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내게 복종한다. 그러나 그녀와 같은 처지인 다른 아이들에게는 나를 두려워하게 하지 않는다. 그 탓에 질투가 났다...
물론 절대로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얘기는 매력적이다. 무조건적인 복종은 주인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면 나로서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다. 선하고 자애로운 실버 드래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내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일이다.
"걱정 말아요, 주인님. 난 주인님이 무섭지 않아요. 그저..."
라이아는 고개를 떨구고 잦아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억울했을 뿐..."
단지 억울했기 때문에 그 아이들에게 심술을 부렸다, 라. 억울했기 때문에 질투했다고 생각하면 편할까.
나는 라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떻게 보면 불쌍한 아이다. 내 행동 하나 하나에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니. 불쌍하긴 하지만, 동시에 사랑스럽다- 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님..."
나는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어깨가 조금씩 떨리는 것이 전해졌다.
"나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라이아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어, 지금도 충분히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속내를 토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나를 소중히 여겨 주세요."
그녀가 안겨왔다. 두팔로 내 목을 감싸안으며.
"나를 사랑해 주세요..."
눈을 감자, 맺혀 있던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라이아..."
이제서야 다 깨달았다. 어째서 나를 두려워하는지, 어째서 질투 따위를 했는지. 라이아는, 이 순수하기 그지없는 아이는 역시나 엘프였던 것이다. 평생에 걸쳐 단 한사람만을 사랑하고, 단 한사람과 관계하는, 도저히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 관계를 견뎌낼 자신이 없는 가여운 아이다. 그랬기에 내게 처녀를 빼앗긴 순간이 두려웠고, 그 순간에 사랑이 없었기에 두려웠으며, 바로 그러하기에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으리라.
"주인님..."
누가 엘프 아니랄까봐서, 이 바보같은 아이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질투 따위를 했던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자신보다 더욱 상냥하게 대하고 있는 여자를.
나는 라이아를 떨어뜨렸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이 더없이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나는 차마 그녀에게 희망적인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라이아."
"네, 주인님."
나는 한차례 숨을 들이쉰 다음에 천천히 말했다.
"버리지 않겠다. 그리고 소중히 여겨주겠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잔인하다고 할 만한 말을.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아."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라이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절망에 빠져들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나는 차라리 세르네린이나 네르세린은 사랑할 수 있어도 라이아만은 차마 사랑할 수 없다. 200년 가까이 싫증내지 않고 내 노예로 거두고 있던 것은 단지 자기만족이었을 뿐, 나는 내 감정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오히려 그녀를 사랑할 수가 없다.
"알았...어요."
"왜 그런지도 묻지 않는군?"
내 물음에 라이아는 웃었다. 눈물을 계속 흘리면서도, 그녀는 억지로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소중히 여겨주시면... 그걸로 충분해요. 노예니까요..."
불쌍한 아이야, 너는 내게 범해지나, 내가 범하는 것은 네가 아닌 것을. 나는 측은한 마음이 일어 라이아를 다시금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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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휴린이 즐겁게 꺅꺅거리며 뛰놀고 있다. 그리고 가까이에는 라이아가 빨개진 눈을 감추려고 고개를 떨구며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공허한 마음이 되어 손으로는 라이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눈으로는 휴린이 노는 모습을 웃지도 않은 채 바라보고 있다.
지리한 시간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휴린도 조금은 지쳤는지 처음처럼 활기찬 모습도 아니고, 라이아도 몸의 떨림이 없어진 것이 많이 진정된듯 싶었다.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날까 생각했을때, 작은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가 다가왔다. 매우 가벼운 기척 하나, 그리고 묵직하고 걸음이 규칙적인 기척이 하나. 그 기척은 별로 거리끼는 기색도 없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누구지?"
나는 고개를 돌려 누가 온 것인지를 확인했다.
"제벨 엘 쥬리안트입니다."
제벨 엘 쥬리안트, 그 꼬맹이다. 황태자가 죽음으로써 쥬리안트 제국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황자. 나를 향한 존경의 수식마저 빼먹은 맹랑한 꼬마놈이다. 그놈이 기사 하나를 대동한 채 여기까지 와서 버릇없게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꼬맹이 꼬맹이 하지만, 선 키가 내 앉은 키보다는 훨씬 크다.
"용건이 있느냐?"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용건이 없으면 돌아가라는 의미로 한 말인데, 꼬마놈의 대답은 의외였다.
"예, 있습니다."
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드래곤 대하는 태도를 잘못 배운 것인지. 비굴한 모습이 없는 것은 마음에 드나, 나를 너무 쉽게 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감점이다. 무엇보다 드래곤을 상대로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용건으로 넘어가려 한다는 점이 가장 불쾌하다.
"어린 아이야,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려면 그에 맞는 예(禮)를 갖춰야만 하는 법이다. 그러나 너는 내게 예를 보이지 않았으니, 나는 네 용건을 듣지 않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자 그제서야 만족스런 눈높이가 나왔다. 이 맹랑한 꼬맹이는 겨우 내 쇄골 밑에나 간신히 닿을 정도에 불과했다. 나이에 비하면 꽤나 크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내게 비하면 아직 한참은 멀었다.
"휴린! 돌아가자!"
멀리서 놀고 있던 휴린이 내 목소리를 듣고는 바로 뛰어왔다. 아직 잘 뛰지 못하는 탓에 달리는 모습이 많이 어색하다. 넘어질 듯, 안 넘어질 듯, 위태롭게 아장거리는 꼴이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져나와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우스꽝스럽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내게로 도달한 휴린, 이 조그마한 아이의 손에는 정원의 꽃이 가득 쥐여 있었다. 제 멋대로 꽃을 꺾어버린 모양이다. 정원사들이 봤다면 충분히 까무러칠 만한 모습이다.
"안 되잖느냐, 휴린. 이렇게 꺾어버리면."
대수롭지는 않은 일이기에, 나는 크게 탓하지도 않았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타일러두긴 해야겠는데, 실제로 별 일 아니기에 뭐라 하기에도 민망했다.
휴린은 내 말을 듣지도 않았는지, 화사하게 웃으며 손에 든 꽃을 내밀었다.
"오빠야, 이거, 꽃, 향기가 좋다."
향기가 좋다... 휴린이 내민 꽃들은 은은한 향기를 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두 다 다른 꽃이다. 하나 하나의 향기를 맡으며 꺾은 것인지, 조화(調和)라고는 전혀 없이 오밀조밀하게 뭉쳐만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휴린이 나를 위해 이 작은 손을 움직여 꽃을 가져왔다는 것만은 넘치도록 전해졌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꽃 향기를 맡았다. 강렬한 향은 없지만, 은은한 향기가 끊임없이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기사, 아직 더운 시기가 찾아오지 않았으니 황궁이라도 향기가 강한 꽃은 아직 피지 않았겠지.
"언니야, 꽃, 향기가 좋다."
휴린은 곧바로 라이아에게 내밀었다. 라이아는 빨개진 눈을 하고도 기쁜듯이 웃으며 꽃향기를 맡았다. 조화로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꽃다발이 오히려 조화를 추구하는 엘프와 한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그리고 휴린은, 정말 잠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꽃다발을 황자놈에게 내밀었다.
"오빠야, 이거, 향기 좋다."
아니... 왜 저런 놈한테까지... 아직 분별력이 부족한 휴린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일 테지만, 나는 내심 불쾌했다. 저런 싹수 노란 놈한테까지 나를 대하듯이 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내 자존심에 금이 가게 하는 행위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불쾌한 점은! 저 싸가지라고는 한번도 보인 적 없는 놈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로 휴린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얼굴이 붉어지고, 겉으로는 당황하면서, 입으로는 우물쭈물 어물거리는 종류의 모습을 보면,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휴린, 그만 가자!"
나는 당장 휴린을 안아 들었다. 그 바람에 놈 앞에서 꽃이 흩어져 떨어져버렸다. 휴린이 애써 꺾어온 꽃인데. 안타깝긴 하나, 나는 크게 괘념치 않고 정원을 벗어났다. 휴린 역시 별로 칭얼거리지도 않았다. 꺾어온 꽃은 향기를 맡게 해주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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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절대로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얘기는 매력적이다. 무조건적인 복종은 주인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면 나로서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다. 선하고 자애로운 실버 드래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내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일이다.
"걱정 말아요, 주인님. 난 주인님이 무섭지 않아요. 그저..."
라이아는 고개를 떨구고 잦아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억울했을 뿐..."
단지 억울했기 때문에 그 아이들에게 심술을 부렸다, 라. 억울했기 때문에 질투했다고 생각하면 편할까.
나는 라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떻게 보면 불쌍한 아이다. 내 행동 하나 하나에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니. 불쌍하긴 하지만, 동시에 사랑스럽다- 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님..."
나는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어깨가 조금씩 떨리는 것이 전해졌다.
"나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라이아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어, 지금도 충분히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속내를 토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나를 소중히 여겨 주세요."
그녀가 안겨왔다. 두팔로 내 목을 감싸안으며.
"나를 사랑해 주세요..."
눈을 감자, 맺혀 있던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라이아..."
이제서야 다 깨달았다. 어째서 나를 두려워하는지, 어째서 질투 따위를 했는지. 라이아는, 이 순수하기 그지없는 아이는 역시나 엘프였던 것이다. 평생에 걸쳐 단 한사람만을 사랑하고, 단 한사람과 관계하는, 도저히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 관계를 견뎌낼 자신이 없는 가여운 아이다. 그랬기에 내게 처녀를 빼앗긴 순간이 두려웠고, 그 순간에 사랑이 없었기에 두려웠으며, 바로 그러하기에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으리라.
"주인님..."
누가 엘프 아니랄까봐서, 이 바보같은 아이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질투 따위를 했던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자신보다 더욱 상냥하게 대하고 있는 여자를.
나는 라이아를 떨어뜨렸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이 더없이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나는 차마 그녀에게 희망적인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라이아."
"네, 주인님."
나는 한차례 숨을 들이쉰 다음에 천천히 말했다.
"버리지 않겠다. 그리고 소중히 여겨주겠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잔인하다고 할 만한 말을.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아."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라이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절망에 빠져들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나는 차라리 세르네린이나 네르세린은 사랑할 수 있어도 라이아만은 차마 사랑할 수 없다. 200년 가까이 싫증내지 않고 내 노예로 거두고 있던 것은 단지 자기만족이었을 뿐, 나는 내 감정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오히려 그녀를 사랑할 수가 없다.
"알았...어요."
"왜 그런지도 묻지 않는군?"
내 물음에 라이아는 웃었다. 눈물을 계속 흘리면서도, 그녀는 억지로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소중히 여겨주시면... 그걸로 충분해요. 노예니까요..."
불쌍한 아이야, 너는 내게 범해지나, 내가 범하는 것은 네가 아닌 것을. 나는 측은한 마음이 일어 라이아를 다시금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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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휴린이 즐겁게 꺅꺅거리며 뛰놀고 있다. 그리고 가까이에는 라이아가 빨개진 눈을 감추려고 고개를 떨구며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공허한 마음이 되어 손으로는 라이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눈으로는 휴린이 노는 모습을 웃지도 않은 채 바라보고 있다.
지리한 시간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휴린도 조금은 지쳤는지 처음처럼 활기찬 모습도 아니고, 라이아도 몸의 떨림이 없어진 것이 많이 진정된듯 싶었다.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날까 생각했을때, 작은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가 다가왔다. 매우 가벼운 기척 하나, 그리고 묵직하고 걸음이 규칙적인 기척이 하나. 그 기척은 별로 거리끼는 기색도 없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누구지?"
나는 고개를 돌려 누가 온 것인지를 확인했다.
"제벨 엘 쥬리안트입니다."
제벨 엘 쥬리안트, 그 꼬맹이다. 황태자가 죽음으로써 쥬리안트 제국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황자. 나를 향한 존경의 수식마저 빼먹은 맹랑한 꼬마놈이다. 그놈이 기사 하나를 대동한 채 여기까지 와서 버릇없게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꼬맹이 꼬맹이 하지만, 선 키가 내 앉은 키보다는 훨씬 크다.
"용건이 있느냐?"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용건이 없으면 돌아가라는 의미로 한 말인데, 꼬마놈의 대답은 의외였다.
"예, 있습니다."
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드래곤 대하는 태도를 잘못 배운 것인지. 비굴한 모습이 없는 것은 마음에 드나, 나를 너무 쉽게 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감점이다. 무엇보다 드래곤을 상대로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용건으로 넘어가려 한다는 점이 가장 불쾌하다.
"어린 아이야,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려면 그에 맞는 예(禮)를 갖춰야만 하는 법이다. 그러나 너는 내게 예를 보이지 않았으니, 나는 네 용건을 듣지 않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자 그제서야 만족스런 눈높이가 나왔다. 이 맹랑한 꼬맹이는 겨우 내 쇄골 밑에나 간신히 닿을 정도에 불과했다. 나이에 비하면 꽤나 크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내게 비하면 아직 한참은 멀었다.
"휴린! 돌아가자!"
멀리서 놀고 있던 휴린이 내 목소리를 듣고는 바로 뛰어왔다. 아직 잘 뛰지 못하는 탓에 달리는 모습이 많이 어색하다. 넘어질 듯, 안 넘어질 듯, 위태롭게 아장거리는 꼴이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져나와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우스꽝스럽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내게로 도달한 휴린, 이 조그마한 아이의 손에는 정원의 꽃이 가득 쥐여 있었다. 제 멋대로 꽃을 꺾어버린 모양이다. 정원사들이 봤다면 충분히 까무러칠 만한 모습이다.
"안 되잖느냐, 휴린. 이렇게 꺾어버리면."
대수롭지는 않은 일이기에, 나는 크게 탓하지도 않았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타일러두긴 해야겠는데, 실제로 별 일 아니기에 뭐라 하기에도 민망했다.
휴린은 내 말을 듣지도 않았는지, 화사하게 웃으며 손에 든 꽃을 내밀었다.
"오빠야, 이거, 꽃, 향기가 좋다."
향기가 좋다... 휴린이 내민 꽃들은 은은한 향기를 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두 다 다른 꽃이다. 하나 하나의 향기를 맡으며 꺾은 것인지, 조화(調和)라고는 전혀 없이 오밀조밀하게 뭉쳐만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휴린이 나를 위해 이 작은 손을 움직여 꽃을 가져왔다는 것만은 넘치도록 전해졌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꽃 향기를 맡았다. 강렬한 향은 없지만, 은은한 향기가 끊임없이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기사, 아직 더운 시기가 찾아오지 않았으니 황궁이라도 향기가 강한 꽃은 아직 피지 않았겠지.
"언니야, 꽃, 향기가 좋다."
휴린은 곧바로 라이아에게 내밀었다. 라이아는 빨개진 눈을 하고도 기쁜듯이 웃으며 꽃향기를 맡았다. 조화로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꽃다발이 오히려 조화를 추구하는 엘프와 한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그리고 휴린은, 정말 잠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꽃다발을 황자놈에게 내밀었다.
"오빠야, 이거, 향기 좋다."
아니... 왜 저런 놈한테까지... 아직 분별력이 부족한 휴린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일 테지만, 나는 내심 불쾌했다. 저런 싹수 노란 놈한테까지 나를 대하듯이 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내 자존심에 금이 가게 하는 행위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불쾌한 점은! 저 싸가지라고는 한번도 보인 적 없는 놈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로 휴린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얼굴이 붉어지고, 겉으로는 당황하면서, 입으로는 우물쭈물 어물거리는 종류의 모습을 보면,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휴린, 그만 가자!"
나는 당장 휴린을 안아 들었다. 그 바람에 놈 앞에서 꽃이 흩어져 떨어져버렸다. 휴린이 애써 꺾어온 꽃인데. 안타깝긴 하나, 나는 크게 괘념치 않고 정원을 벗어났다. 휴린 역시 별로 칭얼거리지도 않았다. 꺾어온 꽃은 향기를 맡게 해주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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