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집은 여전히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전에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었다. 아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초라해져서 일까. 그런데 왠지 그것이 짜증이 났다. 나는 내 의지랑 상관없이 불행해졌는데, 여전히 이런 집에 살고 있는 민지가 말이다.
거실로 들어서자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우리를 맏이 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본 것인지 아는 척을 하려 했지만 민지가 잔소리를 해대는 바람이 금방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고용인이라고 하지만 너보다 훨씬 나이도 많은 사람한테 그래도 되는 거야?"
"뭐 어때? 우리 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그럴 수도 있는 것 아냐? 너도 예전에는 그랬었잖아. 이제 가난해지니까 저 사람들 마음이 이해가 가는 거야?"
그러고 보면 나도 그랬었다. 민지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용인들에 대해서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게 이렇게 눈꼴사나운 행동이었나? 어쨌든 나와 민지는 거실의 소파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그녀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말 할 것도 없이 문제의 계약서였다. 민지는 그것을 받아 팔랑 팔랑 흔들며 말했다.
"이게 뭐야?"
"뭐긴, 계약서지. 난 이제부터 네 돈을 받고 일 할 거니까, 최소한의 대책은 마련 해 둬야지."
"대책?"
"그래, 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갑자기 날 잘라버리면 곤란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못하게 미리 계약서를 써 두시겠다?"
"그래."
"그래? 아하하하 그렇구나, 하긴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잘라버린 사람이 몇 명이더라. 기억도 안 나네."
……아마도 많은 숫자의 가정 교사가 그렇게 해고됐겠지, 하지만 난 그래서는 안 된다.
"흠……계약서라."
계약서를 받아든 그녀는 그것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까지는 읽어서는 곤란하다. 물론 어느 정도의 내용이야 정말로 가정교사에 관한 계약처럼 둘러대고 있지만 조금만 자세하게 읽어보면 바로 본래의 내용이 드러난다. 그녀에게 내 지능을 사용하게 해 주고 그녀의 몸을 내가 가져도 된다는…… 그런 내용 말이다.
"나한테 잘리지 않기 위해 이런 걸 준비했단 말이지……."
서명해라. 어서 서명해라. 넌 돌 머리다. 머리 아프게 그런 것을 읽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가정 교사의 월급 따위, 너에게는 푼돈이잖아? 그러니까 내용 같은 것은 확인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서명을 하지 않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난 조바심이 나는 것은 간신히 참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싸인 안 해?"
"응? 해야지, 좀 있다가. 더워서 땀 좀 식히고."
시간이 흐른다.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길어야 10분일까. 하지만 그 시간이 내게는 영원처럼 다가왔다. 서명만, 서명만 하면 끝나는 대도 그녀는 그것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조바심은 항상 모든 일을 망치는 근원이다. 그녀의 성격으로는 조금만 추켜세우면 바로 할거다. 그런데……갑자기 뜻하지 않던 장애물이 등장했다.
"손님 왔니?"
그녀의 어머니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어머니의 존재를. 하지만 왜 이런 날 집에 있는 거지? 친구들을 만난 다든지 취미생활을 한 다든지, 할 것도 많을 텐데, 왜 이런 날 집에 있는 걸까.
"안녕 하세요."
"넌……옆집에 살던……."
"네."
날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돈을 밝히는 전형적인 졸부라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사소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에 관련된 계약서를 무시할 리가 없다. 어떻게든 한푼이라고 깎아 내려 할 테니……그러니 이 상황에서라면 민지가 입을 한 번 놀리는 것만으로도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가 있다. 민지가 멍청한 것과는 다르게 그녀의 어머니는 졸부의 특성인 돈에 대해서는 꼼꼼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 그런데 어쩐 일이야?"
"저 그러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물론 사실대로 대답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고 해서 민지가 바로 옆에 있는데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민지의 어머니가 슬쩍 다가와,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윽."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곤란하다. 그녀가 봐서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바보짓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일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 그런데 민지가 벌떡 일어서서 그 계약서를 낚아 체듯 빼앗으며 말했다.
"응, 잠시 놀러왔어."
어?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왜?
"그래? 그럼 잘 놀다 가요."
민지의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사라져 갔다. 뭐, 돈을 밝히고 거기에 있어서는 그저 그런 인간이지만 보통은 좋은 사람이니까……어쨌든 그녀가 계약서에 대해서 눈치 체지 못한 것은 다행이다. 민지는 내 팔을 잡아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민지의 방은 고등학생 시절 이후에는 처음 봤지만, 여전히 화려했다. 굳이 변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때는 아기자기 한 것이 여자 애라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골빈 부자의 방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왜, 어머니한테 거짓말을 한 거지?"
넌지시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으로서 가장 궁금한 것은 그것이니까. 그러자 민지가 베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응, 또 가정교사 갈아치우는 거 알면 엄청 혼날 것 같아서."
"그래?"
"그래, 이번이 몇 번째인데. 아, 그러고 보니까 해고전화 해야지."
나로 인해 누군가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건가. 괜히 미안한데. 어쨌든 민지는 빠른 속도로 휴대폰의 번호를 눌러댔고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했다. 흠……이제 모든 상황이 만들어진 것 같다.
"자아, 그럼 계약서에 사인을 해."
그 계약서를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읽지도 않으며 바로 끝 부분으로 펜을 향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의 운명을 나락으로 끌어갔다.
계약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물론 아까도 말했듯, 이렇게 저렇게 말장난으로 가정교사의 계약인 것처럼 숨기고는 있지만 조금만 자세하게 읽어보면 바로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요약하면 민지 자신이 나에게 학업에 대한 능력을 빌려 쓰는 대가로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나에게 귀속한다고 되어 있다.
몸의 귀속. 이것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몸의 소유권을 내가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그녀의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넓은 의미로는 그렇게 길들여진 그녀의 육체가 나를 잊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함으로서 자신의 지적인 허영심이 충족이 되고 육체적으로도 나를 떠날 수 없게 되는데, 그녀가 나에게 주지 못할 것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까지 된다면 이미 그녀의 돈은 모두 내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 나는 그 돈으로 복수의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난 계약서의 효과를 시험해 보기 위해 슬쩍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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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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