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지... 인간 중에서 네 녀석 같은 마법사가 나왔다는 자체가... 이제부터 세상이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운명이라는 증거겠지. 나 화룡제(火龍帝) 카르티엄, 아무리 인간을 하찮게만 생각해 왔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 와서까지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화룡(火龍), 레드 드래곤인 카르티엄은 다가오는 노마법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거대한 레어 안을 메아리치며 울려 인간들의 기를 질리게 하였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다들 나름대로 역전의 용사들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인간들이 드래곤을 무시할 만큼 강력한 종족은 절대 아니었다. 개개인으로 보면 오히려 오크보다 약하고 엘프보다 어리석었으며 드워프보다 기술력도 떨어졌다. 다만 모여있는 이들이 모두 마법검사 또는 마법사라는 점과 마력검진을 펼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르티엄을 교묘한 함정에 빠뜨려 결계에 묶어버렸다는 것이 지금의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한 것이 지금 카르티엄이 말을 걸고 있는 인간 노마법사였다. 그는 이 자리의 모든 인간들이 카르티엄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은근하게 실려있는 피어에 기가 눌려 인상을 찌푸릴 때도 유일하게 당당히 고개를 들어 화룡제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위대한 드래곤 일족의 화룡제 카르티엄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드리옵니다. 저희로서도 어찌 감히 드래곤 일족과 싸우고 싶었겠습니까? 다만 인간의 수가 점점 불어나니 어떨 수 없이 드래곤의 영역까지 넘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생존의 본능에 의한 것이니, 저희도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노바법사는 정말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인 드래곤이 인간들의 치사하고 교묘한 함정과 욕심에 의해 속박 당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반면 그 외의 인간들은 드래곤을 잡아냈다는 성취감, 자만감, 드래곤의 보물을 노리는 탐욕, 혹시 결계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 갖까지의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노마법사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천천히 인간들의 표정을 훑어보던 카르티엄은 비웃음을 띄며 말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인간이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했다는 점에서 드래곤의 표정도 인간이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닌 듯 했다.

“이보게. 내가 그나마 인정하는 것은 오직 자네뿐일세. 나머지 인간들은 그저 쓰레기들일 뿐이지. 왕이라는 것들도 귀족이라는 것들도 드래곤의 관점에서 보면 모둔 능력 없는 것들이 핏줄만 잘 타고나서는 잘난 척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네. 드래곤의 눈에는 단순히 그 인간의 능력만이 보일 뿐이지. 그런 면에서 자네는 특별해. 인간으로서 전무후무하게 9레벨에 도달했으니 말일세. 드래곤도 9레벨까지만 쓸 수 있을 뿐 10레벨은 신의 영역이 아닌가. 만약 인간이 드래곤과 같이 무한의 마나만 가질 수 있었다면 드래곤과 일 대 일로 싸울 수도 있었겠지. 솔직히 인간의 그런 작은 두뇌로 9레벨을 이해하다니 감탄사가 나올 정도라네.”

카르티엄은 잠시 사이를 두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자네이니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어떤가? 말로 진실을 가리는 짓은 하지 말게. 그런 짓은 자네 정도의 능력자가 할 일이 아니라네. 인간이 늘어나 땅이 좁아졌다고? 자원이 부족하다고? 그건 그렇지 않지. 모든 인간들이 평등하게 소비한다면 부족할 일이 없었을 것이네. 이 자리에 모인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귀족이겠지만 그들이 낭비하는 것만 없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릴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또한 먹고사는데 지장 없을 정도의 땅과 자원이 있음에도 이웃나라를 침공하데 소모되는 자원은 또 어떤가? 무기를 만드는데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아내는 것이 너희 인간들이 아닌가? 쥬피터 워맥. 그런 자기 합리화로 자신을 감추려하지 말게. 그냥 인간의 욕심 때문에 다른 생명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야.”

카르티엄의 담담한 어조는 결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을 잊은 듯, 마치 아이를 타이르는 말투였다. 마법사의 얼굴에 더욱 더 죄책감이 번졌다. 드워프가 들었다면 남 애기한다며, 환장했을 소리였지만 드래곤은 모든 마법의 창시자, 마법사들에게는 번 스승과 같은 존재였기에 워맥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카르티엄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인간이 엘프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그대로 만족하며 살겠지요. 드워프라도 자신이 만들 최소한의 자원만을 사용하지요. 인간이 사용하지 않았다면 드워프들도 무기를 만들지 않고 생활용품과 세공품만을 만들었을테니까 말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저도 드래곤의 영역을 차지했다고 해서 인간들이 전쟁을 멈추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만든 마법검으로 더욱 치열한 전쟁을 시작하겠지요.”

카르티엄과 대화하고 있는 하얀로브의 노마법사가 바로 인류 최고의 천재마법사 쥬피터 워멕이었다. 바로 오직 드래곤만이 만둘수 있다는 마법 무기류 제작법을 한성해낸 9레벨의 대마법사였던 것이다.

마법사는 주위의 인간들을 한 번 쓰윽 둘러보고는 다시 카르티엄에게 하던 말을 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생존의 본능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사항이겠지요. 하지만 인간들에게 있는 욕심도 어떻게 보면 본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쩔 수 없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지를 수밖에 없는, 남들보다 나은 삶은 살고 싶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도 모리지 않습니다 .부디 본능에 의행 행동할 수밖에 없는 미천한 삶이라고 생각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 본능이라. 그렇군. 슬픈 일이로군. 이간이란 그런 삶은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여하튼 드래곤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군. 그냥 인간은 그렇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드래곤도 약하지만 생존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세. 너무 오래 살아서 거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드래곤도 생명체이니 어쩔 수 없는 것겠지? 그런 드래곤들을 인간들은 멸종시켰네. 아니 이제 곧 내가 죽으면 멸종되는 것이겠지만.”

카르티엄의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분명 인간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여기에 자만심이 가득 차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명확히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래곤을 잡은 후에 떨어질 거대한 이익에만 눈이 팔려있는 것이었다.

“이보게! 언제까지 드래곤과 쓸데없이 잡담만 늘어놓고 있을 텐가? 빨리 없애버리게!”

이 자리에 모인 인간들 중에는 카르티엄의 영역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몇몇 나라의 국왕들이 친히 나와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카르티엄의 보물에 눈이 벌개져서 재촉했다.

“어디 함부로 끼어 드는가. 미천한 것이!!!”

“헉!”

카르티엄이 말을 꺼낸 국왕에게 집중해서 드래곤 피어를 내질렀다. 피어란 드래곤의 기(氣)같은 것으로 사람이 호랑이와 마주치면 굳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공포감을 주는 기술이었다.

물론 그 위압감은 호랑이 따위와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피어를 집중해서 맞은 그 국왕은 역전의 용사로 왕위에까지 오른 인물임에도 소변을 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이 후에도 두고두고 울궈 먹힐 만한 망신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 모습 덕분에 같이 재촉하려던 이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자신들도 그런 모습을 당하게 된다면 귀족사회로부터 웃음거리로 전락해 매장 당하게 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저런 일을 당하지 않은 자신들은 당당하게 국왕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다는 비겁함을 포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