠를 보내지 마~ 허헝~~ 헝~"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 예린이가 뛰어 들어오더니 재식의 품에 안겨버린다.
"아빠~ 흐흑... 안 갈꺼지? 응? 안가도 되잖아... 허헝~ 헝~ 엄마... 아빠가 안가게 해 줘...엉??"
예린이는 울음은 거의 몸부림에 가까웠다.
이렇게 아빠의 정이 그리운 아이를 두고 떠나야 하다니...재식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면 안될까? 지금처럼 승희네와 이곳을 오가며 지낼순 없을까?
재식은 미련이 남았는지 정애를 힐끗 쳐다 보았다.
하지만 정애는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린다.
"아빠~ 안가도 되잖아~ 허헝~ 안가도 되지? 승희라는 애 부다가 내가 더 좋잖아...허엉~ ? "
"예...예 린 아 ...흐윽!! "
눈물로 범벅이 되어버린 예린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재식은 더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아빠가 가며언~ 난 이제부터 밥도 안먹을꺼야~ 허헉...헝~ 그래도 좋아? 엉 엉 엉~"
정애는 예린이의 통곡에도 눈가에 맺힌 이슬만 닦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린다.
재식은 짐작한다.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고...
"아빤 나빠~ 흐흑!!"
갑자기 재식의 등뒤에서 들려오는 울음섞인 그 한마디,
언제 들어왔는지 방문 앞에는 눈이 발그스름해진 수린이가 서 있다.
"수..수린아~ 흐흠~"
"엄마가 아빨 얼마나 좋아 했는지 알아요? 흐흑... 말은 비록 하지 않았지만 ... 처음 집으로 올때부터...흐흑.."
그렇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전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집으로 끌어 들인다는 건 필시 또 다른 감정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걸 왜 짐작하지 못했을까? 내가 그리 바보란 말인가?
재식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판단에 가슴이 아파온다.
"승희란 애가 그렇게 좋구...승희엄마라는 여자가 그렇게도 좋았어요? 아빠는 우리가 얼마나 아빠를 좋아했는지...흐흑... 알기나 하냐구요? 나 안~ 흐흑... 나 안~ 허 허 헝~~"
수린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재식은 듣지 않아도 잘 안다.
자신의 고통을 참아가면서도 아빠를 갖고 싶어했던 수린이가 아닌가?
여린 살결, 겨우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랫도리를 벌려주면서 까지 아빠를 갖고 싶어했던 수린이었다.
그런 수린이에게 재식은 상처를 주었고 지금은 마음에까지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승희 엄마에게 집착을 하는걸까?
자신의 약점때문에 외도를 해야 한다는 승희엄마에게 집착을 하는 이유는 무었일까?
재식은 자신이 왜 그렇게 결정을 했는지도 모른다.
꼭 무엇에 홀린 것만 같다.
지난 날을 따지듯이 재식을 만류하는 수린이,
그리고 목을 끌어 안은 채 가지 말라고 매어 달리는 예린이,
그러나 재식은 더 이상 이 집에 머무를 수는 없다.
시간을 끌면 끌 수록 마음만 더 아플 것이고 아이들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재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전 정애가 매몰차게 나가 버렸듯이 재식도 이젠 이 방을 나와야 한다.
"아 빠 아~ 안 돼~ 가지마아~ 허헝...엉 엉~~ 허헝~"
"흐흑... 이 바보야~ 니가 아무리 그래봐.... 아빠는 이제 가야 한단 말이야...허 엉~ 헝~"
재식은 매어달리는 예린이의 팔을 끌다시피 하면서 방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온다.
한발 한발 내려가는 그 계단이 오늘따라 왜 그리 짧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거실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 열린 방문마다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띈다.
아쉬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그 얼굴들, 그러나 그 다정스런 얼굴들도 이제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게 크게 느껴지던 거실도 오늘따라 아주 작게 보인다.
드디어 거실문이 열렸다.
이젠 예린이도 포기를 했는지 울기만 하면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 같다.
미소가 가득하던 얼굴들, 천사의 얼굴에는 이제 닭똥같은 눈물만이 가득하다.
재식은 흐느끼느라 들썩거리는 예린이의 작은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예 린 이~ 잘 있 어~ 아빠는 천사같은 예린이를 잊지 못할꺼야~ 흐흡!! 그리고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꺼구..."
"흐흑...허 엉 엉~ 흐 흐 흑!!"
예린이는 목이 메이는지 아무런 말도 하질 못한다.
"흐흣... 아...안 녕 히 ...가 세 요~ 나 중 에..... 꼭 뵈 요~ 흐흑.."
같이 따라나와 곁에 섰던 수린이의 눈물섞인 마지막 인사다.
재식은 더이상 아이들을 볼 수가 없다.
흐르는 눈물로 인해 아이들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기 때문이다.
재식은 차문을 열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키를 돌렸다.
매정한 엔진은 이들의 속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힘찬 소리와 함께 돌아가고 있다.
아이들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재식은 마지막 아이들의 모습을 가슴에 담으려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예린이가 손을 흔들어 준다.
"안 녕~........................................... 아 저 씨 이~"
아저씨...아저씨...아저씨라니...
그렇다 이젠 더이상 예린이와 수린이의 아빠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아저씨가 당연한 것 아닌가?
재식은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이미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백밀러에는 예린이와 수린이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상동을 향하는 재식의 가슴은 지난번처럼 가볍고 들뜨지만은 않았다.
뭔가 허전하고 뭔가의 아쉬움이 밀려와 남아 무겁기만 하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 길은 가깝게만 느껴진다. 어느새 상동의 입구에 다달랐고 집앞이 보인다.
잘 살아야지... 천사같은 아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까지 택한 길이니 더욱 열심히 살아야지...
이젠 돈도 있겠다. 아니... 그런데 얼마인지도 모르는 그 통장이??
재식은 그 순간 예린이 엄마가 주었던 통장을 들고 나오질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이건 실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실수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아 갈 수는 없다.
재식은 또다시 허탈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그래... 오히려 잘 된거야... 잊으려면 모두 잊어버리는게 좋아...
미련을 갖지 말자고 다짐을 할 때 쯤, 어느새 재식은 집앞까지 와 있었다.
"빵 빵~~ 빵 빵~~"
대문앞에 차를 세운 뒤 클렉션을 몇번 눌렀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아니...승희는 뭐 하는거야... 아빠가 왔는데...이녀석이~"
차문을 열고 내린 재식이 대문으로 다가가 대문을 두드리려고 하자 문이 힘없이 열려버린다.
"거기 아무도 안 살아요~ 그저께 모두 이사 갔다우~"
지나가던 노파가 재식을 보면서 어깨너머로 던진 말이다.
"아니 뭣이라고요? 그럴리가?? 그럴리가? "
재식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안으로 급히 들어가 보았다. 아무도 없다. 모든것이 텅텅 비었다.
이건 아니다. 이럴수는 없다. 어떻게 선택한 길인데,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안 돼~~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란 말이야.... 승 희 야~~"
"아...아 니~~ 아 빠 아~ 어..엄마 ... 아빠가 깨어났어... 아빠~~"
"허헉...여..여..여 보~ 으 흐 흐 흑!!! 여 보 오~"
꿈속처럼 아련하게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재식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아빠라니... 여보라니...
재식은 눈을 번쩍 뜨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이 찌푸둥한게 잘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금전 자신을 두고 도망 갔다던 승희와 승희엄마가 재식의 눈앞에 있질 않은가?
"아..아니~~ 스..승희야... 그..그리고 다..당신..."
"아 빠 아~ 와아~ 아빠가 살아났네... 와 아~"
그것은 틀림없는 승희였다. 그런데 살아나다니? 그렇다면 내가???
"아니...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렇다면 내가 이제까지...흐흡..."
곁에있던 승희엄마, 아니 부인이 손을 꼭 잡더니
"흐흑...다..당신이 33개월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는데...흐흑..그런데 오늘 이렇게..."
33개월이라니... 33개월이라면 천일인데 내가 천일동안 잠을 자다니?
그럼 그 동안의 모든 일들이 꿈속에서의 일이었단 말인가?
깨어난 재식은 오히려 지금 상황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예린이와 수린이의 모습과 그 식구들의 모습도 또렸이 떠오르고
조금전 가슴아프게 헤어지던 기억도 너무나 생생하다. 도저히 꿈 같질 않다.
어쩌면 그것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아니었을까?
승희와 승희엄마를 선택한 것이 되 살아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휴~ 당신은 식물인간이면서도 어쩜 매일같이 사정을 해요? 나참...승희보기가 민망해서.."
두 눈에 기쁨의 눈물이 가득 고인 부인이 귓속말로 소근거린다.
"뭐어....내가 그랬어? 으흠~ 그랬을꺼야~ 아암... 천일..천일.. 천일몽이네...하 하 하~"
- 천일몽(千日夢) 끝 -
= 글을 마치며 =
지금까지 천일몽(千日夢)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글이 많이 지연된 것에대해 머리숙여 사과를 드립니다.
지난 12월 23일 천일몽(千日夢)을 쓰기 시작하여 5개월이 넘는 동안 제게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공적인 일을 비롯하여 개인적인 일까지 겹쳐져 도중에 포기 하려던 생각도 몇번 있었구요.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이유중에 하나는 승희엄마와의 만남에서
처음 생각과 조금 다르게 시도해 버리는 바람에 글이 흐트러지게 된 것이랍니다.
아무튼 오늘 마무리를 하면서 제게는 만족감 보다가 또하나의 아쉬움이 남게 되는군요.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즐겁고 행복한 가정 되시기를 두손모아 기도 드리겠습니다.
-소백산 아래에서 kw 배상-
한편, 재식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린이 엄마, 아니 정애씨가 소파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물론 어젯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암캐같이 행동하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정숙한 모습으로 되돌아 와 있었고 어떻게 보면 근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앉으세요~ 피곤하시죠?"
"아...아니...아...예...예~ 조금...."
"대단하세요~ 어젯밤 몹시 지치셨을텐데...후 훗!!"
재식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정애씨의 말에는 필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뜻이 다분히 담겨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조금전 지현이와의 일을 모두 안다는 말인가? 하긴 비밀이 없는 집안이니까...
"아...저어~ 그...그건..."
재식은 몹시 당황했으나 여인의 표정으로 봐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저어~ 제가 제안한 그 일 때문에...드리는 말씀인데...생각을 해 보셨나요?"
재식은 또다시 말문이 막힌다.
어쩌면 깊이 생각을 해 본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으 흐 흠~ 그...그게...저어~"
물론 재식이 생각 나는대로 말을 해 버리면 될 문제지만
정애의 눈치를보니 아마 재식의 대답에 따라서 또 다른 결정이 내려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저어~ 그건 저...정애씨가 저 대신 겨...결정을 지어 주시면 안될까요?"
정애는 순간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흘렀다.
"흐흠~ 그 말씀은 상동에 계신 그 분을 잊지 못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예에~ 그..그것도 마..맞는 말이죠... 아무래도 전... 그 쪼...그 쪽을...."
재식은 말을 하면서도 바로 후회가 되었다.
비록 버벅거리는 말이었지만 그 말 자체에서 모든 것이 들어났으며
정애가 제시하는 것들을 포기 한다는 말인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더 이상 매달리진 않겠습니다...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아니...그 동 안 이 라 면...그..그 말 은???"
재식의 머리에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없다.
침묵이 지속되자 재식은 정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무척 긴장이 된다.
"저어~ 이젠 선생님을 놓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네엣??? 놓아 주다니요? 그게 무...무슨...?"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으셔도 되고... 저희들도 더 이상 찾지 않겠습니다..."
재식은 잠시 현기증이 일어나는 듯 했다.
물론 올 것이 오고야 말았지만
그 말은 마치 오랫동안 맺어진 인연의 고리를 끊어버리겠다는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당연히 기뻐해야겠지만 왜 그리 허탈하게 느껴지는지...
재식은 지금 정애의 말이 귓가에 윙윙거릴 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저어~ 이것은 그동안 저희들을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사례입니다..."
정애는 탁자위에 자그마한 통장 하나를 내 민다.
아마 정애씨의 배포라면 그 통장 안에는 엄청난 금액의 돈이 들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식은 그 통장이 반갑기는 커녕 오히려 서운하게 느껴지는 것은 왠일일까?
"잊지 않을꺼예요~ 예린이나 수린이도 그럴꺼구요~ "
"저어~자..잘 알겠습니다...그..그동안...정도..많이..."
재식은 더 이상 말을 잇질 못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정애의 눈에서 이슬이 맺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아..안 돼~~ 엄마~~ 아빠를 보내지 마~ 허헝~~ 헝~"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 예린이가 뛰어 들어오더니 재식의 품에 안겨버린다.
"아빠~ 흐흑... 안 갈꺼지? 응? 안가도 되잖아... 허헝~ 헝~ 엄마... 아빠가 안가게 해 줘...엉??"
예린이는 울음은 거의 몸부림에 가까웠다.
이렇게 아빠의 정이 그리운 아이를 두고 떠나야 하다니...재식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면 안될까? 지금처럼 승희네와 이곳을 오가며 지낼순 없을까?
재식은 미련이 남았는지 정애를 힐끗 쳐다 보았다.
하지만 정애는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린다.
"아빠~ 안가도 되잖아~ 허헝~ 안가도 되지? 승희라는 애 부다가 내가 더 좋잖아...허엉~ ? "
"예...예 린 아 ...흐윽!! "
눈물로 범벅이 되어버린 예린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재식은 더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아빠가 가며언~ 난 이제부터 밥도 안먹을꺼야~ 허헉...헝~ 그래도 좋아? 엉 엉 엉~"
정애는 예린이의 통곡에도 눈가에 맺힌 이슬만 닦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린다.
재식은 짐작한다.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고...
"아빤 나빠~ 흐흑!!"
갑자기 재식의 등뒤에서 들려오는 울음섞인 그 한마디,
언제 들어왔는지 방문 앞에는 눈이 발그스름해진 수린이가 서 있다.
"수..수린아~ 흐흠~"
"엄마가 아빨 얼마나 좋아 했는지 알아요? 흐흑... 말은 비록 하지 않았지만 ... 처음 집으로 올때부터...흐흑.."
그렇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전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집으로 끌어 들인다는 건 필시 또 다른 감정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걸 왜 짐작하지 못했을까? 내가 그리 바보란 말인가?
재식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판단에 가슴이 아파온다.
"승희란 애가 그렇게 좋구...승희엄마라는 여자가 그렇게도 좋았어요? 아빠는 우리가 얼마나 아빠를 좋아했는지...흐흑... 알기나 하냐구요? 나 안~ 흐흑... 나 안~ 허 허 헝~~"
수린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재식은 듣지 않아도 잘 안다.
자신의 고통을 참아가면서도 아빠를 갖고 싶어했던 수린이가 아닌가?
여린 살결, 겨우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랫도리를 벌려주면서 까지 아빠를 갖고 싶어했던 수린이었다.
그런 수린이에게 재식은 상처를 주었고 지금은 마음에까지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승희 엄마에게 집착을 하는걸까?
자신의 약점때문에 외도를 해야 한다는 승희엄마에게 집착을 하는 이유는 무었일까?
재식은 자신이 왜 그렇게 결정을 했는지도 모른다.
꼭 무엇에 홀린 것만 같다.
지난 날을 따지듯이 재식을 만류하는 수린이,
그리고 목을 끌어 안은 채 가지 말라고 매어 달리는 예린이,
그러나 재식은 더 이상 이 집에 머무를 수는 없다.
시간을 끌면 끌 수록 마음만 더 아플 것이고 아이들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재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전 정애가 매몰차게 나가 버렸듯이 재식도 이젠 이 방을 나와야 한다.
"아 빠 아~ 안 돼~ 가지마아~ 허헝...엉 엉~~ 허헝~"
"흐흑... 이 바보야~ 니가 아무리 그래봐.... 아빠는 이제 가야 한단 말이야...허 엉~ 헝~"
재식은 매어달리는 예린이의 팔을 끌다시피 하면서 방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온다.
한발 한발 내려가는 그 계단이 오늘따라 왜 그리 짧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거실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 열린 방문마다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띈다.
아쉬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그 얼굴들, 그러나 그 다정스런 얼굴들도 이제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게 크게 느껴지던 거실도 오늘따라 아주 작게 보인다.
드디어 거실문이 열렸다.
이젠 예린이도 포기를 했는지 울기만 하면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 같다.
미소가 가득하던 얼굴들, 천사의 얼굴에는 이제 닭똥같은 눈물만이 가득하다.
재식은 흐느끼느라 들썩거리는 예린이의 작은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예 린 이~ 잘 있 어~ 아빠는 천사같은 예린이를 잊지 못할꺼야~ 흐흡!! 그리고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꺼구..."
"흐흑...허 엉 엉~ 흐 흐 흑!!"
예린이는 목이 메이는지 아무런 말도 하질 못한다.
"흐흣... 아...안 녕 히 ...가 세 요~ 나 중 에..... 꼭 뵈 요~ 흐흑.."
같이 따라나와 곁에 섰던 수린이의 눈물섞인 마지막 인사다.
재식은 더이상 아이들을 볼 수가 없다.
흐르는 눈물로 인해 아이들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기 때문이다.
재식은 차문을 열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키를 돌렸다.
매정한 엔진은 이들의 속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힘찬 소리와 함께 돌아가고 있다.
아이들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재식은 마지막 아이들의 모습을 가슴에 담으려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예린이가 손을 흔들어 준다.
"안 녕~........................................... 아 저 씨 이~"
아저씨...아저씨...아저씨라니...
그렇다 이젠 더이상 예린이와 수린이의 아빠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아저씨가 당연한 것 아닌가?
재식은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이미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백밀러에는 예린이와 수린이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상동을 향하는 재식의 가슴은 지난번처럼 가볍고 들뜨지만은 않았다.
뭔가 허전하고 뭔가의 아쉬움이 밀려와 남아 무겁기만 하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 길은 가깝게만 느껴진다. 어느새 상동의 입구에 다달랐고 집앞이 보인다.
잘 살아야지... 천사같은 아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까지 택한 길이니 더욱 열심히 살아야지...
이젠 돈도 있겠다. 아니... 그런데 얼마인지도 모르는 그 통장이??
재식은 그 순간 예린이 엄마가 주었던 통장을 들고 나오질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이건 실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실수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아 갈 수는 없다.
재식은 또다시 허탈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그래... 오히려 잘 된거야... 잊으려면 모두 잊어버리는게 좋아...
미련을 갖지 말자고 다짐을 할 때 쯤, 어느새 재식은 집앞까지 와 있었다.
"빵 빵~~ 빵 빵~~"
대문앞에 차를 세운 뒤 클렉션을 몇번 눌렀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아니...승희는 뭐 하는거야... 아빠가 왔는데...이녀석이~"
차문을 열고 내린 재식이 대문으로 다가가 대문을 두드리려고 하자 문이 힘없이 열려버린다.
"거기 아무도 안 살아요~ 그저께 모두 이사 갔다우~"
지나가던 노파가 재식을 보면서 어깨너머로 던진 말이다.
"아니 뭣이라고요? 그럴리가?? 그럴리가? "
재식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안으로 급히 들어가 보았다. 아무도 없다. 모든것이 텅텅 비었다.
이건 아니다. 이럴수는 없다. 어떻게 선택한 길인데,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안 돼~~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란 말이야.... 승 희 야~~"
"아...아 니~~ 아 빠 아~ 어..엄마 ... 아빠가 깨어났어... 아빠~~"
"허헉...여..여..여 보~ 으 흐 흐 흑!!! 여 보 오~"
꿈속처럼 아련하게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재식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아빠라니... 여보라니...
재식은 눈을 번쩍 뜨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이 찌푸둥한게 잘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금전 자신을 두고 도망 갔다던 승희와 승희엄마가 재식의 눈앞에 있질 않은가?
"아..아니~~ 스..승희야... 그..그리고 다..당신..."
"아 빠 아~ 와아~ 아빠가 살아났네... 와 아~"
그것은 틀림없는 승희였다. 그런데 살아나다니? 그렇다면 내가???
"아니...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렇다면 내가 이제까지...흐흡..."
곁에있던 승희엄마, 아니 부인이 손을 꼭 잡더니
"흐흑...다..당신이 33개월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는데...흐흑..그런데 오늘 이렇게..."
33개월이라니... 33개월이라면 천일인데 내가 천일동안 잠을 자다니?
그럼 그 동안의 모든 일들이 꿈속에서의 일이었단 말인가?
깨어난 재식은 오히려 지금 상황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예린이와 수린이의 모습과 그 식구들의 모습도 또렸이 떠오르고
조금전 가슴아프게 헤어지던 기억도 너무나 생생하다. 도저히 꿈 같질 않다.
어쩌면 그것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아니었을까?
승희와 승희엄마를 선택한 것이 되 살아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휴~ 당신은 식물인간이면서도 어쩜 매일같이 사정을 해요? 나참...승희보기가 민망해서.."
두 눈에 기쁨의 눈물이 가득 고인 부인이 귓속말로 소근거린다.
"뭐어....내가 그랬어? 으흠~ 그랬을꺼야~ 아암... 천일..천일.. 천일몽이네...하 하 하~"
- 천일몽(千日夢) 끝 -
= 글을 마치며 =
지금까지 천일몽(千日夢)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글이 많이 지연된 것에대해 머리숙여 사과를 드립니다.
지난 12월 23일 천일몽(千日夢)을 쓰기 시작하여 5개월이 넘는 동안 제게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공적인 일을 비롯하여 개인적인 일까지 겹쳐져 도중에 포기 하려던 생각도 몇번 있었구요.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이유중에 하나는 승희엄마와의 만남에서
처음 생각과 조금 다르게 시도해 버리는 바람에 글이 흐트러지게 된 것이랍니다.
아무튼 오늘 마무리를 하면서 제게는 만족감 보다가 또하나의 아쉬움이 남게 되는군요.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즐겁고 행복한 가정 되시기를 두손모아 기도 드리겠습니다.
-소백산 아래에서 kw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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