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내게 사장이 한심한 듯 혀를 차며 말을 한다.
“이 녀석아,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야. 너처럼 일도 안하면서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 인줄 알아? 정신 차리고 어서 빗자루 잡아!”
“히잉... 저 진짜 억울한데.”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월급 받기 싫어?”
“아니요.”
“그럼 빨리 빗자루 잡고 나 따라와. 저기 정리해야 할 고물이 안 보이는 거야?!”
“알... 알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저 자동차. 빨리 어떻게 해결하고!”
“네.”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나는 그래도 한 때... 아니 적어도 몇 시간 전에 50억 원의 갑부였다. 이런 부자의 몸이 다시 기본급 100만 원짜리의 초라한 삶이 될 줄이야. 그 사모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나의 힘을 보여주리라... 나의 다이어리의 힘을!
“퍽!”
“뭐해? 안 따라오고?!”
“아파라... 그만 좀 때리세요. 저도 어엿한 성인인데...”
“뭐라고?”
“아... 아닙니다. 빨리 갈게요.”
투덜 투덜거리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저 분... 재미있어. 훗...”
보라는 사무실 창문을 통해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었고 나에게 호감이라도 있는 것처럼 관심 있게 관찰한다. 나도 그런 보라의 눈치를 알아챘고 행동 하나 하나에 신경이 쓰였다. 억울한 것은 억울한 것이지만 먹고 살려면 당장 일을 해야 했다.
“번쩍 번쩍 들어 올리란 말이야!”
“지금 들고 있다고요! 응차!”
“그래가지 오늘 퇴근 하겠어?!”
“알겠어요. 빨리 할게요.”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낮에 사모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온 때문인지 이상 하리 만큼 몸에 힘이 없다. 깊은 한숨을 쉬며 옷을 털어내고 있는 나에게 보라가 가다와 말을 건다.
“태수 씨, 오늘 퇴근하시고 뭐하세요?”
“네? 뭐... 그냥...”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밥 먹을래요?”
“저녁 먹자는 말씀이시죠?”
“네.”
“......”
미인이 나에게 저녁을 먹자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 보라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좋아요! 그런데...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요.”
“문제? 무슨 문제죠?”
“저기...”
“저... 기?”
보라의 뒤편에 호랑이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사장의 눈초리를 두고 한 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확인한 보라가 웃음을 참으며 대답한다.
“풋... 아빠요? 아빠에게는 제가 잘 말씀드려 볼게요. 걱정하시지 말라고.”
“그게... 통할까요?”
“걱정 마세요.”
“음...”
나와 보라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 의심스러웠던지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온 사장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냐며 슬쩍 운을 띠웠다.
“둘이... 무슨 얘기해?”
“아빠, 저 오늘 퇴근하고 태수 씨와 함께 저녁 먹고 집에 들어갈게요.”
“뭐... 뭐라고?!”
보라의 말에 사장이 깜짝 놀라며 나를 노려보며 묻는다.
“너, 우리 보라에게 뭐라고 하면서 밥 먹자고 한 거야?!”
“아, 아니에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요.”
“시끄러! 네가 먼저 꼬리 친 거잖아!”
“글세 저는 아니라니까요!”
“아빠, 제가 먼저 밥 먹자고 말했어요. 제가 먼저 데이트 신청했다고요.”
“맞... 맞아요. 보라 씨가 먼저 데이트를... 응? 데이트?”
“데이트?!”
“네. 제가 먼저 데이트 신청한 걸요.”
“보라 씨...”
“내 딸이? 너한테? 먼저?!”
“......”
데이트라는 단어...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다. 나에게 데이트라는 단어는 사치였고 있을 수 없는 단어 같았는데. 보라가 나에게 먼저 그런 말을 사용해 줌에 진심으로 감동이었다. 감동적인 표정으로 보라를 쳐다보자 나의 입술과 눈꺼풀이 부르르 떨려왔다. 나의 반응에 사장은...
“퍽!”
“아야, 사장님!”
“너, 눈빛이 맘에 안 들어. 우리 딸한테 상처주거나 눈물이라도 나게 하면... 알지?!”
“제... 제가 뭘 했다고...”
“시끄러! 좋아, 밥만 먹고 바로 들여 보네. 알았어?!”
“그럼 밥만 먹지 또 뭘 먹어요?”
“그래도 이 놈이!”
“아... 알았습니다. 알겠다고요.”
“훗.”
사장은 우리를 먼저 집으로 퇴근을 했다. 휴대전화 꺼놓지 말고 전화 오면 즉각 받으라는 엄포를 내리며 유유히 사라졌다. 내가 자기 딸 어떻게라도 할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이렇게 예쁜 보라를 어떻게... 어떻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 어디로 가서 밥 먹을까요?”
“글쎄요,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나... 뭐...”
“아니에요. 저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태수 씨가 원하는 곳으로 가요.”
“그... 그럴까요?”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승용차이지 않은가.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보물... 재산... 물론 유지가 힘들지만 어차피 중고차시장에 내놓을 거 한 번 타고 내놔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아 보라를 고급 승용차에 태웠다.
“우와... 이게 정말 태수 씨 차에요?”
“아직까지는... 그렇죠.”
“아직까지? 그럼 이걸 누구에게 줘요?”
“주는 게 아니고 팔아야죠.”
“왜요? 엄청 좋은데.”
“그러니까 팔아야죠. 엄청 좋으니까.”
“아...”
“왜요? 보라 씨는 이런 자동차 끌고 다니는 남자가 좋아요?”
“차가 좋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아니에요. 밥집으로 가죠.”
“그래요!”
밥집으로 이동하는 차안, 무척이나 고요했다. 자동차 엔진소리도 잡음하나 없이 조용했으며 우리의 사이에도 어떠한 대화가 없었다. 아마 서먹서먹했음이 작용한 이유이지 않을까. 그 적막을 깬 것은 내가 아닌 보라다.
“그런데... 태수 씨는 아빠와 함께 일하시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저요? 저는 그냥... 공부만 했어요.”
“어머, 무슨 공부요?”
“그냥... 이것저것... 인생 공부를 했다 생각하고 있어요.”
“철학적이시네요.”
“어? 제가 철학과 전공인지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요? 우와~ 그냥 말한 건데... 신기하네.”
“흐흐흐.”
철학은 개뿔... 나는 대학도 나오지 못한 고졸인데... 보라에게 자존심상 차마 그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음... 제가 갑자기 건강해진 게 참 신기해요.”
“심장 쪽이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죽는다고 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저를 보면 불쌍하다고 했어요. 어렸을 때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저랑 아빠만 살았거든요. 그래서 절 불쌍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보라 씨는 착하니까 하늘이 감동해서 병을 이겨냈던 거 아닐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 아닌가요?”
“호호호, 태수 씨도 참... 잘 봐주셨다니 감사하네요.”
“......”
보라는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순수했고 착했으며 예뻤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녀의 성품이 담겨 있었고 그녀의 인생과 삶이 녹아들어 있었다. 굳은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보라 같은 여자라면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끼이익~”
“자, 이곳이 제가 즐겨 찾는 식당...”
“응? 불이 껴져 있는데요?”
“설마...”
우리가 도착한 나의 단골집은 그리 비싸지는 않지만 주인아주머니의 풍성한 인심과 뛰어난 음식 솜씨에 감동을 받을 만한 곳이었다. 그런데 간판과 실내 불이 모두 꺼져 있다. 차에서 내려 식당 문으로 향했고 그 문 앞에는 이런 글이 써져 있다.
“금일 개인사정 휴무...”
“망할...”
머피의 법칙인가. 돈도 잃고 주식도 잃고... 단골 식당도 잃어 간다.
“어... 어쩌죠? 태수 씨.”
“글... 글쎄요. 여기 말고는 특별하게 떠오르는 식당이 없는데.”
“음... 그냥 아무 곳이나 가서 먹을까요?”
“에이, 그래도 보라 씨와 함께 하는 데이트인데... 아무데나 가서 먹을 수는 없죠.”
“전 괜찮은데...”
“후아...”
보라가 몸을 비비꼬며 나를 위로하려 했지만 그보다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막막하기만 했고 내 주머니는 가볍기만 했기에 가격이 비싼 고급 식당을 엄두도 못내는 형평이다.
“아, 그 돈 조금만 빼놓을 걸... 망했네.”
하루 종일 50억 원의 미련만이 남은 나에게 이런 속상한 일이 계속 일어남에 기분 좋지 않았다. 고민하고 있는 내게 보라가 좋은 생각이 난 건지 박수를 치며 말을 한다.
“맞다! 태수 씨 집이 이 근처 아닌가요?”
“저희 집이요? 네... 이 근처이긴 한데... 왜요?”
“차라리 우리 태수 씨 집으로 가서 밥 먹어요!”
“뭐... 뭐라고요?!”
“태수 씨 집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설마... 집이 더럽다고 거절하시는 건 아니시죠?”
그럴려고 했다. 집이 너무 더러워 손님을 데리고 가기엔 너무 민망했으니 말이다.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본 보라가 느닷없이 팔짱을 끼며 콧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아잉~ 태수 씨 집에서 우리 밥 먹어요. 제가 요리 솜씨는 없지만 맛있는 것 해드릴테니.”
“보... 보라 씨.”
“가요, 네? 가요~~”
“......”
진퇴양란이란 말은 이럴 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보라를 데리고 가자니 우리 집의 상황이 너무 더러웠고... 더군다나 사장에게 전화라도 오면... 끔찍하다. 그렇다고 길바닥에 서서 멍하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정말... 괜찮겠어요? 저희 집으로 가는 게...”
“네! 완전 좋아요!”
“그... 그럼 가시죠.”
“야호!”
집으로 향하는 길, 심장이 두근거린다. 왜 이유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을까. 스킨쉽도 하지 않았고 그녀와 뭔가 야한 합의도 없는 상황인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바라는 두근거림인지.
“끼이익.”
“여기에요? 태수 씨 동네가?”
“네.”
“정말 가깝구나. 어서 내려요. 태수 씨 집은 어디에 있어요?”
“저... 저 곳...”
“높은 곳에 사시네.”
“흐흐흐...”
차를 세워놓고 적어도 5분 이상은 걸어가야 우리 집이다. 보라와 함께 집으로 걷는 이 길이 정말 행복했다. 아니, 행복하다.
“태수 씨 방은 무슨 색이에요? 남자니까... 하늘색? 파란색?”
“......”
“커튼은 무슨 색이에요? 검은색? 회색?”
“......”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나, 우리 집 색은 노란 황색에 가깝다. 니코틴이 엄청 낀 탓이겠지만 보라가 우리 집으로 올 줄 알았으면 금연이라도 하고 아침에 청소라도 대충 해 놓을 걸... 그렇게 걷다 구멍가게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날도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밖에서 나를 맞이하고 있다.
“어머, 총각! 오늘은 혼자가 아니네?”
“안녕하세요.”
“아가씨가 싹싹하기도 하네. 혹시... 지난번 총각이 말한 그 아가씨야?”
“네? 태수 씨가 제 얘길 했다고요?”
“어머, 예쁘네. 젊으니 참 곱네. 고와.”
“아... 아주머니!”
푼수 같은 아주머니는 지난번 나와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 보라의 얘기를 하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부끄러우며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아주머니의 입을 막기 위해 내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자 아주머니는 혀를 내밀어 내 손바닥을 간질이고 나는 그 때문에 더 이상 아주머니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있으니... 쳐다보지도 않았네.”
“누굴...”
“그런 게 있어. 아가씨는 몰라도 돼.”
“호호호.”
“빠득...”
나는 아주머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를 챌 수 있었고 서둘러 그 위험한 지역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보라의 한 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서둘러가자는 재촉에 보라도 종종걸음을 옮기게 된다. 나는 뒤돌아보며 아주머니에게 오만 인상을 썼고 아주머니는 웃기만 하신다.
“저 아주머니 굉장히 재미있으신 분 같아요. 태수 씨 동네 분들은 인간미가 있어요.”
“그... 그래요? 처음 듣는 얘기네요.”
“이 동네... 참 살기 좋은 곳 같아요.”
“하하하, 농담도... 자. 어서 가시죠.”
“네.”
어렵고 힘들게 도착한 우리 집. 우리 집은 시내에서도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는 다락방이다. 조망은 끝내주지만 그 조망을 위해 참 많은 걸음걸이를 투자해야 한다. 집으로 들어서기 전 마당에 길게 널려진 세탁물을 쳐다본다.
“어머, 빨래가 아직도 널려 있어요.”
“제가 가져올게요.”
“아니요, 같이 해요.”
“......”
나는 재빨리 빨래를 걷으며 보라가 내 빨래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려했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걸린 빨래를 보라가 유심히 쳐다보며 묻는다.
“구멍 난 빨랫감은 직접 손으로 꼬메시나요?”
“아니요, 그냥 입어요. 왜요?”
“여기... 가운데 구멍이 크게 났어요.”
“어디요?”
“여기...”
보라가 보여준 빨래는... 하필 내 삼각팬티다. 그것도 중요부위 한 가운데 구멍이 나 있는 팬티. 쪽팔려 온다.
“......”
“여기 이만하게 구멍이...”
“쉿, 그만... 제가 꼬멜께요.”
“아니 저는 그냥... 구멍이 이만하게 나 있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왜 이 팬티는 구멍이 나서... 하필 또 그 부위에...”
“그 부위?”
내가 말한 그 부위가 어디인지... 보라도 인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말에 보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면 보라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구멍이 난 부위만 보고 말한 건데 내 말에 이상한 분위기가 잡혔다는...
“아이고, 머리야...”
“미... 미처 몰랐네요. 저는 그냥 구멍 난 것만 보고...”
“아닙니다. 제가 꼬메 놓을 게요.”
“......”
입이 방정이라고 내 입을 원망해야지 누굴 원망하겠는가. 빨래를 모두 걷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보라는 다소 민망했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씩씩하게 집안으로 들어선다. 내가 보라 뒤에 있었고 보라가 먼저 앞장서서 집으로 들어왔다.
“우와~ 이곳이 태수 씨 방... 헐...”
“......”
남자 혼자 사는 방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여기 저기 널브러진 양말과 속옷, 쓰레기와 먹다 남은 컵라면 그릇... 아주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보라 씨, 많이 더럽죠?”
“하. 하. 하...”
“그냥 밖에서 먹을 까요?”
“......”
보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더러운 내 방을 유심히 둘러보며 쳐다본다. 이렇게 지저분하고 더러운 남자라는 것에 실망을 한듯하다. 보라를 내 여자로 만들기에 나는 오늘 많은 점수를 잃은 것 같았다. 이제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좋아, 해 보겠어!”
“네?”
씩씩한 말투로 자신의 두 팔을 걷어붙인 보라는 쓰레기봉투를 한 장 들고는 청소를 시작한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보... 보라 씨.”
“여기 대충 정리하고 제가 요 앞에 있는 슈퍼에 가서 재료사다가 맛있는 저녁 해드릴게요. 그런데 너무 정리할게 많은 것 같은데... 도와주시겠어요?”
“......”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하는 보라는... 그대 모습은 장미...
“이 녀석아,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야. 너처럼 일도 안하면서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 인줄 알아? 정신 차리고 어서 빗자루 잡아!”
“히잉... 저 진짜 억울한데.”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월급 받기 싫어?”
“아니요.”
“그럼 빨리 빗자루 잡고 나 따라와. 저기 정리해야 할 고물이 안 보이는 거야?!”
“알... 알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저 자동차. 빨리 어떻게 해결하고!”
“네.”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나는 그래도 한 때... 아니 적어도 몇 시간 전에 50억 원의 갑부였다. 이런 부자의 몸이 다시 기본급 100만 원짜리의 초라한 삶이 될 줄이야. 그 사모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나의 힘을 보여주리라... 나의 다이어리의 힘을!
“퍽!”
“뭐해? 안 따라오고?!”
“아파라... 그만 좀 때리세요. 저도 어엿한 성인인데...”
“뭐라고?”
“아... 아닙니다. 빨리 갈게요.”
투덜 투덜거리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저 분... 재미있어. 훗...”
보라는 사무실 창문을 통해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었고 나에게 호감이라도 있는 것처럼 관심 있게 관찰한다. 나도 그런 보라의 눈치를 알아챘고 행동 하나 하나에 신경이 쓰였다. 억울한 것은 억울한 것이지만 먹고 살려면 당장 일을 해야 했다.
“번쩍 번쩍 들어 올리란 말이야!”
“지금 들고 있다고요! 응차!”
“그래가지 오늘 퇴근 하겠어?!”
“알겠어요. 빨리 할게요.”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낮에 사모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온 때문인지 이상 하리 만큼 몸에 힘이 없다. 깊은 한숨을 쉬며 옷을 털어내고 있는 나에게 보라가 가다와 말을 건다.
“태수 씨, 오늘 퇴근하시고 뭐하세요?”
“네? 뭐... 그냥...”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밥 먹을래요?”
“저녁 먹자는 말씀이시죠?”
“네.”
“......”
미인이 나에게 저녁을 먹자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 보라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좋아요! 그런데...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요.”
“문제? 무슨 문제죠?”
“저기...”
“저... 기?”
보라의 뒤편에 호랑이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사장의 눈초리를 두고 한 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확인한 보라가 웃음을 참으며 대답한다.
“풋... 아빠요? 아빠에게는 제가 잘 말씀드려 볼게요. 걱정하시지 말라고.”
“그게... 통할까요?”
“걱정 마세요.”
“음...”
나와 보라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 의심스러웠던지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온 사장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냐며 슬쩍 운을 띠웠다.
“둘이... 무슨 얘기해?”
“아빠, 저 오늘 퇴근하고 태수 씨와 함께 저녁 먹고 집에 들어갈게요.”
“뭐... 뭐라고?!”
보라의 말에 사장이 깜짝 놀라며 나를 노려보며 묻는다.
“너, 우리 보라에게 뭐라고 하면서 밥 먹자고 한 거야?!”
“아, 아니에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요.”
“시끄러! 네가 먼저 꼬리 친 거잖아!”
“글세 저는 아니라니까요!”
“아빠, 제가 먼저 밥 먹자고 말했어요. 제가 먼저 데이트 신청했다고요.”
“맞... 맞아요. 보라 씨가 먼저 데이트를... 응? 데이트?”
“데이트?!”
“네. 제가 먼저 데이트 신청한 걸요.”
“보라 씨...”
“내 딸이? 너한테? 먼저?!”
“......”
데이트라는 단어...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다. 나에게 데이트라는 단어는 사치였고 있을 수 없는 단어 같았는데. 보라가 나에게 먼저 그런 말을 사용해 줌에 진심으로 감동이었다. 감동적인 표정으로 보라를 쳐다보자 나의 입술과 눈꺼풀이 부르르 떨려왔다. 나의 반응에 사장은...
“퍽!”
“아야, 사장님!”
“너, 눈빛이 맘에 안 들어. 우리 딸한테 상처주거나 눈물이라도 나게 하면... 알지?!”
“제... 제가 뭘 했다고...”
“시끄러! 좋아, 밥만 먹고 바로 들여 보네. 알았어?!”
“그럼 밥만 먹지 또 뭘 먹어요?”
“그래도 이 놈이!”
“아... 알았습니다. 알겠다고요.”
“훗.”
사장은 우리를 먼저 집으로 퇴근을 했다. 휴대전화 꺼놓지 말고 전화 오면 즉각 받으라는 엄포를 내리며 유유히 사라졌다. 내가 자기 딸 어떻게라도 할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이렇게 예쁜 보라를 어떻게... 어떻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 어디로 가서 밥 먹을까요?”
“글쎄요,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나... 뭐...”
“아니에요. 저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태수 씨가 원하는 곳으로 가요.”
“그... 그럴까요?”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승용차이지 않은가.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보물... 재산... 물론 유지가 힘들지만 어차피 중고차시장에 내놓을 거 한 번 타고 내놔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아 보라를 고급 승용차에 태웠다.
“우와... 이게 정말 태수 씨 차에요?”
“아직까지는... 그렇죠.”
“아직까지? 그럼 이걸 누구에게 줘요?”
“주는 게 아니고 팔아야죠.”
“왜요? 엄청 좋은데.”
“그러니까 팔아야죠. 엄청 좋으니까.”
“아...”
“왜요? 보라 씨는 이런 자동차 끌고 다니는 남자가 좋아요?”
“차가 좋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아니에요. 밥집으로 가죠.”
“그래요!”
밥집으로 이동하는 차안, 무척이나 고요했다. 자동차 엔진소리도 잡음하나 없이 조용했으며 우리의 사이에도 어떠한 대화가 없었다. 아마 서먹서먹했음이 작용한 이유이지 않을까. 그 적막을 깬 것은 내가 아닌 보라다.
“그런데... 태수 씨는 아빠와 함께 일하시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저요? 저는 그냥... 공부만 했어요.”
“어머, 무슨 공부요?”
“그냥... 이것저것... 인생 공부를 했다 생각하고 있어요.”
“철학적이시네요.”
“어? 제가 철학과 전공인지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요? 우와~ 그냥 말한 건데... 신기하네.”
“흐흐흐.”
철학은 개뿔... 나는 대학도 나오지 못한 고졸인데... 보라에게 자존심상 차마 그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음... 제가 갑자기 건강해진 게 참 신기해요.”
“심장 쪽이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죽는다고 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저를 보면 불쌍하다고 했어요. 어렸을 때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저랑 아빠만 살았거든요. 그래서 절 불쌍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보라 씨는 착하니까 하늘이 감동해서 병을 이겨냈던 거 아닐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 아닌가요?”
“호호호, 태수 씨도 참... 잘 봐주셨다니 감사하네요.”
“......”
보라는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순수했고 착했으며 예뻤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녀의 성품이 담겨 있었고 그녀의 인생과 삶이 녹아들어 있었다. 굳은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보라 같은 여자라면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끼이익~”
“자, 이곳이 제가 즐겨 찾는 식당...”
“응? 불이 껴져 있는데요?”
“설마...”
우리가 도착한 나의 단골집은 그리 비싸지는 않지만 주인아주머니의 풍성한 인심과 뛰어난 음식 솜씨에 감동을 받을 만한 곳이었다. 그런데 간판과 실내 불이 모두 꺼져 있다. 차에서 내려 식당 문으로 향했고 그 문 앞에는 이런 글이 써져 있다.
“금일 개인사정 휴무...”
“망할...”
머피의 법칙인가. 돈도 잃고 주식도 잃고... 단골 식당도 잃어 간다.
“어... 어쩌죠? 태수 씨.”
“글... 글쎄요. 여기 말고는 특별하게 떠오르는 식당이 없는데.”
“음... 그냥 아무 곳이나 가서 먹을까요?”
“에이, 그래도 보라 씨와 함께 하는 데이트인데... 아무데나 가서 먹을 수는 없죠.”
“전 괜찮은데...”
“후아...”
보라가 몸을 비비꼬며 나를 위로하려 했지만 그보다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막막하기만 했고 내 주머니는 가볍기만 했기에 가격이 비싼 고급 식당을 엄두도 못내는 형평이다.
“아, 그 돈 조금만 빼놓을 걸... 망했네.”
하루 종일 50억 원의 미련만이 남은 나에게 이런 속상한 일이 계속 일어남에 기분 좋지 않았다. 고민하고 있는 내게 보라가 좋은 생각이 난 건지 박수를 치며 말을 한다.
“맞다! 태수 씨 집이 이 근처 아닌가요?”
“저희 집이요? 네... 이 근처이긴 한데... 왜요?”
“차라리 우리 태수 씨 집으로 가서 밥 먹어요!”
“뭐... 뭐라고요?!”
“태수 씨 집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설마... 집이 더럽다고 거절하시는 건 아니시죠?”
그럴려고 했다. 집이 너무 더러워 손님을 데리고 가기엔 너무 민망했으니 말이다.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본 보라가 느닷없이 팔짱을 끼며 콧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아잉~ 태수 씨 집에서 우리 밥 먹어요. 제가 요리 솜씨는 없지만 맛있는 것 해드릴테니.”
“보... 보라 씨.”
“가요, 네? 가요~~”
“......”
진퇴양란이란 말은 이럴 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보라를 데리고 가자니 우리 집의 상황이 너무 더러웠고... 더군다나 사장에게 전화라도 오면... 끔찍하다. 그렇다고 길바닥에 서서 멍하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정말... 괜찮겠어요? 저희 집으로 가는 게...”
“네! 완전 좋아요!”
“그... 그럼 가시죠.”
“야호!”
집으로 향하는 길, 심장이 두근거린다. 왜 이유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을까. 스킨쉽도 하지 않았고 그녀와 뭔가 야한 합의도 없는 상황인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바라는 두근거림인지.
“끼이익.”
“여기에요? 태수 씨 동네가?”
“네.”
“정말 가깝구나. 어서 내려요. 태수 씨 집은 어디에 있어요?”
“저... 저 곳...”
“높은 곳에 사시네.”
“흐흐흐...”
차를 세워놓고 적어도 5분 이상은 걸어가야 우리 집이다. 보라와 함께 집으로 걷는 이 길이 정말 행복했다. 아니, 행복하다.
“태수 씨 방은 무슨 색이에요? 남자니까... 하늘색? 파란색?”
“......”
“커튼은 무슨 색이에요? 검은색? 회색?”
“......”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나, 우리 집 색은 노란 황색에 가깝다. 니코틴이 엄청 낀 탓이겠지만 보라가 우리 집으로 올 줄 알았으면 금연이라도 하고 아침에 청소라도 대충 해 놓을 걸... 그렇게 걷다 구멍가게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날도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밖에서 나를 맞이하고 있다.
“어머, 총각! 오늘은 혼자가 아니네?”
“안녕하세요.”
“아가씨가 싹싹하기도 하네. 혹시... 지난번 총각이 말한 그 아가씨야?”
“네? 태수 씨가 제 얘길 했다고요?”
“어머, 예쁘네. 젊으니 참 곱네. 고와.”
“아... 아주머니!”
푼수 같은 아주머니는 지난번 나와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 보라의 얘기를 하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부끄러우며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아주머니의 입을 막기 위해 내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자 아주머니는 혀를 내밀어 내 손바닥을 간질이고 나는 그 때문에 더 이상 아주머니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있으니... 쳐다보지도 않았네.”
“누굴...”
“그런 게 있어. 아가씨는 몰라도 돼.”
“호호호.”
“빠득...”
나는 아주머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를 챌 수 있었고 서둘러 그 위험한 지역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보라의 한 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서둘러가자는 재촉에 보라도 종종걸음을 옮기게 된다. 나는 뒤돌아보며 아주머니에게 오만 인상을 썼고 아주머니는 웃기만 하신다.
“저 아주머니 굉장히 재미있으신 분 같아요. 태수 씨 동네 분들은 인간미가 있어요.”
“그... 그래요? 처음 듣는 얘기네요.”
“이 동네... 참 살기 좋은 곳 같아요.”
“하하하, 농담도... 자. 어서 가시죠.”
“네.”
어렵고 힘들게 도착한 우리 집. 우리 집은 시내에서도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는 다락방이다. 조망은 끝내주지만 그 조망을 위해 참 많은 걸음걸이를 투자해야 한다. 집으로 들어서기 전 마당에 길게 널려진 세탁물을 쳐다본다.
“어머, 빨래가 아직도 널려 있어요.”
“제가 가져올게요.”
“아니요, 같이 해요.”
“......”
나는 재빨리 빨래를 걷으며 보라가 내 빨래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려했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걸린 빨래를 보라가 유심히 쳐다보며 묻는다.
“구멍 난 빨랫감은 직접 손으로 꼬메시나요?”
“아니요, 그냥 입어요. 왜요?”
“여기... 가운데 구멍이 크게 났어요.”
“어디요?”
“여기...”
보라가 보여준 빨래는... 하필 내 삼각팬티다. 그것도 중요부위 한 가운데 구멍이 나 있는 팬티. 쪽팔려 온다.
“......”
“여기 이만하게 구멍이...”
“쉿, 그만... 제가 꼬멜께요.”
“아니 저는 그냥... 구멍이 이만하게 나 있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왜 이 팬티는 구멍이 나서... 하필 또 그 부위에...”
“그 부위?”
내가 말한 그 부위가 어디인지... 보라도 인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말에 보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면 보라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구멍이 난 부위만 보고 말한 건데 내 말에 이상한 분위기가 잡혔다는...
“아이고, 머리야...”
“미... 미처 몰랐네요. 저는 그냥 구멍 난 것만 보고...”
“아닙니다. 제가 꼬메 놓을 게요.”
“......”
입이 방정이라고 내 입을 원망해야지 누굴 원망하겠는가. 빨래를 모두 걷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보라는 다소 민망했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씩씩하게 집안으로 들어선다. 내가 보라 뒤에 있었고 보라가 먼저 앞장서서 집으로 들어왔다.
“우와~ 이곳이 태수 씨 방... 헐...”
“......”
남자 혼자 사는 방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여기 저기 널브러진 양말과 속옷, 쓰레기와 먹다 남은 컵라면 그릇... 아주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보라 씨, 많이 더럽죠?”
“하. 하. 하...”
“그냥 밖에서 먹을 까요?”
“......”
보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더러운 내 방을 유심히 둘러보며 쳐다본다. 이렇게 지저분하고 더러운 남자라는 것에 실망을 한듯하다. 보라를 내 여자로 만들기에 나는 오늘 많은 점수를 잃은 것 같았다. 이제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좋아, 해 보겠어!”
“네?”
씩씩한 말투로 자신의 두 팔을 걷어붙인 보라는 쓰레기봉투를 한 장 들고는 청소를 시작한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보... 보라 씨.”
“여기 대충 정리하고 제가 요 앞에 있는 슈퍼에 가서 재료사다가 맛있는 저녁 해드릴게요. 그런데 너무 정리할게 많은 것 같은데... 도와주시겠어요?”
“......”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하는 보라는... 그대 모습은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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