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FOUR - the clue
" 힘들어서 안되겠어요. 조금만 쉬었다가 해요. "
페릴이 엉덩이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모습을 본 카밀라는 과장스럽게 한 손으로 허리를 두드리며 레기나에게 말했다. 페릴의 모습이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행동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카밀라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에 온몸이 뻐근해 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
그러나 레기나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고 카밀라는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들어서 계속 사람을 괴롭히는 거에요?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
" 인사 정도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인사도 못하시면서 어떻게 황실 파티에 참가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
레기나는 복잡한 황실의 예법과 황족의 생활을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는 철부지 귀족 아가씨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 그럼 어디 선생이 한번 해봐요. "
레기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건방지기만 한 카밀라의 콧대를 꺾어 놓으려는 듯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해본, 이제 몸에 자연스럽게 배인 동작으로 카밀라를 향해 인사를 해 보였다. 카밀라는 레기나의 인사를 보고 나서야 자신의 인사가 얼마나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을지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 레기나 선생이야 수도 없이 해봤을 테니까 잘하는 거죠! 처음 하는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어색한게 당연한거에요! "
" 그럼 페릴에게 시켜볼까요? "
카밀라는 레기나의 이런 반응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는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 조...좋아요! "
" 만약 페릴이 카밀라 아가씨보다 더 잘하면 앞으로 제 말을 무조건 들으셔야 합니다. "
" 그... 그건... 좋아요. 대신 만약 아니라면 앞으로 내 맘대로 하겠어요. "
차마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카밀라는 자신이 하는 행동마다 일일이 지적을 하고 나서는 레기나를 골려 줄 속셈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 일어서. "
도대체 왜 자신이 저 두 사람의 싸움에 휘말려 들었는지 알지 못하는 페릴은 레기나의 말을 듣고 엉덩이에서 손을 떼며 일어섰다. 혹시라도 자신이 잘못하면 더 혹독한 매질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페릴은 울상을 지으며 레기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기나는 그런 페릴의 태도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아까 카밀라에게 했던 인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 잘 봤지? 내가 했던 대로 따라해봐. "
감히 레기나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페릴은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동작을 기억해 내려 애쓰며 어색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넌 지금 황실 파티에 와 있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울상을 하고 있어도 되겠어? 밝게 미소를 짓고 부드럽게 움직여 보란 말이야. "
페릴은 레기나의 말을 듣고 다시 인사를 했지만 얼굴엔 어색한 미소를 짓고 겨우 레기나의 동작을 흉내만 내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웃음거리 밖에는 되지 못했다.
" 그것 봐요. 나 정도면 충분히 잘하는 거잖아요! "
레기나는 자신이 스스로를 하녀인 페릴과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 레기나를 향해 철없는 말을 던졌다.
" 페릴. "
페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갑자기 부드러운 태도로 변한 레기나를 쳐다보았다.
" 눈을 감고 한번 생각을 해보렴. 넌 지금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파티장에 와 있는 거야. 네 눈 앞에는 멋진 남자가 널 보며 미소를 짓고 있고. 넌 그런 남자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하는 거야. 자신을 더욱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이도록 말이야. "
귀족의 여식이라고 해서 모두 카밀라 같은 성격은 아니었다. 수많은 귀족가를 돌아 다니며 그들의 딸들에게 교양학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 레기나는 몇 년 전 페릴 또래의 아이를 가르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 무슨 말인지 알겠니? "
페릴은 레기나의 물음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레기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겁먹은 표정이 사라지며 긴장이 풀리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인사를 하라고 시켰다.
" 자, 다시 해보자. "
페릴은 레기나가 말한 대로 눈을 감으며 자신이 화려한 파티장에 와 있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가본 적이 없어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그녀 또래의 평민들이 하는 그런 상상속의 파티장을 떠올리며 자신이 화려한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그 속에 어울려 있는 모습을 생각해낸 페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페릴은 레기나를 향해 부드러운 동작으로 인사를 해 보였다.
카밀라가 보기에 페릴의 동작은 아까 레기나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익숙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만약 페릴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키가 크고 입고 있는 옷이 하녀복이 아니라 파티용 드레스였다면 더욱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만큼은 레기나도 카밀라와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페릴의 모습을 보고 있던 카밀라와 레기나는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똑 같은 말만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 너... 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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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K 28th, KRANDOR 335
" 리시안느. "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화려한 불꽃이 터지며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던 리시안느는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다.
" 헤르난... "
" 오늘처럼 기쁜 날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것이오? 한참을 찾아 다녔소. "
헤르난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리시안느에게 말했다. 그러나 헤르난의 정이 가득 담긴 말에도 그녀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헤르난은 리시안느를 향해 다가가 가볍게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 무슨 걱정이라도 있소? "
자신을 보면 늘 환한 미소를 보여주던 리시안느의 평소와 다른 태도에 걱정이 되었는지 그의 음성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리시안느는 헤르난의 질문에 살짝 고개를 저었다.
" 무슨 말 못할 걱정이라도 있는 것이오? "
헤르난은 리시안느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 혹시... 아까 있었던 일 때문이오? "
" ...... "
헤르난이 혹시 하는 마음에 한 질문에 리시안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라이오트라 왕국에서 매년 열리는 마지막 어둠의 달의 축제에 초대된 리시안느는 아까 낮에 왕궁에 마련된 자신의 방에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입고 있었다. 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그녀는 오전 내내 계속된 행사에 헤르난을 따라다니며 지쳐 있었는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서있던 자리에 주저앉았고 마침 드레스에 튀어나온 실을 잘라내려고 작은 가위를 들고 있던 시녀와 뒤엉키며 손등에 작은 상처가 났던 것이다. 왕자가 초대한 손님에게 상처를 냈다는 사실에 시녀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고 갑작스러운 소동에 달려온 호위 기사들은 왕실 치료사를 부르고 리시안느에게 상처를 낸 시녀를 잡아가느라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었다. 다행히 리시안느의 상처는 별 것 아니었고 치료사의 처치로 금방 상처를 없앨 수가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시안느가 헤르난에게 부탁하여 시녀가 벌을 받는 것을 면하게 된 사건이 바로 지금 헤르난과 리시안느가 떠올리고 있는 일이었다.
" 그 일이라면 잘 해결이 되지 않았소. 아무런 상처도 남지 않았고 실수를 한 시녀도 용서를 받았으니 말이오. "
헤르난은 상처가 났던 리시안느의 왼손을 들어올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러나 리시안느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
" 그럼 무엇이 문제라는 것이오? "
리시안느는 다른 사람이 말을 하면 따지는 듯 들릴만한 말이 전혀 그렇지 않게 들리는 것이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끊임없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헤르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이번엔 잘 해결이 되었지만... 저는 제 실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벌을 받는걸 원치 않아요. 비록 그것이 하인이나 노예라고 해도 말이에요. "
그제서야 리시안느가 고민하고 있는 이유를 깨달은 헤르난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 그들은 그냥 그들이 할 일을 한 것 뿐인데... 운이 나쁘게도 제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매를 맞거나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 저로선 참기 힘든 일이었어요. "
가슴속에만 담아두었던, 귀족의 신분으로 하인이나 노예를 걱정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것이 두려워 아니 그보다 자신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두려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민이었지만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는 헤르난에게는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리시안느는 그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조금씩 편한 표정이 되어갔다.
" 제 잘못에 대해서 단 한번도 꾸중조차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들은 잘못하지 않은 일로 벌을 받고 저는 왜 제 잘못을 그들에게 떠넘기고 이렇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
헤르난은 말을 하며 조금씩 표정이 밝아지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리시안느를 다시 한번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끌어 안았다. 헤르난은 그녀처럼 마음이 여리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조금씩의 죄책감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리시안느의 경우는 죄책감이 좀 더 심한 경우일 뿐이었다. 라이오트라 왕국에 있는 전통처럼 죄책감을 씻어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제국에서라면 오히려 더욱 당연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헤르난은 자신의 품에 안겨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는 리시안느를 향해 말했다.
" 리시안느, 고개를 들어 날 보시오. "
리시안느는 헤르난의 음성에서 부드러움과 함께 좀 전까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무언가 거역하기 힘든 분위기를 느끼면서 고개를 들었다.
" 우리 라이오트라 왕국에는 오래된 전통이 하나 있는데 혹시 알고 있소? "
헤르난이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를 챈 것인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던 리시안느의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그녀는 헤르난의 눈빛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든 상태로 시선을 그의 가슴께로 향하며 다시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다.
" 힘들어서 안되겠어요. 조금만 쉬었다가 해요. "
페릴이 엉덩이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모습을 본 카밀라는 과장스럽게 한 손으로 허리를 두드리며 레기나에게 말했다. 페릴의 모습이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행동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카밀라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에 온몸이 뻐근해 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
그러나 레기나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고 카밀라는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들어서 계속 사람을 괴롭히는 거에요?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
" 인사 정도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인사도 못하시면서 어떻게 황실 파티에 참가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
레기나는 복잡한 황실의 예법과 황족의 생활을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는 철부지 귀족 아가씨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 그럼 어디 선생이 한번 해봐요. "
레기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건방지기만 한 카밀라의 콧대를 꺾어 놓으려는 듯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해본, 이제 몸에 자연스럽게 배인 동작으로 카밀라를 향해 인사를 해 보였다. 카밀라는 레기나의 인사를 보고 나서야 자신의 인사가 얼마나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을지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 레기나 선생이야 수도 없이 해봤을 테니까 잘하는 거죠! 처음 하는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어색한게 당연한거에요! "
" 그럼 페릴에게 시켜볼까요? "
카밀라는 레기나의 이런 반응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는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 조...좋아요! "
" 만약 페릴이 카밀라 아가씨보다 더 잘하면 앞으로 제 말을 무조건 들으셔야 합니다. "
" 그... 그건... 좋아요. 대신 만약 아니라면 앞으로 내 맘대로 하겠어요. "
차마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카밀라는 자신이 하는 행동마다 일일이 지적을 하고 나서는 레기나를 골려 줄 속셈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 일어서. "
도대체 왜 자신이 저 두 사람의 싸움에 휘말려 들었는지 알지 못하는 페릴은 레기나의 말을 듣고 엉덩이에서 손을 떼며 일어섰다. 혹시라도 자신이 잘못하면 더 혹독한 매질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페릴은 울상을 지으며 레기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기나는 그런 페릴의 태도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아까 카밀라에게 했던 인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 잘 봤지? 내가 했던 대로 따라해봐. "
감히 레기나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페릴은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동작을 기억해 내려 애쓰며 어색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넌 지금 황실 파티에 와 있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울상을 하고 있어도 되겠어? 밝게 미소를 짓고 부드럽게 움직여 보란 말이야. "
페릴은 레기나의 말을 듣고 다시 인사를 했지만 얼굴엔 어색한 미소를 짓고 겨우 레기나의 동작을 흉내만 내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웃음거리 밖에는 되지 못했다.
" 그것 봐요. 나 정도면 충분히 잘하는 거잖아요! "
레기나는 자신이 스스로를 하녀인 페릴과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 레기나를 향해 철없는 말을 던졌다.
" 페릴. "
페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갑자기 부드러운 태도로 변한 레기나를 쳐다보았다.
" 눈을 감고 한번 생각을 해보렴. 넌 지금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파티장에 와 있는 거야. 네 눈 앞에는 멋진 남자가 널 보며 미소를 짓고 있고. 넌 그런 남자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하는 거야. 자신을 더욱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이도록 말이야. "
귀족의 여식이라고 해서 모두 카밀라 같은 성격은 아니었다. 수많은 귀족가를 돌아 다니며 그들의 딸들에게 교양학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 레기나는 몇 년 전 페릴 또래의 아이를 가르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 무슨 말인지 알겠니? "
페릴은 레기나의 물음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레기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겁먹은 표정이 사라지며 긴장이 풀리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인사를 하라고 시켰다.
" 자, 다시 해보자. "
페릴은 레기나가 말한 대로 눈을 감으며 자신이 화려한 파티장에 와 있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가본 적이 없어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그녀 또래의 평민들이 하는 그런 상상속의 파티장을 떠올리며 자신이 화려한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그 속에 어울려 있는 모습을 생각해낸 페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페릴은 레기나를 향해 부드러운 동작으로 인사를 해 보였다.
카밀라가 보기에 페릴의 동작은 아까 레기나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익숙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만약 페릴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키가 크고 입고 있는 옷이 하녀복이 아니라 파티용 드레스였다면 더욱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만큼은 레기나도 카밀라와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페릴의 모습을 보고 있던 카밀라와 레기나는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똑 같은 말만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 너... 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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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K 28th, KRANDOR 335
" 리시안느. "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화려한 불꽃이 터지며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던 리시안느는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다.
" 헤르난... "
" 오늘처럼 기쁜 날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것이오? 한참을 찾아 다녔소. "
헤르난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리시안느에게 말했다. 그러나 헤르난의 정이 가득 담긴 말에도 그녀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헤르난은 리시안느를 향해 다가가 가볍게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 무슨 걱정이라도 있소? "
자신을 보면 늘 환한 미소를 보여주던 리시안느의 평소와 다른 태도에 걱정이 되었는지 그의 음성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리시안느는 헤르난의 질문에 살짝 고개를 저었다.
" 무슨 말 못할 걱정이라도 있는 것이오? "
헤르난은 리시안느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 혹시... 아까 있었던 일 때문이오? "
" ...... "
헤르난이 혹시 하는 마음에 한 질문에 리시안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라이오트라 왕국에서 매년 열리는 마지막 어둠의 달의 축제에 초대된 리시안느는 아까 낮에 왕궁에 마련된 자신의 방에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입고 있었다. 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그녀는 오전 내내 계속된 행사에 헤르난을 따라다니며 지쳐 있었는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서있던 자리에 주저앉았고 마침 드레스에 튀어나온 실을 잘라내려고 작은 가위를 들고 있던 시녀와 뒤엉키며 손등에 작은 상처가 났던 것이다. 왕자가 초대한 손님에게 상처를 냈다는 사실에 시녀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고 갑작스러운 소동에 달려온 호위 기사들은 왕실 치료사를 부르고 리시안느에게 상처를 낸 시녀를 잡아가느라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었다. 다행히 리시안느의 상처는 별 것 아니었고 치료사의 처치로 금방 상처를 없앨 수가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시안느가 헤르난에게 부탁하여 시녀가 벌을 받는 것을 면하게 된 사건이 바로 지금 헤르난과 리시안느가 떠올리고 있는 일이었다.
" 그 일이라면 잘 해결이 되지 않았소. 아무런 상처도 남지 않았고 실수를 한 시녀도 용서를 받았으니 말이오. "
헤르난은 상처가 났던 리시안느의 왼손을 들어올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러나 리시안느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
" 그럼 무엇이 문제라는 것이오? "
리시안느는 다른 사람이 말을 하면 따지는 듯 들릴만한 말이 전혀 그렇지 않게 들리는 것이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끊임없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헤르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이번엔 잘 해결이 되었지만... 저는 제 실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벌을 받는걸 원치 않아요. 비록 그것이 하인이나 노예라고 해도 말이에요. "
그제서야 리시안느가 고민하고 있는 이유를 깨달은 헤르난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 그들은 그냥 그들이 할 일을 한 것 뿐인데... 운이 나쁘게도 제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매를 맞거나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 저로선 참기 힘든 일이었어요. "
가슴속에만 담아두었던, 귀족의 신분으로 하인이나 노예를 걱정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것이 두려워 아니 그보다 자신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두려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민이었지만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는 헤르난에게는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리시안느는 그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조금씩 편한 표정이 되어갔다.
" 제 잘못에 대해서 단 한번도 꾸중조차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들은 잘못하지 않은 일로 벌을 받고 저는 왜 제 잘못을 그들에게 떠넘기고 이렇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
헤르난은 말을 하며 조금씩 표정이 밝아지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리시안느를 다시 한번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끌어 안았다. 헤르난은 그녀처럼 마음이 여리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조금씩의 죄책감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리시안느의 경우는 죄책감이 좀 더 심한 경우일 뿐이었다. 라이오트라 왕국에 있는 전통처럼 죄책감을 씻어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제국에서라면 오히려 더욱 당연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헤르난은 자신의 품에 안겨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는 리시안느를 향해 말했다.
" 리시안느, 고개를 들어 날 보시오. "
리시안느는 헤르난의 음성에서 부드러움과 함께 좀 전까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무언가 거역하기 힘든 분위기를 느끼면서 고개를 들었다.
" 우리 라이오트라 왕국에는 오래된 전통이 하나 있는데 혹시 알고 있소? "
헤르난이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를 챈 것인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던 리시안느의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그녀는 헤르난의 눈빛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든 상태로 시선을 그의 가슴께로 향하며 다시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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