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떠나가는가?-
1.루프
결박이란 상황이 이리도 빈틈이 없는 줄은 몰랐다.
“딴 생각은 애초에 먹질 않는 것이 좋지. 내가 묶여봐서 알거든.”
어둑했던 밀실에 낮은 촉수의 조명이 들어 오면서, 훅 하는 기류가 몸 뒤쪽에서 느껴진 걸 보면, 누군가 같은 공간 안에 들어섰다는 의미였다.
“내가 설명해 줄까?....인간의 피부 넓이 중에서 1평방 인치의 피부에는 천구백오십만개의 세포와 1300개의 근육조직, 78개의 신경조직, 650개의 땀구멍, 100개의 피지선, 65개의 털, 20개의 혈관, 178개의 열감지 센서와 13개의 냉방 센서가 있지. 키는 저녁 때보다 아침의 키가 0.8Cm정도 크다고 하고... 발은 저녁때 가장 커지게 되고, 하루 평균 2,340번 숨을 쉬고, 120평방미터의 공기를 마셔야 살고, 3.5Kg의 노폐물을 배설해야 하며, 0.7리터의 땀을 흘리고, 평균 750번 정도 주요 근육을 움직이지.
이런 허접한 유아용 기초정보가 어디에 쓰이는지 아나? 바로 너 같은 놈을 묶어놓을 때 사용되는 기초 정보라고 말해두지. 이것보다 더 많고 난해한 정보들이 빼곡히, 차분하게 쌓여서 지금의 결박 수단을 만들었다고나 할까? 네 놈을 꼼짝 못하게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쳐발르고 있는, 그 얇디 얇은 결박루프 속에는 너의 피부와 혈액, 신경 뉴우런들을 타고 흐르는 모든 정보를 읽고 있어.
만약 오줌이 마렵다는 동물적 반사본능이 꿈틀거리는 것과, 결박을 풀고서 뭐 어떻게라도 해보려고 움찔거리는 의지를, 그 루프는 너무나, 얄밉게, 정확히, 구분하는 센스가 있다는 것을 너 같은 놈들은 모른다고 해두지.
피부에서 분포되는 유기화학 폐기물인 땀과 지방, 젖산같이 널널한 항목들의 농도를 정확히 계산해서, 네 놈이 움직이고 싶은 근육과 신경, 골격의 진행 방향을 철저하게 계산한 채로, 한 발 앞서 간다고나 할까? 네 놈이 움직이고 싶은 만큼, 그 앞이 한발 앞서 벽으로 막혀 있는 형국이지. 이제 이해가 가나?”
난 정말 나쁜 놈인 모양이다.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 걸 보면...
“왜 루프지? 하고 많은 이름 중에 루프가 뭐냔 거지?”
난 질문과 함께, 그나마 눈과 귀, 입 그리고 숨쉴 수 있는 코가 열려 있다는 것에 처음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고 있었다.
“질문은 없다. 아니 필요치 않지. 너는 루프로 인해 고개조차 돌릴 수 없다해도, 난 너의 뒤통수에 걸려 있는 바이탈 디텍터로 인해, 너의 미세한 감정선을 교향곡처럼 온 몸으로 따라잡고 있으니까.”
이젠 그 어느 곳에서도 바이탈 디텍터를 사용하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숨소리도, 맥박수도, 혈압도, 산소포화도와, 뇌파의 주기들 조차 개인 정보에 속한다는 법령이 평준화 된 이후로 말이다.
바이탈 디텍터....정말 오래 전에 들어 보았던 그런 구닥다리 장비를 아직까지.....
인간의 질병과 치유라는 교전역사 속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의학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했던 약사들을 더 이상, 교육기관에서 뽑지 않게 되면서, 모든 경로는 뒤틀리기 시작되었다고 난 믿고 있었다.
의료진과 협업에 의해서 환자에게 진료 이상의 피난처를 제공했던 수 많은 약사들이 퇴출 당하고, 기계손이 코드로 처방된 약제들을, 자판기처럼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나같은 레프독(레퍼런스 닥터)은 의사로 취급 되지도 못하면서, 그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는 환자들의 원성들을 의무감으로나마 줏어담기 바빴다.
의사는 더 이상, 신과 같은 존재로 존경 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세상은 받아들였고, 어떤 치료제나 개혁 적인 드라이빙을 통하더라도 한계를 넘을 수 없는, 이른바 인간의 지식 축적력과 그 치유 능력의 한계 앞에 항복을 고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정해진 수명으로 살아간다고 가정했을 때, 그가 혹은, 그녀가 자신의 올바른 판단력으로 환자를 치유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과연 어느 연령즈음에 발휘될 것이며, 그 어느 순간까지 그 능력이 올바르다 증명될 수 있는가에 이미 답을 잃었다는 의미일게다.
레프독은 의사가 아니라고 모두가 떠들었다. 의사는 Doctor, 간호사는 Nurse, 나같은 RefDoc은 반쪽 의사 이면서도, 의사라고 평가되지는 않았으며, 의료문화의 공백을 메우고 다니는 접착제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맨처음 레프독은 의료문화의 초입에서, 갈 곳 몰라 방황하며,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학부 초년생들이 맡아 운영되고 있었다. 언제나 예상을 넘어서서 몰려드는 환자의 양적 해소를 처리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병폐는, 서비스의 질을 떨어 트리고 있었고, 너무 많이 알고 덤벼드는 환자나 보호자들을 진상취급하며, 내치는 것이 보편화되던 시절 이었다.
너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뻔한 전문성을 갑옷 삼아, 질문이 무색해지도록 어렵고 조작도 불가능해 보이는 기계와 장비를 방패 삼아, 의료진은 그 뒤에 이쁜 얼굴로 잠복한 채, 몰려드는 적들에게 눈 앞의 지뢰가 보이지 않느냐며, 목이 터져라 소리만 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미 전투의지는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었으며, 자신감의 상실은 가속화 되고 있는 중이었음을, 의료진이건 환자측이건 모두 공감하고 있었고, 이미 다 같이 굴러가고 있던 생존요구라는 반강제적 차륜의 약진이, 질병이란 숙명의 진흙더미에 떡이 되어가고 있었어도, 세상은 그다지 사람들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미디어는 항상 신약을 통해 인류가 구원된 것처럼 선전하는 것을 방임했고, 우리 같은 레프독들은 약사가 퇴출되어, 더 이상 물을 곳이 없음으로 인해, 굳어질 대로 굳어진 표정으로 약봉지를 들고 서 있는 환자들을 향해, 미친듯이 부작용의 미미함을 설득하는 대화유도법을, 정부로부터 정기적으로 교육 받아야 했다.
환자들을 위한 절대 진료시간이란 빗장은 이미 가치를 상실했고, 그 모든 후처리와 질문에 대한 응대는 레프독의 책임이었며, 그것은 정부나 의료진의 입장이라기 보다는 이윤의 창출에 책임을 지고 있는 특수계층의 의지라고 봐야 했다.
“이름!”
내 앞에 앉아 있는 자는 질문이 아닌 명령을 하고 있었다.
“다 알고 있지 않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네가 알고 있는 게 다를 수도 있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통제된 상황에서 난 범죄적인, 혹은 병리학적 분류를 위해 질문을 당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대답 여하에 따라, 난 다른 사람으로 평가될 것이고, 질문의 방향도, 내가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흐를 가능성이 다분했다.
“...레프독”
그래, 난 레프독 이었지....내 인생이 바뀌게 된 시발점 이었고,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는 현재보다, 오히려 과거의 그 시점이 오히려 나란 사람을 밝히기에 명확한, 모순적인 여정이었다고 해도, 그 명칭이 가져다 주는 신분적인 안정감은, 그 당시를 따라잡을 그 어떤 직업도 지금의 것들과 비교될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워..워...워...진정하시게나..그렇게 흥분하니 루프가 떨고 있잖아?”
시간을 거스르는 나의 퇴행의지가 기어이 아세틸콜린을 분비시켜 분노와 경계심리를 발작적으로 분포했는가 보다. 이미 결박루프는 무한반복적인 쪼임이 생활화 된 것처럼, 내 신체의 곳곳을 무차별 적으로 압박하며 혈류를, 신경조직을, 희망을 차단하고 있었다.
2.신상털기
“이제부턴 루프에 하나를 더 한다. 명령의 거부에 해당된다고 판단되면 벌점 하나씩 추가, 이해되지?”
그는 서두름이 없다. 나에게 경고를 먼저 전달하는 이유는, 앞으로의 여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고를 담고 있으며, 그 원칙에 순응하지 않았을 경우, 자신은 그 진행을 멈출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과도 같았다.
“정면을 주시하게나. 일부러 초점을 흐트리는 것 같은, 멍청한 발상은 하지 말도록...”
나의 정면, 정확한 위치의 허공 위로, 나에 대한 정보는 한치도 틀림이 없이 표시되어 지고, 나는 어느새 그것을 읽고 있었고, 흡사 그 중에 오타라도 발견해야 되는 것처럼, 온몸을 이용해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나의 따라잡기는 어느새 멈추었고, 다시금 그 자를 바라다 본다.
“내가 경고했을텐데....”
그랬다. 경고는 기억에 분명히 남아 있었고, 고통은 정확히 나를 관통했다.
“아주 훌륭해. 눈으로 읽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뇌로 전달되어 사고와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이론이 이렇게나 오랜 세월, 또렷이 증명된다는 것에 찬사를 보낼 밖에....”
허공에 떠 있는 나의 약력은 화려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솔직히 내가 내용을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문명의 표현도구로서, 활자화되고 도식화 되어 분류된, 나의 외형을 훑어본 것일 뿐... 난 참으로 험난하게 살아왔는가 보다.
“너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네 스스로 판단할 때에....”
그는 또다시 질문을 명령처럼 말하고 있다.
“나란 사람은....”
나의 어두를 잘라 먹으면서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비정형적이다. 뭐 이렇게 말하고 싶나?, 그런 거야?”
나의 침묵은 대답을 대신했다. 나의 살아온 경로들을 패턴화 하더라도,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을만큼, 나의 삶은 예측이 불가능 했고, 거쳐간 과정들조차, 어떤 이론을 통해 여과시키려 해도, 분석의 메스를 댈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한 이탈과 변측적 함수가 산재해 있는 답답한 케이스 였다.
“레프독 시절 빼고는 자네의 직종분석 뿐만 아니라, 인적 및 물적 관계보고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게 매우 흥미로와. 거지도 아닌 주제에 특별히 그 절차들을 피해다니면서 살기는 불가능 했을텐데....”
“혐오행위자에게는 특혜가 뒤따르기 마련이죠.”
혐오행위자. 범죄속의 행동양식과는 다른 분류로 봐야 했다. 인간은 혐오의 대상을 아주 다채롭게, 신속한 이유로 대체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동물이라고 나는 항상 말해왔다. 항상 혐오의 대상속에 병립되어진 조건은, 다름 아닌 장막이라는 사실도, 나는 함께 거들먹 거리곤 했다.
그것은 자연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정립하고, 인공스럽게 선택한 조작술. 이른바, 버리고 싶은 것을 일시적으로 가려주는 어둠이었고, 망각이었으며, 외면이자, 신속한 꼬리끊기 였다.
“살인을.... 말하는가?”
“그게 중요한 가요? 지금?”
이번엔 그가 대답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관심이란 물건은, 쏠리는 것조차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그 말...필요치는 않아도 기어이 물어야 할 이유가 나름 뚜렷하다고 믿는 어리섞음...언제나 후회는 예상된 시점을 공습하고, 미련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결국은 남고야 마는게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특혜일 수는 없습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나와, 관계선상에 오른 이들을 다른 상태를 만든다고, 그게 나를 이롭게 한다고 누가 분석했죠?”
“이론적인 접근의 확산은 이제부터 금지....”
그는 나란 인물속에 도사리고 있는 과감성이 두려운 게다. 변화를 모색하는 위험부담 에서조차, 애초에 이탈되어 있던 나란 인물로 인해,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 그 자의 기준선은 상처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는 알까?
“어떤 것도 주장한 바 없고, 강요는 더더욱...그렇다고 목적의식도 전무하고...”
누군가는 나란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가 보다. 레프독 시절, 계수기가 정해 놓은 환자응대 한계를 초과했음에도, 난 병원 밖으로 길게 나있던 환자들의 줄서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의 가장 큰 약점은 의료진을 끝까지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엔가는 기대고 의지해서라도, 현실을 이겨나갈 힘을 얻는다는 나약한 자가당착...
언제나 환자들은 스스로 기울어진 각도의 안정감을 획득함과 동시에, 무엇을 위해 이토록 자기중심을 잃어야 하는가에 대한 명분과 목적의식은 애초에 팔아치운 바람에, 자신의 주머니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막다른 골목 끝에서야 조우하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어차피 잃을 것은 망가진 내 몸뚱아리 뿐이었다.
“자네가 갖고 있는 의도는 뭐지? 동기도 전무하고..., 연결고리가 하나도 밝혀진 게 없잖아!”
그 자는 질문을 명령조로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 그걸 나도 알고 싶었으니까.”
한정된 공간속에서 그 자는 나를 팔아치울 듯이 너덜대는, 많은 것을 들고 들어온 방물장수처럼 보였지만, 그건 허세였다.
3.Memento
그 자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숨쉬기가 더욱 편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자네를.....”
그럴 것이다. 내가 곁으로 다시 갈 수 있다는 기대를 그녀만은 하고 있을테니...
“나도 어차피 어떤 것이라도 결정해야 하지만, 확신은 없어.”
내 인생에 유일 했으며, 지금까지 내 기록에 유일하게 이름이 올라와 있는, 그러면서도 나를 이렇게 결박시키도록 끝까지 따라 붙어왔던 그녀...
“줄서기는 내일도 변함 없을 거에요...우리도 줄을 서고 있는 것처럼.”
병원 밖으로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선 긴 줄을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 뜯고 있던 나에게 던진 그녀의 첫마디..그건 독백도 아니었고, 주절거림은 더더욱 아니었음에도, 난 그 한마디에 가슴을 쳐맞고 다리가 풀려 버렸다.
병원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유도 없이, 자살을 하는 레프독이 늘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는 얘기들...그 주변에 그녀가 있긴 했어도, 수 많은 예측심리학과 범죄분류학을 동원해도 그녀의 존재가 가져다 주는 동기의 전이여부를 밝혀낼 수는 없었다.
그냥 쓰레기를 마냥 청소하고 다니는 잡부였던 그녀가, 자신과 비교될 수도 없는 레프독이라는 거성을 무너뜨릴만한 위해요소를 소유하고 있다고는 누구도 믿질 않았으니까.
누구에게나 회의는 있는 법이다. 어째서 굴러굴러 내가 이 자리에 와 있는가 하고 지나온 자욱을 무심코 되돌아 본다는 뭐 그런...레프독에게 소통과 토론같은 사치는 애초에 주어지질 않았다. 언제나 가득찬 지시사항을 숙지하기 바빴고, 의례 자신들은 그런 과정속에서 몰라보게 성장해 있을 것이라고 다독이는 주변의 인맥이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
벌어져가는 현재의 상황을 시시콜콜 판단할 의무도 없었을 뿐더러, 해야 할 일을 행동에 옮겨야 하고, 그 와중에도 정신 못차릴 정도로 끼어드는 전문성의 강요가, 오감을 막아서고 스스로를 방벽안에 가두는 효과를 불러오긴 했어도, 연쇄적인 자살을 불러일으킬 만한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거리감이 존재했다.
“당신은 특별해.”
그녀가 장난처럼 던지는 그 한마디에 많은 레프독들이 스스로 죽음을 자원했건만, 나만은 예외였던 가 보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나를 불러들였다. 남들은 레프독의 이성이 백지처럼 하얗다고 말했지만, 난 그렇게 믿질 않았다. 그들의 이성은 하얀 백지상태가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고 까만 글씨로 빼곡히 글자로 뒤덮힌 죽은 땅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살인자 일수도 있고, 동기를 전염시킨자 일수도, 아니면 그냥 멍청한 수다쟁이 일 수도 있는 그녀가 내 앞에서는 말없이 옷을 벗었다.
어깨 선이 뭉툭하고, 돌아보면 남들과 같은 머리결, 굴곡진 그늘마저 살결의 포시라움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그녀의 우울한 세레나데. 그녀도 나도 서로에게서 쓰레기를 천천히, 빠짐없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골라가며 버려주고 있었다. 한 눈에 다 들어 오지 않는 그녀의 젖꼭지가, 한 입에 다 들어차지 않는 그녀의 타액들이, 한 몸에 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녀의 중량들이 하나하나 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난 그걸 진화라고 불렀다.
혹시 나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함으로 나는 계속 꿈을 꾸었다. 그녀의 진액이 나의 뇌로 스며들고, 그녀의 진피가 나의 날개가 되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녀의 음모속에 내 눈물을 파종했고, 죽어도 좋을듯 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난 오래도록 그녀를 바수면서도, 도리어 그녀가 나에게 녹아들고 있다는 망상을 계속 잊어가며 울기만 했다.
깨고나면, 그녀는 나에게 다가서는 새로운 쓰레기 더미였다. 낱낱이 분류하고, 까발기며, 그 냄새를 증오하면서도 결코 고개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이 치미도록 분하기에, 이런 아침을 다시 또 버릇처럼 맞이하며 거부할 수 없는 나의 멍청한 기억력을 증오할 새도 없었다.
그렇게 잊혀지고, 버려져도, 내 눈 앞의 그녀는 언제나 신천지의 탐색권을 선물처럼 내 손에 건네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의 망각이 그녀를 하루하루 더욱 신선한 퇴비로 만들어 간다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그렇게 잊혀져 가면서도, 그녀의 삶과 접붙여 졌다는 망상으로 인해, 어둠과 동승하여 이탈된 내 기억마저도 그게 사랑이려니 믿으려 했다.
4.흐르는 물처럼
병원에서 내가 사라졌다는 것이 연이은 레프독의 자살사건과 연이어 화제로 떠오르기는 했어도, 의심을 살만한 그 어떤 용의자도, 자리를 비우는 멍청한 원인제공이 없었기에, 곧바로 나란 존재는 잊혀졌다. 오랜만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와 졌고, 난 할 일이 없어졌다.
“그게 문제였어...”
그 자는 나의 존재감이 상실된 그 시점이 중요한 포인트 였다고 이제사 감동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제 여행이 시작된 거야.”
“여행?”
그 자의 의문부호는 명령임을 잊지않고 있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그녀는 나에게 곧잘 동화를 들려 주곤 했다.
“언제부터 였는지는 몰라도 산이 있었어.
거기에 있으라고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는데,
산은 그냥 그렇게 거기에 있었던 거지.
예전엔 골짜기 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바닥일 수도 있었겠지.
산은 스스로의 아픔을 참고서,
빗물의 도움을 받아가며,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을 한 조각, 한 조각 떼어냈어.
그 비늘들이 산을 떨어져 나오고,
세상의 아우성은 시작되었다고 메아리가 전해주었대.
비늘은 무리를 지어 세상이란 냇물에 몸을 섞었고,
의심과 두려움을 뗏목삼아,
온갖 장애물들이 자신을 죽일듯이 덤벼드는
그 전쟁 속에서도
자신을 기억하고 예기치 않게 달겨드는
옆자리의 비늘을 마주칠때마다 울곤 했지.
비늘을 미워하다 누군가 죽어가고,
비늘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누군가를 죽이고,
비늘 스스로가 함정에 몸을 던지고,
피를 흘려 살고 싶지 않아도 어디선가 살려내고,
아무튼 그 비늘의 숫자보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이 비늘로 인해 죽어가고, 또 살아났기에,
아마도 그 힘으로 비늘은 행선지를 짐작할 거라
물이 속삭였단다.
그때 비늘이 대답했어.
-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아직은 알수 없어.
무지개가 거들었지.
-내 손끝을 찾아오는 게 아닐까?
비늘은 중얼거렸어.
-나의 여행은 오늘 석양까지만, 내일은 나의 다른 조각이 그걸 이어 갈거야.
안개가 걷히며 손을 내밀었어.
-그래, 먼 훗날, 알게 될거야.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녀의 동화는, 누워있는 내 얼굴 위로, 시계추 처럼 흔들리는 젖무덤보다도, 내 눈을 더 어지럽히는 유두의 앙징맞음도 능가해 버리는, 그 무엇이 담겨있었다.
5.외롭다는 이유로
“그녀는?”
이젠 그 자의 질문이 새롭지도 않다.
“그녀가 떠났기에 자네의 행동지표가 변화된 듯도 한데...아닌가?”
“난 변한게 아니라, 변해가는 사람들을 찾아나섰다는 것이 옳은 답이지.”
내가 이 자리에 끌려 오기까지, 그렇게나 다양한 인간 군락을 섭렵하며, 그 많은 사람의 마지막을 거두어 버렸던 이유가, 생각만큼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다수의 연구 인력과 조사와 자료를 확보했다 할지라도, 그 안에 담겨진 현상을 한 줄의 이론식으로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을 뛰어넘는 길임을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토록 단순한 생각으로, 그다지 복잡한 삶을 살아온 나란 인간을, 그 놈의 신상자료 몇줄로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해답을 포기한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세상에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지?”
나의 침묵대신 그 자를 노려보는 나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연이어 조여드는 루프의 압박...
“어째서 죽인 자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거지?”
하지만, 같은 곳은 아니었다. 우후죽순처럼 눈만 뜨면 생겨나는 정류장이었지, 같은 곳은 아니었다.
“그것도 피해자들이 소지하였거나, 구입한 적도 없는 화려하고 비싼 옷을 입힌 채로...”
나는 그들에게 행복한 여정의 기억을 피부로나마 속삭여 주고 싶었다. 살갗의 감각속에 파고들었을, 섬유의 안온한 촉감들, 그로 인해 향수처럼 퍼지게 될, 발걸음의 들뜬 기대감...
그러나,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는대로 거부할 수 없이 끌려갔을테고, 신원확인을 거쳐, 그 옷은 거친 손길로 벗겨져 버려졌을 것이 분명했으며, 마찬가지 신세처럼, 그들이 의지적으로 내다 버린 가족들처럼, 그들도 세상 어느 곳으로, 쓰레기처럼 다시 분류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생명을 얻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누구로부터 이어졌는가를 망각한 채, 이 세상이 나만을 위한 톱니바퀴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이기심으로 내다 버린, 그들의 형제, 자매, 부모, 배우자, 자식들이 쓸쓸히 방 한구섞에서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 용서없는 체벌을, 나 만은 외면 할 수 없었다.
고독사를 맞이한 모든 이들의 관련자를 일일이 찾아내어 벌할 수는 없었다. 이미 버려진 사람들의 숫자는 정도를 넘어섰고, 또 다른 삶을 꾸려가야 한다는 알량한 이유 하나만으로, 관련인들은 이사를 앞두고 쓸모없는 짐짝을 길밖으로 내모는 것처럼, 자신의 생존이유와 관련된 인맥을, 그런식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에 일말의 양심도 갖고 있질 않았으니까.
그들과 생전에 접촉하여 안면식이라도 키우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접근법을 쓰지 않고서는 불가능 했다. 나는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했고, 나를 추적해오는 그 많은 추측을 보기좋게 따 돌리기 위해, 거리와 시간과 행태에서 자유로와야만 했다.
그녀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자원했고, 이제는 그것이 유일한 이 지구상의 도피처처럼 미디어는 나불대고 있었다. 나란 사람을 고독사로 몰고 갈 의지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한마디 사과 없이, 다른 별에서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며, 새로 생긴 그 정류장을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별을 고한 그녀....
그녀만을 욕할 맘은 애초에 없었다. 누구나 쓰레기를 지고 가지 않으려는 것처럼, 가족을, 짐짝을, 슬픔을, 추억을 버려대고 있었으니까. 남겨진 자의 분노를 그녀는 간과한 것뿐...하루에도 수없이 하늘을 뒤덮는 이송셔틀의 분사노즐로부터, 남겨진 자들의 머리 위로 분노의 입김을 쏟아내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인사말을 전할 상대가 없었다.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여, 누구도 그 죽음에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짐짝처럼 시신이 치워지는 것을, 정작 청소원 이었던, 난 보진 못했다. 그저 그 공간은 치워야 할 쓰레기와 생전에 그들이 남긴 아련한 추억과 서글픔만이, 시신이 남긴 악취처럼 허공에 떠 있을 따름이었다.
6. 남겨진다는 것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라고 할 이유도 없잖아?”
이젠 범인으로 몰고 갈만한 사람도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이 그 자의 궤변이긴 했다. 사실 내가 이렇게 체포된 것도 범죄를 혐오한다거나, 사명감에 불타는 작자들의 명예욕이 대변된 결과는 아니었다. 나의 체포에는 이윤의 극대화란 중심 촛점을 흐트리는 날파리를, 젓가락으로 잡아대려는 철없는 충성맹진이 그 원인 이기도 했다.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결심한 작자들의 첫번째 결행은 바로 쓰레기를 분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투척과 정리...버려지는 관련자들은 이유를 알기도 했고, 모르는 자들도 많았다. 눈에 보이지 않게 쓰레기의 적재위치를 이동하고 나면, 바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찾아든다고 믿었다.
그 평화가 손에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영역을 이주시킬 권력자에게 기대감을 뿜어내는 것이 두번째 행동표현 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레임....한껏 부푼 채로, 저멀리 푸른 빛으로 멀어져 갈 이 땅을 향해, 쓰레기여 잘있게 라며 소리칠 순간만을 고대하며, 아울러 내다버린 쓰레기가, 다수의 여타 쓰레기 속으로 이름없이 파묻혀 사라지기만을 기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난 그 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용서없는 Scythe였다.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아 마련한 이주비용을 걸머쥘 타이밍 앞에서, 언제나 이유없는 펑크를 내는 사건들로 인해, 이윤이 사료처럼 공급되어지던 그 작자들을, 예고도 없이 허기지게 한 나의 추수질이, 그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음은 당연했다.
고독사의 당사자와 어떤 인연으로라도 연관되어 희한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사건을 조사하던 그 자는 시점적으로 돌출된 그녀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배후에 그림자처럼 숨을 죽이고 있던 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거의 행운이랄 수 있었다.
“왜 말이...어어...그만...그만...여기 누구 없어?”
가물거리는 나의 시선 앞에서 그 자는 여전히 질문을 명령처럼, 외침조차 혼돈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롤러코스터로 전해지는 지포스를 견디는 심장의 한계는 분명히 일반적인 수치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그러나, 그건 모두를 위한 배려는 아니었다. 나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나를 모르는 그 자가, 내 눈 앞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난 나의 몸이 무기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의 의지를 제어하기 위해 온 몸을 감싼채로 겁박을 억지로 제공하는 루프의 약점은 바로, 당사자가 관통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 대한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박이란 목적을 수행하기만 할 뿐, 당사자를 보호하고 싶은 의지는 없다는 결함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 뒤에서 미친듯한 파형을 뿜어내는 바이탈 디텍터가 루프로 이어진 그 매커니즘을 내가 모를 리 없고, 내가 스스로 일으킨 살인 본능이, 내 앞에 자리한 그 자를 잡아먹을 듯이, 뿜어지는 과정속에서 나를 위한 배려는 이미 없었다. 나의 혈관과 신경, 근육은 루프의 결박한계를 넘기고 있었지만, 나의 강렬한 살인의지는 그것을 막을 재간이 처음부터 없었다.
나의 과거를 더듬어 돌아가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로 인해, 나는 나의 결정을 스스로 기꺼워 해야 했다.
“그래, 그녀의 품속에서 자라나는 나의 또 다른 분신, 그 비늘이 나의 몫을 대신 살고 있잖아? 그럼 됐지 뭐....나야 그들에게 짐이자, 쓰레기지....영원히 다른 쓰레기 더미와 함께 그들에게 기억되지 않고 잊혀져야 편한 존재....”
루프가 계속해서 나의 살을 지나 근육 깊숙히 파고 들어도 나의 의지는 흔들림 없이, 피를 부르고 있었고, 떠나지 못하고 나의 손에 삶을 접은 자들이 하나, 둘 내 앞에 마중을 나오고 있었다. 더 이상 루프를 제거하기 힘든 지경으로 파고든 후에야 나는 숨결을 놓으며 속삭였다.
“당신이....당신이.... 너무 그립다.....”
-END-
P.S.:블루스맨 입니다. 글을 올리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제가 글의 성격 분류에 게으른 편이라 항상 환타지로 올리게 됩니다. 언젠가 어느 작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리....이 세상 모든 글들은 다큐빼고 모두 구라가 베이스라고...ㅋㅋㅋ. 그런 연유로 해서 제가 쓴 글들은 그 영역에서 결코 벗어남이 없기에, 굳이 분류한다라기 보다는 조금 멋스런 표현의 환타지란 단어가 어울릴 듯 하여, 언제나 환타지라고 선정한 것이니, 읽으시기전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한가지 더 사족으로 붙이자면, 단편이 갖고 있는 극적 긴장감을 위해서, 성격을 사전에 구분하는 것을 정작 글을 쓰는 본인이 별로 선호하질 않는, 지랄맞은 성격도 한 몫하고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블루스맨 배상-
1.루프
결박이란 상황이 이리도 빈틈이 없는 줄은 몰랐다.
“딴 생각은 애초에 먹질 않는 것이 좋지. 내가 묶여봐서 알거든.”
어둑했던 밀실에 낮은 촉수의 조명이 들어 오면서, 훅 하는 기류가 몸 뒤쪽에서 느껴진 걸 보면, 누군가 같은 공간 안에 들어섰다는 의미였다.
“내가 설명해 줄까?....인간의 피부 넓이 중에서 1평방 인치의 피부에는 천구백오십만개의 세포와 1300개의 근육조직, 78개의 신경조직, 650개의 땀구멍, 100개의 피지선, 65개의 털, 20개의 혈관, 178개의 열감지 센서와 13개의 냉방 센서가 있지. 키는 저녁 때보다 아침의 키가 0.8Cm정도 크다고 하고... 발은 저녁때 가장 커지게 되고, 하루 평균 2,340번 숨을 쉬고, 120평방미터의 공기를 마셔야 살고, 3.5Kg의 노폐물을 배설해야 하며, 0.7리터의 땀을 흘리고, 평균 750번 정도 주요 근육을 움직이지.
이런 허접한 유아용 기초정보가 어디에 쓰이는지 아나? 바로 너 같은 놈을 묶어놓을 때 사용되는 기초 정보라고 말해두지. 이것보다 더 많고 난해한 정보들이 빼곡히, 차분하게 쌓여서 지금의 결박 수단을 만들었다고나 할까? 네 놈을 꼼짝 못하게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쳐발르고 있는, 그 얇디 얇은 결박루프 속에는 너의 피부와 혈액, 신경 뉴우런들을 타고 흐르는 모든 정보를 읽고 있어.
만약 오줌이 마렵다는 동물적 반사본능이 꿈틀거리는 것과, 결박을 풀고서 뭐 어떻게라도 해보려고 움찔거리는 의지를, 그 루프는 너무나, 얄밉게, 정확히, 구분하는 센스가 있다는 것을 너 같은 놈들은 모른다고 해두지.
피부에서 분포되는 유기화학 폐기물인 땀과 지방, 젖산같이 널널한 항목들의 농도를 정확히 계산해서, 네 놈이 움직이고 싶은 근육과 신경, 골격의 진행 방향을 철저하게 계산한 채로, 한 발 앞서 간다고나 할까? 네 놈이 움직이고 싶은 만큼, 그 앞이 한발 앞서 벽으로 막혀 있는 형국이지. 이제 이해가 가나?”
난 정말 나쁜 놈인 모양이다.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 걸 보면...
“왜 루프지? 하고 많은 이름 중에 루프가 뭐냔 거지?”
난 질문과 함께, 그나마 눈과 귀, 입 그리고 숨쉴 수 있는 코가 열려 있다는 것에 처음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고 있었다.
“질문은 없다. 아니 필요치 않지. 너는 루프로 인해 고개조차 돌릴 수 없다해도, 난 너의 뒤통수에 걸려 있는 바이탈 디텍터로 인해, 너의 미세한 감정선을 교향곡처럼 온 몸으로 따라잡고 있으니까.”
이젠 그 어느 곳에서도 바이탈 디텍터를 사용하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숨소리도, 맥박수도, 혈압도, 산소포화도와, 뇌파의 주기들 조차 개인 정보에 속한다는 법령이 평준화 된 이후로 말이다.
바이탈 디텍터....정말 오래 전에 들어 보았던 그런 구닥다리 장비를 아직까지.....
인간의 질병과 치유라는 교전역사 속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의학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했던 약사들을 더 이상, 교육기관에서 뽑지 않게 되면서, 모든 경로는 뒤틀리기 시작되었다고 난 믿고 있었다.
의료진과 협업에 의해서 환자에게 진료 이상의 피난처를 제공했던 수 많은 약사들이 퇴출 당하고, 기계손이 코드로 처방된 약제들을, 자판기처럼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나같은 레프독(레퍼런스 닥터)은 의사로 취급 되지도 못하면서, 그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는 환자들의 원성들을 의무감으로나마 줏어담기 바빴다.
의사는 더 이상, 신과 같은 존재로 존경 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세상은 받아들였고, 어떤 치료제나 개혁 적인 드라이빙을 통하더라도 한계를 넘을 수 없는, 이른바 인간의 지식 축적력과 그 치유 능력의 한계 앞에 항복을 고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정해진 수명으로 살아간다고 가정했을 때, 그가 혹은, 그녀가 자신의 올바른 판단력으로 환자를 치유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과연 어느 연령즈음에 발휘될 것이며, 그 어느 순간까지 그 능력이 올바르다 증명될 수 있는가에 이미 답을 잃었다는 의미일게다.
레프독은 의사가 아니라고 모두가 떠들었다. 의사는 Doctor, 간호사는 Nurse, 나같은 RefDoc은 반쪽 의사 이면서도, 의사라고 평가되지는 않았으며, 의료문화의 공백을 메우고 다니는 접착제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맨처음 레프독은 의료문화의 초입에서, 갈 곳 몰라 방황하며,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학부 초년생들이 맡아 운영되고 있었다. 언제나 예상을 넘어서서 몰려드는 환자의 양적 해소를 처리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병폐는, 서비스의 질을 떨어 트리고 있었고, 너무 많이 알고 덤벼드는 환자나 보호자들을 진상취급하며, 내치는 것이 보편화되던 시절 이었다.
너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뻔한 전문성을 갑옷 삼아, 질문이 무색해지도록 어렵고 조작도 불가능해 보이는 기계와 장비를 방패 삼아, 의료진은 그 뒤에 이쁜 얼굴로 잠복한 채, 몰려드는 적들에게 눈 앞의 지뢰가 보이지 않느냐며, 목이 터져라 소리만 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미 전투의지는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었으며, 자신감의 상실은 가속화 되고 있는 중이었음을, 의료진이건 환자측이건 모두 공감하고 있었고, 이미 다 같이 굴러가고 있던 생존요구라는 반강제적 차륜의 약진이, 질병이란 숙명의 진흙더미에 떡이 되어가고 있었어도, 세상은 그다지 사람들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미디어는 항상 신약을 통해 인류가 구원된 것처럼 선전하는 것을 방임했고, 우리 같은 레프독들은 약사가 퇴출되어, 더 이상 물을 곳이 없음으로 인해, 굳어질 대로 굳어진 표정으로 약봉지를 들고 서 있는 환자들을 향해, 미친듯이 부작용의 미미함을 설득하는 대화유도법을, 정부로부터 정기적으로 교육 받아야 했다.
환자들을 위한 절대 진료시간이란 빗장은 이미 가치를 상실했고, 그 모든 후처리와 질문에 대한 응대는 레프독의 책임이었며, 그것은 정부나 의료진의 입장이라기 보다는 이윤의 창출에 책임을 지고 있는 특수계층의 의지라고 봐야 했다.
“이름!”
내 앞에 앉아 있는 자는 질문이 아닌 명령을 하고 있었다.
“다 알고 있지 않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네가 알고 있는 게 다를 수도 있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통제된 상황에서 난 범죄적인, 혹은 병리학적 분류를 위해 질문을 당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대답 여하에 따라, 난 다른 사람으로 평가될 것이고, 질문의 방향도, 내가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흐를 가능성이 다분했다.
“...레프독”
그래, 난 레프독 이었지....내 인생이 바뀌게 된 시발점 이었고,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는 현재보다, 오히려 과거의 그 시점이 오히려 나란 사람을 밝히기에 명확한, 모순적인 여정이었다고 해도, 그 명칭이 가져다 주는 신분적인 안정감은, 그 당시를 따라잡을 그 어떤 직업도 지금의 것들과 비교될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워..워...워...진정하시게나..그렇게 흥분하니 루프가 떨고 있잖아?”
시간을 거스르는 나의 퇴행의지가 기어이 아세틸콜린을 분비시켜 분노와 경계심리를 발작적으로 분포했는가 보다. 이미 결박루프는 무한반복적인 쪼임이 생활화 된 것처럼, 내 신체의 곳곳을 무차별 적으로 압박하며 혈류를, 신경조직을, 희망을 차단하고 있었다.
2.신상털기
“이제부턴 루프에 하나를 더 한다. 명령의 거부에 해당된다고 판단되면 벌점 하나씩 추가, 이해되지?”
그는 서두름이 없다. 나에게 경고를 먼저 전달하는 이유는, 앞으로의 여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고를 담고 있으며, 그 원칙에 순응하지 않았을 경우, 자신은 그 진행을 멈출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과도 같았다.
“정면을 주시하게나. 일부러 초점을 흐트리는 것 같은, 멍청한 발상은 하지 말도록...”
나의 정면, 정확한 위치의 허공 위로, 나에 대한 정보는 한치도 틀림이 없이 표시되어 지고, 나는 어느새 그것을 읽고 있었고, 흡사 그 중에 오타라도 발견해야 되는 것처럼, 온몸을 이용해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나의 따라잡기는 어느새 멈추었고, 다시금 그 자를 바라다 본다.
“내가 경고했을텐데....”
그랬다. 경고는 기억에 분명히 남아 있었고, 고통은 정확히 나를 관통했다.
“아주 훌륭해. 눈으로 읽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뇌로 전달되어 사고와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이론이 이렇게나 오랜 세월, 또렷이 증명된다는 것에 찬사를 보낼 밖에....”
허공에 떠 있는 나의 약력은 화려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솔직히 내가 내용을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문명의 표현도구로서, 활자화되고 도식화 되어 분류된, 나의 외형을 훑어본 것일 뿐... 난 참으로 험난하게 살아왔는가 보다.
“너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네 스스로 판단할 때에....”
그는 또다시 질문을 명령처럼 말하고 있다.
“나란 사람은....”
나의 어두를 잘라 먹으면서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비정형적이다. 뭐 이렇게 말하고 싶나?, 그런 거야?”
나의 침묵은 대답을 대신했다. 나의 살아온 경로들을 패턴화 하더라도,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을만큼, 나의 삶은 예측이 불가능 했고, 거쳐간 과정들조차, 어떤 이론을 통해 여과시키려 해도, 분석의 메스를 댈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한 이탈과 변측적 함수가 산재해 있는 답답한 케이스 였다.
“레프독 시절 빼고는 자네의 직종분석 뿐만 아니라, 인적 및 물적 관계보고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게 매우 흥미로와. 거지도 아닌 주제에 특별히 그 절차들을 피해다니면서 살기는 불가능 했을텐데....”
“혐오행위자에게는 특혜가 뒤따르기 마련이죠.”
혐오행위자. 범죄속의 행동양식과는 다른 분류로 봐야 했다. 인간은 혐오의 대상을 아주 다채롭게, 신속한 이유로 대체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동물이라고 나는 항상 말해왔다. 항상 혐오의 대상속에 병립되어진 조건은, 다름 아닌 장막이라는 사실도, 나는 함께 거들먹 거리곤 했다.
그것은 자연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정립하고, 인공스럽게 선택한 조작술. 이른바, 버리고 싶은 것을 일시적으로 가려주는 어둠이었고, 망각이었으며, 외면이자, 신속한 꼬리끊기 였다.
“살인을.... 말하는가?”
“그게 중요한 가요? 지금?”
이번엔 그가 대답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관심이란 물건은, 쏠리는 것조차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그 말...필요치는 않아도 기어이 물어야 할 이유가 나름 뚜렷하다고 믿는 어리섞음...언제나 후회는 예상된 시점을 공습하고, 미련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결국은 남고야 마는게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특혜일 수는 없습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나와, 관계선상에 오른 이들을 다른 상태를 만든다고, 그게 나를 이롭게 한다고 누가 분석했죠?”
“이론적인 접근의 확산은 이제부터 금지....”
그는 나란 인물속에 도사리고 있는 과감성이 두려운 게다. 변화를 모색하는 위험부담 에서조차, 애초에 이탈되어 있던 나란 인물로 인해,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 그 자의 기준선은 상처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는 알까?
“어떤 것도 주장한 바 없고, 강요는 더더욱...그렇다고 목적의식도 전무하고...”
누군가는 나란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가 보다. 레프독 시절, 계수기가 정해 놓은 환자응대 한계를 초과했음에도, 난 병원 밖으로 길게 나있던 환자들의 줄서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의 가장 큰 약점은 의료진을 끝까지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엔가는 기대고 의지해서라도, 현실을 이겨나갈 힘을 얻는다는 나약한 자가당착...
언제나 환자들은 스스로 기울어진 각도의 안정감을 획득함과 동시에, 무엇을 위해 이토록 자기중심을 잃어야 하는가에 대한 명분과 목적의식은 애초에 팔아치운 바람에, 자신의 주머니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막다른 골목 끝에서야 조우하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어차피 잃을 것은 망가진 내 몸뚱아리 뿐이었다.
“자네가 갖고 있는 의도는 뭐지? 동기도 전무하고..., 연결고리가 하나도 밝혀진 게 없잖아!”
그 자는 질문을 명령조로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 그걸 나도 알고 싶었으니까.”
한정된 공간속에서 그 자는 나를 팔아치울 듯이 너덜대는, 많은 것을 들고 들어온 방물장수처럼 보였지만, 그건 허세였다.
3.Memento
그 자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숨쉬기가 더욱 편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자네를.....”
그럴 것이다. 내가 곁으로 다시 갈 수 있다는 기대를 그녀만은 하고 있을테니...
“나도 어차피 어떤 것이라도 결정해야 하지만, 확신은 없어.”
내 인생에 유일 했으며, 지금까지 내 기록에 유일하게 이름이 올라와 있는, 그러면서도 나를 이렇게 결박시키도록 끝까지 따라 붙어왔던 그녀...
“줄서기는 내일도 변함 없을 거에요...우리도 줄을 서고 있는 것처럼.”
병원 밖으로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선 긴 줄을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 뜯고 있던 나에게 던진 그녀의 첫마디..그건 독백도 아니었고, 주절거림은 더더욱 아니었음에도, 난 그 한마디에 가슴을 쳐맞고 다리가 풀려 버렸다.
병원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유도 없이, 자살을 하는 레프독이 늘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는 얘기들...그 주변에 그녀가 있긴 했어도, 수 많은 예측심리학과 범죄분류학을 동원해도 그녀의 존재가 가져다 주는 동기의 전이여부를 밝혀낼 수는 없었다.
그냥 쓰레기를 마냥 청소하고 다니는 잡부였던 그녀가, 자신과 비교될 수도 없는 레프독이라는 거성을 무너뜨릴만한 위해요소를 소유하고 있다고는 누구도 믿질 않았으니까.
누구에게나 회의는 있는 법이다. 어째서 굴러굴러 내가 이 자리에 와 있는가 하고 지나온 자욱을 무심코 되돌아 본다는 뭐 그런...레프독에게 소통과 토론같은 사치는 애초에 주어지질 않았다. 언제나 가득찬 지시사항을 숙지하기 바빴고, 의례 자신들은 그런 과정속에서 몰라보게 성장해 있을 것이라고 다독이는 주변의 인맥이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
벌어져가는 현재의 상황을 시시콜콜 판단할 의무도 없었을 뿐더러, 해야 할 일을 행동에 옮겨야 하고, 그 와중에도 정신 못차릴 정도로 끼어드는 전문성의 강요가, 오감을 막아서고 스스로를 방벽안에 가두는 효과를 불러오긴 했어도, 연쇄적인 자살을 불러일으킬 만한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거리감이 존재했다.
“당신은 특별해.”
그녀가 장난처럼 던지는 그 한마디에 많은 레프독들이 스스로 죽음을 자원했건만, 나만은 예외였던 가 보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나를 불러들였다. 남들은 레프독의 이성이 백지처럼 하얗다고 말했지만, 난 그렇게 믿질 않았다. 그들의 이성은 하얀 백지상태가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고 까만 글씨로 빼곡히 글자로 뒤덮힌 죽은 땅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살인자 일수도 있고, 동기를 전염시킨자 일수도, 아니면 그냥 멍청한 수다쟁이 일 수도 있는 그녀가 내 앞에서는 말없이 옷을 벗었다.
어깨 선이 뭉툭하고, 돌아보면 남들과 같은 머리결, 굴곡진 그늘마저 살결의 포시라움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그녀의 우울한 세레나데. 그녀도 나도 서로에게서 쓰레기를 천천히, 빠짐없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골라가며 버려주고 있었다. 한 눈에 다 들어 오지 않는 그녀의 젖꼭지가, 한 입에 다 들어차지 않는 그녀의 타액들이, 한 몸에 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녀의 중량들이 하나하나 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난 그걸 진화라고 불렀다.
혹시 나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함으로 나는 계속 꿈을 꾸었다. 그녀의 진액이 나의 뇌로 스며들고, 그녀의 진피가 나의 날개가 되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녀의 음모속에 내 눈물을 파종했고, 죽어도 좋을듯 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난 오래도록 그녀를 바수면서도, 도리어 그녀가 나에게 녹아들고 있다는 망상을 계속 잊어가며 울기만 했다.
깨고나면, 그녀는 나에게 다가서는 새로운 쓰레기 더미였다. 낱낱이 분류하고, 까발기며, 그 냄새를 증오하면서도 결코 고개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이 치미도록 분하기에, 이런 아침을 다시 또 버릇처럼 맞이하며 거부할 수 없는 나의 멍청한 기억력을 증오할 새도 없었다.
그렇게 잊혀지고, 버려져도, 내 눈 앞의 그녀는 언제나 신천지의 탐색권을 선물처럼 내 손에 건네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의 망각이 그녀를 하루하루 더욱 신선한 퇴비로 만들어 간다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그렇게 잊혀져 가면서도, 그녀의 삶과 접붙여 졌다는 망상으로 인해, 어둠과 동승하여 이탈된 내 기억마저도 그게 사랑이려니 믿으려 했다.
4.흐르는 물처럼
병원에서 내가 사라졌다는 것이 연이은 레프독의 자살사건과 연이어 화제로 떠오르기는 했어도, 의심을 살만한 그 어떤 용의자도, 자리를 비우는 멍청한 원인제공이 없었기에, 곧바로 나란 존재는 잊혀졌다. 오랜만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와 졌고, 난 할 일이 없어졌다.
“그게 문제였어...”
그 자는 나의 존재감이 상실된 그 시점이 중요한 포인트 였다고 이제사 감동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제 여행이 시작된 거야.”
“여행?”
그 자의 의문부호는 명령임을 잊지않고 있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그녀는 나에게 곧잘 동화를 들려 주곤 했다.
“언제부터 였는지는 몰라도 산이 있었어.
거기에 있으라고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는데,
산은 그냥 그렇게 거기에 있었던 거지.
예전엔 골짜기 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바닥일 수도 있었겠지.
산은 스스로의 아픔을 참고서,
빗물의 도움을 받아가며,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을 한 조각, 한 조각 떼어냈어.
그 비늘들이 산을 떨어져 나오고,
세상의 아우성은 시작되었다고 메아리가 전해주었대.
비늘은 무리를 지어 세상이란 냇물에 몸을 섞었고,
의심과 두려움을 뗏목삼아,
온갖 장애물들이 자신을 죽일듯이 덤벼드는
그 전쟁 속에서도
자신을 기억하고 예기치 않게 달겨드는
옆자리의 비늘을 마주칠때마다 울곤 했지.
비늘을 미워하다 누군가 죽어가고,
비늘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누군가를 죽이고,
비늘 스스로가 함정에 몸을 던지고,
피를 흘려 살고 싶지 않아도 어디선가 살려내고,
아무튼 그 비늘의 숫자보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이 비늘로 인해 죽어가고, 또 살아났기에,
아마도 그 힘으로 비늘은 행선지를 짐작할 거라
물이 속삭였단다.
그때 비늘이 대답했어.
-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아직은 알수 없어.
무지개가 거들었지.
-내 손끝을 찾아오는 게 아닐까?
비늘은 중얼거렸어.
-나의 여행은 오늘 석양까지만, 내일은 나의 다른 조각이 그걸 이어 갈거야.
안개가 걷히며 손을 내밀었어.
-그래, 먼 훗날, 알게 될거야.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녀의 동화는, 누워있는 내 얼굴 위로, 시계추 처럼 흔들리는 젖무덤보다도, 내 눈을 더 어지럽히는 유두의 앙징맞음도 능가해 버리는, 그 무엇이 담겨있었다.
5.외롭다는 이유로
“그녀는?”
이젠 그 자의 질문이 새롭지도 않다.
“그녀가 떠났기에 자네의 행동지표가 변화된 듯도 한데...아닌가?”
“난 변한게 아니라, 변해가는 사람들을 찾아나섰다는 것이 옳은 답이지.”
내가 이 자리에 끌려 오기까지, 그렇게나 다양한 인간 군락을 섭렵하며, 그 많은 사람의 마지막을 거두어 버렸던 이유가, 생각만큼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다수의 연구 인력과 조사와 자료를 확보했다 할지라도, 그 안에 담겨진 현상을 한 줄의 이론식으로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을 뛰어넘는 길임을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토록 단순한 생각으로, 그다지 복잡한 삶을 살아온 나란 인간을, 그 놈의 신상자료 몇줄로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해답을 포기한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세상에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지?”
나의 침묵대신 그 자를 노려보는 나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연이어 조여드는 루프의 압박...
“어째서 죽인 자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거지?”
하지만, 같은 곳은 아니었다. 우후죽순처럼 눈만 뜨면 생겨나는 정류장이었지, 같은 곳은 아니었다.
“그것도 피해자들이 소지하였거나, 구입한 적도 없는 화려하고 비싼 옷을 입힌 채로...”
나는 그들에게 행복한 여정의 기억을 피부로나마 속삭여 주고 싶었다. 살갗의 감각속에 파고들었을, 섬유의 안온한 촉감들, 그로 인해 향수처럼 퍼지게 될, 발걸음의 들뜬 기대감...
그러나,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는대로 거부할 수 없이 끌려갔을테고, 신원확인을 거쳐, 그 옷은 거친 손길로 벗겨져 버려졌을 것이 분명했으며, 마찬가지 신세처럼, 그들이 의지적으로 내다 버린 가족들처럼, 그들도 세상 어느 곳으로, 쓰레기처럼 다시 분류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생명을 얻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누구로부터 이어졌는가를 망각한 채, 이 세상이 나만을 위한 톱니바퀴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이기심으로 내다 버린, 그들의 형제, 자매, 부모, 배우자, 자식들이 쓸쓸히 방 한구섞에서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 용서없는 체벌을, 나 만은 외면 할 수 없었다.
고독사를 맞이한 모든 이들의 관련자를 일일이 찾아내어 벌할 수는 없었다. 이미 버려진 사람들의 숫자는 정도를 넘어섰고, 또 다른 삶을 꾸려가야 한다는 알량한 이유 하나만으로, 관련인들은 이사를 앞두고 쓸모없는 짐짝을 길밖으로 내모는 것처럼, 자신의 생존이유와 관련된 인맥을, 그런식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에 일말의 양심도 갖고 있질 않았으니까.
그들과 생전에 접촉하여 안면식이라도 키우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접근법을 쓰지 않고서는 불가능 했다. 나는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했고, 나를 추적해오는 그 많은 추측을 보기좋게 따 돌리기 위해, 거리와 시간과 행태에서 자유로와야만 했다.
그녀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자원했고, 이제는 그것이 유일한 이 지구상의 도피처처럼 미디어는 나불대고 있었다. 나란 사람을 고독사로 몰고 갈 의지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한마디 사과 없이, 다른 별에서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며, 새로 생긴 그 정류장을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별을 고한 그녀....
그녀만을 욕할 맘은 애초에 없었다. 누구나 쓰레기를 지고 가지 않으려는 것처럼, 가족을, 짐짝을, 슬픔을, 추억을 버려대고 있었으니까. 남겨진 자의 분노를 그녀는 간과한 것뿐...하루에도 수없이 하늘을 뒤덮는 이송셔틀의 분사노즐로부터, 남겨진 자들의 머리 위로 분노의 입김을 쏟아내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인사말을 전할 상대가 없었다.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여, 누구도 그 죽음에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짐짝처럼 시신이 치워지는 것을, 정작 청소원 이었던, 난 보진 못했다. 그저 그 공간은 치워야 할 쓰레기와 생전에 그들이 남긴 아련한 추억과 서글픔만이, 시신이 남긴 악취처럼 허공에 떠 있을 따름이었다.
6. 남겨진다는 것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라고 할 이유도 없잖아?”
이젠 범인으로 몰고 갈만한 사람도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이 그 자의 궤변이긴 했다. 사실 내가 이렇게 체포된 것도 범죄를 혐오한다거나, 사명감에 불타는 작자들의 명예욕이 대변된 결과는 아니었다. 나의 체포에는 이윤의 극대화란 중심 촛점을 흐트리는 날파리를, 젓가락으로 잡아대려는 철없는 충성맹진이 그 원인 이기도 했다.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결심한 작자들의 첫번째 결행은 바로 쓰레기를 분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투척과 정리...버려지는 관련자들은 이유를 알기도 했고, 모르는 자들도 많았다. 눈에 보이지 않게 쓰레기의 적재위치를 이동하고 나면, 바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찾아든다고 믿었다.
그 평화가 손에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영역을 이주시킬 권력자에게 기대감을 뿜어내는 것이 두번째 행동표현 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레임....한껏 부푼 채로, 저멀리 푸른 빛으로 멀어져 갈 이 땅을 향해, 쓰레기여 잘있게 라며 소리칠 순간만을 고대하며, 아울러 내다버린 쓰레기가, 다수의 여타 쓰레기 속으로 이름없이 파묻혀 사라지기만을 기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난 그 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용서없는 Scythe였다.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아 마련한 이주비용을 걸머쥘 타이밍 앞에서, 언제나 이유없는 펑크를 내는 사건들로 인해, 이윤이 사료처럼 공급되어지던 그 작자들을, 예고도 없이 허기지게 한 나의 추수질이, 그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음은 당연했다.
고독사의 당사자와 어떤 인연으로라도 연관되어 희한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사건을 조사하던 그 자는 시점적으로 돌출된 그녀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배후에 그림자처럼 숨을 죽이고 있던 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거의 행운이랄 수 있었다.
“왜 말이...어어...그만...그만...여기 누구 없어?”
가물거리는 나의 시선 앞에서 그 자는 여전히 질문을 명령처럼, 외침조차 혼돈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롤러코스터로 전해지는 지포스를 견디는 심장의 한계는 분명히 일반적인 수치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그러나, 그건 모두를 위한 배려는 아니었다. 나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나를 모르는 그 자가, 내 눈 앞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난 나의 몸이 무기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의 의지를 제어하기 위해 온 몸을 감싼채로 겁박을 억지로 제공하는 루프의 약점은 바로, 당사자가 관통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 대한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박이란 목적을 수행하기만 할 뿐, 당사자를 보호하고 싶은 의지는 없다는 결함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 뒤에서 미친듯한 파형을 뿜어내는 바이탈 디텍터가 루프로 이어진 그 매커니즘을 내가 모를 리 없고, 내가 스스로 일으킨 살인 본능이, 내 앞에 자리한 그 자를 잡아먹을 듯이, 뿜어지는 과정속에서 나를 위한 배려는 이미 없었다. 나의 혈관과 신경, 근육은 루프의 결박한계를 넘기고 있었지만, 나의 강렬한 살인의지는 그것을 막을 재간이 처음부터 없었다.
나의 과거를 더듬어 돌아가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로 인해, 나는 나의 결정을 스스로 기꺼워 해야 했다.
“그래, 그녀의 품속에서 자라나는 나의 또 다른 분신, 그 비늘이 나의 몫을 대신 살고 있잖아? 그럼 됐지 뭐....나야 그들에게 짐이자, 쓰레기지....영원히 다른 쓰레기 더미와 함께 그들에게 기억되지 않고 잊혀져야 편한 존재....”
루프가 계속해서 나의 살을 지나 근육 깊숙히 파고 들어도 나의 의지는 흔들림 없이, 피를 부르고 있었고, 떠나지 못하고 나의 손에 삶을 접은 자들이 하나, 둘 내 앞에 마중을 나오고 있었다. 더 이상 루프를 제거하기 힘든 지경으로 파고든 후에야 나는 숨결을 놓으며 속삭였다.
“당신이....당신이.... 너무 그립다.....”
-END-
P.S.:블루스맨 입니다. 글을 올리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제가 글의 성격 분류에 게으른 편이라 항상 환타지로 올리게 됩니다. 언젠가 어느 작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리....이 세상 모든 글들은 다큐빼고 모두 구라가 베이스라고...ㅋㅋㅋ. 그런 연유로 해서 제가 쓴 글들은 그 영역에서 결코 벗어남이 없기에, 굳이 분류한다라기 보다는 조금 멋스런 표현의 환타지란 단어가 어울릴 듯 하여, 언제나 환타지라고 선정한 것이니, 읽으시기전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한가지 더 사족으로 붙이자면, 단편이 갖고 있는 극적 긴장감을 위해서, 성격을 사전에 구분하는 것을 정작 글을 쓰는 본인이 별로 선호하질 않는, 지랄맞은 성격도 한 몫하고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블루스맨 배상-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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