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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사랑보다 - 단편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5 00:26 580회 0건
-기억이란 사랑보다-

그다지 매서운 추위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전신으로 바람 한점 들어올 수 없도록 꽁꽁 몸을 싸 맨 것도 모자라, 장갑까지 껴대고, 오로지 이 겨울의 추위를 면상으로 받아버릴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버스를 향해 문을 나서는 중이었다.

“아참, 노래....”

나는 회전문 앞에서 멈추어 서서 뒤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막고 서서 그 놈의 엉켜있던 이어폰 줄을 느릿느릿 풀어 대느라 원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옆으로 조금만 비켜 섰더라도, 저 인간 어쩌구하는 욕지기는 듣지 않았을 텐데라는 후회를 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갈길이 바쁜 이유 하나만으로, 길을 막고 지렁이 기어가는 속도로 이어폰을 풀어내고 있는, 그것도 어눌한 손동작을 더욱 바보스럽게 만드는 장갑까지 끼고서, 병신육갑을 떨고 있는 나를, 기가 차다는 시선으로 꼬나 보고 있었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늙어빠진 게 어디 앞에서 얼리어답터 숭내질이야 라는 그 시선들...손에 쥐었던 쓰레기 투척하고 냉큼 도망가는 식으로, 사람들은 회전문 옆에서 빙충이 처럼 서 있는 나를 일일이 꼬나보고 지나갔다.

“그래, 잘났다 씨불탱이들아, 무식한 게, 돈도 쪼들려서, 블루투스도 장만 못했다 왜?”

난 비겁함의 극치처럼, 입밖으로 소리치지도 못하면서, 속으로 비맞은 뭐시기처럼 종알종알종알....사람들이 속히 사라지고, 갑자기 회전문 주위 대회랑의 중앙조명이, 예고도 없이 꺼지는 것을, 난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두워진 실내와 극대비되어, 회전문 너머의 광경과 조도가 실내보다 더 환하게 느껴지는 사이, 나는 그예 어렵사리 풀어내고 있던 이어폰 줄을 겨우 다 풀어내고 있었다.

“도대체 엉키지 않는 이어폰 줄이라고 선전한 넘들은 대체 뉘기야? 아니, 년인지도 모르쥐...”

이어폰을 연결하고, 나는 또 한번 후회하고 만다.

“으이그 쇼핑채널에서 선전헐때 그 장갑....사뒀어야 허는 거인디.....”

난 내 스스로 정말 멍청한 인간이란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그 넘의 핸폰을 비번이라도 풀고 열어볼라치면, 손가락에 특화된 표면특성 때문에, 장갑을 끼고서는 어림도 없는 상황임을 까쳐먹고, 자랑스럽게도 장갑까지 턱하니 끼고서, 핸폰 표면을 문지르다가 깨닫게 된 후회가, 그 기능성 장갑이었기에....

문을 나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문이라는 공간사이에 끼인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서, 나는 오도가도 못한채로, 뭔가를 계속 주춤대고 있었던 게다. 장갑을 벗고서 맨손가락으로 화면을 문지르자, 표현되는 익숙한 화면, 모두가 그럴 것이다. 아효 안심이다...이젠 손가락의 맹위를 떨쳐야 할 시간이었다.

이리저리 앱을 휘둘러가며, 나는 아무 노래나 선택하고 이내 누가 훔쳐나 갈것처럼, 핸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전주가 끝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리라 다짐하면서, 주위를 두리번 거림도 없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흐름에 몸을 끼워 넣으면서 대형 회전문을 걸어나왔다.

“아......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둑해진 하늘을 배경삼아,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은 가시거리를 박약하게 만들정도로 두텁게 내렸고, 사람들은 기뻐하질 않았다.

-미친거 아냐? 퇴근길에 내리는 눈은 완죤 퇴출감인 거 알지?
-아니 먹고 살기 바쁜데 눈보고 좋아 뒤지는 건 강아지뿐이여.
-내일 아침이 더 걱정이네...헐...대박...
-자기야..눈 오는데 나 만날 계획 없쥐? 그럴줄 알고 나 집에 간다잉...

사람들의 톡질이 바빠지기만 했고, 내리는 눈을 주목하는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피우려는 담배에 눈발이나 떨어져서, 애써 붙인 불이나 꺼질까봐 도리어 눈과 바람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지는 사람들...

난 또다시 얼음처럼, 장승처럼 현관을 벗어나기 무섭게 얼어 붙고 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문제가 아니었다. 도도하게 내 두 귀와 밀착되어 있는 이어폰의 진동판을 통해 울려 나오는 그 노래 한자락....내 머리 속은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난 방향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목적을 뒤이어 상실했으며, 촛점을 도저히 맞출 수 없는 나의 시력도 시비를 걸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귓가를 맴도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나의 가슴을 때리고 있었지만, 이런 가슴 먹먹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열한 샤콘느가 눈 앞에 너울대기 시작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정서지원에 무슨 반응을 보이긴 합니까?
=아직..단기간 염증수치가 흔들리고 있어서...
=그럼 지금 산소수치는? 벤틸레이터는?
=산소압을 조금씩 상승시키고는 있는데...
=기도절개후 자발호흡 비율은?
=이미...그런데 에크모를 장기간 저렇게 써서는...
=지금 각성시도는 아무래도...
=오늘 찍어본 것중에서 섬유화 비율은?
=그럼 스테로이드 강화단계로 들어가도...
=MRSA때문에라도 IPF를 예상을 할수는...

아직까지도 그 모든 대화의 꼭지들이 정리되지도 않은 채, 길 밖으로 구토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미 현상을 묻고 오가는 대화에서 그들은 결말을 예상했을지도...그 안에서는 복잡하고 증명될 수 없는 거래이자, 암묵적 합의가 결정되었을 것이고, 그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은, 홀로 베드를 버티고 계측기처럼 초단위로 돈을 뭉태기로 쳐드시는 환자만이, 전투의 첨두에 서서 ICU라는 감옥에 수감된 주변 사람들만 긴장시킬 뿐이었다. 그 외로운 싸움....

모든 것들이 불확실한 시대에 살면서, 시간당 1660킬로미터의 자전속도와 108000킬로미터의 공전속도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코스모스의 무한궤도속으로 사라져가는 정처없는 여정속에 살면서도, 그저 중력의 혜택으로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는 알량한 자부심 하나로, 우리들은 세상이 나에게만은 영원할 거라는 멍청함으로,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살아가는 것일뿐...

나는 세상이 그토록 어떤 확약도 없이, 인간의 멱살을 끌고 가는 도중에도, 어찌 이리 부산하게 모든 것에 발그레한 기대를 쳐발르고 살아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야, 아직이니?”

“응, 앞이야...지금 버스 탔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맛에 살고 있는 거겠지...세상에 나 혼자 골로 가고 있다는 외로움에 빠져있을 때쯤, 구원자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그 야한 희망...난 방금 전의 혼돈도 어디엔가 버려두고 온통 시선은 핸폰의 화면에 못이 박혀있다. 언젠가 그녀는 나에게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앞으로 세상은 더 살기 각박해 질거야. 지금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꿈꾸어 오던 그 역할을 제대로 흉내내려면 더 많은 지식을, 더 짧은 단기간에 흡수해야하고, 그걸 넘어서서는 자신의 부유지점이 세태에 휩쓸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밖에는 도리가 없질 않겠니? 자기두 그런 사람들과 다를바 없이 살다보면 지금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들 대부분이 쓰레기가 되어도 하소연 할곳이 없어질 수 있다 이거지. 우린 이미 가속이 멈추어 질 수 없는, 우리가 만들어 낸 시간이란 기차에 올라탄, 불행한 종족보존주의자 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단 한개도 없지만, 손아귀에서 단 한개도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란 가면을 둘러쓴 슬픈 유전자일 뿐이지....”

“제발 섹스할 때, 분위기 잡치는 소리 쫌 안할 수 없니? 이거야 원, 온 세상 걱정 모두 짊어지느라 등판때기가 무거워서 좇질을 헐 수가 있나?”

“철학적인 사고를 멀리하면 할 수록 자기의 머리는 점점 자기의 뇌영역에서 섹스를 몸 밖으로 밀어낸 다는 거 알으? 바디만 들썩이는 섹스는 노화와 함께 늙어가지만, 머리를 지배하는 섹스의 철학은 나이가 들수록 빛을 발한다니... 꼭 알려줘야 깨닫는 거, 이젠 말하기도 입아프당...입아프게 했으니 오늘의 오랄은 자기만 당첨....빙고”

귀에 들어와 박힐 얘기도 아니었고, 난 그녀의 옷을 벗기는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따위의 불필요한 행위는 사회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난 그녀의 맨살을 쓸어대면서, 그 살에서 느껴지는 탄력을 재확인 하려는 것처럼 쥐어짜기도 하고, 아프다는 얘기가 나올때까지 주물럭대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그런 나의 애무 방법이 문제가 있다고 언제나 불평이었다. 꼭 쥐어짜서 뭔가가 삐져 나올듯이 만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의 행태가 만만히 볼 자연스러움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기야...불확실성의 시대야. 내 손에 쥐어져 있어도, 내가 자기 몸 속에 내 좇을 이렇게 박고 있어도 내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심리가 과연 병적이라 할 수 있을까? 자기는 그렇게나 순수하고 오롯한 마음가짐으로 나랑 섹스허니? 오 마이 달링이 결국 온리유?...이거 너무 상투적인 방송멘트쟈나?”

그녀는 내가 시시콜콜 툴툴거릴 때면, 오히려 조용해지곤 했다. 나에게 덮쳐있던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의 중량감을 그녀도 같이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를 밀어내리듯이, 강제로 오랄을 시키긴 했어도 언제나 예정되어 있는 감각도달 한계까지, 가랑이를 벌리고 빨아주기를 강요하는 억지는 부리지 않았다. 그 대신, 오늘은 어뜨케 해주까라며 코맹맹이 소리까지 더해서 오글거리는 애교를 디저트를 선물하는 우아한 교태까지..... 난 그런 그녀의 오버가 고맙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부담백배라고 하지 않을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아......아파.....조금만....조금만...천천히...그렇게....그러...케...오올치....끄응....”

그녀는 나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스스로 몸을 열어, 칼쿠리로 온통 상채기 투성인 내 마음을 속독으로 해독해가는 그녀의 리액션은 바로 음성유도 였다. 내몸이 원하는 것은 난독증 같은 어설픈 도돌이표 였지만, 그녀는 그런 나의 무질서를 음성으로 천천히 가라앉히며, 섹스의 즐거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내 몸 위로 장막을 치고 있었다.

대낮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나에게 아늑한 어둠의 묘미를 인공적으로라도 건네고 싶은게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 하는 순간은, 사정의 기조가 넓적다리와 대퇴부를 관통하면서 경직의 단계에 접어든다해도 자신을 향한 시선이 풀어지지 않을 때였다.

나의 의지가, 내 시선을 통해, 시셋말로 레이져처럼, 그녀의 얼굴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다. 평소처럼 시시덕대며 유희이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무게로 다루어지는 섹스를 그녀는 가장 선호했다.

“자기는 그럴 때면, 뭐가 다른지 알아? 짐승...영역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사자의 포효..뭐랄까, 자신이 바다속에 살아있다고 외치는 것처럼 160킬로미터가 넘는 곳까지 울려대는 고래의 노래 같은 장엄함....난 자기의 그 놀라운 의지가 온몸의 땀구멍을 통해 가시처럼 솟아나와 내 몸을 찌르는 것 같거든...”

난 그녀의 비유적인 표현을 좋아한다. 그 속에서 새로이 설정되어지는 나의 모습이 지극히 남성적으로 비추어지도록 애쓰는 그녀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기에...

“난 자기의 곡선이 맘에 들어...쓸어보면 알 수 있는 그 탄력도 좋구...”

돌아드는 그녀의 곡선이 머무는 끝에는 언제나 내가 핥고 싶고 빨고 싶은 유토피아가 자리하고 있음을 난 언제나 감사하곤 했다. 거울을 통해 살펴본 나의 몸은 온통 직선과 각, 그리고 잔굴곡의 연속선 뿐이고, 그 형태가 가져다주는 감성속에 휴식이라곤 없었기에 나는 그녀를 다시 찾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나를 설득해왔다.

“오늘은 왜 말이 없어?”

그녀의 채근이 또다시 발동을 건다.

“바쁜 거 알잖아? 갈 곳도 많고....”

난 누굴 위해서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미 그것은 서로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짜증이 앞서는 상황이었고, 그녀는 그걸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투로 언제나 상투적인 질문을 하길 좋아했다.

“우린 언제나 다른 사람들 처럼 현실적이 될 수 있을까?”

“현실적이 뭔데?”

“앞으로 어쩔거냐는 둥, 뭐 그런 거 있잖아?”

“우리 지금 같이 있잖아? 아니 있었지....그렇다고 우리에게 앞으로 어떻게 될거라고 지금 결정해야 옳은 건 아니잖니?”

“그건 그렇지만...오늘 자기 정말 다르다니깐....나 의심 뭐 그런 것두 아니고, 자기를 향한 신뢰감이 무너졌다 그런 것두 아니지만, 오늘은 뭔가 불안해. 이렇게 돌아서서 자기가 가버리면, 내가 알고 있는 자기의 전번들이 모두 통화불능이 될 것 같은 조바심...뭐 그런거 있쟈나...그냥 그래”

난 일어서다 말고 옷을 입지도 않고 뾰루퉁한 얼굴로 조잘대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언제는 내가 니 곁에 없었니? 괜한 의심은...사람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해가 뜨고 해가 지듯이, 우리도 뭐 별 거 있겠니? 살아온 그 날들처럼 그냥 살아지게 될거야.”

나의 위로가 뭐 특별히 효과가 있지는 않다. 돌아서서 홀로 걸어가는 나의 등뒤로 그녀는 어김없이 전화를 날릴테고, 나는 또 익숙한 마음으로, 거 봐라라는 호탕한 웃음으로, 그녀를 다독거려야 하는 마무리가 남아있었으니까. 집앞을 나서면서 나는 습관처럼 핸폰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또다시 길나갈 채비를 서둔다. 거추장스런 장갑을 다시 끼었다, 벗고, 엉켜진 이어폰 줄을 또 풀고 풀고....

“어?......또....눈이”

그랬다. 눈은 계속해서 하늘을 유린하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바보인가 보다. 그렇게나 가슴을 아프게 때리던 그 노래를 또 듣고 있으면서도, 그 시름속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있으니...저 멀리서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 한대가 비틀대며 다가왔다. 어차피 전철역으로 가자면 아무 버스나 타고 나갈 수 밖에 없는 막다른 경유지...난 망서림 없이 버스에 올랐다.

버스안은 늦은 시간임을 알려나 주려는 듯, 곳곳이 빈자리였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도 난 주변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곧장 창밖을 주시했다. 난 승객인 주제에, 손수 운전이나 할 것처럼, 버스의 행로를 따라잡으면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버스 옆을 들이박듯이 다가서는 다른 버스와의 간격때문에 움찔하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면서 나는 내려야 할 승강장 문으로 아예 몸을 틀어 문을 주시했다. 그와 동시에, 내리는 승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승강장의 문이 열렸다. 그 찰나의 순간, 정류소의 광고판이 나의 눈안에 들어왔다.

---숨쉬기가 편안해 졌습니다.---

난 노래 가사처럼 그 광고문구가 입안에서 뱅뱅 돌고 있음을 깨달았다.


=보호자는?
=이미 연락했구요...


내 핸폰은 이미 가득찬 비상연락 상황으로 불을 뿜고 있었다. ICU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환자의 외로운 싸움을 목도할 수밖에 없는 괴로움은 고사하고라도, 일반병실로 옮겨질 날만을 학수고대하던 가족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보호자를 향한 응급호출.......

과연 그런 상황에서 누가 보호자 일까? 보호자란 의미는 누가 누구를 보호하는 것인지 구분이 언제나 의문스러웠다. 환자가 편안히 죽을 수 있을 때까지의 보호? 아니면, 그 환자를 볼모삼고 있으면서 언젠가는 지불해야할, 치료진을 향한, 대가지불을 위한 보호? 그래서 그런지 ICU가 뒤집어 질때는 이 두 보호자 집단은 모두 환자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불문률이 서있다.

다시금 회전문을 지나 대회랑을 들어서면서 나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 보다는 드라마의 훌륭한 편집처럼, 무음으로 혹은 절제된 흑백톤의 콘티로, 또는 중요장면은 요식행위처럼 건너뛰는 스타카토식 줄거리 전개를 바라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린 내 자신이 우스워지고 있었다. 난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최전방에서 허공에 꿩총을 쏘아대고 있는 두 보호자 집단을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철벅철벅철벅......”

보호자란 무리들은 환자가 ICU에서 시신으로 실려 나가기까지, 그 끈을 놓지 않으려는 안간힘에, 비중있는 이유들을 추처럼 매어단다.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다면 그 비난의 화살이, 흐물거리는 경제력을 감안하지도 않은 채, 비싼 병실을 차지하게 만든 책임소재 때문인지, 아니면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배우자로서, 지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무튼 주위의 모든 무리들은 삼삼오오 패를 지어 저마다 합당한 이유에 줄을 서고, 흘러나오는 분위기와 경계선이 가져다주는 날카로운 반전을 곱씹으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난 버릇처럼 화장실에서 마포자루를 빨고 있는 청소부 아주머니와 눈인사를 먼저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름끼치는 물장구 소리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모두가 가늠되지도 않는 임종시각을 견주어가며, 향후에 벌어질 수순을 걱정하며 방황하는 사이, 죽음을 가장 먼저 예감하는 자는 의사도, 간호사도, 보호자도 아닌 청소부 아주머니란 사실을 난 몇번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다급한 호출과 더불어 그 주변에서 이미 임종한 시신으로 인해, 다른 환자들에게 재감염의 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하고, 신속한 처치와 병실베드의 순결한 재셋팅을 위해, 가장 근방에서 환자의 용태를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되는 그 위치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누구는 그럴것이다. 임종선고를 하는 의사의 손에 그 과정의 전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냐고....그러나, 임종의 선고 이전에 치료진은 결코 시술의 끈을 놓게끔 교육받은 적이 없으며, 주변의 정보체계가 그 환자의 내용을 모니터에서 내려놓고 지우기까지, ICU의 상황이 밖으로 새나가는 일은 치명적일 수 밖에 없으므로, 보호자란 무리들은 그 사실을 인지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선고를 듣게 되는 일들도 비일비재 했다.

나는 오히려 침착해져가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울고 있는 보호자들은 기력을 스스로 상실하며, 곡기가 부담스러워지는 상황이 닥쳐오면 금새 겉으로 표가 나고 만다. 난 설사 임종선고를 듣게 된다고 할지라도 처연해지고 싶었다.

“자기야,...........................뭔일이야?”

나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음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이미 그녀는 나를 알고 있었고, 통화중에 전화기 너머로 전달되는 불규칙한 호흡과 그에 따른 쉼표들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해석하는 묘미를 소유하고 있었다.

대화는 불필요 했고, 전화를 걸게된 나 자신이나, 소식을 접한 그녀나, 동시에 전화를 긴 침묵과 더불어, 끊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발걸음이 조급해지는 찰나, 나는 방금전, 버스의 문틈으로 보였던 정류장의 광고카피가 떠올랐다.

--숨쉬기가 편안해 졌습니다.--

이 말은 아마도 기도절개로 인해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임종의 순간까지 잘될 수 있을거란 알량한 기대와 희망만을 벗삼아, 철없는 간병을 해왔던 나를 향한 환자의 마지막 넋두리 일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래 지금쯤이면 숨쉬기가 조금은 편안해 지셨을거야....

누구나 그렇겠지만, 병실에서 홀로 싸우는 환자들을 표현할때,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표현을 곧잘 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회유와 격려가, 의식이 있던 없든간에, 환자의 뇌리에 전달되어질거라는 기대로 가득찬 보호자들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하고, 얘기하고, 쓰다듬고, 나름 종교의 힘을 빌어 기도를 부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싸움은 결국 혼자의 일일뿐, 치료진도 자신의 역량하에서 지원되는 무기지원이 적을 무찌르는데에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결과가 도출되기만을 바란다. 그래서 그들은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자신의 삶을 쪼개어 바수면서까지 임종선고의 직전까지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러나, 항상 있는 일처럼, 모든 전쟁터에서 언제나 이기는 싸움이란 없다.

끝까지 인생을 전쟁처럼 살아온 한 사람이 하얀 세마포에 싸여 누워있었고, 둘러선 치료진은 나와 눈을 맞추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그냥 한판의 흐드러진 전투가 끝이 났고, 우린 보호자란 이름으로 장렬하게 전사한 장수의 시신을 수습하러 여기 온거지....

난 시신을 운구하라는 장의사의 명령대로 장수의 발목을 붙들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고, 이미 내 손 안에서는 그 질량이 가져다 주는 감동은 없다고 봐야 옳았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다가올 전투에 대한 끝없는 경고가 파노라마처럼 각자의 뇌리에서 춤추고, 운구차를 따라 걸어가는 우리의 모습은 죽음이 비껴갔다는 안도의 한숨을 주위에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어차피 닥치게 될 미래를 재방송처럼 완속으로 선사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아버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 날 새벽, 피곤한 전투에서 칼을 내려 놓으셨다.

어느 곳이나 장례식장은 그렇지 않은가? 죽은 사람을 기린다는 표현처럼....모여든 객들은 생전의 무용담을 나누면서 돌아가신 이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고, 가족들은 남겨진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숨죽인 다는 것을...나는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계단을 거쳐 대회랑을 지나, 습관처럼 살아있음으로 인해 외투를 챙겨입고, 미련하게도 또다시 장갑을 끼운채로 핸폰을 만지작 거렸다. 다시금 반복되는 끔찍한 데자부....난 회전문을 지나 음악이 시작되면서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흘러 나오는 처량한 음성...내가 왜 이 노래를 또?

밖은 이미 하얗게 눈에 덮여가고 있었고, 나는 어릴적, 아버지와 함께, 골목길을 덮고 있는 흰눈을 향해, 누구보다 먼저 발자욱을 남기며 좋아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삶이 곧 전쟁이었다는 생각과 더불어, 가슴 깊숙히 빨아들인 담배가 도무지 연기가 되어 나올 줄 모르고 있었다.

누굴 위한 인생이었으며, 누가 그의 삶을 위해 사랑을 약속했을까?

난 내 옆에 다가와 슬며시 팔짱을 끼는 그녀가 그제서야 다가와 있음을 알아차렸다.


“추운데 왜 나왔니?”

“자긴 울지도 않더라?”

“챙피시럽게 별걸 다 기억하누!”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은건 아니구?”

“글쎄, 아무도 알 수 없지......”

“언젠가 아버님이 그러셨지....이 세상 모든 것은 이어져 있는 끈 같다고....”

“끈? 무슨 끈?”

“끈이 별거겠어? 그냥 끈이지 뭐....우리가 알고 있는 것, 모르는 것....그 어떤 것들도 다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흔들건 누가 흔들건간에 그 흔들림은 언제나 정확하게 출렁임의 예고와 함께 전달된다고....”

사람들은 저마다 저 혼자 잘나서 삶을 이어간다고 믿고 있겠지만, 그 어느 하나도 그 끈의 영역안에 속하지 않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어릴적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걸 잊지 않으려고 애썼던 걸 보면 바로 지금 같은 때를 위해서 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너무 담담한 게 맘에 걸리네.”

“그냥 맘이 그래....”

“그럴거야...”

두 사람의 대화도 길게 연장될 수 없었다. 무얼 화제에 올리더라도 끝이 날 수 없는 막막함으로 인해서 대화는 곧잘 엉뚱한 튕겨짐이 계속 존재했다.

“뭘 듣는데?”

그녀가 기어이 묻고 싶은 질문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 본다.

“별거 아냐.”

난 오늘 눈과 함께, 계속 이어져 온 그 노래를 그녀에게도 들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의 한쪽을 그녀에게 건네고, 나는 나즈막한 음성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 팔을 감싸는 그녀의 옆구리가 더욱 따스하게 밀착해오고, 그 편안함에 기대어 더욱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파란 담배 연기는 돌아가신 영혼을 그리워 하는 향불처럼 눈속에서 아른 거렸고, 난 결국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노래로 대신하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가슴이 아픈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거죠

흐리던 하늘이 비라도 내리는 날

지나간 시간 거슬러 차라리 오세요

내가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거죠

함박눈 하얗게 온 세상 덮이는 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이렇게 그대가 들리지 않을 말들을

그대가 들었으면

사랑이란 맘이 이렇게 남는 건지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내가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거죠

새하얀 눈꽃이 온세상 날리는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END-

P.S.:이 노래를 불효자가 아버님께 바칩니다. 들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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