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앙... 아아앙... 아앙...”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시간인데 방안은 어느새 뜨거운 열락으로 후끈 달아올라 있다. 어스름한 햇빛이 방안을 비추는 가운데 멀리 두 개의 알몸이 침대 위에서 긴 그림자를 만들며 연신 꿈틀거린다.
퍽... 퍽... 퍽... 퍽...
“헉헉... 허헉... 헉...”
“아아아앙... 하핫... 학... 아앙... 아핫...”
하얀 알몸 위에서 짙은 피부빛의 알몸이 엉덩이를 중심으로 연신 물결치듯 움직인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빠르게 몰아치다 느릿하니 쓰다듬듯 움직이는 것이 마치 하나의 춤인 양 아름답기만 하다. 근육을 따라 흐르던 땀방울이 격렬한 움직임에 허공으로 비산하며 마지막 햇빛을 받아 황금빛을 이루는 것이 몽환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진다.
퍽... 퍽... 퍼퍽... 퍼퍽... 퍼퍼퍽... 퍽... 퍽...
“허허헉... 헉... 헉...”
“아앗... 하하핫... 핫... 하핫... 아아앙... 아아앗... 아앙...”
별개의 생물인 듯 허리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손의 움직임은 현란하기만 하다. 부드럽고 하얀 알몸 위로 두툼한 손가락이 이리저리 헤매일 때마다 붉은 길이 만들어지며 촉촉한 땀이 배어나온다. 어딘가 예민한 곳을 건드릴라 치면 근육질의 등 위로 올려진 하얀 손가락에 힘이 가해지며 짙은 피부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강하게 눌린다.
퍽... 퍽퍽... 퍽... 퍼어억... 퍽... 퍽퍽...
“으음... 음... 음...”
“아앗... 앙... 앙... 또... 또... 아아앙... 아앗... 핫... 아핫...”
절정이 가까온 듯 손의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허리의 움직임이 더욱 강하고 빨라진다. 여자의 피부 또한 더욱 붉어지고 땀구멍이 열리며 진한 땀이 배어나온다. 비릿한 악취, 하지만 욕망을 자극하는 향기가 온 방안에 가득찬다.
“헉... 허헉... 헉..”
“아앙... 아앗... 앗... 하핫...”
다른 모든 동작을 멈춘 채 허리의 움직임에만 전념하고 있는 남자의 몸에서도 짙은 땀냄새가 배어나온다. 허공으로 비산하던 땀방울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떨어져 짙은 얼룩을 만든다. 콧날을 흐르던 땀방울이 크게 방울지어 아래로 떨어지니 여자는 혀를 내밀어 달게 핥아마시며 더욱 몸을 붉힌다.
“허헉!!”
남자의 등이 갑자기 굳어진다. 단단한 근육이 마치 철벽처럼 오므라들며 더욱 진한 땀을 배출한다. 악취와도 같은 남자의 향기가 근육의 굴곡을 따라 흐르는 땀을 통해 강하게 풍겨나오기 시작한다.
“아앙... 앗... 하학...!!”
남자의 등이 굳어짐과 동시에 등을 껴안은 여자의 하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붉어진 살이 하얗게 변한 허벅지가 남자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조인다. 팔이 맞닿은 부위, 허벅지가 조이는 부위로 진한 땀이 내를 이루어 흐르듯 침대위로 떨어진다.
“하아... 하아... 하아...”
두어차례의 떨림이 더 있은 후 남자의 몸이 여자의 위에서 힘없이 떨어진다. 평생 쏟을 힘을 다 쏟은 듯 풀려버린 몸짓으로 대던지듯 침대에 자신을 맡긴다.
“하아... 하아... 카... 칸피니스님...”
남자만큼이나 힘을 쏟은 듯 초점조차 잡히지 않은 눈으로 여자는 겨우 고개를 돌려 옆으로 눕는 남자를 본다. 성인 남자만큼이나 큰 체구지만 아직은 앳띤 구석이 남아있는 얼굴. 이제 15살 밖에 되지 않은 칸피니스다.
“하아... 하아... 오늘... 하아... 따라... 너무... 너무 좋았어. 마리사... 하아... 오늘따라... 하아... 더욱 열정적이던데?”
“하아... 하... 그... 그거야... 하아... 칸피니스... 님이... 하아... 오늘따라... 너무... 하하... 힘이 넘치시니까...”
칸피니스의 말이 칭찬으로 들리는 지 마리사라 불리운 여자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짓는다. 미인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외모지만 쾌락에 들떠 상기된 얼굴로 얼굴을 붉힌 채 미소를 지으니 어느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미인으로 보인다.
칸피니스는 그녀의 미소띈 얼굴에 마주 미소지어주며 그녀의 눈썹에 살짝 키스한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이 입술을 간질이는 것이 또다른 색정을 느끼게 한다.
“하아아... 오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음?”
“다른 때보다 힘이 넘치시길래.”
여자의 직감은 때때로 사실보다 무섭다. 언제나 가장 정확한 핵심을 무의식 중에 찔러오곤 한다. 다른 남자가 이런 말을 침대에서 들었다면 얼마나 가슴철렁하겠는가? 하지만 칸피니스는 흔하디흔한 시정의 남자가 아니다. 이 시대 유일의 진정한 색마다.
“으음... 뭐 욕구불만이 조금...”
“에엑?”
칸피니스의 말에 여자는 예상 이상으로 놀란다. 욕구불만을 일으킨 대상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칸피니스가 욕구불만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놀라움이다.
“카... 칸피니스님이 욕구불만이라구요?”
“응.”
“저질색마에 여자만 보면 앞뒤를 안가리는, 마음먹은 여자는 그날 안에 옷을 벗기고야 마는 공전절후의 남자 칸피니스님이요?”
“응.”
“하루에 열 번 이상 섹스를 하지 않으면 땀대신 넘쳐자는 정액이 땀구멍으로 흐르고, 하루에 두 명 이상의 다른 여자를 상대하지 않으면 자지가 항문으로 기어들어간다는 그 칸피니스님이요?”
“응.”
대답해놓고 나니 마지막 말이 뭔가 이상하다. 칸피니스는 가만히 마리사를 노려본다.
“잠깐!”
“에?”
“마지막 말 무슨 뜻이야?”
“에? 아~ 그거요?”
다른 귀족이라면 귀족모독죄를 걱정해야 할 처지지만 마리사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귀족의 전담 시녀처럼 귀족의 딸이어서가 아니다. 아니 그녀는 평민조차 아니다. 그저 재수가 좋아 성에 들어오게 된 농노의 딸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칸피니스를 대하는 그녀의 표정엔 조금의 두려움이나 거리낌도 보이지 않는다.
“헤헤헤헤...”
“웃지 말고 말해봐.”
“화나셨어요?”
“응.”
“화나셨구나?”
“화났다니까!”
“에이잉~~”
“왜?”
“칭찬인데... 그만큼 정력이 넘친다는... 온몸이 정력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고, 여자를 꼬시는 능력이 절륜하다는...”
“정말?”
그녀가 칸피니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조금의 칭찬에도 헤벌죽 웃어버리는 그의 성격을 아는 때문이다. 평민이든 농노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칸피니스는 모든 여자에게 관대하다. 화가 났다가도 조금만 좋은 말을 해주면 금방 입을 벌리고 바보처럼 웃는다.
“헤헤헤... 알아보는구나. 나야말로 살아있는 정력, 인간섹스머신이지.”
지금처럼 말이다. 저렇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하녀들 사이에서 델킨피에르가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꼽히는 칸피니스 같지 않다. 왠지 몸을 던지고 싶어지는 그 위험한 매력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면 왠지 힘이 빠지는 듯하다.
“예에... 그런 칭찬의 뜻을 담아서 하녀들끼리 하는 말이에요. 칸피니스님과 섹스한 경험이 있는 하녀들끼리...”
“이런이런... 큰일이로군.”
“예?”
“나한테 그렇게 깊이 빠져서야 시집가기 힘들지 않겠어? 나한테 눈높이를 맞추면 어디 마음에 차는 남자가 나오겠냐구? 억지로 시집가봐야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할 게 분명해. 아아... 그럴까봐 그렇게 걱정하며 일부러 깊이 빠지지 않도록 노력했건만... 진정 이게 잘난 남자의 괴로운 숙명이란 말인가?”
“에?”
이런 점만 없으면 정말 멋진 남자다. 보기에도 잘생기고 덩치도 좋은데다 이렇게 밤일도 잘한다. 가문에서의 위치가 조금 미묘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귀족이고 영주의 아들이다. 혼혈이든 뭐든 일단 귀족인 이상 그녀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 다른 하녀들에게 듣자하니 검술도 뛰어나고 읽은 책도 많다. 신분이나 성별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평등히 대해주는 그의 태도는 그저 고맙고 감격스러울 뿐이다.
하긴 이런 모습도 익숙해지고 나니 귀엽게 여겨진다.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꼴불견일 수도 있지만 그는 그만한 자격이 있지 않은가? 델킨피에르 영지가 그녀가 아는 세상의 전부이긴 하지만 영지 어디에도 칸피니스만한 남자는 없다. 설사 델킨피에르 자작이라 할지라도 칸피니스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다. 이만한 남자가 저정도 잘난체 하는 정도야 귀엽게 애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머, 칸피니스님 말처럼 너무 깊이 빠져버린 모양이네?’
마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상념에 스스로가 먼저 놀라버린다. 다른 남자라면 용납지 못할 추태조차도 귀엽게 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때문이다. 한 남자를 다른 남자와 다른 기준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라면 지금의 감정은 분명 사랑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깨달음과는 달리 마리사는 너무 평온하기만 하다. 어차피 농노에 불과한 신분에 사랑으로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른들끼리의 인맥에 의해, 혹은 귀족의 필요에 의해 그 상대가 정해지고 그 정해진 삶에 순응하면 그 뿐이다. 그것이 농노의 삶이고 여자의 삶이다. 칸피니스란 존재는 그 삶의 작은 변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별다른 동요 없이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걱정되요?”
“그럼그럼, 나 때문에 시집도 못간다는데 걱정되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칠 정도로 잘났다는 것도 그리 마음 편한 건 아니거든.”
진심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나 그런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나 상식을 벗어난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 위에 농노가 귀족의 아들을 사랑하는 일이 더해진들 어떻겠는가? 더구나 이미 정부나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는데 말이다.
“그럼 다 데리고 살면 되잖아요. 어차피 나이 먹으면 정력도 더 강해질테니 우리 정도 데리고 사는 건 일도 아니지 않겠어요?”
“그럴까?”
마리사는 장난삼아 한 말이지만 정작 받아들이는 칸피니스는 장난이 아닌 듯하다. 짧은 대답과는 달리 생각에 잠기는 것이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말 그러시게요?”
“으음... 저기 동쪽의 어느 나라에서는 말야 왕을 위해 하렘이라는 걸 만든다거든?”
“에? 하렘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마리사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빛난다. 더구나 신비에 쌓인 동방의 나라 아닌가?
“그래. 하렘이라고 하는 건 한 명의 왕을 위해서 여자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궁전이야. 오로지 왕의 섹스만을 위한 궁전이라고 할 수 있지.”
“헤에? 정말 그런 곳이 있어요?”
“음. 나도 책으로만 읽은 거라서 진짜 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쪽 나라는 워낙에 지방 귀족의 힘이 강해서 통합이 쉽지 않다고 하더군. 그래서 귀족들에 대한 통제수단으로 그 딸이나 친척의 여자아이들을 데려다가 볼모삼아 하렘에 둔다는거야. 그러다가 자식이라도 낳으면 왕의 자식으로서 왕위계승권을 갖고 말이지.”
“와아... 그럼 자작님이 황도에서 제국기사단으로 복무하는 것과 같은 건가요?”
“대충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거야. 제국기사단 자체도 귀족들을 얽어매기 위한 조직이니까. 별다른 강제력은 없다 하더라도 일단 제국기사단에 소속되고 또 거기서 서열이 매겨진다는 것만 하더라도 무의식중에 꽤 구속이 되거든?”
“아아... 그대신 딸을 인질로 보낸다?”
“그렇지. 잘 하면 자식이 태어나 후계자경쟁에 뛰어들 수도 있으니 지방귀족들 입장에서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지. 어차피 딸이란 정략결혼의 도구로 쓰일 뿐이니까. 뭐 그쪽 나라에서는 아예 물건처럼 주고받기도 한다고 하지만...”
“헤에... 그런 점에서 전 다행인가요? 그래도 천한 것이라며 멸시는 당하더라도 물건취급은 당하지 않으니까?”
생전 처음 듣는 동쪽나라 이야기에 마리사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듣는 데 열심이다. 동쪽나라의 문물과 자신이 사는 세계의 그것과 여러 가지로 열심히 비교해보는 것이 꽤나 흥미로운 모양이다.
“신기해?”
“에?”
“동쪽 나라의 이야기가 신기하냐구.”
“아아... 예.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그냥 동쪽에 신기한 나라가 있다는 말만 들었거든요.”
“그래?”
“예.”
“흐음... 관심 있으면 책이라도 갖다줄까?”
“예? 책요?”
“그래.”
책을 갖다준다는 말에 마리사는 일순 기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시무룩하니 얼굴을 좌우로 쓸어내린다. 책을 받아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글을 읽지 못하는걸요.”
“그래도 하녀장에게 간단한 글쓰기는 배우잖아?”
“하지만 간단한 글쓰기 정도라구요. 제국의 책은 모두 고왕국의 고어로 쓰여져 있잖아요. 어차피 같은 글자로 쓰여져 있으니 읽는 것 정도야 가능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구요.”
“그런가?”
“예.”
하긴 어느 시대나 귀족이라는 인종들은 정보를 독점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왔다. 문자를 독점하고, 언어를 독점하고, 어휘를 독점하고, 개념을 독점하는 방법을 통해서 지식과 정보를 오로지 귀족들만이 생산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강제했다. 평민들은 귀족들이 만드는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고 복종하기만 하면 되도록 말이다. 제국시대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엄연히 제국표준어가 제정되었음에도 귀족들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이미 망한 지 1200년 이상 지난 고왕국의 말을 사교어라며 그들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평민들과는 다른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하고, 자신들의 논의가 평민들에게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니 귀족이 주로 소비하는 책들도 고왕국어로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칸피니스만 하더라도 워낙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고왕국어를 배우는 바람에 익숙해져있어 자각하지 못할 뿐이지 그가 읽는 책들 대부분은 고왕국어로 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각해보면 고왕국시대에 없었던 개념들마저도 고왕국어로 번역해서 책으로 만들어내는 그 노력이 가상할 정도다.
그런 사정을 떠올린 칸피니스는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마리사를 향해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괜한 생색 내려다가 오히려 아픈 데만 건드렸으니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미안하네. 그런 것도 모르고...”
“괜찮아요. 마음만으로도 충분한걸요? 누가 저같은 농노출신 하녀에게 책을 읽으라고 갖다주겠어요?”
“나!”
마리사의 자조섞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분위기를 깨버리는 유쾌한 목소리가 짧고 단호하게 들려온다.
“에?”
“나 있잖아, 나! 내가 읽으라고 갖다주잖아!”
“에에...”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칸피니스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긍정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강하게 보내오고 있다. 저러고 싶은가 여겨질 정도로 집요하고 진지한 표정이다.
“풋...”
“왜? 왜웃어?”
“그럼 저도 고왕국어 가르쳐주세요. 갖다 주면 읽을 수 있게.”
“에?”
고왕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하니 칸피니스의 안색이 변한다. 역시나 귀족어인 고왕국어를 농노가 배운다는 것이 불쾌하게 여겨진 것일까? 다른 귀족들처럼 불경이나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리사는 칸피니스조차도 다른 귀족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절망어린 한숨을 조용히 내쉰다.
하지만 마리사의 짐작은 엉뚱한 곳을 짚고 있을 뿐이다.
“저... 저기... 그거 가르치는 거 굉장히 귀찮거든? 읽고 쓰는 거야 어떻게 대충 하겠는데, 가르치는 건 정말 귀찮단 말야.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냥 보면 알아. 하지만 남이 보면 알게 만들려면 아주아주 번거롭고 어려운 작업이 필요하단 말야. 이해하겠어? 음... 적절치 못한가? 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러니까 싫다는 게 아니라...”
“풋...”
이런 성격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귀찮은 일은 질색하고, 괜히 손 많이 가고 시간 많이 걸리는 일은 아예 말아버리는 성격이라는 것을 잠시 생각지 못했다. 하긴 그런 상황에서 그가 이런 이유로 얼굴을 굳혔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아니 그게 다 천재의 비애거든? 나는 할 줄 아는데 남이 왜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거야. 이정도면 되는데, 대충 이정도 설명해주면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왜 못하는지? 왜 나처럼 안되는지 끔찍한 생각까지 드는거지. 이해하겠어?”
“예에...”
더구나 농노 출신에 불과한 하녀에게도 이리 약한 모습이라니. 델킨피에르 영지의 영주이자 델킨피에르 가문의 주인인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 자작조차도 우습게 여기는 오만한 성격의 그가 고작 자신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보기 싫지는 않다. 왠지 자기 남자라는 생각이 드는 때문이다.
“으음... 이런 어떨까? 내가 고왕국어로 쓰여진 책을 제국표준어로 번역해서 써줄게. 그러니까 고왕국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네가 알고 있는 제국표준어로 내가 따로 책을 써주는거야. 어때? 괜찮겠어?”
“에? 저... 정말요?”
가끔 이렇게 분에 넘치는 친절을 베푸는 모습은 정말 곤란하다. 진심으로 칸피니스를 자신의 남자라 착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이가 되면 아무 남자나 소개받아 결혼해야 할 자신이다. 칸피니스 따위는 그 인생의 한 부분에 작은 추억에 불과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그러기가 쉽지 않아진다. 정말 곤란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곤란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 칸피니스는 더더욱 안절부절하며 무언가 해주려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남자로 있는 건 이렇게 알몸으로 서로 부대낄 때 뿐이면 족하다. 너무 큰 친절은 오히려 부담스럽다.
“다른 아이들도 책 읽는 걸 좋아할까?”
“예?”
“그냥 다른 아이들도 책 읽는 걸 좋아하면 네게 책을 번역해주는 겸 해서 같이 읽게 하려고...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아... 예...”
“싫어하려나? 공부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아... 아니에요. 싫긴요?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람들에게나 싫고 말고가 있는 거에요. 그런 기회도 없이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그 기회만으로도 감지덕지인걸요. 모두들 좋아할 거에요.”
“그래? 다행이다. 필요한 분야의 책이 있으면 내게 얘기해놔. 그럼 내가 책 읽는 김에 대충 번역해서 줄테니까. 우선 마리사에게 주기로 한 동쪽 나라에 대한 책을 번역해 주도록 하지. 어때?”
“고... 고마워요. 정말...”
어이가 없다면 어이가 없다. 개념이 없다고 하면 개념이 없다. 어찌 농노의 딸에게, 그것도 하녀에게 직접 책을 번역해가면서까지 읽히려 한단 말인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철학이나 이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남녀평등이라든가 신분제도 타파의 신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귀족의 자식이 그런 데에 빠져 괜한 하녀나 하인들에게 바람을 넣는 건 늘상 있어왔던 일이니까. 나중에 가문을 이어받은 후 바람이었을 뿐임을 확인해줌으로서 낮은 신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절망하고 더욱 무기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곤 했으니까.
하지만 칸피니스가 하녀들에게 잘해주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오로지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여자를 좋아하는 성격에 여자들이 좋아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리도 친절한 것이다. 어찌보면 그야 말로 진정으로 신분제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여자라면 거지든, 노예든, 귀족이든 구분을 두지 않고 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마리사가 좋으면 됐어. 다른 하녀들도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모두 좋아할거에요. 일단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더구나...”
“더구나 뭐?”
“칸피니스님이 직접 번역해주신다 하시니... 아마 많은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라도 열심히 책을 읽으려 할거에요.”
“그래?”
여자들이 좋아할거라는 것보다 그에게 좋은 칭찬은 없다. 여자들이 기뻐할 거라는 말보다 그를 기쁘게 하는 말 또한 없다. 지금도 여자들이 좋아한다 말하니 입이 좌악 벌어진다. 저러다 턱이라도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험험. 역시 이몸의 인기 덕분이겠지?”
“예...”
“흐흣... 아아... 난 정말 잘났단 말야? 세상에 나같은 남자가 또 있을까? 그렇게 생각지 않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가 가장 정확하다는데 여자의 눈으로 평가했을 때 나만한 남자가 또 있을 거라 생각해?”
“아아... 괴로워요.”
“응? 왜?”
“칸피니스님을 곁에서 보다가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할 생각을 하니... 아아... 벌써부터 절망이... 어찌 그런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흑흑... 모두 칸피니스님 때문이에요. 내가 불행해지면 모두 칸피니스님이 너무 뛰어나신 때문이에요. 책임져요.”
“그래그래, 내가 그 심정 안다. 이해해. 어쩌겠니? 내가 너무 잘난 죄인걸.”
“흑흑... 칸피니스님...”
장난삼아 장단을 맞춰주고 있지만 칸피니스는 너무 진지하다. 괜히 장난으로 시작한 사람이 머쓱해질 정도다.
“걱정마라. 내가 모두 책임질테니까.”
“책임?”
“그래.”
“어떻게?”
“아까 말했지? 동쪽 나라의 하렘이라고.”
“예.”
“그러니까 하렘을 만드는 거야. 나의 하렘을. 그리고 그 하렘에 너희들을 들이는 거지. 나의 매력에 빠져 불행한 인생을 보낼 지도 모르는 가여운 여자들을 나의 하렘으로 초대해 구원해주는거야. 어때? 멋진 계획이지 않아?”
“에?”
농담이라기에는 너무 진지하다. 아마도 진심으로 저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일부일처제가 수백년 이상 내려온 제국인으로서는 도무지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아무리 칸피니스가 좋기로서니 그의 하렘에서 수많은 여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생을 지내라니 사양하고 싶다.
“좋은 생각이잖아? 안그래?”
“예? 예...”
하지만 그렇다고 싫은 티를 노골적으로 내는 것도 곤란하다. 저리 좋아하는데 찬물 끼얹으면 괜히 미안해지지 않겠는가? 지금은 대충 맞장구쳐주며 같이 즐기다가 나중에 진짜 하렘을 만들면 결혼상대가 있어 곤란하다며 조용히 빠져나오면 된다. 괜히 지금부터 칸피니스의 생각을 거스를 필요는 없다.
“그래. 음... 역시 이 부분에 대한 예산도 세워야겠어.”
“예?”
“그러니까 나한테는 세력이라는 게 없잖아. 기사단도 없고, 병사들도 없고.”
“그... 그건...”
“솔직히 말해도 돼. 어차피 사실이니까. 모두 알고 있잖아? 이 성에서 나라는 존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마 너희들이라면 더 잘 알고 있을걸?”
“그... 그렇지만...”
“어쨌든 이대로 세력 없이 있다가는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 수 있을거야. 아무리 내가 강하다지만 델킨피에르가의 기사 전부와 병사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는 거니까. 어쨌든 내 세력을 키워야 한단 말이거든?”
“아...”
이제 대충 칸피니스가 하려는 말이 이해가 가려 한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칸피니스의 생각을 따라잡은 것 같은데 마음이 동의해주지 않는다. 너무나도 파격적인 생각라서 그런 것일까?
“너도 대충 감을 잡은 모양이구나. 맞아. 너희들을 나의 하렘으로 맞아들인 후 거기서 검술과 다양한 지식을 쌓도록 하는거야. 물론 교관은 나고. 내가 직접 검술을 가르치고, 다양한 지식들을 너희에게 가르치는 거지. 그렇게 너희를 나만의 기사단으로 만드는 거야. 제국 최초의 여자기사단으로.”
“아...”
정말 난 사람은 난 사람이다. 어쩌면 저런 발상을 저리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자신과 정을 통하던 하녀들을, 그것도 귀족도 아닌 평민과 농노출신의 여자들을 데려다 직접 가르쳐 기사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칸피니스 외에 그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제국 역사상 이같은 발상을 한 인간은 칸피니스가 유일할 것이다.
“마리사도 기사가 되는거야. 나의 기사가. 제복을 입고, 검을 차고, 내 주위에서 나의 적들을 향해 검을 겨누는 나만의 기사가 되는거쟈. 어때? 괜찮지 않아?”
“예? 예에...”
너무 거창하고 황당한 계획이라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이 기사의 제복을 입고 검을 든 모습이라니! 아예 상상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리도 꿈과 희망으로 반짝이는 얼굴을 그늘로 뒤덮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동의하는 척 해주는 수밖에.
“좋았어. 한 오 년 있으면 나도 나만의 기사단을 갖게 되는것인가? 누구도 알 수 없는 몸으로 연결된 한 가족과도 같은 기사단 말야.”
“예? 예...”
“얼마나 좋아? 남자로 구성된 기사단은 밤에는 따로 자야하지만 여자기사라면 밤에도 항상 옆에서 지켜줄 수 있잖아. 때로는 두 명씩, 때로는 세 명씩. 많으면 다섯명이든 여섯명이든 정력 되는대로 옆에 불러다 같이 잘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암살자 따위 괜히 와봐야 알몸의 다구리 속에 비명도 못지르고 죽어갈 뿐이지.”
“아... 그렇겠네요.”
순수한 감탄이 절로 새어나온다. 그런 깊은 뜻이 있을 줄은 그녀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자신의 감탄을 깊이 후회하게 된다. 그로인해 칸피니스의 자화자찬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아... 난 왜 이리 머리도 좋을 것일까? 생기기를 잘생겼으면 몸매라도 빠지던가, 몸매가 잘났으면 검술이라도 약하던가, 검술을 잘하면 정력이라도 떨어지던가, 정력이 강하면 기술이 부족하던가, 기술이 뛰어나면 하다못해 머리라도 나빠야 하는 것 아니겠어? 도대체 나의 약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자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 것.’
마리사는 이 말을 꼬옥 한 번 크게 소리내어 외쳐보고 싶다. 저리도 자기도취에 빠져 헤어나올 줄 모르는 여자만 보면 바보가 되는 남자에게 그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혀보고 싶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참는다. 바보에게 바보라고 하는 것처럼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냥 바보는 바보로 두는 것이 지금 당장에나 앞으로나 가장 편한 길이다.
“아아... 한 가지 있다. 나의 약점이. 너무도 중대한 약점이 있었어.”
“...?”
“너무 완벽하다는 것. 너무 완벽해서 결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나의 약점이었던거야. 생각해봐. 너무 뛰어난 남자는 남자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지. 여자들은 그 완벽함 때문에 지레 겁먹고 다가서지 못하고 말야. 그런 점에서 너무 잘난 남자는 불행하다 할 수 있어. 동성이나 이성이나 모두 그를 배척할테니까.”
‘하지만 칸피니스님이 어려워 다가서지 못하는 여자는 없는 것 같은데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해서는 안될 말이 대부분이다. 저리도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모습에 감히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경건함이 그녀를 강제한 때문이다. 그 경건함은 말한다. 바보는 바보로 내버려두라고.
“너무도 완벽한 그 자체가 죄악인 나. 그 완벽함이 지나쳐 그 죄가 하늘에 닿았으니 그 죄를 씻기 위해서도 그 완벽함을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 다른 이란 누구인가? 나의 매력을 알아봐줄 남자의 가치를 가장 정확히 판단하는 여자들이다. 나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는 여자들이다. 나의 인생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여자들이 나로 인해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바쳐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의미요 내가 완벽한 사명일 것이다. 아아... 이토록 무거운 삶이라니... 아아... 그것은 그 사명의 무게 때문일 지어다...”
칸피니스의 자아도취증은 한 번 시작하면 끝날 줄 모른다. 델킨피에르 자작이나 그의 모친인 수파니의 에르핀이나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그런 지 알 수가 없다. 하다못해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을 찾으려 해도 불가능하다. 델킨피에르 영지 최악의 비상식인도 칸피니스보다는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들어주어야 하는거지?’
현재 칸피니스의 유일한 연인이라 할 수 있는 히리스조차도 칸피니스의 자화자찬을 끝까지 들어주는 건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경우 칸피니스의 자화자찬은 히리스의 주먹이나 발에 의해 강제로 끝맺게 된다. 하물며 보다 느슨한 관계인 마리사가 견뎌낼 수 있을 리 없다. 처음에는 조금 재미있다 싶던 것이 어느새 고문과도 같이 이어진다.
똑똑--!!
그녀의 마음을 알아서일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마리사의 표정이 밝게 펴지는 것과 동시에 칸피니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 지겨운 자화자찬이 드디어 끝나고야 만다. 마리사의 입가가 옆으로 위로 한없이 늘어나더니 어느새 귓가에 흐뭇하니 걸린다.
“누구야?”
“저... 린네인데요...”
“린네?”
린네라면 칸피니스의 모친인 에렌프 수파니를 전담하는 하녀다. 머리가 영민한데다 체격도 탄탄해 특별히 거동이 불편한 에렌프를 위해 프란츠가 붙여준 하녀다. 물론 출신은 마리사와 같은 농노 출신이다. 남별저에는 기본적으로 평민 하녀도 거의 없으니 여기서 일하는 하녀들은 대부분 마리사나 린네와 같은 신분이라 할 수 있다.
“무슨 일이야?”
“마님께서 칸피니스님을 찾으십니다.”
“어머니께서?”
“예.”
“이 늦은 시간에 왜?”
“이유는...”
“말하기 곤란한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알았다.”
대충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칸피니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다.
“마님께서 부르시는 건...?”
“아아...”
마리사의 물음도 제대로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저 건성으로 대충 대꾸하는 듯한 모습이다. 여전히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은 더욱 어두워져만 가고 있다.
“아마도 네가 짐작하는 그게 맞을거야.”
“아...!”
칸피니스의 한 마디로 마리사도 칸피니스와 비슷한 곤혹스러운 표정이 된다. 다만 다른 것은 당사자가 아니다보니 칸피니스와 같은 짙은 그늘은 없다는 것이다. 말하기 곤란한, 말해서는 안되는 사실을 아는 이의 답답함과도 같은 모습이다.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 까?”
“그... 그건 저도...”
“그래? 뭐 가보면 알겠지.”
“예에...”
“지금 출발할 테니까 네가 준비좀 도와줘.”
“알겠습니다.”
침대에서는 정부지만 침대에서 벗어나면 주인과 하녀의 관계다. 마리사는 칸피니스의 지시에 따라 침대에서 내려오며 충실한 하녀로서의 모습을 되찾는다. 미처 자기 옷을 갖추입을 여유도 없이 칸피니스의 옷을 찾아 정성스런 손길로 그가 옷을 입는 것을 돕기 시작한다.
“휴우... 이게 다 그 개새끼 때문이야.”
움찔, 옷을 갈아입히던 마리사의 손이 움츠러든다. 칸피니스의 욕설에 실린 살기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손은 언제나처럼 빠르고 영활하게 칸피니스의 몸을 그의 옷으로 덮어간다. 워낙에 자주 들어온 욕설이고 살기이기에 이미 익숙하게 적응한 때문이다.
“썩을 새끼. 반드시 그 새끼는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만다! 프란츠 델킨피에르!”
마지막 단추를 채우는 마리사의 손길 위로 마치 씹어뱉듯 토해내는 살기어린 욕설이 스치듯 흘러간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도 식지 않는 증오와 분노가 차갑게 끓어오르는 살기가 그녀의 희고 매끈한 살결 위로 미끄러지며 방안으로 서서히 퍼져나간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와는 너무나도 안어울리는 차갑고 뜨거운 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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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쓰기의 약점은 지나치게 상황묘사가 디테일하다는 것입니다. 일일이 세세하게 묘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다채로움을 표현하느라 직설적이고 간결한 흐름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장난과 같은 대사를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만 필요 이상으로 글이 길어지고 늘어지는 약점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 점이 불만이면서도 고칠 수 없는 건 역시 이런 글쓰기가 저에게 맞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칸피니스는 천재입니다. 인간을 뛰어넘는 육체적 능력과 지적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천재입니다. 그의 낙천적인 성격은 모든 일을 쉽게 해낼 수 있는 능력에서 기인합니다. 그의 자기도취적인 모습은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여자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것은 그러한 능력으로 인한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함입니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다른 누군가와 깊이 맺어짐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칸피니스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물론 믿든 말든 읽는 분 마음입니다만...
오늘 올라간 내용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색마검천황의 중요 설정 가운데 하나였던 델킨피에르성의 하렘의 탄생배경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이 단계까지는 칸피니스도 장난반으로 구상한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 하렘이 만들어지는 건 칸피니스가 진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계획하면서부터입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여자 끌어들어기기 시작됩니다. 그때쯤 되면 매회마다 여자들 이야기 쓰느라 솔로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버리겠죠.
다음회예고>> 구속이자 또한 존재의미인 어머니. 항상 그의 안식처가 되어주지만 그 안식처가 어느새 자신을 옭아매는 덫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과연 무엇때문일까? 증오의 대상인가? 아니면 연민의 대상인가? 그도 아니라면...?
요즘은 대충 본편과 예고편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네요.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시간인데 방안은 어느새 뜨거운 열락으로 후끈 달아올라 있다. 어스름한 햇빛이 방안을 비추는 가운데 멀리 두 개의 알몸이 침대 위에서 긴 그림자를 만들며 연신 꿈틀거린다.
퍽... 퍽... 퍽... 퍽...
“헉헉... 허헉... 헉...”
“아아아앙... 하핫... 학... 아앙... 아핫...”
하얀 알몸 위에서 짙은 피부빛의 알몸이 엉덩이를 중심으로 연신 물결치듯 움직인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빠르게 몰아치다 느릿하니 쓰다듬듯 움직이는 것이 마치 하나의 춤인 양 아름답기만 하다. 근육을 따라 흐르던 땀방울이 격렬한 움직임에 허공으로 비산하며 마지막 햇빛을 받아 황금빛을 이루는 것이 몽환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진다.
퍽... 퍽... 퍼퍽... 퍼퍽... 퍼퍼퍽... 퍽... 퍽...
“허허헉... 헉... 헉...”
“아앗... 하하핫... 핫... 하핫... 아아앙... 아아앗... 아앙...”
별개의 생물인 듯 허리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손의 움직임은 현란하기만 하다. 부드럽고 하얀 알몸 위로 두툼한 손가락이 이리저리 헤매일 때마다 붉은 길이 만들어지며 촉촉한 땀이 배어나온다. 어딘가 예민한 곳을 건드릴라 치면 근육질의 등 위로 올려진 하얀 손가락에 힘이 가해지며 짙은 피부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강하게 눌린다.
퍽... 퍽퍽... 퍽... 퍼어억... 퍽... 퍽퍽...
“으음... 음... 음...”
“아앗... 앙... 앙... 또... 또... 아아앙... 아앗... 핫... 아핫...”
절정이 가까온 듯 손의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허리의 움직임이 더욱 강하고 빨라진다. 여자의 피부 또한 더욱 붉어지고 땀구멍이 열리며 진한 땀이 배어나온다. 비릿한 악취, 하지만 욕망을 자극하는 향기가 온 방안에 가득찬다.
“헉... 허헉... 헉..”
“아앙... 아앗... 앗... 하핫...”
다른 모든 동작을 멈춘 채 허리의 움직임에만 전념하고 있는 남자의 몸에서도 짙은 땀냄새가 배어나온다. 허공으로 비산하던 땀방울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떨어져 짙은 얼룩을 만든다. 콧날을 흐르던 땀방울이 크게 방울지어 아래로 떨어지니 여자는 혀를 내밀어 달게 핥아마시며 더욱 몸을 붉힌다.
“허헉!!”
남자의 등이 갑자기 굳어진다. 단단한 근육이 마치 철벽처럼 오므라들며 더욱 진한 땀을 배출한다. 악취와도 같은 남자의 향기가 근육의 굴곡을 따라 흐르는 땀을 통해 강하게 풍겨나오기 시작한다.
“아앙... 앗... 하학...!!”
남자의 등이 굳어짐과 동시에 등을 껴안은 여자의 하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붉어진 살이 하얗게 변한 허벅지가 남자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조인다. 팔이 맞닿은 부위, 허벅지가 조이는 부위로 진한 땀이 내를 이루어 흐르듯 침대위로 떨어진다.
“하아... 하아... 하아...”
두어차례의 떨림이 더 있은 후 남자의 몸이 여자의 위에서 힘없이 떨어진다. 평생 쏟을 힘을 다 쏟은 듯 풀려버린 몸짓으로 대던지듯 침대에 자신을 맡긴다.
“하아... 하아... 카... 칸피니스님...”
남자만큼이나 힘을 쏟은 듯 초점조차 잡히지 않은 눈으로 여자는 겨우 고개를 돌려 옆으로 눕는 남자를 본다. 성인 남자만큼이나 큰 체구지만 아직은 앳띤 구석이 남아있는 얼굴. 이제 15살 밖에 되지 않은 칸피니스다.
“하아... 하아... 오늘... 하아... 따라... 너무... 너무 좋았어. 마리사... 하아... 오늘따라... 하아... 더욱 열정적이던데?”
“하아... 하... 그... 그거야... 하아... 칸피니스... 님이... 하아... 오늘따라... 너무... 하하... 힘이 넘치시니까...”
칸피니스의 말이 칭찬으로 들리는 지 마리사라 불리운 여자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짓는다. 미인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외모지만 쾌락에 들떠 상기된 얼굴로 얼굴을 붉힌 채 미소를 지으니 어느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미인으로 보인다.
칸피니스는 그녀의 미소띈 얼굴에 마주 미소지어주며 그녀의 눈썹에 살짝 키스한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이 입술을 간질이는 것이 또다른 색정을 느끼게 한다.
“하아아... 오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음?”
“다른 때보다 힘이 넘치시길래.”
여자의 직감은 때때로 사실보다 무섭다. 언제나 가장 정확한 핵심을 무의식 중에 찔러오곤 한다. 다른 남자가 이런 말을 침대에서 들었다면 얼마나 가슴철렁하겠는가? 하지만 칸피니스는 흔하디흔한 시정의 남자가 아니다. 이 시대 유일의 진정한 색마다.
“으음... 뭐 욕구불만이 조금...”
“에엑?”
칸피니스의 말에 여자는 예상 이상으로 놀란다. 욕구불만을 일으킨 대상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칸피니스가 욕구불만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놀라움이다.
“카... 칸피니스님이 욕구불만이라구요?”
“응.”
“저질색마에 여자만 보면 앞뒤를 안가리는, 마음먹은 여자는 그날 안에 옷을 벗기고야 마는 공전절후의 남자 칸피니스님이요?”
“응.”
“하루에 열 번 이상 섹스를 하지 않으면 땀대신 넘쳐자는 정액이 땀구멍으로 흐르고, 하루에 두 명 이상의 다른 여자를 상대하지 않으면 자지가 항문으로 기어들어간다는 그 칸피니스님이요?”
“응.”
대답해놓고 나니 마지막 말이 뭔가 이상하다. 칸피니스는 가만히 마리사를 노려본다.
“잠깐!”
“에?”
“마지막 말 무슨 뜻이야?”
“에? 아~ 그거요?”
다른 귀족이라면 귀족모독죄를 걱정해야 할 처지지만 마리사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귀족의 전담 시녀처럼 귀족의 딸이어서가 아니다. 아니 그녀는 평민조차 아니다. 그저 재수가 좋아 성에 들어오게 된 농노의 딸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칸피니스를 대하는 그녀의 표정엔 조금의 두려움이나 거리낌도 보이지 않는다.
“헤헤헤헤...”
“웃지 말고 말해봐.”
“화나셨어요?”
“응.”
“화나셨구나?”
“화났다니까!”
“에이잉~~”
“왜?”
“칭찬인데... 그만큼 정력이 넘친다는... 온몸이 정력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고, 여자를 꼬시는 능력이 절륜하다는...”
“정말?”
그녀가 칸피니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조금의 칭찬에도 헤벌죽 웃어버리는 그의 성격을 아는 때문이다. 평민이든 농노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칸피니스는 모든 여자에게 관대하다. 화가 났다가도 조금만 좋은 말을 해주면 금방 입을 벌리고 바보처럼 웃는다.
“헤헤헤... 알아보는구나. 나야말로 살아있는 정력, 인간섹스머신이지.”
지금처럼 말이다. 저렇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하녀들 사이에서 델킨피에르가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꼽히는 칸피니스 같지 않다. 왠지 몸을 던지고 싶어지는 그 위험한 매력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면 왠지 힘이 빠지는 듯하다.
“예에... 그런 칭찬의 뜻을 담아서 하녀들끼리 하는 말이에요. 칸피니스님과 섹스한 경험이 있는 하녀들끼리...”
“이런이런... 큰일이로군.”
“예?”
“나한테 그렇게 깊이 빠져서야 시집가기 힘들지 않겠어? 나한테 눈높이를 맞추면 어디 마음에 차는 남자가 나오겠냐구? 억지로 시집가봐야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할 게 분명해. 아아... 그럴까봐 그렇게 걱정하며 일부러 깊이 빠지지 않도록 노력했건만... 진정 이게 잘난 남자의 괴로운 숙명이란 말인가?”
“에?”
이런 점만 없으면 정말 멋진 남자다. 보기에도 잘생기고 덩치도 좋은데다 이렇게 밤일도 잘한다. 가문에서의 위치가 조금 미묘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귀족이고 영주의 아들이다. 혼혈이든 뭐든 일단 귀족인 이상 그녀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 다른 하녀들에게 듣자하니 검술도 뛰어나고 읽은 책도 많다. 신분이나 성별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평등히 대해주는 그의 태도는 그저 고맙고 감격스러울 뿐이다.
하긴 이런 모습도 익숙해지고 나니 귀엽게 여겨진다.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꼴불견일 수도 있지만 그는 그만한 자격이 있지 않은가? 델킨피에르 영지가 그녀가 아는 세상의 전부이긴 하지만 영지 어디에도 칸피니스만한 남자는 없다. 설사 델킨피에르 자작이라 할지라도 칸피니스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다. 이만한 남자가 저정도 잘난체 하는 정도야 귀엽게 애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머, 칸피니스님 말처럼 너무 깊이 빠져버린 모양이네?’
마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상념에 스스로가 먼저 놀라버린다. 다른 남자라면 용납지 못할 추태조차도 귀엽게 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때문이다. 한 남자를 다른 남자와 다른 기준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라면 지금의 감정은 분명 사랑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깨달음과는 달리 마리사는 너무 평온하기만 하다. 어차피 농노에 불과한 신분에 사랑으로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른들끼리의 인맥에 의해, 혹은 귀족의 필요에 의해 그 상대가 정해지고 그 정해진 삶에 순응하면 그 뿐이다. 그것이 농노의 삶이고 여자의 삶이다. 칸피니스란 존재는 그 삶의 작은 변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별다른 동요 없이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걱정되요?”
“그럼그럼, 나 때문에 시집도 못간다는데 걱정되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칠 정도로 잘났다는 것도 그리 마음 편한 건 아니거든.”
진심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나 그런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나 상식을 벗어난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 위에 농노가 귀족의 아들을 사랑하는 일이 더해진들 어떻겠는가? 더구나 이미 정부나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는데 말이다.
“그럼 다 데리고 살면 되잖아요. 어차피 나이 먹으면 정력도 더 강해질테니 우리 정도 데리고 사는 건 일도 아니지 않겠어요?”
“그럴까?”
마리사는 장난삼아 한 말이지만 정작 받아들이는 칸피니스는 장난이 아닌 듯하다. 짧은 대답과는 달리 생각에 잠기는 것이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말 그러시게요?”
“으음... 저기 동쪽의 어느 나라에서는 말야 왕을 위해 하렘이라는 걸 만든다거든?”
“에? 하렘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마리사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빛난다. 더구나 신비에 쌓인 동방의 나라 아닌가?
“그래. 하렘이라고 하는 건 한 명의 왕을 위해서 여자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궁전이야. 오로지 왕의 섹스만을 위한 궁전이라고 할 수 있지.”
“헤에? 정말 그런 곳이 있어요?”
“음. 나도 책으로만 읽은 거라서 진짜 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쪽 나라는 워낙에 지방 귀족의 힘이 강해서 통합이 쉽지 않다고 하더군. 그래서 귀족들에 대한 통제수단으로 그 딸이나 친척의 여자아이들을 데려다가 볼모삼아 하렘에 둔다는거야. 그러다가 자식이라도 낳으면 왕의 자식으로서 왕위계승권을 갖고 말이지.”
“와아... 그럼 자작님이 황도에서 제국기사단으로 복무하는 것과 같은 건가요?”
“대충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거야. 제국기사단 자체도 귀족들을 얽어매기 위한 조직이니까. 별다른 강제력은 없다 하더라도 일단 제국기사단에 소속되고 또 거기서 서열이 매겨진다는 것만 하더라도 무의식중에 꽤 구속이 되거든?”
“아아... 그대신 딸을 인질로 보낸다?”
“그렇지. 잘 하면 자식이 태어나 후계자경쟁에 뛰어들 수도 있으니 지방귀족들 입장에서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지. 어차피 딸이란 정략결혼의 도구로 쓰일 뿐이니까. 뭐 그쪽 나라에서는 아예 물건처럼 주고받기도 한다고 하지만...”
“헤에... 그런 점에서 전 다행인가요? 그래도 천한 것이라며 멸시는 당하더라도 물건취급은 당하지 않으니까?”
생전 처음 듣는 동쪽나라 이야기에 마리사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듣는 데 열심이다. 동쪽나라의 문물과 자신이 사는 세계의 그것과 여러 가지로 열심히 비교해보는 것이 꽤나 흥미로운 모양이다.
“신기해?”
“에?”
“동쪽 나라의 이야기가 신기하냐구.”
“아아... 예.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그냥 동쪽에 신기한 나라가 있다는 말만 들었거든요.”
“그래?”
“예.”
“흐음... 관심 있으면 책이라도 갖다줄까?”
“예? 책요?”
“그래.”
책을 갖다준다는 말에 마리사는 일순 기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시무룩하니 얼굴을 좌우로 쓸어내린다. 책을 받아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글을 읽지 못하는걸요.”
“그래도 하녀장에게 간단한 글쓰기는 배우잖아?”
“하지만 간단한 글쓰기 정도라구요. 제국의 책은 모두 고왕국의 고어로 쓰여져 있잖아요. 어차피 같은 글자로 쓰여져 있으니 읽는 것 정도야 가능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구요.”
“그런가?”
“예.”
하긴 어느 시대나 귀족이라는 인종들은 정보를 독점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왔다. 문자를 독점하고, 언어를 독점하고, 어휘를 독점하고, 개념을 독점하는 방법을 통해서 지식과 정보를 오로지 귀족들만이 생산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강제했다. 평민들은 귀족들이 만드는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고 복종하기만 하면 되도록 말이다. 제국시대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엄연히 제국표준어가 제정되었음에도 귀족들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이미 망한 지 1200년 이상 지난 고왕국의 말을 사교어라며 그들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평민들과는 다른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하고, 자신들의 논의가 평민들에게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니 귀족이 주로 소비하는 책들도 고왕국어로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칸피니스만 하더라도 워낙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고왕국어를 배우는 바람에 익숙해져있어 자각하지 못할 뿐이지 그가 읽는 책들 대부분은 고왕국어로 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각해보면 고왕국시대에 없었던 개념들마저도 고왕국어로 번역해서 책으로 만들어내는 그 노력이 가상할 정도다.
그런 사정을 떠올린 칸피니스는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마리사를 향해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괜한 생색 내려다가 오히려 아픈 데만 건드렸으니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미안하네. 그런 것도 모르고...”
“괜찮아요. 마음만으로도 충분한걸요? 누가 저같은 농노출신 하녀에게 책을 읽으라고 갖다주겠어요?”
“나!”
마리사의 자조섞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분위기를 깨버리는 유쾌한 목소리가 짧고 단호하게 들려온다.
“에?”
“나 있잖아, 나! 내가 읽으라고 갖다주잖아!”
“에에...”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칸피니스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긍정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강하게 보내오고 있다. 저러고 싶은가 여겨질 정도로 집요하고 진지한 표정이다.
“풋...”
“왜? 왜웃어?”
“그럼 저도 고왕국어 가르쳐주세요. 갖다 주면 읽을 수 있게.”
“에?”
고왕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하니 칸피니스의 안색이 변한다. 역시나 귀족어인 고왕국어를 농노가 배운다는 것이 불쾌하게 여겨진 것일까? 다른 귀족들처럼 불경이나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리사는 칸피니스조차도 다른 귀족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절망어린 한숨을 조용히 내쉰다.
하지만 마리사의 짐작은 엉뚱한 곳을 짚고 있을 뿐이다.
“저... 저기... 그거 가르치는 거 굉장히 귀찮거든? 읽고 쓰는 거야 어떻게 대충 하겠는데, 가르치는 건 정말 귀찮단 말야.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냥 보면 알아. 하지만 남이 보면 알게 만들려면 아주아주 번거롭고 어려운 작업이 필요하단 말야. 이해하겠어? 음... 적절치 못한가? 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러니까 싫다는 게 아니라...”
“풋...”
이런 성격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귀찮은 일은 질색하고, 괜히 손 많이 가고 시간 많이 걸리는 일은 아예 말아버리는 성격이라는 것을 잠시 생각지 못했다. 하긴 그런 상황에서 그가 이런 이유로 얼굴을 굳혔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아니 그게 다 천재의 비애거든? 나는 할 줄 아는데 남이 왜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거야. 이정도면 되는데, 대충 이정도 설명해주면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왜 못하는지? 왜 나처럼 안되는지 끔찍한 생각까지 드는거지. 이해하겠어?”
“예에...”
더구나 농노 출신에 불과한 하녀에게도 이리 약한 모습이라니. 델킨피에르 영지의 영주이자 델킨피에르 가문의 주인인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 자작조차도 우습게 여기는 오만한 성격의 그가 고작 자신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보기 싫지는 않다. 왠지 자기 남자라는 생각이 드는 때문이다.
“으음... 이런 어떨까? 내가 고왕국어로 쓰여진 책을 제국표준어로 번역해서 써줄게. 그러니까 고왕국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네가 알고 있는 제국표준어로 내가 따로 책을 써주는거야. 어때? 괜찮겠어?”
“에? 저... 정말요?”
가끔 이렇게 분에 넘치는 친절을 베푸는 모습은 정말 곤란하다. 진심으로 칸피니스를 자신의 남자라 착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이가 되면 아무 남자나 소개받아 결혼해야 할 자신이다. 칸피니스 따위는 그 인생의 한 부분에 작은 추억에 불과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그러기가 쉽지 않아진다. 정말 곤란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곤란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 칸피니스는 더더욱 안절부절하며 무언가 해주려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남자로 있는 건 이렇게 알몸으로 서로 부대낄 때 뿐이면 족하다. 너무 큰 친절은 오히려 부담스럽다.
“다른 아이들도 책 읽는 걸 좋아할까?”
“예?”
“그냥 다른 아이들도 책 읽는 걸 좋아하면 네게 책을 번역해주는 겸 해서 같이 읽게 하려고...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아... 예...”
“싫어하려나? 공부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아... 아니에요. 싫긴요?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람들에게나 싫고 말고가 있는 거에요. 그런 기회도 없이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그 기회만으로도 감지덕지인걸요. 모두들 좋아할 거에요.”
“그래? 다행이다. 필요한 분야의 책이 있으면 내게 얘기해놔. 그럼 내가 책 읽는 김에 대충 번역해서 줄테니까. 우선 마리사에게 주기로 한 동쪽 나라에 대한 책을 번역해 주도록 하지. 어때?”
“고... 고마워요. 정말...”
어이가 없다면 어이가 없다. 개념이 없다고 하면 개념이 없다. 어찌 농노의 딸에게, 그것도 하녀에게 직접 책을 번역해가면서까지 읽히려 한단 말인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철학이나 이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남녀평등이라든가 신분제도 타파의 신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귀족의 자식이 그런 데에 빠져 괜한 하녀나 하인들에게 바람을 넣는 건 늘상 있어왔던 일이니까. 나중에 가문을 이어받은 후 바람이었을 뿐임을 확인해줌으로서 낮은 신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절망하고 더욱 무기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곤 했으니까.
하지만 칸피니스가 하녀들에게 잘해주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오로지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여자를 좋아하는 성격에 여자들이 좋아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리도 친절한 것이다. 어찌보면 그야 말로 진정으로 신분제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여자라면 거지든, 노예든, 귀족이든 구분을 두지 않고 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마리사가 좋으면 됐어. 다른 하녀들도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모두 좋아할거에요. 일단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더구나...”
“더구나 뭐?”
“칸피니스님이 직접 번역해주신다 하시니... 아마 많은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라도 열심히 책을 읽으려 할거에요.”
“그래?”
여자들이 좋아할거라는 것보다 그에게 좋은 칭찬은 없다. 여자들이 기뻐할 거라는 말보다 그를 기쁘게 하는 말 또한 없다. 지금도 여자들이 좋아한다 말하니 입이 좌악 벌어진다. 저러다 턱이라도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험험. 역시 이몸의 인기 덕분이겠지?”
“예...”
“흐흣... 아아... 난 정말 잘났단 말야? 세상에 나같은 남자가 또 있을까? 그렇게 생각지 않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가 가장 정확하다는데 여자의 눈으로 평가했을 때 나만한 남자가 또 있을 거라 생각해?”
“아아... 괴로워요.”
“응? 왜?”
“칸피니스님을 곁에서 보다가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할 생각을 하니... 아아... 벌써부터 절망이... 어찌 그런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흑흑... 모두 칸피니스님 때문이에요. 내가 불행해지면 모두 칸피니스님이 너무 뛰어나신 때문이에요. 책임져요.”
“그래그래, 내가 그 심정 안다. 이해해. 어쩌겠니? 내가 너무 잘난 죄인걸.”
“흑흑... 칸피니스님...”
장난삼아 장단을 맞춰주고 있지만 칸피니스는 너무 진지하다. 괜히 장난으로 시작한 사람이 머쓱해질 정도다.
“걱정마라. 내가 모두 책임질테니까.”
“책임?”
“그래.”
“어떻게?”
“아까 말했지? 동쪽 나라의 하렘이라고.”
“예.”
“그러니까 하렘을 만드는 거야. 나의 하렘을. 그리고 그 하렘에 너희들을 들이는 거지. 나의 매력에 빠져 불행한 인생을 보낼 지도 모르는 가여운 여자들을 나의 하렘으로 초대해 구원해주는거야. 어때? 멋진 계획이지 않아?”
“에?”
농담이라기에는 너무 진지하다. 아마도 진심으로 저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일부일처제가 수백년 이상 내려온 제국인으로서는 도무지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아무리 칸피니스가 좋기로서니 그의 하렘에서 수많은 여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생을 지내라니 사양하고 싶다.
“좋은 생각이잖아? 안그래?”
“예? 예...”
하지만 그렇다고 싫은 티를 노골적으로 내는 것도 곤란하다. 저리 좋아하는데 찬물 끼얹으면 괜히 미안해지지 않겠는가? 지금은 대충 맞장구쳐주며 같이 즐기다가 나중에 진짜 하렘을 만들면 결혼상대가 있어 곤란하다며 조용히 빠져나오면 된다. 괜히 지금부터 칸피니스의 생각을 거스를 필요는 없다.
“그래. 음... 역시 이 부분에 대한 예산도 세워야겠어.”
“예?”
“그러니까 나한테는 세력이라는 게 없잖아. 기사단도 없고, 병사들도 없고.”
“그... 그건...”
“솔직히 말해도 돼. 어차피 사실이니까. 모두 알고 있잖아? 이 성에서 나라는 존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마 너희들이라면 더 잘 알고 있을걸?”
“그... 그렇지만...”
“어쨌든 이대로 세력 없이 있다가는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 수 있을거야. 아무리 내가 강하다지만 델킨피에르가의 기사 전부와 병사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는 거니까. 어쨌든 내 세력을 키워야 한단 말이거든?”
“아...”
이제 대충 칸피니스가 하려는 말이 이해가 가려 한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칸피니스의 생각을 따라잡은 것 같은데 마음이 동의해주지 않는다. 너무나도 파격적인 생각라서 그런 것일까?
“너도 대충 감을 잡은 모양이구나. 맞아. 너희들을 나의 하렘으로 맞아들인 후 거기서 검술과 다양한 지식을 쌓도록 하는거야. 물론 교관은 나고. 내가 직접 검술을 가르치고, 다양한 지식들을 너희에게 가르치는 거지. 그렇게 너희를 나만의 기사단으로 만드는 거야. 제국 최초의 여자기사단으로.”
“아...”
정말 난 사람은 난 사람이다. 어쩌면 저런 발상을 저리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자신과 정을 통하던 하녀들을, 그것도 귀족도 아닌 평민과 농노출신의 여자들을 데려다 직접 가르쳐 기사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칸피니스 외에 그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제국 역사상 이같은 발상을 한 인간은 칸피니스가 유일할 것이다.
“마리사도 기사가 되는거야. 나의 기사가. 제복을 입고, 검을 차고, 내 주위에서 나의 적들을 향해 검을 겨누는 나만의 기사가 되는거쟈. 어때? 괜찮지 않아?”
“예? 예에...”
너무 거창하고 황당한 계획이라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이 기사의 제복을 입고 검을 든 모습이라니! 아예 상상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리도 꿈과 희망으로 반짝이는 얼굴을 그늘로 뒤덮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동의하는 척 해주는 수밖에.
“좋았어. 한 오 년 있으면 나도 나만의 기사단을 갖게 되는것인가? 누구도 알 수 없는 몸으로 연결된 한 가족과도 같은 기사단 말야.”
“예? 예...”
“얼마나 좋아? 남자로 구성된 기사단은 밤에는 따로 자야하지만 여자기사라면 밤에도 항상 옆에서 지켜줄 수 있잖아. 때로는 두 명씩, 때로는 세 명씩. 많으면 다섯명이든 여섯명이든 정력 되는대로 옆에 불러다 같이 잘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암살자 따위 괜히 와봐야 알몸의 다구리 속에 비명도 못지르고 죽어갈 뿐이지.”
“아... 그렇겠네요.”
순수한 감탄이 절로 새어나온다. 그런 깊은 뜻이 있을 줄은 그녀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자신의 감탄을 깊이 후회하게 된다. 그로인해 칸피니스의 자화자찬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아... 난 왜 이리 머리도 좋을 것일까? 생기기를 잘생겼으면 몸매라도 빠지던가, 몸매가 잘났으면 검술이라도 약하던가, 검술을 잘하면 정력이라도 떨어지던가, 정력이 강하면 기술이 부족하던가, 기술이 뛰어나면 하다못해 머리라도 나빠야 하는 것 아니겠어? 도대체 나의 약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자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 것.’
마리사는 이 말을 꼬옥 한 번 크게 소리내어 외쳐보고 싶다. 저리도 자기도취에 빠져 헤어나올 줄 모르는 여자만 보면 바보가 되는 남자에게 그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혀보고 싶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참는다. 바보에게 바보라고 하는 것처럼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냥 바보는 바보로 두는 것이 지금 당장에나 앞으로나 가장 편한 길이다.
“아아... 한 가지 있다. 나의 약점이. 너무도 중대한 약점이 있었어.”
“...?”
“너무 완벽하다는 것. 너무 완벽해서 결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나의 약점이었던거야. 생각해봐. 너무 뛰어난 남자는 남자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지. 여자들은 그 완벽함 때문에 지레 겁먹고 다가서지 못하고 말야. 그런 점에서 너무 잘난 남자는 불행하다 할 수 있어. 동성이나 이성이나 모두 그를 배척할테니까.”
‘하지만 칸피니스님이 어려워 다가서지 못하는 여자는 없는 것 같은데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해서는 안될 말이 대부분이다. 저리도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모습에 감히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경건함이 그녀를 강제한 때문이다. 그 경건함은 말한다. 바보는 바보로 내버려두라고.
“너무도 완벽한 그 자체가 죄악인 나. 그 완벽함이 지나쳐 그 죄가 하늘에 닿았으니 그 죄를 씻기 위해서도 그 완벽함을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 다른 이란 누구인가? 나의 매력을 알아봐줄 남자의 가치를 가장 정확히 판단하는 여자들이다. 나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는 여자들이다. 나의 인생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여자들이 나로 인해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바쳐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의미요 내가 완벽한 사명일 것이다. 아아... 이토록 무거운 삶이라니... 아아... 그것은 그 사명의 무게 때문일 지어다...”
칸피니스의 자아도취증은 한 번 시작하면 끝날 줄 모른다. 델킨피에르 자작이나 그의 모친인 수파니의 에르핀이나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그런 지 알 수가 없다. 하다못해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을 찾으려 해도 불가능하다. 델킨피에르 영지 최악의 비상식인도 칸피니스보다는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들어주어야 하는거지?’
현재 칸피니스의 유일한 연인이라 할 수 있는 히리스조차도 칸피니스의 자화자찬을 끝까지 들어주는 건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경우 칸피니스의 자화자찬은 히리스의 주먹이나 발에 의해 강제로 끝맺게 된다. 하물며 보다 느슨한 관계인 마리사가 견뎌낼 수 있을 리 없다. 처음에는 조금 재미있다 싶던 것이 어느새 고문과도 같이 이어진다.
똑똑--!!
그녀의 마음을 알아서일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마리사의 표정이 밝게 펴지는 것과 동시에 칸피니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 지겨운 자화자찬이 드디어 끝나고야 만다. 마리사의 입가가 옆으로 위로 한없이 늘어나더니 어느새 귓가에 흐뭇하니 걸린다.
“누구야?”
“저... 린네인데요...”
“린네?”
린네라면 칸피니스의 모친인 에렌프 수파니를 전담하는 하녀다. 머리가 영민한데다 체격도 탄탄해 특별히 거동이 불편한 에렌프를 위해 프란츠가 붙여준 하녀다. 물론 출신은 마리사와 같은 농노 출신이다. 남별저에는 기본적으로 평민 하녀도 거의 없으니 여기서 일하는 하녀들은 대부분 마리사나 린네와 같은 신분이라 할 수 있다.
“무슨 일이야?”
“마님께서 칸피니스님을 찾으십니다.”
“어머니께서?”
“예.”
“이 늦은 시간에 왜?”
“이유는...”
“말하기 곤란한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알았다.”
대충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칸피니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다.
“마님께서 부르시는 건...?”
“아아...”
마리사의 물음도 제대로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저 건성으로 대충 대꾸하는 듯한 모습이다. 여전히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은 더욱 어두워져만 가고 있다.
“아마도 네가 짐작하는 그게 맞을거야.”
“아...!”
칸피니스의 한 마디로 마리사도 칸피니스와 비슷한 곤혹스러운 표정이 된다. 다만 다른 것은 당사자가 아니다보니 칸피니스와 같은 짙은 그늘은 없다는 것이다. 말하기 곤란한, 말해서는 안되는 사실을 아는 이의 답답함과도 같은 모습이다.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 까?”
“그... 그건 저도...”
“그래? 뭐 가보면 알겠지.”
“예에...”
“지금 출발할 테니까 네가 준비좀 도와줘.”
“알겠습니다.”
침대에서는 정부지만 침대에서 벗어나면 주인과 하녀의 관계다. 마리사는 칸피니스의 지시에 따라 침대에서 내려오며 충실한 하녀로서의 모습을 되찾는다. 미처 자기 옷을 갖추입을 여유도 없이 칸피니스의 옷을 찾아 정성스런 손길로 그가 옷을 입는 것을 돕기 시작한다.
“휴우... 이게 다 그 개새끼 때문이야.”
움찔, 옷을 갈아입히던 마리사의 손이 움츠러든다. 칸피니스의 욕설에 실린 살기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손은 언제나처럼 빠르고 영활하게 칸피니스의 몸을 그의 옷으로 덮어간다. 워낙에 자주 들어온 욕설이고 살기이기에 이미 익숙하게 적응한 때문이다.
“썩을 새끼. 반드시 그 새끼는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만다! 프란츠 델킨피에르!”
마지막 단추를 채우는 마리사의 손길 위로 마치 씹어뱉듯 토해내는 살기어린 욕설이 스치듯 흘러간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도 식지 않는 증오와 분노가 차갑게 끓어오르는 살기가 그녀의 희고 매끈한 살결 위로 미끄러지며 방안으로 서서히 퍼져나간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와는 너무나도 안어울리는 차갑고 뜨거운 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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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쓰기의 약점은 지나치게 상황묘사가 디테일하다는 것입니다. 일일이 세세하게 묘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다채로움을 표현하느라 직설적이고 간결한 흐름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장난과 같은 대사를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만 필요 이상으로 글이 길어지고 늘어지는 약점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 점이 불만이면서도 고칠 수 없는 건 역시 이런 글쓰기가 저에게 맞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칸피니스는 천재입니다. 인간을 뛰어넘는 육체적 능력과 지적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천재입니다. 그의 낙천적인 성격은 모든 일을 쉽게 해낼 수 있는 능력에서 기인합니다. 그의 자기도취적인 모습은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여자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것은 그러한 능력으로 인한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함입니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다른 누군가와 깊이 맺어짐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칸피니스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물론 믿든 말든 읽는 분 마음입니다만...
오늘 올라간 내용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색마검천황의 중요 설정 가운데 하나였던 델킨피에르성의 하렘의 탄생배경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이 단계까지는 칸피니스도 장난반으로 구상한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 하렘이 만들어지는 건 칸피니스가 진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계획하면서부터입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여자 끌어들어기기 시작됩니다. 그때쯤 되면 매회마다 여자들 이야기 쓰느라 솔로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버리겠죠.
다음회예고>> 구속이자 또한 존재의미인 어머니. 항상 그의 안식처가 되어주지만 그 안식처가 어느새 자신을 옭아매는 덫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과연 무엇때문일까? 증오의 대상인가? 아니면 연민의 대상인가? 그도 아니라면...?
요즘은 대충 본편과 예고편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네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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