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네린은 생각보다 늦게 돌아왔다. 목욕이란 것이 이렇게나 오래 걸리는 것이었던가 생각해 봤지만, 어쨌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휴린은 약간 발그스름한 얼굴로 배시시 웃고 있었고, 3명 모두 약간 젖은 머리칼에서 향기가 배어나왔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라이아 정도일까. 그녀는 잠들어 버렸다. 옷도 입지 않은 채로! 그래서 세르네린과 네르세린이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얼굴만 새빨갛게 물들인 채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나와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는지 뻔히 짐작하는 모습이다.
"오빠야, 오빠야."
휴린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역시나 이 아이는 아직 옷을 입고 벗는 것에는 아직 개념이 없다. 나와 라이아가 벗고 있는 모습을 봐도 별 변화가 없으니.
"목욕은 잘 했니, 휴린?"
"응! 물이 향기가 좋다."
아아, 그래. 언어 체계가 아직 덜 됐나. 하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며칠만에 과거형까지 익히는 것은 무리였겠지.
"그랬구나. 말려줄테니 가만히 있어라, 휴린."
나는 휴린의 은빛 머리칼을 훌훌 털었다. 내 손에 머문 바람이 물기를 말렸다. 자신의 머리칼이 흩날리는 것이 재미있는지, 휴린은 손을 뻗어 제멋대로 흩날리고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으려고 애썼다.
한창 물기를 말리던 중, 나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세르네린을 불렀다.
"세르네린."
"네, 네?"
갑작스런 부름에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다. 아직까지도 몸이 굳어있던 것인가. 순진한 아이는 저런 모습이 있기에 재미있는 것이다.
"안심해도 좋다. 오늘은 더 할 생각이 없으니까."
무엇을- 이라는 목적어 따위는 없어도 이해하겠지. 일단 내 말에 네르세린의 얼굴부터 환하게 펴졌다. 오늘은 더 이상 범해지지 않는다, 라는 생각일 테지만... 역시 그제 밤에 너무 심하게 했던 것일까. 섹스에 거부라도 일으키면 곤란한데.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해도 좋다."
나는 가볍게 허락했다. 갑작스럽게 노예가 된 바람에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가 이렇게나 가볍게 허락하는 데는 그동안 못한 것을 하라는 의미도 있긴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모두 다 정리하고 오라는 뜻이다. 오늘만은 예전으로 돌아가게 해줄 테니, 모두 다 정리하고 온전한 노예가 되어 돌아오라는 의미인 것이다.
과연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세르네린의 얼굴이 쓸쓸하게 변했다. 네르세린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뭔가를 잔뜩 생각하고 있지만.
"저... 주인님."
세르네린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뭐지, 세르네린?"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오늘이 아니라서..."
나는 분명히 말했다. "오늘은"이라고. 하지만 차마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말하는데, 아무리 노예라고는 하지만 최소한 들어 보기는 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말해 봐라."
"네... 내일 황태자 책봉식이 있어요."
"황태자 책봉식? 그 2황자라는 놈 말이냐?"
"네."
대단한 나라다, 쥬리안트 제국은. 하룻밤에 돌연사한 황태자의 장례를 바로 다음날에 치러버리질 않나, 황태자가 죽은 게 겨우 그젠데 내일 2황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겠다니. 도무지 제국이라는 나라가 할 수 있는 짓으로는 여겨지지가 않는다. 그런 대규모 행사가 있으면 나라 곳곳에 있는 귀족들을 불러모을 여유 정도는 갖는 게 보통일 텐데, 이렇게나 빨리빨리 해치워버리면 제국 치고는 위엄있는 규모가 나오질 않는다. 그런데도 감행하겠다고?
"황제가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이군."
전 황태자의 흔적을 없애버리려고 안달하는 모습이 눈에 훤하다. 따지고 보면 이건 내 탓이던가. 별로 신경쓸 것도 아니긴 하지만.
"네. 그래서... 내일 책봉식에 참석해도 될까요...?"
책봉식 참가라. 하긴 황녀의 입장에서 황태자 책봉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긴 하다. 참석은 당연히 해야겠고, 그러려니 내 노예라는 신분이 걸리고. 어쨌든 노예이니만큼 주인에게 허락은 구해야 할 것 아니냔 말이다.
"괜찮겠지."
"아! 정말이세요?"
세르네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무래도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마음 넓은 주인님께서 흔쾌히 허락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란 말이지.
"그럼 파티에 갔다 와도 되겠네요?"
네르세린이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여전히 버릇이 덜 든 아이다.
그러나 파티라니. 하긴 황태자 책봉식 정도 되는 큰 행사가 있는데, 파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긴 하려나.
나는 잠시 생각했다. 파티, 호화로운 연회장에, 음악이 흐르고, 맛 좋은 음식이 널려 있고, 많은 인간들이 모여 춤을 추기도 하며,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가 가득한, 인간들만이 하는 축제... 이거라면 휴린도 경험해볼 만은 하겠다.
"좋다. 하지만 나도 참석하겠다."
"엑?!"
또냐, 그 괴상한 비명은.
"하지만 우린 황녀라구요! 노예라는 걸 알렸다간..."
"알리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단지 휴린에게 인간들의 파티를 보여주려는 것일 뿐이니."
네르세린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한숨 쉬었다. 그것이 그렇게나 큰 문제인가?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알게될 것을.
아, 그러고 보니... 황태자로 책봉되는 그놈...
"세르네린. 2황자라는 그놈의 용건이 그것이더냐?"
"아... 네."
이런, 이런. 결국 그놈이 바라던 대로 되고 말았는가. 나를 적대시하던 그놈은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데... 파티에서는 절대 그놈에게 말도 붙이지 말아야겠다.
휴린의 머리를 다 말리고, 졸음에 겨워 꾸벅거리는 휴린을 내 옆에 뉘였다. 라이아와 휴린, 양손에 꽃인가. 따뜻한 물로 목욕한 덕에 보송보송하고 뽀얀 얼굴이 더없이 귀여워 보인다. 휴린의 이마에 굿나잇 키스 - 아직 밖은 환했지만 - 를 해준 뒤, 나는 풀이 죽어 있는 네르세린을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뭘 그리 멀뚱히 서있느냐. 하루의 자유가 아깝지 않은가 보군?"
"아, 아녜요!"
네르세린은 허둥지둥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표정만은 대단히 밝았다. 세르네린 역시 환한 얼굴이었는데, 역시나 그녀는 버릇없는 네르세린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주인님, 정말 감사드려요."
그렇게까지 감사할 일은 아닐 터인데.
세르네린까지 나가버리자, 나는 양옆을 둘러보았다. 피곤에 겨운 것인지 축 늘어져 있는 라이아, 그리고 새근거리며 잠든 휴린. 이 상황에선 딱히 할 만한 일도 없다. 깨워서 뭔가를 하기도 별로 내키지 않고.
뭐, 나도 잘까.
-----------------------------------------------------------------------------
황태자 책봉식 따위, 나는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공식 석상에서 황녀를 건드릴 만한 인간이 있을 리도 없고 하여, 방에서 라이아와 함께 휴린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했다.
창밖에서 나는 함성이 멎고,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책봉식이 끝난 것일 테지. 세르네린과 네르세린이 피곤한 기색으로 방에 돌아온 것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녀왔어요."
"아아."
나는 휴린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으며 교육을 끝냈다. 그러나 사실상 교육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라이아이기에, 내가 끝냈다고는 해도 휴린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하루 종일이 교육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공부를 지겨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지만.
휴린은 얌전한 아이다. 실버 드래곤의 성정이 그대로 이어져 있어, 보통의 헤츨링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레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생각해 보면, 휴린의 배시시 웃는 웃음이 얼마나 얌전하고 귀여운지 뼈저리게 느낀다. 아직까지 노예 근성이 남아서 얌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저, 주인님... 이제 파티 준비를 해야 하는데요..."
"하도록 해라."
세르네린이 갑자기 당황하는 표정이 되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준비를 해야 한다니 하라고 했을 뿐인데.
"저, 저기, 우선은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아, 옷 말인가. 그러고 보니 문 너머에 꽤나 많은 기척이 느껴진다. 시녀들인가. 세르네린이 왜 당황하는지 알 것 같다. 말하자면 내가 수컷, 그러니까 남자라서 옷을 갈아입기에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방에서 나가 달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차마 주인님이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겠고...
나는 잠시 장난기가 들었다. 세르네린이 당황해 하는 이유, 그러니까 나는 남자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주인님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갈아입으면 되지 않느냐."
"남자 앞에서 어떻게 갈아입으란 거에요?"
안절부절하는 세르네린 대신 앙칼진 네르세린이 대들었다. 저 버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버릇없는 행동 한번에 강간 한번 정도로 징계하면 고분고분해질지도.
"주인님 앞에서 벗는 게 그리 큰 문제더냐? 이미 다 보인 주제에."
네르세린은 당장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버릇없는 아이가 찍소리도 못하고 있는 걸 보니 꽤나 통쾌하기까지 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저리도 귀여운 것을.
장난도 이쯤이면 되었다. 휴린도 보고 있는 상황에, 더 장난을 치다가는 교육상 좋지 않다.
"얼굴 붉히지 마라. 장난이었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연히 내 노예인 그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치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우에는 조금 문제가 있다. 휴린까지 보게 되는 것이다. 휴린이야 내가 지켜보고 있든 말든 이상하게 여길 리 없겠지. 하지만 정작 문제는 내 자신이다.
"세르네린."
"네."
세르네린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향한 그 웃음은 노예답지 않게 온화했다. 감사의 뜻이긴 하겠지만... 정말이지 노예답지 않다. 이럴 때 보여야 하는 것은 저런 따뜻한 미소가 아니라 경건한 존경의 눈빛이어야 하거늘.
"휴린도 잘 꾸며주어라."
"네. 예쁘게 꾸며드릴게요."
세르네린에게 맡겼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아직 그녀의 심미안을 확인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적어도 인간의 미적 감각과는 전혀 무관한 라이아나 맡기기 불안한 네르세린보다야 훨씬 낫긴 하겠다.
생각해 보니, 내가 문제다. 지금 내 옷차림 - 풍성한 느낌의 백색 로브 - 은 아무래도 파티에 입고 나가기에는 접합하지도 않고.
나는 문을 열고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리고 있는 시녀들을 죽 훑어보았다. 저마다 손에 옷이며 상자같은 것들을 잔뜩 들고 있다. 내가 모습을 보이자 순식간에 동작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황궁의 시녀들이라 그런지 교육 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묻느니, 혹여 황제가 내게 보낸 옷도 있느냐?"
"있습...니다."
대답에 상당한 떨림이 있다. 나는 대답을 한 시녀를 살펴봤다. 모여 있는 시녀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 들어보이는 얼굴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꽤나 젊다. 시선을 내리깔고는 있지만 뺨이며 귓바퀴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런 것인지, 별로 어렵지 않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것도 인간들의 기준으로 볼 때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준의 외모를 가진, 그야말로 초절한 미청년! 요 며칠간 내 외모에 대해 특색있는 반응을 접하지 못했더니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젊은 여자들의 눈에는 감히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눈부신 외모다.
나는 그동안 시큰둥했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살아나는 걸 느끼며 그 시녀를 한참이나 내려다 보았다. 시녀는 침묵이 이어지자 조금씩 당황하더니, 곧 옷을 한벌 내밀며 상황을 무마시켰다.
"이것인가."
나는 시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옷을 펼쳤다. 상하로 나뉜, 그것도 바지 형태의 옷이다. 옛날에는 평민이나 입는 옷이었던 바지 말이다. 게다가 꽤나 작은 것이, 황제나 전 황태자놈이 입었던 몸에 착 달라붙는 천박한 옷임에 틀림없다. 나한테 이런 걸 입으라고 보냈단 말이냐.
"되었다. 차마 이런 건 입을 수 없으니 돌려보내라."
"그, 그리하시면..."
시녀는 뒷말을 삼켰다.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낸 내 표정을 본 직후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 정도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바지도 아니고, 이런 천박하고 격조 없는 옷을 대체 어떻게 입느냔 말이다.
"내 옷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쓸 것 없다. 그보다 저 아이들이나 꾸며주거라."
"예에..."
시녀들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방에 들어갔다. 나는 치장을 준비하는 그녀들을 흘겨보고는 복도를 걸었다.
옷이라. 생각해 보니 옷이 아주 없지는 않다. 예전에 인간의 세상에 첫 유희를 나왔을 때 주문해둔 옷이 있다. 200년이나 지났으니 그것이 남아있을 리는 없겠지만... 남아 있다면 파티에 입고 가도 무리는 없을 듯한 옷이다. 찾아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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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문제가 있다면 라이아 정도일까. 그녀는 잠들어 버렸다. 옷도 입지 않은 채로! 그래서 세르네린과 네르세린이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얼굴만 새빨갛게 물들인 채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나와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는지 뻔히 짐작하는 모습이다.
"오빠야, 오빠야."
휴린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역시나 이 아이는 아직 옷을 입고 벗는 것에는 아직 개념이 없다. 나와 라이아가 벗고 있는 모습을 봐도 별 변화가 없으니.
"목욕은 잘 했니, 휴린?"
"응! 물이 향기가 좋다."
아아, 그래. 언어 체계가 아직 덜 됐나. 하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며칠만에 과거형까지 익히는 것은 무리였겠지.
"그랬구나. 말려줄테니 가만히 있어라, 휴린."
나는 휴린의 은빛 머리칼을 훌훌 털었다. 내 손에 머문 바람이 물기를 말렸다. 자신의 머리칼이 흩날리는 것이 재미있는지, 휴린은 손을 뻗어 제멋대로 흩날리고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으려고 애썼다.
한창 물기를 말리던 중, 나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세르네린을 불렀다.
"세르네린."
"네, 네?"
갑작스런 부름에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다. 아직까지도 몸이 굳어있던 것인가. 순진한 아이는 저런 모습이 있기에 재미있는 것이다.
"안심해도 좋다. 오늘은 더 할 생각이 없으니까."
무엇을- 이라는 목적어 따위는 없어도 이해하겠지. 일단 내 말에 네르세린의 얼굴부터 환하게 펴졌다. 오늘은 더 이상 범해지지 않는다, 라는 생각일 테지만... 역시 그제 밤에 너무 심하게 했던 것일까. 섹스에 거부라도 일으키면 곤란한데.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해도 좋다."
나는 가볍게 허락했다. 갑작스럽게 노예가 된 바람에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가 이렇게나 가볍게 허락하는 데는 그동안 못한 것을 하라는 의미도 있긴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모두 다 정리하고 오라는 뜻이다. 오늘만은 예전으로 돌아가게 해줄 테니, 모두 다 정리하고 온전한 노예가 되어 돌아오라는 의미인 것이다.
과연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세르네린의 얼굴이 쓸쓸하게 변했다. 네르세린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뭔가를 잔뜩 생각하고 있지만.
"저... 주인님."
세르네린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뭐지, 세르네린?"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오늘이 아니라서..."
나는 분명히 말했다. "오늘은"이라고. 하지만 차마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말하는데, 아무리 노예라고는 하지만 최소한 들어 보기는 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말해 봐라."
"네... 내일 황태자 책봉식이 있어요."
"황태자 책봉식? 그 2황자라는 놈 말이냐?"
"네."
대단한 나라다, 쥬리안트 제국은. 하룻밤에 돌연사한 황태자의 장례를 바로 다음날에 치러버리질 않나, 황태자가 죽은 게 겨우 그젠데 내일 2황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겠다니. 도무지 제국이라는 나라가 할 수 있는 짓으로는 여겨지지가 않는다. 그런 대규모 행사가 있으면 나라 곳곳에 있는 귀족들을 불러모을 여유 정도는 갖는 게 보통일 텐데, 이렇게나 빨리빨리 해치워버리면 제국 치고는 위엄있는 규모가 나오질 않는다. 그런데도 감행하겠다고?
"황제가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이군."
전 황태자의 흔적을 없애버리려고 안달하는 모습이 눈에 훤하다. 따지고 보면 이건 내 탓이던가. 별로 신경쓸 것도 아니긴 하지만.
"네. 그래서... 내일 책봉식에 참석해도 될까요...?"
책봉식 참가라. 하긴 황녀의 입장에서 황태자 책봉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긴 하다. 참석은 당연히 해야겠고, 그러려니 내 노예라는 신분이 걸리고. 어쨌든 노예이니만큼 주인에게 허락은 구해야 할 것 아니냔 말이다.
"괜찮겠지."
"아! 정말이세요?"
세르네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무래도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마음 넓은 주인님께서 흔쾌히 허락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란 말이지.
"그럼 파티에 갔다 와도 되겠네요?"
네르세린이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여전히 버릇이 덜 든 아이다.
그러나 파티라니. 하긴 황태자 책봉식 정도 되는 큰 행사가 있는데, 파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긴 하려나.
나는 잠시 생각했다. 파티, 호화로운 연회장에, 음악이 흐르고, 맛 좋은 음식이 널려 있고, 많은 인간들이 모여 춤을 추기도 하며,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가 가득한, 인간들만이 하는 축제... 이거라면 휴린도 경험해볼 만은 하겠다.
"좋다. 하지만 나도 참석하겠다."
"엑?!"
또냐, 그 괴상한 비명은.
"하지만 우린 황녀라구요! 노예라는 걸 알렸다간..."
"알리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단지 휴린에게 인간들의 파티를 보여주려는 것일 뿐이니."
네르세린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한숨 쉬었다. 그것이 그렇게나 큰 문제인가?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알게될 것을.
아, 그러고 보니... 황태자로 책봉되는 그놈...
"세르네린. 2황자라는 그놈의 용건이 그것이더냐?"
"아... 네."
이런, 이런. 결국 그놈이 바라던 대로 되고 말았는가. 나를 적대시하던 그놈은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데... 파티에서는 절대 그놈에게 말도 붙이지 말아야겠다.
휴린의 머리를 다 말리고, 졸음에 겨워 꾸벅거리는 휴린을 내 옆에 뉘였다. 라이아와 휴린, 양손에 꽃인가. 따뜻한 물로 목욕한 덕에 보송보송하고 뽀얀 얼굴이 더없이 귀여워 보인다. 휴린의 이마에 굿나잇 키스 - 아직 밖은 환했지만 - 를 해준 뒤, 나는 풀이 죽어 있는 네르세린을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뭘 그리 멀뚱히 서있느냐. 하루의 자유가 아깝지 않은가 보군?"
"아, 아녜요!"
네르세린은 허둥지둥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표정만은 대단히 밝았다. 세르네린 역시 환한 얼굴이었는데, 역시나 그녀는 버릇없는 네르세린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주인님, 정말 감사드려요."
그렇게까지 감사할 일은 아닐 터인데.
세르네린까지 나가버리자, 나는 양옆을 둘러보았다. 피곤에 겨운 것인지 축 늘어져 있는 라이아, 그리고 새근거리며 잠든 휴린. 이 상황에선 딱히 할 만한 일도 없다. 깨워서 뭔가를 하기도 별로 내키지 않고.
뭐, 나도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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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책봉식 따위, 나는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공식 석상에서 황녀를 건드릴 만한 인간이 있을 리도 없고 하여, 방에서 라이아와 함께 휴린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했다.
창밖에서 나는 함성이 멎고,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책봉식이 끝난 것일 테지. 세르네린과 네르세린이 피곤한 기색으로 방에 돌아온 것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녀왔어요."
"아아."
나는 휴린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으며 교육을 끝냈다. 그러나 사실상 교육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라이아이기에, 내가 끝냈다고는 해도 휴린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하루 종일이 교육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공부를 지겨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지만.
휴린은 얌전한 아이다. 실버 드래곤의 성정이 그대로 이어져 있어, 보통의 헤츨링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레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생각해 보면, 휴린의 배시시 웃는 웃음이 얼마나 얌전하고 귀여운지 뼈저리게 느낀다. 아직까지 노예 근성이 남아서 얌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저, 주인님... 이제 파티 준비를 해야 하는데요..."
"하도록 해라."
세르네린이 갑자기 당황하는 표정이 되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준비를 해야 한다니 하라고 했을 뿐인데.
"저, 저기, 우선은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아, 옷 말인가. 그러고 보니 문 너머에 꽤나 많은 기척이 느껴진다. 시녀들인가. 세르네린이 왜 당황하는지 알 것 같다. 말하자면 내가 수컷, 그러니까 남자라서 옷을 갈아입기에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방에서 나가 달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차마 주인님이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겠고...
나는 잠시 장난기가 들었다. 세르네린이 당황해 하는 이유, 그러니까 나는 남자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주인님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갈아입으면 되지 않느냐."
"남자 앞에서 어떻게 갈아입으란 거에요?"
안절부절하는 세르네린 대신 앙칼진 네르세린이 대들었다. 저 버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버릇없는 행동 한번에 강간 한번 정도로 징계하면 고분고분해질지도.
"주인님 앞에서 벗는 게 그리 큰 문제더냐? 이미 다 보인 주제에."
네르세린은 당장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버릇없는 아이가 찍소리도 못하고 있는 걸 보니 꽤나 통쾌하기까지 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저리도 귀여운 것을.
장난도 이쯤이면 되었다. 휴린도 보고 있는 상황에, 더 장난을 치다가는 교육상 좋지 않다.
"얼굴 붉히지 마라. 장난이었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연히 내 노예인 그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치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우에는 조금 문제가 있다. 휴린까지 보게 되는 것이다. 휴린이야 내가 지켜보고 있든 말든 이상하게 여길 리 없겠지. 하지만 정작 문제는 내 자신이다.
"세르네린."
"네."
세르네린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향한 그 웃음은 노예답지 않게 온화했다. 감사의 뜻이긴 하겠지만... 정말이지 노예답지 않다. 이럴 때 보여야 하는 것은 저런 따뜻한 미소가 아니라 경건한 존경의 눈빛이어야 하거늘.
"휴린도 잘 꾸며주어라."
"네. 예쁘게 꾸며드릴게요."
세르네린에게 맡겼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아직 그녀의 심미안을 확인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적어도 인간의 미적 감각과는 전혀 무관한 라이아나 맡기기 불안한 네르세린보다야 훨씬 낫긴 하겠다.
생각해 보니, 내가 문제다. 지금 내 옷차림 - 풍성한 느낌의 백색 로브 - 은 아무래도 파티에 입고 나가기에는 접합하지도 않고.
나는 문을 열고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리고 있는 시녀들을 죽 훑어보았다. 저마다 손에 옷이며 상자같은 것들을 잔뜩 들고 있다. 내가 모습을 보이자 순식간에 동작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황궁의 시녀들이라 그런지 교육 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묻느니, 혹여 황제가 내게 보낸 옷도 있느냐?"
"있습...니다."
대답에 상당한 떨림이 있다. 나는 대답을 한 시녀를 살펴봤다. 모여 있는 시녀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 들어보이는 얼굴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꽤나 젊다. 시선을 내리깔고는 있지만 뺨이며 귓바퀴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런 것인지, 별로 어렵지 않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것도 인간들의 기준으로 볼 때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준의 외모를 가진, 그야말로 초절한 미청년! 요 며칠간 내 외모에 대해 특색있는 반응을 접하지 못했더니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젊은 여자들의 눈에는 감히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눈부신 외모다.
나는 그동안 시큰둥했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살아나는 걸 느끼며 그 시녀를 한참이나 내려다 보았다. 시녀는 침묵이 이어지자 조금씩 당황하더니, 곧 옷을 한벌 내밀며 상황을 무마시켰다.
"이것인가."
나는 시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옷을 펼쳤다. 상하로 나뉜, 그것도 바지 형태의 옷이다. 옛날에는 평민이나 입는 옷이었던 바지 말이다. 게다가 꽤나 작은 것이, 황제나 전 황태자놈이 입었던 몸에 착 달라붙는 천박한 옷임에 틀림없다. 나한테 이런 걸 입으라고 보냈단 말이냐.
"되었다. 차마 이런 건 입을 수 없으니 돌려보내라."
"그, 그리하시면..."
시녀는 뒷말을 삼켰다.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낸 내 표정을 본 직후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 정도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바지도 아니고, 이런 천박하고 격조 없는 옷을 대체 어떻게 입느냔 말이다.
"내 옷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쓸 것 없다. 그보다 저 아이들이나 꾸며주거라."
"예에..."
시녀들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방에 들어갔다. 나는 치장을 준비하는 그녀들을 흘겨보고는 복도를 걸었다.
옷이라. 생각해 보니 옷이 아주 없지는 않다. 예전에 인간의 세상에 첫 유희를 나왔을 때 주문해둔 옷이 있다. 200년이나 지났으니 그것이 남아있을 리는 없겠지만... 남아 있다면 파티에 입고 가도 무리는 없을 듯한 옷이다. 찾아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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