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늦게 일어났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는데, 깨어나고 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해가 황궁 꼭대기에 걸친 것이다. 그나마도 휴린이 깨우지 않았더라면 언제 깨어났을지 모를 일이다.
"휴린?"
"일어나."
"일어났어."
"일어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침대 옆에 서 있는 라이아를 바라보았다. 체념하는 한숨을 내쉬기는 라이아도 마찬가지,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지금의 상황이 최선이었을 터.
"그만해도 돼요, 휴리네시아님."
라이아가 휴리네시아의 입을 검지손가락을 들어 막았다. 이것이 조용히 하라는 의미라는 것 정도는 어린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라이아는 그녀의 행동의 패턴을 이미 파악해두고는 활용하는 중이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하여 적용하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 좋은 선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가르치는 것이냐?"
"네. 일단은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동감했다. 분명히.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말보다 행동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라이아는 좋은 선생으로는 실격이다.
"알았는데, 일단 옷부터 입혀."
상황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내 양 옆에는 전날의 두 황녀가 곤히 잠들어 있었고, 그 탓인지 어린 휴리네시아가 그를 깨우기 위해서는 침대 옆에 서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했을 것이다. 내 옆에 서지 않고도 얼굴을 맞대며 깨울 수 있는 곳, 그건 간단했다. 바로 가슴팍 위.
그러나 그것까지라면 그리 당황스러운 일은 아니다. 정작 당황스러운 것은 휴린이 지금 알몸이라는 것이다. 분명 잠들었을 때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벗고 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내 위에 올라 타고 있는 소녀를 보자, 상대가 여동생임에도 불구하고 하체에 피가 쏠린다.
"흥분하셨나봐요?"
나는 혀를 쯧 찼다. 생각해도 왜 꼭 저런 쪽으로 가는 것일까, 저 색녀는.
"틀려. 이건 내가 건강한 남성이라는 증거다."
새벽발기라고 주장했다. 아무런 자극이 없어도 아침이 되면 - 물론 지금은 아침이라기엔 무리가 있지만 - 발기하는 그 현상, 바로 건강한 남성이라는 상황적 증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별로 신빙성은 없어 보이지만.
"드래곤이신걸요. 당연해요."
"당연하다? 무엇이?"
건강하다는 것이? 아니면 여동생 앞에서 발기하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종족이라는 것이?
"글쎄요."
라이아는 생글생글 웃었다. 신선한 표정이었다. 레어에 있을 때는 보지 못한, 장난기가 섞인 순진한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순수의 상징이라는 엘프니까. 단지 지금까지 성노로 취급하느라 잊고 있었던 것일 뿐, 순결을 잃었다 뿐이지 그녀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엘프였다.
그러나 표정의 순수함과는 달리 그 속은 음흉하기가 그지없다. 저 앙큼한 엘프는 내 여동생인 휴린마저도 자신과 같은 성노 신세로 전락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휴린이 알몸으로 내 위에 올라타는 것을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다!
"넘어가지. 그런데 휴린은 왜 벗겨놨지?"
"어머, 제가 벗겼다고 생각하세요?"
"아닌가?"
라이아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녜요. 자는 동안에 스스로 벗은 거라고요. 답답했나봐요."
젠장, 너무 그럴듯하다. 옷을 입은 채로 잠든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나를 깨우기 전에 뭔가 입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순서가 지나가버렸다. 더 이상 꼬치꼬치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 따지다간 쫌팽이가 되고 만다.
"알았다. 그럼 이만 일어나야지."
기지개를 켜려고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뭔가 요상야릇한 냄새가 난다. 이것은... 지린내?
"휴리네시아님이 싼 거에요. 제가 아니라."
누가 뭐라고 했냐. 저 가녀린 아이에게 덮어씌우다니, 어른으로서 실격이다. 어쨌든 휴린이 쌌다고? 흐음, 하긴 화장실에 가본 적이 없었을 테니 당연한 건가. 고개를 슬쩍 내렸더니 휴린의 가운데에 물기가 묻어 반짝였다. 저게 아마 그 액체겠지. 그 상태로 내 위에 올라탄 거냐...
"알았다. 일단 화장실부터 데려가."
젠장이다.
-----------------------------------------------------------------------------
사실 황족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일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번 있으면 많다 여겨질 정도다. 그러나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세르네린과 네르세린이 레스테나드 곁에 있다는 것 정도일까.
"휴린."
휴린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입 앞에 온 스푼을 물었다. 나는 손에 쥔 스푼을 움직여 밖으로 빼냈다. 이 단순한 동작이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됐다. 그리고 식사는 침묵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연출이다. 이 자리의 모두가 두려워하는 드래곤이 이렇게 바보같은 모습으로 어린애에게 수프를 먹여주고 있는 상황은 굉장한 괴리감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일 것이다.
"다 먹었다. 착하구나."
수프 접시가 비었다. 그리고 빵도 꽤 줄었다. 휴리네시아에게 먹인다고 조금씩 찢은 게 벌써 빵 2개다. 휴린의 무릎에 얹어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주었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소중한 보석 다루듯이. 물론 연출이지만, 황제는 그 모습에 더움 움츠렸다.
"라이아, 다 먹었으면 휴린 데리고 나가 있거라."
"네."
엘프인 라이아는 식사가 빠르다. 많이 먹지를 않으니까. 그녀는 대꾸도 없이 휴린의 손을 잡아 끌었다. 겨우 이틀만에 제법 익숙한 걸음걸이가 나온다. 그 둘은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이어 황제의 두 아들 중 어린 쪽을 향해 말했다.
"너, 저 아이 데리고 나가라."
이 중에 가장 어린 7황녀를 말함이다. 2황자는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황제의 눈초리를 받고는 군말 없이 일어났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런 무거운 분위기에서 제법 처신이 좋다. 왜 이러는지도 모르는 채 멀뚱히 앉아 있는 7황녀를 데리고 라이아의 뒤를 ?았다.
순식간에 4명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인간들은 더욱 긴장했다. 내 표정이 과히 좋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어린애들"이 있을 때는 얕은 미소를 잃지 않았는데, 지금은 찬바람이 쌩쌩 분다. 물론 내가 얼음을 다루는 실버 드래곤인 탓은 절대 아니다. 연출이다, 연출.
"황제."
"예, 예."
황제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나는 그대가 인간이라고 믿고 있다."
"예? 아, 예. 저는 인간입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황제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자식은 개새끼로군."
내가 생각해도 심한 폭언이다. 지금껏 황실에 대한 모욕을 겪어본 적이 없는 이들로서는 아연실색하기만 할 것이다. 무슨 뜻인지 못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그 내용과 발언의 위험 수위에 놀란 것이다. 그러나 별 수 있나? 난 드래곤인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비굴한 모습만을 보이던 황제라도 이번만큼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노를 억지로 꾹꾹 눌러 참는 모습이다. 그러나 내가 신경이나 쓸 거 있나.
사실 나는 지금 기분이 굉장히 나쁘다. 정말 가벼운 기분으로 새 노예들을 데리고 나왔더니만 웬 놈이 끼어들어 내 기분을 망쳐버렸던 것이다. 그게 아까 점심때의 일이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다만 그놈이 내 노예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는 것 정도.
그래서 나는 대번에 저녁식사 소집을 명령하고는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고 있다.
"충고하겠는데, 당장이라도 황태자 저놈을 내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 제국이고 뭐고 죄다 끝이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문제의 황태자가 크게 소리쳤다. 드래곤 앞에서 목소리를 저렇게까지 높일 수 있는 것도 용기라면 용기라 할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뒷감당도 하지 못할 용기 따위는 부리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을.
"네놈이 밤에 뭐 하고 지내는지 말할까?"
순간 황태자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찔리는 것이 있으니 그럴 테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기는 비단 황태자 뿐만이 아니었다. 그럴 테지. 밤에 하는 일 치고 혼자서 하는 일은 별로 없거든.
"첫째, 참수한다. 둘째, 추방한다. 셋째, 내게 맡긴다. 황제, 이 중에 선택하라."
황제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짜고짜 황태자를 폐위시키라는 말인데, 이것에 분노하지 않을 황제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인간이었더래도 화났겠다.
"알 수 없습니다. 그 연유라도 일러 주십시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는 세르네린과 네르세린만이 놀라고 있을 뿐이다. 그랬다. 이 자리의 12명 중 황제까지 포함하여 단 4명만이 그나마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나머지 8명은 새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렇다면 말해주마."
"......!!!"
황태자가 벌떡 일어나서 입을 벙긋거렸다. 기세로 봐서는 뭔가 소리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불쌍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 자신도 그것을 깨닫고는 입을 가리고 목을 쥐었지만, 소리라고는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나는 히죽 웃어 주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손을 써준 것도 물론 내가 한 짓이다. 나는 남의 비밀이나 폭로하길 좋아하는 저열한 성격이거든.
"애초에 네놈이 내 것을 탐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세르네린과 네르세린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내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황태자를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바로 저놈이 내 노예들을 "아깝다"라는 눈초리로 쳐다봤던 것이다! 그것에서 나는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저놈은 언젠가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내 노예들을 제 마음대로 다룰 위험한 놈이다. 확신한다!
"잘 들어라 황제."
사색이 된 황후가 의자 뒤로 물러나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두 후궁이 똑같이 납작하게 엎드렸다. 황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오직 황태자만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죽일 듯이 쏘아 보고 있었다. 기분 좋다. 저놈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 수록 나는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당연하지 않나. 곧 죽을 버러지의 마지막 몸부림을 짓밟아버리는 쾌감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저놈의 비밀을 폭로했다.
"저놈은 제 혈육을 간(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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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린?"
"일어나."
"일어났어."
"일어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침대 옆에 서 있는 라이아를 바라보았다. 체념하는 한숨을 내쉬기는 라이아도 마찬가지,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지금의 상황이 최선이었을 터.
"그만해도 돼요, 휴리네시아님."
라이아가 휴리네시아의 입을 검지손가락을 들어 막았다. 이것이 조용히 하라는 의미라는 것 정도는 어린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라이아는 그녀의 행동의 패턴을 이미 파악해두고는 활용하는 중이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하여 적용하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 좋은 선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가르치는 것이냐?"
"네. 일단은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동감했다. 분명히.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말보다 행동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라이아는 좋은 선생으로는 실격이다.
"알았는데, 일단 옷부터 입혀."
상황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내 양 옆에는 전날의 두 황녀가 곤히 잠들어 있었고, 그 탓인지 어린 휴리네시아가 그를 깨우기 위해서는 침대 옆에 서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했을 것이다. 내 옆에 서지 않고도 얼굴을 맞대며 깨울 수 있는 곳, 그건 간단했다. 바로 가슴팍 위.
그러나 그것까지라면 그리 당황스러운 일은 아니다. 정작 당황스러운 것은 휴린이 지금 알몸이라는 것이다. 분명 잠들었을 때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벗고 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내 위에 올라 타고 있는 소녀를 보자, 상대가 여동생임에도 불구하고 하체에 피가 쏠린다.
"흥분하셨나봐요?"
나는 혀를 쯧 찼다. 생각해도 왜 꼭 저런 쪽으로 가는 것일까, 저 색녀는.
"틀려. 이건 내가 건강한 남성이라는 증거다."
새벽발기라고 주장했다. 아무런 자극이 없어도 아침이 되면 - 물론 지금은 아침이라기엔 무리가 있지만 - 발기하는 그 현상, 바로 건강한 남성이라는 상황적 증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별로 신빙성은 없어 보이지만.
"드래곤이신걸요. 당연해요."
"당연하다? 무엇이?"
건강하다는 것이? 아니면 여동생 앞에서 발기하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종족이라는 것이?
"글쎄요."
라이아는 생글생글 웃었다. 신선한 표정이었다. 레어에 있을 때는 보지 못한, 장난기가 섞인 순진한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순수의 상징이라는 엘프니까. 단지 지금까지 성노로 취급하느라 잊고 있었던 것일 뿐, 순결을 잃었다 뿐이지 그녀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엘프였다.
그러나 표정의 순수함과는 달리 그 속은 음흉하기가 그지없다. 저 앙큼한 엘프는 내 여동생인 휴린마저도 자신과 같은 성노 신세로 전락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휴린이 알몸으로 내 위에 올라타는 것을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다!
"넘어가지. 그런데 휴린은 왜 벗겨놨지?"
"어머, 제가 벗겼다고 생각하세요?"
"아닌가?"
라이아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녜요. 자는 동안에 스스로 벗은 거라고요. 답답했나봐요."
젠장, 너무 그럴듯하다. 옷을 입은 채로 잠든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나를 깨우기 전에 뭔가 입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순서가 지나가버렸다. 더 이상 꼬치꼬치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 따지다간 쫌팽이가 되고 만다.
"알았다. 그럼 이만 일어나야지."
기지개를 켜려고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뭔가 요상야릇한 냄새가 난다. 이것은... 지린내?
"휴리네시아님이 싼 거에요. 제가 아니라."
누가 뭐라고 했냐. 저 가녀린 아이에게 덮어씌우다니, 어른으로서 실격이다. 어쨌든 휴린이 쌌다고? 흐음, 하긴 화장실에 가본 적이 없었을 테니 당연한 건가. 고개를 슬쩍 내렸더니 휴린의 가운데에 물기가 묻어 반짝였다. 저게 아마 그 액체겠지. 그 상태로 내 위에 올라탄 거냐...
"알았다. 일단 화장실부터 데려가."
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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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황족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일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번 있으면 많다 여겨질 정도다. 그러나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세르네린과 네르세린이 레스테나드 곁에 있다는 것 정도일까.
"휴린."
휴린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입 앞에 온 스푼을 물었다. 나는 손에 쥔 스푼을 움직여 밖으로 빼냈다. 이 단순한 동작이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됐다. 그리고 식사는 침묵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연출이다. 이 자리의 모두가 두려워하는 드래곤이 이렇게 바보같은 모습으로 어린애에게 수프를 먹여주고 있는 상황은 굉장한 괴리감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일 것이다.
"다 먹었다. 착하구나."
수프 접시가 비었다. 그리고 빵도 꽤 줄었다. 휴리네시아에게 먹인다고 조금씩 찢은 게 벌써 빵 2개다. 휴린의 무릎에 얹어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주었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소중한 보석 다루듯이. 물론 연출이지만, 황제는 그 모습에 더움 움츠렸다.
"라이아, 다 먹었으면 휴린 데리고 나가 있거라."
"네."
엘프인 라이아는 식사가 빠르다. 많이 먹지를 않으니까. 그녀는 대꾸도 없이 휴린의 손을 잡아 끌었다. 겨우 이틀만에 제법 익숙한 걸음걸이가 나온다. 그 둘은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이어 황제의 두 아들 중 어린 쪽을 향해 말했다.
"너, 저 아이 데리고 나가라."
이 중에 가장 어린 7황녀를 말함이다. 2황자는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황제의 눈초리를 받고는 군말 없이 일어났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런 무거운 분위기에서 제법 처신이 좋다. 왜 이러는지도 모르는 채 멀뚱히 앉아 있는 7황녀를 데리고 라이아의 뒤를 ?았다.
순식간에 4명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인간들은 더욱 긴장했다. 내 표정이 과히 좋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어린애들"이 있을 때는 얕은 미소를 잃지 않았는데, 지금은 찬바람이 쌩쌩 분다. 물론 내가 얼음을 다루는 실버 드래곤인 탓은 절대 아니다. 연출이다, 연출.
"황제."
"예, 예."
황제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나는 그대가 인간이라고 믿고 있다."
"예? 아, 예. 저는 인간입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황제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자식은 개새끼로군."
내가 생각해도 심한 폭언이다. 지금껏 황실에 대한 모욕을 겪어본 적이 없는 이들로서는 아연실색하기만 할 것이다. 무슨 뜻인지 못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그 내용과 발언의 위험 수위에 놀란 것이다. 그러나 별 수 있나? 난 드래곤인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비굴한 모습만을 보이던 황제라도 이번만큼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노를 억지로 꾹꾹 눌러 참는 모습이다. 그러나 내가 신경이나 쓸 거 있나.
사실 나는 지금 기분이 굉장히 나쁘다. 정말 가벼운 기분으로 새 노예들을 데리고 나왔더니만 웬 놈이 끼어들어 내 기분을 망쳐버렸던 것이다. 그게 아까 점심때의 일이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다만 그놈이 내 노예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는 것 정도.
그래서 나는 대번에 저녁식사 소집을 명령하고는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고 있다.
"충고하겠는데, 당장이라도 황태자 저놈을 내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 제국이고 뭐고 죄다 끝이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문제의 황태자가 크게 소리쳤다. 드래곤 앞에서 목소리를 저렇게까지 높일 수 있는 것도 용기라면 용기라 할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뒷감당도 하지 못할 용기 따위는 부리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을.
"네놈이 밤에 뭐 하고 지내는지 말할까?"
순간 황태자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찔리는 것이 있으니 그럴 테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기는 비단 황태자 뿐만이 아니었다. 그럴 테지. 밤에 하는 일 치고 혼자서 하는 일은 별로 없거든.
"첫째, 참수한다. 둘째, 추방한다. 셋째, 내게 맡긴다. 황제, 이 중에 선택하라."
황제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짜고짜 황태자를 폐위시키라는 말인데, 이것에 분노하지 않을 황제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인간이었더래도 화났겠다.
"알 수 없습니다. 그 연유라도 일러 주십시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는 세르네린과 네르세린만이 놀라고 있을 뿐이다. 그랬다. 이 자리의 12명 중 황제까지 포함하여 단 4명만이 그나마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나머지 8명은 새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렇다면 말해주마."
"......!!!"
황태자가 벌떡 일어나서 입을 벙긋거렸다. 기세로 봐서는 뭔가 소리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불쌍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 자신도 그것을 깨닫고는 입을 가리고 목을 쥐었지만, 소리라고는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나는 히죽 웃어 주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손을 써준 것도 물론 내가 한 짓이다. 나는 남의 비밀이나 폭로하길 좋아하는 저열한 성격이거든.
"애초에 네놈이 내 것을 탐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세르네린과 네르세린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내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황태자를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바로 저놈이 내 노예들을 "아깝다"라는 눈초리로 쳐다봤던 것이다! 그것에서 나는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저놈은 언젠가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내 노예들을 제 마음대로 다룰 위험한 놈이다. 확신한다!
"잘 들어라 황제."
사색이 된 황후가 의자 뒤로 물러나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두 후궁이 똑같이 납작하게 엎드렸다. 황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오직 황태자만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죽일 듯이 쏘아 보고 있었다. 기분 좋다. 저놈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 수록 나는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당연하지 않나. 곧 죽을 버러지의 마지막 몸부림을 짓밟아버리는 쾌감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저놈의 비밀을 폭로했다.
"저놈은 제 혈육을 간(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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